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건강. 종범스님
오늘 이 법문은 사실 이 두 마디로 다 했습니다. 安寧(안녕), 健康(건강).
안녕이라는 건 편안한 거죠. 건강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 탈 난데가 없는거,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것 임.
그럼 우리가 늘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사실 이것이 편안한가? 하고 보면.편안치 않고요. 저렇게 해도 편안한가? 해도 편안치 않고요.
실제로 매일같이 보지만 어느 날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안녕하십니까? 라고 말을 해도 편안치 않다는 거를 알고 하는 말입니다.
늘 편안한 사람만 가득하다면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편안치 않은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이 말은 항상 그게 바라는 바도 되고, 늘 점검하는 이야기도 되고, 함께
걱정하는 이야기도 되니까 안녕하십니까? 이 말이 그렇게 들어도, 들어도 그게 중요한 말이 됩니다.
그러면 어덯게 하면 안녕한 건가?
아픈 데가 없는 것이 안녕한 건가? 걱정이 많거든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몸, 물질, 사람에 대한 걱정 이런 걱정을 하거든요.
근데, 이런 걱정이 어디서 나오느냐? 정신에서 나옵니다.
정신. 그래서 이 정신 이 하나가 편안해야 몸, 물질, 사람에 대한 걱정을 덜 수 가 있습니다.
누가 어덯게 되면 어덯게 될까? 걱정 중에 사람 걱정이 그렇게 많습니다.
거 무슨 저 연극을 한다 던지 노래를 한다 던지 한번 봐요. 전부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야속하고 원망스럽고 전부~ 사람이거든요.
그러고 이 물질, 이익과 손해. 손해 보면 어덯하나? 어덯하면 이익을 볼까? 이 물질에 대한 걱정이죠.
또 뭐 어디를 가던지 몸에 좋다는 것에 그렇게 관심이 많습니다. 거 몸에 좋다는 것에 관심이 많다는
애기는 몸이 잘못 될까봐 항상 몸이 불안하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알고 보면 3가지입니다.
몸, 물질, 사람 걱정. 이런 걱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때 편안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덯게 해야 이런 걱정에서 벋어날 수가 있느냐?
거 간단합니다.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지혜.
무슨 지혜를 얻느냐? 조금 전에 경전을 외웠거든요.
“사리자여, 色不異空(색불이공)이요 空不異色(공불이색)이니, 色卽是空(색즉시공)이요
空卽是色(공즉시색)이니, 受想行識(수상행식)도 亦復如是(역부여시)니라. 나무아미타불!”
반야바라밀로 돌아갔을 때, 이게 지혜의 삶입니다.
지혜의 삶을 살 때, 무엇이 보이느냐?
색불이공 공즉시색,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또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은 우리 몸이거든요. 우리 몸이 공과 다르지 않다. 이거에요.
공은 뭐냐? ‘제법공상’은 여기서 제법은 색, 수, 상, 행, 식 우리 정신과 육체를 말하는데,
불생불멸이고 불구부정이고 부증불감이니라. 이렇게 공의 내용을 설명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그래 공이라는 것은 다른게 아니라, 불생불멸(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불구부정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고) 부증불감(자꾸 불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이게 공이에요. 공상이 그렇다 이 말이죠. 공상은 공의 내용이다. 이 말입니다.
그럼 무엇이 공이냐?
이, 우리 몸에 보이는 부분, 이게 공이라는 겁니다. 보이는 부분이 色(색)인데, 색을 地水火風
(지수화풍)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뼈도 있고요, 혈액도 있고 체온도 있고, 숨도 쉬고, 이렇게 뼈와
혈액과 체온과 숨이,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이다. 이 소리에요.
그게 반야바라밀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受想行識(수상행식)이라는 것은 수, 느낌. 느낌이 이게 큰 문제입니다.
이게 ‘있느냐?’도 느끼는 거에요. 있고 없는 것이 전부 느낌 뿐 입니다.
무엇이 있는 것인가? 있다고 느끼는 겁니다. 이게.
