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의 대승관법
국내 관법 수행자 가운데 손꼽을 정도로 깊은 경지를 체험한 그가 수행에만 매진하는 것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커다란 숙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원효 스님의 대승관법 복원이다. 한국 위빠사나의 원형을 원효사상에서 찾는 김 법사는 “남방 위빠사나가 아비달마의 아공법유(我空法有)와 업감연기에 근거해 일신의 열반에 머무는데 반해, 원효 스님의 대승관법은 일심의 진여에 의지해 너와 내가 둘이 아닌 금강심지(金剛心地)에 머물면서 동체대비의 보살행을 지향하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토굴에서 참외를 나눠 먹으며, 원효 스님의 대승관법에 대해 공부해 보았다.
-원효 스님을 한국 위빠사나의 시조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원효(元曉, 617~686) 스님은 7세기에 이미 한, 중, 일 대승불교권에서 가장 완벽하게 붓다의 위빠사나를 정립한 분입니다. 중국, 일본의 선사들은 일반적으로 대승 경전에만 의존하므로 자칫하면 근본 경전인 아함경의 핵심 수행법인 12연기의 정밀성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원효 스님은 당대에 이미 <금강삼매경론>의 무상관(無常觀, 12연기관)과 무생관(無生觀, 오온유식관)으로 12연기와 5온 관찰법을 전승했습니다.
무상관에서는 모든 현상은 연기로 일어나서 변하므로 현상세계에서 번뇌를 없애기 위해 12연기를 관하고, 무생관에서는 주관 세계인 분별하는 생멸의식을 없애기 위해 오온인 유식(唯識)을 관합니다. 원효스님은 용수와 천태지자 스님의 삼관(三觀 : 假觀, 空觀, 中觀) 수행도 포함하면서 무상관, 무생관의 자기 관찰에서 더 나아가 올바른 사유 분별, 깊은 본성에 대한 직관, 외적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관, 객관적인 사물을 찾는 관을 내세웠습니다.“
-원효 스님의 대승 관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원효 스님은 <기신론해동소>에서 4념처(신, 수, 심, 법)관을 설명하면서 진여관과 법상관, 자비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여관(眞如觀)은 진여의 반야관인 시각(始覺)에 의지하여, 안으로는 본래의 마음을 찾고 바깥으로는 일체 경계에 물들지 않아 진여삼매에 드는 것입니다. 사념처 위빠사나의 한 형태인 법상관(法相觀)은 무상관(無常觀), 고관(苦觀), 무아관(無我觀), 부정관(不淨觀)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과 부처, 중생과 내가 둘이 아닌 원효의 대승 관법입니다. 물론 원효스님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아마티불’ 염불도 방편으로 제시했습니다.”
-원효 스님의 관법은 어떤 의미에서 대승적입니까?
“원효 스님은 무상관과 무생관을 닦아서 일미관행(一味觀行)에 들게 했습니다. 그의 일미는 모든 법은 일심이요, 일체 중생은 본각이므로 현실과 열반이 하나이고, 나와 중생이 하나이며,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sana), 자비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경지에 도달하면 저절로 자비관이 우러나오고, 일념으로 항상 육바라밀을 실천하게 됩니다.”
- 북방의 간화선과 남방 위빠사나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아는 이들이 많습니다. 두 수행법의 접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남방에서는 무아(無我) 위주의 현상관(隨觀) 중심이고 북방에서는 공(空)을 중심으로 하는 불성의 본성관(直觀) 위주입니다. 남방에서는 오온 구성 요소의 변화 속에서 무상, 고, 무아의 현상을 관찰했고, 북방에서는 오온과 열반을 하나로 보아 본성을 직관(회광반조)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입니다. 현상과 본체는 불꽃과 빛처럼 둘이면서 하나이기 때문에, 그 중 하나만 철저히 꿰뚫어 보면, 본래 있는 참나인 열반은 발견되는 것입니다.”
-간화선과 관법을 같이 닦을 수가 있습니까?
