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연기경
출처 : http://cafe.daum.net/bd-dm/QfvA/9
글 의 순 서
첫 째 마당 - 연기의 바른 뜻
1) 들어가는 글
2) 기대어 일어남(연기, paṭiccasamuppāda)이란?
둘째 마당 - 둑카의 윤회
1) 윤회의 바른 뜻
2) 둑카가 도는 모습을 두 바퀴 굴려 보임
셋째 마당 - 연기를 이루는 열 두 갈래
1) 열 두 갈래의 모습
2) 무명 (알지 못함, avijjā)
3) 행 (지나친 행위, 업형성, saṇkhāra)
4) 식 (앎, viñ̃̃ñāṇa)
5) 명색 (몸과 마음, nāma-rūpa)
6) 육입 (여섯 감각기관, saḷāyatana)
7) 촉 (부딪힘, phassa)
8) 수 (느낌, vedanā)
9) 첫 번째 연기의 바퀴
네 번째 마당 - 다시 윤회하는 모습
1) 애 (갈애, taṇha)
2) 취 (취착, upādāna)
3) 유 (행위, bhava)
4) 생 노 사 (jāti, jarāmaraṇan)
5) 두 번째 연기의 바퀴
다섯 번째 마당 - 연기와 업
1) 업에 대한 바른 이해
여섯 번째 마당 -『십이연기경』공부를 마치며
첫 째 마당 - 연기의 바른 뜻 (바꿈)
1) 들어가는 글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알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경전 네 가지를 공부하기로 했었죠.
첫 번째 경인『초전법륜경』을 마치고, 이제 두 번째로『연기경』을 공부해 볼까요?
연기에 관한 가르침은《쌍윳따 니까야》연기모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연기는 붓다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일 뿐만 아니라『초전법륜경』에 나오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가 지닌 바른 뜻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과도 중요한 관련이 있습니다.
연기에 대한 이해는 붓다가 보여주고자 했던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아는데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므로 이 연기를 잘 공부해야만 사성제와 팔정도를 더욱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로『연기경』을 공부하는 까닭입니다.
2) 기대어 일어남 (연기, paṭiccasamuppa̅da)이란?
연기는 빨리어 paṭiccasamuppāda(빠띳사쌈무빠다)를 옮긴 말입니다.
‘paṭicca(빠띳싸)’ 라는 말은 ‘의지하다, 기대다’는 뜻으로 조건이나 원인을 뜻하고
‘samuppāda(쌈무빠다)’ 는 어떤 것이 ‘생기다, 일어나다’는 뜻으로 결과를 말합니다.
어떠한 조건을 기대어 결과가 생긴다는 뜻으로 보통 ‘기대어 일어남’, 곧 연기로 옮깁니다.
이것은 빠띳싸쌈무빠다가 지닌 단순한 말뜻일 뿐입니다.
이러한 연기, 곧 기대어 일어남은 둑카가 끊임없이 사람 안에서 되풀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람의 행위, 특히 무명 때문에 저지르게 되는 지나친 행위의 원인과 결과를 포함해서 둑카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연기는 사람들이 둑카를 어떻게 저지르고 또 그것이 어떻게 끊임없이 되풀이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연기를 알면 둑카를 알게 되는 것이죠.
반대로 ‘둑카를 안다’라고 했을 때 어떻게 아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연기법이 보여주는 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연기는 사람이 하는 지나친 행위가 어떻게 되풀이 되고 그것이 왜 괴로움인가를 설명할 뿐 다른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둑카를 꿰뚫어 알고자 한다면 공부해야 할 것이 바로 연기입니다.
이 가르침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게 되고, 그것이 어떻게 끊임없이 되풀이 되며 점점 커져 가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연기는 바로 윤회를 뜻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삶속에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끊임없이 계속 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 따라 윤회를 완전하게 표현한다면 ‘그냥 윤회한다’고만 말해서는 안 되고 ‘둑카가 끊임없이 윤회한다.’라고 해야 합니다.
연기의 의미를 바르게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
기대어 일어남, 연기 (paṭiccasamuppa̅da) (paṭicca+samuppa̅da) |
연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여 따로 독립된 개체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어떤 우주의 존재 원리를 밝힌 것이 아닙니다. 붓다의 연기는 그저 인간의 행위에 대한 가르침으로 둑카가 끊임없이 사람 안에서 되풀이 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일 뿐입니다. |
둘째 마당 - 둑카의 윤회
1) 윤회의 바른 뜻
사람들은 ‘윤회한다’고 했을 때 무엇이 윤회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윤회한다’는 말은 동사입니다.
그 말엔 주어가 빠져 있죠.
주어 없이 그저 동사만으로 뜻을 취하면 잘못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윤회를 보여주는 연기법에서도 무엇이 도는지를 빼버린 채 그냥 단순히 ‘돈다’고만 하면 윤회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죠.
연기가 보여주는 윤회하는 모습을 사람들은 잘못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잘못 받아들였을까요?
사람 안에서 둑카가 끊임없이 윤회한다고 받아들이지 않고, 생명체가 태어나 살다가 죽고 또다시 다른 어떤 곳에 태어나며 윤회한다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차이점을 좀 더 알아볼까요?
그럼 한 가지 질문을 해 보죠.
사람 안에서 둑카가 돌고 도는 것일까요, 아니면 윤회 안에서 사람이 돌고 도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각자 답을 해 보십시오.
‘둑카의 윤회’를 모른 채 그저 ‘윤회한다’고만 받아들였던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윤회 안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고 죽으며 돌고 돈다고 하겠죠.
그들에게 윤회는 생명체가 나고 죽으며 도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윤회라고 하는 곳에서 돌고 도는 존재이죠.
끊임없이 나고 죽는 존재입니다.
그렇게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윤회를 찰흙으로 비유해서 생각합니다.
찰흙은 여러 형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거꾸로 찰흙은 여러 형상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여러 형상들은 이 찰흙에서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것이죠.
이와 같이 찰흙이 하나의 형상에서 다른 형상이 되는 것처럼 윤회라는 것은 온, 처, 계라고 하는 근본요소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나고 죽는 윤회는 온, 처, 계(蘊,處,界)가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온, 처, 계를 잠시 살펴볼까요?
∎온(무더기, kkhandha) - 여기서 ‘온’은 적집(쌓임), 덩어리,
무더기 등을 뜻하는 것으로 사람을 구성하는 물질[색], 느낌[수], 기억[상], 생각[행],
앎[식]을 가리킵니다. [5온]
∎처(감각장소, āyatana) - 감각기관(根)과 대상(境)이
마음과 심소의 작용을 일으키는 곳이므로 ‘처(處)’라 하는데
6근(안, 이, 비, 설, 신, 의)과 6경(색, 성, 향, 미, 촉, 법)의 열 두 갈래가 있어 12처라 합니다.
∎계(요소, dhātu) - ‘계’는 구성요소, 원소를 뜻하는 말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여섯 가지 대상이 만나 여섯 가지 식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18계라고 합니다.
이것이 윤회 안에서 사람이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러나 윤회 속에서 사람이 생사를 되풀이한다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이 아니라 힌두교사상입니다.
그들은 “브라만이 사람을 만들었고, 그 브라만이 만들어낸 사람은 끊임없이 업을 짓는데, 그 업이 나쁘면 죽은 뒤 나쁜 곳으로 가고 그 업이 좋으면 좋은 곳으로 간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하나의 생명체에서 다른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힌두교의 윤회입니다.
그들은 윤회 속에서 생명체가 나고 죽기를 되풀이 한다고 하죠.
붓다가 말한 윤회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둑카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윤회 속에 사람이 도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둑카가 도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란 생명체가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둑카가 윤회하는 것입니다.
생명체가 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붓다의 윤회를 말하려면 정확히 ‘둑카가 윤회한다.’라고 해야 합니다.
잠깐!! |
윤회에 대한 붓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경전이 있습니다.
바로『악기왓사경』입니다.
이중 아홉 번째 내용을 보면
붓다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윤회에 대해 사견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잠시 살펴볼까요?
『악기왓사경』 -수정한 것 확인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 때 부처님은 사왓티 아나타삔띠까 동산에 있는 제따와나 승원에 계셨다.
그때에 왓싸 편력행자는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다가가 기쁘고 기억할 만한 말을 나눈 뒤 알맞은 자리에 앉았다.
알맞은 자리에 앉은 뒤 유행승 왓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고따마여!‘세상은 영원하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는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
“왓싸여! 나는‘세상은 영원하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2)“고따마여!‘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는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
“왓싸여! 나는‘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3)“고따마여!‘세상은 끝이 있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는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
“왓싸여! 나는‘세상은 끝이 있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4)“고따마여!‘세상은 끝이 없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는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
“왓싸여! 나는‘세상은 끝이 없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5)“고따마여!‘생명과 몸은 같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는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
“왓싸여! 나는‘생명과 몸은 같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6)“고따마여!‘생명과 몸은 서로 다르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는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
“왓싸여! 나는‘생명과 몸은 서로 다르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7)“고따마여!‘중생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는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
“왓싸여! 나는‘중생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8)“고따마여!‘중생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는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
“왓싸여! 나는‘중생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9)“고따마여!‘중생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는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
“왓싸여! 나는‘중생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10)“고따마여!‘중생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는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
“왓싸여! 나는‘중생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바르고 다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2) 둑카가 도는 모습을 두 바퀴 굴려 보임
연기법은 둑카가 도는 모습을 펼쳐 보인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붓다는 둑카가 돌고 도는 모습을 세 가지 vaṭṭa(왓따)로 설명했는데 빨리어 왓따는 ‘돎, 회전’을 뜻하는 말입니다.
보통 세 가지 회전이라고 하는데 세 가지는 첫째가 번뇌의 회전, 둘째가 업의 회전, 셋째가 과보의 회전입니다.
회전이라고 하는 까닭은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해 끊임없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번뇌가 생기면 번뇌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업을 짓게 만들죠.
