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9. 어떻게 하면 명상을 잘 할 수 있을까ㅡ임 승택교수

수선님 2018. 11. 4. 12:38

9. 어떻게 하면 명상을 잘 할 수 있을까
 
2009년 12월 06일 (일) 22:05:19 임승택 교수 anusati@hanmail.net

   마음지킴(sati) 실천 양상
 
어떻게 하면 명상을 잘 할 수 있을까. 명상에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당연히 품어 보았을 생각이다. 앞서 언젠가 언급했듯이, 명상이란 ‘잘 쉬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무엇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냥 쉬자는 취지이다. 아무 것도 의도하지 않고서 있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는 맥락이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누어서 떡먹기’가 아닌가. 사실 ‘누어서 떡먹기’에도 약간의 기술과 노력은 필요하다. 그래야만 고물을 흘리지 않고 제대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명상이란 그러한 노력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경험하거나 떠오르는 모든 현상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명상이란 더 이상 아무 것도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쉽지 않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냥 편히 있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에 대해 무언가 해야 할 일이 많은 존재로 여겨 왔고, 또한 그와 같이 되도록 길들여져 왔다. 그 결과 우리는 쉬는 것에 친숙하지 못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당장 며칠 동안만이라도 고립된 곳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머물러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감당하기 버겁지 않을까 싶다. 물론 우리는 직분에 따라 열심히 일을 해야 하고,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노력과 긴장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쉬어야 할 때 쉴 줄 아는 여유 또한 필요하다. 밥을 먹을 때에도, 옷을 입을 때에도, 대소변을 볼 때에도, 온통 사업 걱정에 빠져 있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간다. 따라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일상에 대해 좀 더 생생한 태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일할 때에는 일하고 쉴 때에는 쉬는 유연함이 길러질 수 있을 것이다. 불교 명상의 핵심 원리로 거론되는 마음지킴(念, sati)은 바로 이것을 주된 기능으로 한다. 마음지킴은 과거와 미래라는 상상의 세계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현재로 되돌리는 역할을 한다. 즉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 대해 분명한 의식을 갖는 것이 마음지킴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현재의 사태에 깨어있는 능력을 확고히 하는 것’을 일컬어 ‘마음지킴의 확립(satipaṭṭhāna)’이라고 한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상상에서 기인하는 갖가지 강박적 사고와 부정적 정서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마음지킴이란 지금 이 순간 경험하거나 떠올리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 이외에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 역시 어려운 일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때그때 벌어지는 사태를 그냥 그대로 주시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님에 분명하다. 우리의 마음은 한 순간도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요동을 친다. 언제 그랬느냐 싶게 망상의 세계에 붙잡혀 불안과 회한에 빠지곤 한다. 따라서 경전에서는 옷이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려는 것이 같이 다급한 마음으로 마음지킴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내면의 안정과 더불어 있는 그대로를 통찰하는 지혜를 얻게 된다고 전한다(AN. V. 99-100쪽). 따라서 처음 명상에 임하는 사람에게는 호흡에 대해, 몸의 움직임에 대해, 좋거나 싫은 느낌 따위에 대해,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요구된다. 

