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스크랩] 금강경 2

수선님 2018. 12. 16. 11:32

 

 

금강경 2(선현기청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금강경 두 번째 품을 이야기 하는 날이다. 금강경에 보시면, 두 번째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이라고 하는 부분이 있다.

 

선현(善現)은 수보리(須菩提)인데, 수보리(須菩提)를 한문으로 번역을 하면 선현(善現)이라고도 하고 공(空)의 도리에 대해 잘 안다고 해서 공생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본문에는 ‘수보리(須菩提)야’라고 하셨는데, 제목에는 선현(善現)이라고 되어 있다. 선현(善現)이 무엇인가? 그것은 수보리(須菩提)다. 수보리(須菩提)가 일어나서 법을 청한다고 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그 때에 어느 때인가? 부처님이 자리를 펴고 편안히 앉아 계실 때, 그 때를 말한다. 아무 말씀도 않하고 앉아 계실 때, 그 때에 수보리(須菩提)가 일어나서 부처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어떤 방식으로 질문을 드리느냐? 장로(長老) 수보리가 장로(長老)라는 말은 법도 높고 연세도 많은 분을 장로(長老)라고 한다. 장로(長老)인 수보리(須菩提) 존자가 재대중중(在大衆中), 대중 가운데에 앉아 있다가 즉종자기(卽從座起), 독송할 때는 즉종자기(卽從座起)라고 연결해서 읽는데, 의미로 붙일 때는 즉종자기(卽從座起)이라고 읽으면 의미가 않된다.

 

 

즉 띄우고 종자기(卽~從座起)로 해야 한다. 그게 한문으로 읽는 법이다. 그래서 읽는 것을 보면 아는지 모르는지 금방 안다. 그런데 독송할 때는 즉종자기(卽從座起)연결해서 읽으면 편하다. 그러나 뜻으로 이것을 독해할 때는 즉종(卽從)을 짧게 읽으면 [아, 저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즉종(卽從)이라고 하지 않는다.

 

 

종자기(~從座起)로 시작해야지, 즉종(卽從)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그게 한문의 문맥이라고 한다. 한문에도 맥이 있다. 즉~고종자기(卽~고從座起)하야 종자기(從座起)라고 하는 것은 자리로부터 일어나서 편단우견(偏袒右肩)하고 가끔 보면, 수보리(須菩提)한테도 하시고, 하시고 이렇게 토를 다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맞지 않다. 왜 그런가 하면 수보리(須菩提) 존자가 장로(長老)가 아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 상대할 때는 부처님께는 ‘하시고’를 하고 수보리(須菩提)에게는 ‘하고, 하고’ 그것이 격이다.

 

그것을 압존불(壓尊佛)이라고 한다.

 

존불(尊佛), 존중한 부처님께 눌렸다. ‘누루다’는 압(壓)자가 있다. 압존불(壓尊佛), 존불에게 눌렸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 축원할 때도 그 축원을 올리는 대상에게는 존칭을 쓰지 않아야 한다.

 

 

‘아무개’라고 해야 되지, ‘아무개님’라고 ‘님’자를 붙이면 않된다. 부처님께 ‘님’자를 붙이면 부처님의 제자 그 이하의 격에서는 ‘님’자를 쓰면 않된다. 그것을 압존불(壓尊佛)이라고 한다. 존불(尊佛)에게 눌린다고 한다. 그게 전부 문맥이라고 한다.

 

 

편단우견(偏袒右肩)하고, 편단(偏袒)이라고 하는 것은 한쪽만 벗는다는 의미다. 옷 벗을 단(袒)자인데, 편(偏)은 한 쪽이라는 소리다. 우견(右肩)이라고 하는 것은 오른 쪽 어깨로서 전체적으로는 오른 쪽 한 쪽만 옷을 벗는다고 한다.

 

 

우슬착지(右膝着地)하고, 오른 쪽 무릎을 땅에 붙이고, 합장공경(合掌恭敬)해서, 합장하고 공경한다. 여기까지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질문을 하기 위해서 공경을 표시하는 내용이다. 질문을 할 때는 질문을 하는 격식이 있고, 예절이 있어야 한다.

 

 

저 솥에 있는 밥을 먹는데, 솥에 가서 밥을 주먹으로 밥을 쥐어서 입에다 넣으면 먹는 것은 먹는 것이지만 그게 좀 이상하지 않겠나? 솥에 있는 밥이라도 자기 입에 들어가는 데는 과정과 절차가 있듯이 질문을 하는 데는 거기에 대한 예절과 그 공경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법이 그 질문하는 사람의 속에 들어간다. 그렇지 않으면 않들어 간다. 그래서 이런 것이 질문을 하는 공경례(恭敬禮), 공경으로서 예절을 표한다고 한다.

 

 

이백불언(而白佛言)이라, 말 이을 이(而)자는 그냥 밑으로 내려온다. 위로 읽지 말고 밑으로 읽어야 한다. 합장공경(合掌恭敬) 띄우고 이백불언(而白佛言)이게 이런 번역들이 참 중요한데, 한문 그대로 문장만 보면, “하얀 부처님이 말씀하시데” 라고 이렇게 번역해야 된다.

 

 

그런데 그게 ‘희다(白)’라고 하는 명사가 아니고, ‘아뢴다’, ‘말씀드린다’, ‘고백한다’라고 하는 동사이다. 그래서 “부처님께 아뢰어 말씀을 올리데” 이런 뜻이다. 처음 보는 사람은 백발백중으로 백불(白佛)이라고 하면 ‘하얀 부처님’이라고 새긴다. 이런 데서 어려운 점이다.

 

 

“부처님께 아뢰다” 이것은 동사다. 말씀을 올리데, 희유세존(希有世尊),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기서 세존(世尊)이라는 말이 나오고, 희유(希有)라는 말이 나온다. 희유(希有)라는 말은 보통 볼 수 없는 그런 일이다. 바랄 희(希)자로 새기지 않고 드물 희(希)자다. 희망(希望)이라고 새기는 것이 아니고 드물다고 새긴다.

