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혜조스님] 왜 수행을 해야하는가?

수선님 2018. 11. 4. 12:42
 

1. 수행은 왜 해야 하는가


가. 첫 번째로, 삶의 성장을 향한 변환을 위하여

   

현대의 과학 산업문명은 분명히 획기적인 진보를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도가 가히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매우 편리한 생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의 삶이 그러한 편리함으로 인하여 그전보다 더 편안하고 평온하며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다라는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것입니다.

생활의 주변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수많은 강요적인 제안의 정보들 ・ 정신없이 쏟아내는 생활 도구들의 새로운 모델들 ・ 일확천금을 독려하는 무조건의 이윤 추구 ・ 총체를 외면하고 편견을 확대하여 절대화시킨 과포장된 광고들 ・ 성문화의 무절제한 상품화와 무방비적인 노출 ・ 오락 속의 폭력성 문화의 확대 ・ 진정한 가치 추구을 위한 교육의 역활 부재 ・ 학교붕괴 ・ 범죄 동기에 있어서 생명 경시 의식  ・ 청소년 범죄의 심각한 증가 ・ 환경문제의 심각성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문제들로 인하여 이 사회는 진리 ・ 정의 ・ 윤리 ・ 행복 등의 가치가 실로 뒤죽박죽된 혼돈의 경연장인 것처럼 보여집니다.

이처럼 오늘날 이 세상이 너무나 뒤죽박죽되어 혼란스럽고,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화되고 있어서 가치에 대한 사고분별과 판단을 포기한 것은 아닌가요? 그래서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위 대상들의 성화와 사회의 혼돈된 도도한 흐름에 휩쓸려 피동적으로, 단지 그냥 「살아지고」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 속에서 우리는 이미 삶의 도덕 ・ 정의 ・ 평등 ・ 참가치 등의 참다운 의미에 대한 자기 반성과 성찰을 외면한 채 오로지 「나」만의 순간적 즐김을 위한 삶으로 정신없이 내닫고 있는 사회 풍조에 자기도 모르게 동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요?

공익과 윤리를 외면한 무조건적인 이윤의 획득과 일확천금을 노리는 삶의 태도는 실로 자신의 내면의 청정성과 인간성을 황폐하게 만들어 훈훈한 인간적 감성과 정서가 메말라 버린 삶 속에 자신을 황량하게 나뒹굴게 만듭니다. 설사 어찌 어찌하여 엄청난 부를 얻었다 할지라도 성실과 근면의 아름다움이 퇴색하고 연민과 더불어 사는 너그러움의 지혜가 사라져 버린 자리에 자만과 교만이 자기도 모르게 내부에 자리해, 뭇 사람들에게 눈살 찌푸려지는 존재로 전락해버린 예들을 흔히 보고 있습니다.

또한 감각적 쾌락과 오락의 탐닉은 일시적으로는 말초 감각을 자극시키는 쾌감을 가져다줄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것들은 들뜸과 흥분의 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평화와 평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조건이 끝나면 허망함이 몰려와, 자신은 그전보다 더 깊은 고독과 공허로 휘말리게 되어 더욱 더 그것에 집착하게 되는 악순환을 불러올 뿐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문제를 만드는 요인으로 이와 같이 대상으로 말미암은 것들도 물론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각자 내면의 성향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반적인 삶의 모습은 ‘도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서 ‘도피’라고 말한 것은 ‘문제’로부터의 탈출 ・ 외면 ・ 회피를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할 때 자신의 내면에서 항상 어떤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 생활의 유용함을 위한 것이 전혀 아닌 어떤 물건을 갖고 싶은 욕망

○ 습관적으로 기어오르는 성적 욕망

○ 부도덕한 성적인 충동

○ 나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 자에 대한 미워하는 마음

○ 나의 기호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한 짜증스러움

○ 같은 분위기의 반복에서 오는 지루함

○ 자극이 없는 일상의 따분함

○ 남들이 이루고 것들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심

○ 남들에 쫓아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초조와 불안감

 