무엇이 없는 것인가? 없다고 느끼는 거에요.
무엇이 밝은 것이고, 깜깜한 것인가? 이거 다 느낌입니다. 이게.
그래 이 반야바라밀로 보면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다, 이건데,
중생이 밝다고도 느끼고, 검다고도 느끼고, 있다고도 느끼고 없다고도 느끼고, 이 느낌이 受에요.
그다음에 이렇다 저렇다 지각을 합니다. 아는거, 그게 想이죠.
그 느낌과 지각에 따라서 행동을 해요. 이게 행이에요.
그러고 마지막에 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느낌과 지각과 행동은 현재적인 건데,
이건 識은 삼세(과거, 현재, 미래)에 다 통합니다.
과거에도 이런 것이 있었다.
또 이렇게 되면 앞으로 이렇게 된다.
이렇게 되면 좋은 거다, 나쁜 거다. 이 과거 현재 미래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설계, 구상하는게
식입니다. 근데 이것도 다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는 거에요.,
이것을 꿰뚫어 보는게 照見五蘊皆空(조견오온개공)입니다.
조견이란 말은 그냥 느낌이 아니라 꿰뚫어 보는 거에요. 이거는 ‘수,상,행,식’이 아닙니다.
그 ‘수,상,행,식’은 스스로 밝다고, 어둡다고 보고, 있다고 보고 없다고 보고, 이런 건데,
그 이전에 꿰뚫어 보는거, ‘지수화풍’ 사대를 꿰뚫어 볼 때, 공이라는 거죠.
게 이게 ‘불생불멸을 항상 보고 있으면 걱정 근심이 없어져요.
이게 生死解脫(생사해탈)입니다.
근데 아무리 이 몸이 건강해도 얼마 있으면 늙어요.
세상 돌아가는거 보면 전부 젊은 사람들입니다. 그럼 노인은 다 어디 갔나?
벌써 이 현장에서 돌아가셨다는 거에요. 일터에서 돌아가신 거에요.
그러면 방에 들어가면 계시거든요. 그래 마지막에 가야할 대학이 방콕대학입니다.
방콕대학은 어느 인생이든지 다 갑니다. 방에 콕 박혀서 숨만 쉬고 게시는거죠. 마지막에 숨까지
지면 그걸 돌아가셨다. 그러는데, 그 돌아가는게 일시에 오는게 아닙니다. 서서히 오거든요.
그러니까 어떠한 건강도 이게 건강하게 느낄 뿐이지 건강한게 없습니다.
그래서 느끼는거 하고 존재하는거 하고는 다르거든요.
존재는 뭐가 하느냐?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 부증불감’만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가 뭐 난다고 느낀다든지,
간다고 느낀다든지, 좋다고, 안 좋다고 느끼는 건 우리의 느낌입니다. 느낌, 受에요.
게 저 사람이 좋으냐? 나쁘냐? 아! 좋은, 나쁜 사람 같아. 그거는 느끼는 사람의 느낌이고
사실은 ‘불생불멸이고, 불구부정, 부증불감’입니다, 그게, 그거 알아야 되거든요.
‘아 저 뭐, 하늘에 있는 흰 구름이 아, 저 관세음보살 같다. 아니면 큰 용 같다. 뭐 손녀 같다.
이건 느끼는 거죠. 사실은 그 구름이 생긴 것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依他起性)
없어지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불생불멸’이에요. 그게 空이죠.
그래서 죽는 순간에도 ‘불생불멸’을 딱 보고 죽을 수 있으면 그게 ‘조견오온개공’입니다.
게 空을 ‘조견’하는 거에요.
아픈, 헤어지는 순간에도 그 ‘불생불멸’을 꿰뚫어 보고 있으면 그게 조견이거든요.
그럼 그게 해탈이에요. 이렇게 지혜로 편안해야 그게 건강이지, 지혜로 편안하지 못하고
운동을 해가지고 팔 힘을 키워가지고, 보약을 먹어가지고, 뭘 어덯게 해서 편안해 보자
이것은 느낌이지, 사실은 편안한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을 자꾸 닥을 때, 거기에 안녕 할 수 있어요.
