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섞이지 않고 제 모습을 이루네
인연(因緣)의 조건에 따라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하면
독립된 개별자(個別者)로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낱낱이 스스로 정체성(正體性)을 갖지 못하고
뒤섞여 혼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변과의 인연관게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끊임 없이 변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변화만이 삶일 수 있으며
여기에서 제 모습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한 치도 제 모습을 버리지 않고
하나하나의 시간이 그대로 십세(十世)의 전체 시간이 되면서도 하나하나는 자기의 모습을 갖고 잇습니다. 서까래가 집의 전체를 이루는 총상이지만 서까래 모습으로서 총상인 것과 같습니다. 한 순간의 시간이 모든 시간을 담고 있다고 해서 뒤죽박죽된 시간이 아니라 자기 시간 그대로를 분명하게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한 그루의 나무라도 그것이 존재하게 된 것은 우주법계가 그 나무가 존재할 수 있는 인연 조건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우주법게가 한 그루의 나무 속에 그 인연의 힘을 그대로 보냈기 때문에 한 그루 나무이면서도 우주법계의 전체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무의 모습을 버리고서 우주법계의 기운을 나툰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화엄세계의 부처님을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이라고 하지만 그 부처님의 얼굴은 중생의 수만큼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있는 시간과 공간을 여의지 않고도 온 세계에 두루 나툰다고 이야기 하는 화엄의 가르침도 여기에 그 까닭이 있습니다.
나뭇잎은 나뭇잎의 모습대로 비로자나 부처님이 되어 부처님의 세계를 나투고, 나비는 나비대로 제 모습을 하면서 비로자나 부처님입니다. 온 세계의 사물과 중생들이 한 치도 제 모습을 버리지 않고,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부처와 부처로서 빛을 나투고 있으며 이 빛은 서로가 서로에게 부처가 되개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세계는 부처님의 말씀 "와서 보라"에서 나타나듯 실천을 통해 증득됐을 때 이미 우리에게 다가와 있는 세계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선을 화엄(華嚴)의 실천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도 있습니다. 화엄의 이해가 이해로 그쳐서는 화엄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대로 삶의 전부가 됐을 때만 화엄이 화엄이며 실천된 선으로서의 화엄입니다.
좌선의 모습으로 이 이야기를 전개해 봅시다. 방 안에 한 좌선 수행자가 앉아 있다고 합시다. 이때 우리가 그 상황을 화엄의 생각으로 파악해 봅시다.
앉자 있다고 하는 선 수행자의 활동은 그 사람과 방과의 인연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때 우리는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앉아 있기 위해서는 만드시 앉아 있을 어떤 곳, 곧 여기서의 방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수행자가 앉아 있다는 말과 방이 앉아 있다는 말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는 말입니다. 방과 앉아 있는 수행자가 없으면 앉아 있다는 행위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행자가 앉아 있다고 함은 그 사실을 정확히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방이 앉아 있다고 함도 그 사실을 정확히 전달한 것이 아닙니다. 방과 수행자가 함께 앉아 있다고 함도 물론 잡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는 앉아 있는 사실에 의해서 앉아 있는 방과 수행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앉아 있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앉아 았다고 하는 행위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앉아 있음이 없었으며, 앉아 있음이란 그 밖의 다른 행위에 상대하여 이름붙였기 때문에 다른 행위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 뜻이 없기 때문이다. 즉 걸어 감, 서 있음 등에 의해서 앉아 있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앉아 있음을 또한 서 있음이라고 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앉아 있음은 무엇의 앉아 있음이 아니라 우주법계의 모든 활동의 인연이 앉아 있음으로 나툰 것이면서도 앉아 있음을 허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부르기 이전에 이미 앉아 있음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표현 이전에 그대로 앉아 있음일 뿐으로 이 또한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앉이 있음은 어떤 하나의 사실을 지칭하지만, 실재에 있어서는 그 자체가 우주의 모든 모습의 나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어어표현 이전에 진여자성이 자신의 모습을 고집하지 않고 모든 곳에서 그것 자체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나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뒤섞여 혼란스럽지 않고 각자의 모습 그대로 전체이면서 동시에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의 실천은 이 대목에서 언어 이전에 그저 앉아 있음이지요. 이 자리 곧 앉아 있음이 서 있는 모습이며 이 행위를 하고 있는 주체도 나이면서 너이며 너이면서 방이 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뜻을 가지고서 분명한 의서소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일상언 생활로는 이 자리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또한 일상의 언어로서 이 사실을 가리키고 있으니 언어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한정되지 않는 언어에 대한 안목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한정되지 않는 안목을 빈 마음의 자기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체가 진여자성의 나툼으로 서로가 서로의 삶의 근거가 되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의 전체가 되고 있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표현입니다.
좌선(坐禪)의 앉아 있음만이 아니고 행선(行禪)의 걷는 행위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걷기도 하지만 아울러 땅이 걷는 것이며 걷는다는 행위 그대로 앉아 있음이요 말함입니다.
어떻게 이 행위를 총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할(喝)이나 방(棒)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때입니다. 우리의 이와 같은 이해가 또한 선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으니, 선은 분별의식으로 이루어진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으니, 선은 분별의식으로 이루어진 언어(言語)와 사유(思惟) 이전이란 업이 모두 소멸됐음을 이야기합니다. 언어와 사유의 세계가 그대로 중생의 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의 현장성과 즉흥성 등을 이야기할 때 그 내용은 아집(我執) 법집(法執)의 모든 번뇌가 다 사라진 곳에서 나온 완성된[바라밀] 삶입니다. 깨어 있는 때는 물론이거니와 꿈속에서나 깊은 잠 속에서도 한 톨의 번뇌 씨앗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을 성취하기 이전은 모두가 중생으로 업(業)에 매어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가 되기 바로 전의 경지에 오른 수행자인 금강유정(金剛兪定)도 중생이라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단순한 새로운 견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번뇌가 다 끊긴 곳에서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며 그 가운데서 보살의 동체대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메모 :
'법성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제16구 生死涅槃常共和 (0) | 2018.12.09 |
---|---|
[스크랩] 제15구 初發心是便正覺 (0) | 2018.12.09 |
[스크랩] 제13구 九世十世互相卽 (0) | 2018.11.25 |
[스크랩] 제12구 一念卽是無量劫 (0) | 2018.11.25 |
[스크랩] 제11구 無量遠劫卽一念 (0) | 2018.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