등등의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문제점들이 자신의 내부에서 거의 항상 일어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이 그런 것들에 대한 절제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사고를 가치로 하는 것보다는, 이와 같은 문제들이 일어났을 때 그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서 그 문제로부터 일시적인 ‘도피’의 양상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어디까지나 문제로부터 일시적으로 피해있는 것이지, 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해답은 분명히 아닙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문제에 대한 그 본질적인 해답에 접근해 보려는 적극적인 의도와 실천도 없이 삶이 그냥 그냥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차라리 경이롭습니다.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서만 삶의 질이 향상되어 성숙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세속의 삶, 다시 말하면 일반적인 세상살이의 삶에 대한 습관적 태도를 성숙한 삶으로부터 도피적이고, 소극적이고, 외면하는 삶이라 말한다면, ‘수행’이란 삶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맞이하여 그 본질적인 내면의 핵심을 파헤쳐 명쾌한 해답을 찾아내는 삶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삶의 문제로부터 도망가거나 외면하거나 어떻게 되겠지하며 막연하게 기다리지 않고, 오히려 직접 문제 안으로 들어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타파하여 마침내는 자유롭고 평온 속에서 삶을 사는 삶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도피적인 삶이 아니라 적극적인 삶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 안에서 지루하면 텔레비전을 보거나, 꼭 필요하지도 않은 책을 뒤적거리거나, 전화통을 붙잡고 여러 친구들에게 연락하거나, 인터넷에 들어가 여기저기 기웃거리거나 하며 어떤 흥밋거리를 찾음으로서 그 지루함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현실은 ‘지금 내가 지루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자루하다고 느끼는 것의 본질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그 현실을 가장 현실적으로 해결하는 우선순위가 될 것입니다. 원인을 알면 해답은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그 문제의 원인에서 도망하여 문제의 바깥에서 임시방편의 다른 사건을 만듭니다. 그런데 그러한 태도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는커녕  문제를 파묻어 버리고 오히려 다른 문젯거리를 하나 더 만들고 맙니다. ‘집착’이라는 어마어마한 문젯거리를 말입니다.


여하튼 오늘날 우리 삶의 상황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내면 깊숙한 바램은 정말 가치 있는, 의미로 충만된, 행복한 이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실로 가치있고, 의미로 충만되며, 참다운 행복이 과연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우선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알고 이해하기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문제가가 발생하면 오히려 자신들로부터 달아나 자기 자신을 잊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문젯거리가 적라나하게 드러나려 하면 그들은 거기에서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 이와 같이 대개의 경우, 삶에 있어서의 자신의 문젯거리를 진정으로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것을 해낼 수 있다고도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근래에 우리 주변에 기공 ・ 태극권 ・ 단전호흡 ・ 요가 ・ 아바타 ・ 참선 등의 육체 내지는 정신 수련이 건강유지와 불치병의 치료를 목적으로 다양한 양상으로 소개 ・ 제안 ・ 권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신 수련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대부분은 지적 호기심 속에서 신비한 초월적 효과 내지는 경계를 막연하게 기대할 뿐,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이해하고 문제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그래서 평온과 평화스러운 삶으로의 전환을 진정으로 갈구하는 삶의 자세로 다가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서 물러남이 없이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은 영원히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재 자기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실제로 삶에 있어서 진정한 성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삶에 있어서 진정한 성장은 변환을 전제로 가능합니다. 일시적인 평온과 삼매, 고요함, 축복은 고무적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삶의 분명한 변환을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변환이란 삶에 있어서 자신의 내면의 문제로부터 도피하는 의식에서 적극적인 해답 찾기에로 나아가려는 의식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과감하게 변환되어야 합니다. 낡은 허물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변환되어 보다 깊디깊은 의미로 가득 찬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미 가득한 삶은 삶에 있어서 문제(고통)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변환 없이는 자기 자신의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변환된다는 것은 낡은 허물을 벗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낡은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항상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변환을 위해서는 정말 대단하고 진정한 용기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자기 변환을 위한 최선의 길은 자기 자신을 깊이 깊이 알고, 이해하는 공부가 우선입니다. 이 자신을 바로 알고 이해하는 공부가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행을 해야만 합니다.



