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金剛經(금강경)-4 부처님의 사랑법
妙行無住分(묘행무주분)
復次(부차)라고 하는 말은 '다시' 그리고 '또'라고 하는 말이다.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은 於法(어법)법에 있어서 應無所住(응무소주) 보살은 법에 응당히, 반드시, 마땅히 그런 뜻이다.
주(住)하는 바 없이 여기서 주(住)라고 하는 것은 구하는 것, 바라는 것, 취하는 불구(不求), 불망(不忘), 불취(不取)를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몸, 밖으로부터 얻어지는 이익, 미래의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오욕락(五慾樂)을 말한다.
법(法)은 무엇인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 몸, 밖으로부터 얻어지는 공경, 자기 이익을 법이라고 하고 미래에 자기 몸에 필요한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오욕락(五慾樂)으로 재물 사랑 음식 명예 편안히 잠자는 수면을 말한다.
이런 것을 應無所住(응무소주)마땅히 바라는 바 없이 마땅히 구하는 바 없이 마땅히 취하는 바 없이 行於布施(행어보시)보시를 행할지니라. 여기서 布施(보시)라고 하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생(資生)보시라고 해서 몸을 돕는다. 자본이라고 하는 자(資)와 생활이라고 하는 생(生)자인데 재물 보시를 말한다. 재물은 우리 삶을 돕는다. 그것을 재보시라고 한다.
두번 째는 무외(無畏)보시라고 해서 두려운 마음을 없애준다. 편안한 위로를 말한다.
세번 째는 법(法)보시라고 해서 지혜를 깨우쳐 준다. 걱정을 없애는 것을 말한다. 이게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전부를 말한다.
보시는 재시(財施)·법시(法施)·무외시(無畏施)로 나누어 진다. 재시는 자비심으로 다른 이에게 조건 없이 물건을 주는 것이고 법시는 다른 사람에게 부처의 법을 말하여 선근(善根)을 자라게 하는 것이며 무외시는 스스로 계를 지켜 남을 침해하지 않고 다른 이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 주는 것이다.
옛 분이 말하기를 백 명의 불쌍한 사람에게 적선하는 것은 한 사람의 착한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착한 사람 천 명에게 공양하는 것은 한 사람의 불자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다.
불자 만 명에게 공양하는 것은 한 분의 선신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선신[善神] 십 만명에게 공양하는 것은 삼세 제불 한 분께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삼세 제불 천 만분께 공양하는 것은 한 분의 무심 도인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以生其心]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내라고 한 것은 성경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는 것과 같이 그 마음을 내어 베푸는 것은 어떤 조건도 없이 행해져야 한다. 달마대사를 만난 양무제가 자신의 업적을 열거하며 그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을 때 달마는 한 마디로 무공덕[無功德]라고 일갈한다.
보시는 한 마디로 나눔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나눔은 모든 조화의 시작이다. 수행의 실천행에 첫 번째로 나눔을 내세우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불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다.
그게 왜 그런가? 육바라밀(六波羅蜜) 전체가 자생(資生)보시, 무외(無畏)보시, 법(法)보시라고 가르치고 있다.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첫 번째 보시는 자생(資生)보시, 재물 보시를 말한다.
두 번째 지계(持戒)는 부처님이 제자들의 비도덕적인 행위를 막기 위하여 설정해 놓은 법규를 지키고 범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여 가지가지 선을 실천하고 모든 중생을 살찌게 하는 행위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모든 계율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관계를 이루며 하나씩 만들어져 인간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이 계율이다. 그대가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대가 인간 관계속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만법이 있다. 이 만법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인간의 수준을 상.중.하로 나눈다면 그대가 세상의 만법을 지키며 다른 사람에게 만법의 준수를 강요하는 것은 근면 성실하다고 하고 보통사람[中]이며 본인은 지키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지키기를 강요하는 것을 인색하다고 하고 하[下]의 수준이다.
예를 들면 건달 세계의 두목들은 부정하게 모은 돈으로 온갖 탐욕을 누리고 하루밤 술값으로 타인들의 한달 생활비를 탕진하면서 자기 부하들에게는 쥐꼬리만한 봉투를 던져주며 열심히 아끼며 살기를 바란다. 세상에 이보다 인색한 쫄장부가 있겠는가?
그대가 세상의 만법을 스스로 지키면서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고 타인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그 아픔을 감싸준다면 이것을 사랑[上]이라고 한다. 사랑은 그대의 세치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부딪히는 그대의 몸짓이다. 20세기 위대한 성자[聖子] 마더 테레사 수녀는 온 생애를 사랑으로 실천하신 분이다.
