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금강경 여래실견분(如理實見分) (第 五)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제오(第五)는 부처님을 신상(身相) 몸의 모습으로 볼 수가 있겠습니까? 에 대답이다. 이 말씀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 보시를 많이 하되 구하는 것이 없이 보시하는 것이 수행이다.
보시를 계속하되 구하지 마라. 구하면 생사의 업이 된다. 아무리 좋은 것을 구해도 구하는 것은 생사가 된다. 구하면 없어지고 구하면 없어지고 없어진다. 바라밀행을 하는 보살은 보시를 계속해서 하기만 하지 세속적인 것을 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무엇을 구하는가? 상구보리 하화중생만 구한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는 것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만 구하지 다른 것은 구하지 않는다. 그것이 보살의 무주상보시라고 한다.
그러니까. 수보리가 의심을 하기를 부처님은 삼십이상을 갖추었는데 그것은 어디에서 생겼는가? 삼십이상이 이루어지도록 구했으니까. 생겼지. 구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생겼겠는가? 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구하는 것이 없이 보시하라고 하셨는데 부처님이 삼십이상을 갖춘 것을 보면 틀림없이 수행을 통해서 삼십이상을 구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원인이 없는 결과가 어디 있겠는가? 구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겠는가? 라고 의심을 한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것을 아시고 묻는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提 於意云何) 수보리야,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가이신상 견여래부(可以身相 見如來不) 신상, 삼십이상 팔십종호 원만구족상, 부처님의 상호를 원만구족상이라고 한다. 그것을 팔십종호 팔십 가지 종류의 좋은 것이라고 하고 또 삼십이대인상 서른 두 가지 대인상이라고 한다. 이것을 부처님의 상호라고 한다.
그러면 이런 상호를 가지고 여래라고 보겠는가?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무엇을 부처님이라고 하는가? 삼십이상을 부처님이라고 하는가? 팔십종호를 부처님이라고 하는가? 원만구족상을 부처님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부처님이라고 하는가?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불야 세존(不也 世尊)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불가이신상 득견여래(不可以身相 得見如來) 몸매(身相:육신의 특징)로써 여래를 봄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불가(不可) 라고 하는 것은 [없다. 못한다]는 말이다. 삼십이상을 가지고 여래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삼십이상이 아닌 것은 또 어디에 있는가? 삼십이상이 아닌 것을 가지고 여래라고 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삼십이상을 가지고 여래라고 할 수도 없고 삼십이상이 아닌 것을 가지고 여래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이고(何以故) 왜냐하면 여래소설신상(如來所說身相)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매(삼십이상)라고 하는 것은 즉비신상(卽非身相) 사실 삼십이상(몸매)이 아닙니다. 수보리가 말을 한 내용이다.
즉비 신상(卽非 身相)은 무엇인가? 즉비 신상(卽非 身相)이라고 하는 것은 [몸의 모습은 사실 몸의 모습(몸매)이 아닙니다]라는 뜻이다. 여기 즉비(卽非)에 아주 중요한 문제가 들어 있다.
수보리는 신상(身相)이 즉비 신상(卽非 身相), 신상(身相)은 사실 신상(身相)이 아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불고 수보리(佛告 須菩提) 수보리는 부처님께 질문하기를 신상(身相)에 대해 질문을 했는데 부처님이 대답하는 경문에서는 신상(身相)이라고 말씀을 않하시고 범소유상(凡所有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가지고 해석을 여러 가지로 한다.
수보리가 질문한 내용은 신상(身相)에 대하여 물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대답을 하는 것은 신상(身相)에 대한 답변을 하시지 않았다. 여래 신상(如來 身相)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여래 신상(如來 身相)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범소유상(凡所有相)이라고 말씀하셨다.
결과적으로 수보리가 질문한 내용은 여래 신상(如來 身相)에 대하여 물었다. 그런데 부처님의 대답은 범소유상(凡所有相)이라고 하였다. 범소유상(凡所有相)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있는바 온갖 겉모양(相)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신상(身相)도 범소유상(凡所有相)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형상이 범소유상(凡所有相)이라고 한다. 그래서 왜 그랬을까? 구마라집이 번역을 할 때 일부러 그렇게 했을까? 아니면 경전의 본래 경문이 그랬을까? 이것을 가지고 말이 많다.
사실은 똑같다. 신상(身相)이나 범소유상(凡所有相)이나 상(相)은 상(相)이다. 상(相)으로 볼 때 신상(身相)도 상(相)이고 범소유상(凡所有相)이라고 하는 것은 제상(諸相) 모든 형상(形相)인데 신상(身相)도 모든 형상(形相) 가운데 하나이고 모든 형상(形相)도 그대로 상(相)으로 나타난 일체형상(一切形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중요한 것이 상(相)이다. 신상(身相)이 되었든 또는 다른 물상(物相)이 되었든 아니면 식상(識相) 의식으로 상상하는 상(相)이 되었든 이미지 의식으로 생각하는 식상(識相)이 되었든 물상(物相)도 상(相)이고 신상(身相)도 상(相)이고 식상(識相)도 상(相)이다. 문제는 상(相)이다.
