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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도(中道, 산스크리트 madhyamā-pratipad)>

수선님 2018. 10. 28. 13:15

 

          <중도(中道, 산스크리트 madhyamā-pratipad)>

                                  

 

                                    용수보살

                                          

1. 중도(中道)란

 

   중도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제일성으로 5비구에게 “나는 중도를 깨달았노라”라고 이르시니 이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따라서 중도란 구경의 깨달음의 눈으로 본 구경의 진리인 만법의 참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만법의 참모습의 내용이 중도이다.

중도에 있어서 중(中)이라는 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바른 이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에 있어서 ‘중(中)’이라는 것은 중생들의 견해가 상대적인 관점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상대적인 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중생은 근본적으로 무명으로 인하여 나[我相]라는 관점에서 만법을 보기 때문에 유무, 상하, 장단, 생사, 빈부, 귀천, 고저, 선악, 시비, 주객, 고락 등으로 일체를 상대적으로만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을 변견(邊見)이라고 한다. 그러나 깨달음으로 본 만법의 구경의 바른 참모습은 상대적이지 않고 일체법은 이사무애(理事無礙) 하고 사사무애(事事無礙) 해서 원융무애(圓融無礙) 하다. 이렇게 원융무애한 만법의 참모습을 중도라고 한다.

   이러한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의 개념을 더 확장해서 해석한 것이 AD 3세기 초반 용수(龍樹, Nagarjuna)에 의해서이다.

   중도를 중로(中路)라고도 하는데, 분별지(分別智)에 의한 인간의 극단적인 사고와 그에 의해서 이루어진 판단의 결과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 혹은 ‘중도’와 같은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할 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경험한 것, 그리고 내가 참고로 할 수 있는 사전이나 책, 자료들을 동원해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세계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예컨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연구하고 개발한 과학적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경지이다. 지금 <중도(中道)>란 제목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 글도 엇비슷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중도를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중도를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말 큰 사전에 있는 단어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말이다. 때문에 불교에서 ‘깨쳐라’고 하는 말을 자꾸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지식체계를 다 버리고, 또 다른 부처님 가르침의 세계를 상상해야 한다.

   어리석은 인간의 분별지는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서 사물을 변별(辨別)한다. ‘있다’가 아니면 ‘없다’이며, ‘옳다’가 아니면 ‘그르다’가 존재할 뿐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은 존재 할 수가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견해 중 변견(邊見)이라는 것이 바로 이분법적 논리이다. 예를 들면, 너와 나, 좌와 우, 상과 하, 부자와 빈자와 같이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서 단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이분법적인 논리의 진실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중도이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중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중간은 어정쩡한 회색시대이고, 이런 사상을 가진 자는 우물쭈물하는 비겁한 존재들이다. 중도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좌우를 초월한 ‘새 길’을 말한다. 거기에 사성제(四聖諦), 연기법(緣起法), 팔정도(八正道) 등이 꿈틀거리는 곳이다. 따라서 중도(中道)에서 ‘중(中)’을 지금까지는 아무도 모르고 또 없었던, 전혀 ‘새로운, 바른’ 길, 이런 말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중도를 중심으로 한 용수의 철학을 중관사상(中觀思想)이라고 한다. 사실은 중도를 용수가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다. 이미 부처님께서 중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와 대승불교의 용수가 말한 중도는 다소 다르다. 초기불교에서 중도는 부처님께서 고락(苦樂)을 모두 체험한 결과 극단적인 수행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체득하고, 마음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실천적 중도였다. 부처님은 출가 전의 쾌락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하며, 이것을 버리고 고 ‧ 락(苦樂) 양면을 떠난 심신의 조화를 얻은 중도(中道)에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체험에 의해서 자각했다. 따라서 부처님은 고 ․ 락 두 가지 극단의 길을 가서는 아니 되고, 중도의 길을 가야 한다고 하셨다. 이러한 중도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한다. 그리고 중도의 길은 여덟 가지 바른길이라 해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있어서, 용수의 중관사상에서 주장하는 중도는 사상적 중도이다. 여기 중도에서의 ‘중(中)’자는 가운데라는 뜻이 아니고, ‘정확하다’, ‘올바르다’라는 뜻으로 바를 ‘정(正)’자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중생의 견해가 상대적인 관점에 완전히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상대적인 관념을 타파하기 위한 주장이다. 또한 ‘중(中)’은 「무자성(無自性) - 공성(空性)」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부처님의 중도와 용수의 중도가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용수의 중도론 뿌리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에 닿아 있다.