업도 마찬가지로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반드시 과보를 만들어 냅니다.
과보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번뇌를 다시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번뇌, 업, 과보가 계속 돌고 돌기 때문에 회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번뇌[유아견(상견, 단견), 탐진치 등 오염원, 10결, 집성제] 때문에 업[의도, 의업, 의행]이 생기고,
업 때문에 과보[5취온고, 고성제]가 생기고, 과보 때문에 번뇌가 생깁니다.
이것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이 둑카입니다.
둑카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돌고 돌기 때문에 둑카가 윤회한다고 하는 것이죠.
연기법은 둑카가 도는 모습을 두 번에 걸쳐 보여줍니다.
열두 갈래 하나하나의 이름도 첫 번째 바퀴에서 썼던 것을 두 번째 바퀴에서는 쓰지 않고 다른 새로운 이름으로 씁니다.
그래서 모두 열두 가지 갈래로 연기법을 설명합니다.
둑카가 도는 첫 번째 바퀴에서는 번뇌의 회전을 무명으로, 업의 회전은 지나친 행위인 상카라로 보여줍니다.
마지막 과보의 회전은 식, 명색, 육입, 촉, 수 이 다섯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 바퀴에서 세 가지 회전을 열두 갈래 중 일곱 가지 부분으로 보여준 것이죠.
둑카의 윤회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 번째 바퀴를 이어서 보여줍니다.
첫 번째 둑카가 도는 모습에서 마지막 과보를 기대어 번뇌가 다시 생깁니다.
그 번뇌의 회전을 갈애, 취착이라는 두 가지 부분으로 나타냅니다.
업의 회전은 보통 유로 알고 있는 바와로 보여줍니다.
바와는 ‘삶’으로 옮기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지나친 행위를 뜻하는 상카라나 행, 형성, 혹은 업과 똑같은 뜻으로 알아야 합니다.
시간만 다를 뿐이죠.
바와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한대로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과보의 회전을 ‘생, 노사’ 라는 두 가지 갈래로 나타내고 있죠.
이렇게 둑카가 도는 모습을 도표와 그림으로 살펴보도록 하죠.
첫 번째 바퀴 |
번뇌의 회전 |
무명(avijja, 알지 못함) |
업의 회전 |
행(saṇkha̅ra, 지나친 행위) | |
과보의 회전 |
식(viñ̃̃ñ̃̃ana, 앎), 명색(na̅ma-ru̅pa,몸과 마음), 육입(saḷa̅yatana, 여섯 가지 감각 기관) 촉(phassa, 부딪침), 수(vedanā, 느낌) | |
두 번째 바퀴 |
번뇌의 회전 |
애(taṇha, 갈애), 취(upada̅na, 취착) |
업의 회전 |
유(bhava, 행위) | |
과보의 회전 |
생, 노사(ja̅ti, jara̅maraṇan) |
윤회는 둑카가 번뇌, 업, 과보로 끊임없이 악순환하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집중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번뇌라기보다는 ‘행위(업)와 행위의 과보’입니다,
인간은 그 행위에 따라서 31천에 해당하는 각각의 삶을 꾸려 가는데
여기서 31천은 시공간을 달리 하는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행위의 과보로 이루어진 현재 삶에 나타난 각각의 양상들로 알아야 합니다.
셋째 마당 - 연기를 이루는 열 두 갈래
1) 열 두 갈래의 모습
둑카가 윤회하는 것을 두 번에 걸쳐 도는 모습으로 보여주면 누구든 둑카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리라고 짐작할 수 있겠죠.
그렇게 되풀이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두 번에 걸쳐 도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연기에 들어있는 부분을 모두 합하면 열두 갈래입니다.
그 열두 갈래는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입니다.
경에는 다음과 같이 이 가르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어떤 경인가요?)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무명이라는 조건 때문에 (지나친) 행위가 생기고,
행위라는 조건 때문에 앎(식)이 생기고,
앎(식)이라는 조건 때문에 명색(마음과 몸)이 생기고,
명색이라는 조건 때문에 여섯 가지 감각기관(육입처)이 생기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라는 조건 때문에 부딪침(촉)이 생기고,
부딪침이라는 조건 때문에 느낌(수)이 생기고,
느낌이라는 조건 때문에 목마름(갈애)이 생기고,
목마름(갈애)이라는 조건 때문에 붙잡음(취착)이 생기고,
붙잡음(취착)이라는 조건 때문에 (새로운) 업(유)이 생기고,
(새로운) 업이라는 조건 때문에 태어남이 생기고,
태어남이라는 조건 때문에 늙음과 죽음,
근심, 슬픔, 고통, 불쾌감, 절망이 생긴다.
이와 같이 모든 둑카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연기라고 한다.(직접확인요)”
‘무명이라는 조건 때문에’에서와 같이‘~이라는 조건 때문에’라고 옮긴 이유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볼 때 응진스님이 설명해 줄 겁니다.
여기서 ‘무명과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가 둑카의 첫 번째 회전이고
‘애, 취, 유, 생, 노사’가 둑카의 두 번째 회전입니다.
갈래는 열두 가지이고, 회전은 두 바퀴이죠.
그럼 연기를 이루고 있는 열두 갈래가 가진 하나하나의 뜻을 살펴보죠.
2) 무명 (알지 못함, avijja̅)
먼저 무명을 뜻하는 avijjā(아윗사)를 살펴보기로 하죠.
빨리어 avijjā(아윗사)는 a와 vijjā(윗사)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낱말로 ‘알지 못한다.’ 곧 모른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모른다는 것일까요?
여기서 아무거나 모른다고 해서 다 무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성제를 모르는 것만을 무명이라 합니다.
사성제의 핵심은 둑카이기 때문에 둑카를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고 하죠.
둑카를 둑카로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곧 둑카를 즐거움으로 잘못 아는 것이 둑카를 둑카로 모르는 것이죠.
과학이나 경제 원리 같은 어떤 다른 지식을 모르는 것까지 무명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둑카를 둑카로 알기가 쉽지는 않죠.
둑카는 즐거움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둑카가 어떻게 즐거움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까요?
사실 둑카는 느낌이나 감정, 또는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즐거움으로 다가옵니다.
느낌이라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뚜렷하게 바로 알 수 있는 것인데, 느낌이 즐겁고 좋기 때문에 둑카라고 바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죠.
보기를 들어 볼까요?
마누라 몰래 바람을 피우거나 마약을 할 때 그것은 분명히 하지 말아야 할 짓인 둑카지만 그 느낌은 온몸을 흥분시키고 아주 즐거운 것으로 알죠.
이것들은 진짜 하지 말아야 할 짓이지만 그 느낌은 즐거움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느낌 그 자체가 즐거움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행복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물론 느낌이야 참으로 즐겁고 좋겠지만 그는 자기의 아내를 속이고 남의 아내와 바람피운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겠죠.
주변 사람들이 다 모른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이 편할 리 없고, 혹시 들키기라도 한다면 참으로 난처한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마누라와 자식 몰래 바람이나 피우며 지내다보면 모든 바른 인간관계가 무너지게 되고 그것은 결국 진정한 행복을 가져올 수 없으니 이것이 정말 둑카 아닙니까?
느낌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은 단맛을 지닌 독과 같습니다.
독성은 감추어져 있어 잘 모르지만 단맛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게 되죠.
독을 독으로 알지 못하고 단것으로 아는 것처럼 둑카도 그 느낌이 아주 좋기 때문에 즐거움으로 알게 되니 둑카는 잘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둑카를 잘 모르고, 둑카를 즐거운 것으로 잘못 알게 됩니다.
이것이 무명이지요.
무명은 사람을 더럽게 하기 때문에 더러움(낄레사, 번뇌)이라고 하죠.
이것이 연기의 열두 가지 갈래 가운데 무명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입니다.
무명이 일어나면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돌기 때문에 회전을 붙여 번뇌의 회전이라고 합니다.
3) 행 (지나친 행위, 업형성, saṇkha̅ra)
saṇkha̅ra(상카라)는 빨리어로 saṃ(상)과 kara(까라)가 결합해서 생긴 말입니다.
saṃ은 ‘특별하다’는 뜻이고 kara는 ‘행위하다’는 뜻이죠.
‘특별하게 함’ 이란 ‘지나치게 힘쓴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 상카라를 지나친 행위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나친 행위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데,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입니다. (???)
그 행위는 모자라는 행위, 넘치는 행위, 바른 행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행위 가운데 모자라거나 넘치는 행위만을 지나친 행위라고 합니다.
이 지나친 행위를 업이라고도 하죠. (???)
[* 편집자 주 : 업[의도, 행(行)]을 유발하는 세 가지 원인 : 탐진치[5취온(집성제)]http://cafe.daum.net/bd-dm/QoB7/1]
흔히 업을 사람이 짓는 모든 행위로 잘못 알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지나친 행위만을 업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 입으로 짓는 지나치지 않은 행위는 업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상카라는 업과 같은 뜻을 지닌 말입니다.
연기를 이해할 때 이 상카라에 대한 바른 이해는 아주 중요합니다.
불교는 지나친 행위, 곧 업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업에 대한 가르침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이 연기입니다.
이 연기를 바르게 알아야만 업을 알 수 있고, 업을 이해해야만 불교를 알 수 있죠.
거꾸로 업을 알지 못하면 불교를 제대로 알 수 없죠.
이러한 상카라, 곧 업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몸으로 하는 지나친 행위(행동, 신업), 입으로 하는 지나친 행위(말, 구업), 마음으로 하는 지나친 행위(생각, 의업)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지나친 행위를 하는 몸, 입, 마음이라는 세 가지 문에 따라 나눈 것입니다.
다른 모습으로도 상카라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좋은 지나친 행위, 좋지 않은 지나친 행위, (흔들리지 않는/흔들림 없는) 지나친 행위입니다.
이것은 상카라가 갖는 성격에 따라 나눈 것이죠.
또 다른 모습으로 상카라를 나눌 수 있죠.