그래서 모든 문제는 상(相)이다. 모든 문제가 상(相)이다. 상(相) 놀음이다. 모든 고통이 상(相)에서 오고 일체 어리석음이 상(相)으로 자꾸 더해 간다. 또 상(相) 때문에 지옥에 가고 상(相) 때문에 즐거워 한다.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상(相)이고 괴로움을 느끼는 것도 상(相)이다. 사는 것도 상(相)이고 죽는 것도 상(相)이다. 그래서 상(相)이라고 하는 것은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한다. 변화하는 것이 있다.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하는 것은 생상, 주상, 멸상이 있다. 생상(生相) 생기는 모양이 있다. 또 주상(住相) 머무는 모양이 있다. 또 멸상(滅相) 사라지는 모양이 있다. 이것이 유위법(有爲法)이다.
그래서 생상(生相)은 초상(初相) 처음 일어나는 것이 생상(生相)이고 주상(住相) 머무는 것은 중상(中相)이고 또 멸상(滅相) 없어지는 것은 후상(後相)이라고 한다.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하는 것은 생주멸(生住滅)이 있는 동시에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초중후(初中後)가 반드시 있다.
그런데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고 머물 주(住)자에다가 다를 이(異)를 써서 넷으로도 이야기를 하는데 주(住)나 이(異)는 다 현재이기 때문에 같이 보게 된다. 머무는 것도 현재이고 달라지는 것도 현재이다.
그래서 생주이멸(生住異滅) 넷을 생주멸(生住滅) 셋으로 합쳐서 본다. 생주멸(生住滅)이라고 하는 것이 다 유위법(有爲法)이고 생멸법(生滅法)이다. 생주멸(生住滅)은 시간으로 보면 초중후(初中後)인데 일체 만물이 다 초중후(初中後) 처음과 중간 없어지는 마지막이 있다.
우리는 현재 주상(住相)에 머물러 있다. 조금 있으면 멸상(滅相)이 온다. 그러면 태어나는 초상(初相)은 벌써 과거에 있었다. 그래서 초상(初相) 및 생상(生相)은 과거(過去)이고 후상(後相) 및 멸상(滅相)은 미래(未來)다. 주상(住相)은 현재(現在)이다. 이것이 유위법(有爲法)이다. 이런 것이 전부 범소유상(凡所有相)이다.
무릇 있는바 모든 상(相)은 이것을 말한다.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고 한다. 허망(虛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상(自相)이 없다. 자체 상(相)이 없다는 것이다. 생상(生相)도 자상(自相)이 없고 주상(住相)도 자상(自相)이 없고 멸상(滅相)도 자상(自相) 자체 상(相)이 없다고 한다.
왜 자체 상(相)이 없는가? 연생법(緣生法) 인연으로 태어 낳기 때문에 자상(自相)이 없다. 예를 들면 몸이 있는데 몸에는 생상(生相), 주상(住相), 멸상(滅相)의 자체 상(相)이 있는데 이것이 연생법(緣生法) 인연으로 난 법이다.
반(半)은 아버지에게서 왔고 반(半)은 어머니에게서 왔다. 어머니 몸 빼내고 아버지 몸 빼내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몸 자랑하고 얼굴 자랑하는 것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한다. 자기 몸이 아니고 부모가 물려준 몸을 가지고 큰 소리 친다고 한다.
내 얼굴은 내가 만든 얼굴이 아니라 반(半)은 아버지가 물려 주셨고 반(半)은 어머니가 물려 준 것이다. 아버지 몸 다 빼가고 어머니 몸 빼가고 나면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연생(緣生) 이다. 그래서 자상(自相) 자체 상(相)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몸이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온 것을 보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지,수,화,풍 뼈 부분, 혈액 부분, 체온 부분, 호홉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골절과 혈액과 체온과 호홉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식상(識相)이 있다. 식상(識相)도 전부 배우고 익힌 것이다. 다 학습을 통해서 의식이 형성된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전부 어릴 때부터 입으로 물어서 익히고 눈으로 보고 익히고 만져 보고 익히고 뜯어보고 살펴본다.
범소유상(凡所有相)은 전부 식상(識相) 의식의 형틀을 만들어 가는 행위다. 그러니까. 의식이나 신체나 자상(自相)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자상(自相)이 없기 때문에 허망하다. 또 자성(自性) 자체의 성질도 없다.
범소유상(凡所有相)은 자상(自相)도 없고 자성(自性)도 없기 때문에 인연 화합물(因緣 化合物) 인연이 화합해서 형성된 사물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것이 난다고 해서 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진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허망하다. 자상(自相)이 없고 자성(自性)도 없다.