‘반야바라밀’을 닥을 때 몸, 물질, 사람에 대한 공포에서 벋어납니다.
전부 사람 공포가 그렇게 많습니다.
저 사람이 잘 못 봐주면 어덯할까? 내가 왕따 되면 어덯하지?
거 뭐 딸이나 아들한테도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해서 연락을 안 하는가?
그것도 공포증이에요. 아들 공포, 딸 공포.
심지어 손자, 손녀한테도 아. 그 아이가 왜 본체만체하지? 거 손자 손녀 공포증인데요.
그게 전부 사람공포에요. 그럼 이 억 만 가지 공포, 두려움 고통을 어덯게 면할 수가 있는가?
‘사리자여!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로 보면, 이 몸이 태어나는게 풀 끝에 이슬 한 방울이 맺히는 거와 같고,
이 몸이 사라지는게 풀끝에 이슬 한 방울이 날라가는 거와 같은데,
여기에다가 우리가 난다고하는 느낌, 죽는다고 하는 느낌이 솟아나서
그 자기 느낌으로 자기가 고통에 빠지는 겁니다.
게 내 느낌이 나를 괴롭히는 거지, 다른거 아니에요. 자업자득임.
자기가 어덯게 느끼느냐에 따라서 지옥도 되고 극락도 되는 겁니다.
어덯게 느끼느냐? 똑 같은거에요.
그러니까 좋고 나쁜거라는 것은 다 자업자득의 소치이지 정해진 것 없다.
정해진 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그거거든. 그래서 항상 이 마음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고 살아가는게 그게 도인이에요. 그렇게 되면 흔들림이 없습니다.
뭐 아픈 것에 대해서도, 그거 알아야 되요.
아픈거 못 느끼는 거를 도인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아픈거를 느끼는데, 아픈거 그 자체가 ‘불생불멸’을 꿰뚫어 보고 있는거, 그게 건강이에요. 그렇잖아요.
헤어지는게 없는 걸 도인이라 그러면 안돼요.
헤어지는데 헤어지는 순간에 불생불멸을 꿰뚫어보고 있는거, 그게 건강한 겁니다. 그게 안녕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많큼 불안하게 여기지 않고, 모자라게 여기지 않는게 그게 안녕이에요.
아주 중요한 말씀인데, 우리는 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어디에 귀의합니까? 부처님이 귀의하시는 곳은 어디에요?
잡아함경 제44권에 보면 존중경이라는 경이 있는데요,
부처님이 말씀하셨어요. 존중하고 공경할 대상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무엇을 존중하는가? 나는 어디에 공경하는가?
존중하고 공경할 대상을 갖지 못한 사람은 삶의 질서가 없고, 삶의 염원이 없어서 불행한 사람이다.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볼 때, 나는 누구를 공경하고 누구를 존경할 수 있을까?
나보다 삼매가 높고, 지혜가 높고, 해탈이 높고 신통이 높은 사람은 하늘 땅 다 보아도 없다.
‘천상천하 무여불“이라 그랬잖아요. 시방세계역무비. 그랬죠.
그럼 내가 공경할, 존중할 분은 누구냐? “없다”는 거에요.
그럼 나는 무엇을 공경해야 하는가? 나는 정법을 공경한다. 그랬어요. “정법”
나는 정법에 의지하고 정법에 공경하고, 정법을 존중한다.
이게 부처님이 깨달은 뒤에 삶의 세계입니다. 정법존중.
그 정법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겁니다.
늘 정법에 의지하고 정법을 공경하고, 정법을 존중하는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그래서 보세요.
“보리살타의 반야바라밀다 고로 심무가애하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의
반야바라밀다 고로 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니라 나무아미타불.”[菩提薩陀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空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 般若波羅密多 故得
阿?多羅三?三菩提 ]
보리살타는 보살님이고 삼세제불은 부처님 아닙니까? 게 보살님 부처님이 격이 같거든요.
