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 빠알리어 anatta, 산스크리트어 anatman)>
무아(無我)를 비아(非我)라 하기도 한다. 비아(非我)란 말은 “아(我)인 상태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즉, 무아란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불교는 “있다, 없다” 하는 존재론적인 언설을 금하고 있다. 때문에 내가 있다든가 내가 없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공무(空無)가 아니란 말이다. ‘무아’란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내가 아니다. 내세울 아(我)가 없다는 말이다. 내세울 ‘아’가 없으니 욕심낼 것도 없고, 남과 다툴 것도 없으며, 남을 싫어하거나, 남에게 아부하거나, 남에게 화낼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를 고집하는 아상(我相)의 반대말이 무아이다. 즉, 무아는 아상(我相)을 부정하는 말이고, 영원한 ‘나’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아상이란 ‘나’를 내세우고,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무아란 불변의 실체라 할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붓다의 인간관이다.
예컨대, 우리가 검토할 대상을 녹색의 한 나뭇잎이라 치자. 시간이 지나면서 단풍이 들어 그 녹색 잎은 붉은 색을 띨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것의 모양, 조직, 색깔, 그 밖의 다른 성질들이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이처럼 단풍이 든 붉은 색의 잎과 녹색의 싱싱한 잎 사이에는 동일성을 밝혀 줄 요소가 없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동일한 잎으로 본다.
달리 말하면, 잎이라 불리던 그 대상은 이미 변해버렸고, 지금 우리는 그 대상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변화 과정일 뿐이다. 이런 사정은 우주의 모든 현상에 적용되며 사람이란 존재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사람도 계속 변한다. 이와 같이 변화과정은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 변화를 담당하는 ‘당체’는 없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anattā)’의 개념이다.
진짜 ‘나(我)’라면 변화가 없어야 하고 항상 하기에 즐거움이여야만 한다. 그러나 잘 관찰해보니 그렇지 않더란 얘기다. 모든 게 다 변화한다. 내 몸도 변하고, 내 마음도 항상 변해가고, 주변 사람과 주변 사물들 그 모든 게 다 변화해간다. 중생은 특히나 내 몸을 ‘나’로 여기는데, 내 몸도 변화한다. 즉, 늙어간다. 내 몸이 진짜 ‘나’라면 내 뜻대로 돼야 하고 늙고 싶지 않으면 늙지 말아야 한다. 내가 내 몸의 주인이라면 내 몸이 내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생각 또한 내 뜻대로 안 된다. 인간이 자신으로 여기는 게 바로 마음속의 생각인데, 이 생각조차 언제나 변화해간다. 다만 이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그 생각을 영원한 ‘나’로 여기는데, 이게 멍청한 짓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걸 ‘나’로 여기는 것이니까.
무아란 덮어놓고 ‘나’라는 게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아(無我)에서 ‘아(我)’라는 것은, 영원성을 의미한다. 무아(無我)의 뜻은 ’나‘라는 게 없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고, ‘나‘라고 여기는 몸과 마음에 내재된 영원함을 유지한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은 변화해갈 수밖에 없다. 변화한다는 것은 곧 그 안에 어떤 영원성이 내재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많은 분들이 무아(無我)를 한자 무(無)에 얽매여서 그냥 단순하게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내가 없다. 그럼 이 글을 쓰는 ‘나’는 누군일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은 없다. 그러나 찰나적으로 생사를 거듭하는 끊임없는 생명의 흐름(연기에 의한 오온의 집합체)은 있다. 이 게 글을 쓰는 나요, 이 글을 읽는 너다. 따라서 무아를 ‘내가 없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불교 교의의 두 기둥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인데, 무상(無常)과 윤회(輪廻)의 개념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나 자이나교에서 이미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무아만은 석가모니불이 성도한 후 최초로 설파한 가르침이다. 빠알리어 atta는 ‘참나’이다. 따라서 anatta(무아)란 참나가 아니란 말이다. 