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
(김종욱 서울대 강사)
1. 문제의 상황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지만, 그 봄을 알리는 새 소리가 숲에서는 들리지 않고, 눈 녹은 산 밑 샛강에서도 물고기는 더 이상 뛰놀지 않는다.
왜 그럴까? 경작에 방해가 되는 해충을 없애기 위해 밭이나 숲에 마구 뿌린 살충제로 해충과 함께 익충도 죽자, 그것을 먹은 새들도 중독되어 멸종에 이르게 되었고, 아울러 지표면으로 스며든 독극물이 샛강을 오염시킴으로써 그곳에 살던 물고기도 떼죽음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은 환경 위기의 주원인을 공해에서 찾고 있는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여사의 그 유명한 저서 《침묵의 봄(Silent Spring)》의 분석 내용이다. 젊은 시절 이 책에 감명받은 A는 그후로 환경론자(environmentalist)가 되었다. 그런데 연구를 거듭할수록 A는 환경의 위기가 훨씬 더 광범위하고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업화에 따른 생산성의 향상과 인구의 폭발적 증가는 개인당 자연재의 소비량을 증대시켜 폐기물의 양을 증폭시켰다.
그리하여 산업 폐수와 가정 하수는 수질을 오염시키고, 농약의 남용과 산림의 벌채는 토양의 오염과 침식을 가져왔다. 더욱이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공장과 자동차에서 배출되는 아황산가스는 산성비를 내리게 하고, 일명 프레온 가스라고 알려진 염화불화탄소는 성층권의 오존층을 파괴하며, 특히 이산화탄소의 증가는 온실효과를 강화시켜 지구온난화를 가져와 각종 기상이변을 초래하였다.
이처럼 경제의 성장을 급속하게 계속 추구하는 이상, 환경의 파괴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제 A는 산업주의에 의거한 경제 개발을 억제하고 환경주의에 입각해 자연 보전을 추구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성장 우선의 경제론자(economist)인 B에게는, 이러한 주장은 여전히 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후진국들에게는 전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환경의 보전보다는 당장의 배고픔을 극복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이 더 우선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국가와 인류가 부강해져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고, 환경에도 눈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
또한 환경이 청결하고, 숲이 늘어나며, 인구의 증가가 감소하는 국가는 오히려 모두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들 아닌가? 그렇다면 생태계의 위기를 과장하여 선전하는 환경론자들의 주장은, 자연의 회복력과 인류의 적응력을 과소평가한 채 소란을 피우는 것에 불과하며, 특히 과학 기술의 진보를 통한 인류의 경제적 번영을 가로막고 자신들 조직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일종의 ‘생태학적 사기(eco-scam)’라고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이윤의 창출을 통해 욕망의 실현을 꿈꾸는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서의 인간을 중심에 놓는 것이 경제론자들인데, 이들과는 정반대인 환경론자의 진영에서도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찾아 볼 수 있다.
사실 물고기가 전멸할 정도로 강물이 오염되는 현상을 놓고 바람직하다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물고기 나름대로 고유한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강물의 오염이 인간에게 해악을 유발하기 때문인가? 이 중 후자가 인간중심주의적 환경론의 입장이다. 모든 가치는 인간에 의해 부여된 것이므로, 자연도 인간에 의해 파생된 외면적 가치만을 지닐 뿐이며, 이처럼 인간이 가치 체계의 중심에 서는 이상, 자연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도 오직 인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태 위기의 극복이나 환경의 보전에 있어서 인간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 것이지만, 그런 식으로 보호된 자연이 결국은 인간을 위한 안식처로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자연을 단순히 이용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경제론자의 주장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문제를 노출하게 된다.
이와는 달리, 앞서의 물음에서 전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자연중심주의적(ecocentric) 환경론이다. 여기서는 자연이 그 자체의 존재 이유와 고유한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고 본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작동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적 전체이기 때문에, 그것의 일부에 불과한 인간이 총체적 유기체의 각 부분들을 자의적으로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인간의 이용을 위해서만 자연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발상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지만, 윤리적 자율성의 능력을 지니지 않은 자연 사물이 과연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그런데 경제적 개발로 인간의 삶의 질이 개선된 후에나 자연의 보호도 효과적으로 관리될 수 있다고 보는 경제론자이건, 그러한 경제적 성장의 한계와 폐해를 지적하고 자연의 보전을 우선시하는 환경론자이건, 또 그런 자연의 보전이 오직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서만 추진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인간중심주의적 환경론자이건, 단지 자연 그 자체의 생명력을 복원하기 위해 생태계의 보전을 주장하는 자연중심주의적 환경론자이건 상관 없이, 그들 주장 사이의 모든 갈등은 인간에 대해서만 자연을 평가하느냐 아니면 자연의 망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느냐 하는 시각차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따라서 여전히 중요한 문제는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서양의 역사 속에서 자연관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고대 서양의 자연관
자연이라는 말 nature의 그리스적 표현은 physis다. 이 퓌지스는 동사 physao片? 명사화한 것이고, 그것은 ‘꽃피다’ ‘용솟음치다’ ‘뿜어나오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퓌지스는 꽃핌이나 용솟음, 다시 말해 일종의 발현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그 과정 자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용솟음이란 내부의 그 어떤 것이 용솟음쳐 나옴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해서 용솟음쳐 나오게 된 것이 구체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사물의 내적 본성을 가리키고, 후자는 그런 본성이 구현된 개개의 사물들 혹은 그런 사물들 전체를 가리킨다.
이처럼 퓌지스에는 ‘본성으로서의 자연’과 ‘전체로서의 자연’이라는 의미가 이중적으로 혼재되어 있다. 즉 우리가 자연이라는 말에서 흔히 떠올리는 사물들 전체뿐만이 아니라, 그런 사물들의 내적 본성이나 원리까지도 모두 퓌지스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물의 본성으로서의 퓌지스를 물질적 질료(質料, hyle)와 비물질적 형상(形相, eidos)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탐구하였다.
