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99칙 肅宗十身調御 - 숙종황제의 십신조어

수선님 2018. 10. 28. 12:49

관련 이미지 <벽암록> 제99칙은 숙종 황제와 혜충 국사와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숙종 황제가 혜충 국사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십신(十身) 조어(調御) 입니까?’ 혜충 국사가 말했다. ‘단월(檀越)이여! 비로자나의 정수리를 밟고 초월해 가시오.’ 숙종 황제가 말했다. ‘과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혜충 국사가 말했다. ‘자기의 청정법신이 있다고 인정하지 마시오.’”


擧。肅宗帝問忠問師。如何是十身調御. 國師云。檀越踏毘盧頂上行. 帝云。寡人不會. 國師云。莫認自己淸淨法身.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제3권, <전등록> 제5권 남양혜충국사전에 전하고 있는데, 본래 두 가지 문답을 여기서는 하나의 선문답으로 정리하고 있다. 혜충 국사와 숙종의 대화는 <벽암록> 18칙 무봉탑에도 싣고 있다. 혜충(慧忠, ?~775) 국사는 육조혜능의 선법을 계승하였고, 숙종 황제는 당나라 현종(玄宗)의 제3 왕자로 황태자 때부터 혜충 국사에게 참선을 배워 상당한 식견을 갖추었기에 <조당집>에는 혜충 국사와 나눈 여러 선문답을 수록하고 있다.

 

숙종 황제가 혜충 국사에게 ‘어떤 것이 십신(十身) 조어(調御) 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조당집>에는 이 질문에 혜충 국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황제에게 ‘아시겠습니까?’ 라고 묻고 있다. 황제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국사는 ‘노승의 물병이나 갖다 주시오.’라고 말하여 하나의 대화가 끝나고 있다.


혜충 국사는 자신의 몸으로 부처의 십신(十身)과 십호(十號)의 하나인 조어장부(調御丈夫)인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황제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부처의 십신(十身)은 60권<화엄경>42권 이세간품에 설하고 있는데, 미혹함과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진실한 깨달음을 완성하여 중생세계에서 활동하기에 무착불(無着佛), 원력과 서원의 힘으로 이루었기에 원불(願佛), 여러 가지 수행의 보답으로 아름답게 부처의 모습을 구족하여 업보불(業報佛), 청정한 정신으로 많은 선의 근본을 지니고 그 힘으로 깨달음을 완성하였기 지불(持佛), 항상 열반의 경지에 머물기 때문에 열반불(涅槃佛). 불신(佛身)이 널리 법계에 두루 충만하기에 법계불(法界佛). 부처가 일체 중생의 마음에 두루하며,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이기에 심불(心佛). 항상 삼매의 경지에 주하기에 삼매불(三昧佛). 사물의 진실 본성을 분명하게 나투기에 성불(性佛). 마음대로 교화하기에 여의불(如意佛)이라고 한다.

 

80<화엄경>과 <화엄경공목장> <석씨요람> 등에도 언급하고 있는데,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보살이 원력을 세우고 수행을 완성하여 구경의 불과를 체득한 덕을 열 가지 방면으로 나누어 이름 붙인 것인데, 부처의 십신(十身)은 일불신(一佛身)에 십신(十身)이 구족한 비로자나라고 하고 또한 시방삼세에 두루하기에 주변법계신(周遍法界身)이라고 한다. 또 부처님의 십호중의 하나인 조어(調御), 조어장부는 <불설십호경>에 “타심(他心)을 잘 다스리는 것을 조어장부라고 한다.”고 설하는 것처럼, 시방삼세의 다양하고 수많은 중생들의 마음을 잘 살펴보고 근기에 맞추어 교화하여 제도하는 능력을 갖춘 대장부를 말한다.

 