 

 

희유(希有), “드물게 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다”고 하는 뜻이다. 이것을 비유해서 ‘우담바라(優曇跋羅華)’라고 하는 꽃이 있는데, 삼천년 마다 한 번씩 꽃이 피운다. 그 우담바라를 ‘희유하다’라고 설명한다. 해마다 피는 것이 아니고 삼천년 마다 한 번씩 꽃이 핀다고 해서 ‘희유하다’라고 한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 우담바라(優曇跋羅華)처럼 자주 세상에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한 번씩 나타날 수 있는 분이어서 ‘희유하십니다’라고 한다. 그래서 그 이름을 세존(世尊)이라고 했다. 부처님에게는 십호(十號)가 있는데, 세존(世尊)은 십호(十號) 가운데 하나다.

 

 

밑에는 여래(如來)라고 하는 말도 있는데, 여래(如來)도 십호(十號) 중에 하나다. 왜 이렇게 호(號)가 많은가? 그 호(號)라고 하는 것은 그 부처님의 행(行)과 덕(德)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실행한 덕(德)을 하나하나 지목해서 호(號)로 부른다.

 

 

그래서 그 호(號)는 피하는 것이 아니다. 자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지적하는 명(名)은 피한다. 그것을 인명덕호(人名德號)라고 해서 사람 자체를 지적하는 것은 이름(名)이고, 그 사람의 덕(德)을 나타내는 것은 호(號)라고 한다.

 

 

그래서 이름(名)은 피하는 것이 동양의 관습이고, 호(號)는 피하지 않고 자주 주자 불러야 한다. 그런데 스님들의 법명이 호(號)인가? 명(名)인가? 사실상으로는 명(名)이 아니다. 호(號)가 된다. 따라서 법호(法號)이기 때문에 큰스님의 이름이라도 무슨 자, 무슨 자라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근래에 종자, 범자라고 하는데, 자(字), 자(字)는 없다. 그냥 ‘종범’이다. ‘청정법’을 근본으로 한다고 이렇게 이름을 지어 주셨는데, 그것이 일종의 법호(法號), 즉 호(號)다. 개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이념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스님들의 이름은 피할 필요가 없다.

 

 

근래에 보면, 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불교의 전통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냥 ‘석가모니’라고 하지, ‘석’자, ‘가’자, ‘모’자, ‘니’자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자, ‘존’자가 아니고 ‘세존’으로 끝내지 하지 않았나? 세존(世尊), 세상에서 아주 존귀한 분, 아주 휼늉하신 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은 왜 이렇게 희유(稀有)하고 세상에서 존귀(世尊)하신 분인가? 여래 십호(十號) 가운데 설명이 있는데, 부처님은 선서(善逝), ‘잘 갔다’ 라고 한다. 선서(善逝)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인가? ‘중생들은 잘못 간다’고 한다. 무엇이 못 가는가? 중생들은 많은 ‘죄를 지어 가지고 않 좋은 곳으로 간다’고 한다.

 

 

그러면 잘못 간 것이다. 그러면 죄는 왜 짓는가? 번뇌가 짓는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 무명 번뇌를 다 끊고, 탐욕을 끊고, 분노를 끊어서 탐, 진, 치 삼독을 다 끊어서 생사윤회로 들어 간 것이 아니라 해탈열반으로 갔기 때문에 ‘잘 갔다’라고 한다.

 

 

그런데 중생들은 탐, 진, 치 삼독을 그대로 가지고 또, 죽고 또, 나고, 또, 죽고 또, 나고, 그러니까 그게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서(善逝)를 ‘호거(好去), 잘 갔다’ ‘묘왕(妙王), 묘하게 간다’ 이라고 한다. 묘하게 어디를 가는가? ‘해탈열반으로 가신다’고 한다. 그것을 선서(善逝)라고 하고 호거(好去)라고 하고 ‘묘하게 간다’ 해서 묘왕(妙王)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부처님은 조어장부(調御丈夫), ‘중생을 잘 이끌어 가르치는 장부’, ‘중생을 올바르게 길들이는 장부’ 라고 한다. 중생을 어떻게 길들이는가? 부처님은 악한 중생은 선하게 길들이고, 선한 중생은 생사해탈(生死解脫)하게 길들이고, 생사해탈(生死解脫)한 중생은 보살도를 닦게 길들이는 것을 조어장부(調御丈夫)라고 한다.

 

 

중생은 ‘나’라는 것을 위해 죄를 짓게 되는데, 죄업을 짓는 것은 다른 이유가 하나도 없다. ‘아집(我執)’ 때문에 ‘나’ 때문에 ‘나’를 위해서 죄를 짓는다. 그런데 ‘나’는 없어진다. 늙어서 죽는다. 죄만 그대로 남는다. 이것 참 기가 막힌다. ‘나’를 위해서 죄를 지었는데 ‘나’는 없어지고 죄만 남는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게 된다’고 한다. 그런 중생을 위해서 오계(五戒), 십선계(十善戒) 법문을 설해 가지고 선하지 못한 중생을 선한 중생이 되도록 길을 들인다. 이것이 삼악도(三惡道)에 빠지는 중생을 위해 인천락(人天樂)을 받게 한다. 이것이 첫 번째 조어장부(調御丈夫)가 하는 일이다.

 

 

그래서 ‘경전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인간 세계, 천상 세계에 태어난 중생’이라야 가능하다. 그래 가지고 ‘선남자, 선녀인’이라고 했다. ‘삼악도(三惡道) 중생’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첫 번째 착하지 못한 중생은 오계(五戒), 십선계(十善戒)의 법문을 통해서 선한 쪽으로 인도해야 된다.

