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10. 왜 명상이 잘 되지 않을까 ㅡ임 승택교수

수선님 2018. 11. 4. 12:39

10. 왜 명상이 잘 되지 않을까
 
2010년 01월 05일 (화) 23:07:12 임승택 anusati@hanmail.net

   마음가짐의 중요성

왜 명상이 잘 되지 않을까. 명상을 해본 사람들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앞선 글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명상의 본래 목적은 스스로를 편히 하는 데에 있다.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혀 본연의 삶을 회복하자는 취지이다. 사실 명상이란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는 과정에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어렵지 않은 것이어야 하고 흐르는 물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누구든지 열린 마음으로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명상이라는 흐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점을 분명히 이해했다면 명상의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명상이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것임에 분명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필자는 부적절한 마음가짐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앞선 글에서 필자는 몇 가지 명상의 테크닉을 소개한 적이 있다. 예컨대 주시하는 현상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명칭을 붙이는 방법이라든가, 그러한 명칭을 떼고서 관찰의 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따위가 그것이다. 그러한 기법들에 숙달됨으로써 우리는 명상의 진전을 이루어 낼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아무리 훌륭한 방법을 숙지하고 있더라도 명상의 기본 취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명상이란 무언가를 얻으려고 애쓰거나 피하려고 발버둥치는 것과 본래적으로 무관하다.

이러한 사실을 망각할 때 갖가지 명상 테크닉은 명상 자체를 어렵고 피곤한 일거리로 만들 우려가 있다. 숨을 마실 때 마신다고 알아차리고 내쉴 때 내쉰다고 알아차리는 입출식념(入出息念, ānāpānasati)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명상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 수행자는 망상을 피우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하여 기를 써가며 호흡에 대해 명칭을 붙이려고 할 것이다. ‘마시고, 마시고, 마시고...  내쉬고, 내쉬고, 내쉬고...  ’라고. 물론 이러한 방법이 얼마간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며, 또한 그렇게 해서 거친 상념들을 제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현상은 억압할수록 반발이 커지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억지로 가라앉힌 상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맹렬한 기세로 고개를 쳐든다. 심지어는 ‘마시고,... 내쉬고,... ’를 되뇌는 그 순간에도 요동을 치며 들썩거리기 일쑤다.

망상이 그치지 않을 때에는 그러한 망상의 상태를 받아들여야 한다. 망상 자체를 자연스럽게 허용하면서 지긋이 주시하다 보면 어느덧 누그러져 있음을 알게 된다. “잘 놀다가도 멍석을 펴 주면 그친다.”라는 속담을 여기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망상 자체를 대상화하거나 조작하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얻게 되는 결과이다. 이렇듯 명상이 잘 되지 않을 경우에는 억지 명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어쭙잖은 기교로 명상 자체를 부담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보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적절한 마음가짐으로 명상의 본래 취지를 잘 실천하고 있는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명상이란 매우 지루하고 곤혹스러운 일거리가 되고 만다.

명상의 실천에서는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 무언가를 없애려는 마음 따위에 매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마음들은 괴로움의 원인(苦集諦)으로 귀착되기 쉬우며, 있음에 대한 갈망(有愛, bhava-taṅhā) 혹은 있지 않음에 대한 갈망(非有愛, vibhava-taṅhā)의 변종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명상 수행자는 일체의 바람이나 근심 따위를 접어놓고서 오로지 현재에 충실하고자 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보고 듣고 맡고 지각하는 현상들에 관련하여, 보았을 때에는 보인 것만 있어야 하고, 들었을 때에는 들린 것만 있어야 하고, 맡았을 때에는 맡은 것만 있어야 하고, 지각했을 때에는 지각한 것만 있어야 한다(SN. IV. 73쪽).”

