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되새기기

[스크랩] 자살에 대한 불교의 입장

수선님 2018. 11. 2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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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라자가하 죽림정사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 무렵 찬나 존자는 나라 마을 암라나무 숲에서 수행하고 있었는데 병이 들어 매우 위중한 상태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장로 사리풋타와 마하카트야나는 찬나가 머무르고 있는 나라 마을 암라나무 숲으로 병 문안을 갔다.


“좀 어떠하십니까? 위중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주 고통스럽습니다. 병은 더해만 가고 덜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습니다. 더 이상은 고통스러운 삶은 바라지 않습니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필요하다면 제가 옆에서 간호를 해드리겠습니다.”


“간호로 낳을 병이 아닙니다. 죽는 것이 고통을 덜하는 길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묻겠습니다. 존자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는 것이 진실한 자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은 모두 참다운 내가 아닙니다. 나는 그것이 나(我)라거나 내 것(我所)이라거나 나의 본체(我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한 찬나는 그 다음날 혼자서 칼로 자살을 하고 말았다. 사리풋타와 카트야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찬나 비구의 육신을 화장하고 죽림정사로 돌아왔다. 그들은 부처님께 자초지종을 아뢰고 그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 것인지를 여쭈었다.


“나는 그에게 큰 허물이 있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너희들이 말했 듯이 그는 일체의 집착과 속박에서 벗어났다. 따라서 그는 죽은 뒤에도 다른 업신(業身)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큰 허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잡아함 47권 1266경 《천타경(闡陀經)》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이유로 자살을 했다면 이는 잘못인가 아닌가. 이에 대해 자살이란 어쨌거나 본인의 선택 문제이지 죄악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또 얼마나 절박했으면 자살을 했겠느냐는 동정론도 있다. 과연 그러한가. 불교적 입장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이 경을 읽다 보면 이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이 경은 찬나라는 비구의 자살사건이 주제다. 그가 자살을 결심하게 된 것은 난치의 중병으로 고통을 참을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육신에 대한 집착이나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 아니었다. 육체적 고통이나 즐거움은 누구나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해탈을 성취한 수행자는 고통이나 즐거움 자체에 집착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은 이미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생사가 하나(生死一如)인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그가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집착이 없고, 그리하여 더 이상의 윤회를 하지 않을 사람이라면 자살을 하든 더 살든 관계가 없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부처님이 자살을 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말을 반대로 살펴보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함부로 자살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다시 말해 중생의 자살은 그것이 아무리 옳고 이유가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허물이 된다는 것이다. 해탈한 사람은 생사가 동일한 것으로 알지만 윤회의 바다에 빠진 사람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경전 외에도 《발가리경(跋迦梨經)》 《차마경(差摩經)》도 난치병에 걸린 박카리 비구와 케마 비구의 자살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결론은 앞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에 비해 어떤 비구가 병이 들어 죽었는데 그가 악도에 떨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경전도 있다. 욕심이 많고 애착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윤회를 거듭한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자살은 중생이 함부로 선택할 죽음의 방법이 아니다.

 

홍사성/불교방송 상무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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