무아는 ‘참나’까지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 무아는 불교 근본교리로서, 여기 ‘아(我)’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미와는 구별되는 내용이다. 고대 인도에는 브라만 교설에 의해 아트만(atman-我)사상이 보편화돼 있었으므로 부처님은 일차적으로 그 ‘아트만(我)’의 관념을 부정하기 위해 무아설을 주장했다. 즉, 당시 우파니샤드철학이 아(我)를 실체 시 하는데 반해 부처님이 이런 견해를 거부한 것이 초기경전(빠알리어 니까야)에서 말하는 무아(無我-anatta)이다. 산스크리트어 anatman(무아)는 atman이 아니란(an) 말이다. 아트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의 실존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비록 가아(假我)이지만 ‘나’는 존재한다. 아트만(atman)이란 실체를 뜻하고, 무아란 존재론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당시 브라만교에서는 고정 불변의 자아(atman)를 인정하고 그러한 자아를 터득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을 그들의 제일의 교의로 삼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자아사상을 단지 ‘자아가 있다는 인식[아상(我相)]’일 뿐이라며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므로 인무아(人無我)ㆍ법무아(法無我)를 "나의 본질은 없는 것이며, 대상으로서의 사물들(삼라만상)의 본질도 없는 것이다"와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내가 없고 대상으로서의 존재자도 없는 공무(空無)가 이 세계의 실상이라면, 종교도 필요 없고, 선행도 다 헛된 것에 불과 할 뿐이며, 깨달음을 얻는 것도 다 헛된 일일 뿐이다. 그러나 불교의 무아의 사상은 공무(空無)의 사상이 아니다. 무아를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이 해석하지 말고 본질(本質)이 없다, 실체가 없다와 같이 해석해야 한다.
고대 인도에서는 자아[아상(我相)]와 무아(無我)가 철학이나 종교의 신념체계에서 아주 민감하게 다루던 주제였다. 이 두 말은 상반되는 개념으로 자아(自我)는 ‘내가, 나의 실체’가 있다는 의미[아상(我相)]이고, 무아는 참나가 아니란 말이며, 오온(五蘊)으로 구성된 나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오온으로 구성된 ‘나’는 참나가 아니고 가아(假我)란 말이다.
그리고 영(靈)ㆍ육(肉) 이원론의 영혼초월주의는 항구적인 아트만을 전제로 한다. 부처님은 바로 그러한 아트만이 고(苦)의 원인이라고 본 것이다. 영혼초월주의(우월주의)는 2원론적 분열을 전제로 하고 있어 고를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고대인도 브라만사회의 신분질서[caste 제도]에서는 자기신분(사회계급)은 영원히 변치 않고 계승된다고 했다. 이처럼 카스트제도를 합리화하는 아트만(atman)을 부정하기 위해 무아론은 주장한 것이다. 아트만은 카스트제도를 합리화해 민중탄압을 위한 자아사상[아트만(atman)]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그것을 단순한 아상(我相)일 뿐 영원불변하는 실체는 아니라고 부정했다. 아트만은 카스트제도(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민중을 속이는 관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부처님은 ‘나의 것’이라는 관념을 포기할 것을 가르쳤다. 민중을 억압하기 위해 자아사상이 있었다면, 민중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무아사상이 대립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통 받던 민중에게 희망과 해방감을 주었고, 민중의 환영을 받아 불교가 성립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 다른 이야기는,
놀랍게도 2600년 전 고대 인도에 언론의 자유가 완벽하게 확보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인도사회에서 아트만(atman)을 인정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는 사회기반을 흔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는데, 부처님이 이를 공공연히 부정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상의 자유, 언론자유가 확보돼 있었다는 말이고, 그래서 소위 육사외도(六師外道)의 성립도 가능했으리라 하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초기경전인 <상윳따 니까야(Samyutta Nikaya)>에 무아(無我)에 대한 법문이 실려 있다. 장로 케마(差摩, Khemā) 비구는 코삼비(Kosambī, 拘啖彌/구담미)국 바다리카(跋陀梨) 동산의 병상에 누워 있었다. 이에 다른 비구들이 병문안을 와서,
“얼마나 편찮은가”라고 묻자, 그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다”고 대답했다. 문병 온 비구들이 그를 격려하고자,
“붓다는 무아의 가르침을 설하시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이에 케마는,
“나는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이 비구들 간에 물의를 빚어 여러 사람들이 따져 묻기 위해 케마에게 몰려왔다. 그때 케마가 답한 것은 이러했다.