 

 

‘인간 세계에 나고, 천상 세계에 태어나서 인천락(人天樂)을 받는 중생도 그곳에 집착을 하면 또 그 복이 다하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거기는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쪽으로 인도를 해야 한다. 그게 두 번째 조어장부(調御丈夫)이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받았을 때에는 도를 닦아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야 한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니까. 착하지 못한 중생은 우선 오계(五戒), 십선계(十善戒)을 잘 닦아서 삼악도(三惡道)에서 인천락(人天樂)을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된다. 그러면 생사해탈(生死解脫)은 닦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성제(四聖諦), 십이연기(十二緣起)를 닦는 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닦는 길이다.

 

 

사성제(四聖諦), 십이연기(十二緣起)는 삼악도(三惡道)에 있는 중생들에게는 사성제(四聖諦), 십이연기(十二緣起)는 닦을 수 없는 복력(福力)이다. 우선 오계(五戒), 십선계(十善戒)을 잘 닦아서 삼악도(三惡道)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인천락(人天樂)을 받는 중생에게 가능한 복력(福力)이다.

 

 

그러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다시 재발심하고 육바라밀로서 보살행을 닦아야 한다. 그래야 자리이타를 해서 나도 제도하고, 중생도 제도하게 된다. 그것이 부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리고 선서(善逝), 조어장부(調御丈夫) 이런 분이기 때문에 세상에 그것보다 존귀하신 분이 없다. 그래서 ‘세존이시여’ 라고 하게 된다.

 

 

앞에서는 세존(世尊)이라고 하고 여래(如來)라고 하였다. 여래(如來)께서는 선호념 제보살(善護念 諸菩薩)하시고 선부촉 제보살(善付囑 諸菩薩)하십니다. 여래(如來)가 무엇인가? “예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변함이 없다’고 한다. 변함없는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저 허공이 어디서 왔는가?’ 또 ‘허공이 어디로 가는가?’ 그러면 허공은 어디서 왔을까? 또 허공이 어디로 갈까? 부처님이 오신 것은 ‘허공처럼 오셨다가 허공처럼 간다’고 한다. 그것이 ‘여래(如來)’이다. 그러면 ‘허공’이 정말 오는가? 허공은 온다고 한다.

 

 

어떻게 오는 걸까? 눈을 딱 감고 있다가 눈을 탁 뜨면 허공이 바로 나타나니까. 그것을 보고 허공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깜깜하면 않보이니까. 그것을 보고 허공이 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허공이 어디서 왔을까? 그런 것을 ‘여래(如來)’라고 한다.

 

 

분명히 오기는 왔는데 온 것이 없다. 분명히 가기는 갔는데 가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부처님만 그런가? 그렇지 않다. 일체 중생이 다 그렇다. 단 ‘중생은 모를 뿐이다’라고 한다. 이 ‘몸이 오는 것은 허공같이 오는 것이고’, 이 ‘몸이 가는 것은 허공처럼 간다’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을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를 통해서 ‘그것을 아셨고’, ‘중생은 모를 뿐’이다. 그러나 ‘오고 가는 사실은 부처님하고 똑같다’고 한다. 그래서 ‘오고, 가는 사실은 똑같은데’, ‘부처님은 아시고, 중생은 모를 뿐이다’라고 한다.

 

 

그래서 여래(如來)께서는 선호념 제보살(善護念 諸菩薩)하시고, 호념(護念)이라고 하는 것은 ‘잘 가르쳐 주신다’고 하는 말씀인데,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십주(十住)보살’ 이상을 가르치는 것이다. ‘십주(十住)’라고 하는 것은 ‘발심한 분’을 말한다. 십주(十住)의 제일 처음이 ‘발심주(發心住)’이다.

 

 

‘발심(發心)’은 무엇인가? 성불하도록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보리’라고 하는 것이 ‘깨닫고자 하는 마음’, ‘깨달은 마음’, ‘깨달으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킨 분을 십주(十住)보살이라고 하고, 십주(十住)의 첫 번째가 발심주(發心住)이다.

 

 

그래서 ‘발심(發心)’을 하면 십주(十住)의 보살이 되고, ‘발심(發心)’하지 못한 분은 ‘십신(十信), 열 가지 믿음’이라고 한다. 따라서 심(心)만 하면 ‘발심(發心)’이 된다. 심(心)이 꽉 차면 ‘발심(發心)’이 된다. ‘발심(發心)’만 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십신(十信), 열 가지 믿음’의 경우에는 흔들린다고 한다.

 

 

그래서 ‘십신(十信), 열 가지 믿음’을 미숙(未熟)이라고 하고, 또 십주(十住) 그 이상을 근숙(根熟)이라고 한다. 그 호념(護念)은 ‘잘 가르쳐 주신다’고 하는데, 십주(十住) 이상의 보살들을 잘 가르쳐 주신다고 한다.

 

 

또 부촉(付囑)은 그 휼륭한 보살들에게 당부 하는 것이다. 이들을 ‘잘 인도해 주십시요’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미래의 보살들을 현재의 그 수승한 보살들에게 부탁(付託)하고 당부(當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부촉(付囑)’의 대상은 ‘십신(十信), 열 가지 믿음’ 이하(以下)의 보살들을 십주(十住) 이상의 보살들에게 당부(當付)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부촉(付囑)’이라고 한다.

 

 

그러면 여기서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강조했는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수행을 가르친 것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삼악도(三惡道)에 있는 중생은 인천락(人天樂)을 받도록 노력을 해야 하고, 인천락(人天樂)을 받는 중생은 열반락(涅槃樂)을 받도록 노력을 해야 하고, 열반락(涅槃樂)을 받는 중생들은 발심(發心)해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도(菩薩道)를 닦아 가지고 무상보리(無上菩堤)를 이루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럼 무상보리(無上菩堤)는 어떤가?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계속해서 중생을 제도하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하는 분이 부처님이라고 한다.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실천하면 보살이고, 사무량심(四無量心), 자비희사(慈悲喜捨)를 실천하면 부처님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되어 가는 길이 이런 길인데, 이 길을 가르치고, 이 길을 당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정(義淨 635-713)당(唐)나라. 삼장법사가 번역한 의정역 금강경(義淨 金剛經)이 있다.