까마 지나친 행위, 루빠 지나친 행위, 아루빠 지나친 행위입니다.
이것은 상카라가 일어나는 영역에 따라 나눈 것입니다.
영역에 따라 나눈 것과 성격에 따라 나눈 것은 서로 관련이 깊습니다.
좋은 지나친 행위는 욕계 선업과 색계선업을,
좋지 않은 지나친 행위는 욕계 악업을,
흔들리지 않는 지나친 행위는 무색계 선업을 가리키는 말이죠.
지나친 행위는 몸, 입, 마음가운데 어느 한 가지로 할 수 있고, 좋거나, 좋지 않거나, 흔들리지 않은 것 가운데 어느 하나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까마, 루빠, 아루빠 지나친 행위를 공부해 보기로 하죠.
상카라의 종류
분류방법 ⇩ |
지나친 행위(상카라, 업)의 종류⇩ |
문에 따라 ⇨ |
신업(행동), 구업(말), 의업(생각) |
성격에 따라 ⇨ |
좋지 않은 지나친 행위 (apuñ̃̃ñ̃̃abhi-saṇkha̅ra) |
좋은 지나친 행위 (puñ̃̃ñ̃̃abhi-saṇkha̅ra) | |
흔들리지 않는 지나친 행위 (a̅neñ̃̃ja̅bhi-saṇkha̅ra) | |
영역에 따라 ⇨ |
까마업, 루빠업, 아루빠업 |
먼저 까마에 입각해서 삶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까마 지나친 행위에 대해 조금 알아보죠.
까마 지나친 행위를 하는 사람은 자기 주변 사람들을 자기가 싫어하는 대상과 좋아하는 대상, 이 두 가지로만 나누어 봅니다.
싫어하는 대상은 멀리하고, 좋아하는 대상은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힘을 쏟으며 관계를 맺습니다.
이런 행위는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는데, 좋으면 욕계선업이고, 좋지 않으면 욕계악업이 되겠죠.
그것이 좋든 나쁘든 무명 때문에 한 행위라면 상카라, 곧 지나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루빠 지나친 행위, 곧 색계선업에 대해 설명해볼까요?
루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이는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크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까마의 흠을 보아 까마가 주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대상을 물질로만 보려고 합니다.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죠.
주변의 사람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도록 의식을 조작합니다.
사람은 다른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 관계를 바르고 알맞게 맺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그저 물질로만 보려고 의식을 조작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루빠의 관점을 가진 이가 이런 생각으로 몸과 입과 마음으로 말, 행동,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지나친 행위입니다.
자신도 사람들과 더불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더불어 살아가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참으로 지나치고 넘친 생각이죠.
이것이 사람들에게 지나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죠.
아루빠 지나친 행위도 이렇게 알아야 합니다.
아루빠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이들은 주변의 사람들을 비롯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정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을 하죠.
이런 생각을 가졌으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자기식대로 하겠죠.
주변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도 그를 정말 존재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생각에 따라 관계를 맺는 것이죠.
주변의 사람을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과 바르게 관계를 맺을 수가 없겠죠?
그러니 그 행위는 정말 지나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곧 아루빠 지나친 행위, 무색계 선업이라 하는 것이죠.
지나친 행위는 몸과 입, 마음으로 짓는 지나친 행위를 뜻하는 말입니다.
루빠, 아루빠 지나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악업을 짓지 않을지도 모르나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지혜로운 행위도 하지 못하겠죠?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좋은 행위, 곧 선업도 상카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보기에는 좋고 훌륭한 행위처럼 보여도 그것이 무명 때문에 지은 행위라면 그것은 상카라로 곧 업이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행위를 한 후 그 좋은 느낌에 집착을 해서 다시 그것을 하려고 집착하는 마음은 번뇌, 업, 과보의 회전을 가져올 뿐입니다.
그러니 좋은 행위도 지혜롭게 해야겠죠?
이 정도면 지나친 행위를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4) 식 (앎, viñ̃̃ñ̃̃a̅ṇa)
지나친 행위가 업의 회전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업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과보의 회전을 생기게 하죠.
과보의 회전에는 다섯 갈래가 있습니다.
첫 째가 식이죠.
십이연기에서 세 번째 갈래로 나오는 식은 뇌에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는 앎, 곧 기억으로 저장된 앎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뇌에 저장된 기억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런 경우는 실제 우리 삶에서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에서 말하는 식은 모든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나친 행위 때문에 생겨난 앎’만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마약을 하면 기분이 좋다는 바르지 못한 앎인 무명을 지닌 채 살다가 어느 날 처음으로 마약을 했다고 합시다.
단지 마약이 좋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마약을 하고나서 새롭게 생긴 마음(식)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까요?
마약을 한 번 경험한 후에는 다시 기회만 주어진다면 쉽게 마약을 하고 싶은 마음, 곧 마약에 대한 새로운 마음(앎)이 머리에 기억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지나친 행위를 하고 그 지나친 행위 때문에 생겨난 식만이 바로 십이연기에서 말하는 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식은 마음이 알아야 하는 대상으로서 존재하지 않고 그 대상을 아는 마음이기 때문에 쉽게 알지 못합니다.
이 마음은 대상으로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없다는 뜻에서 잠재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식을 쉽게 알 수 없는 것이죠.
이 식을 모르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왜냐하면 식을 모르는 것은 지나친 행위의 과보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업을 알지만 그 업의 결과인 과보를 보지 못하니 업과 관련된 생각도 모두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어서 다음 세상에 태어나 업을 지은대로 과보를 받는다고 생각하죠.
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과보가 아닌 것을 과보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번 생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태어나기 전에 쌓았던 업 그대로 받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죠.
많은 불자들이 이와 같이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승이 업을 가르친 분임에도 업과 관련해 잘못된 견해만을 갖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식을 모르기 때문에 안타까운 것은 이것뿐이 아닙니다.
사람들 가운데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것이지?
지금 내가 하는 행위가 어떻게 될까?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 묻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나름 자신 있게 답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과보를 정확히 모르다보니 그 대답 또한 갖가지로 나오게 되고, 그것에 바탕을 둔 숱한 믿음이나 신앙도 생기게 되죠.
사람들은 그들이 중요시하는 체험이나 전통, 혹은 신비한 주술이나 종교적 신념, 철학 등에 따라 서로 다른 그들만의 말을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속에서 벌어지는 행위와 그 행위의 과보, 그것의 원인과 결과를 나름대로 가르쳐줍니다.
그럴싸하게 믿을 수 있게끔 답을 내리죠.
그러나 과보를 정확히 모른 채 내려진 그럴싸한 답은 서로가 서로를, 한 무리가 다른 무리를 서로 다르게 생각하거나, 아예 적이나 원수로 생각하는데 까지 이르게 합니다.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까닭은 행위의 결과인 식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업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니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죠.
적어도 현생에서 업은 어떤 일정한 원칙이 없어 보입니다.
좋은 일을 했는데도 나쁜 결과만 자주 생깁니다.
나쁜 짓을 저질렀는데 오히려 좋은 결과가 생기는 경우도 숱하게 만납니다.
그러니 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렇게 업을 이해할 수 없다보니 내생을 그럴싸하게 말하는 사람과 만나면 다음 생을 믿게 되고, 창조주 하나님을 그럴싸하게 말하는 사람과 만나면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무당이나 점쟁이도 믿게 되는 것이죠.
이런 어리석은 생각들이 없어지려면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인 식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식이 지닌 바른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 사람들이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게 된 가장 큰 까닭이라 해야겠죠.
이 세계를 지배하고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행위입니다.
사람들을 고귀하거나 천하게 하거나, 또는 잘 살거나 못살게 하는 것도 바로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모르는 듯합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행위와 그 행위의 과보인 식을 모르고 오해하기 때문이죠.
이것을 한 치 의심 없이 시원하게 알면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가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십이연기에서 말하는 식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행위를 하고 나서 그 행위를 경험한 기억이 어딘가에 새겨져 남아 있지만 자신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존에 쓰고 있는 잠재의식이나 무의식과는 조금 달리 여기서 말하는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은 자기가 저지른 행위 그대로를 기억한 앎이 그 사람 마음어딘가에 새겨진 것을 말합니다.
‘기억의 형태로 분명하게 새겨진 앎’이 바로 식입니다.
어떤 업을 지은 뒤, 그 행위는 비록 사라졌지만 이 앎은 기억의 형태로 계속 사람에게 남아 있다가 언젠가 그 조건을 만나면 다시 그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이죠.
훔치고 싶은 행동과 같은 나쁜 잠재의식들은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이 아니죠.
그런 마음은 그 행위를 한 번 경험한 뒤나, 또는 보고 듣고 난 뒤 그 행위를 괜찮다고 생각하는 앎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른 좋은 잠재의식도 마찬 가지죠.
좋은 행위를 한 번 하고난 뒤 그 행위를 스스로 좋아하고 그 행위에 만족감을 느끼는 앎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식은 태어날 때부터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식은 행위의 결과입니다.
잠재의식으로 표현하는 이 식은 다른 잠재의식과는 잘 구분해서 알아야 합니다.
뇌는 무엇을 보고 듣거나, 기억을 하거나, 생각을 하던 거기에 알맞게 일을 합니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거부할 것은 거부하고, 비교할 것은 비교하고, 기억할 것은 기억하는 일을 하죠.
일어나는 모든 마음을 그 사람이 모두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잠을 잘 때도 우리의 뇌는 일을 하고 있고, 거기에 따라 마음도 일어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식은 분명 뚜렷하게 드러나는 마음은 아니지만 이런 종류의 잠재의식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의 형태로 저장된 잠재의식을 말하는 것이죠.
여기서 잠재의식이라고 하는 까닭은 마음이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을 하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잠시 뇌의 활동과 잠재의식, 무의식에 대해서 살펴보고 가죠.