탈레스(Thales)가 만물의 근원(arche?)을 물이라고 했을 때, 그 아르케는 사물의 근원이 되는 어떤 물질적 요소를 의미했다. 이렇게 퓌지스에 관한 연구가 곧 아르케의 탐구를 뜻하는 것으로 되어감에 따라, 자연의 본성에 관한 물음은 기존의 여러 기본 물질들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일례로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아르케를 공기라 했고, 엠페도클레스(Empedokles)는 그것을 흙, 물, 불, 공기의 4대 요소로 보았다.
그러나 물질적 시각에서의 자연의 본성 탐구 중 가장 세련된 형태는 데모크리토스(Demokritos)의 원자론에서 나타났다. 원자(atoma)란 문자 그대로 ‘더 이상 나누어지지(tom) 않는(a) 것’인바, 이렇게 분할 불가능한 궁극의 물질적 원자들이 크기와 모양과 위치의 차이에 따라 결합되거나 분리됨으로써 자연 사물들의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원자론(atomism)이다.
이것은 자연에는 어떠한 목적도 없고 다만 원자들의 기계적이고 필연적인 운동의 결과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철저한 기계론(mechanism)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시 아테네의 정치적 혼란기에 등장한 일종의 상대주의적 지식 상인들인 소피스트(Sophist)에 의해서 철학적 논의의 중심은 자연에서 인간과 사회로 바뀌었고, 퓌지스에 관한 연구는 노모스(nomos)의 탐구로 전환되었다.
노모스는 두 가지 어원을 갖고 있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여긴다’는 뜻의 nomizesthai를 어원으로 할 경우 노모스는 ‘관습’이라는 의미이고, ‘나누어준다’는 뜻의 nemein을 어원으로 할 경우 노모스는 그런 나눔의 어떤 ‘질서’나, 그런 질서의 표현으로서 ‘법’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연 현상보다는 현실 사회에 더 관심이 많았고 당시 사회의 혼란을 상대주의적 궤변으로 대처하고자 했던 소피스트들은, 사회의 도덕이나 법(노모스)은 절대 불변의 것이 아니라, 인간들 간의 합의나 그들의 ‘관습’에 따라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상대적인 규약에 불과하며, 자연(퓌지스)은 도덕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자연의 본성이란 말 그대로 자연적 본능으로서 이기적 욕망일 뿐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자연과 인간 사이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칙의 존재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발상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 이익과 자기 주장만을 본성으로 지닌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될 경우, 사회적 혼란이 가중될 수 밖에 없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그 자신은 정치적 혼란의 희생양으로 독배를 마시고 죽었으나, 생전의 소크라테스(Sokrates)는 그런 혼란의 치유책으로서 절대적으로 보편타당한 원리가 존재함으로 확신하였다. 이러한 믿음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Platon), 또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 이르기까지 부동의 신조로 전수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인간이란 보편적으로 사유하는 이성적 인간이며, 이런 인간이 그의 이성을 통해 파악한 질서와 원리가 바로 자연 사물의 본성이고, 자연은 그런 원리에 의해 조화롭게 ‘질서잡혀진 것(kosmos)’이었다. 이와 같은 사고 경향을 한마디로 총괄하여 표현해줄 수 있는 말이 바로 서양철학의 핵심 개념인 로고스(logos)이다. 로고스는 ‘모으다’는 뜻의 동사 legein에서 온 명사이다.
그런데 원시 채집 경제 하에서 들판의 과실을 모으는 것이나 고대 그리스인들이 해상 무역을 통해 재화를 모으는 활동 등을 연상해보면 알 수 있듯이, 모은다는 것은 그저 되는 대로 뒤죽박죽으로 모으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어떤 원칙 하에서 질서있게 모으는 것이라는 점에서, ‘모으다’는 곧 ‘정돈하다’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돈하며 모으는 활동에는 갯수를 셈하여 말하고 헤아려 생각하는 활동이 수반된다는 점에서, ‘모으다’는 ‘계산하다’ ‘말하다’ ‘사유하다’이다. 따라서 이것을 명사화할 경우, 로고스는 원리나 법칙, 수적 비율, 언어, 사유능력으로서의 이성 등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로고스적 발상법이란, 수학적 비율로 된 사물의 원리나 법칙을 인간이 이성을 통해 사유하여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리키며, 이것이 서양 철학의 본류를 형성한다. 이제 노모스는 단순히 ‘관습’이 아니라 그 본뜻인 ‘질서’를 지닌 것으로서 바로 로고스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에, 퓌지스의 연구는 로고스의 탐구로 추진된다. 또한 이 로고스는 물질적 감각이 아닌 이성적 사유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퓌지스는 물질적 질료 대신 비물질적 형상의 방향에서 탐구된다.
형상(形相)이라는 단어 eidos는 ‘보다’는 뜻의 eido를 명사화한 것으로서 문자 그대로 ‘보여진 것’, 즉 모양이나 형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모양은 단순한 겉모양이 아니라, 오히려 한 사물의 외관을 그런 식으로 규정해 주는 본모양이라는 뜻에서의 형상을 말한다. 우리가 불완전하게나마 여러 가지 모양의 원을 그릴 수 있는 것은,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원 자체가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을 본뜨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 사물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닮고자 하는 모범적인 본(本, paradeigma)이 바로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idea)이다. 자연의 모든 사물들은 자신의 본질인 이데아를 나누어 갖거나(metaschesis, 分有) 본받음(mime?is, 模寫)으로써 성립하는 개별자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기하학적으로 정의된 원 자체는 계속 남아 있어도 그것을 본떠 그려진 원들은 지워져 없어지듯이, 영원 불변의 참다운 실재인 이데아에 비해 감성계의 자연 사물들은 허망한 그림자의 세계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현실의 세계가 환영의 세계로 화하는 것을 그의 제자는 용납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이 생각한 초월적인 형상(eidos)을 사물의 속으로 끌어들여 내재화시켰다. 그가 보기에, 모든 사물은 그 사물을 바로 그 사물로서 구실하게 만드는 저마다의 기능(ergo?)을 자신의 본질(ousia)로서 자기 속에 지니고 있으며, 또 그것을 목적(telos)으로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다.
