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

[스크랩] 대지도론(大智度論) 45. 부처님의 출세

수선님 2018. 12. 2. 12:40

[문] 마하연 가운데 비록 그런 말씀이 있으나, 나는 모든 것을 믿을 수는 없다.
[답] 그것은 큰 실수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으로,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이니, 그대는 거슬려서는 안 된다. 그대는 마하연 가운데에서 나왔거늘 어째서 말하기를 “나는 전혀 믿을 수 없다” 하는가?

 

또한 마하연의 논의는 이 가운데에서117)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말하기를 “이 32상의 업의 인연은 욕계에서 심지 색계나 무색계에서 심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무색계에는 몸도 빛도 없기에 32상은 몸을 장엄하는 것이므로 그곳에서는 심을 수 없다 함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색계에서야 어찌 심지 못하겠는가?

색계에는 여러 범천왕이 있어 항상 부처님께 최초의 법륜을 청했다.

 

이는 지혜가 청정하므로 능히 불도를 구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32상의 인연을 심지 못한다 하는가?

 

또한 “인간 가운데에서는 심을 수 있지만, 다른 길에서는 심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사가도(娑伽度)118)용왕은 10주(住) 보살119)이요, 아나바달다(阿那婆達多)120)용왕은 7주 보살121)이요, 나후아수라(羅睺阿修羅)122)왕 역시 큰 보살이거늘 어찌하여 다른 길에서는 인연을 심지 못한다 하는가?

 

또한 그대는 인간 가운데 염부제(閻浮提)123)에서만 심고, 울달라(鬱怛

  
  
  
117) 곧 마하연경 가운데에서를 말한다.
118) 범어로는 Sāgara-nāgarāja. 사가라(娑伽羅)라고도 한다.
119) 부처님의 지혜의 물로써 관정을 받는 관정주(灌頂住) 보살을 말한다.
120) 범어로는 Anavataptanāgarāja.
121) 불퇴전의 지위에 머무는 보살을 말한다.
122) 범어로는 Rāhu asurarāja.
123) 범어로는 Jambudvīpa. 인도를 가리킨다. 수미산을 둘러싼 4대주(大洲, catur- dvīpaka) 가운데 하나로, 수미산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반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남섬부주(南贍部州)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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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羅)124)에서는 심지 못한다고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가운데 울달라 사람은 나라는 주체[吾我]가 없이 즐거움에 집착하고 영리한 근기가 아닌 까닭에 안 된다고 해도 구타니(劬陀尼)125)와 불바제(弗婆提)126)의 두 곳은 복덕과 지혜와 수명이 염부제보다 수승하거늘 어찌하여 심지 못한다 하는가?

 

또한 그대는 한 생각으로 한 상호의 인연을 심는다 하는데, 이 마음은 손가락을 튀기는 사이에 60의 생(生)이 멸하지만 한 생각 동안에 머무르지 않고 분별치도 못하거늘 어떻게 능히 대인상(大人相)을 심겠는가? 이 대인상은 깨닫지 못한 마음으로는 심을 수가 없나니, 그러므로 여러 생각이 화합하여야 한 상호를 심는 것이다.

 

마치 무거운 물건을 한 사람으로서는 멜 수 없고 반드시 여러 사람의 힘을 이용하는 것처럼 이 상호의 인연을 심는 것도 반드시 큰 마음과 여러 생각이 화합해서 비로소 심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복상(百福相)이라 하니, 백 가지 큰 마음과 생각이 복덕을 심는 까닭에 이를 백복상이라 한다. 한 생각으로 한 모습을 심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일이라도 한 생각으로 한 일을 심지 못하거늘 하물며 백복상이겠는가.

 

그렇거늘 어찌하여 석가모니보살의 마음은 아직 순수하게 맑아지지 못했는데 그의 제자는 마음이 순수하게 맑아졌고, 미륵보살은 마음은 순수하게 맑아졌는데 제자는 마음이 순수하게 맑아지지 못했다 하는가?

 

이러한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3장127) 가운데에도 마하연 가운데에도 이런 말은 없다.

이 말은 그대의 짐작에서 나온 것이리라.

  
  
  
124) 범어로는 Uttarakuru. 수미산을 둘러싼 4대주 가운데 하나. 수미산의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장방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북구로주(北俱盧洲)라고도 한다.
125) 범어로는 Apara-Godānīya. 수미산을 둘러싼 4대주 가운데 하나. 수미산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서우화주(西牛貨州)라고도 한다.
126) 범어로는 Pūrvavideha. 수미산을 둘러싼 4대주 가운데 하나. 수미산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반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동승신주(東勝身州)라고도 한다.
127) 범어로는 tripiṭ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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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다만 석가모니보살이 보굴(寶窟) 안에서 불사불(弗沙佛)128)을 뵈옵고 7불 7야 동안 한 게송으로써 찬탄한 것만 보았을 뿐이다. 미륵보살도 갖가지 방법으로 불사불을 찬탄하였으나, 다만 아바타나경(阿波陀那經)129)에 말씀되지 않아서 그대가 알지 못함은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문득 말하기를 “미륵의 제자들은 마음이 순수하게 맑아지지 못했다” 하는데 이런 것이 모두 그릇된 실수이다.

 

또한 그대가 말하기를 “보살은 모든 물건을 모두 보시하여 아끼지 않기를 마치 시비왕(尸毘王)130)이 비둘기를 위하여 매에게 살을 베어 주고서도 후회하는 마음이 없는 것 같다”고 하였는데 재물이나 보배로써 보시하면 낮은 보시라 하고, 몸으로써 보시하면 중간 보시라 하며, 갖가지 보시 가운데서 마음이 집착되지 않는 것을 높은 보시라 한다.