 

 

여기서는 ‘호념(護念)’이라고 하고 ‘부촉(付囑)’이라고 설명하지 않고 ‘최승이익(最勝利益), 가장 휼륭한 이익’으로 ‘익제보살(益諸菩薩), 모든 보살을 이익하게 하시며’ 이렇게 설명을 하였다. ‘최승부촉(最勝付囑)’으로 ‘부촉 제보살(付囑 諸菩薩)’ 이라고 설명하였다.

 

 

그것은 곧, 부처님이 이야기 하는 것은 보통 일반적으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모두 다 어떤 중생이든지, 이익을 얻어서 나중에는 다 무상보리(無上菩堤)를 이루도록 하는 그런 ‘호념(護念)’이고, 그런 ‘부촉(付囑)’이기 때문에 ‘최승이익(最勝利益), 가장 휼륭한 이익’이라 하고, ‘최승부촉(最勝付囑)’이라고 번역을 한다.

 

 

그 다음이 아주 중요한 것인데, 여기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 핵심(核心)이 『‘세존 선남자 선여인(世尊 善男子 善女人)에서부터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까지 이 구절이다. 핵심(核心)이다.

 

 

세존(世尊)이시여! 선남자 선여인(善男子 善女人)이, 발아뇩다라삼약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여기서 토(吐)는 ‘한이는’이라고 달아야 한다. 옛날 토(吐)에 보면, ‘ㅎ’자 쓰고 ‘니’자 쓰고 ‘는’자를 쓴다. 그래서 옛날에는 ‘하니는’ 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 말로 하면 ‘한’ 바로 띄우고 ‘이는’가 거기에 달리는 토(吐)이다.

 

 

아뇩다라삼약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발(發)한 그리고 ‘이는’는 ‘사람은’이란 뜻이다. 그래서 ‘아뇩다라삼약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발(發)한 사람은’ 그리고 ‘응운하주(應云何住), 응당히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그 다음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여기에 분명히 선남자 선여인(善男子 善女人)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몸, 천상의 몸을 받은 사람이라야 발심(發心)을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금생에 잘 닦아서 최소한 지옥(地獄)에는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지옥(地獄)에 한 번 떨어져 놓으면 금강경이고, 법화경이고 도대체 들을 수가 없다.

 

 

그것이 선남자 선여인(善男子 善女人)이다. 그리고 선남자 선여인(善男子 善女人)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몸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악한 일을 하는 중생에게는 금강경이 들어오지 않는다. 지옥(地獄)에 갈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금강경이 않들어 온다고 한다.

 

 

그러니까. 선남자 선여인(善男子 善女人)이다. 죄악(罪惡)을 짓지 않는 사람,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도록 악을 범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아뇩다라삼약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이룬다고 한다. 그 뜻은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킨 사람들은’라는 뜻이다.

 

 

그리고 ‘무상보리(無上菩堤)를 이루려고 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게 ‘보리심(菩提心)’인데 이 ‘보리심(菩提心)’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문이다. 글자 그대로 하면 보리(菩堤)는 각(覺)이다. 그래서 각심(覺心)이다. 각심(覺心)이면 부처님이 깨달았기 때문에 불심(佛心)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불(佛)은 각(覺)이니까. 불심(佛心)은 ‘부처님 마음이다’ 그래서 ‘부처님 마음이다’도 ‘보리심(菩提心)’이다. 또 부처님의 깨달음을 나도 깨닫고자 하는 마음도 ‘보리심(菩提心)’이다. 그러니까. ‘구보리심(求菩提心), 보리(菩提)을 구하는 마음’도 보리심(菩提心)이고, 깨달은 마음도 보리심(菩提心)이라고 한다.

 

 

그게 다 통(通)한다.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부처님처럼 성불하고자 하는 마음을 구하는 그런 사람들은’, ‘성불하고자 마음을 일으킨 사람들은’ 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구보리지심(求菩提之心)’이라고 되어 있다. ‘보리(菩提)을 구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그 보리(菩提)는 깨달음인데, 무슨 조그마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고, 최상의 깨달음, 최상의 성불을 하도록 하는 그런 깨달음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응운하주(應云何住), 응당히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라고 하였다. 이게 참 문제다.

 

 

‘머문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마음이 항상 어디에 지금 머물고 있는가?’ 라고 하는 질문이다. 그게 왜, 이런 말이 나오는가? 하면, 보통 발심(發心)을 하지 못한 우리 중생들은 어디에 머무는가? 색성향미촉법(빛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의 ‘육진(六塵)에 머물게 된다’고 한다.

 

 

‘보는 대로 마음이 거기에 머물러 있게 되고’, ‘듣는 대로 거기에 머물러 있고’, ‘냄새나는 대로 머물러 있고’, ‘먹는 대로 머물러 있고’, ‘느끼는 대로 머물러 있고’, ‘생각하는 대로 머물러 있다’ ‘육진(六塵)에 머물러 있게 된다’고 한다. 이것을 ‘미발심(未發心) 중생이 그 마음을 머무는 장소’라고 한다.

 

 

‘미발심(未發心)중생’은 색성향미촉법(빛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 ‘육진(六塵)에 머물게 있게 된다’고 한다. 몇 십년 전 지나가 과거에 내가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또 미래에 머물러 있다. 이게 ‘발심(發心)하지 못한 중생이 머물러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발심(發心)을 한’, ‘깨달음을 구하고자 마음을 일으킨 보살은 어디에 머물러야 합니까?’ 이것을 묻는 내용의 질문이다. 그런데 이런 중생이라도 그『깨닫기 전과 같이 ‘말하는 집착’과 ‘원망’과 ‘분노’ 이런 ‘중생심(衆生心)’이 일어날 때, ‘미발심(未發心)중생’은 일어나는 대로 행동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나면 화내고’, ‘욕심나면 욕심내고’, ‘생각나면 생각대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미발심(未發心)중생’이라고 한다. 그런데『발심(發心)을 한』보살은 화가 나고, 욕심도 나고, 생각이 나고, 여러 가지 습관이 나올 때, 그것을 여기서는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 이라고 했다.