세 번 째 인욕(忍辱)은 온갖 모욕과 번뇌를 참고 어려움을 극복하여 안주하는 것으로 우리 일상 생활에 있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인 성나고 언짢은 마음을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한다.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먼저 성나는 그 마음을 조복(調伏)하여 억누른다. 그러나 역경만 참아서는 안 되며 자기 마음을 즐겁게하는 순경(順境)도 참아야 한다.
그 이유는 역경을 참지 못하면 분노가 치밀어서 투쟁하기 쉽고 순경을 참지 못하면 유혹에 빠져서 몸과 마음을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장 22절 '저들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그대의 지금 그 자리는 영겁의 세월을 인고[忍苦]하며 주어진 소중한 자리이다. 참고 또 참아서 그대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
법화경 12장 제바달다품에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제바달다 비구야말로 나의 선지식이며 그의 덕분에 나는 육바라밀을 이루었으며 자비희사라는 보살의 사덕과 32상과 80종호 금색 피부 불타의 십력 등 시방의 중생을 구제하는 이 모든 것을 그의 덕분에 이룰 수가 있었다.
그는 천도라는 세계에서 천왕 여래로 나타날 것이다.'(세존께서 그의 생애 최대의 적을 최고의 칭찬과 기원으로 회향하셨다.)라고 하셨다.
두 번째, 세 번째 지계(持戒)와 인욕(忍辱)은 계(戒)를 지키고 인욕(忍辱)을 하는 무외(無畏)보시이며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를 말한다.
그리고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는 법보시(法布施)를 말한다. 왜 그런가? 법을 가르쳐 주고 법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는 그 법을 깨우쳐 주는 사람은 정진을 하지 않으면 않된다.
그 법을 깨우쳐 주는 사람이 정진을 하지 않으면 않된다. 피곤하고 게으르면 법을 알려줄 수가 없다. 그리고 선정(禪定)이 있어야 법을 설할 수 있지 선정(禪定)이 없으면 또 법을 설할 수가 없다.
지혜(智慧미혹(迷惑)을 절멸하고 보리(菩提)를 성취하는 힘)를 닦아야지 지혜(智慧)를 닦지 아니하면 법을 설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는 법보시(法布施)다. 법보시(法布施)는 특히 정신적인 베풂으로 진리의 말씀을 전해서 뭇 중생들이 미혹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육바라밀(六波羅蜜)은 열반(涅槃)의 피안(彼岸)에 이르기 위한 보살의 여섯 가지 수행이다. 여기서는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 육도(六度)의 육바라밀(六波羅蜜) 행(行) 전체를 보시(布施)로 본다.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의 재물을 보시하는 그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보시(布施)의 뜻이 그렇다. 그렇다면 몸을 위해서 바라지도 말고, 외부의 명예를 위해서 바라지도 말고, 미래의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오욕락(五欲樂)을 바라지도 말고, 오로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실천하라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菩薩(보살)은 於法(어법)에 應無所住(응무소주)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行於布施(행어보시)보시(布施)를 실행할지니라고 하는 것이 그 뜻이다. 그 밑에 所謂(소위) 그러면 설명을 해본다면 이런 뜻이다. 이른바 不住色布施(부주색보시)색(色모양)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며, 색을 바라지 말고 보시한다.
不主聲香味觸法布施(부주성향미촉법보시)니라.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 머물지 말고, 바라지 말고 보시할지니라. 이런 전체가 미래에 대한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가 되고 현재에 대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온(五蘊)이 된다.
온 자기 몸을 위해서 무엇을 바라지 말고, 미래의 오욕락(五欲樂)을 위해서 바라지도 말고, 다른 이들로부터 이익(利益)과 명예(名譽)를 바라지도 말라. 이것이 不主聲香味觸法(부주성향미촉법)이다.
그렇다면 바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그것은 아니다. 바라지는 말고 오로지 보시(布施)를 실천하기만 하라. 그것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다.
무주상(無住相)이란 이야기는 바라지 말라는 소리다. 구하지 말라는 소리다. 취하지 말라는 소리다. 불망(不望)·불구(不求)·불취(不取) 그게 무주상(無住相)이다.
그러면 상(相)은 무엇인가? 자기 몸, 오온(五蘊)도 상(相)이고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오욕락(五欲樂)도 상(相)이고 또 명예(名譽)와 이익(利益)도 상(相)이다. 이런 것을 전부 바라지 말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바라지 말라고 하는가? 여기서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실행 보시를 말하고 있다. 지금 이 경전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경전(經典)이고, 앞서 발심한 보살들의 수행 방법을 말하고 있다.
