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理)와 사(事)가 하나되어 분별이 없으니
마음이 마음인 데서 보면
인식 주관으로 한정된 듯하지만
이 마음이 그대로 온갖 대상이 되고,
대상이 대상인 데서 보면 인식대상으로 한정된 득하지만
이 대상이 그대로 일체 만상으로 나툰 마음이니
마음에서 대상을 대상에서 마음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관계를 명연(冥然)
곧 차별을 꿰뚫고 혼연일체로 하나된다고 하였습니다.
원융(圓融)한 한모습이니
온 우주 그대로가 비로자나 부처님의 세계인 것을 본래면목이라고도 하고 이(理)라고도 하며 또한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화엄에서 삼게가 단지 마음[三界唯心]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상을 떠나 거울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대상이 마음의 얼굴이라 하여 두 거울이 마주 보고 서로 비춘다[兩鏡雙照]라고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과 대상이 마음이라고 하는 하나된 장(場)에서 마음과 대상일 때의 마음이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지, 대상을 떠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제 마음의 얼굴을 알 수 있습니다. '갑'이 보이면 '갑'이 마음의 얼굴이요, '을'이 보이면 '을'이 마음의 얼굴입니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모든 모습으로 나툰 마음의 얼굴이 또한 그대로 대상의 얼굴인 줄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마음이고 대상은 대상이니, 마음과 대상이 인연의 장(場)에서 나하이나 마음이 있으므로 대상이 있고, 대상이 있으므로 마음이 있다는 근본연기의 법칙이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가 이(理)인데, 이 이가 성립되는 이유도 마음이 마음이 아니고 대상도 대상이 아닌, 곧 마음으로 독립된 실체가 없고 대상으로 독립된 실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마음이 아닌 데서 마음이며, 대상도 대상이 아닌 데서 대상임을 여실히 아는 것이 스스로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스님들께서는 마음 밖에서 진리를 찾는 경우를 외도(外道)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마음이면서 일체 만상으로 나툰 것을 화엄의 법계연기라고 했으며 마음마음이 겹쳐진 세계가 중중무진법계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마음인 데서 보면 인식 주관으로 한정된 듯하지만 이 마음이 그대로 온갖 대상이 되고, 대상이 대상인 데서 보면 인식 대상으로 한정된 듯하지만 이 대상이 그대로 일체만상으로 나툰 마음이니 마음에서 대상을, 대상에서 마음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관계를 명연(冥然), 곧 차별을 꿰뚫고 혼연일체로 하나된다고 하였습니다.
마음과 대상은 또한 그대로 진여공성의 자기 나툼이니 공성인 듯하면서 마음으로 대상으로 나투고, 마음인 듯 대산인 듯하지만 그대로가 공성을 나투고 있으니 공성과 그 나툼의 관계를 하나되어 분별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理)와 사(事)로 나구고는 있습니다만, 이 그대로 사이고 사 그대로 이인 상태이기 때문에 부득이 이와 사로 나눈 줄을 알아야 겠습니다.
이것은 언어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언어표현이되 언어로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드러나야 하는 실천의 세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천하지 않는 앎이란 앎이 아닙니다. 물론 지식과 지혜로 나누기도 합니다만 실천이 관계되지 않으면 지식이든 지혜는 마찬가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혜일치란 쉽지 않기 때문에 이치를 아는 것은 바로 되지만 그것을 그대로 행하는 데는 차근차근 익혀야 한다[理卽頓悟 事非頓徐]고 <능엄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연기실상의 입법게에서 보면 이(理)와 사(事)는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낱낱 현상의 나툼인 사(事) 그대로가 연기실상의 이(理)이기 때문입니다. 곧 이가 있고 사가 있는 것도 아니며 사가 있고 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사는 원융한 한모습이며 사를 관통하고 있는 이인 공(空)에 의해서 사사(事事)가 다시 원융한 한모습이 됩니다.
이 사사에 원융한 삶이 삼매(三昧)의 삶이며, 무량한 여래의 생명이 중생과 사물 마다에 그대로 나눈 것입니다. 온갖 모습이 그대로 부처님의 나툼이기 때문에 사물과 사물, 중생과 중생의 원융한 모습이 아니라 부처님과 부처님의 원융한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가 보리심(菩提心)을 낼 때는 수행자의 중생심(衆生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 부처님의 지혜광명인 불성(佛性)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마음 그대로 불성으로, 불성이 수행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한 마음 한 중생 한 사물 그대로가 불성이지, 그 안쪽 어딘가에 슴어 있는 것이 불성이 아닙니다.
때문에 처음 보리심을 낼 때 그것이 그대로 온전한 불성인 줄을 확실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를 아는 것을 신심(信心)이라고 합니다. 이 신심 그대로 온전한 불성이며 이것은 온 중생들의 생명의 빛을 그대로 나툰 것이기 때문에 처음 보리심을 낸 수행자는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보리심과 대원력으로 나서는 수행의 첫발이 부처님의 세계를 이루는 원인이자 결과가 되는 것도 이 까닭입니다.
대원력이란 모든 중생이 스스로의 생명체이면서 우주법계가 한 생명으로 관계 맺고 있음을 여실히 나는 데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앎이란 실천을 뜻하기 때문에 발심수행자란 보리심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대원력의 실천이 항상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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