다시 말해 눈 앞의 이 책상은 책상의 본질적 기능(ergo?)을 실현(en)한 현실적인 것(en + ergo? = energeia, 현실태)이고, 그것을 만든 자의 제작 목적(telos)을 구현(en)하여 자신 속에 소유함(echon)으로써 완성된 것(en + telos + echon = entelecheia, 완성태)이다. 이것은 모든 사물의 생성 변화하는 운동을, 기능의 실현을 통한 목적 성취의 과정으로 보는 목적론(teleology)적 사고 방식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자연은 원자들로 결합된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유지하고 완성해가는 일종의 생물체처럼 간주된다. 이상에서 보듯이, 그리스인들은 퓌지스의 연구를 질료적으로는 아르케에 관한 탐구로, 형상적으로는 로고스에 관한 탐구로 전개시켜 나아갔다.
그러나 사물의 본성을 물질적 질료의 방향에서 보아 원자론적 기계론으로 귀결되든, 비물질적 형상의 방향에서 보아 기능적 목적론으로 귀결되든, 자연이 자신의 본성을 지니고 스스로 움직여간다고 본 점에서는 어느 정도 자연중심적인 사고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자연의 본성이나 원리가 오직 인간의 ‘정신(nous)에 의해서만 알려지는 것들(ta noe?a)’의 영역이라는 점에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비교 우위를 주장하는 인간중심주의로 이어질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3. 중세 서양의 자연관
로만 가톨릭의 시대인 중세에 그리스의 퓌지스(physis)는 라틴 어 나투라(natura)로 번역되었다. natura는 ‘태어나다’는 뜻의 nascor에서 온 말로,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본성’을 뜻하고, 그런 본성을 지니고 태어난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사물들 혹은 사물 전체를 뜻한다.
따라서 퓌지스와 마찬가지로, 나투라의 의미에도 ‘본성으로서의 자연’과 ‘전체로서의 자연’이 동시에 포함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언가가 생겨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꽃핌’으로서의 퓌지스와 ‘태어남’으로서의 나투라는 전혀 다른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꽃이 핀다는 것은 꽃이 적절한 때(kairos)를 만나 제 스스로 피어난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에, 퓌지스로서의 자연이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이 스스로 발현된 자립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부모를 그 존재 원인으로 하여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나투라로서의 자연은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기 안에 갖고 있지 않아 스스로에 의해 존립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퓌지스가 스스로 움직이는 자율적 자연을 의미한다면, 나투라는 신에 의해 조종되는 피동적 자연을 의미한다. 이것은 퓌지스가 ‘제작(poie?is)’의 산물인데 반해서, 나투라는 ‘창조(creatio)’의 산물임을 시사하고 있다.
전혀 없는 ‘무에서는 아무 것도 생겨날 수 없다(ex nihilo nihil fit)’고 본 그리스인들은, 우주 만물은 그들의 신 데미우르고스(De?iourgos)가 이미 있어온 기본적인 질료와 형상을 결합시켜 나름대로의 조화를 이루어 나가도록 해준 것이라고 보았다. 데미우르고스라는 말의 원뜻이 장인(匠人)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작자(poie?e?)로서의 그는 장인처럼 이미 주어진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제작물(to poioumenon)을 형성해낸다.
이처럼 제작이 ‘있던 것에서 있는 것으로 됨’을 뜻하는데 반해서, 창조는 ‘없던 것에서 있는 것으로 됨’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이 볼 때 만물의 근원은 만물의 최초 원인이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것을 낳은 최고의 원인이 되면서도 그 자신은 자기를 낳는 어떠한 원인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신에 앞선 것을 전혀 갖지 않은 제일의 원인으로서의 신은 기존의 ‘어떤 것으로부터(ex aliquo)’가 아니라, 완벽한 ‘무로부터(ex nihilo)’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를 수행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은 이미 나타나 있는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히브리서, 11장 3절) 이제 신과 자연의 관계는 제작자와 제작물의 관계가 아니라, 창조주(creator)와 피조물(ens creatum)의 관계로 된다. “은총은 자연을 밑에 둔다(gratia supponit naturam).”는 원리에서 보이듯이, 신의 은총과 말씀과 섭리에 의해 자연이 창조된다. 모든 것을 산출하는 신이 능산적 자연(能産的 自然, natura naturans)이라면, 그에 의해 산출되는 자연은 소산적 자연(所産的 自然, natura naturata)이다. 한갓된 피조물을 초월한 절대 타자라는 점에서, 창조주인 신과 피조물로서의 자연이나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이게 되고, 이런 점에서 신은 피조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숨겨진 신(deus absconditus)’이 된다.
하지만 신은 세상을 창조함에 있어,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인간만은 ‘신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하였다.(창세기, 1장 27절) 신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은 자유의지와 인격성을 갖을 수 있고, 신앙을 통해 신과 가까워질 수도 있다. 아울러 신의 형상이 부여됨으로 해서, 인간은 신의 영광을 반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며, 다른 피조물인 자연과는 질적으로 다른 우월한 존재가 된다.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사, 땅을 지배하라,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장 28절)는 말씀에 따라, 이제 인간에게는 땅의 지배권(dominum terrae)이 부여되는 것이다. 결국 신-인간-자연으로 이루어진 중세적 위계 구조는, 인간은 신을 섬기고 자연을 지배한다는 말로 압축된다. 이것은 신중심주의(theocentrism)에 기대어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가 등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중세는 신 중심인 반면 근대는 인간 중심이라거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근대만의 특징이라거나 하는 식의 일반인의 통념은 매우 얕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자연의 생성에 창조론이 도입됨에 따라, 많은 그리스적 사유 유산들이 기독교적으로 변형되었다.
