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스크랩] 금강경3

수선님 2018. 12. 16. 11:32

 

 

금강경 3 대승정종분

 

오늘은 금강경 세 번째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을 할 차례다. 본문을 보시면, 불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佛告 須菩提 諸菩薩 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이라고 되어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을 하시되 모든 보살은 마땅히 다음과 같이 항복할지니라고 하는 말이다.

 

 

수보리는 아라한이다. 보살마하살은 무엇인가? 하면 여기서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보(菩)자는 보리(菩提)라는 뜻이고 살(薩)은 사트바라는 뜻인데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보살(菩薩)이 무엇인가? 라고 하면 깨달은 사람이다. 마하살, 그러면 마하는 크다는 말이고 살(薩)은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큰 사람마하는 대인(大人)이다.

 

 

그러면 보(菩)자는 동아시아에서 길도(道)자로 쓴다. 보살(菩薩)이라고 하는 말은 곧 도인(道人)이라는 소리다. 마하살(摩訶薩)이라고 하는 말은 대인(大人)이라는 말이다.

 

 

도인(道人) 대인(大人) 그것이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응당히 마땅히 그 마음을 항복시킬지니라고 하였다.

 

 

항복(降伏)이라는 말은 없앤다는 말이다. 그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중생심, 번뇌심이라고 한다. 중생심, 번뇌심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가 여러 가지 있지만 탐진치를 말한다.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도인(道人)대인(大人)들은 그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없앨지니라고 시작 된다.

 

 

그러면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도(道)를 이룬 사람도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고 도(道)를 이루려고 시작하는 사람도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다.

 

 

그러니까. 도를 깨달은 사람도 보살(菩薩)이고 도를 깨닫고자 시작하는 사람도 보살(菩薩)이다.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가? 참문제인데, 앞부분에 보면 선남자 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면 이라고 하였다.

 

 

선남자 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 아뇩다라삼보리심을 일으킨 사람들은 응여시주 여시항복기심(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응당히 이와같이 머물고 이와같이 항복시킬지니라고 했다.

 

 

여기서는 선남자 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 않나오고 바로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로 나온다. 수보리가 묻기는 선남자 선여인(善男子善女人)으로 물었는데 부처님의 설법은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로 나온다.

 

 

이런 것이 경(經)이다. 이런 가닥을 잘쳐야 경(經)의 흐름을 안다고 한다. 그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은 무엇인가? 경전의 제목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그래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고 하는 문제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라고 하는 문제 선남자 선여인(善男子善女人)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라고 하는 줄거리가 있는데 이런 것을 놓치지 않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로 피안(彼岸)에 간다 하는 것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그리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라고 하는 가장 높은 깨달음 그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다.

 

 

그런데 이것을 자세히 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고 줄이면 보리심(菩提心)이다. 보리심을 일으킨다는 것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다.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킨다는 말은 구보리지심(求菩提之心)보리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킨다고 한다. 보리는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보리심(菩提心)은 보리 자체의 마음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자체의 마음이다.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도 보리심(菩提心)이고, 깨달음 그 자체의 마음도 보리심이다. 깨달음 그 자체 보리심(菩提心) 안에는 반야심도 있고, 자비심도 있고 억만가지 공덕심이 다 있는 것이 보리심(菩提心)이다.

 

 

그런데 보리(菩提)를 구할 때에는 반야심이 등장을 해야 한다. 그래서 반야는 부처님의 어머니라고 한다. 반야가 문수인데 문수는 불모(佛母) 부처님의 어머니다. 깨달은 분이 부처님인데 깨닫는데 중심되는 마음이 반야이다.

 

 

깨닫고 나면 보리(菩提)가 된다. 그런데 보리(菩提)가 반야심도 되고, 자비심도 되고, 원력심도 되고, 공덕심도 되고 좋은 부처님의 덕을 다 버리라고 한다. 그래서 화엄경 7십 8권에는 거의 한권에 걸쳐서 보리심(菩提心)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그 부처님의 보리(菩提)에 대한 마음이 끝이 없다. 번뇌심(煩惱心)이라는 것은 중생심인데 번뇌심의 근본은 무명(無明)이다. 어리석은 것, 무명(無明)은 사견이다.

 

이 무명(無明) 사견 하나가 탐심도 있고, 진심도 있고, 질투심도 있고, 여러 가지 온갖 죄악심(罪惡心)이 전부 무명(無明) 하나에서 다 나온다.

 

 

그리고 온갖 좋은 마음들은 전부 보리(菩提)에서 다 나온다. 그래서 보리심(菩提心) 번뇌심(煩惱心)으로 구분된다. 번뇌심의 근본은 무명(無明)이고, 보리심(菩提心)의 근본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바로 그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에서 자비, 원력, 공덕 일체가 다 나온다. 그런데 그 무명심(無明心)에 있던 중생들이 보리(菩提)로 들어 가는데 누가 보리(菩提)로 들어 가는가? 그것은 선남자 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 들어 간다.