앞에서 한없는 중생을 다 이롭게 하겠다고 이런 발심(發心)을 했다. 그런 발심(發心)을 한 보살은 무엇을 하는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실천한다. 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고 하는 말은 지혜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하여 지도(智渡)라고 번역한다.
도(渡)건너간다고 하는 것은 실천한다는 말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智慧)다. 지혜(智慧)를 실행(實行)하는 보시(布施)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다.
그런 지혜(智慧)를 실행하지 못하는 중생은 어떻게 하는가? 중생들은 지혜(智慧)를 모르기 때문에 사랑하고 집착하는 애취행(愛取行)을 한다. 사랑하고 집착하는 애취(愛取) 때문에 생사윤회(生死輪回)를 계속한다.
사랑과 집착을 하는 애취(愛取) 그것 때문에 업(業)이 형성되어서 내세에 또 태어난다. 그것 때문에 업(業)이 형성되어서 내세(來世)에 또 태어난다. 애취(愛取)가 물고기로 말하면 낚시 밥, 미끼라고 한다.
사랑과 집착으로 고통이 생기고 사랑과 집착으로 고통이 생기는데 사랑과 집착이 없으면 고통이 없다. 물고기가 미끼를 물지 않으면 낚시 줄에 끌려 올라갈 일이 없다. 다 낚시 밥을 물다가 낚시 줄에 끌려 올라간다.
불나방이 밝은 불을 탐하지 않으면 불에 타서 죽을 일이 없다. 불나방은 밝은 불을 탐하다가 불에 타서 죽는다. 그래서 중생들은 이 애취행(愛取行)으로 보시(布施)를 하는데 보살(菩薩)은 무주상(無住相)으로 보시(布施)를 한다.
이러한 경지가 중생하고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실천하는 보살(菩薩)과의 차이점이다. 그것은 보살(菩薩) 수행이 역시 부처님(佛) 생활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사랑법이다. 부처님은 어떻게 사랑을 하는가? 무주상(無住相)으로 보시(布施)를 한다. 이게 부처님의 사랑법이다.
중생이 왜 괴로운가? 부처님의 사랑법을 몰라서 괴로운 법이다. 사랑한답시고 원수를 만들고 사랑한답시고 고통을 만든다. 그것이 중생이다. 그래서 중생은 전부 사랑하다가 괴로워 한다.
대중 문화를 보면 전부 사랑하다고 헤어지고 사랑하다가 고통받는다. 전부 그렇다. 대중 가요도 그렇고, 대중 드라마도 그렇고 대중의 삶도 그렇다.
애취(愛取) 때문에 전부 사랑과 집착을 잘못해서 고통 받는다. 그래서 보시를 해도 사랑하고 집착하는 애취(愛取) 보시를 하니까. 주면 받을 생각을 한다. 주고 나면 그 자신은 받을 생각부터 먼저 한다.
주는 것 까지는 좋은데 받을 생각을 하니까. 그게 고통(苦痛)이다. 모든 고통은 받을 생각을 하는데서 생긴다. 받을 생각을 일체 하지 않으면 고통은 없다.
부처님은 보시를 하되 바라는 마음 없이 구하는 마음이 없이 취하는 마음없이 불망(不望)·불구(不求)·불취(不取)의 보시(布施)를 한다. 바라고 구하고 취한다고 하는 말을 표현할 때 머무를 주(主)자를 쓴다.
머문다는 것은 바라는 것, 구하는 것, 취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것이 머무를 주(主)자다. 무주상(無住相)이라고 하는 것은 불취상(不取相)인데 상(相)이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필요한 것으로 몸(體), 오욕락(五欲樂), 명예(名譽) 이런 것이 전부 상(相)이다. 여기서는 상(相)자의 의미가 다른 무엇이 있다. 없다가 아니다.
무주상(無住相)이라고 할 때 상(相)자의 의미는 있다. 없다가 아니다. 몸(體)하고 오욕락(五欲樂)하고 명예(名譽) 이런 것을 여기서는 상(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것을 왜 보살(菩薩)은 구하지 않는가? 그런 몸(體)이나 오욕락(五欲樂)이나 또는 다른 명예(名譽)나 이익(利益)은 구(求)하면 없어진다고 한다.
없어지면 괴로워(苦) 한다. 그런데 중생(衆生)은 얻는 것과 구(求)하는 것만 알았지, 주는 것이나 얻는 것이나 구한 것이 없어진 다음에 또 괴로움이라는 것은 모른다고 한다.