개별적 사물에 대한 보편적 형상의 초월성(플라톤)은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초월성으로 바뀌고, 개별적 사물 속에 내재하는 자체 본질로서의 기능과 목적(아리스토텔레스)은 창조의 역사 속에 내재하는 신의 의지로서의 섭리와 목적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역사적 목적론을 통해서 비물질적인 형상적 방향만이 강조됨에 따라, 물질적이고 질료적인 방향에서의 원자론은 그후 근대 과학이 성립될 때까지 천년 동안의 고독을 맛봐야만 했다.
4. 근대 서양의 자연관
서양의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로만 가톨릭으로부터의 이탈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 교황권에 의거한 봉건 국가로부터 군주권이나 개인적 시민권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 국가로의 이행이며,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이라는 보편적 교회(ecclesia universa)의 권위로부터 개인적 신앙(fides individualis)과 성서에 호소하는 개신교로의 전환 과정이다.
그러나 그 어떤 방향으로의 선회라 하더라도 한 가지 공통되는 점은, 근대의 시작인 르네쌍스가 보편적 신성(神性, divinitas)에 대한 인성(人性, humanitas)과 개성(個性, individualitas)의 중시를 그 특징으로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바로 개인의 등장으로 귀착된다. 그런데 개인(individual)이라는 말이 원래 ‘나눌 수(divide) 없는(in) 것’, 그래서 ‘침해되거나 파괴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볼 때, 개인의 등장 이면에는 ‘분할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근대 과학의 기계론에서 부활된 원자(atom) 개념 역시 ‘나눌 수(tom) 없는(a)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근대 유럽인들이 얼마나 분할과 분석과 분리를 통해서 사태의 진상에 접근하고자 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분리적 사고의 발단에 데카르트(Descartes)가 있다.
사상적 혼란기에 직면하여 진리의 확고 부동한 기초를 찾고자 했던 데카르트는 일단 모든 것을 의심해 보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그렇게 확고 부동하고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을 다 의심해 보아도 의심되지 않는 것이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가 모든 것을 의심하고 생각하는 동안, 그렇게 의심하고 생각하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이처럼 내가 있음이 확실하지만, 그것은 오직 내가 생각하는 동안만이라고 한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진리의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내가 사유하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 또는 자아의 본질은 사유(cogitatio)이고, 인간은 ‘사유하는 자(res cogitans)’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물체의 본질은 연장(延長, extensio)이다. 왜냐하면 물체에서 색깔과 소리와 맛 등은 떼어낼 수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크기를 지니고 공간 속에 퍼져 있다는 연장성만큼은 떼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체는 ‘연장된 것(res extensa)’이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보기에 사유와 연장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유란 하나의 통일체로서, 크기와 형태를 지니지 않아 분할 불가능한 것이지만, 연장은 장소를 차지하여 언제라도 분할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사유와 연장이 판이한 것이라면, 사유를 본질로 하는 것(자아-정신-인간)과 연장을 본질로 하는 것(세계-물질-자연)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립적인 것(실체, substantia)’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아와 세계,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이 실체적으로 분리된다. 중세에는 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그렇지 못한 자연에 비해 분명 우월한 존재이고 그래서 인간과 자연은 서로 분리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모두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섭리 속에서 연결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이 자신의 사유를 통해 스스로 확고 부동한 토대를 마련함에 따라, 신의 그러한 연결 고리는 느슨해지고, 인간과 자연의 괴리는 메울 수 없는 간격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이러한 데카르트적 분리(Cartesian division)는 동시대 내지는 그후의 철학과 과학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니, 철학에서는 인간의 주체성의 강화로, 과학에서는 자연의 객관성의 강화로 각각 나타났다. 먼저 철학 분야에서는 데카르트의 인간-자연 관계가 칸트(Kant)의 주관-객관 관계로 전이되었다.
인식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에 따른다고 하여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한 칸트는, 인간은 경험적으로 주어진 자료에 감성과 오성의 선험적 형식들을 투입하여 구성함으로써 인식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자연이란, 인간에 의해 구성된 세계이고, 선험적 자아에 나타나는 ‘현상의 총체’이며, 주관에 의한 ‘경험의 대상 전체’이다.
이런 대상 세계로서의 자연이 철저히 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수동적 ‘필연(Notwendigkeit)’의 영역인 데 반해, 선험적 자아로서의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르는 자율적인 ‘자유(Freiheit)’의 영역이다. 그런데 칸트식의 이러한 인간의 의식은 어디까지나 ‘현상(Erscheinung)’ 세계에만 국한될 뿐 ‘사물 자체(Ding an sich)’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칸트의 선험적 의식이 헤겔의 절대적 의식으로 고양됨에 따라, 사물 자체도 ‘사유의 산물(Gedankending)’로 간주되고, 자연의 전개는 정신의 자기 형성 과정과 동일시되었다.
헤겔(Hegel)에 있어서 자연이란, 이념(Idee)이 타자적 형태로 나타난 것이며, 신과도 같은 절대 정신(absoluter Geist)이 ‘자기를 밖으로 드러낸 것(外化, Enta�βerung)’이다. 이것은 철학적 기독교의 범신론적 변주라고 할만한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마르크스(Marx)는 헤겔식의 변증법을 물구나무 세워, 자연이란 정신이 아니라 육체적 노동이 외화(外化)된 것으로서, 인간의 사용가치의 원천이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세계의 참다운 실재를 정신적인 것으로 보는 유심론자(spiritualist)가, 의식이 자연에 앞서고 자연은 의식에 의해 파악된 것으로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하거나, 세계의 진정한 실재를 물질적인 것으로 보는 유물론자(materialist)가, 자연이 의식에 앞서며 자연은 의식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거나 간에, 양자는 모두 자연을 인간의 의식과 대립시키고, 인간이 자연의 정신적 혹은 물질적 원리를 파악하여 자연을 자신의 필요에 맞게 변화시킴으로써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는 정확하게 일치한다.
