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8.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ㅡ임 승택교수

수선님 2018. 11. 4. 12:38

8.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2009년 11월 10일 (화) 09:12:31 임승택 교수 anusati@hanmail.net

   깨달음에 대한 오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다소 주제넘은 질문으로 여겨질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히 물어야 할 불교의 궁극 목적이다. 우리는 흔히 불교(Buddhism)에 대해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바로 그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것에 대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심지어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지고한 무엇으로 신비화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물론 불교의 최종 목적에 관한 논의에서 신중한 자세는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심성이 깨달음 자체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목적지가 분명할 때 비로소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올바른 실천에 전념할 수 있다. 깨달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에 대한 불분명한 입장은 결연한 실천적 의지를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깨달음에 대해 오해를 부추기는 주장들이 존재한다. 혹자는 깨달음을 얻고 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성취되는 듯한 주장을 펼친다. 마치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가 다만 그것으로 명예와 부귀를 거머쥐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혹자는 깨달음을 위한 지난한 과정들은 생략한 채 오로지 단박에 성취하는 그것만을 강조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져 천지를 뒤흔드는 체험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다른 혹자는 깨달음을 현실 삶과 유리시켜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고립무원의 경지로 여긴다. 참새가 봉황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범부 중생은 백날을 닦아도 깨달음 근처에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들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며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깨달음이란 말 그대로 ‘모르던 사실을 궁리 끝에 알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기존의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과정이 수반되며, 그러한 이유에서 예상치 못했던 극적인 요소들이 개입될 수 있다. 즉 무작정 원한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차원으로의 정신적인 도약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비단 수행의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흔히 겪는 일이다. 예컨대 때가 무르익지 않으면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주장들에도 얼마간의 교훈은 있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의 장벽을 넘어서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까닭에 다만 진득하게 열심히 수행하라는 취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는 그것의 성취를 요원한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것은 결국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의 존재 이유를 망각케 할 위험성이 있다.

   깨달음의 실현 과정

깨달음에 관한 잘못된 견해들은 그것만 성취하고 나면 만사형통이라는 한탕주의적 사고를 조장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필자 또한 그러한 ‘깨달음 한탕주의’에 현혹된 경험이 있다. “이번의 집중 수행으로 끝장을 내야지.”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야.” 물론 새롭게 수행에 임하는 와중에 이러한 각오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행을 하는 이유는 탐냄․성냄․어리석음 따위의 부정적인 정서를 다스려 참된 지혜(慧, paññā)를 개발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면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 자체가 일종의 탐냄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깨달음 한탕주의’란 다름 아닌 그러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경우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깨달음의 실현 과정은 어떠해야 하는가.
다음의 경전은 깨달음에 관한 초기불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앞서의 주장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비구들이여, 나는 완전한 지혜(aññā)의 성취가 단번에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와 반대로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실천하고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완전한 지혜의 성취가 있게 된다(MN. I. 479-480).” 이것으로 우리는 깨달음에 관한 붓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점차적인 닦음에 의한 점진적인 깨달음이 그것이다. 붓다는 삶 속에서 점차적으로 무르익는 깨달음을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깨달음에 관련한 경직된 태도들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극단적인 고행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깨달음에 접근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녀야 한다.

이제 그렇다면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일까.
이상에서 언급한 방식으로 과연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일까.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깨달음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양한 이설(異說)을 전한다. 예컨대 중도(中道, majjhima-paṭipadā)를 깨달았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 혹은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를 깨닫는다고 기술하기도 한다. 그런데 중도란 바른 견해(正見)라든가 바른 의도(正思惟) 따위의 팔정도(八正道)를 가리키며, 다시 팔정도는 사성제의 마지막 항목인 도성제(道聖諦)에 포섭된다. 한편 ‘의존적인 발생과 소멸’을 내용으로 하는 연기 또한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 과정을 밝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사성제와 표리(表裏)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상적유경󰡕에 기술되듯이 붓다의 깨달음과 가르침은 사성제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MN. I. 184쪽 이하). 요컨대 그는 인간 존재가 괴로움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각하였고, 또한 그것의 원인을 통찰하여 해소함으로써 깨달음을 완성하였던 것이다(임승택,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궁극 목표에 관한 고찰」, 2008).

󰡔전법륜경󰡕에는 사성제를 12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깨닫는 양상(三轉十二行相)이 묘사된다. 예컨대 고성제(苦聖諦)에 대해서는 ‘이해해야 하고(pariññeyya)’, 집성제(集聖諦)에 대해서는 ‘끊어야 하며(pahātabba)’, 멸성제(滅聖諦)에 대해서는 ‘실현해야 하고(sacchikātabba)’, 도성제(道聖諦)에 대해서는 ‘닦아야 한다(bhāvetabba)’는 자각의 과정이 세 차례에 걸쳐 반복해서 등장한다. 더불어 그들 각각에 대해 “눈이 생겨나고 지혜가 생겨나고 통찰이 생겨나고 밝음이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났다.”라는 문구가 되풀이된다. 이러한 내용은 붓다의 깨달음이 일회적으로 단박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사성제를 내용으로 하는 붓다의 깨달음은 지난한 수행의 과정을 통해 점차적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전법륜경󰡕에서는 그러한 과정을 걸쳐 “사성제에 관한 지혜와 견해가 청정해진 연후에 비로소 ‘위없는 바른 깨달음(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aṃ sammāsaṁbodhi)’을 선언했다(paccaññāsiṃ).”는 언급도 나타난다(SN. V. 422-423쪽).