나. 두 번째로, 대상에서 자기 자신으로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은 온통 컴퓨터를 위시한 전자기기와 유전공학 기술을 토대로 한 많은 생산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먼저, 유전공학(생명공학)은 유전자를 쪼개고, 제거하고, 덧붙이고, 고립시키거나 또는 아무 관계가 없는 유기체들 간에 유전자를 재결합시키거나 전이시키는 기술입니다. 지금 유전과학자들은 이 기술로 자연선택의 법칙을 거슬러 다양한 생물체들의 유전자들을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하여 인간은 다양한 식물과 동물을 만들어내는 지구상의 새로운 생명 창조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두뇌와 욕망으로 자연적인 진화 과을 멈추게 할 수 있게 되어 생명의 의미가 영원히 바뀌어 버릴지도 모르는 중요한 지점에 직면해 있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구조 속의 세포역학은 연기법을 바탕으로 상호인정과 상호의존을 생태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즉, 특정한 종(種)의 생존에 적합한 안전성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개별적인 유기체의 삶과 전체 생명권 사이에 끊임없는 협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기적 생명과 지질학적 환경 사이에 정교한 상호참여가 진화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으로서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전생명공학은 생물종의 자연적 관계성을 근간으로 하는 온전성을 교란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 태도는 자연의 지혜에 경멸을 표시함으로써 그 근원적인 정교함을 무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학은 다만 인간의 욕망과 시장가치를 위하여 다른 생물체들의 유전자 구조 자체를 변경시켜 놓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한편 우리 삶의 주위는 온통 컴퓨터를 이용한 전자기기로 구성되어 있는 지경입니다. 세계에서 한국이 개인 컴퓨터의 사용이 제일이며, 개인 무선 전화기 보유율도 제일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기구들로 인한 편리함이 우리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에서 오는 인간적인 훈훈함을 앗아가 버리고 있습니다. 성실과 근면을 포함한 노동의 즐거움을 물러나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전자기기들은 우리 생활 주변을 전자파로 포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전자파의 담장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전자파가 물리적인 측면에서 어떤 어마어마한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간헐적으로 그 증후군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데 더욱 문제가 심각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컴퓨터로 인하여, 이제 인간들의 존재의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전환될 전망인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는 인간의 존재의미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찾아졌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간성의 향기가 삶의 정서와 맛을 담당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란 엄청난 창조물이 등장한 후로는 인간의 존재의미는 「접속」에서 찾아지며, 필요한 것은 정보일 뿐이며 그것은 컴퓨터가 담당해 주므로 인간들은 다른 인간과 인간적 관계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어 인간성이 황량해져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정보는 다 노출되어 있으므로 청소년들에게 교육적, 윤리적으로 차단되어야 할 정보도 제도적으로 혹은 테크닉적으로 제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 가히 상상하지 못할 도덕 붕괴, 철학 붕괴, 학교붕괴의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업하는 자들은 이러한 현대 과학의 산업기술에 의한 생산물들이 인간들에게 심성적으로, 정서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편리와 성적 자극과 쾌락감의 극대만을 내세우며 이윤 창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거리는 오직 생산성 향상과 이윤의 극대화에 따른 끝없는 기업성장일 뿐입니다. 더욱이 경제면에서 우리는 세계화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경쟁력을 기르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세뇌되어 있습니다. 구조조정이란 결국 돈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 버려야 하는 것으로 분위기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상품성을 높여야 한다는 다급한 현실의 필요는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적, 도덕적 노력을 모두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류의 지식과 지혜의 근거 역할을 해온 대학에서 기초학문이 이윤 창출의 불리함의 이유로 폐과(閉科)될 위기를 맞고 있는 가공스러운 현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의식구조의 밑에서 이미 만연되어 있는 심각한 삶의 문제들로 우리는 질식상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각한 환경오염 ・ 독성제품의 난무 ・ 생태계의 파괴 ・ 인간성의 상실 ・ 윤리의식의 말살 ・ 향락문화의 범람 ・ 어처구니 없는범죄의 동기들 ・ 청소년 범죄 ・ 건전한 성문화의 괴멸 등이 해결의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 있습니다. 게다가 컴퓨터의 무서운 발전 속도는 우리를 지적으로 항상 불안, 소외로 몰아가며, 정보가 삶의 양상을 좌우하면서 인간들 사이의 괴리감이 더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이러한 현대 산업문명이 향락을 부추기는 문화 현상을 쏟아 내놓는 현실 앞에서 우리들의 대개의 생활 모습은 자기의 삶의 흔적을 전혀 살펴봄이 없이 실로, 감각적 쾌락의 추구만을 의식의 바닥에 깔고 미친 듯이 앞으로만 내닫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제 잠시 멈춰 서서 지금 내가 어디를, 무엇을 향해 내닫고 있는가를 돌아볼 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삶의 목적과 방향상실이라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당혹스러워할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워왔으며, 지금도 삶의 한가운데서 기를 쓰고 정보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보란 것은 오직 대상에 대한 지식일 뿐이며 그러한 지식이 결코 인간의 근본적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동력인은 결코 아닙니다. 그 동안 인간들은 오직 대상들에만 매달려 왔는데, 대상에 대한 연구로 문명은 눈부시게 발전(?)했을지 몰라도 인간의 행복도는 전혀 향상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행복도에 있어서는 더욱 심각한 위기에 이르게 되어버렸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이제는 그 이유를 진실로 심각하게 사고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러한 현대 과학기술의 원리는 자연의 지혜 보다 인간 자신의 능력이 우월하다는 엄청난 교만심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기술개발을 통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쉴새없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기술의 자연 통제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성은 갈수록 황폐해지고 공허해지며, 인간생존의 토대가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 세계에서 지배자가 되려고 발버둥쳐왔지만, 이제 그가 딛고 선 세계는 썰렁한 인간성으로 가득한 무의미한 세계가 되어버리려 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면 과연 이렇게 되어버린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여태까지 인간이 행복을 너무나 대상에만 매달려 찾아왔다는데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장 근원적 것은 밖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즉 대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었던 것입니다. 행복감은 대상을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정신적인 만족감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면을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정신적으로 오염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정신적 오염이란 다름 아닌 인간 개개인의 탐욕 ・ 성냄 ・ 어리석음 입니다. 개인의 탐(탐욕) ・ 진(성냄) ・ 치(어리석음)와 관계된 문제들이 오늘날 인간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점을 위한 핵심 관점으로 생각되지 않는 한 상기의 문제를 해결할 어떠한 대책도 마련할 수 있다고 보는 의식은 탁상공론 내지는 더욱 사태를 심각하게만 만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대상에서 자기에로, 객체에서 주체로, 밖에서 안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들은 개인의 상황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들이 기분이 언짢고, 속이 상해서 화가 날 때 즉각 대상에 대해 반응하며 대상을 통해 그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항상 대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상대방이 잘못하거나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 대상 혹은 상대방이 바뀌어지기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나’로부터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객관적인 위치에서 ‘대상과 나’를 평등한 관계에서 관조해 보면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종종 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상만 관심사이지 ‘나’에 대한 것은 주도면밀하게 따져보지 않습니다.