만나는 것만 알았지 헤어지는 것은 모른다. 태어나는 것만 알았지 죽는 것은 모른다. 그래서 덮어놓고 자식을 낳으려고 하고 덮어놓고 살려고 하고 덮어놓고 구하려고 하고 덮어놓고 얻으려고 한다.
물고기가 낚시 밥이나 미끼를 먹는 것만 알았지 제 몸이 낚시 줄에 끌려 올라가는 것은 모른다. 불나방이 환하게 밝은 곳에 뛰어 드는 것만 알았지 뛰어들면 불에 타서 죽는 줄은 모른다.
이것을 복보포시(福報布施) 복에 보답을 바라는 보시라고 한다. 그런데 바라는 마음으로 보시를 하려고 해도 그 만큼 돌아 오니까. 복보포시(福報布施)도 공덕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복보포시(福報布施)가 돌아오면 그것은 없어진다. 또 괴로워진다.
그래서 이렇게 복보포시(福報布施)복에 보답을 바라고 보시하는 것은 생겼다가 없어지고(生死輪回) 태어났다가 죽으니까. 그것을 생사업(生死業)이라고 한다. 해탈 바라밀행이 아니고 생사업(生死業)이다. 그래서 바라지(所願) 말라고 한다.
얻어 봐겠자 사라지니까. 사라지면 또 괴로우니까. 그러니까. 얻을 생각 전혀 하지 말고 오로지 보시(布施)를 하라고 한다. 그러면 보시(布施)를 해서 공덕(功德)은 점점 불어나는 동시에 바라지 않으니까. 괴로움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없다.
그런데 중생들은 바라는 마음으로 보시를 하니까. 대가(代價)가 돌아오지 않으면 보시를 중단하고 포기해 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공덕(功德)이 전혀 없다.
보시(布施)조차 하지 않으니까. 완전히 가난해져서 빈궁과보(貧窮果報)를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부자가 되어도 생사업(生死業)인데 부자가 되기도 전에 가난해져 버린다. 그것은 않된다.
복보포시(福報布施)처음에는 바라는 마음으로 보시를 하더라도 점점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지혜(智慧)를 배우게 되면 바라는 마음이 점점 줄어들어서 나중에는 저절로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를 하게 된다.
처음부터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려면 이것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실천(實踐)이기 때문에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를 하려면 아공(我空)을 먼저 믿어야 된다.
아공(我空)은 무엇인가? 나(我)라는 것은 오온(五蘊)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5요소(要素)의 결합(結合)인데 그 오온(五蘊)이 다 공(空)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오온(五蘊)이 공(空)하다는 것은 우리 몸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는 말이다. 죽음이 없다고 하는 말을 확실히 믿을 때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의 문(門)에 들게 된다고 한다.
왜, 죽음이 없는가? 우리 몸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책이 한 권 만들어졌다. 그런데 책이라고 하는 자성(自性)이 없다. 종이 뿐이다. 종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오온(五蘊) 뿐이다.
나(我)라는 것은 없고 오온(五蘊) 뿐이다. 종이 하나하나도 또 자성(自性)이 없다. 물질 뿐이다. 그 물질은 생겨도 자성이 없기 때문에 자체 본질이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고 없어져도 없어진 것이 아니다.
마치 번갯불이 일어났다가 번갯불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우리 몸도 하나의 번갯불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이렇게 이 몸 그대로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의 대사상(大四相)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질 때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의 문(門)이 열린다.
이 몸에 대한 애착(愛着)이 꽉 차 있는데 무엇을 바라는 없이 보시하라고 하는 것은 않된다. 지금 무서워 겁이 나서 죽겠는데 겁내지 말라고 해서 겁이 않날 수가 없다.
그래서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라고 하는 것은 반야행(般若行) 보시(布施)라고 생각하면 된다. 반야를 실천하는 보시다. 반야바라밀 발심을 하고 반야바라밀 수행을 하는 것이 보살이니까. 바라는 것이 없이 보시하라고 이르는 말이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바라는 것이 없는 보시(布施) 하라는 것이고 바라는 보시(布施)는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데 바라는 보시(布施)를 하지 말라고 하니까. 보시(布施) 자체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복보보시(福報布施)도 닦지 않고 그냥 가난(貧窮)하게 되는 길이라고 한다.