   즉, 용수의 저서 <중론(中論)>은 초기불교를 비판하고 대승불교를 수립하려고 저술한 것이 아니라, 부파불교에 의해 왜곡된 불교를 바로잡고 초기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부파불교 당시 일부 부파의 아비달마교학에서 자성(自性)의 존재를 긍정하거나 연기설(緣起說)을 왜곡해 부처님 사상에 배치되는 주장이 더러 있었다.

   용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중론>을 비롯한 자신의 저술을 통해 엄격히 비판하고, 자신의 설이야말로 모두 부처님 진의를 전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모든 존재가 연기성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이라 했고, 이 공은 유 ․ 무 극단이 없는 것이므로 중도를 지향한다고 했다.

   중생은 근본적으로 무명으로 인해 ‘나[아상(我相)]’라는 관점에서 만법을 보기 때문에 유 무, 장 단, 빈 부, 귀 천, 선 악 등으로 일체를 상대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을 변견이라고 한다. 그러나 깨달음으로 본 만법구경(萬法究竟)의 바른 참모습은 이러한 상대는 조금치도 존재하지 않고 일체법은 이사무애(理事無碍)하고, 사사무애(事事無碍) 하며, 원융무애(圓融無碍)하다. 이렇게 원융무애한 만법의 참모습을 중도라고 한다.

 

2. 용수(龍樹, Nagarjuna)  

    

   용수의 생몰연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고대 남인도에 있었던 사타바나(Satavahana) 왕조의 가우타미푸트라 샤타가르니(Gautamiputra Satakarni)왕이 용수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점을 미루어, 불멸 후 6~7백년 경에 해당하는 AD 2세기 후반과 3세기 전반 사이(AD 약 150~250년)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는 남인도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으며, 자라면서 당시 인도의 거의 모든 종교, 철학 등을 섭렵한 후, 최종적으로는 불법에 귀의해 중관사상을 수립함으로써 부처님 사상을 논리적으로 완성시켰다.

   용수가 불교에 입문할 무렵, 인도 불교계는 여러 부파가 갈라져서 20여 종으로 난립한 부파불교시대였다. 그리고 이들 교파는 전문수행인들이라 할 아비달마(阿毘達磨) 논사들에 의해 방대한 논서(論書)가 작성되고, 지나치게 번쇄한 이론중심의 아비달마불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이들 이론중심의 아비달마불교에 불만을 품은 대중적 성격을 띤 새로운 불교개혁운동으로 대승불교가 일어났고, 이들 혁신적인 불교도들을 중심으로 대승경전의 편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 전통적인 바라문교의 육파철학(六派哲學)이 하나 둘 정비돼감과 동시에 대중적인 힌두교가 서서히 그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사상계의 혼돈 속에서 불세출의 사상가이자, 훗날 대승불교의 아버지, 제2의 붓다, 혹은 보살이라 칭송되는 용수가 탄생했다. 용수는 <중론(中論)> 외에 <대지도론(大智度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반야경>, <화엄경> 등 대승경전의 사상을 간결하게 잘 정리해서 대승불교의 기초를 놓았다.