   명상의 부작용

명상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매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몸과 마음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관조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장기간 집중적인 명상을 하다가 보면 그와 반대되는 상황에 부딪히곤 한다. 몰입된 의식 상태가 되어 현실 감각을 놓칠 수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감정 따위에 매우 민감해지기도 한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에 격한 감정이 생겨날 수도 있고, 신체의 특정 부위에 예리한 느낌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한 상태는 더욱 진전된 명상을 위한 과정일 수 있으며, 그간의 명상이 헛되지 않았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그러한 체험들에 대해서는 바른 이해와 함께 적절한 대처가 필수적이다.

안도 오사무(安藤 治)는 통상적인 의식 상태에서는 체험할 수 없고 집중적인 명상에서만 경험하는 비일상적인 심리 상태를 다음의 넷으로 정리한다. 감정의 폭발, 지각의 변용, 유사 열반(僞涅槃), 선병(禪病) 등이 그것이다(김재성 옮김, 安藤 治 지음, 『명상의 정신의학』, 2009). 이들은 명상의 길을 걷는 모든 수행자들에게 잠복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수년에 걸쳐 지속될 수도 있다. 이러한 체험들은 매우 강한 충격으로 느껴질 수 있으며 심지어는 병리적인 상태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노련한 스승의 지도 아래에 있을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것을 대처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그때그때의 감정에 휘둘리게 될 경우, 완전한 정신병적 상태가 되어 약물치료에 의존해야 하거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꾸려나가기 힘든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감정의 폭발이란 강렬한 감정적․신체적 에너지가 갑자기 끓어오르는 상태를 가리킨다. 예컨대 신체의 각 부분에 격심한 통증이 발생하거나, 급속도로 긴장이 풀어져 맥이 빠져버리거나, 엄청난 희열을 동반하면서 신체의 각 부위가 떨리고 요동을 치는 경우가 그것이다. 지각의 변용이란 신체의 일부가 매우 커진 것처럼 느껴지거나, 돌처럼 뻣뻣해지고 무거워지는 경우를 말한다. 혹은 갑자기 강한 절망감이나 슬픔․공포 따위가 엄습해 오기도 하고,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강열한 빛이나 이미지에 압도되어 컨트롤이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유사 열반이란 강렬한 해방감의 체험 속에서 그러한 상태를 명상의 최종 목표로 잘 못 파악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특히 그러한 체험은 지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그릇된 신념을 자극하는 까닭에 떨치기 힘든 강한 집착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의 선병은 앞서의 세 가지가 굳어져 고질화된 병증으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이것은 명상에서 야기되는 정신적․신체적 부조화를 총괄적으로 일컫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비일상적인 심리 상태를 접하게 되면, 초보 수행자들은 강하게 저항하거나 혹은 끈질기게 집착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의연한 마음가짐으로 명상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누구든지 그와 같은 비일상적인 상태를 접하게 되면 흥분이나 긴장을 하기 마련이다. 필자는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잊지 말아야 할 기본 수칙으로서 앞서 언급했던 명상의 취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즉 명상이란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는 과정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발생한 정서적 상태들에 대해서는 차분하게 수용하면서 지긋이 응시해 주어야 한다. 흥분이나 긴장이 지나치면 우선 그것에 대해 초점을 모아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차츰 마음의 동요도 가라앉고 문제시되었던 상황도 해소된다. 그러한 연후에 원래의 명상 방법으로 되돌아가면 된다.

이러한 과정은 초기불교 당시부터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다음 문구가 그것이다. “사리뿟따는 보름 동안에 걸쳐 ‘현상에 대한 순차적인 위빠사나’를 하였다....   [그는] 기쁨과 즐거움을 지닌 첫 번째 선정(初禪)에 도달하여 머물렀다. 첫 번째 선정에는 생각(尋)․지속적인 생각(伺)․기쁨(喜)․즐거움(樂)․하나된 마음(心一境性)․접촉(觸)․느낌(受)․지각(想)․의도(捨)․마음(心)․의욕(欲)․확신(勝解)․정진(精進)․마음지킴(念)․평정(捨)․마음냄(作意) 등의 현상이 있었다. 그들 현상이 그에게 순차적으로 분명해졌다. 그들 현상이 그에게 감지되는 것(viditā)으로서 일어났고, 감지되는 것으로서 유지되었고, 감지되는 것으로서 사라졌다. 그는 이와 같이 알아차렸다. ‘실로 그들 현상은 나에게 있지 않다가 발생한 것으로서 발생한 후에는 사라졌다.’라고. 그는 그들 현상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묶이지 않고, 벗어난 상태로, 구속되지 않은 상태로,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서 수행하였다(MN. III. 25쪽).”