이 분들이 전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합니다. 반야바라밀다에 귀의해요.
이렇게 경전이라는 건 깊은 뜻이 있습니다.
삼세제불이 어디에 의지합니까?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합니다.
보리살타 보살마하살이 어디에 의지하느냐?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거든요.
그러니까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면 마음에 걸림이 없어요. 무가애라. 무가애가 그게 안녕입니다.
무가애는 편안한 것이다. 이 걸림이 있기 때문에 편안치 않거든요.
걸림이 없으면, 꺼림직하고, 걱정되고, 불안하고 이 마음이 안 놓이고, 이게 걸리는 거그던요.
그러면 그것은 이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 라는 것에 생각이 떠나와 있어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과 공이 不異요, 즉시다. 다르지 않고 곧 이것이다.
이것에 떠나와 있으면 걸려요.
죽으면, 잘못되면 어덯하지? 어덯게 어떻게 나는 어덯게? 나는 어덯 하라고. ㅎ~
그 대답이 어디 있느냐? 내가 반야바라밀다에 돌아가면 대답이 있거든요.
그래서 ‘조견’을 하면 돼요. 꿰뚫어 보면 된다 이거에요.
그래서 느낌으로는 이슬이 맺혔을 때와 이슬이 없어질 때가 다르지만 이걸 꿰뚫어 보면 곧 이것이다.
다르지 않다. 이렇게 되면 이슬방울에 걸리지 않아요. 그럼. 편안해요.
맺혔을 때나 사라졌을 때나 편안해요. 이게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면 안되는게 없어요. 그게 대신주에요. 대신주(大神呪).
모든게 다 되요. 그게 대명주(大明呪)에요. 최고로 높은거에요, 그게 무등등주(無等等呪)에요.
그래서 能除一切苦(능제일체고)라. 모든 고통은 반야바라밀다에 의해서 다 없어진다. 이거에요.
眞實不虛(진실불허)다. 이거는 진실해서 전혀 헛된 것이 아니다.
게 ‘卽說呪曰(즉설주왈)’ 아닙니까? 빨리 ‘반야바라밀다’로 돌아가자. 이 말입니다.
‘아제 아제’는 가자 가자 이 말인데 어디로 가느냐? ‘반야바라밀다’로 돌아가자 이 말입니다.
지혜. 이 생사 없는 지혜를 확실히 믿고 그 지혜를 향해서 자꾸 노력하면 그게 편안한 거고요,
그게 건강한 겁니다. 지혜를 등진다던지 멀리하면 걱정, 근심이 생겨요.
예를 들자면, 불을 확 켜면 환히 보이니까 두려움이 없는데, 깜깜 어두우면 여기에 뭐가 있는지
모르거든요. 그래서 걱정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다를 확실히 보고있으면 삶과 죽음이
없는걸 보고 있거든요. ‘照見五蘊皆空(조견오온개공)인 거에요. 그래서 ’度一切苦厄(도일체고액)‘
이에요. 일체 고통이 다 없어진다. ‘능제일체고’라 모든 고통을 다 없애버린다.
그래서 이 고통이라는게 도데체 어디서 오느냐?
그 지혜가 없는 자기 느낌이 만들어낸 그림자입니다.
깜깜한 방에 들어갔을 때 무섭단 말이에요. 그 무서움이 어디서 오느냐?
방을 보지 못하는데서 오는 두려움이거든요. 그게 자기 느낌이에요.
그래서 항상 삶과 죽음이 없는 지혜, 오고감이 없는 지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을
지혜에 의지해서 정진하면 되거든요. 그게 건강한 겁니다.
그러면 그 오고감이 없는 지혜를 반야바라밀다를 아주 견고하게 믿는게 그게 건강입니다.
이 믿음이 아주 순수해지면 깨달은거 하고 조금도 다를게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신심이 순수할 때 그걸 ‘신만’이라 그럽니다.