   용수의 핵심 저서인 <중론(본명 중송/中頌, Madhyamaka--sastra)>은 용수의 초기작품으로 27장 449게송(한역은 445게송)으로 간결하게 이루어져 있다. 그 후 <중론>에다가 용수의 <십이문론(十二門論)> 및 그의 제자 제바(提婆 Kanadeva, 2~3세기경)의 <백론(百論)>을 합해 삼론(三論)이라 불렀고, 이에 근거해 삼론종(三論宗)이 성립됐다. 그리고 중국 수 ․ 당시대에 삼론종을 대성시킨 길장(吉藏, 549~623)이 지은 <중관론소(中觀論疏)>는 <중론> 연구의 획기적 저서로 꼽힌다. 그리고 후세의 몇몇 불교학파가 그에게 연원을 두고 있어서 중국에서는 용수를 8종(宗)의 조사(祖師)라고 해서 매우 존숭했다.

  

3. 중도(中道)의 특징

        

   • 중도(中道)는 분별의 양극단을 배격한다.

       

   <중론(中論)>을 중심으로 한 중도(中道) 지향의 사상을 중관사상 혹은 중관철학이라 하고, 중관사상의 흐름을 이어받은 논사들을 중관파(中觀派)라 불렀다. 중관파는 후에 유식(唯識)을 설하는 유가행파(瑜伽行派)와 함께 인도 대승불교의 2대 사상이 됐으며, <중론>은 대승불교에 이론적 기초를 부여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사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도는 <반야경>에 입각한 대승공관(大乘空觀)의 입장에서 공사상(空思想)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중론>의 핵심사상이고, 원시불교 이래의 무아(無我)사상과 연기설(緣起說)을 재해석하고 확장함으로써 공(空)사상을 확립한 이론적 근거였다. 그리고 이에 의해 부파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 일반 철학사상까지도 비판했다.

   따라서 중도의 중심사상은 「연기(緣起) → 무자성(無自性) → 공(空)」으로 귀결되는데, 모든 존재가 연기성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공은 유 ․ 무의 극단이 없는 것이므로 중도(中道)를 지향한다.

   중도란 아무런 걸림 없이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고, 올바르게 관찰하는 거기에 깨달음이 있다고 했다. 즉, 어리석은 중생의 생각으로 구성한 양극단의 상대적인 개념을 모두 근거 없음을 밝혀내서 부정하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수행을 높이 쌓아 번뇌와 무명(無明)을 탁 깨뜨려버리면 허공처럼 청정하고 확 트인 참마음 자리가 열린다. 여기에는 한 점의 속박도 치우침도 없다. 이것을 ‘중도의 경지’라고 한다.

            

   • 중도는 곧 연기론(緣起論)이며, 공성(空性)을 추구한다.

 

   용수가 <반야경>의 공관을 추구한 것은 그것이 바로 연기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곧 우리가 공(空)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실제 모든 사물이 각기 독자적인 존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연기의 관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관계로 이루어진 까닭에 연기의 관계를 떠나있는 독자적인 성질로서 자성(自性)이나 실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용수는 불교의 핵심을 연기로 파악했으며, 이 연기는 관계성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봤다. 즉, 연기는 모든 존재의 존재방식을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존재도 자성(自性)이 없으며, 이것이 용수가 말하는 공(空)의 의미이다.

   그리하여 <중론>에서 “인연으로부터 생하지 않은 사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사물은 공이 아닌 것이 없다(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제24장 19게)”라고 했다. 즉, 용수는 연기하고 있는 것을 공성이라 설하고, 그것이 중도 그 자체라 했다.

   공한 세계는 언어적인 개념으로 표현할 수 없다. 다만 필요에 의해 그런 이름으로 부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가명(假名)이라고 한다. 이렇듯 모든 언어가 공한 세계를 올바로 드러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론들은 이러한 언어로 구성돼 있다. 그 때문에 용수는 이러한 이론들을 희론(戱論)이라 칭하며 비판했다. 따라서 <중론>의 주석가들에 의하면 승의제(勝義諦)란 궁극적으로 “언설(言說)을 떠나 희론이 적멸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공을 이해함에 있어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공(空)’, 그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비어있다는 말이라는 점이다. 비어있는 것과 없다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무(無)-없다」는 말은 있던 것이 없어진 것이고, ‘공(空)’은 본래부터 없는(비어 있는) 것이며, 고정된 주체(자아)가 없다는 뜻이다. 즉,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 중도는 「무자성(無自性) - 공(空)」을 추구한다.

