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衆生, 산스크리트어 sattva)>
• 중생(衆生)이란
‘중생’은 본래 불교 교단을 이루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나 법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제한적으로 가리키던 불교 용어였다. 그러다가 사람은 물론 날고 기는 모든 생명체를 포괄해 총칭하게 됐다. 즉, 중생이란 불타(佛陀)에 상대되는 말로서 진리를 깨닫지 못해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는 뭇사람을 가리키던 것이 교의(敎義)의 확대에 따라 더 넓게는 모든 사람과 동물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중생(衆生)이란 산스크리트어의 사트바(sattva)의 역어로서, ‘사트바’는 존재하는 것, 살아있는 것 등의 뜻이 있는데, 구마라습(鳩摩羅什)과 진제(眞諦) 등은 ‘중생(衆生)’이라 한역했고, 당나라 현장(玄奘)은 ‘유정(有情)’이라고 번역해, 구마라습 등의 번역을 구역이라 하고, 현장의 번역을 신역이라 한다.
그런데 중생은 폭넓은 의미를 담은 의역이고, 유정은 직역에 충실한 듯한 말인데, ‘중생’을 더 많이 쓰고 있다. 중(衆)은 ‘무리 중, 많을 중’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한자로서, 숫자적인 의미도 포함되지만 정해진 수가 아니라 상대적인 비유로서 ‘많은 수’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하지만 이 한자 자원(字源)은 많은 사람들이 한곳을 지켜본다, 응시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공통된 마음을 가지고 삶을 영위하는 모든 무리들이란 의미가 된다.
그리고 중생이란 선악이라는 관념들이 무분별적으로 취산(聚散:모이고 흩어짐)되는 형태를 따르기 때문에 “무리 중(衆)”자와 “생명의 생(生)”자를 사용해서 무리 속에서 살아가면서 윤회의 바퀴에 의해 변화하는 관념적 정신을 갖고 살아가는 “무리속의 생명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불교에서 중생이란 말은 흔히 미혹(迷惑)의 세계에 있는 생류를 가리킨다.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모든 생명체, 생명이 있는 모든 구제 대상(救濟對象)을 의미하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말은 고금을 불문하고 많이 사용됐다. 그리하여 <장아함경> 22권에서는 “남녀, 귀천, 위아래가 없고, 다른 이름이 없이 대중과 함께 태어나기 때문에 중생이라 한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중생이란 말을 사용했다. 즉, 오경(五經) 중 하나인 예기(禮記)의 제의(祭儀)편에 “살아있는 무리들은 언젠가 죽는다. 죽으면 땅으로 돌아간다(衆生必死 必死歸土).”라고 쓰여 있고, <장자(壯子)>에도 나오는 말이므로 한문 용어로는 오히려 불교 쪽에서 빌려 쓴 말이라 하겠다.
그런데 여러 불교경전에서는 중생의 의미를 다양하게 쓰고 있어서 그 개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중생은 생명이 있는 것,
- 일체의 살아있는 것,
- 인간을 비롯한 의식감정을 지닌 동물을 말하며,
- 특히 미망(迷妄)의 세계에 있는 것을 뜻하는 등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초목이나 흙이나 돌 같은 비정(非情) 또는 비유정(非有情)은 중생의 개념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인간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인간을 위시해 생명을 가진 모든 생물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에 절대적인 차이를 두지 않으며, 그 어느 것도 윤회하는 영혼이 머무는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중생은 해탈할 때까지 윤회를 반복한다. 그 윤회의 범위로서 불교에서는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인간 ․ 천(天:神)의 육도(六道) 또는 육취(六趣)를 말하며, 그리고 나아가서 현실의 동물 외에 용(龍) ․ 나찰(羅刹) ․ 야차(夜叉) 및 상상의 새 건달바(乾闥婆) ․ 가루라(迦樓羅) 등의 신화적 존재까지도 중생으로 간주한다.
좀 더 종교적 의미에서는 높은 경지에 도달한 존재, 즉 부처 ․ 보살과 구별해 아직 미혹에 빠진 사람 및 동물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부처 ․ 보살도 포함해 중생이라 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부처의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하는데, 이것은 중생에 대한 무한한 자비와 신뢰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 산천초목이나 돌, 쇠처럼 중생의 범주에 들 수 없는 것들은 비중생(非衆生) 혹은 비유정(非有情)이나 무정(無情)이라 한다. 그 이유는 구제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중생은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의 오온(五蘊)으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이 오온은 변화무상해서 영원히 간직되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그러한 중생이 마음을 닦아 지혜로워져서 부처가 되려는 것이 불교이다. 그리고 중생을 구제해서 피안으로 건네주는 것을 중생제도(衆生濟度)라고 한다.