 

 

선남자 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라고 하면 무엇을 말하는가? 화엄경에서는 선재동자(善財童子)라고 하였다.

 

선재동자(善財童子)라고 하는 말이 아주 중요한 말이다. 첫째, 선업성(善業性)이 있다. 선업(善業)을 지은 사람이 보리(菩提)로 들어가지 이 악업이 뚜꺼우면 못들어 간다.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 고통 받느라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선업(善業)을 지어야 된다. 선업(善業)을 짓지 않은 사람이 깨닫는 것은 칡 흙같이 어두운 밤에 태양을 보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업(善業)이 없으면 않된다. 보리(菩提)를 구할 수 없다.

 

 

그 다음에는 진실성(眞實性)이 있어야 한다. 그게 동자(童子)라고 한다. 동자(童子)라고 하는 것은 진실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선업(善業)을 많이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 재보가 풍부해지는데, 재보(財寶)라고 하는 것은 의보(依報)와 정보(正報)라고해서 몸이 건강하고, 물질이 넉넉한 것을 재보(財寶)라고 한다. 그게 선재(善財)이다.

 

 

이것은 전부 선업(善業)에서 나온다. 그런데 선업(善業)을 짓고 재물이 풍부하다고 해서 선재(善財)만 가지고 되는가?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그래서 동자(童子)가 되어야 된다. 그리고 진실성(眞實性)이 있어야 된다. 그게 선재동자(善財童子)라고 한다.

 

 

그래서 선남자 선여인(善男子善女人)은 선재동자(善財童子)라고 한다. 선업(善業)도 있고, 복(福)도 많고, 재복(財福), 선업(善業)과 재복(財福)이 풍부한 것이 선재동자(善財童子)다. 진실성(眞實性)이 있어야 된다. 그리고 동자(童子)가 되어야 된다.

 

 

예쁘다라고 해도 자기 자신이 예쁘지 않다는 것을 미리 알아가지고 좋아하지도 않고 오히려 화를 내는 그런 정도의 사람은 동자(童子)가 아니다. 그런 정도로는 않된다.

 

예쁘다라고 하면 정말 예쁜줄 알고 아주 진실성(眞實性)이 있는 선재동자(善財童子) 그게 선남자 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다. 선업성(善業性), 진실성(眞實性) 이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두 가지가 있으면 신심(信心)이 더 깊어져 가지고 그 보리(菩提)가 어떤 것이지를 알아 버린다. 그게 신해(信解)라고 한다. 이렇게 선업성(善業性), 진실성(眞實性)이 있으면 선업성(善業性)과 진실성(眞實性)에 의해서 신심(信心)이 깊어진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에 신심(信心)이 깊어져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부처님이 깨달은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 버린다. 어떻게 아는가?

 

경(經)에서 전부 설명하기를 보리(菩提)는 무생무멸(無生無滅)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다고 하였다.

 

무명무상(無名無相)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고 하였다.

 

또 적지원명(寂知圓明)고요하면서 이것을 안다고 한다. 보리(菩提)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고요 적(寂)자이다. 보리(菩提)가 이 부처님의 마음이 무슨 모양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고요하다.

 

 

또 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알 지(知)자를 사용하여 적지(寂知)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끝이 없다.

 

그래서 둥글 원(圓)자를 쓰고, 밝을 명자를 써서 적지원명(寂知圓明)이라고 한다. 또 소소영영(昭昭靈靈)밝고 밝고 신령스럽고 신령스럽다고 한다.

 

 

이게 우리 본래의 보리(菩提)다.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보리(菩提)고 부처님이 깨달으신 보리(菩提)다.

 

그 보리(菩提)가 무엇인가? 말로 설명을 하자면 무생무멸(無生無滅)이요, 그 다음에 무명무상(無名無相)요, 그 다음에 적지원명(寂知圓明)이요, 마지막에는 소소영영(昭昭靈靈)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알면 된다. 그게 우리 중생의 고향 마음이다. 그게 아니면 전부 번뇌심이다. 가짜 마음, 그림자 마음이라고 한다.

 

사는 것, 죽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전부 번뇌다. 무생무멸(無生無滅)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무슨 모양 그리고 이름 짓고 그냥 모양에 메이고 이름에 메이는 것은 전부 번뇌다.

 

 

그것을 무명무상(無名無相)이라고 한다. 마음이 어디에 있나? 찾아보면 없다. 그러나 환하게 안다. 적지(寂知)이고, 마음에 끝이 없다.