인연법(因緣法)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깨우쳤다고 한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인연법(因緣法)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면 중생이나 만물이나 전부 상(相)인데 제법(諸法) 모든 일체 만법이 자성 무소유(自性 無所有) 자성이 있는 바가 없다. 자체 본성이 있는 바가 없다. 이것을 깨달은 것이다.
인연(因緣)이라고 하는 것은 자성 무소유(自性 無所有) 자성이 없다 라는 것을 말한다. 연생법(緣生法)은 무자성(無自性) 인연으로 생긴 법은 자성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돌에는 돌의 자성이 없고 물에는 물의 자성이 없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자성이 없다.
있는 것에는 있는 것의 자성이 없고 없는 것에는 없는 것의 자성이 없다. 법무자성(法無自性) 법에는 자성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 무엇으로 자성을 삼는가? 이타위성(異他僞性) 다른 것으로서 자성을 삼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법성원융(法性圓融) 법성은 원융하다. 자체 성(性)이 없기 때문에 다 원융하다. 제법부동(諸法不動) 제법이 아무리 움직여도 움직이는 자성이 없다. 부처님이 이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억만년을 죽었다 태어나도 부동(不動)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그런데 이것을 왜 모르는가? 그것은 상(相)에 미혹(迷惑)해서 모른다. 상(相)에 딱 걸려서 그렇다. 꿈을 꾸는 사람은 꿈 속에 보이는 형상(形相) 그것이 자성(自性)이 없는 줄을 몰라서 꿈 속을 계속 헤매인다.
그런데 그것을 언제 알게 되는가? 꿈에서 딱 깨어나는 순간 꿈을 꾼 그것은 허상이었구나 그것을 이제 알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자성(自性)이 없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형상(形相)에 헤매고 다닌다.
형상(形相)에 헤매고 다니는 그것을 생사윤회(生死輪回)라고 한다.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상(相)이 없으면 생사(生死)가 없다. 그러면 상(相)이 모두 없어야 생사(生死)가 없는가? 없어도 역시 없는 상(相)이 된다.
그러니까. 상(相)이라고 하는 것은 나타내도 상(相)이고 없애도 상(相)이 된다. 유상(有相)이 아니면 무상(無相)이라고 한다. 그러면 유(有)에도 자성(自性)이 없고 무(無)에도 자성(自性)이 없어서 유(有)나 무(無)나 전부 연생법(緣生法)이고 연생법(緣生法)이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한다. 또 생사법(生死法) 살고 죽는 법이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한다.
그 생사(生死)가 바로 그대로 부동(不動)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인연법(因緣法) 하나를 확실히 깨달으면 상(相)이 상(相)이 아닌 줄을 알게 된다고 한다. 상(相)이 상(相)이 아닌 줄을 알면 상(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니까. 그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한다.
인생이 어디에 묶이는가? 상(相)에 묶인다고 한다. 상(相)은 생각하는 것도 상(相)이고 집착하는 것도 상(相)이고 관찰하는 것도 상(相)이고 전부 상(相)인데 그 상(相)에 걸리는 그것이 생사(生死)라고 한다.
그래서 범소유상(凡所有相)은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고 한다. 유상(有相)도 상(相)이고 무상(無相)도 상(相)이고 유(有) 무(無)가 다 상(相)이고 식상(識相)도 상(相)이고 물상(物相)도 상(相)이고 물질과 생각이 다 상(相)이라고 한다.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만약 제상(諸相 모든 모양)이 상(相 모양)이 아님을 보면, 제상(諸相 모든 모양)이 상(相 모양)이 아님을 어떻게 보는가? 그것은 제법 무자성(諸相 無自性)을 보아야 한다. 제법의 자성이 없음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견여래(卽見如來)
이 인연법(因緣法)이라고 하는 것은 제법 무자성(諸相 無自性) 제법의 자성이 없음을 말한다. 연생법(緣生法)은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한다. 이것을 확실이 보면 죽는 것도 연생법(緣生法)이고 사는 것도 연생법(緣生法)이고 가는 것도 연생법(緣生法)이고 오는 것도 연생법(緣生法)이고 일체 만법이 모두 연생법(緣生法)이다.
그런데 전부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한다. 그래서 법성(法性)이 원융(圓融)이요. 제법(諸法)이 부동(不動)이라고 한다.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에 일체 만법(萬法)이 모두 부동(不動)이라고 한다.
또 전부 연생법(緣生法)이기 때문에 원융(圓融)하다고 한다. 티끌 하나도 인연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이고 온 세계도 인연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이니까. 이것을 원융(圓融)하다고 한다.
원융(圓融)이라고 하는 것은 일즉다(一卽多) 하나가 곧 많은 것이고, 다즉일(多卽一) 많은 것이 곧 하나가 됨을 원융(圓融)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에는 하나라는 자성(自性)이 없고 많은 것에는 많은 것이라고 하는 자성(自性)이 없으니까. 막 통하게 된다. 이것을 원융(圓融)이라고 한다.
