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발심할 때가 바른 깨달음이며
세상의 모든 법들은 서로가 서로를 전제로 살게 해주면서
그로써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화엄(華嚴)의 중중무진연기법계(重重無盡緣起法界)이며
그대로 비로자나(毘盧疵那)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깨달음을 향한 '한마음'은
부처님의 모든 공덕을 나투는 '전체'로서 깨달은 마음입니다.
깨달음을 향한 깨달은 마음
앞서 말씀드렸던 중심이면서 주변이며, 주인이면서 객인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봅시다. 또 나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은 반드시 너라는 이름을 의지해서 가능하다는 점도 아울러 생각하십시오.
이와 같은 내용을 화엄(華嚴)에서는 1에서 10까지의 숫자를 예를 들고 있습니다. 1이란 그 자체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2에서 10까지의 숫자가 뒷받침되어야만 1이란 숫자가 뜻을 갖게 되며 아울러 근본 숫자인 1이 없으면 2에서 10까지의 숫자도 있을 수 없습니다. 1이 모든 숫자 가운데 하나이지만 동시에 1이 모든 숫자를 성립시키고 있는 것에서 보면 1이 모든 숫자가 됩니다.
10이라는 숫자도 1과 그 밖의 숫자에 의해서 있게 됐지만 그 또한 모든 숫자를 성립시키면서 모든 숫자가 됩니다.
이와 같은 관게에서 보면 낱낱 숫자는 자기의 얼굴을 가진 전체 숫자 가운데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 숫자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앞서 서까래와 집과의 관계, 수행자의 앉아 있음이 우주법계의 얹아 있음을 나타내는 인과관계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와 같은 인연관계가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세상의 모든 법들은 서로가 서로를 전체로 살게 해 주면서 그로써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라도 온 우주를 성립시키기도 하고 해체시키기도 합니다. 한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온 우주가 그 생각과 어울려 새로운 한 세계를 이루고 그 생각이 사라지는 순간 온 우주가 사라지는 법으로, 다른 세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생각생각마다 온 우주가 전체로 그 생각을 이루고 새롭게 새롭게 창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화엄의 중중무진연기법계(重重無盡緣起法界)이며 그대로 비로자나(毘盧遮那)부처님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세계를 향해 마음을 내는 것 자체가 깨달음 그대로라고 이야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을 향한 마음은 단지 부처님의 공덕을 이루는 한 마음이 아니라 부처님의 모든 공적을 나투는 전체로서 깨달은 마음입니다.
한 마음이 단지 연기실상의 한 부분이 아니라 연기실상의 전체덕상을 다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떠나서 연기실상의 부처님 덕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님의 정각(正覺)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을 향한 처음 마음이 정각이며 여래법신(如來法身)입니다. 이는 연기살상의 다른 이름이 정각이며 여래법신이기 때문입니다. 연기하고 있는 일체의 원융한 일상의 법들이 바로 여래법신의 온갖 덕상의 나툼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고 한다면 각각의 단계는 부처님의 세계를 이룰 하나의 부분이 될 것이며 조각난 부분으로 있는 낱낱의 공덕이 완전한 부처님의 공덕을 이룰 것입니다. 이 경우 낱낱의 공덕과 부처님의 공덕은 서로 다른 것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이때는 전체 없는 부분도 가능하며 부분 없는 전체도 가능하여 상주론과 단멸론의 허물에 빠지게 된다는 앞서의 지적과 같게 됩니다.
우리들의 삶을 봅시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그 낱낱의 사건들이 현실입니다. 이 현실의 삶, 곧 개인과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사건들에 대해 그 본질을 잘 알지 못하면서 욕심내거나 성내는 삶이 우리에게 불만족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크게 보면 그것은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나는 마음 때문입니다.
현실의 삶이 불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 삶을 규정하고 있는 마음이 불만족스러운 것입니다. 이 마음의 주인은 자아의식입니다. 불만족[苦]의 주인은 인생이 아니라 인생을 잘못 아는 자이의식이 삶의 근거[集]가 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삶 자체가 고(苦)가 나이라 삶을 잘못 이해하는 데서 불만족이 일어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불만족과 불만족의 원인을 소멸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가르침을 펼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도(中道)의 실천수행이 근본이니 곧 불만족의 소멸을 이루는 선정수행과 삶의 여실한 실상을 보게 하는 지혜수행이 그것입니다. 선정과 지혜수행을 함께 완성해야만 위 없는 바른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생사의 괴로움을 면할 뿐인 선정수행만으로는 생사의 근본실상을 볼 수 없고 선정에서 깨어났을 때 다시 생사의 괴로움에 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곧 선정수행만으로는 생사란 본래 자사의식이 주인을 이루는 중생의 마음에 의해서 되풀이되며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게 된 데서 불만족이 일어남을 모를 뿐만 아니라, 불생불멸의 생사가 삶의 본래 모습이며 그 자체로 모든 법들을 창조하고 있는 나눌 수 없는 한 세계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도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선정체험인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선정조차 초월하여 거친 번뇌는 다 소멸됐으나 [非想] 아직 미세망상이 남아 있는[非非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완전히 이루고서도 고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었고, 고의 발생의 원인인 집착 곧 자아의식에 의해서 발생하는 생사의 모습을 여실히 지켜보는 염처(念處)수행을 통하여 고를 완전히 소멸시켰던 경험에 의한 것입니다.
그 결과 고의 원인은 생사에 있지 않고 생사를 잘못 아는 데에 있음을 여실히 알고 나서 삶의 실상인 연기법의 가르침을 펴시게 됐습니다.
때문에 번뇌의 지멸(止滅)을 위한 선정바라밀과, 생멸인연을 자아의식에 의해 왜곡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여실히 아는 반야바라밀[智慧]을 함께 닦는 것이 선정만을 수행하는 수행자들과는 다른 불교 수행자의 수행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염처수행[定慧雙修]의 수행방법으로 수행을 시작한다고 할 때 그 마음은 이미 깨달음을 이루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연기법의 학습으로 모든 법들이 서로서로 의지하며 인연법으로 전체가 되어서 함께 있음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바른 수행으로 모든 중생이 인연법의 실상인 깨달음을 성취한 모습으로 있음을 알 때만이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중생들의 삶인 인연법이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중생계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망상의 종자까지 소멸하여 무상,무아의 연기실상을 바르게 아는 근본지(根本智)와,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후득지(後得智)가 갖추어 졌을 때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리심(菩提心)과 대원력(大願力)이 보살의 삶이어야만 하는 것도, 중생계가 그대로 연기실상인 깨달음을 나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처음 낼 때부터 완전한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펴진 우주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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