 

 

그 사상(四想)을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의『기심(其心)』‘그 마음’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발심(發心)’하지 못한 ‘미발심(未發心)중생’은 일어나는 그대로 화가 나면 화를 내고, 미우면 막 복수도 하고, 싸움도 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면 되지만『발심(發心)을 한』보살은 대체 그 ‘분노와 탐욕이 일어날 때, 어떻게 그 마음을 가라 앉혀서 복종(服從)시켜야 하겠습니까?’ 이것을 묻는 것이다.

 

 

물론 까닭이 있다. 그러니까. 그게 수행이다.『‘머문다’고 하는 것은 색성향미촉법(빛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 ‘육진(六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리(菩提)를 일으키는 마음을 가지고 그 보리(菩提)를 일으키는 그 마음에 머물러서, 육바라밀(六波羅蜜) 수행을 하는데, 탐욕과 분노가 일어나게 되면 그 탐욕과 분노의 마음을 어떻게 눌러서 항복(降伏)시켜야 하겠습니까?』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수행(修行)이 생략되어 있다. 다른 번역에는 운하수행(云何修行)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어떻게 수행을 하며, 또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시켜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수행(修行)을 여기에 넣었어도 마찬가지다. ‘미발심(未發心)중생’은 평소에 수행하는 대신에 ‘수행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는 것인데’,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는 대신에 무엇을 하는가?

 

 

무엇을 할 것이라고 생각되는가? 발심하지 못한 보통 중생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는 대신에 무엇을 한다고 생각하는가? 십악(十惡)을 짓는다. 십악(十惡)은 살생(殺生)·투도(偸盜)·사음(邪淫)하고 망어(妄語)·기어(綺語)·악구(惡口)·양설(兩舌)과 탐욕(貪慾)·진에(瞋恚)·치심(痴心)이다.

 

 

생각만 일으켰다고 하면 탐욕(貪慾)·진에(瞋恚)·치심(痴心)이고, 행동을 했다고 하면 살생(殺生)·투도(偸盜)·사음(邪淫)이고, 말을 했다고 하면 망어(妄語)·기어(綺語)·악구(惡口)·양설(兩舌)이고, 거짓말, 둘러대는 말, 꾸며대는 말이다.

 

 

요즘에는 곧이곧대로 말하면 큰일 난다. 바른 말을 해서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바른 말을 하면 절대 않된다. 예를 들면 인물 못난 것을 ‘얼굴 못생겼다’고 하면 큰일 난다. 좀 늙어 보이는데 ‘늙어 보인다’고 하면 큰일 난다. 상처 받는다.

 

 

그러니까. 꾸며서 하는 말이 기어(綺語)인데, 기어(綺語)를 입에 달고 살아야 살 수 있다. 거짓말을 그냥 입에 달아야 살 수 있다. 이게 ‘발심(發心)’하지 못한 ‘미발심(未發心)중생’들이 살아가는 일이다.

 

 

『보통 ‘발심(發心)’하지 못한 ‘미발심(未發心)중생’은 십악(十惡)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발심(發心)’한 보살은 무엇을 합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부처님이 하나하나 대답을 하시기를,『‘발심(發心)’한 보살은 보리심(菩提心)에 머물러야 한다.』보리심(菩提心)이 ‘부처님 마음’인데, ‘깨달은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라 이루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것을 간략히 줄이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지비원(慈悲願) 삼심(三心)이라고 하였다. 지혜(智慧), 자비(慈悲), 원력(願力) 그게 부처님의 보리심(菩提心)이라고 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네 가지 마음을 다음 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사심(四心), 곧 광대심(廣大心), 제일심(第一心), 상심(常心), 부전도심(不顚倒心)을 보리심(菩提心)이라고 한다. 사심(四心)을 가지고 사심(四心)에 머물러서, 지혜(智慧), 자비(慈悲), 원력(願力), 그 삼심(三心)에 머물러서 십악(十惡)을 닦는 것이 아니라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는다. 그래 가지고 다음 어떻게 해야 할까?

 

 

온갖 탐욕과 분노가 일어나면『그 마음을 항복 시켜라. 그러면 그것이 반야바라밀 수행이다.』이것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불언(佛言)하시되 선재선재(善哉善哉), 착하고 착하구나.’ 또는 ‘휼륭하고 휼륭하다.’라고 한다. 수보리(須菩提)가 장로(長老)인데, 머리가 허연 백발을 보고, ‘착하고 착하구나.’고 하면 않된다.

 

 

나이 많은 분을 보고 ‘착하다’고 하면 봉변(逢變)을 당한다. 큰일 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기가 않착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자기가 알고 있다. 자기가 착하지 않다는 것을 자기가 훤희 알고 있는데, 엉뚱한 사람이 ‘착하고 착하구나.’고 한다면 좋지 않다.

 

 

이것은 우리 나라 말로서의 ‘착하다. 착하다’ 그런 경우의 말은 아니다. 번역하기 어려운 말인데 ‘휼륭하고 휼륭하다’ 라는 뜻이다.『수보리(須菩提)야 여여소설(如汝所說)』‘그대가 말한 바와 같아서’『여래(如來)는 선호념 제보살(善護念 諸菩薩)하고 선부촉 제보살(善付囑 諸菩薩)하나니라.』

 

 

『여금제청(汝今諦請)‘너는 자세히 들어라’』이 자세히 들어라.고 말씀하신 것은 ‘번뇌망상심(煩腦妄想心)을 가지고 듣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실상법(實相法)’을 말하기 때문에 ‘생멸심(生滅心)으로 듣지 말아라’는 뜻이다. ‘생멸심(生滅心)’으로 ‘실상법(實相法)’을 들으면 실상법(實相法)이 ‘생멸심(生滅心)’이 되어 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법문을 들을 때는 내 생각으로 듣지 말고 마음을 턱 내려 놓고 조용한 마음으로 그냥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속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리 저리 빠져서 그냥 새 버리고 그러면 좋은 보배 그릇을 하나 주었는데, 받기도 전에 깨버린 것과 같다고 한다.