공덕(功德)을 닦되 바라는 것이 없어야 보살(菩薩)이지 바라지도(所願) 않고 공덕도 닦지 않으면 그것은 해태굴(懈怠窟)게으른 굴에 빠진 것과 같다고 한다. 결론이 그것이다. 이 한 줄의 문구 뿐이다.
보살(菩薩)은 어법(於法)에 응무소주(應無所住)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행어보시(行於布施)보시(布施)를 행할지니라. 부주성향미촉법보시(不主聲香味觸法布施)이른바 색(色)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며 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할지니라. 그게 아주 여기 전부이고 밑에는 더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이다.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부주어상(不住於相)수보리야 보살은 응당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相)에 머물지 말지니라. 상(相)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 상(相)은 유무(有無)의 있다. 없다의 상(相)이 아니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온(五蘊)과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 오욕락(五慾樂)하고 명예(名譽)와 공경(恭敬) 자기와 관련된 그런 것을 이르는 말이다.
자기류상[自己流相]자기와 관련된 상(相)이다. 있다. 없다. 세간법. 출세간법 그런 법이 아니고 그 상(相)이 아니다. 하이고(何以故)어째서 그런가? 약보살(若菩薩)만약 보살이 부주상보시(不住相布施)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하면 기복덕(其福德)그 복덕이 불가사량(不可思量)생각할 수가 없느니라.
바라지 않고 보시하는 그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고 그게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게 된다. 중생(衆生)이 보시(布施)를 하기는 하는데 전부 바라는 그것 때문에 공덕(公德)은 하나도 않되고 고통(苦痛)만 오게(來) 된다고 한다.
그것은 아공(我空)을 깨닫지 못하고 그 보시(布施) 자체는 지혜(智慧)를 닦는 보시(布施)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인데 그렇지 못하고 생사업(生死業)을 만드는 보시(布施) 그것이 바라는 보시(布施)가 된다.
받으면 또 없어지고 또 받으면 없어지는 것이 생사업(生死業)이다. 태어나면 또 죽고 태어나면 또 죽고 많이 받아봐야 없어지니까. 마찬가지가 된다. 그런데 중생들은 없어지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많이 받는 것만 좋아한다.
그래서 많이 받으려고 하면 고통도 더 많다. 그것이 다 없어지고 나면 슬픔도 더 많고, 결국 자기 고통만 만드는 일이 된다. 그것을 애취행(愛取行)보시(布施)사랑하고 집착하는 행위의 보시라고 한다. 전부 그렇다.
중생이 하는 짓은 잘한다고 하는데 결국 미끼를 먹는 물고기와 같은 일을 하고 불에 뛰어드는 그런 불나방 같은 짓을 하는 것이 중생이다. 불을 보고 뛰어 갈때는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뛰어 갔겠는가? 그렇지 않는가?
낚시 밥을 보고 먼저 와서 누가 먹을 까봐 그냥 빨리 가서 물때는 얼마나 대단하게 달려 가서 물었겠는가? 그게 중생이다. 그게 애취행(愛取行)이라고 한다. 그 밑에는 비유이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네 생각은 어떠냐? 동방허공(東方虛空) 가사량부(可思量不)동방이라고 말하는 것은 방향의 첫 번째방위니까 동방이라고 했다. 동방의 허공을 생각할 수 있겠느냐? 불야(不也) 세존(世尊)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라고 하였다.
수보리(須菩提)야 남서북방(南西北方)은 동서남북 사방이고 사유(四維)는 그 사이사이 간방이고 상하(上下)는 위아래로서 시방을 이르는 말인데 이런 허공(虛空)을 가사량부(可思量不)생각할 수 있겠느냐? 불야(不也) 세존(世尊)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라고 하였다.
수보리(須菩提)야 보살(菩薩)의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 복덕도(福德)보살들이 바라는 것없이 베푸는 보시의 복덕도 역부여시(亦復如是)또한 이와 같아서 불가사량(不可思量)생각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지혜로 실천하는 공덕(功德) 지행보시(智行布施)는 공덕을 이루 말할 수가 없고 생각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수보리(須菩提)야 보살(菩薩)은 단응여소교주(但應如所敎住)다만 응당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여기서 무엇을 가르쳤는가?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를 가르쳤다. 여소교(如所敎)가르친 바라고 하는 것은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를 말하고 있다.
머문다(住)라고 하는 것은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에 머물러라는 말이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하는 보시 그런 것 말고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에 머물러라고 가르쳤다.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를 하면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라고 하는 것이 그대로 지혜(智慧)를 실천(實踐)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어떻게 사랑을 하는가?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로서 사랑을 한다. 사랑하고 집착하지 않는 몸과 마음으로 보시를 하고 다 베풀기는 하지만 바라지는 않는다.