“벗들이여. 내가 있다고 한 것은 육체를 아(我)라고 한 것이 아니다. 역시 나의 감각이나 의식을 가리켜 아(我)라고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들을 떠나 별도의 내가 있다고 한 것도 아니다. 벗들이여, 그것은 예들 들면, 꽃의 향기와 같은 것이다. 꽃향기는 꽃의 어느 부분에 있는가. 꽃잎에 있는가. 또는 줄기에 향기가 있는가. 아니면 꽃술에 향기가 있다고 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의 향기는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육체를 아(我)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감각이나 의식을 아(我)라고 해서도 안 된다. 혹은 그것들을 떠나서 별도의 나의 본질(本質)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것들의 통일체로서 ‘내가 있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무아라 한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허무적멸(虛無寂滅)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수레라는 실체, 집이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지 조건의 화합으로 유지되고 있는 수레나 집 그 자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수레를 해체해 바퀴, 뼈대, 손잡이… 이런 식으로 해체해놓으면 그 어느 것도 수레가 아니다. 그래서 수레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단순히 연기적으로 화합해서 임시로 수레라는 명칭이 부여됐을 따름이다. 집도 마찬가지이다.
그와 같이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육체(色)ㆍ느낌(受)ㆍ인식(想)ㆍ심리현상(行)ㆍ알음알이(識)들을 해체해보니 그 어느 것도 ‘아(我)’가 아닌 무아이지만, 그렇다고 오온(五蘊)을 떠나서 별다른 무아란 없다. 오온을 떠나서 별다른 무아를 구한다면 그러한 무아야말로 무아라는 인식이나 관념이 되고 만다. 단지 「오온으로 구성된 아(我)는 참나가 아니란 말이다.」 이것이 무아의 정의다.
무아는 ‘지금 여기(現今)’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정신과 물리적인 현상들의 참모습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역동적인 전개는 바로 연기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무아는 연기(緣起)의 다른 이름이다. 사실 인도 지식인들이 제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처님 가르침이 무아였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무아를 공(空)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더 적극적으로 불성(佛性)이나 진여(眞如)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따라서 여기서 ‘무아’란 '행위의 주체로서의 나', '삶의 주체로서의 나'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나'는 내가 의지해야 할 가장 믿을만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일관되게 강조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을 주장하면서 자신[참나]을 의지하라고 했다. 그러니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집착하는 나, 불변의 실체인 나, 아상을 가진 ‘나’가 없다는 말이다. 분명히 ‘참나’는 있다.
부처님이 임종 시에 제자들에게 “자등명 자귀의(自燈明 自歸依-스스로를 등불삼아 스스로를 의지하라)”는 말씀을 하셨고, 모든 경전 서두에 나오는 “여시아문(如是我聞-내가 그렇게 들었다)”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자(自)’ 혹은 ‘아(我)’란 둘 다 자기, 즉 ‘나’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자(自-아/我)란 존재론적인 실체로서의 ‘나’, 불생불멸의 본체인 자아(自我)가 아니다. 여기에 나오는 ‘나’는 우리들의 인격적 주체, 행위의 주체, 삶의 주체가 되는 ‘나’를 의미한다. 부처님도 이러한 자아는 인정하셨다. 거듭 말하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아는 외도들이 말하는 실체적 본체론으로서의 아(我, atman)을 부정한 것이다.
무아이론에서 거듭 유의해야 할 것은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해서 상식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나’ 또는 삶의 주체, 행위의 주체, 인격적 주체인 ‘자기’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한 평생을 살다가 죽는 ‘나’는 있다. 단지 이와 같은 존재를 영원한 실체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일상적으로 말하는 ‘나’란 비실체적인 몇 가지 요소들[五蘊]이 모여서 일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임시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가아(假我)’라고 부른다. 이 ‘가아’의 존재는 인정하고 있다.