 

 

 

보배 그릇은 그대로 간직해야 하지, 깨면 못쓰는 것이다. 또 보배 그릇에다가 다른 돌을 넣으면 못쓰는 것이다. ‘자기 소견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생각으로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지 말라’ 그리고 그렇게 판단을 하는 것은 ‘보배 그릇을 깨는 것과 같다’고 한다.

 

 

 

자기 소견으로 해석을 하면 그 ‘보배 그릇에다가 나쁜 것을 담아서 못쓰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여금제청(汝今諦請), ‘너는 자세히 들어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생멸심(生滅心)으로 듣지 말고 아주 깊은 마음으로 들어라’고 한 것이다.

 

 

 

당위여설(當爲汝說)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말하리라’ 선남자 선녀인(善男子善)이 발(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발한 이들은, 응여시주(應如是住) ‘응당히 다음과 같이’ ‘다음에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머물고’ 여시항복기심(如是降伏其心)또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항복할지니라’고 하였다.

 

 

 

유연(唯然)이라고 하면 ‘네’ 라고 뜻이다. 예대(禮待), 예로써 대답을 할 때는 유연(唯然)이라고 한다. 야대(野待), 보통으로 대답할 때는 ‘아’ 라는 대답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유연(唯然) 세존(世尊)’이라고 하면 ‘네, 세존(世尊)이시여’ 원요욕문(願樂欲聞), ‘원컨대 듣고자 하나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설명만 하면 재미가 없다. 그런데 재창(再唱)하면 재미가 있다. ‘생멸심(生滅心)’으로 들으면 재미가 없고, 이것을 아주 깊은 마음으로 들으면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같이 읽으셔도 좋습니다.

 

 

 

금강경을 읽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재사(祭祀)를 지낼 때 스님들이 읽는 경전들이 있다. 그것은 의식독경(儀式讀經)이다. 의식독경(儀式讀經)은 그 시간에 이것을 딱 읽어서 여법하게 마쳐야 한다. 그러니까. 경전을 격식에 맞추어 읽어야 하는 것이다.

 

 

 

혼자 간경독경(看經讀經)을 할 때는 경전을 보기 위해서 읽는다고 한다. 그게 간경독경(看經讀經)이다. 의식독경(儀式讀經)하고는 다르다. 그때는 금강경의 의미가 내 마음 속에 들어오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금강경의 뜻이 마음 속에 다 들어와야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슨 소리를 크게 내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 속에 들어오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오래 읽어도 피곤하지 않도록 읽어야 한다. 그렇게 소리를 계속 높이기만하면 피곤하게 된다. 어떨 때는 바람 소리가 흘러가듯이 슬슬 나가다가 높일 때는 크게 높이면 된다.

 

 

 

옛날에 한문 서당에서 글을 읽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불을 다 꺼놓고 밤새도록 잠도 않주무시고 계속 읽고 외우셨다. 그런데 얼마나 천천히 읽는가? 하면 글자 하나하나 새기어 가면서 운곡(韻曲)을 다 살리면서 읽으셨다. 여러 불자님들도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숨도 아주 복식호홉으로 될 수 있고, 아주아주 굉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금강경의 뜻이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이 목적이다’라고 한다. 그것을 읽고 끝내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누가 쫒아오는 듯이 그냥 빨리빨리 읽는다.

 

 

 

그 옛날에 노래를 빨리 부르는 경우가 있었는데, 노래를 아무리 빨리 불러도 이 금강경을 빨리 읽는 것처럼 빨리 부르는 노래는 없다. 불과 간단한 시간에 다 읽어 버린다. 금강경 잘 읽는 스님들은 많이 있다.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시간은 제한이 되어 있는데 그 시간에 모든 의식을 끝내야 한다.

 

 

그런데 나처럼 세월아, 네월아 그러면 언제 다 읽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의식독경이고, 이것은 간경독경이다’라고 한다. ‘경을 보기 위해서 독경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구분이 다르다는 것이다.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보살은 발심(發心)을 왜 하는가?

 

 

중생이 하도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발심(發心)을 한다. 벌써 발심(發心)을 할 정도가 되면 복(福)도 있고 환경도 좋은 선남자 선녀인들 이라고 할 수 있다. ‘선남자 선녀인’들 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화엄경’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라고 하는 분이 나오는데 ‘선재(善財)’라고 하는 것은 ‘환경도 좋다’라고 하는 의미다.

 

 

‘태어나자마자 금은보화가 집에 가득하다’ 그것을 ‘선남자 선녀인’이라고 한다. ‘건강도 좋다’ ‘이목구비도 좋다’ 이렇게 자기 몸이 좋다고 하는 것은 정보(正報)라고 한다. 또 환경이 좋은 것은 의보(依報)라고 한다. 그리고 환경도 좋고, 자기 몸도 좋고 고통이 없는 분들은 ‘선남자 선녀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보살도(菩薩道)를 닦으려고 마음을 내는가? 그것은 중생들의 고통, 그것이 한량없이 많다. 그것을 본다. 그리고 중생들의 고통을 느낄 때 발심(發心)을 한다. 그 중생들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중생들의 고통을 느끼는가?

 

 

욕심을 많이 내서 고통을 느끼고, 화(瞋)를 내서 고통을 느끼고, 그 화(瞋)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 많다. 그중에 이런 것이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라는 말이 있다. 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왜 저질렀겠는가? 그것은 화(瞋)가 나서 그렇다.

 

 

극한 상황으로 가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죄’인데, 그게 전부 화(瞋)를 못 눌러서 그렇다. 그런데 그 화(瞋)는 불과 같고, 화산의 폭발과 같다. 화산이 폭발하면 남는 게 없다.