몸․느낌․마음․법이라는 사념처(四念處)의 항목들은 마음지킴을 확고히 하기 위한 구심점이 된다. 우리는 이들에 대한 기민한 알아차림을 통해 마음의 방황을 차단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없으면 온갖 잡생각에 이끌려 명상을 한다는 자체마저 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상태를 막는 방법으로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는 마음속으로 명칭을 붙일 것을 제안한다. 예컨대 숨을 마실 때에는 ‘마시고, 마시고, 마시고... ’를, 내쉴 때에는 ‘내쉬고, 내쉬고, 내쉬고...  ’를 되뇌라고 권한다. 물론 그렇게 하더라도 잡념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당황하지 말고 ‘잡념, 잡념... ’이라는 명칭을 붙이라고 이른다. 잡념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대부분의 잡념은 저절로 약화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 ‘마시고’라든가 ‘내쉬고’로 돌아가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현상들에 대해 명칭을 붙이다보면 망상에 빠져드는 습관적 경향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 또한 경험 내용들에 대해 보다 세밀한 관찰이 가능해진다. 예컨대 단순한 자연적인 호흡에도 쉴 새 없는 떨림과 진동들이 교차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아가 이것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다 보면 ‘마시고’라든가 ‘내쉬고’ 따위의 명칭을 붙이는 것이 불필요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세한 현상들에 대해 일일이 명칭을 붙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체험의 와중에도 다시 망상에 빠져 호흡을 놓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재빨리 망상에 빠진 사실을 알아차리면 된다. 필요하다면 ‘잡념, 잡념... ’ 따위의 명칭을 재차 사용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잡념을 피웠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얼마만큼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느냐이다. 그렇게 하다가 보면 결국 망상에 빠지는 빈도는 줄어들고 그것의 강도 또한 옅어진다.  

일반적으로 명상의 초보 단계에서는 호흡이나 느낌 따위에 집중하도록 권장을 받는다. 이들에 대한 관찰이 가장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간 숙달이 되고 나면 호흡이나 느낌 따위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시고 내쉬는 호흡의 틈새에도 여러 느낌들이 끼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코끝이나 배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도 어깨가 결린다거나 지루하다거나 하는 것을 동시적으로 지각하게 된다. 알아차리는 범위가 자연스럽게 넓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관찰의 범위가 확대되면 특정한 하나의 대상에 몰입하려는 의지적인 노력을 줄이고, 개방된 태도로 몸과 마음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그러한 와중에도 마음의 방황이 심해진다 싶으면 언제든지 최초의 호흡에 대한 집중으로 돌아가면 된다. ‘잡념, 잡념... ’ 따위를 되뇌는 방법을 사용하여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렇게 오랜 기간을 반복하다 보면, 몸․느낌․마음․법이라는 사념처 전체의 구분이 의미를 잃게 된다. 즉 관찰의 힘이 증장되어 감관에 와 닿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 ‘선택 없는 마음지킴(choiceless mindfulness)’을 행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존 카밧진(Jon Kabat-Zinn)은 “어떤 특정한 것에만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무엇이든 떠오르는 것에 모두 집중하는 것”으로 언급하였고, 또한 이것에 숙달되기 위해서는 수년에 걸친 연습이 요구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Jon Kabat-Zinn, 장현갑 옮김, 󰡔마음챙김 명상과 자기치유󰡕, 2005, 133쪽). 바로 이 상태가 확고해지면 의지적인 노력으로 마음지킴을 행하던 그간의 양상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즉 특정한 대상을 임의로 선택하여 마음지킴을 할 필요가 없어지고, 오히려 관찰되는 대상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상황이 전개된다. 바로 이것을 두고 쉐우민 사야도(Shwe Oo Min Sayadaw)는 “처음 수행을 해 나갈 때는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수행을 오래 하다가 보면 법이 저절로 드러나 이끌어 준다.”고 언급하였다. 

마음지킴의 실천 양상은 ‘의지적인 노력’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넘어간다고 할 수 있다. 처음 명상을 익힐 때에는 결연한 태도로써 마음지킴을 해야 한다. 즉 몸이나 느낌 따위에 대해 전력을 다해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습관적인 망상과 나태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다. 이와 관련하여 『삿담마빠까시니(Saddhammapakāsinī)』라는 문헌에서는 “대상에 밀착하여 서는 것(PsA. 510쪽)” 혹은 “하나의 대상에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확고하게 머무는 것(PsA. 539쪽)”으로 마음지킴의 양상을 묘사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명상의 진전되면 의지적인 노력을 줄여 나가야 할 때가 온다. 과도한 의지는 그 자체가 일종의 욕심일 수 있으며 있는 그대로를 살피는 데에 방해가 된다. 예컨대 내면의 탐욕이라든가 성냄 따위에 대한 알아차림은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가장 분명해진다.