다시 말해 유심론자에 의해 인간이 정신적 사유의 주체로 규정되건, 유물론자에 의해 인간이 물질적 노동의 주체로 규정되건, 인간이 주체(Subjekt)가 되어 객체(Object)인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보는 점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인간과 자연 사이의 데카르트적 분리에서 야기된 이러한 ‘자연의 객체화’는 과학 분야에서는 자연의 객관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데카르트가 자연 사물을 창조주의 피조물(ens creatum)이 아니라 단순히 ‘연장된 것(res extensa)’으로 본 것은, 연장(extensio)이라고 하는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인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자연계에서 영적이고도 신비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자연에 숨겨진 의도나 목적은 없고, 자연은 각 부품들간의 인과관계의 연쇄로 이루어진 기계와도 같다고 보는 ‘기계론(mechanism)’이 출현하게 된다. 기계론에서는 물질적 구성요소인 ‘미립자들’과 그것들 간의 인과관계로서의 ‘운동’이라는 두 가지만으로 모든 자연 현상을 설명한다. 따라서 설사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더라도, 일단 세계가 성립된 이후에는, 신은 그것에 개입하지 않고, 그들간의 기계적 역학 관계에 따라 작동해 가도록, 그저 기하학적으로 설계만 하였다고 보게 된다.
이러한 신은 자신의 피조물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하는 창조주가 아니라, ‘기하학적 정신(esprit ge�me�rique)’에 따른 기계의 설계자이기 때문에, 신앙보다는 수학과 과학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 곧 신의 섭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찬양하는 지름길로 여겨진다.
이제 학문의 척도는 철학(고대)이나 신학(중세)이 아니라 수학과 물리학이 되며, 어떤 것이 과학적인가의 척도는 그것이 얼마나 수학적으로 계량 가능한가에 달려 있게 된다. 이처럼 기계론을 통해 자연이 수학적으로 계량화됨으로써, 자연의 객관성 강화가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등장한 과학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기술과 결합되었다. 원래 과학(science)은 자연의 원리에 대한 ‘이론적 활동(theoria)’이나 ‘관조하는 앎(scientia)’을 뜻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객관적인 것이라면, 기술(technic)은 인간이 자신의 생존과 생활을 위해 ‘도구를 사용(techne)’하여 자연을 이용하려는 의지나 능력(ars)을 뜻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주체적인 것이다.
이렇게 상이한 과학과 기술이 통합되는 것은 그 발단의 단서를 합리주의에 두고 있다. 서구 근대 사상의 근간을 이룬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란, 모든 것은 이성과 합치되어 존재하고 있으므로 세계에 내재된 이성적(수학적) 질서를 인간의 이성을 통해 밝혀낼 수 있다는 입장을 말한다. 그런데 세계에 이성적 질서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세계가 점차 좀더 나은 상태로 발전해간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주의는 진보에 대한 일종의 낙관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이 정치적으로는 계몽주의로, 경제적으로는 산업주의로 나타난다.
이성의 확대와 보급을 통해 정치적 진보를 주장하는 것이 계몽주의(Enlightenment)라면, 산업화와 생산성의 증대를 통해 경제적 진보를 주장하는 것은 산업주의(industrialism)이다. 합리주의에 뿌리를 둔 산업주의는, 자연계의 이성적 질서인 자연법칙을 인간의 이성을 통해 밝혀내고, 생산성을 효율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목적을 위해 과학과 기술이 결합되고, 그렇게 결합된 과학 기술을 통해 자연이 인간의 이용 대상으로서 도구화된다. 아울러 산업주의는 생산성의 실현 방식과 관련하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누어진다. 생산 효율을 늘리기 위해서는 생산 수단을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시장을 자본의 수급 논리에 맡겨야 한다고 보는 것이 자본주의(capitalism)라면, 생산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생산 수단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시장을 국가 계획의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산주의(communism)이다.
그렇다면 흔히 상반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서로 배다른 자식이 아니라, 산업주의의 이란성 쌍생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합리주의가 산업주의로 변이됨에 따라, 합리주의적 인간형인 ‘지혜인(homo sapiens)’은 산업주의적 인간형인 ‘생산인(homo faber)’으로 바뀐다. 또한 산업주의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기준으로 삼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변질시킨다.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을 지닌 진보된 사회가 고급의 문화나 문명이라면, 그런 기술적 능력을 지니지 못한 낙후된 자연 상태는 저급한 미개의 야만이 된다.
근대적 생산성의 창출에 유리한 구조를 지닌 사려 깊고 적극적이며 생산적인 인간이 남성적인 것이라면, 그런 구조를 지니지 못해 생산성의 증대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경박하고 소극적이며 소비적인 인간은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과학 기술을 통해 생산성의 향상에 성공한 근대적 산업 국가가 제국주의 지배국이 되는 데 반해, 과학 기술의 부재로 생산성의 향상에 열악한 전근대적 농업 국가는 식민지 피지배국이 되고 만다.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육체) 간의 데카르트적 분리가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거쳐, 문명과 야만, 남성과 여성, 식민국과 식민지의 분리로 귀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리는 단순한 구분에 그치지 않는다. 각 항의 전자(인간·정신·문명·남성·식민국)와 후자(자연·물질(육체)·야만·여성·식민지)의 분리는 후자에 대한 전자의 우위에 기초하여 전자에 의한 후자의 지배로 이어진다.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근대적 경향에 반발하여 여러 가지 사조들이 생겨났다. 문명과 야만의 구분에 대한 반박으로는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가, 남성의 여성 차별에 대한 공격으로는 페미니즘(feminism)이,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으로는 반제국주의 운동(anti-imperialist movement)이, 그리고 서구의 합리주의적 근대성(modernity) 전반으로부터의 탈출(post) 경향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각각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다기(多岐)한 분출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조를 촉발시킨 이면의 근저에는 인간과 자연의 분리와 인간의 자연 지배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하는 생태철학이야말로 단순한 환경보호 운동의 차원을 넘어 서구적 사유 방식 전체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 작업이 된다고 할 수 있다.