하나도 걸릴 것이 없다. 또 일념(一念)이 무량원겁(無量遠劫)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일념(一念)이라고 하였다. 일념(一念)은 일찰나(一刹那)다. 일찰나(一刹那)가 무량원겁(無量遠劫)이라고 한다.
일찰나(一刹那)는 일찰나(一刹那)라고 하는 자성(自性)이 없고 무량원겁(無量遠劫)은 무량원겁(無量遠劫)이라는 자성(自性)이 없으니까. 일념(一念)이 즉시 무량원겁(無量遠劫)이고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시 일념(一念)이라. 일념(一念)이 원겁(遠劫)이고 원겁(遠劫)이 일념(一念)이라고 한다.
이것을 법성원융(法性圓融)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인연법(因緣法)을 잘 알면 전부 원융(圓融)이고 부동(不動)이기 때문에 무슨 근심 걱정을 아무리 돈을 주고 하라고 하더라도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근심 걱정하는 것은 전부 어리석어서 하는 일이다. 무엇 때문에 어리석은가? 상(相)이 상(相)이 아닌 줄을 몰라서 그렇다. 이것 하나를 몰라서 그냥 세세생생을 고생만 하게 된다. 그런데 억만년을 고생하고 나면 깨치는 순간에 그게 또 일찰나(一刹那)에 가능하다.
그게 일념(一念)이 원겁(遠劫)이라고 한다. 일찰나(一刹那)가 무량원겁(無量遠劫)이라는 뜻이다. 고생할 때는 그 억만년 억만겁을 돌아 돌아서 무진 억겁을 그냥 고통을 받았는데 딱 깨고나면 일찰나(一刹那) 밖에 않된다고 한다.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시 일념(一念)이더라고 한다.
그래서 참회진언에도 나온다. 백겁적집죄(百訪積集罪) 백겁동안 지은 죄가 일념돈탕제(一念顧蒸除) 일찰나(一刹那)에 다 없어진다고 한다. 그것이 왜 그런가? 일념(一念)이 무량원겁(無量遠劫)이기 때문에 그렇다.
무량억겁 동안 죄를 지었는데 깨닫는 순간에 다 없어졌다. 그래서 백겁적집죄(百訪積集罪)라도 일념돈탕제(一念顧蒸除)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못 깨달아서 그 상(相)에 집착하게 해서 돌아 다니면 일찰나(一刹那)가 무량원겁(無量遠劫)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무량원겁(無量遠劫)과 일찰나(一刹那)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찰나(一刹那)에도 자성(自性)이 없고 무량원겁(無量遠劫)에도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을 법성원융(法性圓融)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이 그렇다. 이게 자성 무소유(自性 無所有)라고 한다. 그래서 제법 무자성(諸法 無自性)모든 법에는 자성(自性)이 없다. 이것을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한다.
『화엄경』권13「광명각품」제9에 “일찰나(一刹那)에 무량겁(無量劫)을 두루 보니,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고 머무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삼세의 일을 알면, 모든 방편에서 뛰어나 여래의 십력을 이룬다.(一念普觀無量劫 無去無來亦無住 如是了知三世事 超諸方便成十力)” 는 경문이 있다.
불교에서는 아주 재미있는 관점이 하나 있다. 늙음과 죽음을 같이 본다고 한다. 노사(老死). 노(老)는 곧 사(死)다. 노와 사를 분리해서 보지 않는다. 늙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12연기(十二緣起)에서도 노사를 같이 본다. 왜 그럴까? 눈이 밝다가 가물거리면 죽는다.
달이 밝다가 힘이 없으면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몸이 무상한 줄 모른다. 재물이 무상한 줄 모르고. 사람이 무상한 줄 모른다. 그래서 삼세(三世)가 일념(一念)이고 일념이 삼세임을, 무량겁(無量劫)이 일찰나(一刹那)이고 일찰나가 무량겁임을 모르기 때문에 무상한 현상에 자꾸 매달린다.
컵을 가지고 있다면 컵은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깨진다. 아무리 소중히 간직해도 깨진다. 이렇게 가지고, 또 깨지고 하는 행동을 무진억겁으로 반복한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만나면 헤어진다.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고, 내가 한 번 이기면 한번은 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기는 것만 알지. 다음을 모른다. 이렇게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한다.
삼세가 모두 일념(一念)이고 억겁의 세월이 일찰나(一刹那)다. 그런데 이 도리를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지혜로 알 뿐이다. 그래서 나를 구하는 것이 지혜다. 지혜가 없으면 다른 어떤 것도 구제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약견제상(若見諸相)이 비상(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하였다.