인용된 경문은 앞에서 언급했던 비일상적인 심리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즉 선정(禪, jhāna)이라는 집중된 상태에서 접하게 되는 다양한 감정과 정서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된 생각․접촉․느낌․지각 따위는 감정의 폭발이라든가 지각의 변용에 해당하는 체험들을 포섭한다고 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수동형 문구를 사용하여 그러한 상태가 저절로 감지(感知)된다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즉 통증(受)이나 희열(喜) 따위를 일부러 발생시키거나 사라지게 해야 할 대상으로 언급하지 않고 단지 감지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경전에서는 그들 각각에 대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대처해야 하는가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집착하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명상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숙달함으로써 우리는 경험하는 일체의 현상들에 대해 한걸음 물러나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지니게 될 것이다. 

한편 『니까야』의 다른 구절에서는 이러한 체험이 진리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면서]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을 얻게 되었을 때, 느낌(受)이 감지되는 것으로서 일어나고, 감지되는 것으로서 유지되고, 감지되는 것으로서 사라진다....  지각(想),...  생각(尋) [따위의 현상들이] 감지되는 것으로서 일어나고, 감지되는 것으로서 유지되고, 감지되는 것으로서 사라진다...  ‘무명의 일어남으로부터 느낌의 일어남이 있다.’고 하는 ‘조건에 의한 일어남(paccayasamudaya)’의 의미로 느낌의 일어남이 감지된다....   ‘무명의 소멸로부터 느낌의 소멸이 있다.’라고 하는 조건에 의한 소멸(paccayanirodha)의 의미로 느낌의 사라짐이 감지된다...  (Ps. I. 78-179쪽; DN. II. 223쪽 cf. 등).”

명상의 목적이 오로지 고요한 상태를 얻는 데에 있다면, 여기에서 언급한 느낌이라든가 생각 따위는 방해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들은 깊은 삼매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으로 번뇌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생각(尋)은 ‘두 번째 선정(第二禪)’ 이상의 상태에서 그치며, 느낌(受)이나 지각(想) 따위도 ‘지각과 느낌이 소멸한 선정(想受滅定)’에 이르면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임승택, 「선정의 문제에 대한 고찰」, 2002). 따라서 이들 현상은 깊어가는 삼매와 더불어 일어남과 사라짐을 반복하면서 고갈되어 가는 과도적인 것이다. 그러나 확인할 수 있듯이 이들은 ‘조건에 의한 일어남과 사라짐’을 감지하기 위한 매개가 된다. 즉 교리적 가르침을 깨달아 내면화 하는 수단이 된다. 

이상과 같이 명상의 여정에서 발생하는 비일상적인 정서와 감정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현상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통찰의 대상이 되며 회피되거나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바로 이점이 분명해 질 때 명상의 부작용에 관한 우려가 불식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집중적인 명상에서 경험하는 갖가지 정서적 요인들은 오히려 성숙된 명상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명상을 위험한 것으로 만드는 실제 원인은 특정한 심리 체험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체험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집착하는 따위의 그릇된 태도일 것이다.