잠재의식은 각성 상태이긴 하지만 자기의식 없이 발생하는 정신적 활동으로
예를 들어 운전하는 일은 잠재의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은 꿈·최면·정신 분석 등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의식되지 않는 상태로, 일상의 정신 상태에 영향을 주고 있는 마음의 심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의식을 포함한 이러한 정신작용은 모두 뇌의 활동으로 설명되는데 이것을 이해하면 십이연기의 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뇌는 크게 좌뇌와 우뇌로 나누는데 이들 사이에는 많은 신경세포들이 서로의 소통을 위해 축색을 뻗고 있죠,
같은 성질의 신경세포들이 뻗는 축색들은 서로 모아져 거대한 다발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다발 중 뇌량이라는 것이 가장 큽니다.
또한 뇌는 발생 과정으로 보아 앞에서부터 전뇌, 중뇌, 후뇌로 크게 구분하는데, 전뇌에는 뇌의 80%를 차지하는 대뇌를 비롯하여 간뇌라고 하는 시상과 시상하부, 뇌하수체, 해마 등이 있죠.
중뇌에는 뇌간이라고 하는 뇌교와 연수가 포함되어 있고, 소뇌는 후뇌에 해당합니다.
대뇌 표면에서 3~4cm 깊이에 이르는 부분을 통칭하여 대뇌피질이라 하는데, 이것은 다시 전두엽, 두정엽, 측두엽, 후두엽으로 나눕니다.
전두엽은 대게 사고, 판단 등의 종합적인 정신작용의 중추이며 감각 및 운동의 중추입니다.
측두엽은 인지기능, 감정의 조절, 청각 및 언어 등을 담당하죠.
두정엽은 여러 가지 정보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지역이고, 후두엽은 주로 시각을 담당합니다.
시상은 후각을 제외한 시각, 청각, 미각, 촉각 등 모든 감각성 정보가 모이고 분배되며, 시상하부에는 식욕 및 성욕의 중추가 있습니다.
측두엽 안쪽 아래에 위치한 편도체는 불안, 공포 등의 감정을 조절하는 중추이고, 해마는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죠.
중뇌는 척수의 상단에 위치하며 뇌교와, 반사작용의 중추이며 호흡, 심장박동 등의 무의식 중추인
연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뇌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일을 합니다.
여러 가지 기능을 하며 우리 몸을 유지하기도 하고 복잡한 사고를 가능하게도 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뇌의 활동이나 의식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운전 등과 같은 잠재의식을 십이연기에서 말하는 그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이연기에서 말하는 식을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으로 말할 때, 그것은 행위를 하고 난 뒤 기억의 형태로 분명하게 새겨진 앎을 뜻하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5) 명색 (몸과 마음, na̅ma-ru̅pa)
명색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명색, 곧 몸과 마음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모든 몸과 마음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앞의 부분과 연결 지어 생각해보면 십이연기에서 말하는 명색은 그저 단순히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몸과 마음은 지나친 행위 때문에 앎(식)과 함께 생기는 몸과 마음입니다.
주의해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고 그저 몸과 마음이라고 하면 단순히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모든 몸과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행위 때문에 생기는 몸과 마음이 아니면 여기서 말하는 명색이 아닙니다.
업 때문에 생긴 물질만을 여기서 명색이라고 하는 것이죠. (???)
여기서 마음(명)은 과보의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심소를 말하죠.
업 때문에 생긴 물질(색)은 지나친 행위가 만들어낸 물질을 말합니다.
사람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으로 이 물질은 계속 생겨납니다.
지대, 수대, 화대, 풍대 이 사대물질 가운데에서도 업 때문에 생긴 사대물질도 있고, 다른 조건으로 생긴 사대물질도 있는데 여기서는 다른 조건으로 생긴 사대물질은 들어가지 않습니다.
명색에 대해서는 이것 말고 다른 특별히 알아야 할 것은 없습니다.
물질은 네 가지 원인으로 생깁니다.
업, 마음, 온도, 음식이 바로 그것이죠.
이것이 사대물질에 영향을 주어
물질을 생기게 하는 네 가지 원인입니다.
아비담마에서는 업에서 생긴 물질을 설명할 때
업을 과거의 마음에 있었던 유익하거나 해로운 의도로 설명합니다.
또한 무색계 4가지 마음은 무색계에 태어나게 하므로 업에서 생긴 물질을 일어나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나친 행위를 업으로 알아 그것 때문에 생긴 새로운 물질로 알아야 합니다.
6) 육입 (여섯 감각기관, saḷa̅yatana)
육입처를 뜻하는 saḷāyatana(싸라야따나)의 뜻을 알아보죠.
싸라야따나는 말 그대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라는 뜻입니다.
감각기관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 여섯 가지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여섯 가지 대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라고 합니다.
지나친 행위를 하고 난 뒤의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은 분명 그 이전의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과보로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것이죠.
이것은 지나친 행위를 경험한 새로운 인식기관이 형성된 것으로 행위의 과보로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7) 촉 (부딪힘, phassa)
부딪힘을 나타내는 촉은 대상과 문이 만나는 것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감각기관과 대상의 부딪힘이죠.
여기에서 말하는 촉도 부딪힘 모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행위 때문에 생기는 부딪힘’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나친 행위를 경험하고 그 과보로 새롭게 만들어진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대상과 부딪히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이것은 지나친 행위를 저지르기 전의 부딪힘과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딪힘도 과보의 회전에 포함되는 것이죠.
새롭게 만들어진(첨가)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여러 가지 대상들이 와 부딪힙니다.
이렇게 감각기관에 대상이 와서 부딪히는 것만을 ‘부딪힘, 촉’이라고 해야겠죠.
8) 수 (느낌, vedana̅)
느낌은 과보의 회전에 들어있는 것 가운데 마지막 것입니다.
느낌이 무엇일까요?
대상과 감각기관이 만나 부딪힘이 생길 때 그 대상에 대해 좋다거나 싫다고 아는 것도 함께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느낌’입니다.
이 앎은 지혜나 앎, 상(?)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느낌은 앎의 일종입니다.
(어원, 구분해서 주처리)
이 느낌이 아는 것은 현재의 대상을 ‘좋거나 싫음, 좋지도 싫지도 않음’가운데 어느 하나로 아는 것입니다.
저울추와 같습니다.
저울추는 물건의 무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양쪽 물건의 무게가 어떤 것이 많은지 적은지, 같은지 알 수 있죠.
여기서도 사람이 지닌 모든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행위 때문에 생긴 느낌만을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9) 첫 번째 연기의 바퀴
지금까지 살펴본 일곱 갈래로 ‘둑카의 윤회’가 한 바퀴 굴러가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나머지 다섯 갈래가 지닌 뜻은 잠깐 뒤에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에서 둑카가 계속 도는 모습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죠.
‘지나친 행위가 둑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모르고서 하는 행위가 지나친 행위, 곧 상카라입니다.
그 지나친 행위를 저지른 뒤 기억의 형태로 마음에 새겨진 앎이 식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몸과 마음이 명색입니다.
여섯 가지 새로운 감각기관도 생기겠죠?
새롭게 생긴 감각기관과 대상이 닿는 것이 부딪힘, 곧 촉입니다.
새로운 감각기관과 부딪힘이 생길 때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으로 아는 것이 느낌입니다.
이 일곱 갈래에서 번뇌의 회전은 무명이고, 업의 회전은 지나친 행위, 곧 상카라이고 나머지 갈래가 과보의 회전입니다.
이 세 가지 회전 중에서 사람들이 뚜렷하게 아는 것이 지나친 행위인 업의 회전입니다.
업의 회전은 쉽게 볼 수 있지만 나머지 두 가지 회전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붓다는 이것을 스스로의 지혜로 보고 알았죠.
연기라는 이름으로 윤회를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회전을 완벽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지나친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마다 아무런 원인 없이 지나친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그 원인이 있습니다.
번뇌를 이기지 못하고 지나친 행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지나친 행위를 하게 되는 원인은 ‘무명’이라고 하는 번뇌입니다.
무명 때문에 지나친 행위를 저지른다고 해야겠죠.
그 지나친 행위엔 그 행위의 과보도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식에서부터 느낌까지 다섯 갈래입니다.
그 다섯 갈래는 지나친 행위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지나친 행위의 입장에서 보면 식을 포함한 다섯 가지 지나친 행위의 과보들이라고 해야죠.
사람이 어떤 한 가지 지나친 행위를 저지르게 되면 그 지나친 행위엔 원인도 있고, 과보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지나친 행위에 대해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둑카’를 꿰뚫어서 안 것입니다.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 지나친 행위(업)의 원인도 모르고, 그 과보도 모른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네 번째 마당 - 다시 윤회하는 모습
1) 애 (갈애, taṇha)
지나친 행위가 되풀이되는 모습인 윤회는 한 바퀴 돌고나서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윤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다시 한 바퀴 도는 모습을 설명해야 넉넉해집니다.
이와 같이 다시 한 번 도는 모습을 보여주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을 알 수 있겠죠.
과보의 회전 마지막인 느낌에 이르렀을 때 윤회의 첫 번째 바퀴가 끝났습니다.
이것으로 윤회의 수레가 굴러가는 것이 끝나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번뇌의 회전인 갈애가 다시 느낌을 기대어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갈애는 무엇일까요?
갈애는 taṇha(딴하)를 옮긴 것으로 바와를 갈망하는 것이죠.
바와는 지나친 행위, 곧 업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업 때문에 생긴 ‘식, 명색, 육입, 촉, 수’위에 다시 새로운 대상이 와 부딪칩니다.
대상은 바깥의 새로운 대상입니다.
그 대상과 감각기관이 만날 때 생기는 느낌은 앞에서 경험했던 지나친 행위와 관련이 있는 느낌입니다.
그 느낌은 새로운 대상을 느끼지만 그것의 바탕은 지나친 행위이기 때문에 그 새로운 대상을 느낄 때도 지나친 행위를 했을 때의 느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결국 그 느낌을 줄 수 있는 지나친 행위를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죠.
이 마음이 바로 갈애입니다.