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닌 것. 즉 모양으로 있는 모든 것, 또는 모든 현상이 다 허망한 것임을 알면 곧 여래를 보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가 일념(一念)인 한 마음 속에 있는 그 도리. 무량겁(無量劫)이 일찰나(一刹那)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여래를 안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한가하게 살아야지 이렇게 마음먹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무량겁(無量劫)과 일찰나(一刹那)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꿈속에서 출세도 하고 좋은 곳에도 가보고,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가졌다. 그런데 이것이 진실인가? 좋았다고 하지만 꿈은 꿈이다. 지혜는 꿈에서 딱 깨는 순간이다. 꿈속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해도 깨면 그만이다.
우리 인생도 한 평생 복이 대단해서 도와주는 사람도 많고 몸도 건강하고 재물도 많고,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 죽는 순간에 뒤돌아보면 이 모든 것이 꿈이다. 죽기 전에는 꿈인 줄 모른다. 죽는 순간에 돌아보면 10년을 살아도 꿈이고 50년을 살아도
꿈이고 100년을 살아도 꿈이다.
지혜는 바로 꿈꾸는 내가 누구인지 훤히 아는 사실이다. 그것이 곧 지혜이다. 복과 지혜를 비유하기를, 복은 저 하늘을 향해서 쏘아 올리는 화살과 같다고 말한다. 앙전사허공(仰箭射虛空)이라고. 화살을 높이 들어서 허공에 쏜다는 말인데, 화살을 하늘로 쏘아 올리면 올라가다 결국은 땅에 떨어진다.
쏘아 올려 진 화살이 한계에 이르면 다시 내려온다. 복도 그와 같다. 허공에 쏘아 올린 화살처럼 아무리 쌓아도 결국은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지혜는 무엇일까? 허공 그 자체가 지혜이다. 화살이 아무리 높이 올라간다고 해도 하늘인 허공하고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면 지혜를 어떻게 체득할 수 있는가? 내가 나를 바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미혹해서 화살만 알고 지혜를 모른다. 복은 화살과 같고 지혜는 허공과 같다. 그런데 화살만 집착하니까. 화살이 날아가는 허공이나 화살이 날아가서 떨어지고, 왔다 갔다 하는 그 공간은 전혀 모른다.
태어나서 머물고 죽는 모든 것이 지혜의 군상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복만 알고 복만 구하려고 한다. ‘지혜와 복은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은 결국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복덕을 짓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왜 그런가? 연기법(緣起法)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연기법(緣起法)에는 하나 하나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소리다. 또 자체 성격(性格)이 없다는 소리다. 그래야 연기법(緣起法)이다.
그래서 이 몸이 연기법(緣起法)이기 때문에 자체 성격(性格)이 없고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왔고, 지, 수, 화, 풍 사대(四大)에서 왔고, 모든 사람들이 가르쳐 주고, 보여 준 것 거기에서 생각(思考)이 형성된 것이지, 몸 자체는 자성(自性)이 없다고 한다.
그것을 연생법(緣生法)이라고 하고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제상이 비상(諸相非相) 모든(諸相) 모양이 모양(非相)이 아닌 줄 아는(智) 것이 그렇게 중요한데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또 제상비상(諸相非相) 모든(諸相) 모양이 모양(非相)이 아닌 것을 보는(見)것, 약견 제상비상(若見 諸相非相) 모든(諸相) 상이 상(非相)이 아님을 본다. 그러면 즉견여래(卽見如來) 곧 바로 여래를 본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제상비상(諸相非相) 모든(諸相) 상이 상(非相)이 아님을 아시는 분이 무엇 때문에 상을 구했겠는가? 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상(相)을 부처님이라고 해도 맞지 않고 비상(非相)을 부처님이라고 해도 않 맞다고 한다. 왜냐하면 상(相)에는 상(相)의 자성(自性)이 없고 비상(非相)에는 또 비상(非相)의 자성(自性)이 없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떠나 별도로 있는가? 따로 무엇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제상비상(諸相非相)이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인가? 이것을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고 중도(中道)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중도(中道)라는 말도 상(相)과 비상(非相)을 여윈다고 그래서 중도(中道)이지, 중도(中道)라는 것에 대한 무엇을 드러내면 그것도 중도(中道) 상(相)밖에 않된다고 한다.
상(相)과 비상(非相)을 여윈 것이 중도(中道)이지, 상(相)과 비상(非相)이 말고 그 중간에 말뚝을 하나 박아서 이것이다. 그러면 그것도 역시 상(相)에 불과하다고 한다. 유상(有相), 무상(無相), 중상(中相) 가운데 중상(中相)이 될 수 밖에 없다. 중(中)은 상(相)이 아니다.
유상(有相)과 무상(無相)을 다 여윈 것을 중도(中道)라고 한다. 이것을 가르친 분이 용수보살(龍樹菩薩)이다.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중론(中論)이라고 하는 책에서 가르치고 있다.
중인연생법(衆因緣生法) 모든 인연으로 난 법을,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나는 그것을 공(空)이라고 말한다. 공(空)이라고 하는 것은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중연구족(衆緣具足) 화합물생(和合物生) 모든 인연이 다 갖추어져서 화합(和合)하여 물건이 생긴다고 하였다.