5. 불교의 자연관
불교의 자연 개념을 논하기에 앞서, 자연(自然)이라는 표현이 한역불교에서 실제로 사용된 경우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원래 자연(自然)이라는 말 자체는 중국 도가 사상에서 도의 본성을 가리키는 핵심 용어로서 ‘제 스스로 그러함’을 뜻하는데, 이것은 “억지로 만들거나(造) 일부러 하지(爲) 않으면서 만물이 스스로 서로를 다스려 질서를 잡는 것(無造無爲 萬物自相治理)”을 의미했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제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이런 자연을 ‘저절로 그렇게 됨’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항상 장로를 공경하는 자에게는 네 가지 복이 저절로 자라난다.”(常敬長老者 四福自然增, 《법구경》 〈술천품〉)거나, 인위적 노력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 생기는 부처님의 지혜”(自然智, 《법화경》 〈비유품〉, 〈법사품〉)라고 하거나, 불국정토에서는 온갖 좋은 것들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생겨나고” “저절로 앞에 나타난다”(自然化生, 自然在前, 《무량수경》)거나 하는 것들이 좋은 예이다. 그런데 이때의 자연은 팔리어 sayam.이나 산스크리트 svayam.에 대한 번역어로서 단순히 ‘저절로’라는 수식어에 불과할 뿐, 소위 자연관을 논할 때의 그 자연 개념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본성으로서의 자연’과 ‘전체로서의 자연’이라는 온전한 자연 개념을 불교적인 사유 속에서 검토해 보기 위해서는, 그 단서를 단순 역어로서의 자연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만 한다. 그곳이 바로 다르마이다. 인도 철학 사상에서 다르마만큼 복합적이고도 핵심적인 의미를 가진 개념도 없을 것이다. 대충 열거해 보아도 법령·판결·관례·규범·질서·법칙·이법·의무·권리·정의·도리·도덕·선행·진상·진리·교리·교설·본성·본질·요소·사물·사건·존재 등 20여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떠받치다’ ‘유지하다’ ‘지탱하다’는 뜻의 dhr.에서 유래한 다르마(dharma)는 크게 보면 ‘어떤 것을 떠받쳐 유지시켜 주는 것’ 또는 ‘어떤 것에 의해 지탱되어 유지되는 것’이라는 뜻이며, 이를 좀더 세분하면 다음과 같은 네 부류로 나뉜다.
첫째, 인간 사회를 떠받쳐 유지시켜 주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사회의 ‘질서’와 ‘규범’과 ‘법령’, 카스트 제도상의 ‘의무’, 인생의 네 가지 주기(a?�ama)에 관한 ‘관례’ 등을 뜻한다. 이것은 브라흐만교도 내지는 힌두교도로서 지켜야 할 ‘정의’이자 ‘도덕’으로서, 불교의 등장 이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도 사회에서도 존중되고 있는 힌두 다르마이다.
둘째, 우주 만물을 떠받쳐 유지시켜 주는 것이라는 뜻에서는 우주의 ‘이법’이나 ‘법칙’, 만물의 ‘본성’이나 ‘진상’ 또는 ‘진리’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래의 협소한 용법이 불교의 등장으로 인해 훨씬 확장되었음을 보여 준다. 브라흐만이나 힌두의 다르마가 카스트적 규제를 포함하는 지극히 인디아적인 법임에 반해, 이런 불교의 다르마는 카스트 제도를 넘어선 만유 보편의 법이다. 전자가 신들의 계시로서 영원 불변한 부동법(不動法, sana?-dharma)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무수한 조건에 따라 생성 소멸하는 인연법(因緣法, prat沖tya-dharma)을 가리킨다. 따라서 “연기를 보면 곧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보면 곧 연기를 보는 것이다.”(若見緣起便見法 若見法便見緣起, 《중아함》 〈상적유경〉)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연 만물의 원리 내지 본성으로서의 다르마(法)란 내용적으로는 바로 ‘연기(prat沖tyasa?utpada)’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이런 만물의 법칙에 의해 지탱되어 유지되는 것이라는 뜻에서는 그런 이법에 의해 형성된 ‘사물’이나 ‘존재자’ 혹은 그 존재자의 구성 ‘요소’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연기’라는 본성적 원리에 따라 ‘연기한 것(prat沖tyasamutpanna, 緣已生)’을 가리킨다. 불교에서 일체법이나 제법(諸法, sarva-dharma)이라는 말로 함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존재자들이다.