이 갈애는 느낌을 기대어 일어납니다.
느낌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것이죠.
보기를 들어 설명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남의 마누라와 바람을 피우면 그 경험이 마음속에 남겠죠.
그것이 바로 앎, 곧 식입니다.
그 기억을 간직한 새로운 몸과 마음도 더불어 생기고, 동시에 새로운 감각기관도 생깁니다.
모두 지나친 행위 때문에 생겼으니 지나친 행위의 동료들이죠.
이 위에 드러나는 대상의 부딪침을 느낄 때 어떻게 느낄까요?
그리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죠.
특히 대상이 여자라면 그 느낌은 과거에 바람 폈을 때 느꼈던 느낌 그대로 느끼겠죠.
이처럼 갈애는 어떤 것을 간절히 바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떤 것을 간절히 바라는 것일까요?
과거에 했던 지나친 행위를 그리워하고, 기억하고,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하고 싶어 한다고 해서 모두 갈애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느낌을 기대어 갈애가 일어나기 때문에, 또 그 느낌도 지나친 행위 때문에 일어나는 느낌이기 때문에, 그 지나친 행위를 다시 하고 싶은 마음만을 갈애라고 해야 합니다.
2) 취 (취착, upa̅da̅na)
취착에 대해서 공부해볼까요?
취착을 뜻하는 upādāna(우빠다나)는 upa(우빠)와 ādāna(아다나)가 맺어져 만들어진 낱말입니다.
우빠는 아다나의 뜻을 강조하는 말이고, 아다나는 붙잡는다는 뜻이므로 우빠다나는 ‘꽉 붙잡다, 지나치게 집착하다, 붙잡지 말아야 할 것을 잡다’라는 뜻입니다.
흔히 ‘취(取), 취착(取着), 꽉 붙잡음’ 으로 옮기고 있죠.
앞에서 공부했던 갈애와 뜻이 같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갈애가 자주 생기다 보니 그 힘이 더 강해진 것이라는 점이죠.
갈애와 취착은 모두 번뇌에 해당하는 것이고, 한 번 경험했던 지나친 행위를 다시 하고 싶어 하는 충동입니다.
십이연기의 열두 갈래에서 무명에서 느낌까지는 과거의 삶속에서 행위의 윤회입니다.
윤회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윤회로 이어지게 됩니다.
갈애와 취착을 보여줌으로 새로운 윤회가 시작되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죠.
지금 새로운 지나친 행위를 하기 위해 번뇌로서 갈애와 취착이 일어난 것입니다.
3) 유 (행위, bhava)
취착을 기대어 바와가 일어나는 것은 번뇌가 업을 다시 일으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유’나 ‘존재’로 옮기고 있는 바와가 지닌 뜻을 살펴볼까요?
바와는 상카라와 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업과 바와는 같은 뜻을 지닌 다른 말이죠.
붓다는 바와를 지나친 행위나 업을 가리키는 말로 썼습니다.
바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명을 지속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바와는 지나친 행위이며 업입니다.
갈애와 취착이라고 하는 번뇌를 기대어 생긴 것입니다.
첫 번째 바퀴에서 번뇌와 업을 가리키는 이름과 두 번째 바퀴에서 번뇌와 업을 가리키는 이름이 서로 다릅니다.
시간과 차례가 달라 이름만 달리 할 뿐 그 뜻은 서로 같습니다.
첫 번째 바퀴에서 번뇌의 회전에 갈애와 취착이 포함되어야 하듯, 두 번째 바퀴에서 갈애와 취착에 무명이 들어있다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업의 회전도 마찬가지로 첫 번째 바퀴의 상카라를 바와로 말해도, 두 번째 바퀴에서의 바와를 상카라라고 해도 됩니다.
4) 생 노 사 (ja̅ti, jara̅maraṇan)
이제 두 번째 바퀴에 들어있는 과보를 얘기해 보죠.
‘생과 노사’로 두 갈래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 첫 번째 바퀴에서 보여준 과보와는 서로 다릅니다.
이 두 가지는 첫 번째 바퀴에서 과보로 보여준 다섯 갈래의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두 갈래를 말하면 앞에서 말한 다섯 갈래도 함께 포함하고, 다섯 갈래를 말하면 이 두 갈래도 포함한다고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식, 명색, 육입, 촉, 수’ 다섯 갈래가 ‘생, 노사’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 노사’는 생명체[5온]의 탄생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식, 명색, 육입, 촉, 수’ 이 다섯 갈래의 상태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생, 노사’는 앞에서 말한 다섯 갈래를 제외한 다른 것은 없다고 알아야 합니다.
5) 두 번째 연기의 바퀴
지금까지 연기법의 열두 갈래가 지닌 바른 뜻과 더불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기대어 생기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연기법은 둑카가 열두 갈래로 두 바퀴 도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바퀴가 끝나면 두 번째 바퀴가 어떻게 연결될까요?
이것을 알면 끊임없이 돌고 도는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바퀴에서 무명은 번뇌의 회전에 속하는 것이고, 번뇌의 회전을 기대어 상카라라고 하는 업의 회전이 생깁니다.
또 이것을 기대어 ‘식, 명색, 육입, 촉, 수’라고 하는 과보의 회전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번뇌 때문에 업이 생기고, 업 때문에 과보가 생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식, 명색, 육입, 촉, 수’라고 하는 과보의 회전 때문에 갈애와 취착이라고 하는 번뇌의 회전이 다시 일어납니다.
이것을 기대어 바와라고 하는 업의 회전이 생깁니다.
이것을 기대어 ‘생, 노사’라고 하는 과보의 회전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보면 과보의 회전이 번뇌의 회전을 다시 일으키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바퀴에서도 과보의 회전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끝이 다시 바퀴의 처음인 번뇌의 회전을 일으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되풀이 되는 것이죠.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번뇌 때문에 업이 생기고, 업 때문에 과보가 생기며, 과보 때문에 다시 번뇌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돌고 돈다는 것입니다.
연기는 사성제 가운데 ‘둑카라는 거룩한 진리’ 에 대한 자세한 풀이입니다.
‘둑카라는 거룩한 진리’는 꿰뚫어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꿰뚫어 알아야 할까요?
하나를 기대어 다른 하나가 생기며
번뇌에서 업, 업에서 과보, 다시 과보에서 번뇌로
끊임없이 돌고 도는 연기의 이치를 아는 것이 바로 둑카를 꿰뚫어 아는 것입니다.
상카라, 곧 지나친 행위가 바로 둑카입니다.
지나친 행위는 아무런 원인 없이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지나친 행위는 그 결과도 있습니다.
둑카도 이와 같이 원인도 있고, 그 결과도 있습니다.
이렇게 둑카가 끊임없이 돌고 도는 모습을 아는 것이 ‘둑카를 꿰뚫어 아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마당 - 연기와 업
1) 업에 대한 바른 이해
기대어 일어남, 곧 연기를 아는 것은 업과 업의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입니다.
곧 업에 대한 가르침을 아는 것이죠.
불교는 ‘업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업에 대한 가르침을 아는 것이 불교를 아는 것이죠.
연기는 업에 관한 가르침을 자세하게 펼쳐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바른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뒷날 불자들은 업에 관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업을 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업을 이번 생에 태어나기 전, 과거 어떤 생에서부터 지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받아야 하는 것도 오직 그 때 지은 업의 과보라고 생각을 하죠.
번뇌와 번뇌 때문에 저지른 업이 죽은 다음에 과보를 주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견해라고 생각하질 못합니다.
그리고 업의 결과인 과보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똑같은 과보를 준다.’라는 것도 잘못 받아들이고 있죠.
다른 사람의 팔을 자르면 언젠가 자신의 팔도 잘리는 것 정도로 ‘업에 따른 똑같은 과보’를 생각합니다.
남을 죽이면 자신도 죽임을 당한다거나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면 언젠가 자신의 물건도 도둑질당한다고 생각하죠.
도둑질이나 범죄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게 되는 것도 도둑질과 범죄의 과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업을 바르게 알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다른 사람의 팔을 잘라서 자신의 팔도 잘린다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입니다.
업이 과보를 준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붓다가 말한 과보는 업을 저지르고 나면, 업을 저지르는 동안에 과거에 느꼈던 대상에 대한 느낌이 떠올라 다시 그 업을 짓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하나 뿐인 업의 과보입니다.
똑같은 결과를 준다는 것이죠.(빨리원문과 병기)
자기가 저지른 그대로 다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업을 짓는 동안에 경험한 그대로 새로운 앎과 몸과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을 경험한 새로운 감각기관들도 생기겠죠?
새로운 대상과 부딪혀도 그러한 경험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대상은 정말 과거에 업을 짓는 동안에 있었던 대상이 아닙니다.
결국 현재의 대상을 통해 과거의 느낌을 다시 느끼기 위해 지금 현재 있는 대상을 왜곡해서 느끼게 됩니다.
그 대상을 다시 간절히 바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죠.
이것이 업이 주는 참된 결과, 즉 과보입니다.
업을 짓고 난 후 업과 똑같은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도둑질을 하면 남들이 알건 모르건 도둑놈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다시 도둑질을 하고 싶은 번뇌를 남겨 조건만 되면 다시 도둑질을 하게 하는 결과를 낳죠.
업이 주는 과보는 이것 말고 다른 것이 없습니다.
다른 것을 말한다면 그 업 때문에 끊임없이 생기는 결과를 말해야겠죠.
‘끊임없이 생기는 결과’라는 것은 그 과보 때문에 다시 번뇌가 생기고, 번뇌 때문에 또 그 업을 저지르고, 다시 과보가 생기고, 다시 번뇌, 업, 과보로 계속 이어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끊임없이 하게 되는 악순환을 바로 ‘끊임없이 생기는 결과, 곧 윤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 때문에 그의 삶은 점점 불행에 빠지게 되고 마음의 상처만 입게 되겠죠.