초기경전에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이라는 표현은 사성제의 가르침과 관련해서만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불교의 목표가 다름 아닌 사성제라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아울러 사성제의 실현 과정은 반드시 점진적으로 묘사된다는 점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유념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문제에 관련해서는 다음의 가르침을 주목할 만하다. “네 층의 계단이 있어 전당(殿堂)으로 오르는 것과 같이, 만일 어떤 사람이 ‘첫 계단을 오르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단을 올라 전당에 올랐다’고 말한다면 그럴 이치가 없느니라. 왜냐하면 반드시 첫 계단을 지난 뒤에야 차례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단을 따라 전당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니라.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고성제에 대해 아직 밝게 알지 못하면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밝게 알고자 하면 그리 될 수 없느니라(󰡔잡아함경󰡕, 권16, 436경).”

불교라는 종교에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능가하는 또 다른 궁극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확인했듯이 그것의 구체적 내용은 사성제이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가 괴로움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 그것의 원인은 내면의 집착과 탐욕에 있다는 것, 그러한 괴로움은 극복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 이외에 다름이 아니다. 필자는 이점이 분명해질 때 앞서 거론했던 ‘깨달음에 대한 오해’들이 불식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깨달음이란 결코 과시의 대상일 수 없으며, 단박에 성취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니고, 현실과 유리된 고립무원의 경지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순간부터 실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집착과 탐욕이 있는 한에서 끊임없이 자각하고 닦아 나가야 할 과제인 것이다.

   법(法, dhamma)에 대한 관찰

앞선 원고에서 살펴보았듯이, 『대념처경』에서는 위빠사나의 통찰 대상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DN. II. 290-315쪽).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이 그것이다. 이들 중에서 처음의 세 가지는 관찰 대상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즉 몸이라든가 느낌 따위는 지속적으로 지켜보아야 할 내용이 된다. 반면에 마지막의 법은 그러한 관찰 대상인 동시에 위빠사나를 통해 얻게 되는 결과를 종합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법에 대한 관찰(dhammānupassī)은 몸이라든가 느낌 따위를 관찰하면서 체득하는 내용까지를 망라한다. ① 다섯 장애(五蓋), ② 다섯 집착된 온(五取蘊), ③ 여섯 터전(六入處), ④ 일곱 깨달음의 요소(七覺支), ⑤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알아차림(pajānāti)’이 그것이다. 이들 다섯은 법에 대한 관찰의 하위 항목을 구성하는 동시에, 위빠사나를 통해 성취하는 깨달음의 실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먼저 다섯 장애에 대해서부터 살펴본다. 이것은 다시 쾌락에 대한 욕망(kāmacchanda), 악한 마음(byāpāda), 혼침과 졸음(thīnamiddha), 들뜸과 회한(uddhaccakukkucca), 의심(vivikiccha) 등을 가리킨다. 이들 다섯은 몸․느낌․마음 등을 관찰하는 와중에 발생하는 것으로 일종의 번뇌라고 할 수 있다(MN. I. 347). 또한 지혜를 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불건전한 쓰레기에 비유되기도 한다(SN. V. 146). 그런데『대념처경』에서는 바로 이들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방법(samudayavayadhammānupassī)’에 적용시킨다. 그리하여 “내부적으로 쾌락에 대한 욕망이 있을 때 ‘나에게 내부적으로 쾌락에 대한 욕망이 있다’고 알아차리고, 혹은 내부적으로 쾌락에 대한 욕망이 없을 때 ‘나에게 내부적으로 쾌락에 대한 욕망이 없다’고 알아차린다.”는 방식으로 관찰해 나갈 것을 권한다(DN. II. 301).