따라서 명상이 무르익은 단계에서는 마음지킴을 한다는 생각마저 내려놓고 한걸음 물러날 필요가 있다. 이때에는 부정적․긍정적 자극들에 흔들리지 않는 관조적 거리두기가 강조된다. 이러한 분위기에 익숙해짐으로써 우리는 경험하는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즉 편견과 독선으로부터 벗어나 자신과 세계를 열린 마음으로 감싸 안는 방법을 체득하게 된다. “명상이란 더 이상 아무 것도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했던 앞서의 언급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이다. 필자는 이러한 분위기에 친숙해지는 것이야말로 명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결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더불어 이러한 경지를 두고서 ‘해야 할 일을 마친 상태(kataṃ karaṇīyaṃ)’라고 표현하지 않았을까 싶다. 

   팔정도의 이해와 실천

이상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니까야』에서는 마음지킴을 행하지 말아야 할 경우도 있다고 가르친다. 예컨대 불건전한 생각 따위가 비정상적으로 계속되면 그것에 대한 마음지킴을 그만 두라고 이른다(MN. I. 120쪽; AN. III. 185-186쪽). 따라서 마음지킴의 실천 양상에는 ‘의지적인 노력’과 ‘자연스러운 흐름’에 이어 ‘하지 말아야 할 경우’가 추가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지막의 경우는 다소 예외적이지만 명상의 실천에 수많은 변수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마음지킴의 강약을 조절해 나가야 하며, 또한 이것이 지닌 여러 측면들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 두어야 한다. 더불어 이것에 친숙해질 때까지는 유능한 지도자의 가르침 아래에 있는 방법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 훌륭하고 자상한 스승이 곁에 있다면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성공적인 명상은 마음지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한 예비적인 조건들도 고려해야 하며, 수행의 전체 여정에 관해서도 그 윤곽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엉뚱한 생각과 기대감에 이끌리는 불필요한 방황의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팔정도(八正道)의 체계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팔정도는 편향되지 않은 실천으로서 중도(中道)의 실제 내용이 된다(SN. V. 420쪽 이하). 동시에 사성제(四聖諦)의 마지막 항목으로서 도성제(道聖諦)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붓다는 바로 이것을 통해 신통한 앎(abhiññā)과 완전한 깨달음(sambodhi)을 성취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수행자(沙門)란 존재할 수 없고, 이것이 있을 때 비로소 수행자가 있을 수 있다고까지 언급했다(DN. II. 151쪽).

일반적으로 팔정도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수행에 막 입문한 사람들이 단계적으로 구비해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팔정도이며, 다른 하나는 거기에 이미 익숙한 이들이 여덟의 덕목 모두를 구비하고서 반복적인 실천을 해 나가는 경우에 해당한다. 전자의 이해 방식은 깨달음에 이르는 지형도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수행의 여정이 일정한 단계를 밟아 나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필요성에 부응하는 것이다. 한편 후자는 현실의 삶 속에서의 온전한 실천을 위한 지침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이 경우 팔정도를 구성하는 덕목들의 선․후 관계는 중요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를 돕는 위치에 놓인다. 사실 팔정도의 덕목들은 서로 연결될 때 그 효력을 강력하게 발휘할 수 있다. 필자는 양자 가운데 어느 방식을 취하든 팔정도의 체계를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보며, 그것이야말로 명상을 잘 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팔정도의 첫 번째 덕목인 바른 견해(正見)는 불교적 가르침 전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의미한다. 이것은 세속의 굴레 속에서 기능하는 바른 견해와 해탈로 이끄는 수승한 견해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세속적인 바른 견해는 업(業)에 의한 지음과 받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리킨다. 이와 관련하여 경전에서는 “무엇이 나쁜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의 뿌리이며,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좋은 것의 뿌리인지 분명히 아는 한에서 바른 견해이다(MN. I. 46-47쪽).”라고 하였다. 한편 해탈로 인도하는 출세간적인 바른 견해는 사성제(四聖諦)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즉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지혜가 있으니, 이것을 바른 견해라 한다(DN. II. 312쪽).”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세속적인 바른 견해는 굳이 명상과 연계시키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요구되는 윤리적 덕목이다. 한편 출세간의 바른 지혜는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한 것으로, 명상의 실천과 직접적인 연관관계에 놓인다.  