이것이 과보가 삶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빼고 다른 업의 과보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죽였다고 자기도 죽임을 당한다거나 도둑질을 했다고 도둑질을 당하는 것이나 범죄를 저질러 발각되어 교도소에 들어가는 것들이 과보를 받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표현이 좀 그렇습니다만 그것은 멍청해서 그런 것이죠.
범죄를 저질러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가는 것도 자신이 어리석고 멍청해서 그렇게 당한 것이라 해야겠죠.
멍청하지 않고 교활하고 치밀한 사람들은 잘 잡히지 않습니다.
잡히더라도 온갖 방법을 써서 쉽게 풀려나는 경우도 많죠.
이런 것들은 붓다가 말하는 업의 과보가 아닙니다.
자기가 어리석어서 그렇게 당한 것이죠.(비유 검토- 바른 과보의 의미)
그러나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행복하다거나 과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잘못된 행위로 인해 그만큼의 과보를 받고 결국은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업이 주는 진짜 과보는 한번 그 업을 짓고 난 다음에 그 업을 짓는 동안에 마음에 새겨진 경험이 사라지지 않고, 다시 어떤 대상을 만나더라도 그 대상과 동일시해서 그 경험을 다시 느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업과 같은 행위를 다시 하고 싶어 하는 마음, 곧 번뇌가 일어나고 또 그 업을 짓게 됩니다.
결국 과거에 지었던 업을 다시 짓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업이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입니다.
이것이 윤회고, 이것이 둑카의 망가짐 또는 무너짐이죠.
붓다는 사람의 행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알고 자세하게 일러 주었습니다.
지나친 행위는 일어나서 사라지는 성품이 있다는 것도 말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나친 행위, 곧 업의 특성을 아는 것입니다.
업의 특징들은 바로 ‘무상, 고, 무아’ 로서 그것들은 쓸모없고, 망가진 것이고, 나쁜 것이죠.
이것을 알면 지나친 행위를 싫어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청정으로 가는 길입니다. (결론 부분 때문에 새로 첨가)
여섯 번째 마당 -『십이연기경』공부를 마치며
지금까지 연기법에서 열두 갈래가 지닌 하나하나의 바른 뜻을 살펴보았고, 그 열두 갈래를 번뇌, 업, 과보의 회전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또 윤회가 지닌 두 가지 뜻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윤회에 대한 오해와 바른 뜻도 살펴보았습니다.
인과응보가 지닌 바른 뜻도 드러내었습니다.
연기법은 둑카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라는 것도 말했습니다.
근본요소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생멸을 하기 때문에 ‘무상’ 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업이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그 자체가 ‘무너짐, 망가짐’이라는 것도 말했습니다.(설명 약함)
사람이 윤회 속에서 나고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둑카가 윤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업의 생멸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지나친 행위가 무엇인지, 또 그 행위의 원인과 결과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겠죠.
윤회를 본다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짓인 지나친 행위가 ‘망가진 것’이고 ‘쓸모없는 것’임을 보는 것입니다.(본문 설명 약함)
그러기 위해서는 십이연기 전체의 흐름을 보아야만 합니다.
십이연기를 이루는 열두 갈래 하나하나는 다음 하나가 생기기 전에 모두 소멸합니다.
이렇게 소멸하는 것을 보는 것이 ‘제행무상’을 보는 것이라고 잘 못 생각합니다.
그러나 붓다가『십이연기경』을 설한 것이 이 열두 갈래 하나하나가 생멸하는 것을 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굳이 열두 가지를 이렇게 하나를 기대어 다른 하나가 생기는 모습으로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붓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번뇌와 업과 과보가 어떻게 기대어 일어나는지, 그래서 그것이 어떻게 사람 안에서 윤회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아는 것이죠.
붓다는 세상을 뜨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부하였습니다.
“비구들이여! 이제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제행은 소멸하는 것이니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라!”
여기서 ‘소멸하는 것’으로 옮기는 vaya(와야)가 지닌 바른 뜻은 하지 말아야 할 행위인 둑카 그 자체의 성품이 ‘망가진 것, 곧 파괴된 것’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제 붓다가 남긴 마지막 유훈을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옮기는 것으로 공부를 정리할까 합니다.
vayadhammā sam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a
잘 들어라. 오, 제자들이여.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겠다.
모든 구성된 것들은 변하게 되어 있다.
방일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하지 말아야 할 모든 헛짓거리(제행)는
그 자체가 망가지고 쓸모없는 것이니(무상)
늘 주의 깊게 자신의 행위를 살피며
여덟 가지 바른 길을 온전하게 닦아가라.
십이연기에 대해서 공부를 마쳤습니다.
이해가 잘 되시나요?
기존의 십이연기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는 것도 공부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번 살펴보고 마무리하기로 하죠.
|
테라와다 연기 |
붓다의 연기 |
1) 윤회의 주체 |
Ÿ d 식 (재생연결식-바왕가- 수띠) |
Ÿ d 더러움에 물든 몸과 마음 : 오취온 - 둑카 |
2) 연결된 삶 |
전생, 현생, 내생(삼세) |
현생 |
3) 과보의 형태 |
삼세에 걸쳐 지은대로 받는다. |
업과 똑같은 과보를 현세에서 그 즉시 받는다. |
4) 세 가지 회전 |
번뇌, 행위, 결과가 삼세에 걸쳐 회전 |
번뇌, 업, 과보가 현생에서 회전 |
5) 무명에 대한 해석 |
Ÿ d 사성제를 모르는 것 Ÿ d 사성제의 중심인 고를 모른다. Ÿ d 苦 - 세간의 모든 마음(81) - 모든 심소(51) - 모든 물질 (28) Ÿ d 명색 각각 근본실재요소의 성질을 알지 못하는 것 Ÿ d 어리석음의 심소이다. |
Ÿ d 사성제를 모르는 것 - 둑카를 둑카로 모르는 것 - 둑카를 즐거움으로 아는 것 Ÿ d dukkha = du+kara - 나쁘게 행하다. 나쁜 행위 - 하지 말아야 할 행위 <둑카=연기=윤회> |
6) 상카라에 대한 해석 |
① 덕스럽지 못한 행 ② 덕스러운 행 ③ 흔들림 없는 행 →총 29가지 마음 중 공통 심소인 쩨따나(의도)가 바로 상카라이다. |
Ÿ d 특별한 행위, 지나친 행위, 넘치는 행위로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무명 때문에 한 행위 만이 상카라이다. Ÿ d 필요에 의해서 한 행위는 상카라가 아니다. |
7) 식에 대한 해석
|
Ÿ d 과보의 마음 Ÿ d 입태시 첫 번째 일어나는 재생 연결식 19가지 ① 악처의 재생연결 ② 욕계 선처의 재생연결 ③ 색계의 재생연결 ④ 무색계의 재생연결
|
Ÿ d 과보의 마음 Ÿ d 상카라라는 조건 때문에 생긴 감추어진 마음 Ÿ d 경험에 대한 잠재된 기억 Ÿ d 다음 업을 이어주는 마음 Ÿ d 다음 행위의 조건이 되는 마음 Ÿ d 다음 행위로 옮겨가게 하는 마음 → 무명 때문에 한 행위는 반드시 업이 되고 업은 반드시 찌꺼기가 남는다. |
8) 명색에 대한 해석 |
Ÿ d 名-재생 연결과 관련된 심소 Ÿ d 色-몸, 성, 심장의 깔라빠 |
Ÿ d 상카라로 만들어진 새로운 몸과 마음 |
9) 육입에 대한 해석 |
Ÿ d 여섯 가지 인식 기관에 6근이 가지는 순수한 감각작용이 생기는 것 |
Ÿ d 새로운 인식기관의 형성 |
10) 촉에 대한 해석 |
Ÿ d 대상과 부딪치게 하는 어떤 힘 Ÿ d 과보의 마음과 연결된 감각접촉 |
Ÿ d 대상을 계기로 기억과 부딪침
|
11) 수에 대한 해석 |
Ÿ d 대상과 부딪쳤을 때 즐겁거나 괴롭거나 혹은 덤덤함을 경험하는 것 |
Ÿ d 부딪침의 느낌 |
12) 애에 대한 해석 |
Ÿ d 탐욕(로바)의 심소 |
Ÿ d 목마름-과거에 지었던 업을 다시 하려는 것 |
13) 취에 대한 해석 |
Ÿ d 탐욕(로바)의 심소 |
Ÿ d 강력한 갈애 - 과거에 지었던 업을 꽉 붙잡는다. |
14) 유에 대한 해석 |
Ÿ d 상카라 - 29가지 쩨따나(의도) ① 업유-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를 생기게 하는 업을 행하는 것으로 선하거나 해로운 의도, 즉 재생을 있게 하는 모든 선하거나 해로운 업 ② 생유-(32가지) 과보의 마음들과 이들과 관련된 마음부수들과 업에서 생긴 물질들 |
Ÿ d 상카라=업=유 Ÿ d 파워가 더 커짐 Ÿ d 됨, 혹은 삶 |
15)생에 대한 해석 |
Ÿ d 과보의 마음 19중 하나가 입태하여 모체에 있는 암울한 기간을 거쳐 두려운 세상으로 나오는 것 |
Ÿ d 새로운 오취온의 생겨남 |
16) 노사 |
Ÿ d 생명체의 죽음 |
Ÿ d 변해서 망가짐 |
기존의 불교에서는 십이연기를 심, 심소, 물질에 모두 배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확히 윤회를 삼세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존 불교에서 설명하고 있는 무명이나 식, 그리고 유에 대한 해석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부분입니다. 간단한 용어 설명은 아래를 참고하시거나 청정도론을 보시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연기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겠죠? |
1)-1 식을 재생연결식, 바왕가의 흐름, 수띠로 나눈 것은 그 역할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식은 입태시 재생 연결식으로 생의 첫 의식이 되고, 잠재되어 잠잘 때, 혹은 의식을 잃었을 때와 같은 경우에도 바왕가로 흘러가며 마지막으로 죽을 때 죽음의 마음으로 다음 생으로 옮겨간다. 이것은 생을 이어주고 삶의 바탕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다가 다음 생으로 옮겨가게 한다고 한다.