 

 

그래서 그 화(瞋)는 오히려 쉬운 것이다. 화(瞋)는 날 때만 나지, 항상 나지는 않는다. 불(火)이라고 하는 것은 날 때만 나지 항상 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탐욕이라고 하는 것은 물과 같아서 않나오는 곳이 없다. 표가 없을 뿐이다. 물이라고 하는 것은 몸에 맞으면 온 옷에 스며들고, 몸속까지 스며들고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탐욕은 물과 같고, 화(瞋)는 불과 같다고 한다. 불(火)은 보이지만 탐욕은 보이지가 않는다.

 

 

탐욕, 애수(愛水)의 물이 천천히 사람을 빠트려서 그냥 구렁텅이의 나락(那落)으로 밀어 넣는 게 탐욕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그것은 사실을 잘못 보는 사견(邪見) 때문에 그렇다. 이것이 무명(無明)이다.

 

 

사실(査實)을 바로 보면 그 탐욕과 분노가 않일어나는데, 사실을 사실(査實)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정견(正見)을 갖지 못해서 그 탐욕과 분노가 생기는 것이다.

 

 

그 탐욕과 분노로서 십악(十惡)을 지어 가지고 끊임없는 고통을 당하니까. 그것을 보고 어떻게 발심을 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발심보살(發心菩薩)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고통이 없다고, 또는 내가 당장 아쉬운 것이 없다고 그것을 뽐내고 자랑을 한다면 그것은 사람도 아니다. 자기가 잘난 것, 자기가 힘이 세다고 자랑하는 것은 생각이 모자라도 굉장히 모자란 행동이라고 한다.

 

 

지금 중생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 중생이 누구인가? 우리 어머니도 중생이고, 아버지도 중생이고, 이웃도 중생이고, 모두 함께 있는 사람이 중생이고, 멀리 있는 사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다 중생이다.

 

 

그래서 이런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에 신음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시달리고 있는데, 그런 중생을 그냥 놓아두고 ‘나’ 잘난 것을 자랑하고, ‘나’ 편한 것을 자랑하고 그렇게 살았나?

 

 

‘나’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가 생각한 자기 몸인데, 몸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몸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나는 또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래서 이렇게 조금만 이 경전의 뜻을 생각하면 도를 않닦을래야 않닦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리석어서 못닦고, 몰라서 못닦지, 우리 인생, ‘내 자신이 얼마 못간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어리석고’ ‘스스로 탐내고’ ‘스스로 분노를 일으켜서 받는 그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살펴서 안다면 어떻게 보살행을 할려고 하는 마음을 않일으키겠는가? 이것이 발심(發心)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또 하나 문제는 말도 말도 말할 수 없는 것이 도(道)이다. 그래서 깨닫는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런 것이 있다.

 

같은 법문이라도 어떤 스님은 돈오돈수(頓悟頓修), ‘몰록 깨달아서 몰록 닦는다’고 주장을 하시고, 어떤 분은 돈오점수(頓悟漸修), ‘깨닫기는 금방 깨닫지만 닦는 것은 점차 닦아 간다’고 말씀을 하시고 있다.

 

대략 경전에서는 ‘돈오점수(頓悟漸修)도 아니다’라고 한다.

 

점수점오(漸修頓修), ‘점점 닦을수록 점점 깨닫는다’ 이것이 경전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그래서 점수점오(漸修頓修)라고 한다. 금강경을 열번 읽으면 열번을 읽는 것만큼 지혜가 생긴다. 그게 점수점오(漸修頓修)이다.

 

 

백번을 읽으면 백번을 읽는 것만큼 지혜가 생긴다. 그것을 점수점오(漸修頓修)라고 한다. 첫째 돈오돈수(頓悟頓修), 금방 깨달아서 금방 닦는다. 두 번째 돈오점수(頓悟漸修), 금방 깨달아서 차근차근 점점 닦는다. 점수점오(漸修頓修), 점점 닦아서 점점 깨닫는다. 이 모든 법문들 가운데 어느 것이 맞는가?

 

 

어느 것이 맞을 것 같습니까? 그러나 이게 전부 다 맞는 말씀이다. 그게 왜 그런가? 이런 말씀이 있다. 선문(禪門)에 최초구(最初句)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최초구(最初句)는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내려오기 전에 이미 왕궁에 오셨고, 어머니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중생제도를 다해 마쳤다. 그게 도(道)이다. 그런 세계가 있다.

 

 

또, 그런가 하면 부처님이 팔상성도(八相成道)를 하셨다. 룸비니 동산에서 출가해 가지고 또 성불해서 45년 동안 설법하고 중생을 제도하셨다. 그것을 말후구(末後句)라고 한다. 이것은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다. 최초구(最初句)라고 하는 것은 그 근본이다. 그러면 그것이 틀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 똑같다.

 

 

중생을 제도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 중생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중생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도 없지만 사실 중생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도(道)이다.

 

 

자! 그러니, 그 도(道)를 어떻게 설명을 하겠는가? 그러니까. 부처님은 도(道)를 설명하는 설도자(說道者)가 아니라 조어장부(調御丈夫)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소의 해석도 보면 인도의 세친 보살론(菩薩論), 천친론(天親論)하고 규봉선사의 소(疏)하고는 지금 설명하는 것처럼 딱 발심수행으로 그 수행차제(修行次第)를 쭉 설명을 했다. 그것은 말후구(末後句)에 의해서 설명을 한다.

 

 

부처님이 언제 출가를 하셔서 언제 성도하시고, 언제 설법하시고, 이렇게 ‘점수점오(漸修頓修)에 의해서 설명한 것으로 인도에서 태어나셔서 금강경을 해석한 인도 대선지식들의 가르침이다’고 한다.

 

 

금강경도 야부송(冶父頌)이라든지, 중국에서 일어난 선사들이 해석한 금강경들이 있는데, 이런 금강경은 말후구(末後句), 점수점오(漸修頓修)에 의해서 설명한 것이 아니라 돈오돈수(頓悟頓修)에 의해서 설명을 한 것이다.