물이 끓는 것도 중연구족(衆緣具足) 화합물생(和合物生)이다. 물이 있고, 불이 있고, 끓을 만큼 열을 계속 가열하면 펄펄펄 끓는다. 끓는다고 하는 것은 자체 상(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과 불과 그릇이 잘 조화를 이루어서 모든 인연이 구족화합(具足和合)이 되면 끓는 물이 발생을 한다.
그게 물생(物生) 물건이 생긴다고 한다. 이 몸이 생길 수 있도록 모든 인연이 구족하게 화합을 해서 나온다. 그래서 오늘 날까지 머물러 있는 것도 중연(衆緣)이 구족(具足)하게 화합(和合)하여 나온 물건이다.
이 몸이 죽는 것도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 있도록 모든 인연이 구족화합(具足和合)한 소산(所産)이다. 별거 아니다. 내가 죽고 싶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죽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그 생각이 일어날 만한 모든 인연이 다 갖추어져서 화합(和合)이 된 산물(産物)이다.
그러니까. 자성(自性)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누가 나를 미워해도 그 미워할만한 모든 인연들이 다 갖추어져서 화합(和合)된 결산물이기 때문에 누가 나를 미워해도 “아 이런 인연법(因緣法)이 갖추어졌구나” 이렇게 알아야 된다.
미워하는 그 자체를 원망(怨望)하면 상(相)에 집착(執着)을 한다. 누가 나를 좋아해도 나를 좋아할만한 모든 인연이 다 갖추어져서 화합(和合)된 산물(産物)이 저렇게 나타나는구나. 이런 인연법(因緣法)을 이해(理解)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이해(理解)를 해야지 좋아하고 싫어하고 집착(執着)을 하면 고통(苦痛)이 끝나지를 않는다. 저 사람이 왜 죄(罪)를 짓는가? 미워하지 말고 인연법(因緣法)을 몰라서 저런 죄(罪)를 짓는구나. 이해(理解)해야 한다.
다 몰라서 하는 것이다. 이해(理解)를 못해서 죄(罪)를 짓는다.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어리석어서 그렇다. 전부 나쁜 짓을 어리석어서 하지 알고는 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용서(容恕)해준다” 내가 왜 용서(容恕)를 해주는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용서(容恕)를 하는가?
용서(容恕)해준다는 말은 전부 거짓말이다. 소용(所用)없다. “어리석어서 그렇다” 이렇게 이해(理解)를 해야 한다. 할아버지가 허구 헌날 고함만 질러도 할아버지 미워하지 말고 할아버지가 나이는 많아도 인생을 몰라서 저렇구나.
인생을 알면 저렇게 고함을 지르겠는가? 보니까. 이상한 할아버지들 많다. 한 번 밥집에 밥을 먹으러 갔다. 어떤 할머니하고 할아버지하고 오셨는데, 이 할아버지가 무엇을 시켰는지, 않시켰는지, 말 한마디도 없고 시종일관 신문만 보고 앉아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하고 평생 사는 할머니들은 참 어지간하겠다. 아니, 신문이야, 집에 가서도 볼 수 있고 내일 볼 수도 있는데, 이왕 밖에 나와서 외식을 하는 식당에 앉아서 말 한마디 없이 신문만 보고 있는가? 말이다.
얼마나 생각이 부족하고 재미가 없으면 그렇겠는가? 말이다. 저 나이에 신문을 그렇게 눈이 빠지게 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 인생을 아직 모르는 것이다. 내가 내일 죽을 인연이 탁 될지, 모래 죽을 인연이 될지, 모른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죽음의 산물인데, 죽기 전에 마음을 잘 쓰는 것이 할 일이지, 신문을 그렇게 디립다 읽는 게 할 일인가? 말이다. 단체장을 출마를 할건가? 국회의원을 출마를 할건가? 그렇게 인생을 모른다.
이렇게 살아온 것은 이 몸이 이렇게 유지되도록 인연(因緣)이 딱 구족(具足)되게 화합(和合)되어서 이렇게 되어 왔다. 그러면 죽을 인연(因緣)이 구족(因緣)되게 화합(和合)되면 가 버린다.
언제 가 버릴지 모르니까. 가기 전에 마음이라도 편안하게 쓰고 옆에 사람이라도 좋은 말 많이 해주고 따뜻하게 무엇인가. 인간의 온정을 베풀다가 죽어야지, 아무 말없이 허구헌날 신문이나 쳐다보고 있으면 왜 그렇겠는가? 어리석어서 그렇다.
그런 할아버지를 할머니가 용서(容恕)를 한다고 해서 되는가? 않된다. 용서(容恕)는 무슨 용서(容恕) “아, 이 노인이 나이는 많아도 어리석어서 이 모양이구나” 이렇게 이해(理解)를 하면 된다.