신만이면 바로 성불이에요.
신만, 그런데 믿음이 항상 부족해요.
순간적으로는 그럴거 같다. 이건 느낌이거든요.
신심이라는건 지속되는거죠. 아, 그럴거 같네. 이건 느낌이에요.
그래서 이 느낌하고 요 신심하고도 혼동이 돼.
그냥 생각으로 그렇다. 이거 생각하는게 아니고요, 아주 지속적으로 그걸 믿는거에요.
그러니까 죽음을 느껴도 사실은 죽는게 없다.
그게 바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다. 그럼 부처님은 깨달아서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는 그 부처님 말씀을 순수하게 믿으면 같아지는 거에요.
깨달은 부처님하고 믿는 우리하고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아주 만족하면 성불입니다. 신만성불 이에요.
그러니까 아플 때도 아야아야 느낌이거든요. 그래서 이 불생불멸이다. 딱 믿고 보면, 그냥 보이는거에요.
그게 바로 성불하고 믿는거 하고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정진이 자꾸 나옵니다.
믿음과 정진이 확실할 때, 그게 건강한 겁니다.
믿음이 있는데 정진이 안 나올 수 없죠.
그러면 그 정진을 요즘말로 하면, 감은보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은혜를 느끼는 거에요.(감은)
부처님이 성불해서 이런 가르침을 펴주셨는데, 그 우리가 받았단 말이죠.
그 부처님가르침을 받은 것에 대한 그 느낌이 깊이 들어있어요.
신심이 있으면 느낌이 안들 수가 없습니다. 그게 感恩(감은. 은혜를 느끼는)이에요.
그럼 우리가 정진을 자꾸 해야 되거든요. 그게 보은도 되고 사은도 됩니다.
은혜에 감사하는게 사은 아닙니까. 은혜에 보답하는게 보은이죠.
그래서 이 감은, 사은 이런게 건강한 삶이에요.
그런 삶에 대한 법문이 관세음보살 보문품 법문입니다.
게 지혜가 깊어지면 자비는 저절로 나옵니다. 그 지혜가 표현되었을 때 자비가 되는거지,
지혜가 뭐 어디 도망간게 아니고요, 지혜 없이 자비가 나올 수 없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두려움이 항상 차있는데 자비가 어덯게 나올 수가 있겠어요.
지혜가 항상 밝아질 때 자비가 저절로 나오고 능력도 저절로 나옵니다.
게 관세음보살 보문품 법문 보면 좋은 법문 많지요.
“중생 피곤액하야 무량고 핍신이라도 관음묘지력이 능제세간고로다. 나무아미타불.”
“구족신통력하고, 광수지방편하야 시방제국토에 무찰불현신이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보문품 뒤에 나오는 게송인데요.
“중생이 막 고단하고 액운이 끼고, 고액이 껴서 그걸 전부 입는다. 이거에요. 곤액을 입어가지고,
한량없는 고통이 내 몸에 다가온다 하더라도, 관세음의 미묘한 지혜의 힘이 능히 세간의 고통을 구제한다.“
그럼 관음묘지력이 뭐냐?
이 반야바라밀의 묘지력입니다.
반야바라밀이 밝아지면 다른 중생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이 자기 생각에, 자기 느낌에 푹 빠져있으면, 다른 사람 말이 안 들어와요.
그러고 이 생각이 다르면요. 같은 말을 전부 다른 뜻으로 씁니다. 이걸 알아야 되요.
말은 같은데 말 속에 느끼고 있는 내용이 다 다릅니다. 이거요 아주 크게 조심해야 되요.
같은 말을 다르게 이해하는게 더 힘듭니다. 차라리 모르는 말 배우는게 훨씬 낫지요.
그래서 이 지혜가 깊어져야 관음을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의 음성을 직접 아주 보는 듯이 들을
수가 있거든요. 그래 능제세간고라, 관세음의 미묘한 지혜의 힘이 능히 세간의 고통을 구제한다.