   

   특히 용수는 이러한 연기의 인연관계를 떠나 있는 것을 자성(自性)이라 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연기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자성이란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무자성(無自性)이며 공이라고 했다.

곧 자성(自性)이란 인(因)과 연(緣)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립적인 것이며,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일 없는 항상 고정불변한 존재인데, 실제로 그와 같은 것은 생겨날 수도 있을 수도 없다고 했다.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과 연의 상호관계로 생겨나는 것이고, 따라서 그와 같은 것은 곧 자성이 없는 까닭에 공(空)인 것이다.

   이처럼 용수가 고정불변한 자성의 개념을 부정한 것은 그 자성의 관념이 우리 인간들의 망상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세계는 수많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약속에 의거한 언어적 세계로서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불변의 세계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언어를 불변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해 그로 인해 번뇌를 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중론>은 그와 같은 불변적인 성질로서 자성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우리 삶의 세계가 연기의 이치에 의거해 있고, 공의 세계이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래서 용수는 <중론>에서 “공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성립한다. 만약 공의 의미가 없다면 모든 사물은 성립하지 않는다(以有空義故 一切法得成 若無空義者 一切則不成-제24장 14게)”라고까지 말했다. 결국 이 세상은 공관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지 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중도의 뿌리는 부처님에 있다.

 

   용수는 <중론>에서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관(空觀)을 연기설과 같은 위치에 놓음으로써 공관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대승불교의 역사적 위상을 확립시켰다. 이로 인해 <반야경>으로 대표되는 대승불교는 역사적으로 그 연원이 부처님에게 유래됐음을 분명히 했고, 그럼으로써 대승불교의 역사적 의미는 더욱 공고하게 됐다. 즉, 용수는 그의 저서 <중론>에서 그의 사상적 근본이 불교의 개조인 부처님에게서 출발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와 같이 <중론>은 부파불교에 의해 왜곡된 불교를 바로잡고 초기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그리하여 용수는 자신의 설이야말로 모두 부처님의 진의를 전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지금도 일부 학자는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을 주장하며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용수의 진의를 파악한다면 대승불교야말로 부처님 사상의 확장이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일체법이 연기이며 무자성이라는 「연기 - 무자성 - 공」의 이론이 용수가 확립한 중관사상의 근본으로서, 이 중관사상은 부처님이 설한 중도사상을 계승한 것이요. 후에 삼론종은 물론이고 천태종, 화엄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파에 그 영향을 미쳤으니, 모든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교의가 된다고 하겠다.

       

4. 팔부중도(八不中道)

   

   팔부중도(八不中道)는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인연법으로 허망하고 사악한 이론들을 모조리 때려 부순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중론>의 첫 구절 귀경게(歸敬偈)는 용수가 부처님의 진리 중 으뜸인 연기법을 가지고 당시에 횡행하던 잘못된 이론들을 모조리 타파한 후에 부처님께 자랑스럽게 절하는 용수의 자부심을 나타낸 문장이다.

   귀경게란 부처님을 기리는 노래란 뜻으로서,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 이런 인연을 능히 설하시어 여러 희론(戱論)을 소멸시키시니, 설법자 가운데 최고인 분에게 나는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라고 하면서 팔부중도(八不中道)를 제시했다. 이 귀경게의 팔불 게송이 <중론>의 핵심이다. 즉,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연기의 이법(理法)이 생(生) ․ 멸(滅) ․ 상(常) ․ 단(斷) ․ 일(一) ․ 이(異) ․ 내(來) ․ 거(去)의 여덟 가지 잘못된 견해[팔사(八邪)]를 떠난 것임을 파악할 때 참다운 공(空)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고, 팔사가 떨어져 무소득(無所得)의 바른 견해에 머무르는 것을 팔부중도라 했다.