6)-1 29가지 마음은 덕스럽지 못한 행에서 욕계 악업의 12가지 마음을, 덕스러운 행에서 욕계 선업 8가지 마음과 색계 선업 5가지 마음을, 흔들림 없는 행에서 무색계 선업 4가지 마음을 합한 것이다.
총 29가지 마음 중 공통 심소인 쩨따나(의도)가 바로 상카라이다.
8)-1 물질은 단독으로 생기지 않는다. 때문에 항상 덩어리로 생기는데 이것을 깔라빠라고 한다.
이 명색을 기점으로 마음과 심소와 물질이 비로소 만족된다고 설명한다.
[* 편집자(뗏목) 주 : 대부분의 사람들은 힌두교의 사후윤회, 사후업보를 뒷받침하기 위해
12연기를 유아견(상견) 입장에 서서 3세양중인과로 설명하는데
위 내용은 그런 내용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붓다의 원가르침[근본불교]에 좀 더 가깝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는 내용이기에 음미해볼만한 좋은 글이라고 봅니다.
12연기를 잘못 이해하시게 되면 붓다의 모든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게 되기에
12연기에 대한 바른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연기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무아를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붓다의 모든 가르침을 포섭하는 4성제도 바르게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현 남방불교든 북방불교든 그 근본부터 힌두사상으로 변질, 왜곡되어 있습니다.
5온은 무상한 현상적 현실적 연기적 인간 존재를 의미하고,
통상 나라고 부르는 명칭, 개념입니다.
5취온은 5온에 대한 번뇌, 취착의 무더기입니다.
즉 5취온은 몸과 마음[명색, 5온]이 아니라
5온에 대한 번뇌, 집착으로 생긴
삿된 견해[유아견(상견, 단견)], 탐진치 등 오염원, 10결, 집성제입니다.
5취온 자체가 고성제가 아니라 5취온고가 고성제입니다.
5취온은 고성제의 원인으로 집성제입니다.
(* 참고 : [5온]과 [5취온]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알지 못하면 [연기법]을 알지 못해 [무아]도 알지 못하고 [불법]을 이해할 수 없다! http://cafe.daum.net/bd-dm/JPlw/38)
12연기상의 행(상카라)은 어리석은 의도로 의행[의업]만 해당할뿐
구업과 신업은 해당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12연기상의 식은 재생연결식이 아니라
어리석은 의도[행]로 인한 어리석은 인식[식]입니다.
12연기상의 명색은 명색에 대한 어리석은 인식 즉 5취온을 의미합니다.
12연기상의 6입은 6근에 대한 어리석은 인식입니다.
12연기상의 유는 존재(5온)에 대한 취착심이므로 5취온입니다.
12연기상의 생은 육체적 탄생이 아니라 5취온의 드러남입니다.
12연기상의 노사는 생로병사에 대한 취착심[5취온, 집성제]으로 인한
온갖 정신적 괴로움[5취온고, 고성제]입니다.
생, 노사 두 가지를 합쳐 생로병사 우비고뇌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참고 : 12연기 유전문 역관과 순관을 쉽게 풀어드릴까요? http://cafe.daum.net/bd-dm/JPlw/41)
남방불교는 기본적으로 업감연기 입장이고, 업에 촛점을 두고 12연기를 설명하다보니
마하시 사야도처럼 [번뇌=>업=>과보...]로 설명해 놓으신 것 같습니다.
업론은 불교 고유의 가르침도 아닐뿐만 아니라
무아견[여실지견, 정견, 중도, 연기법]을 취하는 불교에서는
자이나교 등[유아견(상견)]에서와 같은 사후윤회, 사후업보,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기에
연기를 설명하시면서 업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법은 그리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12연기 유전문은
괴로움의 발생 원인[5취온, 집성제]으로
온갖 정신적 괴로움[5취온고, 고성제]이 발생한다는
괴로움의 발생 구조를 설명해놓은 것입니다.
무아견(여실지견, 정견, 중도, 연기법) 입장인 불교에서 윤회라는 개념을 굳이 사용한다면
힌두교, 자이나교 등[유아견(상견) 입장]에서와 같은
사후윤회, 사후업보, 사후세계 등은 인정할 수 없으므로
오직 바로 지금 여기 현실세계에서
5취온[어리석은 의도(行), 어리석은 인식(識) 등. 유아견(상견, 단견), 탐진치 등 오염원. 10결. 집성제]이라는 원인(因)으로
5취온고[고성제]라는 결과(果)가 발생하여 계속 악순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불교수행이고, 8정도이고, 도성제이고, 12연기 환멸문입니다.
8정도는
현상[5온, 5취온]을 여실지견[정견, 무아견, 중도, 연기법]하여
5온의 무상, 무아를 통찰하고, 5취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여
5취온[집성제]을 염오, 이욕, 소멸함으로써 [5취온(집성제) 소멸, 도성제]
불교(수행)의 목적인 해탈(자유), 열반(평온)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5취온고(고성제) 소멸, 멸성제]
* 참고
뗏목 12.01.01. 12:33 물론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힌두교의 사후윤회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지요.
불교에서의 윤회 개념은 바로 지금 여기 현실에서 일어나는
5취온[집성제]=>5취온고[고성제]=>5취온=>5취온고... 윤회입니다.
중2야님이 설명한 방법은 3요소로 나누어 [번뇌=>업=>과보]로 설명하셨지요.
마하시 사야도는 그런 3요소로 3세에 걸쳐 양중인과로 사후윤회를 설명했지요.
3세양중인과로 연기를 설명하는 방법은 불교의 연기와 무아의 법리에 전혀 맞지 않고,
붓다께서 비판하고 부정해버린 힌두교의 사후윤회를 옹호하는 입장입니다.
musim 11.12.31. 15:55 중2야님께서는 무슨 윤회를 말씀하시는지.... 답글 | 삭제 | 신고
뗏목 11.12.31. 21:14 불교의 전반적인 내용을 거의 다 언급하는 글을 쓰다보니
담아야 될 내용이 너무 많고,
더군다나 나의 주관적인 사견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경전을 근거로 설명해야 하니 쓸 내용의 분량이 대폭 늘어나게 되어
연기 부분을 별도로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중점을 두고
교리와 수행 부분으로 나누어 2권 분량으로 서술하여 강조를 좀 해두었을뿐입니다.
연기 부분만 별도로 떼내어 설명해도 한 권의 분량이 될 것입니다.
사실 불교는 연기가 붓다 가르침의 모든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5온, 5취온, 4식, 4식주, 12연기, 4성제[8정도], 4법인 등이 다 연기의 내용입니다. 답글 | 수정 | 삭제 | 신고
중2야 11.12.31. 16:08 어떻게 고로 발전해가나 하는건데 지금까지는
아비담마의 내용들이죠
그 범주에 머물러 있죠
저나 지인은 아리아쌋짜[4성제] 만을 말합니다
물론 그 것이 틀렸다는 것보단 미진하다 말씀드리는 건데요
지금 건네 드리지 못하는 법문이 있습니다
대전가면 드릴께요
말씀하신 내용이 어떻게 고로 발전하나죠?
막연한 내용이 아닌거죠
어떠한것은 상황에따라 고가 되기도하고 안되기도 합니다
오취온이 전부 고는 아니란거죠
자연적인 현상이 될수도 있고 고로 발전할수도 아무 렇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죠
건강하세요 답글 | 삭제 | 신고
┗ 뗏목 12.01.01. 11:35 5취온의 개념을 바르게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온갖 정신적 괴로움[고성제]을 일으키는 원인들[집성제]을 간단히 5취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고의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5취온이 아닌 것입니다.
5취온이 아닌 것은 수행에 별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고가 발생하는 기본적인 원인[집성제]은
무상한 것[5온]을 탐진치로 항상하도록 붙잡기[취착, 집착] 때문에
괴리가 생겨 5취온고가 발생[고성제]하는 것입니다.
탐진치로 붙잡지 않으면 5취온고가 발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파일 자료가 있으면 운영자 자료실에 그 자료를 올려보시길 바랍니다.
그냥 책이라면 언제 만날 기회에 그때 보고 싶군요. ^^ 수정 | 삭제 | 신고
뗏목 12.01.01. 07:50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고성제 부분입니다.
무엇이 붓다께서 말씀하신 고냐 하는 것이지요.
붓다의 가르침은 고에 대한 모든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자 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불교는 학문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실용적인) 가르침이기에
고성제의 고는 붓다께서 지금 여기 현실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5취온고인 것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정신적 괴로움만이 문제 해결의 대상입니다.
정신적 괴로움이 육체적 괴로움도 유발하게 되니
육체적 괴로움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해결할 수 없는 부분도 있기에
붓다의 가르침은 온갖 정신적 괴로움[5취온고, 고성제]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르침으로 보는 것입니다. 답글 | 수정 | 삭제 | 신고
┗ 뗏목 12.01.01. 12:38 4성제의 전반부[고성제, 집성제]는
12연기 유전문으로 어떻게 5취온고[고성제]가 발생하게 되는지를 설명해놓은 것이지요.
온갖 정신적 괴로움의 발생[5취온고, 고성제]입니다.
그 과정을 논리적 인과관계로 자세히 설명해놓은 것이 12연기 유전문입니다.
중2 야님이 [번뇌=>업=>업보]로 계속 반복[회전, 윤회]하며
괴로움이 증장해나가는 것으로 설명하는 방법도 설득력을 가집니다.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설명 방법보다는 훨씬 현실적이고 수승한 설명방법이지요. 수정 | 삭제 | 신고
[* 편집자 주 : 남방불교에서 일반적으로 12연기를 설명하는 방식.