중생은 베푸는 것은 적고 바라는 것은 많다. 그게 사랑할 줄 모르는 행동이고 마음이다. 바라는 것이 근심이다. 전부 바라는 것이 물고기의 낚시 밥이고 미끼다. 바라는 것이 불나방의 불꽃이다.
바라지 않으면 행복하다. 바라는 것이 지옥이다. 왜 그런가? 물이 아무리 아무리 흘러도 바라는 것이 있는가? 바람이 아무리 아무리 불어와도 바라는 것이 있는가? 바람이 괴롭나? 물이 괴롭나?
저 태양이 항상 비추어 주어도 무엇을 바라는 것이 있는가? 태양이 괴롭나? 오직 사람만 바라는 것이 많다. 그래서 괴로운 법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반야(般若)를 배우는 보살(菩薩)들은 바꾸는 법이다.
공덕은 많이 짓되 바라지는 않는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을 바라는가? 이 몸에 유익한 것을 바란다. 몸을 떠나서 바라는 것은 없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공상(空相)인데 공상(空相)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이 없다는 말이다.
무엇을 바라겠는가? 몸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허수아비가 하나 생기는 것과 같고 몸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허수아비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데 그것을 환(幻)이라고 한다.
환(幻)이라고 하는 것은 허수아비, 꼭두각시를 말한다. 꼭두각시가 생기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꼭두각시가 없어진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겨도 전혀 생긴 것이 아니고 없어져도 전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환생환멸(幻生幻滅)이니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법문이다. 허수아비처럼 생기고 허수아비처럼 없어지니까. 환생환멸(幻生幻滅)은 바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이 몸이 공상(空相)이라는 것을 턱 믿고(信) 이 몸이 공상(空相)이라는 것을 알고(智) 발심(發心)하는 것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보살(菩薩)이니까. 이 몸을 위해서 무엇을 구하는 마음이 없다.
그러면 보살(菩薩)은 무엇을 위해서 발심(發心)을 하는가? 그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褥多羅三邈三菩提) 지혜(智慧)를 더 맑게 밝혀 가는 것이 보살(菩薩)의 가치관(價値觀)이다.
보살(菩薩)은 몸을 닦기 위한 가치관이 아니라 지혜(智慧)를 닦는 가치관을 가진다. 지혜(智慧)보다 더 소중한 게 없는 것이 보살(菩薩)이다. 이 몸은 허수아비와 같아서 없어진다.
몸을 위해서 온갖 것들을 바라고 구하고 취하여 모든 나쁜 죄를 태산 같이 지어 봐야 육신은 아침이슬처럼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그 다음은 어찌할 것인가? 죄만 남아서 내생에 고통만 받게 된다고 하는 말이다.
몸을 위해 태산 같은 죄를 지었는데 육신은 아침이슬처럼 사라지고 그 다음은 죄만 남는다. 그러니까. 몸을 위해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육신은 사라진다. 그러면 결국 이것은 무엇인가?
그 자신이 육신인줄을 알고, 몸은 사라지는 줄을 알고 그 육신은 허수아비처럼 생겼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 줄 알고 허수아비처럼 없어지기 때문에 없어지는 것이 아닌 줄을 아는 그 지혜(智慧) 그것이 참 중요하다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지혜(智慧)를 위해 사는 것은 보살(菩薩)이고 육신(肉身)을 위해서 사는 것은 중생(衆生)이다. 그런데 중생은 매일매일 몸 걱정을 한다. 몸이 건강한 것인지 확인한다. 불교(佛敎)가 아니라 몸교, 육신교(肉身敎)가 되었다.
그리고 불교의 무슨 종파(宗派)가 아니라 육신교(肉身敎) 몸종(肉身宗) 건강파(健康派)가 되었다. 몸(肉身)을 아주 종(宗)으로 삼는 몸종(肉身宗)이라는 말이다. 전부 그렇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침이슬(朝露)과 같다. 사라진다.
그러니까.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하는 것은 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신심(信心)이 없이 그냥 되는 게 아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신심(信心)이 없이 절대 그냥 되는 게 아니고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보시(布施)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지혜(智慧)의 실천이다. 지혜(智慧)를 실천하는 보시(布施)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말이다. 그래서 지행보시(智行布施)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면 중생이 무엇을 받기 위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감정이라는 정(情)자 실행할 행(行) 정행보시(情行布施)라고 한다.
