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의 마음가짐
좌선은 안락의 법문
곰곰이 생각하면 좌선은 안락의 법문이지만, 사람들이 흔히 병을 얻는 것은 모두 마음을 잘못 쓰기 때문이다. 이 뜻을 잘 터득하면, 자연히 온몸이 편안하고 정신이 상쾌해질 것이다. 바른 생각이 분명하고 법의 맛이 정신을 도와 고요하고 맑은 기쁨을 누릴 것이다. 한 번 밝게 된 사람이라면 용이 물을 얻은 것 같고, 호랑이가 산을 의지한 것과 같을 것이다. 아직 밝게 되지 못한 사람은 바람에 의해서만 불을 일으키려는 것과 같아서 그 힘이 달릴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판단하고 절대로 서로 속이지 말라.
도가 높아지면 마(魔)가 성하는 법이어서 역경과 순탄함이 만 가지나 된다. 그러나 바른 생각이 나타나면 그 어떤 것에도 거리끼지 않을 것이다. 능엄경(楞嚴經)과 천태지관(天台止觀)과 규봉(圭峰)의 수증의(修證儀)에 악마의 일을 두루 밝혀,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 해 두었으니 반드시 알아 두라. ―《좌선의》―
좌선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마음가짐이다.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좌선에 임해야 하는가?
첫째로 염두에 둘 것은 바로 좌선은 안락(安樂)의 법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안락이란 말 그대로 편안하고 즐겁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좌선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편안하고 즐거워야 한다.
편안하고 즐겁기 위해서는 우선 만족해야 한다. 만족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추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일체의 바램을 놓고 쉬어야 한다. 심지어는 깨닫고자 하는 마음조차도 하나의 헐떡임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일체의 사량분별(思量分別)과 '나'라고 하는 생각, 내지는 깨치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모두 놓아버리고 다만 앉아 있을 뿐이다.
그대로만 하면 5분 앉으면 5분 부처이다. 좌선이란 몸을 주저 앉혀 고요히 할 뿐 아니라, 마음을 주저 앉혀 쉬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5분 앉으면 5분 부처라는 신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앉아있는 부처는 더 이상 부처가 되고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성, 즉 우리 모두의 본 마음·참 나는 본래 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릇됨만 없으면 자성의 계(戒)요, 더 이상 산란함만 없으면 자성의 정(定)이요, 더 이상 어리석음만 없으면 자성의 혜(慧)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수행을 해나간다거나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하는 것도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 무엇도 추구할 필요 없이 다만 5분 앉아있으면 5분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아울러 좌선을 하는 때에는, '몸으로써 깨닫는다'는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께서도, 차라리 사대(四大)로 된 물질 몸에 대해서는 '나'와 '내 것'에 매일지언정, 의식(意識)에 대해서 '나'와 '내 것'에 매이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우리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며, 우리의 생각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고 흔들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량분별이나 지견의 이해 및 알음알이로써 깨닫고자 해서는 백 천 만겁이 흘러 미륵보살이 하생(下生)한다 해도 깨치기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이러한 알음알이는 모두 부처님께 맡겨버리고, 몸으로써 깨닫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좌선에 임하는 것이 오히려 보탬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아울러 좌선을 하는 가운데 특이한 현상이나 자취를 구하지 말 것이며, 혹 신통스럽거나 두려운 경지가 나타난다 할지라도 이 모두 다 요망한 일로 여겨 마음에 두지 말고 심상히 지나가 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신과의 진정한 만남
좌선이 끝나 일어설 때에는 천천히 몸을 움직인 후에 편안히 일어나고 갑자기 일어서지 말라. 좌선에서 일어난 뒤에는 어느 때나 항상 좌선의 방법에 의하여 선정(禪定)의 힘을 보호하고 유지하기를 어린애를 돌보듯 하라. 그러면 선정의 힘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선정의 한 문이 가장 급한 일이다. 만약 선정을 잘 이루지 못하면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망망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슬을 찾으려면 물결이 가라앉아야 한다. 물결이 일렁이면 찾기 어렵다. 물결이 가라앉아 맑고 깨끗해지면 마음의 구슬이 저절로 나타난다.
《원각경(圓覺經)》에 이르기를 "거리낌없는 청정한 지혜가 다 선정에서 나온다"고 하였고, 《법화경(法華經)》에서는 "고요한 곳에서 마음을 닦고, 편안히 머물러 움직이지 않기를 수미산처럼 하라"고 하였다.
범부와 성인을 뛰어 넘으려면 반드시 반연(攀緣)을 고요히 끊고, 앉아서 가고 서서 가려면(坐脫立亡) 선정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한 평생 힘을 기울여도 오히려 잘못될까 두려운데, 하물며 게을러 가지고야 어떻게 생사의 업(業)을 막아내겠는가?
그러므로 옛 사람이 이르기를 "만약 선정의 힘이 없으면 죽음의 문에 굴복 당하고, 눈앞이 캄캄하여 갈팡질팡 헤매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라건대, 모든 참선하는 벗들은 이 글을 거듭거듭 읽고,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여 다 같이 바른 깨달음을 이룰지어다.