 

 

그러면 돈오돈수(頓悟頓修)가 틀렸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러면 점수점오(漸修頓修)가 틀렸는가? 그것도 아니다. 도(道) 자체가 그렇다.

 

사람에 따라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도 맞고, 돈오점수(頓悟漸修)도 맞고, 점수점오(漸修頓修)도 다 맞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안전한 길은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길이니까. 점수점오(漸修頓修)가 제일이다. 이 길은 못갈 중생이 하나도 없다.

 

 

자! 악한 사람은 선한 길로 가고, 선한 사람은 해탈의 길로 가고, 해탈에 든 사람은 보살도의 길로 가서 성불해서 중생을 제도하는 길로 간다. 그러니까. 오계, 십선의 길이 있고, 사성제, 십이연기의 길이 있고, 육바라밀의 길이 있는 것이다.

 

 

야부송(冶父頌)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다. 니희아불희(你喜我不喜), ‘너는 즐거워도 나는 즐겁지 않다’ 이게 최초구(最初句), 부처님이 ‘어머니의 모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중생을 제도를 다해 마쳤다’고 하는 소식이다.

 

 

저, 세상이 다 타고, 지구가 다 타고, 온갖 것이 다 타도 않타는 것이 있다. 그게 무엇일까? 높은 건물이 있는데 싹 다타버렸다. 그런데 않타는 것이 있다. 그게 무엇인가? 허공이다. 모든 것이 다 타도 허공은 타지 않는다.

 

 

그게 본래의 나(我)이다. 그러니까. 본래의 내가 생노병사를 받는 ‘나(我)’를 보고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이다. 니희아불희(你喜我不喜), ‘너는 즐거워도 나는 즐겁지 않다’고 한다.

 

 

허공이 지금 불에 타는 그것을 보고 ‘너는 타도 나는 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게 최초구(最初句)이다. 그것은 돈오돈수(頓悟頓修)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아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하는 말을 쓰면 절대 그릇된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돈오돈수(頓悟頓修)가 맞으면 돈오점수(頓悟漸修)가 틀린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은 생멸심(生滅心)으로 실상법(實相法)을 듣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법문을 듣는 자세가 아니다. 군비아불비(君悲我不悲) ‘그대는 슬퍼도 나는 슬프지 않다’ 이게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소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거기는 아주 자유롭다는 것이다.

 

무엇이 자유로운가? 안사비새북(雁思飛塞北)기러기는 북쪽으로 날아갈 것만 생각하고, 연억구소귀(燕憶舊巢歸)제비는 옛집으로 돌아올 것만 생각한다.

 

자유자재하다는 의미다. 이게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소식이다. 중국 선사들이 가르친 금강경의 오의(悟意)다. 시원시원하다.

 

 

추월춘화무한의(秋月春花 無限意)가을 달과 봄꽃의 무한한 뜻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중국 선사들이 말하는 금강경의 법문이다. ‘어떻게 닦아서 어떻게 한다’는 것은 인도 선지식들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금강경 오가해’라고 하는 해석에 다 들어 있다.

 

 

중국 선사들의 말을 들어 보면 시원시원하기는 한데, 무엇인가 모를 것 같고, 인도의 금강경론이나 이런 것을 보면 세밀하고 자세하기는 한데, 어째 답답하다. 한 쪽에는 모르고 시원하고, 한쪽에는 알고 답답하다.

 

 

결국은 도를 닦아서 지혜가 생겨야만 모르는 것도 없어지고, 답답한 것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개중지허자가지(箇中只許自家知)그 속에서 다만 스스로 아는 사람들에게만 허락한다. 그것은 설명을 못한다. 그게 금강경이다.

 

 

답답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꾸 독송을 해서 우리 산란한 마음이 점점 가라앉을수록 진리가 훤하게 보인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는다. 진리는 더듬어서 알아내는 것이 절대 아니다. 마음이 밝아져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알아내는 것이 절대 아니다. 마음이 밝아져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이 어떻게 밝아지는가? 혼탁한 생각을 자꾸 가라앉히면 밝아지는 것이다.

 

 

더럽혀진 물은 가만히 놓아두면 밑으로 가라앉는 찌꺼기가 있는데, 마음 가라앉는 것은 찌꺼기가 전혀 없다. 그래서 흙탕물 가라앉는 것하고 마음 가라앉는 것하고는 틀리다. 우리 마음도 흙탕물 가라앉는 것처럼 찌꺼기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마음은 찌꺼기가 없다. 그거 한번 가라앉히고 보세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만약 틀렸다면 찾아오세요. 아주 자신있게 상대해 줄 생각이다. 마음은 가라앉을 찌꺼기가 없다. 그런데 흙탕물은 가라앉으면 찌꺼기가 있다.

 

 

그래서 마음은 가라앉으면 가라앉는 것만큼 마음은 환하게 된다. 보리(菩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밝아져서 나타나는 것이지, 무엇을 알아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보리(菩提)는 무엇을 알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밝혀야 한다. 금강경 자꾸 읽고 잘 닦으시면 그게 마음을 밝히는 것이다.

 

 

千尺絲綸直下垂 (천척사륜직하수)

一波在動萬波隨 (일파재동만파수)

夜靜水寒魚不食 (야정수한어불식)

滿船空載月明歸 (만선공재월명귀)

 

천척의 낚싯줄을 아래로 드리우니

한 물결이 일어나자 만 물결이 뒤따른다.

고요한 밤 물 차가와 고기 물지 않으니

배에 가득 허공 싣고 달빛에 돌아오도다.

 

<금강경 야부송(金剛經 冶父頌)>에 나오는 중국 송나라 때의 고승이었던 야부 도천(冶父 道川)스님의 시입니다.

 

중앙승가대학총장 종범스님

 

 

출처 : 수보리
글쓴이 : 원종스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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