 

그래서 원명(圓明)이다. 아주 밝고 신령스러운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다. 복(福)이 있고, 선업(善業)이 있고, 진실(眞實)함이 있기 때문에 선남자 선여인(善男子善女人)은 이것을 딱 안다.

 

 

그런데 왜 중생들은 그렇게 헛고생을 하고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괴로워할까? 그래서 이 중생을 건져야 되겠다고 하는 자비심이 생긴다. 그게 발심(發心)이다.

 

그게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다. 그러나 무생무멸(無生無滅)이고 무명무상(無名無相)한 것을 내가 구하려고 달려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탁 믿고, 이런 것이 바로 본래 보리심(菩提心)인데, 중생 중생이 다 가지고 있는 보리심(菩提心)이다. 왜 그렇게 중생들은 허구 헛날 고통 속에서 괴로워해야 되는가? 

 

 

그러니까. 이러한 중생을 도와야 되겠다. 이런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다.

 

그래서 보리(菩提)는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밝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보리(菩提)를 이루려면 보살행을 자꾸 닦으면 보리(菩提)는 점점 더 완전하게 넓어진다.

 

 

그래서 그것을 비유하기를 보리심(菩提心)은 허공과 같다고 한다. 허공은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것은 구름만 없어지면 허공은 저절로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 보리(菩提)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보리(菩提)는 무생무멸(無生無滅)이고 무명무상(無名無相)이니까. 허공과 같아서 무엇을 구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구름과 같은 번뇌만 사라지면 보리(菩提)는 저절로 드러난다하였다. 번뇌(煩惱)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四相)이다.

 

 

사상(四相)의 번뇌(煩惱)구름을 없애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보살행(菩薩行)을 자꾸 닦으면 된다. 그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보살행(菩薩行)이다.

 

 

그렇게 되려면 첫째 발심(發心)을 해야 된다. 그것은 무엇인가? 중생(衆生) 구제(救濟)하겠다는 발심(發心)이다.

 

중생을 다 구제(救濟)해도 구제(救濟)했다는 생각 털끝만큼도 일으키지 않는 그것이 발심(發心)이다. 그것이 보리심(菩提心)이다.

 

그러면 내 보리(菩提)도 넓어지고 중생(衆生) 구제(救濟)도 저절로 된다.

 

 

중생(衆生) 구제(救濟) 다해도 보리심(菩提心)으로 하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고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그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중생(衆生) 구제(救濟)했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

 

 

그것이 금강경 지금 공부하는 대목이다. 긴장할 정도로 거창하게 시작을 하고 있다. 반야바리밀이 무엇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무엇이다. 선남자 선녀인이 무엇이고 보살마하살이 무엇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선남자 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 중생(衆生) 구제(救濟)와 보살행(菩薩行)을 하겠다는 발심(發心)을 하면 그때부터는 선남자 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 아니다. 무엇인가? 바로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된다.

 

 

그래서 선남자 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 발심(發心)을 하면 즉시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된다.

 

여기서부터는 선남자 선여인(善男子善女人)중에서 발심(發心)한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을 상대하는 법문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선남자 선녀인이라 하지 않고 바로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라고 시작을 한다.

 

 

그게 경전(經典)이다. 앞에서는 선남자 선녀인이라고 말하고 여기는 왜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나오는가? 이렇게 의심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부 않하는 사람은 전혀 의심도 하지 않는다. 그냥 질문하고 대답하고 왜 틀리는가? 관계없이 지나간다. 그러면 아주 편하다.

 

그렇지만 경(經)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그렇지 않다. 다 맥락이 있다.

 

보리(菩提)를 구하는 것이 보살(菩薩)인데, 어째서 중생에 대한 자비(慈悲)를 먼저 일으키는가? 그것이 문제다. 그래서 보리(菩提)는 다른 곳이나 어디서 구해오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 속에 번뇌(煩惱)가 사라지면 드러난다.

 

 

번뇌(煩惱)가 사라지면 드러나기 때문에 번뇌(煩惱)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공덕행(功德行)을 지을 때 사라진다고 한다. 공덕 중에 공덕은 중생을 인도하는 일이다. 그래서 중생(衆生) 구제(救濟)하는 것이 바로 보살이다.

 

 

그러니까. 응여시항복기심(應如是降伏其心)이니라. 항복기심(降伏其心)은 사상(四相)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라고 했다. 그러면 공덕(功德)을 닦는 것은 전부 자기의 번뇌심을 항복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보살(菩薩)은 남(他)의 일은 조금도 없다. 남(他)을 많이 도와주는 것이 자기 번뇌를 없애는 수행이다. 보살(菩薩)이 발심(發心)을 하면 발심(發心)하는 순간부터 타인(他人)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도(道)를 닦기 위한 공덕(功德)이 보살행(菩薩行)을 하는 공덕이라고 한다. 보시를 한다든지, 공양을 한다든지, 회향을 한다든지, 동사섭을 한다든지, 무엇을 한다든지, 바라밀행을 닦는 모든 것이 나의 사상(四相)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항복시키는 노력이라고 한다.

