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은 항상 함께하고
맑고 고요한 마음,
빈 마음으로 생사의 모습을 지켜볼 때,
고(苦)도 아니고 낙(樂)도 아닌
연기관계(緣起關系)에서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일 뿐.
실체가 없는 생사를 보게됩니다.
곧 생사가 여래법신(如來法身)이며 화엄(華嚴)의 세계입니다.
빈 마음으로 여실(如實)히 지켜보기
수행(修行)이란 행(行)을 닦는다는 것입니다. 행이란 습관적으로 현상을 동일한 모습으로 인식하게 하는 힘으로 이에 의해서 시비선악 등의 의지가 발생하게 됩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은 언제나 이 행의 요소가 동반되고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마음은 비워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빈 마음으로 사물을 여실히 보는 수행을 염처수행(念處修行)이라고 합니다. 모든 션해를 방하착(放下着)하고 오로지 있는 그대로, 되는 그대로를 지켜보면서 삶의 진싱을 아는 수행입니다.
이 게송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태어남과 죽음도 마찬가집입니다. 모든 중생과 사물의 사람을 여실히 지켜보면 생성과 소멸이 근본바탕입니다. 생성과 소멸을 여실히 안다는 것이 별것 아닌 듯하지만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만 부처님 시대는 삶의 이면에 삶의 기체(基體)로서 계급간의 차별을 결정하는 영원한 존재가 있다고 하는 상주론(常住論)과 인과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견해인 단멸론(斷滅論)의 양대 가르침이 풍미하고 있던 때입니다.
이런 생각을 전제하고 본다면 태어남과 죽음은 지금 여기서의 인과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현상적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면 인과관게에서 삶과 죽음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을 꿰뚫고 존재하는 차별된 영원한 존재도 없고, 인과를 떠나 우연히 존재하는 삶과 죽음도 아닙니다.
또한 죽음이 있기에 여원한 것도 아니고 태어남이 있기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삶과 죽음은 나눌 수 없는 인과관계의 동시적 현상으로 상주론과 단멸론의 사유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견해를 바른 견해라고 하며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생성과 소멸의 기체를 설정한다든다 인과를 부정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으니, 이런 견해는 단지 생각이 만들어 내는 허구로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온갖 삶의 모습은 단지 연기관계에서 생성과 소멸일 뿐입니다. 연기관계에서 조건의 결합에 따라 생성과 소멸의 모습만 있는 것이 지금 여기의 우리이며 이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따라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등으로 집착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행의 집착에 의해서 생사가 불만족스러울 뿐입니다. 불만족스러운 모습은 생사의 본 모습이 아니라 집착하는 작용인 행의 마음작용에 의해서 잘못 인식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앞서 고의 발생이 생사에 있지 않고 생사를 색칠하는 업의 활동인 중생의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생사가 불만족으로 다가 올 때는 우리들의 진실한 삶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고 집착하는 자신의 마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 세게에서 살고 있는 것이며 이때는 생사가 생과 사로 별개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생과 사로 나누어 생을 탐하거나 싫어하며 사를 탐하거나 싫어하게 되는데, 이것은 생사의 진실한 모습을 알지 못한 어리석은 마음작용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상태를 여실히 지켜보아 집착하는 마음작용인 행이 지멸(止滅)될 때 염처수행의 말고 고요한 마음이 되며 이때는 생사를 왜곡하여 상주론이나 단멸론과 같은 잘못된 견해를 갖지 않게 됩니다.
이때 생과 사로 나누었던 것이 잘못된 견해임을 알고 생사가 나눌 수 없는 한 삶임을 알게 됩니다. 생이 사를 그대로 담게 되고 사가 생을 그대로 담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생은 사를 원인으로 하고 사는 생을 원인으로 해서 생사가 함께할 때 비로소 우리가 있게 되니, 생이 불생생(不生生)이며, 사가 불사사(不死死)입니다. 여기에서 불생불사(不生不死)가 우리의 진실한 모습이며 원융한 일상(一相)임을 보게 됩니다.
이울러 맑고 고요한 마음, 빈 마음으로 생상의 모습을 지켜보게 될 때 집착으로 이루어진 변치 않는 업인 행의 작용이 그침과 아울러 끊암없이 변하는 무상의 자기 본래 흐름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 무상이 그 극에 이르러 오히려 고요한 부동(不動)의 미묘한 곳임을 보게 되면서 무상과 부동의 끊임 없는 교류, 연속과 불연속이 함께하는 것이 삶의 진실임을 알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동(動)에서 부동(不動)을, 부동에서 동을 자유롭게 넘나들어 동과 부동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실상의 면목을 알게됩니다.
이 중도실상에 비추어 자아란 동으로서 동일하거나 부동으로서 동일한 실체를 갖지 않고 인연조건에 따라 제 모습을 갖기 때문에, 행에 의한 습관적 집착에 의해서 동일한 실체로 인식되고 있는 자아가 없음을 확실히 체득하게 됩니다.
생사를 지켜 보는 여실수행(如實修行)인 염처수행(念處修行)으로 무상무아의 자기 본래면목을 보게 되고 그 순간 모든 중생과 사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무상의 동으로서 부동을, 무아의 빈 모습으로서 낱낱을 이루는 법계 인드라망의 상관관계를 체험하게 됩니다.
생사 속에서 빈 마음으로 법계 인드라망을 여실히 알게 되어 무상무아의 흐름을 볼 때 생사의 모습 그대로 열반적정이 됩니다. 이것을 원성실성이라고 합니다.
생사의 모습은 이것이 생(生)하므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사(死)하므로 저것이 사하는 연기실상인데, 이것을 생과 사의 개별로 나누어 그 자체로서 생과 사를 설정할 때 변계소집성의 세계가 나누어 그 자체로서 생과 사를 변계소집성의 세계가 있게 되고 그 결과 인생은 괴롭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비록 변게소집성의 세계라 할지라도 그것은 잘못된 마음작용인 행의 집착에 의한 것일 뿐 그 근본은 무상무아입니다. 이제 수행에 의해서 무상무아를 보게 되는 순간 행의 지멸이 이루어지고 모든 집착이 사라집니다. 이 집착이 고의 근원이므로 행이 지멸되는 순간, 고가 소멸하고 열반의 맑고 고요하며 온갖 삶을 서로서로 있게 하는 따뜻한 자비의 기운이 넘쳐나는 세계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보면 생사란 변계소집성에 의한 고의 세계도 아니고 열반적정에 의한 낙(樂)의 세계도 아니고, 연기관계에서의 중도실상일 뿐입니다. 따라서 열번적정도 그 자체로서 실체를 갖는 것이 아니라 행의 집착과 지멸이라는 상태의 변화와 마음 비움의 전환만 있을 뿐입니다.
생사 그 자체도 연기관계로, 생사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변계소집성으로 인한 생과 사의 분별과 거기에 따른 욕심과 성냄의 대상인 생사도 단지 행의 집착뿐, 실체가 없기 때문에 생사와 열반은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생사가 중도연기실상으로 여래법신이며 화엄의 세계입니다. 생사가 비로자나 부처님의 모습이니 빈 마음으로 삶을 지켜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 것입니다.
온 몸에 힘을 대상의 나눔이 사라지는 순간, 마음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스스로가 법계 실상의 비로자나 부처님입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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