나아가서, 설사 대상 혹은 상대방이 잘못이었거나 나쁘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도 대상과 상대의 시정을 요구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같이 따라와 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분노하여 자기 스스로를 상하게 합니다. 이것은 대상 혹은 상대로부터 손실을 얻어 화살을 하나 맞은 것이요,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여 또 하나의 화살을 맞은 셈이 됩니다. 최소한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을 수가 얼마든지 있는데도 자신에 대한 지혜가 전혀 없는 관계로 스스로 화살을 맞으러 들어가고 마는 형국입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사실은 분노의 원인이 대상이나 상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아니고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이 부분은 일반인이 지금 여기서 바로 이해하기에 는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간의 원리를 듣다보면 반드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작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정보의 바다라는  컴퓨터 어디를 크릭해 보아도 자신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관심을 객체인 대상에서 주체인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향해야 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관심을 자기 자신에 기울려 볼 때,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경악할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외부 대상과 접할 때 의심 없이 보이는 그대로 외부 대상이 실재한다고 판단하고 그것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고는 의지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실은 대상과 감각적인 접촉을 통해 지각활동을 일으킬 때 순수 지각이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순수지각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두어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관심조차 가져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만 자신의 「고정화된 관념」이라는 안경을 통하여 대상을 보고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안’에서 ‘자기의 밖’의 것을 볼뿐이라는 말입니다. 안과 밖, 주관과 객관의 대립과 격리가 일어나는 장(場)은 ‘의식’이라고 일컫는 장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 의식의 장에 있으면서 이미 오염된 지각표상, 관념 그리고 사량(思量)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인식하는 구조 속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의식의 장에서는 존재의 되어져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지 못합니다.