 

 

내가 아닌 남을 도와 준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보살(菩薩)이 되면 남(他)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 중생이 나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첫 번째 마음이 그것이다. 소유일체중생지류(所有一切衆生之類)이른바 세상에는 일체중생들이 있다.

 

 

약란생(若卵生)도 있고, 약태생(若胎生)도 있고, 약습생(若濕生)도 있고, 약화생(若化生)도 있는데 알로 태어난 것은 난생이고, 태로 태어난 것이 태생이고, 습기로 태어나고, 변화해서 태어난다.

 

 

곰팡이라든지 대부분 난태습(卵胎濕)으로 태어난다. 그런데 화생(化生)은 무엇인가? 천상에 가서 태어날 때는 무엇으로 태어날까? 알로 태어날까? 태로 태어날까? 습으로 태어날까? 생각해보았는가?

 

 

천상에 가서 태어난다고 말하는데 천상에는 무엇으로 갈까? 어머니 모태(母胎)에 들어가서 천상에 올라가는 걸까? 지옥에 가서 태어나는 것이나 천상에 가서 태어나는 것이나 그것은 전부 화생(化生)같다.

 

 

화(化)해서 그냥 여기 있다가 갑자기 변화해서 그쪽으로 간다. 그리고 사람이 귀신이 되는 것도 화생(化生)이다. 그것은 태(胎)로 가는 것이 아니고 습(濕)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알에서 깨어나 가는 것이 아니고 전부 갑자기 변해서 그렇게 간다.

 

 

화생(化生)의 범위가 아주 넓다. 그런데 귀신 중에도 사람의 고기를 먹는 나찰귀가 있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태생(胎生)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귀신은 화생(化生)이다.

 

 

그래서 천상, 지옥, 귀신 이런 것은 다 화생(化生)이다. 또 약유색 약무색(若有色 若無色) 색깔이 있는 중생, 색깔이 없는 중생, 약유상 약무상(若有想 若無想)생각이 있는 중생, 생각이 없는 중생,

 

약비유상비무상 若非有想非無想)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생이라고 하였다.

 

 

십류(十類)중생, 십일류(十一類)중생이라고 하는데 중생의 종류가 이렇게 많다. 이런 중생을 내가 다 어떻게 해야 되겠다고 하는데 여기까지를 보리심(菩提心) 가운데 광대심(廣大心)이라고 한다.

 

 

보리(菩提)는 광대(廣大)하다. 이렇게 광대한 마음을 가진 보살(菩薩)이 되니 남(他)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게 전부 나(我)다. 그런데 이러한 중생들을 무슨 조그마한 것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아개영입 무여열반(我皆令入 無餘涅槃)내가 다 제도하여 무여열반에 들어가게 하라고 하였다.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고 하는 것은 생사(生死)에도 머물지 않고 소승해탈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을 열반(涅槃)에도 머물지 않고 생사(生死)에도 머물지 않는 대승보살()이라고 말한다.

 

 

육바라밀(六波羅蜜)이 있는데 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를 닦으면 생사(生死)에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을 닦으면 열반(涅槃)에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

 

 

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만 잘 닦으면 그것은 열반(涅槃)에 머물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열반(涅槃)에 머물지 않기 위해 보살(菩薩)은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을 닦는다고 한다.

 

 

그래서 열반(涅槃)에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 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를 닦으면 생사(生死)에 머물지 않는다한다. 이것을 무여열반(無餘涅槃) 대승열반(大乘涅槃)이라고 한다.

 

 

이런 대승열반(大乘涅槃)에 들어가는 마음을 가져라고 한다. 여기까지를 제일심(第一心)이라고 한다. 가장 높은 마음 광대심(廣大心)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는 여시멸도 무량무수 무변중생 이와 같이 무량하고 무수하여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어서 끝도 없는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어서 제도하였으나 실무중생 득멸도자 진실로 어떤 중생도 열반으로 인도 받아서 들어간 이는 없다고 하였다.

 

 

여기까지를 상심(常心)항상한 마음이라고 한다. 이게 다 보리심(菩提心)이다. 그리고 광대심(廣大心) 제일심(第一心)이라고 한다. 금강경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이 대목이다. 그리고 불교가 어렵다고 느끼는 점이다.