참고 : 12연기를 3세양중인과로 설명하니, 어떻게 연기법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http://cafe.daum.net/bd-dm/JJ0y/30]
┗ 뗏목 12.01.01. 07:57 12연기를 이해하는데 있어 유의해야 할 점은
표현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전에서 설명해놓은 자구에 얽매이면 연기를 바르게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표현이 축약되어 있기에 오해할 수 있어 살을 붙여 설명해야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됩니다.
12연기는 5온의 발생을 설명하고자 하는 가르침이 결코 아닙니다.
현존하는 5온에서
어떻게 5취온이 발생하고 증장[집성제]해
5취온고가 발생[고성제]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12연기법입니다.
12연기 각지 모두가 한 순간에 다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12연기의 행은 의도(사유)[의행]일뿐 업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업이라고 해놓으면 당연히 구업, 신업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수정 | 삭제 | 신고
중2야 11.12.31. 17:23 살을 붙여 주십사 하는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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뗏목 12.01.01. 07:22 자이나교 등에서 업은 구업, 신업이 주류이고,
사후업보를 인정하기에 업을 아주 중요한 내용으로 다루지만
연기와 무아를 근본으로 삼는 붓다의 가르침[불교]에서는
업은 불교의 고유한 가르침도 아닐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는 사후업보를 인정하지도 않기에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붓다의 원가르침[근본불교]이 농축되어 있는 제법본경을 보시면
업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업을 일으키는 행[의도]은 아주 중요시합니다.
즉 의도를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괴로움이 발생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시에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답글 | 수정 | 삭제 | 신고
┗ 중2야 11.12.31. 22:39 의도가 있어도 즐거울수도 있습니다
다음생이 있다고 믿는 중들은 다음생을위해
부지런히 선방에 공양 내면서 즐거워 합니다
이것을 고라고만 볼수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의도가 없다면 누가 승가에 보시하죠?
생에 아무런 이득이 없는데요
법을 유지하나 안하나 아무런 이득이 없는데요
사람관계의 잘못됨은 사회의 법만으로도 충분 합니다 삭제 | 신고
┗ 중2야 11.12.31. 22:54 제가 하고 하는 말은 연기 알기가 무척어렵다는 겁니다
어떻게 전개될지 안다는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 연기를 알고 고를 알려면 팔정도를 닦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여집니다
의도가 있어도 업이 발생 안 할 수도 의도가 없어도 고통으로 갈 수 있습니다
지기님이나 저나 여기 회원분들 분명히 아실겁니다
연기 윤회 팔정도 . . . 전부가.고를 없애고자 함을요
저 지인스님 분명하게.둑카가 윤회 한다 합니다
없애는 기준점이 팔정도 라는것두요
둑카의 윤회가 미진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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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2야 11.12.31. 23:04 수행시에 의도를 파악하신다 함은 어떤 의미 인지요?
저는 수행을 달리 보지 않습니다
팔정도를 도라 하고 그걸 닦는걸 도 닦음이라 합니다
지난번에 지적하셨듯이 표현이 진짜 거친니다
이것은 분명히 팔정도에 벗어 납니다
저나 지기님이나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글을 올립니다
그러나 고에 대한 말이 없다면 고에 대한 토론이 없다면 이건 진짜 희론이 아닐까 합니다
전부 막연한 고 책에 쓰여 있는 고 만 말하지 않를까 생각합니다
아까 5살 짜리 딸이 지갑 훔쳐오는걸 못본척하고 그걸로 먹거리를 준비하다 경찰. . .
여관방에서 힘겹게 사는 가족의 비참함을 듣고 눈물 흘렸습니다 삭제 | 신고
┗ 중2야 11.12.31. 23:13 이 어려운 분들에게는
아무리 부처님 법이 최고고 최상승이고 열반이라 해도 여전히 생은 고통일 뿐입니다
이러한 중생의 고통을 이해 하지 못하면 팔정도를 닦는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팔정도 안에는 적극적으로 보면 봉사 희생 겸손 하심.
. . .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깨달음 병에 시달리는 한 결코 고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아무짝에 쓸모 없는 3000년전 한 늙은이의 넋두리에 불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오온 오취온고 보다더 힘들고 괴로운 것은
가난하기에 오는 배고픔이 더 하지 않을까 합니다 삭제 | 신고
┗ 중2야 11.12.31. 23:28 어쪄면 오온의 고 오취온의 고
차라리 암으로 죽기 싫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괴로움이 더 크다 봅니다
팔정도니 사성제니 배부른 자들의 한심한 말장난에 불과 해서는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법을 이해하고 나니 꺼꾸로 딜레마에 빠진. 제 자신를 봅니다
멍청해서 화두터져 부처된다 했을 때가 더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이 넉두리가 이번 년도의 일만으로 끝나길 바랍니다
제 작은 소망입니다
종교 역사 속에서 태어났고 역사 속으로 소멸할뿐인데요
60조 세포의 반란에 불과한데요
세포가 지랄 합니다 자자고 안녕히들 주무세요 삭제 | 신고
뗏목 12.01.01. 07:28 불법을 바르게 이해하실려면 선, 불선에 대한 개념부터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자타에게 이로움을 가져오면 선,
어느 일방에게만 이로움을 가져오거나 자타 모두에게 해로움을 가져오면 불선입니다.
불법의 선, 불선 개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사회 윤리적 개념이 아닙니다.
의도 그 자체를 금하는 게 불법이 아닙니다.
불선을 가져오는 의도가 5취온에 포함되는 의도입니다.
선을 가져오는 의도는 적극 권장해야 하는 의도입니다.
불법은 의도 그 자체를 소멸하고자 하는 가르침이 결코 아닙니다.
12연기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정진에 이 내용이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답글 | 수정 | 삭제 | 신고
┗ 뗏목 12.01.01. 09:11 중아함 101) 증상심경(增上心經) : 5상(相) http://cafe.daum.net/bd-dm/ANKx/140
중아함 102경 염경 : 붓다의 성도(成道) 과정[정사유, 4선, 7각지, 4성제, 8정도...] http://cafe.daum.net/bd-dm/Gg8G/11
위 자료도 참고해서 잘 살펴봐야 합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습니다.
불법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고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쓰잘데기 없이 고를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자타의 이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고타마 붓다께서도 사회평등을 주장하셨고, 전쟁없는 평화를 지향했습니다.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한 것이 불법에 대한 바른 태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수정 | 삭제 | 신고
┗ 뗏목 12.01.01. 05:52 자기 자신의 고의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사람의 고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을 얻고 자기 자신의 고의 문제를 해결한 자가 취할 바의 바른 길입니다.
고타마 붓다께서도 솔선수범하여 바로 그런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고타마 붓다의 생애를 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한 교리에만 빠져들어 있으면 붓다의 바른 가르침을 놓칠 가능성이 많아지게 됩니다. 수정 | 삭제 | 신고
┗ 뗏목 12.01.01. 07:34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행, 보시행을 하되 그 어떤 결과를 바라지 말고,
그저 자기가 할 바만 바르게 행하면 괴로움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결과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의도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연이 함께 개입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 자신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바르게 행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도록 바른 노력은 하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초연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에게 괴로움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수정 | 삭제 | 신고
뗏목 12.01.01. 07:35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겪을 수밖에 없는 고[생로병사 그 자체의 고. 5온의 고]의 문제는
불법[4성제]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고[5취온고, 고성제]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5온의 무상, 무아와 5취온의 무상, 고, 무아]를 인정하고
초연한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현상을 바르게 알아 인간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지혜롭게
맞서지 않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어리석게 그런 해결불가능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거나 맞서게 되면
자신의 고만 자초하게 할뿐인 것입니다.
고타마 붓다께서 신, 영혼, 아트만 등
온갖 허망한 관념[희론]을 비판하고 부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답글 | 수정 | 삭제 | 신고
┗ 뗏목 12.01.01. 07:39 인간으로서 해결불가능한 문제에 집착하게 되면
반드시 괴로움만 뒤따르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자이나교의 고행수행입니다.
우파니샤드(힌두사상)에서 주장한 범아일여 사상 또한 허망한 관념론일뿐이기에
그런 사상을 추구하면 평생 동안 깨달음병으로 괴로움만 자초하거나
착각도인이 되어 사람들을 기망하거나
자아도취에 빠져 오리무중에서 횡설수설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자기자신도 모르게 정신병자가 됩니다.
붓다께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이기에 쾌락주의도 부정하였습니다.
제행이 무상한데 무상한 탐욕[5취온]을 움켜쥐게 되면
반드시 괴로움을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쾌락주의도 버린 것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bd-dm/APsK/32
* 참고 : 불교란 무엇인가? http://cafe.daum.net/bd-dm/APsK/30
제법본경(諸法本經) : 근본불교의 핵심교리, 불교수행의 핵심요지 http://cafe.daum.net/bd-dm/APsK/18
12연기 유전문 역관과 순관을 쉽게 풀어드릴까요? http://cafe.daum.net/bd-dm/JPlw/41
의존적 발생[연기법]의 언어에서 존재와 탄생 http://cafe.daum.net/bd-dm/G1Xy/13
무아와 재탄생 (1) : 모든 둑카(고)는 자아(self)라고 부르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http://cafe.daum.net/bd-dm/G1Xy/24
무아와 재탄생 (11) : 무아를 안다면 재탄생이나 재화신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http://cafe.daum.net/bd-dm/G1Xy/34
「철저한 검증 경」(S12:51) : 12연기 / 상좌부 주석가의 주석을 비판해 보시길... http://cafe.daum.net/bd-dm/BGji/383
M 38.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Mahātanhāsankhayasutta] [사띠 비구경] : 윤회, 12연기, 4식, 신수념, 6근보호, 5개, 4선, 무집착 http://cafe.daum.net/bd-dm/Gg8K/39
중아함 97) 대인경(大因經) : 연기법, 무아의 개념, 상단견 등 견해에 대한 분명한 앎을 위하여 http://cafe.daum.net/bd-dm/Gg8K/22
[4성제]를 중심으로 불교의 수행[29연기관계] 체계적 종합 정리 http://cafe.daum.net/bd-dm/Gg8K/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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