즉, 무아의 참뜻은 '나'라는 존재의 완전한 부정이 아니라 '나'라는 개체의 독립적 실체가 있다는 인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나' 아닌 무수한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는 비실체적인 연기(緣起)의 산물이다. 나는 나의 뜻과 무관하게 태어나고[生] ․ 늙고[老] ․ 병들고[病] ․ 죽는[死] 과정을 거역할 수 없다. 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 내 자신을 뜻대로 할 수 없다. 그 이유에 대한 부처님 말씀은 「나는 내가 아닌 것[非我]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의 참뜻은 ‘나'라는 독자적 실체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나' 아닌 것들과의 관계성을 바로 깨닫는 것이 '나'를 바로 아는 것이라는 말이다.
내 몸 속에 돌고 있는 피는 물[水]에서 왔으며, 체온은 불[火]에서 왔으며, 활동성은 바람[風]에서 왔으며, 뼈와 피부는 땅[地]에서 왔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니라 산이고 대지이며 강물이고 우주의 일부이다. 나는 내가 아닌 타자들이 인연을 매개로 잠시 모여 있는 오온(五蘊)일 뿐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독자적 실체가 없고 관계성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무아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대립된 두 개념, 무아(無我)와 자아(自我)가 사상적으로는 성립될 수 있으나 진리로서도 합당한 이치인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불교에서 무아를 주장한다면 자아(自我)를 주장해서는 안 되지만, 부파불교시대에 와서는 윤회에 있어서 중심적 주체가 없다는 점을 혼란스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독자부(犢子部)에서는 윤회의 주체로 뿌드갈라(pudgala-個我)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했다. 즉, 변하지 않는 윤회의 주체[自我-我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개아(個我)라고 했다. 그리고 설일체유부에서는 법체(法體)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바라문들의 주장인 아트만(atman)과 비슷한 개념이다. 초기불교의 무아사상이 시대가 바뀜에 따라 교리가 변용되면서 불교는 차츰 아트만 사상에 동화돼갔다.
이에 반발해서 용수(龍樹, 나가르주나)가 등장했다. 그는 그의 저서 <중론(中論)>에서 연기(緣起)와 공(空)의 관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연으로 생긴 법들(因緣所生法), 그것을 공이라고 설한다(我說卽是空). 또 이것을 거짓 이름이라고 한다(亦爲是假名). 이것이 중도의 뜻이다(亦是中道義).」
모든 존재는 수많은 인연으로 존재하는데, '나'라는 존재도 바로 그 인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체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성으로 인해 있기 때문에 독자적 실체성은 공(空)하며, '나'라는 존재도 공하다는 것이다. 다만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인연의 산물에 대해 '인간', '동물', '무정물'과 같은 거짓의 이름을 붙였을 뿐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용수는 「무자성(無自性) - 공(空)」의 논리를 전개해나갔다.
이렇게 보면 무아를 설하는 것은 '내가 없다'라는 '나의 부재(不在)'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자와의 관계성을 확인하는 것이며, '내가 바로 너'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를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아를 사유함으로써 없어지는 것은 내 자체가 아니라 ‘나’라는 아상(我相)이다. 무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협소한 자기인식을 벗어버리고 우주적이고 총체적인 나를 자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아설은 ‘나’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참다운 자기, 우주적 자아, ‘참 나’를 깨닫고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아를 설한다고 해서 업(業)의 주체가 없다거나, 삶을 계획하는 창조적 행위와 미래를 설계하는 주체로서 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처님은 말했다.
<법구경(法句經)>에서, “나의 주인은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은 곧 나이다.”라고 ‘나’를 강조했다. 나의 삶과 행위의 주인은 바로 나이며, 나를 통제하고 미래의 올바른 삶을 빚어내는 것도 바로 자신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부처님은 자기 자신이야말로 고해에서 나를 구해주는 섬[洲]이라고 했다. 즉, 장아함 <유행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대들은 스스로를 섬(洲)으로 삼고 스스로를 의지처로 삼되 타인을 의지처로 삼지 말며, 법(法)을 섬(洲)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하되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지 말고 머물러라.」고 당부했다.