         ※여기서 ‘불(不)’이란 다 버리고 다 포용하는 원리이다. 그것이 바로 공의 세계이며, 개체와 전체를 모두 살리는 중도의 원리이다.

 

   팔부중도는 우리가 존재로 여기는 모든 그릇된 고장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 설해진 여덟 가지의 부정(否定)이다. 그러므로 사물이 존재한다[유(有)]고 하는 판단도,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무(無)]는 판단도 모두 「연기 - 공」의 입장에서는 부정되는 것이며, 이런 존재론적인 유와 무의 두 견해를 끝없이 부정해가는 바에 참된 중도가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팔부중도는 어리석고 삿된 견해를 끊어 없애는 - 파사현정(破邪顯正) 하는 바른 가르침이다. 그러나 범부 중생은 망상에 빠져 생멸(生滅)ㆍ단상(斷常)ㆍ일이(一異)ㆍ거래(去來)를 실체적인 법이라고 고집한다. 그 결과 생사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공(空)의 팔불(八不)이 중도임을 깨달아 열반에 들어야 한다고 했다.

 

    ① 불생불멸(不生不滅)---부처님이 깨달으신 중도의 이치는 모든 법이 본래부터 자성이 없이 갖가지 인연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기법에 근거해 설해진 것이다. 그리고 인연에 의해서 나타난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는 공한 것으로 극단적인 양변을 여의었다. 그러므로 중도는 곧 연기의 법이며, 공한 법이고, 일체의 차별과 대립을 떠난 적멸의 법이라는 것이다. 즉, 불생불멸이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이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因)과 연(緣)이 화합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망념 된 중생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일어남이 있고 사라짐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실상은 거짓모습이다. 즉, 삼라만상은 인연의 있고 없음에 따라 생멸변화 할뿐이요, 현상 그 자체에는 아무런 자성(自性), 즉 실체성이 없음을 말한다.

   마음도 그와 같아서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가라앉으면 만법이 사라진다. 세계를 만들고 파괴하는 것이 마음이지만 그 마음은 원래 형체가 없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 세계와 우주를 만들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마음이 가정과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주인공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인생의 주인이 아니겠는가. 마음은 원래 생한 적이 없고(不生) 그렇기 때문에 멸하지도 않는다(不滅).”라고 했다.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은 현대물리학에서도 일찍이 규명한 이론이다. 비눗방울 하나도 아예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그렇게 허망하게 보이는 비눗방울도 아주 없애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어디엔가 어떤 또 다른 형태로 변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형태는 변하더라도 그 질량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컨대, 종이가 있다고 하자, 그것을 태우면 외형은 사그라지지만 종이를 태운 에너지와 재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어떤 모양으로든 우주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니 불멸이다. 그리고 어떤 작은 물질도 새로 만들어낼 수 없으니 불생이다. 이처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연기 - 가합(假合) 해서 잠깐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 종이 한 장도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 새롭게 생기게 하지도 못하는 이것이 불생불멸의 진리이다. 이것을 공이라 한다.

  

    ② 불상부단(不常不斷)---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어느 한 극단에 사로잡혀 중심을 얻지 못하는 그릇된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윤회 상에 있는 중생의 몸과 영혼은 항상 하지 않음을 말한다. 즉, 모든 법은 영원함도 끊어짐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들이 있고 반대로 순간적으로 끝나는 것들이 있다고 여기기 쉽지만 그 역시 치우친 견해로서 망념 된 마음의 소산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용수가 불상부단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은 존재자의 연속성에 관한 논의이다. 여기서 상(常)이란 상주(常住)로서 변하지 않는 자성을 가지고 계속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며, 단(斷)이란 단멸(斷滅)로서 연속성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연기(緣起) - 무자성(無自性) - 공(空)」의 입장에서의 불생불멸이 이미 불상부단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상(不常)은 일단 생한 존재자가, 생(生)이란 상태를 계속해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부단(不斷)은 멸한 존재자의 멸(滅)이란 상태가 계속 유지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유가 발효돼 버터나 치즈가 됐을 때, 버터나 치즈에는 우유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불상이다. 그러나 전생(前生)과 내생(來生)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우유가 없이는 버터나 치즈가 생길 수 없기 때문에 부단이다.

