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3. 위빠사나 수행2 - 일상에서 알아차림하기(사띠하기) - 정념정지

수선님 2018. 11. 4. 12:48

일상에서 알아차리기(사띠하기)

 

1) 아침에 일어날 때 알아차리기

 

(1) 누운 자리에서 먼저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2) 그리고 배의 일어남, 꺼짐의 호흡을 알아차린다.

 

누어있을 때에는 호흡이 제일 잘 보인다. 잠이 깨자마자 마음을 보면 벌써 근심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마음이 미래로 달아나 있는 것이다. 이때 마음을 먼저 보아주고 호흡을 잠깐이라도 알아차림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그날 하루가 편안하다. 하루의 시작이 좋으면 이 좋은 파장을 다음 순간으로 연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하루의 끝도 좋은 것이다.

 

2) 저녁에 자기 전에 알아차리기

 

(1) 자리에 누운 상태로 먼저 현재의 마음을 한 번 알아차린다.

(2) 그리고 바닥에 닿아있는 몸의 상태를 그대로 죽 알아차려 내려간다.

(3) 그리고 배의 일어남, 꺼짐의 호흡을 알아차리다가 잠에 든다.

보통 와선을 하면 금방 잠이 드는데 이렇게 알아차리면서 잠이 들면 숙면을 취할 수가 있다. 그것은 알아차림에 의해 마음에 번뇌가 없는 맑은 상태에서 잠에 들기 때문에 악몽을 꾸거나 선잠을 자지 않는다.

 

만일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잠을 못자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먼저 알아차리고 일어나 앉아서 좌선을 한다. 좌선을 하다가 졸음이 오면 자연스럽게 잠을 자면 된다. 보통 잠이 오지 않으면, 마음에 지금 잠을 못자면 내일 힘들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고, 이 두려움이 자꾸 생각을 일으키고, 점차 생각에 빠져 더욱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항상 현재의 마음을 먼저 보아주어야 한다.

 

3)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잠을 자는 동안에는 할 수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매 찰나의 변화가 알아차릴 대상인데, 잠을 자는 상태는 잠재의식(바왕가)의 흐름이 이어질 뿐, 6근과 6경의 촉에 의한 오온의 작용이 없는 순간으로 알아차릴 대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숙면 중에는 현재의 오온을 깨어서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숙면을 취하면서 그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다만 수행자가 낮 동안의 알아차림이 잘 이어져 의식이 명료하게 깨어있어 밤에도 잠이 들지 않고 몸과 마음의 현상들을 계속 알아차리는 경우는 있습니다. 실제로 수행센터에서 하루 종일 알아차림을 이어가는 집중 수행을 하면 밤에 누워있어도 졸음이 오지 않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 기상시간까지 누워서 알아차림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잠을 자지 않아도 아침에 몸이 가볍고 피로가 풀려있습니다. 밤새 알아차림을 이어갔기 때문에 선한 마음의 작용으로 몸과 마음이 선한 상태로 바뀌어졌기 때문입니다.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4개월간 주무시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부처님께서도 하루 네 시간은 주무셨다고 합니다. 수행자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누워 잠들기 직전까지는 될 수 있으면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이어가도록 노력을 해야 하지만, 밤에 잠을 자면서 잠 속에서도 알아차림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 일상의 알아차림이란 무엇인가? **

지혜를 개발하는 위빠사나 수행은 법당이나 수행 처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보통 하루15시간 이상 활동을 하면서 하루 한두 시간 좌선과 경행으로 수행이 빠르게 발전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릴 대상이 "현재의 몸과 마음"이므로 누구나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항상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날 때 일어나는 과정을 알아차릴 수 있고, 세수할 때 세수하는 과정의 움직임과 느낌들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식사시에 손의 움직임, 음식 맛의 변화, 음식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 빨리 먹으려는 마음 등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발걸음을 알아차리고, 그러다가 직장의 일이 떠오르면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발걸음을 알아차립니다. 직장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말하려는 의도와 상대의 말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직원들의 부적절한 언행에 반응하는 자신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현재의 자신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말의 실수가 적어지고 항상 바르고 가장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알아차림이 없으면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넘어가 일어나는 탐심과 성냄을 그대로 언행으로 표현하고 결국 번뇌의 원인을 이 자리에서 심게 됩니다. 그리고는 언젠가는 그 원인에 의한 결과를 자신이 받으면서 괴롭게 됩니다.

 

그 외에도 일상에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모든 행위(몸의 움직임)와 거기에서 나타나는 느낌(受)과 생각(想)과 의도(行)와 일어나는 마음(識)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현재를 알아차리려고 노력만하면 하루 종일 업무와 수행을 같이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알아차린 결과로 즉시 언행이 바르게 되길, 화가 안나기를, 욕심을 내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알아차림을 하는 것은 바른 알아차림을 할 수 없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미 현재의 마음상태가 바라는 마음에 의해 들떠있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의무는 그 무엇도 바라는 것 없이 현재를 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수행의 좋은 결과는 조건들이 성숙되면 저절로 나타나게 됩니다. 기다린다고 빨리 오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면 오히려 더 늦어집니다. 그냥 편안하게 현재를 알고, 알고....를 계속 이어가십시오.