   명상을 타락시키는 요인들

최근 서구권을 중심으로 다양한 명상 프로그램들이 개발되고 있다. 특히 마음지킴(念, sati)에 기반을 둔 불교 명상은 여러 방식으로 심리치료에 적용되고 있다(임승택,  「사띠 개념의 현대적 해석 양상에 대한 재검토」, 2009). 필자는 명상의 현대화라는 측면에서 그러한 시도들에 대해 일단의 지지를 보낸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 명상의 본래 의의가 훼손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려감을 갖는다. 전통적인 불교 명상은 팔정도(八正道)에 입각한 것으로 계(戒)․정(定)․혜(慧)를 망라하는 전인적인 성숙의 과정을 포함한다. 그러나 최근 유행하는 명상 프로그램들은 건강이라든가 병증의 문제에 치중된 경향을 보이며, 일부 기법들은 공공연히 영리적인 목적을 위해 보급되기도 한다. 이들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검증과 비판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명상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스스로를 평안하고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며 잠재된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명상을 할수록 스스로에 대한 존엄감이 약화되는 경우가 있다. 무언가에 구속되어 간다는 느낌이 더해지고 자신의 가능성을 제약받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럴 경우에는 현재 실천하고 있는 명상을 재고해 보아야 한다. 명상은 괴로움을 덜어내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며 성숙한 삶과 행복의 증진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명상을 과감히 거부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왔다고 해서, ‘그렇더라.’고 경전에 써 있다고 해서,...  혹은 유력한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이 분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받아들여 행하지 말라.](AN. I. 189쪽)”

우리는 특정한 명상 가르침이 과연 유용한지를 꼼꼼히 따져야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가르침은 유익한 것이고, 이러한 가르침은 비난받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면 이익과 행복이 있게 된다.’라고 분명히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AN. I. 190).” 그렇다면 이러한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과연 무엇을 근거로 올바른 명상과 사이비 명상을 구분해 낼 수 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필자는 잭 콘필드(Jack Kornfield)가 언급했던 네 가지 악습을 소개한다. 권능의 남용, 돈의 오용, 성적 비행,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 등이 그것이다(이현철 옮김, 『마음의 숲을 거닐다』, 2006). 이들 넷은 매우 뿌리가 깊은 것으로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순수한 공동체들을 문란케 하고 무너뜨리는 역할을 해왔다. 현재 실천하고 있는 명상에서 이러한 요인들이 감지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타락의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권능의 남용이란 명상을 익히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모든 권한이 특정 개인에게 집중될 때 발생한다. 명상의 지도자는 오랜 동안의 체험을 바탕으로 수행의 여정에서 예견되는 난관이 무엇이고 그 해결책은 어떠한지에 대해 알고 있다. 초보 수행자는 그들의 도움을 통해 극복하기 힘든 여러 심리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지속적인 명상을 행해 나갈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기술적인 도움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을 경우에 발생한다. 탁월한 역량을 지닌 스승은 제자들로 하여금 무한한 존경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스승의 덕성을 의심하지 않는 열광적인 제자들은 스승 역시 인간에 불과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망각한다. 그리하여 지고의 존재로 이상화하여 자신의 인생 전체를 통솔해 주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해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암묵적인 정신적 독재 체제가 구축된다.

권능 남용에 희생되는 당사자는 제자와 스승 모두이다. 광신적인 제자들은 스승이 하는 모든 요구를 절대적인 명령으로 받들어 추종하게 된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스승은 자신의 능력 범위를 넘어서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불행한 방향으로 내몰게 된다. 이러한 권능 남용의 징후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특정한 기법에 지나치게 매달리게 되는 경우 일단 권능 남용에 희생되지 않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매사에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서 스승만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지 못한 채 항상 제자의 역할로만 남아 있는 경우도 그러하다. 특히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들을 거리낌 없이 하게 되는 경우라면 권능 남용에 깊숙이 희생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돈의 오용 또한 명상을 타락시키는 주요 원인이다. 명상이라는 고매한 가르침을 처음 접한 사람은 경이로운 마음으로 그것을 대하게 된다. 마치 인생의 전체가 변화된 듯한 느낌을 갖기도 하고 건강이라든가 인간관계 등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진전을 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자발적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바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명상을 주변 사람들과 후대에 전하는 데에 유용하게 소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엄청난 돈이 쌓이면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크다. 그간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돈 때문에 타락해 간 수많은 종교 공동체를 목격한다. 특히 단순한 생활을 필요로 하는 명상에서 돈은 방해물이 되기 쉽다. 따라서 사심 없는 태도와 투명한 관리가 요구된다.