“화두로 깨쳤다면 그때는 자동적으로 반야관이 완성됩니다. 깨달은 아라한이나 붓다는 한결같이 자비와 반야관을 실천했습니다. 그것이 금강경에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基)’이라 했고, 상응부 경전에서는 보는 것, 듣는 것, 어떠한 생각에서 느낌(受), 인식(想 ), 생각(思)의 시작과 중간, 끝을 알아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불교의 모든 수행은 정과 혜를 균형 시키고 완성하여 자비를 실천하는 작업이므로 자신의 근기나 개성에 맞춰 하되, 항상 경전과 선지식의 지도하에 배우는 게 좋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위빠사나를 육조스님 이전의 여래선으로 보면 됩니까?
“예, 그렇습니다. 여래선이란 말은 <능가경>에 있는 말로 규봉종밀 선사가 선을 외도선, 범부선, 소승선, 대승선, 최상승선으로 나눈 후에 최상승선을 여래선(如來淸淨禪)이라 했는데, 이는 달마대사가 전한 선의 정통선을 주장하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붓다는 위빠사나 수행법을 발견했고, 이 방법으로 정각을 이루셨습니다. 이 선법이 대승불교에서 발전하여 달마를 통해 중국에 전해진 것입니다.”
-지(사마타) 관(위빠사나)의 원리를 알고 수행하는 것이 중요한 듯 한데요.
“위빠사나 수행은 단계별로 향상되는 것이 스스로 검증되며 <중부경>에 의하면 어떤 수행법이든지 일단 완전히 깨닫고 나면 자동적으로 위빠사나가 수행된다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위빠사나는 깨달음, 지혜라는 말과 동의어로, 그 말 자체에 수행의 원리가 들어있습니다. 호흡, 행선, 염불, 화두 등 어떤 수행법도 팔정도(계, 정, 혜)에 근거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없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위빠사나에 포함되고, 팔정도가 없으면 정신 통일인 사마타 수행에 머물게 됩니다.”
-한국 선 수행풍토를 평하신다면?
“한국에서는 공도리(空道理) 정도 알고는 깨쳤다고 오도송을 읊고 법거량을 하는데, 더 세밀한 관(觀)과 더불어 진여자성을 운용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참선을 많이 하고도 인격변화가 없는 것은 반성 부족과 수행 체계상의 문제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생각, 말, 행동 이전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으므로 언행이 일치되어 인격적 변화가 오게 되며, 현재 하는 일과 마음이 온전히 일치되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됩니다. 지도해 줄 선지식이 많지 않고 견성이후 보임법(保任法)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정각을 이룬 이후에도 위빠사나를 하셨습니다.
영명연수 선사는 <종경록>에서 깨치고 나서도 마음의 생주이멸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관법을 무시하면 간화선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아함경>의 10가지 결박, <능엄경>의 50가지 번뇌 등을 근거로 한 점검법도 정립해야 합니다.”
-수행체게에 문제점이 있다면 보완할 방안도 있을 텐데요?
“중국의 선종, 특히 후대의 간화선에서는 너무 공관(空觀)에 치우치면서 유식(唯識)을 경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유식관법에서 보완해야 합니다. 대승의 유식관법이 거의 단절되었으므로 붓다의 12연기관을 근간으로 남방 위빠사나에서 수행법을 보완하든가, 천태지자 대사의 지관법(止觀法)이나 초기 선종 선사들의 수행법, 원효 <대승기신론소>의 자성(自性) 진여관, <금강삼매경론>의 무생관(無生觀, 12연기관) 등에서 수행체계를 복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자비관과 원효의 6바라밀 수행은 깨달음만 강조하는 한국 선수행의 보완점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간화선-위빠사는 어떻게 병립이 가능할까요?
“한국은 어느 나라 보다 근본불교의 전망이 높은 나라입니다. 원효 스님이 천태지자 대사의 5시교판을 비판하며 아함경 등의 소승경전을 외면하지 않았듯이 통불교의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조화롭게 발전하리라고 봅니다. 앞으로 기법 보다는 대승경전에 입각한 화두선, 관법 수행이 체계화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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