바른 의도(正思惟)는 앞서의 바른 견해를 내면화하여 바르게 마음을 쓰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욕심을 버리려는 의도(出離思), 분노를 버리려는 의도(無恚思),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無害思) 등이 있다. 바른 견해의 확립과 더불어 우리는 올바른 행동으로 나가게 된다. 바로 거기에서 바른 의도는 스스로를 다잡는 역할을 해준다. 사성제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를 통해 우리는 일체의 괴로움이 내면의 탐욕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탐욕이 완전하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순간순간의 유혹에 흔들릴 수 있으며, 그때마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바람직하고 건전한 의도를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바른 의도이다.

바른 언어(正語)․바른 행위(正業)․바른 삶(正命)은 비도덕적인 행위를 억제하고 착하고 바람직한 행위를 증진시키는 덕목들로 구성된다. 이들은 다양한 세부적 계율(戒律) 항목들과 연계되며 몸과 마음으로 드러나는 일체의 행위를 포섭한다. 또한 이들 덕목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부각되는 것으로, 팔정도의 실천이 사회적․윤리적 측면으로까지 확대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바른 언어와 바른 행위 등은 혼자만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 세 가지 덕목이 명상의 실천에서 지니는 진정한 가치는 윤리적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순화를 돕는다는 데에 있다. 이들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도덕적 비행으로 인한 죄의식과 자책에 빠지지 않게 되며 조화로운 마음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것이 전제될 때 우리는 본격적인 명상에 들어갈 수 있다. 경전에서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바른 법(善法)의 처음은 무엇인가. 계율의 청정이며 견해의 올바름이다. 그와 같이 비구가 계율이 청정하고 견해가 올바르게 된다면, 그대여, 비구는 계율에 의지하고 계율 위에 서서 ‘네 가지 마음지킴의 확립(四念處)’으로 나간다....  (SN. V. 143쪽 등)”