 

그렇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중간 보시를 찬탄하여 단바라밀을 원만히 한다고 하는가? 이 보시는 비록 마음에 자비함이 많으나 지혜로움을 아는 것과 지혜로움을 알지 못함이 있다. 마치 사람들이 부모나 친척을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거나 혹은 주인을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알게 되는 바이니, 비둘기를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은 것은 중간 보시에 속한다.

 

[문] 보살이 일체 중생을 위하고 부모를 위하고 주인을 위함은 모든 사람을 위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몸을 아끼지 않는 것만으로는 단바라밀의 원만한 성취라 하지 못한다.

 

[답] 비록 일체 중생을 위한다고 해도 그 마음이 청정한 것은 아니다.

 

나의 몸이 주체[吾我] 없음을 알지 못하고, 받는 이가 사람도 아니요 주인도 아님을 알지 못하며,

보시한 물건에는 진실한 성품이 하나라고도 말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말할 수 없음을 알지 못한다.

 

이 세 가지 일에 마음이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청정치 못하다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복덕의 과보는 받을지언정 곧장 불도에 이르지는 못한다.

 

반야바라밀다에서 설하듯이 세 가지 일[三事]을 얻어도 안 되고 또한 집착되어서도 안 되니,

  
  
  
128) 범어로는 Buddha Puṣya.
129) 범어로는 Avadāna-sūtra.
130) 범어로는 Śi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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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단바라밀의 원만함을 구족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반야바라밀을 능히 대지(大地)와 성곽과 취락을 분별해서 일곱으로 나누며, 이것을 반야바라밀의 원만한 성취라 하는 것이다. 이 반야바라밀은 한량도 없고 끝도 없어서 마치 큰 바닷물과 같다.

 

모든 하늘이나 성인ㆍ아라한․벽지불에서 초행의 보살[初行菩薩]에 이르기까지도 그 끝을 알지 못하고 10지(地)131)에 머무는 보살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대지의 10성곽과 10취락을 일곱으로 나눌 수가 있으며,

그것을 반야바라밀의 원만한 성취라 말하는가?

 

이와 같은 산수의 법에서 대지를 나눈다고 함은 세속의 반야바라밀이 차지하는 아주 일부일 뿐이다.

 

예를 들어 마치 큰 바다에서 한 두 방울의 물 같은 것이니, 실제의 반야바라밀은 3세에 걸친 모든 부처의 어머니[佛母]라고 하며, 일체법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이 반야바라밀은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으니, 그 어디에서 구하여도 얻을 길이 없다. 마치 환술 같고 메아리 같으며, 또한 물속의 달과 같아서 보자마자 문득 잃어버린다.

 

성현들께서는 항상 가엾이 여기시기 때문에 비록 반야는 한 모습이지만 갖가지 이름과 말로써 이 반야바라밀다이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보배 창고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니 그대의 말은 크게 틀린다.

 

또한 그대는 말하기를 “네 가지 관찰이란 곧 시기를 관찰하고, 토지를 관찰하고, 종족을 관찰하고, 태어날 곳을 관찰함이다. 인간의 수명이 8만 세 일 때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시고, 7․6․5․4․3․2만 세일 때 부처님이 나타나시고, 인간의 수명이 백 세 일 때 부처님이 나타나시니, 이 같은 시기를 말한다”고 했다.

 

만일 부처님들께서 중생을 항상 가엾이 여기신다면 어찌하여 여덟 가지 시기에만 부처님이 나타나시고 다른 때에는 나타나시지 않는가? 불법은 시기를 기다리지 않나니, 마치 좋은 약은 먹자마자 병이 낫듯이 불법도 그와 같아서 시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문] 보살이 중생들을 가엾이 여긴다 해도 부처님들이 때를 기다리는 일은 없다.

  
  
  
131) 범어로는 ḍasābhū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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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8만 세를 지나면 장수(長壽)로 즐거움이 많고 염애(染愛) 등의 번뇌[結使]도 두터워지며 근기는 둔하여 교화할 만한 때가 아니다. 만약 백 세 이하의 시기가 되면 사람들은 단명으로 괴로움이 많고 성냄 등의 번뇌가 더욱 두터워진다.

 

이렇게 즐거울 때와 괴로울 때는 모두 도를 얻을 시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나오시지 않는 것이다.

 

 

 [답] 모든 하늘들의 수명은 천 만 세를 넘고, 전생의 인연이 있어 비록 즐거움이 많고 애욕에 물드는 일이 두텁지만 능히 도를 얻으니, 하물며 인간 세상이랴. 인간세상은 크게 즐거움이 없고 서른여섯 가지가 부정한 까닭에 교화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명이 8만 세를 지나더라도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실 것이다. 이때에는 사람들이 병이 없고 마음이 즐거우며 모두 영리하고 복덕이 있으니, 복덕 있고 영리하기 때문에 도를 얻기가 쉬운 것이다.

 

또한 사자고음왕불(師子鼓音王佛)132) 때에는 인간의 수명이 10만 세요, 명왕불(明王佛)133) 때에는 인간의 수명이 7백 아승기겁이요, 아미타불(阿彌陀佛)134) 때에는 인간의 수명이 무량 아승기겁이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말하기를 “8만 세를 지나서는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시지 않는다” 하는가?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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