넷째, 그런 만물의 법칙에 관해 가르치는 것이라는 뜻에서는 ‘교설’ ‘교리’ ‘경전’ 등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불법(佛法, buddha-dharma)이라 하고, 그런 가르침을 삼보의 하나로서 법보(法寶, dharma-ratna)라고 할 때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상과 같은 다르마의 여러 의미들 중 두번째와 세번째 의미가 불교적 자연 개념의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우주 만물의 이법이나 본성을 ‘연기’로 보는 것은 ‘본성으로서의 자연’에 해당하며, 연기를 본성적 원리로 하여 ‘연기한’ 일체의 존재자들은 ‘전체로서의 자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본성으로서의 자연’과 ‘전체로서의 자연’은 각각 법성과 법계로 표현될 수도 있다. 법성(法性, dharmata?)이란 법의 본성을 말하는데, 이 때의 법은 실제로는 제법, 즉 모든 ‘연기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제법의 본성으로서의 법성이란, 연기한 제법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성격, 또는 연기한 모든 존재자를 그렇게 존재하게 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연기(緣起)’이다. 이 연기라는 원리는 현실 세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연기한 것’들을 추상화한 하나의 이법이기 때문에, ‘연기한 것(prat沖tyasamutpanna, 緣生)’을 추상명사로 만들어, 연생성(緣生性, prat沖tyasamutpannatva)을 법성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연기(prat沖tyasamutpa?a)란 수많은 조건들(prat沖tya)이 함께(sam) 결합하여 일어난다(utpa?a)는 ‘상호의존적 발생’을 의미한다. 일체의 현상이 이런 상호의존성(idappaccayata?)의 원리에 따라 성립된다고 할 경우, 영원 불변하게 고정된 것은 있을 수 없고(無常), 혼자만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자아도 있을 수 없으며(無我), 자기만의 존재로 지속되는 독립적인 실체도 있을 수 없게 된다(無自性, 空). 서양인에게서 자연의 본성이 제작성(고대)과 창조성(중세)과 기계적 인과성[근대]이고, 도가에서는 무위자연성(無爲自然性)인데 비해, 불교에서는 이처럼 무상성(anityata?)과 무아성(ana?matva)과 공성(s�?yata?)을 특징으로 하는 상호의존성, 즉 연생성이 자연의 본성(법성)인 것이다.
이러한 연생성으로서의 법성이야말로 모든 존재자의 있는 그대로의 실태를 보여주는 것이므로, 제법실상(諸法實相, dharmata?)이라고도 한다. 또한 상호의존적 발생이라는 이러한 ‘현상의 규칙성(dhammaniya?a)’은 여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간에 이미 있어 온 일종의 법주성(法住性, dhammat.t.hitata?)으로서(《상윳타니카야》 2. 25), 그러한 법을 깨달은 자가 곧 붓다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법성은 붓다가 될 수 있는 근본적 가능성인 불성(佛性, buddhatva)을 가리키기도 한다.
법계(法界, dharma-dha?u)라고 할 때, 그 계(dha?u)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야기하다’ ‘놓다’는 뜻의 dha貶【? 유래한 dha?u는 ‘야기하는 근원(因, 性)’과 그런 근원에 의해 ‘야기되어 놓여진 것(分齊, 가지런히 나누어 가짐)’이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전자의 뜻으로 해석할 경우, 모든 존재자의 현상을 야기하는 근원으로서의 연생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법계는 곧 법성과 같은 의미가 된다. 하지만 후자의 뜻으로 해석할 경우, 연기라는 원리 하에 마치 하나의 가족이나 종족처럼 공존하며 모여 있는 것을 뜻한다는 점에서, 법계는 곧 ‘연기한 제법(prat沖tyasamutpanna? dharma?.)’, 즉 일체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불교에서 ‘전체로서의 자연’이란 이처럼 연기라는 원리에 의해 관통되어 있는 세계, 상호의존하여 이루어진 모든 존재자, 곧 일체법으로서의 법계이다. 그런데 일체법은 12처, 18계, 유위법과 무위법 등으로 표현된다. 12처(處, a?atana)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마음(意) 등의 내적인 것과 형태(色)·소리(聲)·냄새(香)·맛(味)·감촉(觸)·사물(法) 등의 외적인 것으로 이루어진 ‘경험의 열두 가지 터전’을 말한다.
18계는 이런 여섯 가지의 육체적 기관(六根)을 인(因)으로 하고, 저 여섯 가지의 물질적 대상(六境)을 연(緣)으로 하여 여섯 가지의 정신적 작용(六識)이 일어남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일체를 12처 또는 18계라 함은, 육체계와 물질계와 정신계가 연기라는 원리에 의해 통합되어 작용하는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유위법과 무위법은 깨달음의 여부와 관련된 다소 종교적인 분류법이다.
유위(有爲, sam?kr.ta)란 번뇌를 낳는 의지적 성향(sam?ka?a, 行)에 의해 형성된 것을 말하고, 무위(無爲, asam?kr.ta)란 그런 의지적 성향에 의해 형성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세간(世間)의 미계(迷界, 깨닫지 못한 세계)를 유위법이라 한다면, 출세간(出世間)의 오계(悟界, 깨달은 세계)는 무위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연기하지 않는 법은 결코 있을 수 없으므로”(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중론》 24 : 19), 유위법도 무위법도 다 함께 일체법으로서 모두 연기에 의해 통일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 무위법도 ‘연기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라 해서, 연기하는 이 현실의 세계와 무관한, 마치 신과도 같은 영원 불변한 절대자의 세계가 아니며, 그렇기에 출세간은 세간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따라서 어리석음의 세계를 깨달음의 세계로 변혁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당위성이 확보된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만약 무위가 유위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미계(迷界)를 오계화(悟界化)하는 중생제도가 어찌 가능할 수 있겠는가?
둘째, 유위법도 무위법도 모두 ‘연기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양자는 상호의존하여, 자기만의 존재(自性)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므로, 유위법과 무위법, 세간과 출세간, 미계와 오계가 모두 무자성(無自性) 공(空)이라는 점에서 전혀 차별이 없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사가 열반과 다르지 않고(生死卽涅槃), 번뇌가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煩惱卽菩提)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무자성 공으로서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특정한 입장(自性的 戱論)’에 따라 고정적으로 분별되지 않기에, 그저 같고도(如) 같다(如)고 할 따름이다. 이처럼 무자성 연기의 ‘법에 따라 그러한 것(法然, dharmata?)’은 ‘같고도 같은 것(如如, tathata?)’이요, ‘진실로 같은 것(眞如, bhu?a-tathata?)’이며, ‘참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如實, yatha?-bhu?a)’이다.