바른 노력(正精進)은 본격적인 명상의 영역에 속하는 동시에 명상에서 요구되는 심리적 에너지(viriya)를 공급한다. 붓다의 가르침이 지향하는 해탈의 세계란 다름 아닌 본능적인 욕망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이다.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거슬러 올라가는 결연한 의지와 꿋꿋함이 필요하다. 이러한 여정은 결코 쉽지 않으며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오로지 홀로 걸어 나가야  한다. 바로 거기에서 바른 노력이란 일체의 불건전한 상태를 미리 차단하고, 이미 발생한 그것에 대해서는 미련 없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건전하고 유익한 상태는 적극적으로 이끌어 내고, 이미 존재하는 그것에 대해서는 더욱 만전을 기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내면에 잠재된 번뇌의 표출을 막고, 또한 현재 발생해 있는 그것을 소멸하여 바른 명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바른 마음지킴(正念)은 본고를 통해 이제까지 강조되어온 것으로, 불교 명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이것은 몸․느낌․마음․법에 대한 통찰이라는 사념처의 수행을 가리키기도 하고, 관행적으로 위빠사나(觀, vipassanaā)라고 일컫는 그것이기도 하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것을 통해 우리는 번뇌와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대로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마음지킴의 실천은 그 자체로서 완결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경전에서도 사념처의 전체 과정을 포섭하는 것으로 묘사한다(DN. II. 313쪽).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것을 팔정도라는 일련의 체계 속에서 만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마음지킴의 실천이 어느 한 순간에 단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준다. 바른 마음지킴은 앞서의 바른 견해에서부터 이어지는 점진적인 절차와 위계에 따라 행해진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것의 실천은 그와 같은 예비적 단계들을 걸친 연후에야 비로소 존재의 실상을 꿰뚫는 강력함을 발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바른 삼매(正定)는 바른 마음지킴에서 기인한 평온한 마음으로서 네 단계로 구분된다. 욕심을 버린 데서 생겨난 즐거운 심리 상태로서의 첫 번째 선정(初禪), 언어적․분석적 사고가 가라앉은 상태로서의 두 번째 선정(第二禪), 그저 평온한 즐거움만이 머문다고 하는 세 번째 선정(第三禪), 마음지킴이 극히 청정해진다고 하는 네 번째 선정(第四禪)이 그것이다(DN. II. 313쪽). 이러한 삼매의 경지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이견이 분분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두 번째 선정 이후로는 언어적 사고가 가라앉아 그것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매의 경지는 순수한 체험의 영역으로 남겨 두자는 분위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의 몇 마디 경전상의 암시만으로도 그러한 삼매의 경지를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예컨대 호흡이나 느낌 따위에 대한 알아차림이 기민해지면 관찰되는 현상들이 세밀하게 포착된다. 그렇게 되면 유동적으로 포착되는 현상들 모두에 대해 일일이 명칭을 붙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또한 그와 같이 집중된 상태를 지속하는 와중에는 여타의 언어적 사고도 가능하지 않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언어적 사고가 개입되는 순간 사물의 미세한 변화 양상을 놓치게 된다. 한편 관찰의 힘이 더욱 증장되면 감관에 와 닿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 ‘선택 없는 마음지킴’이 행해진다. 이때부터는 일부러 마음지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찰되는 대상이 마음지킴을 이끌어 주는 상황이 전개된다.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음지킴이 진행되는 가운데 지극히 평안하고 즐거운 심경을 누리게 된다. 더불어 더욱 투명해진 의식으로 모든 감각 영역에서 드러나는 현상들을 한걸음 물러나 관조할 수 있게 된다.

이상과 같은 팔정도의 덕목들은 삼학(三學)으로 일컬어지는 또 다른 체계로 재분류되기도 한다. 예컨대 바른 언어․바른 행위․바른 삶의 세 가지는 계학(戒學)에, 바른 노력․바른 마음지킴․바른 삼매는 정학(定學)에, 바른 견해․바른 의도는 혜학(慧學)에 배치되기도 한다. 이 삼학의 체계는 초기불교 이래로 널리 사용되어 온 수행 방식의 분류법이다. 그런데 이들의 순서는 팔정도의 그것과 동일한 배열이 아니다. 즉 팔정도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바른 지혜와 바른 의도는 삼학의 체계에서 맨 마지막 단계에 배속된다. 팔정도에서 굳이 이들을 서두에 등장시킨 이유는 예비적인 형태의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가 수행의 시작 단계에서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른 견해를 통해 명상의 실천에 관한 전체적 조망을 가져야 한다. 또한 바른 의도를 지녀야만 방향성을 잃지 않고 올곧게 수행을 계속할 수 있다. 물론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는 그러한 예비적인 역할만으로 임무가 끝나지 않는다. 계율과 선정이 무르익으면 더 뛰어난 차원의 견해와 의도를 지닐 수 있게 된다(Bhikkhu Bodhi, 전병재 옮김,『팔정도』, 2009). 따라서 팔정도의 가르침은 순환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바른 명상을 위해 이상과 같은 절차와 내용들에 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더불어 이 팔정도야말로 가장 널리 채택되어 온 보증된 깨달음의 길(道, paṭipad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출처 : 열린선원
글쓴이 : 온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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