선의 세계

[스크랩] 61. 돈오(頓悟) 5

수선님 2018. 10. 28. 12:50


돈오라고 하면 말 그대로는 단박에 깨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개념을 시간의 틀 속에서 이해할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본각이라는 초시간적인 진상을 바탕으로 해서 성립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한 개인이 수행을 하고 그 어떤 깨달음의 체험을 하는, 그런 사건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본각의 자리에서 보면 그런 건 다 짐짓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그래서인가, 우리는 존경하는 고승대덕(高僧大德)에게 당신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깨쳤느냐, 깨쳐서 당신은 이제 부처님인가 하고 감히 대놓고 여쭈어보지 못한다. 옛 조사(祖師)들의 어록을 비롯한 온갖 선서(禪書)의 주제가 온통 깨달음이건만, 정작 지금 살아있는 대덕들에게 마주 대고 당신의 깨달음 체험에 대해 우리의 관심사를 여쭈어보지 못한다. 그런 것은 아예 여쭈어볼 주제가 못된다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그게 왜 아예 거론할 만한 주제가 못되는 것일까? 우리로서는 아주 궁금한데…. 개념과 이론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입장이 아니라 수행과 깨달음의 세계에 삶을 바치고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깨달음이라는 주제를 논하려면 개념과 이론이 아니라 궁극적인 깨달음을 준거로 해서 논해야 하는 것이고 깨달음의 궁극적인 뜻인 본각을 준거로 한다면 그런 세간적인 관심사는 거론할 주제가 못된다.

 

전의 글에서 이철수 씨가 ‘좌탈’이라는 제목의 판화에 적어 넣은 글을 소개했었다. 스님이 바야흐로 앉은 채 입적하려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옆에다가 쓴 글인데, 뒷부분까지 다 넣어 다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깨달음이 내 손님으로 오실 때에야 피해가지 못하지만 나가서 불러들일 일이야 아니지. 내 생애가 적적하기만 하여 손님 받을 겨를이 없었다. 이제 되었으니 그만 나가서 문 닫아 걸어라.” 첫 대목은 깨달음을 억지로 구하려 하지 않는다는 얘기이니 대오(待悟)를 부인하는 선의 입장을 보여준다고 풀이했었다.

 

그 다음 “내 생애가 적적하기만 하여 손님 받을 겨를이 없었다”고 한 대목은 무슨 뜻인가? 평생 고요하게 지내다보니 깨달음이라는 손님이 오더라도 받아들일 겨를이 없었다는 말이니, 깨달음을 구하지도 않았고 맞아들이려고 애쓰지도 않았으며 찾아오더라도 그것이 나의 세계에 들어올 틈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았다는 얘기이다. 납자(衲子)의 본분에 전혀 충실하지 않았다는 얘기로 들릴 수도 있다. 깨달음을 구하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그러니 수행도 안 하고 조용히 빈둥거리며 지냈고, 심지어 깨달음이 저절로 오더라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깨달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보냈다는 식으로…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적적(寂寂)이라는 대목의 뜻이다. 그야말로 고요하다는 말인데, 여기에서 고요하다는 것은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특히,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분별이 이미 없으니 깨달음을 구할 일도 없었고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여 깨달음을 이루려 할 일도 없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미 깨달음의 자리에서 살아왔다는 뜻이다. 그러니 깨달음이라는 개념이 오거나 말거나 그걸 맞아들이거나 말거나 할 일도 없었다.

 

그런 분이야말로 깨친 분이라고, 실제 인물이냐고, 누군지 알고 싶다는 궁금증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만약 그런 이들을 실제로 만나 과연 어떻게 수행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런 깨달음 자리에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아마도,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도 않을 것이다.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으므로….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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