 

 

일체중생을 다 제도를 했는데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이가

없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이런 것이 어렵다.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어렵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에 대해 중국의 규봉선사(圭峰密禪師)가 소(疏)를 지었는데 다섯 가지로 설명을 하였다. 다섯 가지를 다 설명할 수는 없고 첫 번 째가 중생무성(衆生無性)이다. 중생이라는 성(性)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 중생성(衆生性)은 무엇인가? 보리성(菩提性)이라고 한다. 중생이 왜 중생인가? 그것은 번뇌(煩惱)가 있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하였다. 번뇌(煩惱)라고 하는 것은 어두움과 같아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밝음을 등지면 어두움이 생기지만 밝음만 나타나면 어두움은 없어진다고 하였다. 이것을 중생(衆生)은 무성(無性), 본성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첫 번째 무성고라고 하였다.

 

 

생각해보면 밝음을 등져서 어두움이 생겼다가 밝음이 나타나서 어두움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밝음이 나타나기 전에 있었던 어두음은 어디로 갔나? 이런 것을 공부라고 한다. 공부가 없으면 대답을 못한다. 다른 말을 해서는 않된다.

 

 

중요한 말이다. 무성(無性)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하였다. 규봉선사가 중생은 무성고라고 하였다. 본성은 없는 까닭이다. 그러면 본성이 없는 까닭이 무엇인가?

 

 

예를 들면, 해가 넘어간다고 하는 것은 지구가 해를 등진 모양이다. 그래서 어둡다. 또 해가 뜬다는 것은 지구가 해를 맞이하는 형상이다. 그러면 해를 등져서 어두움이 생겼다가 해를 맞이해서 밝음이 생겼으면 해를 등졌을 때의 어두움은 어디로 갔을까?

 

 

그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간곳이 없다고 하는데 그럼 어디로 갔을까? 그래서 그것은 대답이 아니라고 한다. 가장 가까운 대답이 어두움은 본래 생기지를 않았다고 한다. 어두움이 본래 생긴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해를 등졌을 뿐이지 어두움이 생긴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번뇌는 생긴 일이 없다고 한다.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제 알았을까? 번뇌를 소멸시키고 난 다음에 이 사실을 안다고 한다.

 

 

번뇌 속에 있을 때는 모른다고 한다. 이것이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해를 맞이하고 보니까. 어두움은 본래 생기지 않았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한다. 해를 맞이하기 전에는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 어떻게 알겠는가? 모른다고 한다.

 

 

어제 저녁에 꿈을 꾸었다고 한다면 꿈을 꾸지 않은 분들도 계시겠지만 꿈을 꿀 때는 무섭게 꾸거나 재미있게 꿈을 꾸었는데 꿈을 딱 깨고 나니까.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꿈인 줄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 꿈은 어디로 갔을까? 본래 그 꿈은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을 무생(無生)이라고 한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다. 그런데 꿈을 깨고 나니까. 꿈인 줄을 알았을 때는 간 곳이 없을 뿐이다. 왜냐하면 온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게 무생무멸(無生無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중생이라고 하지만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다 인연(因緣)으로 생긴 연생(緣生)이기 때문에 무생(無生)생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중생(衆生)이라고 하는 것을 자꾸 고집(固執)하는 것이 중생상(衆生相)에 걸려서 자성(自性)이 없는 것을 갖다가 자성이 있는 아집(我執)으로 집착(執着)을 하니까. 그것을 구름(雲)만 보고 허공(虛空)은 보지 못하는 허물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중생(衆生)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煩惱)를 일으켜서 중생(衆生)일 뿐인데 그 번뇌(煩惱)라고 하는 것은 어두움과 같아서 본성(本性)이 없다. 그리고 집안에 있는 어두움을 불을 켜서 다 밝혔다.

 

 

그러면 불을 다 켜고 어두움을 밝히고 나서 내가 그 어두움을 다 구제했다는 생각을 하거나 말할 수 있겠는가? 라는 뜻이다. 이해가 되는가? 이것이 이해되면 굉장한 공부다. 이것은 보통 공부가 아니다.

 

 

어두움이 방안에 꽉 찼었다. 그러다가 불 한번 켜서 어두움을 싹 구제했다. 그러면 방안에 가득한 어두움을 내가 통째로 구제했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그러나 어두움은 본래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중생은 본래 없었다고 한다.

 

 

이런 보리심(菩提心)으로 구제하니까. 일체중생을 다 구제했어도 구제받은 사람은 없다고 나온다. 그냥 나오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한다.

 

이 말씀을 더 깊게 하면 지금까지 알던 것도 잊어 버리고 힘들어 진다.

 

그래서 중요하다.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였지만 제도 받은 이가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해야 반야바라밀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으로 가는 길이다. 왜 그런가?