정생지격(情生智鬲)이라고 감정(感情)이 딱 일어나면 지혜(智慧)는 막혀 버린다. 이것을 정생지격(情生智鬲)이라고 한다. 정(情)이 생기면 지(智)는 막힐 격(鬲)자 지혜(智慧)는 막힌다. 화(嗔)가 나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과 똑 같다.
그래서 중생은 정행(情行)을 한다. 보살(菩薩)의 지행(智行)을 해야 고통이 없는데 정행(情行)을 한다. 무엇을 주거나 보시하는 것을 보면 무명(無明)에 가려진 정행(情行)을 한다.
그리고 자기가 정(情)이 가는 사람에게 베풀지 정(情)이 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다. 절대 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결혼을 해서 시아버지도 오래 동안 모시고 시집 식구들을 위해 굉장히 열심히 살았는데 남편이 5년 전에 죽었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시아버지를 계속 모시고 열심히 노력했다.
어느 날 남편의 형 시아주버니가 와서는 갑자기 나가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나가라고 해서 영문도 모르고 나왔는데 아무것도 가진 것 하나 없이 빈손으로 나왔다.
나오고 나서 후일 이야기를 들어보니 보상금이 나왔는데 그 집에서 한 20억원 보상금을 받았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에게 보상금의 배당금을 않주기 위해서 쫒아 냈다.
중생이 하는 짓이 이렇다. 다른 사람한테는 다 나누어주고 그 동생은 이미 5년 전에 죽었고 며느리만 있으니까. 며느리에게 보상금을 않주려고 미리 내 보내고 거기에 있던 사람들끼리만 나누었다.
그러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법으로 보면 보상금을 않받았다고 해서 더 불행한가? 그렇지 않다. 보상금을 받았다고 해서 더 행복한가? 그게 아니다. 받은 사람이나 않받은 사람이나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그래서 조금만 소견(所見)이 돌아가면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만족을 얻는 도구가 되어야 되지 마음에 고통을 주는 수단이 되어서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이 된다.
지금까지 시집와서 계속 시부모를 모시고 그렇게 했으면 의례히 그 집안에 있는 가족이다. 그러면 동생이 죽었더라도 동생 몫으로 배당을 해주는 것이 그게 사람의 마음이다.
그것을 주지 않으려고 미리 내쫒고 자기들끼리만 나누어 가졌다. 몇 푼 더 차지해 가지고 써 바야 다 날아가고 절대로 행복(幸福)하지 않는다. 또 그것 않 받아 봐도 절대로 죽는 법이 없다.
그런데 중생은 순전히 감정(感情)으로 사니까. 동생(同生)이 살아 있었으면 절대 그렇게 못한다. 이것을 정행보시(情行布施) 정(情)으로 행(行)하는 보시(布施)라고 한다.
생사업(生死業)이다. 그렇다면 이 물질을 공정하게 분배하면 기쁨을 얻는 도구가 되는데 물질을 공정하게 처리 하지 못하면 근심과 고통만 생기고 허물이 된다.
그래서 물질을 관리하는 행동을 딱 보면 그 사람의 품격(品格) 그 인간의 품질(品質)이 거기서 드러난다. 물질 관리(管理) 한 번 시켜보면 거기서 품격이 다 나타난다. 희한(稀罕)하다. 돈은 한 번 맡겨 보면 그 성격 알 필요도 없다. 돈을 한 번 턱 맡겨 보고 돈을 한 번 써보라고 하면 다 드러난다.
한 번 해보세요. 돈을 한 묶음 남편에게 주면서 이것 당신 마음대로 써보라고 권(勸)해보세요. 그러면 그 사람의 품격대로 쓰게 된다. 그래서 상황(狀況)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데 어리석어 가지고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못한다.
그래서 자기 몸(身)에 집착을 하니까. 또 재(財), 색(色), 식(食), 명(名),수(睡) 재물과 색과 음식과 잠과 명예를 탐하는 일체의 마음이 오욕락(五慾樂)에 집착을 하니까. 또 권력과 이익(利益)에 집착을 하니까. 또 적게 주면서 많이 받을 생각만 계속 한다.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않된다.
그래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법을 실천(實踐)하는 보살(菩薩)은 무주만행(無住萬行) 보살수행(菩薩修行)이다. 바라는 것이 없는 만 가지 공덕을 닦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무주만행(無住萬行) 보살수행(菩薩修行)수행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닦지도 않는다. 그것이 어리석은 마음이다. 바라는 것 없이 만 가지 공덕을 닦는 것이 무주만행(無住萬行)이다. 그게 보살(菩薩)의 수행(修行)이다.