전부 어리석어서 그렇다. 인연법(因緣法) 하나 몰라서 그렇다. 그래서 이 중론(中論)이라고 하는 것이 전부 이런 인연법(因緣法), 무자성(無自性) 이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중도(中道)라고 한다.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은 가명(假名)이다.
유(有)에도 유성(有性)이 없고 무(無)에도 무성(無性)이 없다. 이것을 가명(假名)으로 중도(中道)라고 한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중론(中論)이다. 중론(中論)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법(因緣法)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게 용수보살(龍樹菩薩)이다.
제가 젊을 때 어떤 강주(講主) 스님을 뵈니까. 법문을 해 주시는데, 네 가지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법문을 해 주셨다. 그것이 무엇인가? 원각경(圓覺經)에 있는 말씀인데, 다음과 같다.
어불견수(魚不見水)고기는 물을 보지 못하고
인불풍수(人不見風)사람은 바람을 보지 못하고
미불견성(迷不見性)미혹하면 성품을 보지 못하고
오불견공(悟不見空)깨달으면 공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짐작(斟酌)을 하겠는데, 오불견공(悟不見空)깨달은 사람은 허공을 보지 못한다. 이게 도대체 모르겠더라. 그런데 나중에 원각경(圓覺經)을 보다 보니까. 규봉선사(圭峰禪師)의 제 7 권 上권에 그 말씀이 있다. 역시 뭐가 뭔지 모랐는데 규봉선사(圭峰禪師)의 해석을 보니까. 이해가 되었다.
무슨 내용인가? 능엄경(楞嚴經)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결이 있다.
空生大覺中(공생대각중) 이 허공이 대각에서 생긴 것이
如海一漚發(여해일구발) 마치 바다에서 물거품이 하나 일어나는 것과 같다.
有漏微塵國(유루미진국) 이 생기고 없어지는 유루의 그 미세한 세계가
皆從蚣所生(개종공소생) 전부 허공으로부터 의지하여 생겼다.
라고 하는 말이 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인가? 상(相)이든, 색상(色相)이든, 공상(空相)이든, 허공(虛空)이라고 하는 것도 공상(空相)을 말하는 것이다. 또 색상(色相)이라고 하는 것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색도 다 상(相)이고 식상(識相)도 다 상(相)이고, 전부 그렇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도 모두 상(相)이다. 성상(聲相)도 상(相)이고, 촉상(觸相)도 상(相)이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의상(意相)도 상(相)이고 전부 그렇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사대(四大)라고도 하지만 능엄경(楞嚴經) 같은 데서는 지수화풍공견식(地水火風空見識)에서 공대(空),견대(見),식대(識)를 추가하여 칠대(七大)라고 한다. 이게 맞다. 공(空)도 상(相)이고, 견(見)도 상(相)이고, 식(識)도 상(相)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수화풍공견식(地水火風空見識)을 칠대(七大) 만법(萬法)이라고 한다. 이 칠대(七大) 만법(萬法)이 다 상(相)이라고 한다. 그런데 칠대(七大) 만법(萬法)이 어디에 존재하는가? 허공(虛空) 안에 다 존재(存在)한다.
그러면 허공(虛空)은 어디서 나왔는가? 이 대목이 법문이다. 여러분 허공(虛空)이 어디서 나왔지요? 이것을 잘 알면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 자성(自性)을 보는 것이다. 지수화풍공견식(地水火風空見識)이라고 하고 모든 게 다 허공(虛空) 안에 있다는데 그러면 허공(虛空)은 어디서 나왔는가?
능엄경(楞嚴經)에서 무변허공(無進處空)이 각소현발(覺所現發)이라. 무변허공(無進處空)은 각(覺) 마음(心)에서 나왔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불견공(悟不見空)이라. 그러면 도대체 깨달은 사람은 왜 허공(虛空)을 보지 못하는가?
이게 참 무진법문(無盡法問)인데, 도저히 젊을 때는 모르겠더라고. 이후에 상좌(上座)한테 물었더니 상좌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알기 어렵다. 허공(虛空)이라고 하는 그것은 자성(自性)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공무자성(空無自性)이요. 종심기(從心起)라. 허공(虛空)이라고 하는 그것은 자성(自性)이 없고, 마음으로부터 일어났다. 종심(從心) 마음을 쫒아서 일어났다고 한다. 심멸(心滅)이면 공멸(空滅)이라. 마음(心)이 사라지면 공(空)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허공(虛空)이 지금 저기 있는 것인가? 우리는 저 허공(虛空)을 훤히 보이는데, 허공(虛空)이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없는 것인가? 또 없어서 않보이는 것이 아니다. 유무(有無)를 떠났는데, 내 생각으로 허공(虛空)이다. 허공(虛空)이 아니다.
공무자성(空無自性)이니 종심생(從心生)이라. 천수경(千手經)에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는 본래 자성(自性)이 없고 마음으로부터 일어났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죄(罪) 하나 뿐만 아니라 일체 만법이 전부 자성(自性)이 없는 종심생(從心生)이라고 하였다.