이렇게 되어있음.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이 관음묘지력인데, 반야바라밀의 힘이 모든 고통을 다 구제
한다. 그러고서 그 힘이 얼마나 활발하게 나오느냐?
구족신통력하고 신통력은 능력이거든요. 지혜가 깊어지면 능력이 나옵니다.
그래서 신통력을 다 갖추고 또 광수지방편, 지혜의 방편을 널리 다 닦아서, 이게 전부 정진입니다.
정진하지 않고서는 신통력을 갖출 수가 없고 방편도 닥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방제국토에 시방 어느 어느 곳에 무찰불현신이라, 어디든지 나타나지 않는 데가 없다.
이게 자비인데 이 지혜가 밝으면 자비가 저절로 나오거든요. 이게 신심이 깊으면 정진이 저절로
나온다. 그게 건강이고 안녕입니다. 지혜가 밝고 자비가 깊은게 그게 건강하고 편안한 거에요.
그래서 항상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게 건강한거고요. 그리고 항상 정진을 펴 나갈 때
그게 편안한 거에요. 정진이 없으면 편안할 수가 없거든요. 이렇게 자꾸자꾸 해 나가면 거기에
행복도 있고 기쁨도 있는 거지, 아 신심도 없고 정진도 없는데 거기에 건강, 편안할 수가 없다.
기쁨을 얻을 수가 없다. 구하면 구할수록 자꾸 불안이 끼어들거든요.
이 불안하고 근심스럽고 걱정스러운 것은, 나에게 지금 지혜가 모자라는구나 그걸 느껴야 됩니다.
지혜 있는 이는 불안하지 않거든요. 무가애가 되요. 무가애가.
지혜가 없는 이는 다른 데에 의지 할 려고 하는 거에요. 사람, 물질, 몸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 물질, 걱정하니까 불안하고, 사람 걱정하니까 불안하거든요.
근데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면, 불생불멸을 딱 보고 있으니까 불안할게 없다 이거에요.
그러고 항상 정진을 해서 은혜를 느끼고 은혜를 보답하고 끊임없이 정진하는 거에요.
그러면 시방제국토에 무찰불현신이라. 이렇게 능력이 출중하고 불가사의한데,
걱정, 신경쓸게 뭐가 있어요?
이것이 성불하는 시절인연입니다.
그래서 항상 믿는 마음이 아주 튼튼하고 순수하면 편안~해요. 그게 안녕이에요.
늘 정진을 자꾸 해나가면 그게 건강입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닥고 또 닥고, 또 닥고 그렇게 닥으면,
편안하고 건강하고, 건강하고 편안하고, 그게 불자의 행복이죠.
몸 걱정, 이게요. 걱정 아무리 해도 걱정 끝날 날 없습니다.
너무 많이 먹었나? 너무 적게 먹었나? ㅎ~ 만날 걱정이에요.
요새 뷔페식당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 보면 참 재미있는거 많아요.
한쪽에는 접시 들고, 한 쪽에는 수저들고는, 더 들까? 들 들까?(이 생각 저 생각)
이렇게 음식 하나 가리는 데도 걱정을 하고 있는거에요. 지금
그러니까 이 사람의 예측 짐작이라는게 이렇게 불안정한 거에요.
당장 자기 배속으로 들어갈 음식도 이렇게 좋을까? 나쁠까? 많을까? 적을까?
이렇게 확신이 없고 망설이는데, 다른 거야 뭐 말할게 뭐가 있겠어요. 거 아주 가만히 보세요.
여러분 자신도 한번 보세요. 왼손에는 빈 그릇 들고, 오른손에는 더는것 들고, 놨다, 덜었다
얼마나 이거 망설입니까? 미래를 예측한다는게 그런겁니다. 그게 바로 이 걱정이거든요.
그렇게 하지 말고, 딱 반야바라밀다를 믿고 자꾸 정진해 나가면
거기에 건강이 오고, 거기에 편안함이 있습니다.
금년에 편안하시고 건강하게 한해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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