자기 자신이야말로 욕망[貪] ․ 분노[瞋] ․ 어리석음[癡]과 같은 삼독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구해낼 수 있는 섬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흘러가는 무상한 세상에서 오직 스스로 믿고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만이 자신을 구하는 길이다.
불교는 바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 '섬'을 찾고 개발하는 종교이다. 스스로 수행하고 깨달음을 추구하기 때문에 불교를 자력문(自力門)이라고 한다. 결국 무아설은 자아에 대한 허구적 이미지에 대한 부정이며, 이를 통해 참다운 자기[참나]를 인식하기 위한 것이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 같은 오류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
이러한 해석이 대승불교시대에 가서 더욱 발전을 해서 ‘참나, 본래의 나’를 설하며, 본성(本性), 본래면목(本來面目), 진아(眞我)를 들추어내서, 본래부터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불성론(佛性論), 자성삼보(自性三寶)와 자성불(自性佛)사상, 여래장(如來藏)사상이 나타나게 됐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오온(五蘊)은 무아라고 일관되게 강조한 것인데, 오온이 무아라고 하는 말은 오온이 무상하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래서 무아와 무상은 상의성(相依性)의 관계이다. 불교의 골격은 무상과 무아가 병렬 교차하는 것이다. 무아를 확인하면 자의식(自意識)이 해체된다. 무정물(無情物)은 자의식이 없다, 인간만이 자의식이 있다.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상처받고, 화를 내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길을 가는데, 하! 저 스님 멋지네! 하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 좋다. 헌데 아따, 못생겼구먼! 이러면 기분이 나쁘다. 이것은 ‘나’라고 하는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간에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함께 하기 어려운 것이다. 부부싸움도 자의식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무아를 확인하면 자의식이 해체돼버리고, 자의식이 해체되면 거기에서 자비(慈悲)가 나온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아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이다. 즉, 무아는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봐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무아의 생명은 무아행(無我行)이라는 실천면에서 살아 있다.
이와 같이 공교롭게도 ‘나(我)’를 없애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갈고 닦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수행이란 나(我)를 연마하는 것이고, 나(我)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수행방향이 부처를 향해 간다면 그것은 부처와 일체가 되는 것이고, 아상(我相)이 없어지는 방향이 된다. 그리고 이타(利他)를 향해 아상(我相)를 없애는 것이 곧 수행이다.
열반은 무아성(無我性)의 자각 아래 철저하게 무아행(無我行)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경지이다. 일체의 법들이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이고, 자신뿐만 아니라 일체유위법들이 ‘나’라고 내세울 것이 없음을 알면, 나에게 애착하지 않고, 남에게 애착하지 않고, 자학(自虐)도 하지 않고, 남을 증오하고 미워하고 해치려 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무아행을 하는 자는 일체의 행이 자비롭고, 번뇌가 없고, 집착이 없고, 걸림이 없다. 즉, 무아행을 이루면, 무아와 자아(自我)의 개념을 초월해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조화를 창출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아 상태는 성자의 수준인 아라한(阿羅漢, Arhan) 이상의 수행에서나 가능할 정도로 매우 높은 경지이다. 무아가 되면 남과 나의 경계가 없어지고 ‘나’란 존재성이 사라진다. 부처님은 무아의 경지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이라 했다. 그 정도가 되면 번뇌를 완전히 여읜 상태, 무아의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이 경지가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참으로 무아에 통달해야 그를 일러 진정한 보살이라 한다(若通達無我法者 如來說明眞是菩薩)”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과(道果)가 결정되는 것은 무아를 얼마나 완전하게 아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무아를 아는 것에 따라서 집착을 끊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처음부터 무아를 알기는 어렵다. 먼저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을 알고, 그 뒤에 무상을 안 뒤에 오는 괴로움을 통찰하고, 그 괴로움이 자기 뜻대로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무아의 진리를 봐야 한다. 그리고 무아의 진리를 봤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없기 때문에 유신견(有身見)이 생기지 않아서 그 결과로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업을 생성하지 않아서 미래의 태어남이 없고, 받을 것이 없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끝내는 것이다.