이 얼마나 끔찍스러운 일입니까? 그럼 이때까지 우리는 허구의 대상, 즉 허상을 보고 가치를 부여해 왔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행복의 근처에 혹은 너를 이해할 수 있는 근처에라도 서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한발 더 나아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 우리의 자유를 장해하는 대상들이 나타날 때, 대개의 경우는 환경이나 대상이 바뀌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어떤 조치를 하려고 해왔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은 편안함 ・ 자유 ・ 지고의 행복 같은 어떤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환경이나 대상을 바꾸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바뀌는 것이 쉽겠습니까? 내가 바뀌는 것이 당연히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것 즉, 자신에 대한 이해가 없으므로 자신을 전환시키는 마음을 시도해 본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만 환경과 대상 혹은 제 삼의 구원자에게로 막연한 기대를 하는 방법만으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의 관심을 대상을부터 ‘나’에게로 돌려야 합니다. ‘나’를 깊이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면  삶에 있어서 대부분의 문제들이 의외로 선선하게 해결됩니다. 요즘 미친 듯이 날뛰는 세상살이로부터 전혀 불안감을 갖지 않고 인생살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문제’들에 대해서 깊이 깊이 이해한다는 말이며 ‘나의 문제’들을 깊이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면 들끓는 마음을 평온으로 가라앉혀 평화스러운 마음속에서 삶을 대할 수 있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사랑입니다. 아니 삶의 전부라고해도 과언이 아닐는지 모릅니다.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이해하는 것이 선결 사항입니다. 왜냐하면 대상이란 ‘나’와의 관계를 떠나서 영원불변의 고정적인 절대적 존재로 실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이해하게 되면 실로, ‘너’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를 이해할 수 있다면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연민할 수 있습니다. 이해가 바탕이 되어있지 않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너’를 이해할 수 없는 자가 어떻게 ‘너’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요즘 우리들이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사랑 놀음 즉, 사랑으로 포장된 소유욕. 그 이상의 의미가 없을지 모릅니다. 또한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너’에게 ‘나’를 이해해 주도록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나’를 사랑하도록 요구와 강요를 할 수 있겠습니까?


‘너’를 사랑하려면 ‘너’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너’를 이해하려면 ‘나’를 이해해야만 하는 의식의 전환이 먼저 갖추어져야 합니다. 이 ‘나’를 깊이 깊이 이해하는 작업 ・ 공부. 이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위빠싸나(몸과 마음의 통찰)라는 방법이 그 가능성을 우리들에게 열어 줄 것입니다.


다. 세 번째로, 인식에 있어서의 본질적인 오류로부터 해방을 위하여

 

  우리는 대상을 보고・듣고・냄새 맡고・맛보고・ 피부로 접촉하며 인식합니다. 이 과정에서 인식되어지는 대상과 그 대상과 접촉하는 눈・귀・코・혀・몸(피부) 등의 인식기관과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 등의 의식이 관계를 맺어 인식이 성립됩니다. 이 인식과정에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대상은 보고・듣고・냄새 맡고・맛보고・ 피부로 접촉해서 인식한 대로 거기에 고유한 특성과 형상을 지닌 채 ‘실재’하며, 그것이 인식기관과 접촉되어 직접 지각에 의해 인식된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그것이 인식기관과 접촉되면 그 실재하는 형상과 꼭 같은 표상이 생겨 그 표상을 통하여 순수지각이 일어나 인식된다고 알고 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간추려 정리하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연, 즉 대상은 외계에 실재하며 그것은 순수 지각에 의하여 그것의 되어져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인식한다는 소박한 실재론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앞으로도 그러한 소박한 실재론의 의식구조를 안고 사물과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가치를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식대상・인식기관・인식작용의 복잡한 구조에 관해서는 언급을 않으려 합니다. 다만 그것의 비진실한 허망성에 핵심 사항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려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볼펜을 보십시오. 그러나 처음 순간에는 그것이 ‘볼펜’이라든가,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든가 하는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단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 순간 이윽고 ‘이것은 검은색 수성펜이다’라고 판단될 때, 다시 말하면 단지 ‘〜것’을 언어를 매개로 하여 ‘검은색 수성펜’이라고 인식하고 수성펜이라는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것’이  ‘실재하는 수성펜’이 됩니다. ‘〜것’이 검은색 수성볼펜으로 존재물로 실재하게 된 것입니다.