일반적으로 ‘쾌락에 대한 욕망’은 성적(性的) 욕구를 의미하는데,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으로는 ‘신체의 불결한 모습을 떠올리는 명상(不淨觀, asubhānupassī)’이 권장된다. 즉 똥․오줌․고름 따위의 추한 모습을 떠올려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이 사용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yathabhūtaṁ)’에 대한 통찰을 강조하는 위빠사나에서는 ‘쾌락에 대한 욕망’ 자체가 진리를 깨닫기 위한 매개로 활용된다. 즉 ‘있으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없으면 없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통해 ‘일어남과 사라짐의 진리(samudayavayadhamma)’를 깨우치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내면의 부정적 정서들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으로써 그들에게 변화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감정과 정서들이 차츰 변화하여 어느새 약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다섯 장애에 대한 알아차림’의 실제 내용이며 위빠사나를 통해 성취해 나가는 깨달음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악한 마음, 혼침과 졸음, 들뜸과 회한, 의심 등도 관찰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이들 장애에 대한 통찰과 반성이 없을 때 우리는 옳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리기 십상이다. 경전에서는 이들 장애를 잘 살펴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양자 모두에게 무엇이 이로운가를 깨우치지 못한다고 전한다(AN. III. 230). 그러나 이들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하게 되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대처해 나가게 된다. 예컨대 졸음이 온다고 해서 무작정 졸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역시 관찰 대상으로 삼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졸음과 싸우지 말고 졸린 상태를 지긋이 알아차리면서 졸음에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도록 하라.”는 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 그리하여 졸음으로부터 얼마간 비켜나는 체험을 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분명한 알아차림을 통해 수행의 장애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것은 다섯 집착된 온(五取蘊)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는 육체(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이라는 다섯의 요인(蘊)들에 집착하여 그것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용모(色)와 즐거운 느낌(受) 따위를 추구하는 가운데 갖가지 환상(想)과 욕망(行)에 뒤엉키게 된다. 바로 이것이 범속한 우리 존재의 실상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우리의 바람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현상에 불과하다. 바로 이점에 대한 통찰은 특정한 느낌이나 생각 따위가 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스쳐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깨우침을 얻게 한다. 바로 이것이 법에 대한 관찰의 두 번째 내용으로서 ‘다섯 집착된 온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거짓된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의 체험에 이르게 되고 종국에는 무아(無我)를 깨닫게 된다. 

이러한 양상은 눈(眼)과 시각대상(色), 귀(耳)와 소리(聲) 등으로 이루어진 여섯 터전(六入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위빠사나의 통찰 능력이 증장됨으로 인해 우리는 보거나 듣는 모든 것에 대해 분명한 알아차림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즉 눈(眼)을 ‘눈’ 자체로 알아차리고 보이는 것(色)을 ‘보이는 것’ 자체로 알아차리게 된다. 또한 이들 두 가지를 조건으로(paṭicca) 발생한 속박(結, saññojana)에 대해서도 분명한 알아차림을 지니게 된다. 사실 ‘다섯 집착된 온’을 비롯한 일체의 현상은 바로 이 여섯의 터전으로부터 발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에 대해 알아차림을 지닌다는 것은 경험하는 모든 것의 실제 양상을 보다 근원적으로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걸치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얽매는 일체의 속박들에 대해 더 이상 현혹되지 않고 그것의 끊어짐(斷, pahāna)으로 나가게 된다(DN. II. 302).

한편 일곱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는 이상의 과정을 통해 얻게 된 심리적 결과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즉 알아차림의 상태를 한결같게 유지하는 염각지(念覺支), 경험하는 현상들을 그때그때 올바르게 분별하는 택법각지(擇法覺支), 노력을 그치지 않고 계속하는 정진각지(精進覺支), 그러한 노력과 더불어 충만한 기쁨을 느끼는 희각지(喜覺支), 그러한 기쁨과 더불어 신체의 편안함을 느끼는 경안각지(輕安覺支), 그러한 편안함으로 고요한 선정의 상태에 머무는 정각지(定覺支), 그렇게 해서 일체의 현상에 대해 초연해지는 사각지(捨覺支)가 그것이다.

경전에서는 이들 항목을 상황에 맞게 잘 적용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컨대 마음이 위축되어 있을 때에는 택법각지․정진각지․희각지로 대처하고, 들떠 있을 때에는 경안각지․정각지․사각지로 다스리며, 염각지는 모든 경우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내용을 전한다(SN. V. 113이하). 또한 『입출식념경』등에서는 몸에 대한 관찰(身念處) 등을 행해 나갈 때 이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무르익는다고 기술한다(MN. III. 85-86). 이러한 깨달음의 요소들은 법에 대한 관찰의 네 번째 내용이 되는 동시에, 위빠사나를 통해 체득한 지혜의 활용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법에 대한 관찰의 마지막 세부 항목은 사성제(四聖諦)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사성제는 초기불교의 궁극 목적으로서 깨달음의 실제 내용이 된다. 『대념처경』에서는 이 사성제의 가르침을 다른 내용들에 비해 압도적인 분량과 비중으로 장황하게 설명한다(DN. II. 304이하). 예컨대 고성제에 관해서는 태어남․늙음․죽음 따위의 괴로움의 양상에 대해 일일이 열거한다. 집성제에 관해서는 갈망(taṇhā)을 괴로움의 원인으로 제시하면서 그것의 발생 과정을 자세히 언급한다. 멸성제에 관해서는 그러한 갈망이 소멸하는 양상에 대해 기술한다. 마지막으로 도성제에 관해서는 바른 견해(正見)에서부터 바른 삼매(正定)에 이르는 팔정도를 나열한다.

『대념처경』에 등장하는 사성제는 사념처(四念處)의 구조 안에 형식적으로 편입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섯 집착된 온(五取蘊)이라든가 여섯 터전(六入處) 등에 대한 알아차림과 중복되는 내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이전에 기술했던 실천․수행의 전 과정을 사성제라는 틀로써 다시 한 번 최종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바로 이점은 위빠사나의 근거가 되는 『대념처경』이 사성제의 실현을 위한 프로그램으로서의 성격을 띤다는 것을 말해준다.

출처 : 열린선원
글쓴이 : 온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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