 

실제로 선원에서 좌선이나 경행으로 사띠(알아차림)하는 수련을 하여, 일상에서 사띠(알아차림)를 유지하는 수행자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의 지혜로 매사에 평화롭고 행복하게 집착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주자주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내어, 현재를 객관적으로 알아차림을 해야지 하고 실제로 자주자주 알아차림을 해야 합니다. 생각으로만 사띠하고 실제 사띠하는 행위가 없다면 이는 망상이지 수행이 아닙니다. 이때라도 현재 생각만 한 것을 알고 즉시 몸으로 돌아와 알아차림을 이어가면 다시 위빠사나 수행이 됩니다.

 

** 왜 이렇게 일상에서도 알아차려야 하는가? **

 

그것은 첫 시간에 손바닥을 마주 대고 느낌을 알아차려 보았듯이 마음을 몸에 붙이고 있으면 마음에 괴로움 욕심 성냄 등이 없이 고요해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곧 마음은 정화되고 고요해져서 오온의 실재하는 성품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알아차림의 힘이며 위빠사나의 통찰지혜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시작은 마음을 몸에 붙이는 연습으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감각기관(6근. 눈, 귀, 코, 입, 몸, 뜻(意) = 안이비설신의)은 밖으로 나가서 감각대상(6경. 형상, 소리, 냄새, 맛, 접촉, 생각)과 만나면, 들어올 때는 거의 좋고, 싫고, 나에게 해롭고, 이롭고 라는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가지고 들어와 번뇌(괴로움)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번뇌를 생산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몸과 마음에 항상 주의를 집중해서 알아차림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위빠사나 수행의 시작이며 완전한 열반을 얻을 때까지 지속해야하는 선한 마음의 작용(淨心所)입니다.

 

언제나 알아차림(sati. 사띠)이라는 티켓을 들고 다니면 불사(不死)의 문인 열반(닙바나. 니르바나)에 도착하는 열차를 타게 됩니다.

 

** 일상에 알아차림(사띠. 正念)은 분명한 앎(삼빠쟌나. 正知)과 연결됩니다. **

 

대념처경의 신념처 중 분명한 앎(삼빠쟌나) 편에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가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돌아갈 때도 분명히 알면서 한다. 팔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에도 분명히 알면서 한다.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 때에도 분명히 알면서 한다.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에도 분명히 알면서 한다. 대소변을 볼 때에도 분명히 알면서 한다. 가고 서고 앉고 잠들거나 잠에서 깨어날 때에도 말하거나 침묵 할 때에도 분명히 알면서 한다. ”

 

분명한 앎에는 4가지가 있습니다. 현재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지혜로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1)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

2) 시기 상황이 적절한가? 이익은 있지만 시기가 적절하지 않은가?

3) 지금 알아차리고 있는 대상이 알아차릴만한 대상(실재)인가, 헛된 것(관념)인가?,

4) 지금 통찰 지혜로서 대상을 보고 있는가? 깨어있지 못하고 어리석음으로 대상을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는 것이 네 가지 분명한 앎(삼빠쟌나)입니다.

 

대념처경의 분명한 앎은, 일상의 모든 행위에 알아차림으로, 현재의 행위가 열반을 얻는데 이익이 있는지, 시기 상황이 적절한지, 관념이 아닌 실재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리석음 없는, 무상, 고, 무아의 측면에서 집착 없이 행위를 하는지 등으로 분명한 앎(正知. 삼빠쟌나)과 함께 해야 합니다.

 

결국 어떤 문제가 알아차림을 해도 계속 반복되어 일어나면, 그것을 대상으로 분명한 앎을 해봅니다. 그러면 네 가지 삼빠쟌나 중에 어딘가에 걸려있고, 그것을 알면 스스로 그 문제를 놓아버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1)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림(sati. 사띠) 시작해서 알아차림으로 끝이 난다고 할 만큼 알아차림은 아주 중요한 단어이다. 사띠라는 말은 빨리어다. 이 단어가 의미 하는 여러 가지 뜻 중에서 기억과 알아차림이 가장 큰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불경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올 때 sati. 사띠를 념(念)자로 번역하고 이것이 다시 우리나라로 넘어올 때 기억(念)으로만 넘어왔다. 보통 기억하면 과거를 기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위빠사나의 사띠의 기억은 현재 이 순간에 대한 기억이다.

 

빨리어 사띠. sati는 기억과 동시에 알아차림이란 뜻이 함께 포함된 단어로 넘어 왔어야 본래의 뜻을 바르게 전달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지금 우리나라의 위빠사나 책에서는 사띠를 기억. 알아차림, 마음챙김, 주시하다 등으로 여러 가지로 혼용하고 있지만 우리 선원에서는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통일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84000법문은 좀 크게 축약하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37조도품으로 축약되며, 이는 다시 8정도로 축약되고, 다시 계. 정. 혜 삼학으로 축약되며, 계정혜 삼학은 다시 알아차림(사띠, sati)하나로 귀결 된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알아차림(사띠)이다. 매 순간 알아차림으로 깨어있어 번뇌가 될 원인을 행하지 말고 그 순간 알아차려 번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셨다.

 

그래서 수행자가 알아차림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다면 위빠사나수행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 알아차림의 정의부터 알아차림의 대상과 알아차림을 할 때의 마음가짐 등등 알아차림에 대한 모든 것을 여러 번에 나누어 자세하게 살펴본다.

출처 : 옥련암
글쓴이 : 산빛노을(원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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