   이와 같이 우유와 치즈 간의 모든 관계는 상도 아니요 멸도 아니다. 이렇듯 인과란 자성이 없이 일어나는 것이어서 연기적이며 상대적이니, 단상(斷常)이라는 양극단의 견해에 떨어지지 말고, 「연기 - 무자성 - 공」의 입장에서 인과관계를 봐야 한다는 것이 불상부단이다.

 

    ③ 불일불이(不一不異)---불일불이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서로 다르나 그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동일한 것이기에, 영원히 다르다거나 동일하다는 집착을 부정한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이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하나인 관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불일불이란 연기(緣起)로 생한 현상적 존재들은 독립체로서 고정적인 자성을 갖고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나타난 거짓 상(相)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들의 참 성품은 동일한 진여법성으로서 하나이다. 그러므로 현상적 존재들은 서로 다르면서 별개의 존재가 아닌 한 몸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하나도 아니면서 다르지도 않다는 것이 불일부이의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ㅡ)’이란 원인과 결과가 같다는 인과동일(因果同一)의 입장이며 ‘이(異)’란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는 입장이다. 원인과 결과는 연기론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용수는 이를 능동적으로 생겨나게 하는 것으로서의 능생(能生)과 수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으로서의 소생(所生), 즉 능소(能所)의 관계로 파악하면서 이 관계를 불일불이라고 했다.

   이를 원자의 세계에 견주어 살펴보면,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가 결합해 물 분자를 이룬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 물을 이룬다는 관계에서 본다면, 수소와 산소는 물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므로 능생이며, 물은 수소와 산소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므로 소생이 된다. 중론에서의 중요한 테마는 이 능생과 소생의 관계가 불일불이라는 것이다. 물의 성질이 수소와 산소의 성질과 동일할 수는 없으므로 불일이다. 그러나 수소와 산소를 떠나서는 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전혀 관계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이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서로 연기에 의해 성립할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각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무자성적인 것이다. 그러니 불일불이 역시 「연기 - 무자성」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④ 불래불거(不來不去)---중론 제2장 관거래품(觀去來品)의 첫 번 째 게송에 “이미 지나간 것에는 간다는 것이 없으며,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에도 간다는 것은 없다.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을 떠나 지금 지나가는 것에도 또한 간다는 것은 없다(己去無有去 未去亦無去 離已去未去 去時亦無去-제2장 1게).”라 돼 있다. 이 게송은 과거, 미래, 현재에 대해 ‘간다’는 작용이 불가득(不可得)임을 논증하는 상당히 사변적인 게송이다.

   과거에 이미 간 것에나 미래에 아직 간 일이 없는 것에는 ‘간다’는 동작이 이미 완료됐거나 그 동작이 실현된 일이 없기 때문에 ‘간다’는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재 지나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은 간다는 작용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용수는 이것마저 부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반은 가고, 아직 반은 가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작용마저도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동작을 관찰하는 사람은 자신이 현재 지나가고 있는 작용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미 방금 지나간 과거의 동작을 파악하고 사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불래불거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과 ‘가고 옴’이라는 운동을 다루고 있다.

   모든 법은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고 어디를 향해 간 바도 없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왔다가 저곳으로 가는 것이 모든 존재들의 흐름 같지만 그것 역시 형상에 집착하는 망념 된 마음에서 그렇게 보일뿐 실지로는 움직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여래(如來)’ 한 마디에 집약된다. 여래(如來)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명호이다. 여래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되고 있으나 근본 뜻은 언제든지 와 있다는 말이다. 즉,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다. 여래라고 하는 것은 불거불래(不去不來)이다. 여래(如來)에서 ‘여(如)’ 자는 항상(常)이라는 뜻이다. ‘언제나’라는 글자로서, 언제나 부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인간세계에 와 계시다고 해서 여래라고 한 것이다.