• 중생상(衆生相)
<금강경(金剛經)>에서는 4상(四相)을 논하면서 중생, 즉 sattva란 넓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살아있는 모든 것’이라 하고, 좁게는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생명체에 한정 짓고 있다. 그리고 그 중생들이 가지는 본능적 집착을 중생상(衆生相, 산스크리트어 sattva-saṃjñā)이라 일컬으며, 중생상의 여러 가지 특징을 들어 중생의 의미를 구체화하는데, 대체로 어리석은 인간을 지칭하고 있다. 중생상의 특징으로는,
첫째, 괴로운 것을 싫어하고 재미있고 좋은 것만 탐내는 등 이기적인 행동이나 상념의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좋은 것은 자기 것으로 하고, 나쁜 것은 남에게로 돌리려 한다.
둘째, 천당과 지옥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천당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욕심으로 나타난다. 비슷하게 기복불교(祈福佛敎)도 중생상의 소산이라 하겠다.
셋째, 약한 사람을 억누르고 강한 사람에게 빌붙는 약육강식도 중생상이고, 자기의 일에 지나친 욕심을 갖고 남을 이기기 위해 투쟁하는 것도 중생상이다.
넷째, 중생상은 자신의 몸이 오온(五蘊)이 화합해 이루어진 참된 실체라고 고집하는 잘못된 견해를 가진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생명체와 생명이 없는 자, 유정과 무정을 나누는 이원론적 집착으로 나타난다.
다섯째, 나는 중생이니까 부처님과 같이 해탈할 수 없을 것이라는 스스로 퇴굴심을 내는 것이다. 이런 중생상은 열등의식이 바닥에 깔려 있어서인데, 초기 대승불교에서 sattva(有情-중생)의 이런 점을 강조했다. 부처와 중생들을 분별해 자신을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불도를 닦는데 게을리 한다거나 불도를 닦는다고 해도 부처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이것이 중생상이다. 말하자면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위와 같은 속성을 가진 생명체가 중생이니, 그 특성을 미루어볼 때 어리석은 인간을 지칭하고 있다. 그리하여 <금강경>에서는 각자 개인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중생이란 것을 자르고 버리라고 했다. 이 어리석은 중생이라는 공통된 가치관을 버리면 부처가 된다고 했다.
• 마음속의 중생
중생(衆生)이란 말 속에는 심식(心識)을 가진다는 의미가 있어 함식(含識) 등으로도 번역되는데, 육조 혜능(慧能) 대사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을 강조하면서 중생을 겉으로 드러난 몸의 형상을 한 인간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마음속의 중생에 관심을 가지라고 했다.
즉, 사홍서원의 첫 구절이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이 글에서의 핵심 포인트는 ‘중생(衆生)’이다. 중생을 건지기 위해, 그 중생이 일으키는 삿됨을 끊고, 이를 위해 배우고, 이를 철저히 실천해 불도를 완성하는 것이다. 즉, 혜능 대사가 지적하는 중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우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상식으로서의 중생은 부처가 아닌 자는 모두 중생이다. 너와 나, 모두가 어리석은 자 중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중생 인식은 올바른 인식이 아니라고 혜능 대사는 지적한다.
혜능 대사는 당신의 제자를 중생으로 보아 제도(濟度)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중생, 심중 중생(心中衆生)을 중생이라고 했다. 이외에도 식중생(識衆生)이나, 자심중생(自心衆生) 등의 말도 했다. 그리고 <금강경> 사상(四相) 중의 중생상(衆生相)을 생멸심(生滅心)이라고도 했다.
이에서 보듯이 중생이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으로서의 중생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생멸하는 생각들까지를 의미한다. 무수히 일어나는 생각들, 그래서 무수히 많다는 의미의 중(衆)과 생멸하는 생각의 생(生)을 합해 중생이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중생이 아뢰야식에 근거해 의(意)와 의식(意識)을 일으킨다.”고 했다. 이것은 위에 “‘사트바’는 심식(心識)을 가진다는 의미가 있어 함식(含識) 등으로도 번역된다.”는 말과도 상응한다. 즉, 중생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에 얽매여 미혹한 존재로서 내 마음속에 있다. 그러므로 내 마음속의 중생에 초점을 맞추어 수행하는 것이 바른 길, 바른 붓다의 길을 가는 것이라 했다.
<능엄경>에는 ‘나그네 살림’을 중생이라고 했다. 견성을 하게 되면 항상 주인공으로 살지만 그렇지 못한 중생은 나그네 살림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중심이 잡히지 않은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삿된 기운이란 것이 바로 중생 마음이다. 구도자로서 우리는 영적 수행을 통해서 한 껍질 한 껍질 차근차근 우리의 중생심을 벗겨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중생심이 탈각돼 사라질 때 우리의 본성품이 밝게 드러나는 것이다. 한 껍질 벗겨나갈 때마다 우리는 아픔을 느끼고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지만 그러한 고뇌와 고통이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따라서 인내(忍耐)의 힘이 무엇보다도 수행자에게 요구된다. 그리고 그 수행을 하는 자가 진정한 중생이다.
