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만년의 마지막 안거를 베살리의 나씨동산에서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부처님은 베살리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감회를 말씀했다.
“지금 보는 저 베살리를 다시는 보지 못하겠구나. 다시는 저곳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니 이제 하직을 하고 떠나야겠구나.”
이 말을 들은 베살리 사람들은 부처님이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것을 알고 슬퍼했다. 부처님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그치거라. 슬퍼하지 말라. 부서져야 할 물건을 부서지지 않게 할 방법은 없느니라. 그래서 나는 그대들에게 늘 이렇게 가르쳤다.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이다.(諸行無常)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一切皆苦) 모든 괴로운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諸法無我) 그리고 이것을 알면 완전한 평화를 얻게 된다.(涅槃寂靜) 여래는 오래지 않아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대들은 이 네 가지 법을 근본으로 삼아 열심히 수행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쳐라.”
부처님은 여행을 재촉하여 쿠시나가라에 이르렀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사라나무 사이에 자리를 펴게 하고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웠다. 그리고 세 가지 법복을 제정했다. 부처님은 궁금해 하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그 연유를 설명했다.
“내가 죽은 뒤에 불법은 북천축(北天竺)에서 크게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했다. 세 가지 법복은 오는 세상 단월들이 공덕을 지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난다는 출가한 비구가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가급적 쳐다보지 말라. 보더라도 말하지 말라. 만일 말하게 되더라도 마음을 온전히 하라.”
이어서 부처님은 마지막 제자인 수바드라를 교화한 뒤, 나이 많은 수행자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에 대해서도 말씀했다.
“이제부터 수행자들은 서로 ‘아무개’라고 부르지 말라. 나이가 많은 수행자에 대해서는 형님이(尊)라고 하고, 나이가 적은 수행자에 대해서는 아우님(賢)이라고 부르며 서로 형제처럼 지내라. 또한 지금부터는 부모가 지어준 성(姓)을 쓰지 말고 석자사문(釋子沙門)이라고 하라. 젊은 비구는 늙은 비구를 장로(長老)로 일컫고, 늙은 비구는 젊은 비구에 대해 이름을 부르라. 또한 비구들이 새로 이름을 지으려면 삼보에 의지해야 한다.”
<증일아함> 37권 팔난품(八難品) 제3경
예로부터 불교의 수행자들은 출가하면 속성(俗姓)을 사용하지 않았다. 출가자는 세속의 혈연보다는 법연(法緣)을 소중하게 여긴다. 따라서 세속적 혈연을 나타내는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다. 교단제도가 정비되면서는 속가에서 쓰던 이름마저 사용하지 않고 법명을 지어 불렀다. 법명은 불명(佛名)이라고도 한다. 미래에 성불할 부처님의 이름을 미리 부른다는 거룩한 의미다. 중국에서는 스님들의 법명 앞에 속성대신 반드시 석씨(釋氏)를 붙였다. 이는 ‘석가모니의 거룩한 자손’이라는 뜻이다.
한편 선종에서 법호를 붙이는 방식은 그가 사는 산이나 지방의 이름을 끌어다 썼다. 조주종심(趙州從심)이나 장사경잠(長沙景岑)은 각각 조주와 장사 지방에서 천하를 호령하던 선사라는 뜻이다. 운문문언(雲門文偃)이나 백장회해(百丈懷海)는 각각 운문산과 백장산에 머무는 산중의 어른이라는 뜻이다. 전각이름에서 따온 서당지장(西堂地藏)같은 법호도 있다.
그러나 요즘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세속의 인연을 더 중시하기 때문인지 출가한 스님들 이름 앞에 자꾸 속성을 붙인다. 또 한 지방이나 산중을 호령하는 선사가 없기 때문인지 지명(地名)이나 산명(山名) 또는 사명(寺名)을 법호로 쓰는 분도 거의 없다. 아쉬운 일이다.
홍사성/불교평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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