   팔부중도는 존재의 근원에 대해 그 허망함을 밝히고, 진정한 존재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존재에 대한 진실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해탈이요, 열반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존재는 하나인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다. 영원한 실재가 아니라 연기적이며, 고정된 실재가 없는 공이다.

   이렇게 설명은 했지만 이와 같은 팔부중도를 우리들로서는 상당히 이해하기 힘들다. 비유를 든다면 바다와 거품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바다에 거품이 생겼다고 하자. 전체적인 바다의 입장에서 볼 때 많은 거품이 생겨나고 없어지지만 바다 자체에서는 생겨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 즉, 파도가 생겨나고 없어지면서 많은 거품이 일지만 바다 자체는 생겨남과 없어짐이 없다. -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 그리고 거품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품이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파도가 일면 또 생긴다. - 불상부단(不常不斷)이다.

    • 거품과 바다가 같은 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바닷물이 파도라는 인연을 만나 거품이라는 다른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거품과 물이 아주 다른 것이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거품은 물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다. - 불일부이(不一不異)이다.

    • 거품이 왔다거나 갔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바다의 입장에서 볼 때 거품은 가고 온 곳이 없다. 바람을 따라 왔건 바람을 따라 갔건 그것은 하나의 허망한 현상이지 바닷물은 그대로인 것이다. - 불래불거(不來不去)이다.

   바다를 전체로 봤을 때 바다는 종일토록 물결치면서도 ‘바다’ 그 자체에는 아무른 변화가 없다. 겉모습에서는 물결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변하는 듯 보이지만 그 본체인 바다는 늘 그대로인 채로 늘고 주는 일이 없고, 가고 오는 일도 없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다른 일상의 경험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이 곧 ‘불생불멸 불래불거’의 이치이다. 그리고 이렇게 바닷물처럼 그대로인 법이 중도법이다. 연기법에 의해 형성된 우주의 모든 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니 결국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고, 상주(常住)하지도 단멸(斷滅)하지도 않는다.

          

5. 중도와 쌍차쌍조

           

   쌍차쌍조(雙遮雙照)는 중도(中道)를 설명하는 용어 중 하나이다. 천태종 개조 (智顗, 538~597) 대사가 이것으로 중도를 설명했고, 성철(性澈) 스님도 쌍차쌍조가 중도의 핵심사상이라 했다. 쌍(雙)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의 양변을 말하는 것이다. 유와 무, 이것과 저것, 선과 악, 나와 너 등 일체의 차별상인 2분법을 말한다. 쌍차(雙遮)라는 것은 이 양변이 서로를 막아서 서로를 숨기는 것, 즉 서로의 소멸을 말한다. 쌍조(雙照)라는 것은 그 반대로 이 양변이 서로 비추어서 이것은 저것을, 저것은 이것을, 서로를 드러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쌍으로 막고 쌍으로 긍정하며, 쌍으로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한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그럼 뭘까? 남. 여를 초월했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쌍차(雙遮)이다. 쌍조(雙照)라는 말은 초월한 자리에서는 두 개를 다시 긍정하는 자리에 들어간다.

   초월은 왜 초월하느냐 하면, 긍정하기 위해서 초월한다. 남ㆍ여를 초월한 자리에 서게 되면 남자는 남자대로의 특성을 인정하고, 여자는 여자로서의 특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의 똥고집도 인정하게 되고, 여자들의 시기질투도 이해가 된다. 초월의 자리, 궁극의 자리에 서고 보면 다 이해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남남끼리 만나 일심동체의 금실 좋은 부부관계가 이루어지면, 바로 거기가 중도의 자리이다. 이 세상에 약점 없는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서로가 극진히 사랑한다면 그런 약점을 다 덮고, 마치 이쪽 개울물과 저쪽 개울물이 합쳐져서 한 물이 되듯, 부부가 사랑으로 용서하고 융합해 잔잔한 물길처럼 산다면, 그 게 바로 최상의 쌍차쌍조요, 중도의 참모습이다.