천차만별의 응화신을 나투는 것이 부처이기에 십신(十身)이라고 하며, 말을 잘 훈련시키는 것 같이 자유자재로 중생들을 제도하는 의미로 조어장부라고 하는 것이다. 황제의 질문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는 말과 같은 것인데, 혜충 국사는 “단월(檀越)이여! 비로자나의 정수리를 밟고 초월해 가시오.”라고 대답했다. 국사는 황제께 폐하라고 부르지 않고 ‘단월’이라고 불렀다. 혜충 국사가 황제의 스승이며 스승이라는 훌륭한 안목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단월은 범어로 dana-pati로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시주(施主)라고 한다. 그리고 비로정상은 법신이 비로자나불의 두상(頭上)이다. 혜충 국사가 황제께 말한 것은 ‘단월께서 자신이 십신조어의 부처가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데, 그러한 경지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십신(十身) 조어(調御)의 본체인 비로자나불의 정상까지 초월하여 향상일로(向上一路)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라는 의미이다. 즉 선에서 말하는 ‘백척의 장대 끝에서 머무르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깨달음을 체득한 열반적정의 경지에 이르기 어려웠기에 그 곳에 머물면 열반의 경지가 곧 자신을 죽이는 집착의 세계로 전락되고 말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을 언제 어디서나 어떤 경계에도 머무름이 없도록 해야 자유롭게 지혜작용을 활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 마음을 비우도록 설하는 공의 실천은 마음을 어떤 경계에도 머무름이 없도록 하는 무주(無住)의 실천이다. 번뇌 망념을 텅 비우고 근원적인 본래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향상일로(向上一路)라고 한다. 즉 중생심의 차별세계에서 불심의 절대세계로 전환시키는 것인데, 선에서는 망념을 자각하고, 불성을 깨닫는 돈오견성이라고 한다. 본래의 청정한 마음(불성)이 되어야 반야의 지혜로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자유롭게 잘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숙종 황제는 ‘과인은 국사가 말씀하신 비로자나 부처의 정상을 밟고 초월해 가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짐(朕)이라고 하지 않고 과인(寡人)이라고 한 것도 혜충 국사를 스승으로 모시는 입장이며, 덕이 적은 사람이라고 겸손한 말이다. 그래서 혜충 국사는 ‘자기의 청정법신이 있다고 인정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즉 비로자나불의 정상을 초월하는 방법을 설했다.

 

청정법신은 비로자나 법신불이다. 법신은 계정혜(戒定慧) 삼학으로 요약되는 불법의 지혜와 인격을 완전히 체득하여 일체 만법과 하나가 된 지혜의 당체이다. 보신은 불법의 지혜와 인격이 구족된 부처의 능력을 구비한 것이며, 화신은 불법의 지혜를 많은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설법하여 깨달아 해탈을 얻도록 교화하는 것인데, 부처의 삼신(三身)이 달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부처의 기능과 작용을 삼신(三身)으로 나눈 것이다.

 

의학을 완전히 통달해야 의사의 자격을 갖추게 되고, 의사가 되어야 의학의 지혜와 기술을 환자에게 의술로 베풀 수 있는 것이다. 황제는 나 자신이 청정법신불이며, 나 이외에 부처란 없다는 입장이었기에 국사는 자신이 부처고, 십신조어의 청정법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자신이 청정법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와 법신이라는 두 가지 사물을 인정하는 이원론(二元論)에 떨어진 것이며, 진정한 법신(본래면목)을 체득한 것이 아니다. 자기도 비우고, 부처라는 생각도 비운 그 당처에 위대하고 참된 자기가 현성하게 되며, 일체 처에 두루하는 청정법신불이 현전하게 되는 것이다.

 

원오는 혜충 국사는 말이 많았지만(갈등) 역시 국사로서 친절한 지도로 깨달음을 체득할 수 있는 법문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평창’에 동산양개 선사가 학인을 지도하는 방편으로 일체처에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새의 길(鳥道)을 인용한 것처럼, 마음에 자기나 부처라는 흔적도 없어야 비로정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한 나라의 국사 또한 억지로 붙인 이름.” 혜충국사는 남양 백애산에 40년간 은거하였는데 숙종황제가 초청하여 국사로 모셨지만,본분상에서 볼때 황제나 국사라는 이름도 없다 임시방편으로 붙인 이름이다.

 

“혜충국사 홀로 훌륭하게 명성을 떨쳤구나.” 세상에 국사나 왕사, 선사나 장수라는 작위를 부여한 사람은 많지만, 혜충국사는 최고로 훌륭한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그 이유는 혜충국사는 숙종과 대종(代宗).

“대당나라의 참다운 천자를 도와서.” 세속의 훌륭한 황제가 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불법을 깨달아 참된 법왕의 천자가 되도록 하였다.

 

“일찍이 비로자나 정상을 밟고 넘어가도록 했네.” 국사는 숙종 황제를 지도하여 비로자나 법신불을 초월하여 향상일로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철퇴로 황금 뼈를 쳐부수니.” 황제가 소중하게 생각한 황금법신불의 뼈 골수까지 쳐부순 국사의 말씀은 철퇴와 같네.

 

“하늘과 땅 사이에 무슨 물건이 있겠는가?” 천지간에 한 물건도 없는 청정법신도 자기도 일체 인정하지 않은 경지다.

 

“삼천(三千)의 육지와 바다(刹海) 고요한 밤.” 한 물건도 없는 본지풍광의 조용한 세계,

 

“누가 창용굴(蒼龍窟)에 들어갈지 모르겠다.” 용의 턱에 있는 여의주를 얻기 위해서는 창용굴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참된 불법을 체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성본스님 / 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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