무아를 깨달은 자는 윤회하지 않고, 무아를 깨닫지 못한 자는 윤회한다. 깨달았느냐 깨닫지 못했느냐 하는 차이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사유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머릿속으로 분석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무아를 깨닫고 체득하면, 혹시 완전히 사라져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자유롭게 되는 것이지, 완전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붓다의 무아는 형이상학적 견해(見, diṭṭhi)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무아의 진리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인식 가능한 것이 아니다. 무아에 대한 통찰은 염리(厭離, nibbidā-出離), 이탐(離貪, virāgā), 해탈(解脫, vimutti), 해탈지견(解脫知見, vimuttamiti ñāṇaṃ) 등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실천적 과정이 고려되지 않은 순수 이론으로서의 무아는 붓다의 원래 취지에서 벗어난 것이며, 형이상학적 견해에 해당하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범부는 스스로가 오온(五蘊)이라는 경험세계를 지배하는 힘(vaso)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괴로움의 현실은 자신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닥쳐온다. 이 점에서 오온을 이끄는 내부의 통솔자 혹은 주재자 따위는 인정될 수 없다. “어떠한 물질현상(色=오온)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내부적인 것이든 외부적인 것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모든 물질현상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러한 ‘나’는 있지 않다.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우리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다. 거기에는 고정불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른 종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 무아를 깨친 자에겐 윤회가 없다. 원칙적으로 무아와 윤회는 양립하는 교리가 아니다. 따라서 무아의 윤회, 또는 무아인데 누가 윤회하는가 라는 질문은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 범부 = 자아의 상태 = 윤회
• 아라한 = 무아의 상태 = 윤회종식
즉, 아라한은 무아이고 더 이상 태어남이 없는 윤회의 종식을 획득했으니 윤회의 주체에 대해서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범부들은 윤회에 종속되고 무아가 아닌 자아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니 자아가 계속해 윤회한다. 범부가 윤회하는 것은 자아의식 때문이다. 따라서 무아인데 윤회의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왜냐하면 무아라는 말은 곧 윤회를 종식시킨 아라한이라는 것인데, 아라한에게는 윤회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회의 주체라느니 누가 윤회하는가 라는 의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과(道果)가 결정되는 것은 무아를 얼마나 완전하게 아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무아를 아는 것에 따라서 집착을 끊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처음부터 무아를 알기는 어렵다. 먼저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을 알고, 그 뒤에 무상을 안 뒤에 오는 괴로움을 통찰하고, 그 괴로움이 자기 뜻대로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무아의 진리를 봐야 한다. 그리고 무아의 진리를 봤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없기 때문에 유신견(有身見)이 생기지 않아서 그 결과로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업을 생성하지 않아서 미래의 태어남이 없고, 받을 것이 없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끝내는 것이다.
「내가 ‘나’를 주장하는 순간 개체아(個體我)로서의 인식이 발현된다. 우주와 내가 분리되는 것이다. 이때 우주는 더 이상 실상(實相)이 아니다. 나의 의식작용에 의해 창출되는 허상(虛像)의 세계일뿐이다. 그래서 무아이어야 한다. 귀한 사람이란 피아의 경계가 사라져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음을 알기에 모두에게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요, 천한 사람이란 피아의 경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타인을 모두 투쟁과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말이 ‘나’이고, 가장 위대한 말이 ‘당신’이라 하지 않는가.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상(相)’을 버리라고 하셨다.
‘철저한 자신’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대로의 나’가 아닌 ‘나를 떠난 나’이다. 이 세상 만물은 모두 하나로 연결돼 상호작용하는 역동적 관계라는 사실을 직시하면 금방 알 수 있다. 분리돼 있는 ‘나’는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세포요, 큰 나무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일 뿐이다. 영국의 유명한 시인 엘리어트는 말했다.
“예술은 자기 것의 표현이 아니고 자기 것을 넘어선 세계의 표현이다.”라고 했다.
종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를 넘어선 세계를 인식한다면 어떤 언행을 하고,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답이 나온다.」 - 지광 스님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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