   그러니 쌍차쌍조란 ‘양변의 극단을 여윈’ 그런 말과 일맥상통하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시끄러움은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불협화음에서 생긴다. 하모니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처럼, 너그러운 타협과 상생이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 지극한 중도는 지혜와 자비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쌍차쌍조(雙遮雙照)를 통해 갈등과 모순, 대립과 투쟁으로 점철된 현실을 통섭(通攝) 내지 원융(圓融)시키고자 했던 것이며, 그것은 극단적인 흑백논리를 초월해 모든 것을 포용하고 화해시키고자 했던 일종의 중도 구원론이었다. 이와 같이 쌍차쌍조(雙遮雙照) 즉, 양 극단을 여의고, 서로 비춰보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것이 바로 중도(中道)인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지금까지 장황하게 설명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법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하고 끊어지는 것도 아니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같거나 다르지도 않고, 오는 바도 가는 바도 없다.

    모든 법은 인연 따라 화합한 것으로 고유의 성품이 없다[공(空)].

    다만 거짓 이름으로 말할 뿐이다[가(假)], 양 극단에서 벗어났으므로 이를 중도(中道)라 한다.」

   그리고 이를 자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미몽에서 벗어나고, 갇힌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번뇌 망상을 떨쳐버리고 한 점의 속박도 치우침도 없는 중도의 경지에 이르러 무명(無明)을 탁 깨뜨려버리면, 보는 것마다 진실이요, 하는 것마다 걸림이 없고, 한 치의 어긋남이 없게 된다.

한 점 치우침 없는 중도의 완성은 바로 치우침 없는 부처의 길이다.

   부처님께서는 선에도 매달리지 말고, 악에도 매달리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선에 치우치면 선의 노예가 되기 싶고, 악에 매달리면 악의 노예가 된다.

   선악을 포용하면서도 선악에 매달리지 않는 삶을 살라고 하셨다.

   선도 포용하고 악도 포용하면서 선악을 초월한 삶! 사람이 깨치고 나면 아무 꾸밈없이 말하고 행동해도 모든 것에 걸림이 없고, 하는 일 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이치에 딱 딱 들어맞는다. 그것이 도인(道人)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중도의 도리이다.

               

   그런데 문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中道)와 용수 스님이 말한 중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라고 하겠다.

   “초기경전에서 중도는 예외 없이 팔정도(八正道)를 말한다. 어디에도 용수의 <중론(中論)>에서와 같은 논법을 중도라고 부르지 않는다. …

   물론 양극단을 여의고 가운데에 의지해서 법을 설한다는 표현은 몇 군데 등장하지만 중도는 반드시 팔정도를 말한다.

   그런데 용수 스님은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맛지마빠띠빠다(빠알리어 majjhimā paṭipadā)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팔정도인 중도는 용수 스님에 의해서 다른 개념으로 변질된 것이다.… <중론>에서 중도를 이렇게 변질시키고 곡해함으로 해서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고구정녕히 말씀하시고 강조하신 팔정도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중도는 초기경에서 보면 맛지마 빠띠빠다(majjhimā paṭipadā) 혹은 맛지마 빠띠빳띠(majjhimaa pat*ipatti)인데 이것은 분명히 실천적인 용어이다. 빠띠빳띠란 길을 가는 것이란 뜻이고 그래서 중국에서도 행도(行道)라고 옮겼고 초불에서는 도 닦음으로 옮긴다. 이러한 중도는 <초전법륜경>에서 분명히 8정도라고 못 박고 있다.   = 각묵 스님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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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misan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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