공무자성 종심생(空無自性 從心生)이라. 공(空)에는 자성(自性)이 없는데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 그러면 성(性)을 딱 보는 순간에 허망(虛妄)하게 자꾸 좋은 물건, 나쁜 물건, 큰 것, 작은 것들을 만들어 내는 의식의 그 마음이 잘못된 행위가 녹아져 버린다.
그래서 색상(色相)을 유(有)다. 무(無)다. 좋은 것이다. 나쁜 것이다. 라고 분별하는 분별망식(分別妄識)이 녹아지니까. 분별망식(分別妄識)이 녹아지면, 허공(虛空)이다. 물상(物相)이다. 라고 보지 않는다.
제상(諸相)이 다 비상(非相)인 것이다. 망식(妄識)이 녹아지면 제상(諸相)이 다 비상(非相)이 되니까. 망식(妄識)이 녹아진 그것이 깨달음인데, 그 망식(妄識)이 녹아진 깨달음이 무엇을 보겠는가?
공상(空相)을 보겠어요? 색상(色相)을 보겠어요? 그러니까. “깨달은 사람은 공(空)을 보지 못한다” 이게 그대로 법문을 참답게 한 것이다. 이게 원각경(圓覺經) 대소초(大疏秒)에 인용(引用)된 구결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랬다.
그러면 깨닫지 못한 사람이 여러 가지를 보는데, 그것은 전부 하나하나에 자성(自性)이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 내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일체가 다 종심생(從心生)이다.
내 생각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이게 생긴 것인가? 안생긴 것인가? 무자성(無自性)이다. 그게 연생법(緣生法)이다. 그렇다고 없는 것인가? 있는 것인가? 그대로 이게 연생법(緣生法)이고, 무자성(無自性)인데, 사람이 생각으로 “이것은 무엇이다. 좋은 것이다. 나쁜 것이다. 이게 얼마 나간다. 어디에 쓰인다.” 라고 한다.
이게 전부 학습(學習)된 자기 망식상(妄識相)을 가지고 분별(分別)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허공(虛空)도 분별(分別)에서 나온 것이고, 물질(物質)도 분별(分別)에서 나온다. 허공(虛空)에 자성(自性)이 있나요? 물질(物質)에 자성(自性)이 있나요? 사람도 분별(分別)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분별심(分別心)이 녹아지니까. 아무것도 상(相)을 보는 것이 없다. 그래서 오불견공(悟不見空) 깨달은 자는 공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게 경전에 다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모르겠더라.
오늘 법문은 제상비상(諸相非相)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상(諸相)은 성격(性格)이 없다. 제상(諸相)은 무자성(無自性)이다. 물에는 물의 자성(自性)이 없고 자체 성격이 없다.
나무에는 나무의 자체 성격이 없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자체 성격이 없다. 전부 연생법(緣生法)이다. 그래서 상(相)과 비상(非相)의 자유자재한 것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그래서 이런 법문을 야부(冶夫)스님은 제상비상 즉견여래(諸相非相 卽見如來) 이것을 어떻게 송(頌)을 달았는가? 하면 다음과 같다.
유상유구 개시망(有相有求 皆是妄) 상이 있는 것이라고 보고 계속 구함이 있는 행위가 이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우리 중생들은 저기에 상이 하나 탁 있다. 유상(有相)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구하는 것이다. 유구(有求)다. 이게 전부 허망(虛妄)한 것이다.
무형무견 타편고(無形無見 墮偏枯) 이것은 반대로 “저것은 형상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고, 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고, “없다”고 하는 견해를 이루어낸다. 이것은 전부 편고(偏枯) 치우쳐서 빼빼 마른데 떨어졌다고 한다. ‘있다’라고 하면 ‘없다’라고 하는 그것에 견해(見解)를 내고, 없다면 있다는 견해를 내는 이것 전부가 망상(妄相)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당밀밀 하증간(堂堂密密 何曾間) 당당하고 높고높고 은밀하고 은밀해서 이 몸이 가나 오나 사나 죽으나 이 반야의 세계는 일념(一念)이 무량겁(無量劫)이고 무량겁(無量劫)이 일념(一念)이고, 일즉다(一卽多)요, 다즉일(多卽一)이라. 일찍이 조금도 하증간(何曾間) 사이가 없다.
일도한광 삭태허(一道寒光 爍太虛) 한 길의 그 차가운 광명이 삭태허(爍太虛) 태허공에 빛난다. 이렇게 반야(般若)의 세계를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보면 즉견여래(卽見如來) 곧 여래를 본다는 것을 송(頌)으로서 남겨 주셨다.
漚滅空本無(구멸공본무) 물거품 다 꺼지면 허공마저 없어지듯
況復諸三有(황부제삼유) 더구나 세 가지의 다그러한 모습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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