 

 

구제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사상(四相)이 있다고 한다. 사상(四相)이 없으면 구제 했다는 생각이나 구제 받았다고 하는 생각이 전혀 있을 수 없다.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수보리야 만약에 보살이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있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니라고 했다.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무엇인가? 이것에 대한 일반적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 번째가 탐진치애(貪嗔痴愛)로 해석한다. 아상(我相)은 탐심이고, 인상(人相)은 진심이고, 중생상(衆生相)은 치심이고, 수자상(壽者相)은 애착이라고 하였다.

 

 

참 대단한 설명이다. 탐심(貪心)좋은 것은 다 내가 하려고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나(我) 때문에 그렇다. 진심(嗔心)화 많이 내는 것은 타인에게 허물이 있다 화내는 것이지 나(我)에게 화내는 것은 아니다.

 

 

그 다음에 중생상(衆生相)은 치심(癡心)어리석은 것인데 중생이 하는 짓은 좋은 것은 내가 하려고 하고 나쁜 것은 남에게 줄려고 한다. 그래서 중생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한다. 그게 중생이다.

 

 

아들 집에 가서 아들이 부엌에서 밥하고 청소하는 것을 보면 그 어머니가 기분이 되게 나빴는데 딸네 집에 가서 보니까. 사위가 밥하고 청소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그렇게 좋아한다. 그게 중생이다.

 

 

그것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고 중생심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꾸 애착(愛着)한다. 탐욕과 애착이 다른 점은 탐욕은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고 애착은 이미 내 것이 된 것을 계속 더 오래오래 간직하려고 한다. 그것을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한다.

 

 

또 틱냑한 스님은 아상(我相)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는 내가 있고 내가 아닌 것이 있다고 하였다.

 

 

인상(人相)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으로 구분하고 중생상(衆生相)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과 중생이 아닌 것으로 구분하며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하는 것은 수명과 수명이 아닌 것으로 구분한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수명이 아닌 것은 저 하늘의 허공과 같은 것, 돌맹이, 강물이라고 한다. 오로지 내 몸만을 수명으로 따진다. 그런 것을 수자상이라고 하였다.

 

 

육조구결(六祖口訣)에서는 아상(我相)이라고 하는 것을 재물과 학문과 자기신분을 믿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오늘 날 사람들이 보는 우리의 해석하고 비슷하다. 재산 많으면 다른 사람들을 경솔하게 보고 오만하게 여긴다.

 

 

또 전문지식이 많다고 하면 그 전문성을 믿고 다른 사람을 가볍게 여긴다. 그것을 경만심(輕慢心)이라고 한다. 그리고 경만심(輕慢心)이 아니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아닌 것은 공경심(恭敬心)이라고 한다.

 

 

그래서 보살(菩薩)이 되면 일체중생(一切衆生)을 공경(恭敬)하게 된다고 한다. 번뇌가 꽉 차게 되면 중생은 경만해진다. 왜 중생을 경만히 보고 가볍게 여기는가? 재산이 있고 그것을 믿고 전문지식을 믿고 자기 신분을 믿고 우리 조상이 무엇이라고 한다.

 

 

또는 우리 가문은 무엇이라는 것을 믿는데 그것을 아상(我相)이라고 한다.

 

 

인상(人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무슨 일을 잘하면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교양이 있다거나 예절을 잘 지킨다거나 요즘 운전 못하면 카맹이고 컴퓨터 못하면 컴맹이고 휴대폰 쓰지 못하면 폰맹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을 못하면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맹자가 많다. 또 세계 여행을 해보면 그 나라마다 문화와 관습이 있는데 그런 것을 모르면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다. 또 시민으로서 일정한 규범이 있는데 그런 것을 모르면 또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을 인상(人相)이라고 한다.

 

 

옛날로 말하면 인의도덕(仁義道德)을 잘 지키되 인의도덕(仁義道德)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그것이 인상(人相)이라고 한다. 그게 육조스님의 말씀이다.

 

 

중생상(衆生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호사기기(好事己冀)

오사시인(汚事猜人)좋은 일은 자기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모두 남(他)에게 돌리는 것을 중생상(衆生相)이라고 하였다.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설명을 하셨는가? 하면 아주 재미있다. 대경취사(對境取捨)경계를 맞이해서 그것을 취하고 버리는 취사심(取捨心)을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하였다.

 

 

독특한 해석이고 중요한 말씀이다. 어떤 것에 대해 좋다. 나쁘다. 좋은 것은 내가 하고 나쁜 것은 하지 않는다. 취하고 버리는 것인데 그것을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한다.