명상을 배우는 데에 지나친 경제적 부담이 따른다면 일단 의심해 보아야 한다. 자신이 지불하는 대가가 어떤 용도로 활용되는지 알 수 없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그렇게 해서 모아진 돈은 대부분 오용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그러한 프로그램을 보급하는 사람들은 명상 자체보다는 돈에 목적을 두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로부터 올바른 명상을 배우기란 불가능하다.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명상 프로그램은 일종의 상품이다. 시장에 출하된 상품들은 구매자를 유혹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포장된다. 그것을 취급하는 전문 상인들은 선전용 프로그램과 주력 상품을 별도로 관리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그리하여 선전용 프로그램에 충분히 현혹된 구매자들에 한해 엄청난 대가의 주력 상품을 내놓는다. 유감스럽게도 최근 국내에서 개발되어 급속도로 보급되어 나가는 몇몇 명상 프로그램에서 이러한 혐의가 발견된다. 사실 명상의 가르침을 막대한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했던 사례는 동․서양을 통해 부지기수이다.

성적 비행 역시 명상을 타락시키는 해묵은 요인이다. 일부 타락한 스승들은 자신의 위치를 악용하여 은밀한 성적 행위를 일삼는다. 그들은 특별한 가르침을 명목으로 비밀스러운 성적 접촉을 요구한다. 심지어는 공개적인 석상에서까지 성적 친밀함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근세 한국불교에서 명망이 높았던 한 스승은 “여인들의 무릎을 베개로 삼아 잠을 청했다.”라고 전해진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회자되는 것 자체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초기불교의 사례로 볼 때 명상의 실천이 반드시 독신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재가자들 중에도 뛰어난 명상의 성취를 이룬 분들이 종종 언급되기 때문이다(AN. I. 26쪽; Ps. I. 174쪽 등). 그러나 어떠한 경우라도 성적 행위를 찬양하거나 부추긴 일은 없었다. 성적 비행은 수행자를 불안과 회한의 나락으로 이끌 뿐이다. 그것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간다. 현재 배우는 명상에서 그것을 조장하는 무언가가 발견된다면 지체 없이 그만 두거나 떠나야 한다.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은 현실적으로 비교적 쉽게 간파하여 대처할 수 있다. 상식적인 맥락에서 우리는 이러한 습관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역사를 통해 음주를 즐겼다고 전해지는 인물들은 적지 않다. 일부 힌두교 문헌과 수행자들 사이에는 환각제의 사용이 공공연하게 거론되기도 한다.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은 그 자체로도 문제가 크지만, 결연한 수행 의지를 말살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경계해야 한다. 명상을 하는 이유는 불건전한 사고와 정서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알코올이나 마약은 우리를 그들 자체와 하나가 되게 만든다. 그러한 상태에서 명상의 진전을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된 사람은 권능 남용과 성적 비행까지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존경받는 명상가들은 자신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왔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명상가라고 할 수 있는 붓다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의 위대함은 그가 행했다고 전해지는 불가사의한 신통력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고결함은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괴로움의 현실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겸허히 수용했다는 데에 있다. 또한 그는 인간적인 나약함이 정신적 진보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인식했다. 그리하여 전 인생을 통해 허물없는 바른 삶을 살고자 끝없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그를 진정한 스승으로 간주할 수 있다. 명상이 잘 되지 않을 때에는 스스로의 실천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명상의 취지를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언가 허황된 생각에 이끌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 냉정히 자문해 보아야 한다. 바로 거기에서 붓다의 삶은 바른 명상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해주는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열린선원
글쓴이 : 온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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