그러니까. 불구과보(不求果報)결과에 보답을 구하지 말고 상행보시(常行布施)항상 보시를 실행할지니라. 보시는 재물보시, 무애보시, 법보시가 있는데 육바라밀의 실천이다. 육바라밀은 온갖 만 가지 공덕행을 이르는 말이다.
이렇게 닦는 것이 부처님의 사랑법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 많은 설법을 하시는데 중생으로부터 무엇을 바라는 것이 있다면 괴로워서 못한다. 중생이 법문 들은 대로 하겠는가? 않한다.
그래도 바라는 것이 없으니까. 끊임없이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업이 다할 때까지 계속 하시는 것이 부처님의 사랑이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일체의 행동도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딱 된다. 그런데 바라는 마음(所願) 때문에 아주 문제다.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바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우리 손은 오른 손이 왼손 씻어주고 왼손이 오른 손을 씻어주고 하여도 서로 바라지는 않는다. 또 얼굴도 씻고 그래도 바라지 않는다. 그냥 한다.
그래서 손이 하는 것을 보면 완전히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고 있다. 발도 씻어 주고 몸도 씻어 주고 밥도 먹여준다. 손이 온갖 일을 다 한다. 몸을 보살피는 것은 손이지만 손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다.
바라는 것은 전혀 없다. 오른 손이 왼 손을 다치거나 상하게 하더라도 오른 손은 왼 손에게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다. 왼 손은 다쳤어도 불평 하나 하지 않는다. 그게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는 무분별(無分別) 보시(布施)다. 손은 평생 몸을 위해 보살피듯이 그냥 한다. 손이 몸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할 뿐이다. 무엇을 바라는 것은 없다.
오직 하기만 한다. 그게 무분별(無分別) 보시(布施)고 그것이 부처님의 사랑이다. 부처님은 그렇게 사랑을 한다. 그러니까. 괴롭지 않다. 바라지만 않으면 괴롭지 않다.
그 어떤 사람이 난초를 그렇게 좋아 하였다. 난초를 하도 좋아해서 옆에 방에 어머니가 계신데 어머니 방에는 잘 않가고 난초 있는 곳에는 그냥 시시때때로 가니까. 하도(河道) 미안해서 방편을 썼다고 한다.
난초의 난실을 어디다 차려 놓았는가? 하면 어머니 방을 거쳐서 난실로 가도록 그렇게 방편을 했다. 그러니까. 사실은 어머니 보러 가는 것이 아니고 난초를 보기 위한 방법이었다. 가다가 오다가 한 번씩 쳐다보게 되니까 억지로라도 한 번씩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난초를 위해서는 거름도 주고 닦아도 주고 물도 주고 환기도 시켜주고 별별 소소한 것을 다해준다. 어떤 때는 30분도 쳐다보고 1 시간도 난초를 쳐다보고 좋아 한다. 그렇게 한다. 그 뿐이다.
난초한테 바라는 것은 조금도 없다. 난초가 자기를 않쳐다 본다고 해서 속상하거나 섭섭한 일도 없고 자기를 몰라 준다고 해서 괴로운 일도 없고 난초에게는 하나도 바라는 것이 없다.
그게 바로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 무분별(無分別) 보시(布施)다. 분별이 없다. 그냥 사랑을 주기만 할 뿐이다. 그러면 난초 않키우면 어떻게 되는가? 난초를 키우는 기쁨이 하나도 없다.
역시 공덕을 않닦으면 어떻게 되는가? 공덕에 대한 보답이 하나도
없다. 가난하고 게으르고 박복하고 그 뿐이다. 보시를 하고 바라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아예 바라지도 않고 보시까지 않하면 빈궁(貧窮) 빈천(貧賤) 해태(懈怠) 그것 뿐이다.
무엇이 있겠나?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난초 않키우면 되지 않을까? 않키워도 된다. 그러면 난초를 키우는 기쁨은 전혀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는 법을 몰라 가지고 지금까지 생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바라기만 하고 보시를 못해서 그렇다. 또 보시를 하되 자기 감정대로만 해 가지고 정행보시(精行布施)를 한다. 그래서 잘못된다. 마치 물고기가 낚시 밥을 물때 제 몸 팔자를 한 번 고쳐보려고 그냥 마음먹고 물었는데, 제 몸이 끌려 올라 가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삶이 그렇게 된다.
여기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보시(布施)를 하는 것은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를 해야 된다. 그것이 보살(菩薩)의 수행(修行)이니라. 이것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