따라서 ‘법과 같아 제 스스로 그러한 것(法爾自然)’에서는 주관과 객관, 인간과 자연, 부분과 전체가 둘로 분열되어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無二, 無碍).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을 상즉(相卽)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무책임한 신비주의적 동일화를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것에 자리를 잡아 머물러 집착하지 않고(無位, 無住) 전체를 하나로 관통하여 봄(全一觀)으로써, 사태의 진상에 제대로 다가가기(實相觀, 如實智見)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부분과 전체가 상호 침투(相入)한다는 것은, 협소한 분석의 시각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지만, 연기적 전일성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한없이 거듭 거듭해서 상호 관련되어 있으므로(重重無盡緣起), 하나의 사물은 고립된 부분이 아니라 전 우주와의 관계망 속에서 그 우주 전체를 반영한다(一中一切 多中一)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부분과 전체를 전일적으로 조화시키는 연기론에서는, 목적론처럼 전체의 목적을 중요시하여 부분을 전체에 종속시키거나, 기계론처럼 부분의 요소를 강조하여 전체를 부분으로 환원시키거나 하지 않는다. 더욱이 다 같이 인과성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연기적 인과성과 기계적 인과성은 내용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근대의 기계론에서 자연은 마치 죽은 기계처럼 수동적인 물질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자연 내 요소들 간의 인과관계도, 일정한 원인의 부분이 제한된 범위에서 일정한 결과의 부분을 낳는 쪽으로만 진행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는 획일적이고도 단순한 선형적(linear) 인과관계가 된다.
그러나 불교의 연기론에서 자연은 마치 인드라의 그물처럼 수많은 조건들이 서로를 반영하는 관계들의 연쇄이기 때문에, 자연 내 구성원들 간의 인과관계도, 원인과 결과가 ‘고정된 선후관계(因先果後, 果先因後)’나 실체성(自性)을 고집하지 않는 역동적이고도 공(空)한 관계가 된다. 이것은 현대의 생태학적 시스템 이론의 주장을 연상시킨다. 그 이론에서 자연은 서로 연결된 관계들의 자기조직적 그물망(network)이기 때문에, 자연 내 각 사건들 간의 인과관계 역시, 되먹임(feedback) 작용을 통해 결과가 원인에 재투입되기도 하는 환류적이고도 복잡한 비선형적(nonlinear) 인과관계가 된다. 이렇게 볼 때, 인과의 일방성과 단순성을 주장하는 근대의 기계론과는 달리, 인과의 상호성(mutuality)과 복잡성(complexity)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연기론과 시스템 생태학은 일맥 상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인간과 자연이 둘로 분열되지 않는다는 것은 근대 서양인의 인간관과 자연관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인에게서 인간은 비물질적 정신성을 본질로 하고 이와는 반대로 자연은 물질적 연장성(延長性)을 본질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은 각각 독립된 실체로서 분립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불교에서 자연은 이런 것이 아니다. 법성(法性)을 본성의 원리로 하고 법계(法界)를 전체의 범위로 하는 불교적 자연(法性自然, 法界自然)에서는, 모든 존재자가 상의성(相依性)과 연생성(緣生性)과 공성(空性)을 법으로 하여 통일된 한 생명의 큰 바다를 이루고 있다.
그곳에서 천지와 나는 한 뿌리이고(天地與我同根), 정신과 물질은 둘이 아니며(色心不二), 만물과 나는 한 몸이다(萬物與我一體). 그러므로 땅의 인연을 받아 태어난 생명(身)과 그 땅(土) 자체는 언제나 하나인 것이다(身土不二). 이것은 오늘날 생태학의 입장이기도 하다. 생태계에서는 ‘생산자’인 녹색식물이 광합성 작용을 통해 산소를 방출하고 자신의 유기물을 동물이나 미생물에게 제공하며, ‘소비자’인 인간과 동물은 그렇게 방출되고 제공된 것들을 영양 단계별로 이용한다.
또한 ‘분해자’인 미생물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시체를 분해함으로써 유기물을 무기물화하는데, 이 무기물은 필수 원소로서 뿌리를 통해 녹색식물에게 다시 흡수된다. 이것은 완벽한 상호의존적 순환작용이다. 이곳에서 ‘소비자’인 인간은 ‘생산자’인 녹색 식물의 숙주에 붙어 사는 ‘기생자’에 불과할 뿐, 이성만을 믿고 자연을 지배하려는 ‘군림자’가 될 수는 없다. 또한 그렇게 상호의존적으로 순환하는 자연이라는 생명의 그물은, 연결망(network)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수많은 연결망들로 중첩되어 있다. 마치 인드라의 그물과도 같은 이러한 연결망 속에서는 개별 부분들 간에 정확한 경계선을 긋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분들을 고립된 실체로 파악하려는 것(自性的 分別)은 인간 주관의 투영일 뿐, 실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諸法實相)을 보는 것은 아니다.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 緣起)을 원리로 하는 그 곳에서는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보다 더 근본적이지 않으며, 어느 한 부분도 중심임을 주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연기론적 혹은 생태학적 상호의존성을 우주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자는, 피조물의 창조자를 주인으로 신앙하는 신중심주의도, 합리주의와 산업주의에 의거해 자연을 지배하는 근대적 인간중심주의도, 인위적 조작을 배제하고 그저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자고만 하는 환경론적 자연중심주의도, 인간에 대해서만 가치가 있는 자연이 인간의 힘을 통해서만 보호될 수 있다고 하는 환경론적 인간중심주의도 내세우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란, 서로 간에 중심성을 주장하지 않는 공(空)한 관계, 그래서 중심이 없기에 지배도 종속도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계 속에서만 인간의 비인간화와 자연의 비자연화를 극복하고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자연을 자연답게 할 수 있을 것이다.<끝>
김종욱
동국대 불교학과 및 서울대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현재 서울대 철학사상 연구소 특별연구원. 서울대 강사. 논문으로 <하이데거에서 존재론적 차이와 형이상학의 문제>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하이데거와 철학자들><하이데거와 근대성>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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