 

 

그러면 왜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릴까? 오래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단히 중요한 해석이다. 대경취사(對境取捨)분별이 수자상(壽者相)이라고 것은 하였다. 분별(分別)이라고 하는 것은 나눈다는 말이다.

 

 

그릇 두 개가 있을 때 하나만 가져가라고 하면 좋은 것만 선택하려고 한다. 그러면 왜 좋은 것만 선별하는가? 그것은 오래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러니까. 물건을 고른다든지 음식을 선택한다든지 좋은 것에 대한 집착이나 자기 것으로 하려는 동기(動機)는 전부 오래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취사(取捨)자체는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릴려고 한다. 그것은 모두 오래 살려고 하는 수명의식(壽命衣食)이라고 육조구결(六祖口訣)에서 말씀하셨다. 굉장히 탁월한 견해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뼈 속에 배여 있다. 그게 중생이다. 이것 때문에 보리(菩提)가 않나타나는 것이지 이것만 자꾸 소멸 시키면 보리(菩提)는 저절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보리(菩提)가 먼 곳에 있어서 그런 것이 절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보살행(菩薩行)만 닦으면 보리(菩提)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대승불교(大乘佛敎)라고 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를 이루려고 마음을 내었는데 그런 사람에게 첫 번째로 하시는 말씀이다. 그것이 발심(發心)이다. 네 가지에 머문다고 하는데 그것을 사심(四心)에 머문다고 한다.

 

 

심이무정 천하평화(心而無爭 天下平和)

마음에 다툼이 없으면 천하가 평화롭고.

심이무욕 세상자유(心而無慾 世上自由)

마음에 욕심이 없으면 세상이 자유롭다.

 

 

심이무번 즉득보리(心而無煩 卽得菩提)

마음에 번뇌가 없으면 곧바로 깨달음 얻고.

심이무파 즉현삼매(心而無波 卽顯三昧)

마음에 물결이 없다면 곧바로 삼매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사심이란 대심(大心), 광대심(廣大心), 상심(常心), 부전도심(不顚倒心)이다. 대심은 일체 중생들을 다 제도하겠다는 마음이고, 광대심은 일체 중생을 무여열반(無餘涅槃)으로 이끌어주겠다는 것이며, 상심은 그러한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전도심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을 사상(四相: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걸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수행을 하게 되면 의식이 바뀌기 때문에 인식 자체가 변한다. 수행을 하면 높고 낮다, 고통과 즐거움, 피안과 차안 등 이렇게 끊임없이 둘로 나누는 이분법(二分法)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손바닥의 앞뒤처럼 부처 쪽에서 보면 반야, 지혜, 열반이고 중생 쪽에서 보면 고통, 망상, 번뇌라고 한다. 중생과 부처, 어느 쪽에서 바라보는 가에 따라 달라진다. 수행을 해서 초월을 해버리면 괴로움과 번뇌가 반야로 바뀌게 된다.

 

 

육조 스님은‘자성을 본 사람은 부처’라고 했으며, 한쪽을 보는 사람은 중생이고, 양변을 다 보는 사람은 부처라고 하였다. 사람은 어디다 뜻을 두느냐에 따라서 행복의 측도도 달라지고 삶의 질도 달라진다고 한다.

 

 

자기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그런 사람은 평생을 가도 마음의 평정을 한 번이라도 느끼지 못한다. 사홍서원에는 중생을 다 제도 하겠다. 번뇌를 다 끊겠다. 불도를 다 이루겠다고 하였다. 그 뜻이 얼마나 큰가?

 

 

자기 안위를 위해서 수행하거나 화두 참선한다면 공부가 않된다. 불법(佛法)은 장마 때 소나기 오는 것과 같은데 작은 뜻을 가지고 공부한다면 소나기 올 때 자그마한 간장종지를 가지고 비를 받는 것과 같다고 한다.

 

 

뜻이 적은 사람은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흔들리고 늘 괴로워하고 방황하지만, 뜻이 큰 사람은 바람 불어도 태풍 불어도 끄떡없다. 자기의 뜻이 큰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를 닦아간다.

 

 

또 다음 장에서는 육행(六波羅蜜)을 닦는다고 한다. 그러면 사심(四心)과 육행(六行)을 닦아서 무엇을 하는가? 라고 한다. 사심(四心)에 머무는 것이나 육행(六行)을 닦는 것은 무두가 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항복시키는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항복(降伏)이 총(總)이고, 발심수행(發心修行)이 별(別)이라고 한다. 이게 규봉스님의 해석이다. 멋진 해석이다. 모든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사상(四相)을 항복시키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그러면 항복(降伏)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상(四相)을 여의는 것이라고 한다. 금강경은 중생심(衆生心)을 항복(降伏)시키는 것인데, 중생심(衆生心)을 항복(降伏)시키는 것은 사상(四相)즉 상(相)을 여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상(離相)즉 금강경(金剛經)은 이상경(離相經)상(相)을 여의게 하는 경전이라고 한다. 역대로 도인들이 말씀하시기를 유사상(有四相)하면 즉시중생(卽是衆生)이고, 무사상(無四相)하면 즉시불(卽是佛)이라고 하였다.