• 중생의 범위
앞에서 중생의 본질은 구제 대상(救濟對象)이라는 점과 업(業)을 생성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특징은 결국 의지(意志)로 귀결된다. 훌륭한 가르침을 만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타인의 도움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의지와 그에 따른 수많은 실천수행이 수반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수행할 수 있는 자, 그것은 인간일 수밖에 없고, 구제 대상을 전제로 했을 때에도 역시 어리석은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헌데 이와 같은 한계를 넘어 <금강경>에서는 ‘9류중생(九類衆生)’을 제시한다. 즉, 일체중생의 종류를,
- 난생(卵生) - 알에서 태어나는 것,
- 태생(胎生) - 자궁의 태반에서 태어나는 것,
- 습생(濕生) - 물고기와 모기 등의 곤충류,
- 화생(化生) - 홀연히 태어나는 것으로 도깨비나 신,
- 유색(有色) - 형태를 가진 모든 생물,
- 무색(無色) - 형상이 없는 귀신,
- 유상(有想) - 오관의 지각을 가진 존재,
- 무상(無想) - 물리적 오관(五官)의 지각을 갖지 않는 천상의 존재들,
- 비유상 비무상(非有想非無想) - 신(神)들을 말한다.
이러한 구류중생의 의미를 분석해보면 ‘살아있는 모든 것’을 일컬으며, 생물 중에서도 주로 동물만을 지칭하는데, 우리말의 짐승이 바로 중생에서 전이된 것이다. 그리하여 식물은 제외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삼론종(三論宗)의 조사이며, 중관사상의 대가인 길장(吉藏, 549~623)은 초목(草木)에도 불성이 있다고 해서 초목도 성불할 수 있다는 초목성불론(草木成佛論)을 말했고, 이에 따른 영향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초목성불론이 대두됐다.
그래서 일본의 일련종(日蓮宗)에서 초목성불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심지어 천태대사 지의(智顗, 538~597)에 의해서 개창된 천태종에서는 초목과 와력(瓦礫)에도 불성이 있다고 했다.
초기불교에서 초목에 불성이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초목에 불성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대승불교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다.
첫째는 유 ․ 무정물을 망라한 모든 것이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삼라만상 모두가 공성(空性)을 지닌다는 입장이다.
둘째는 세상의 모든 것이 그물코처럼 상의상관(相依相關)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유정 ․ 무정에 관계없이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이 세상 모든 대상이 연기이고 공성이고 중도임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목성불의 대두는 자연물에 대한 대승불교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정복대상이 아니라 자비심을 가지고 대해야 할 도반임을 말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자로서는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까지도 모두 고마운 존재로서 인식해 조화롭게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자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자연과 동떨어진 독자적인 존재자, 즉 둘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동일한 생면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자연을 보존해야 함은 자명하다. 오늘날의 자연보호운동의 사상적 기반이라 할 수 있겠다.
• 중생(衆生)과 불성(佛性)의 관계
당나라시대 대주 혜해(大珠慧海) 선사의 어록집인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에는 중생과 불성의 관계를 논하며, 해탈은 오로지 돈오(頓悟)에만 있다고 했다.
“죄를 지은 중생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또한 불성이 있느니라.”
“이미 불성이 있을진댄 바로 지옥에 들어갈 때에 불성도 함께 들어갑니까?”
“또한 함께 들어가느니라.”
“이미 함께 들어갈진댄 지옥에 들어갈 때 중생이 죄를 받음에 불성도 또한 함께 죄를 받습니까?”
“불성이 비록 중생을 따라 함께 지옥에 들어가지만 중생이 스스로 죄의 고통을 받는 것이요, 불성은 원래 고통을 받지 않느니라.”
“이미 함께 지옥에 들어갔는데 어떻게 지옥의 고통을 받지 않습니까?”
“중생이란 모양[相]이 있음이니 모양이 있는 것은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있음이요, 불성(佛性)이란 모양이 없음이니 모양이 없는 것은 곧 공한 성품이니라. 그러므로 진공(眞空)의 성품은 무너짐이 없는 것이니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허공에 땔나무를 쌓으면 땔나무는 스스로 무너지나 허공은 무너지지 않음과 같으니 허공은 불성에 비유하고 땔나무는 중생에 비유한 것이니, 그러므로 함께 들어가나 함께 받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아미산)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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