나타난 지각표상을 이처럼 ‘언어’로써 인식하는 것은 동시에 지각표상을 의식 혹은 마음 밖에 있는 것으로 추상화하여 「외적사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지각표상(관념)과 언어가 결합하여 그 표상이 사물로서 외재화(外在化)된 것이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언어에 의한 관념으로 추상화된 허망한 것일 뿐 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관념・언어 뿐이며 그에 실제로 부합, 상응하는 외적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일반적인 사람에 비춰진 현상적인 존재는 허망분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이 얼마나 황당한 사실입니까? 내가 여태까지 상대한 대상이 전혀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가짜 대상을 상대로 어떤 가치를 결정하며 울고 불며,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며 살아왔다는 의미 아닙니까. 이 사실은 여러분들이 언뜻 이해하기가 다소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한 이론의 전개에 집중해서 따라가 보면 여러분들은 분명히 개념적으로나마 이 진실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이번에는 인식작용의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실이라고 믿는 구조 안에는, 자신들의 관점을 벗어나 현상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인식한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태도나 관점들의 어느 하나 또는 그것들의 조합에 의해 좌우됩니다.

① 믿음 또는 신념(saddha)

② 좋아함이나 선호(ruci)

③ 전통

④ 형상에 관한 심려(尋相)

⑤ 견해의 이해에서 오는 기쁨


특히 믿음 또는 신념은 인식과 서술 사이의 관계 내지는 그 인식 토대의 예측 가능성 등과 관련해서 인식의 원천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과 신념은 그것에 반하는 증거가 분명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실이다고 고집할 정도로 우리를 어리석음으로 이끌어 갑니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의 심리를 상세히 분석하는 일이 요구됩니다. 이 부분의 해답을 얻기 위하여 고따마 붓다가 감관 지각에 대하여 심리학적으로 포괄적인 분석을 한 부분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비록 고따마 붓다가 감각 경험과 지각 그리고 인식 경험의 과정을 설명한 부분이 매우 짧기는 하지만 그것이 함축하는 바는 상당히 광범위합니다.


오, 빅쿠들아, 시각 기관과 시각 대상에 의존하여 시각 의식은 일어난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어우러진 것이 접촉이니,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일어난다. 느낀 것을 그가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그가 반성하며, 반성한 것에 그는 집착한다. 집착하게 된 것, 그것 때문에 그렇게 얽매인 지각에 의해 성격지어진 개념들이 그를 집요하게 공격하여, 시각 기관으로 하여금 시각 대상을 과거. 미래. 현재에 속하는 것으로 알게끔 만든다(M 1, 111-112)


우선, 감각 경험을 일으키는 원리는 ‘의존성(paticcasamuppada, 緣起)'입니다. 감각 기관과 대상간의 상호 의존성 속에서 만 지각 과정은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인식은 감각 대상 자체가 감각 기관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감각과 결합되지 않은 대상은 지각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관점을 완전히 배제하고  궁극적인 객관성 자체로서의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차적으로 시사해 줍니다.

감각 기관과 감각 대상과 이 둘에 의해 조건지어진 의식 등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을 접촉(phassa)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접촉’이라는 말은 ‘피부 접촉’처럼 제한된 의미가 아니라, ‘나는 누구와 접촉하고 있다’는 말에서처럼 더 넓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접촉의 불가피한 결과가 느낌(受, vedana)입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초기 순간의 느낌이라는 인식 과정은 항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느낌 그 자체는 따로 떼어 놓고 본다면 그것은 즐겁다, 괴롭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다라고 알게 되는 순수한 감각 현상으로서 감각적 인식에 관한 한 즐겁다거나 괴롭다는 감정적인 인식이 반드시 뒤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순간 여기에 감정적인 요소가 도입되어, 유쾌한 것과 불쾌한 것과 중립적인 느낌이 발생하게 됩니다. 접촉은 미워함과 혐오함뿐만 아니라 좋아함과 무관심도 잉태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각 경험의 감정적인 면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윤리 도덕적 가치의식을 부동적으로 남겨두지 않고, 그것들을 경험의 세계 속에 근거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 감각 경험의 감정적인 면인 느낌이란 인간을 압도하여 그에게서 모든 합리적인 사고를 빼앗아갈 정도로 무시무시한 형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경험의 불가피한 요소인 감정은 우리가 지닌 어리석은 혼란과 괴로움의 주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 고따마 붓다는 “느낌에 의존하여 지각이 일어난다"라는 ‘의존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에 “느낀 것을 그가 지각한다”라고 ‘그’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작용 주체를 나타내는 서술 방법으로 바꾸어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인과적으로 조건지어진 인간의 자아성이 감정의 왕성한 활동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독립적이고 고정 불변하며 자기 존속적인 ‘자아’라는 개념(실재가 아닌)을 만들어 내는가를 탁월한 서술 솜씨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느낀 것을 그가 지각한다.”는 말은 지각이 우리의 감정생활에 의해 항시적으로 결정되며 또 우리의 관심이, 즉 그것이 단순한 관심이든 좋아함과 싫어함 같은 보다 확장된 감정이든 지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어떠한 지각도 관점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순수 지각이란 성립될 수 없다는 겁니다. 관점이란 자신이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한 가치가 부여된 관념을 말합니다.