 

 

유사상(有四相)이면 즉시중생(卽是衆生)이라. 사상(四相)이 있으면 중생이라고 하였다.

 

 

중생(衆生)이 무엇인가? 사상(四相)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중생(衆生)이라고 한다.

 

 

무사상(無四相)이면 즉시불(卽是佛)이라. 사상(四相)이 없으면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였다. 육조(六祖) 혜능(慧能)스님의 법문이다.

 

 

중생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유사상(有四相)하면 즉시중생(卽是衆生)이고, 사상(四相)이 있으면 곧 중생이라고 한다. 무사상(無四相)이면 즉시불(卽是佛)사상(四相)이 없으면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사상(四相)이라고 하는 것은 구름(雲)과 같고, 보리(菩提)라고 하는 것은 허공(虛空)과 같다. 그런데 허공(虛空)이 멀리 있어서 않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구름(雲) 때문에 않 나타난다고 한다.

 

 

보리(菩提)가 멀리 있어서 않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사상(四相)때문에 않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상(四相)을 없애는 방법은 마음 속에서 계속 일어나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는데 이것을 항복(降伏)시키는 것이 보살행(菩薩行)이라고 한다.

 

 

항복(降伏)시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상(離相)즉 상을 여의는 것이다. 나(我)라는 상(相)이라든지, 내가 아니라는 상이라든지, 있는 상, 없는 상, 죽는 상, 태어나는 상이 전부 자성(自性)이 없는 구름과 같은 것인데 상(相)에 매여서 그것으로 인해 한없는 고통을 격는다.

 

 

그래서 상(相) 분상(分相)을 여의게 되면 중생심(衆生心)을 항복(降伏)시키는 것이고, 중생심(衆生心)을 항복(降伏)시키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한다.

 

 

이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금강경이다.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종경송(宗鏡頌)이 있는데 그런 말씀이 있다.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중에 종경송(宗鏡頌)이 있다. 종경(宗鏡)선사가 게송(偈頌)으로 하신 법문이라고 한다.

 

 

거기에 그런 말씀이 있다. 보리심(菩提心)에서 볼 때 생사열반이 본래 평등하다. 이것은 보리심(菩提心)에서 볼 때 생사열반은 다르지 않고 본래 평등하다. 그런데 우리는 보리심을 모르고 있고 보리심을 못깨달았으니까.

 

 

상(相)에 매여서 죽고 사는 생사에 매여 무서워한다. 그러나 그게 본래 평등하다. 생사열반(生死涅槃)이 본평등(本平等)하니 망심진처 즉보리(妄心盡處 卽菩提)로다. 허망한 마음이 다 없어지면 바로 보리(菩提)라고 하였다.

 

 

처(處)자는 별의미가 없다.‘망심이 다한 곳’이라고 굳이 새길 것은 없다. 망심이 다 없어지면 곧 보리(菩提)라고 한다. 구름이 다 사라지면 바로 하늘이라고 한다. 구름이 다 없어지는 곳이 바로 하늘이라고 해도 된다. 그러나 굳이 처(處)자를 해석할 필요는 없다.

 

 

허망한 마음이 다 없어지면 바로 보리(菩提)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도(道)가 멀거나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 멀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너무 우리 몸에 깊이 들어와 있고 그게 아주 뼈 속에 배여서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참회를 하고 공덕을 닦으면 다 없어진다고 한다.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다 없어진 다음에 탁보면 본래 그것은 생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마음은 본래 깨닫고 보면 생기지 않은 자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맑힌 뒤에는 절대로 절대로 마음 찌꺼기가 없다고 한다. 물을 맑히면 찌꺼기가 있어도 마음을 맑힌 후에는 찌꺼기가 없다고 한다.

 

 

왜 그런가? 나쁜 마음은 본래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본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어두움을 밝은 것으로 밝힌 다음에는 어두운 찌꺼기 그림자가 없다. 어두웠을 때 방안에 불을 밝게 키면 어두웠던 흔적에 대한 먼지 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있겠나? 그런 것은 없다.

 

 

마음도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

때문에 어두웠는데 이것을 탁 밝히면 찌꺼기나 그림자가 하나도 없는 그대로 밝은 보리심(菩提心)이 된다.

 

 

중앙승가대학교 명예교수 종범스님

 

출처 : 수보리
글쓴이 : 원종스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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