인식과정의 다음 단계는 반성(思, vitakka)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인 경우 이 반성은 지각의 결론들을 평가하여 독립적이고 자기 지속적인 실체로서의 자아의 존재를 계속해서 정당화하여 망상(障碍, 戱論, papanca)으로 몰고가 마침내는 속박과 괴로움으로 이끌고 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감정의 지나친 전개로 말미암아 자기 지속적인 실체나 자아라는 개념이 출현했기 때문에 이러한 망상이 생겼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망상이 일단 발생하고 나면, 그것의 영향력은 지각(sanna, 想)과의 관계에서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지각된 대상에 대한 관념(sankha, 思量)과의 관계에서 발휘됩니다. 우리가 자아라는 개념에 매달리는 한 지각에 대한 관념과 연결되고, 이렇게 된 망상이 스스로를 과거 ・ 현재 ・ 미래의 대상들과 관계시키는 경우에는 그 망상은 영속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분명히 일시적이고 소멸되기도 하는 ‘지각’보다는 영원하고 소멸 불가능하다는 인상을 주는 ‘자아 개념’에 의해서 노예화되기가 더욱 쉽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 본질적으로 오류를 만들어낼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판단과 분별된 인식으로 대상에 가치를 부여하고는 의지를 결정하는 한 행복을 지향하는 바람직한 삶으로 나아가지는 못할 것은 당연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오류로부터 벗어나 주관적 편견들을 제거하여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되어져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기 위해서는 대상을 대할 때 반드시 관점, 즉 관념이 끼어들지 않은 중립의 상태에서 행해야만 하는데 중립의 상태를 유지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수행 외에 거의 다른 방도가 없다는 면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2. 수행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의무사항입니다.


이상과 같이 왜 수행을 해야 하는가에 관하여 대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나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하나의 사항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정의를 교육의 시작에 들어서면서 들어왔습니다. 실로, 우리는 ‘네’와 관계를 맺지 않고 나만이 고립된 상태에서 삶을 영위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삶이란 ‘나’와 ‘네’가 관계를 맺어 그것을 유지하며 흘러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와 네가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나와 네가 ‘사랑하는 관계가 된다’는 의미임에 분명합니다. 사랑한다는 의미는 내가 네를 돕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네를 진정하게 도울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나와 네’에 대한 본질적인 것을 참으로 이해해야만 가능합니다. ‘나와 네’에 대한 이해에 오류를 범한 상황에서 게다가 대상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부여된 가치 판단을 가지고 네를 도울 때는 의도는 선의였지만 결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서 마침내 도리어 도리킬 수 없는 국면을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도사리고 있음을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인식의 오류가 무지를 낳고 그 무지로 ‘내’가 ‘네’와 관계를 맺을 때는 나 혼자의 문제 속에서만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네’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악을 저지르면서 살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얘기입니까? 실제로 이러한 일들을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더욱 가공할만한 것은 네에게 해악스러운 해우를 저지런 결과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이 자신의 인식의 오류와 무지에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에게, 나아가서는 정말 내가 사랑하는 상대들에게 실제적으로 악이나 불편을 끼치지 않고 그들에게 유익함을 주는 존재로 살 수 있기 위해서는 내가 존재의 실상을 알고 그 지혜로서 대상을 이해하며 살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 의무사항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의 본질과 실상을 아는 깨달음 속에서 살지는 못하더라도 하염없이 깨달음으로 향하는 수행하는 마음을 놓지 말고 자신의 오류를 항상 점검하고 경계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위빠사나 수행 가이드
글쓴이 : 청 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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