―《좌선의》―
실제로 좌선을 하다보면 알게 되겠지만, 좌선이야말로 진정한 자신과의 만남이다.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인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만 앉아만 있다는 것이 그렇게도 어렵고 힘든 것인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몇몇 유별난 분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잠시라도 무엇인가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듯하다. 때로는 한꺼번에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해낼 수 있어야 능력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앉아있기만 한다는 사실이 마냥 낯설기만 하다. 두렵기도 하고. 평상시에는 이일 저 일에 쫓겨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는데, 막상 앉아있으려니 생가지도 않았던 근심걱정, 계획, 회한 등등이 마구 떠올라 괴로울 정도이다.
다리는 피가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저려오기만 하고, 엉덩이는 배겨오고 졸음은 밀려오고, 죽을 맛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과정을 피해가서는 안 된다. 여태껏 전혀 돌아보지 못했던 자신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내 육신 하나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적응이 되어 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비로소 행동을 변화시킴으로써 사고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정상에 선 이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인생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심지어 남들과 직접 경쟁해 쟁취하는 운동경기나 무도시합조차도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고 술회한다. 외로운 고도.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싸움이다.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가 인생에 승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참선은 단순히 자신과 싸움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짜 나의 허상을 여실히 바라보고, 참 나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참 나의 발견. 참 나를 본 이라야 생은 물론 죽음에 임박해서도 당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업생(業生)이 아니라, 원생(願生)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서서 죽고 앉아 죽고 심지어는 물구나무서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참 나는 항상 되고, 즐겁고, '나'가 있으며, 깨끗하다.
우리 모두 참 나를 돌아보자! 또한, 느껴보자!
이것을 이 생에서 이루지 않으면 언제 이룰 것인가?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좌선은 안락의 법문
곰곰이 생각하면 좌선은 안락의 법문이지만, 사람들이 흔히 병을 얻는 것은 모두 마음을 잘못 쓰기 때문이다. 이 뜻을 잘 터득하면, 자연히 온몸이 편안하고 정신이 상쾌해질 것이다. 바른 생각이 분명하고 법의 맛이 정신을 도와 고요하고 맑은 기쁨을 누릴 것이다. 한 번 밝게 된 사람이라면 용이 물을 얻은 것 같고, 호랑이가 산을 의지한 것과 같을 것이다. 아직 밝게 되지 못한 사람은 바람에 의해서만 불을 일으키려는 것과 같아서 그 힘이 달릴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판단하고 절대로 서로 속이지 말라.
도가 높아지면 마(魔)가 성하는 법이어서 역경과 순탄함이 만 가지나 된다. 그러나 바른 생각이 나타나면 그 어떤 것에도 거리끼지 않을 것이다. 능엄경(楞嚴經)과 천태지관(天台止觀)과 규봉(圭峰)의 수증의(修證儀)에 악마의 일을 두루 밝혀,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 해 두었으니 반드시 알아 두라. ―《좌선의》―
좌선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마음가짐이다.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좌선에 임해야 하는가?
첫째로 염두에 둘 것은 바로 좌선은 안락(安樂)의 법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안락이란 말 그대로 편안하고 즐겁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좌선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편안하고 즐거워야 한다.
편안하고 즐겁기 위해서는 우선 만족해야 한다. 만족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추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일체의 바램을 놓고 쉬어야 한다. 심지어는 깨닫고자 하는 마음조차도 하나의 헐떡임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일체의 사량분별(思量分別)과 '나'라고 하는 생각, 내지는 깨치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모두 놓아버리고 다만 앉아 있을 뿐이다.
그대로만 하면 5분 앉으면 5분 부처이다. 좌선이란 몸을 주저 앉혀 고요히 할 뿐 아니라, 마음을 주저 앉혀 쉬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5분 앉으면 5분 부처라는 신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앉아있는 부처는 더 이상 부처가 되고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성, 즉 우리 모두의 본 마음·참 나는 본래 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릇됨만 없으면 자성의 계(戒)요, 더 이상 산란함만 없으면 자성의 정(定)이요, 더 이상 어리석음만 없으면 자성의 혜(慧)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수행을 해나간다거나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하는 것도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 무엇도 추구할 필요 없이 다만 5분 앉아있으면 5분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아울러 좌선을 하는 때에는, '몸으로써 깨닫는다'는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께서도, 차라리 사대(四大)로 된 물질 몸에 대해서는 '나'와 '내 것'에 매일지언정, 의식(意識)에 대해서 '나'와 '내 것'에 매이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우리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며, 우리의 생각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고 흔들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량분별이나 지견의 이해 및 알음알이로써 깨닫고자 해서는 백 천 만겁이 흘러 미륵보살이 하생(下生)한다 해도 깨치기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이러한 알음알이는 모두 부처님께 맡겨버리고, 몸으로써 깨닫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좌선에 임하는 것이 오히려 보탬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아울러 좌선을 하는 가운데 특이한 현상이나 자취를 구하지 말 것이며, 혹 신통스럽거나 두려운 경지가 나타난다 할지라도 이 모두 다 요망한 일로 여겨 마음에 두지 말고 심상히 지나가 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신과의 진정한 만남
좌선이 끝나 일어설 때에는 천천히 몸을 움직인 후에 편안히 일어나고 갑자기 일어서지 말라. 좌선에서 일어난 뒤에는 어느 때나 항상 좌선의 방법에 의하여 선정(禪定)의 힘을 보호하고 유지하기를 어린애를 돌보듯 하라. 그러면 선정의 힘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선정의 한 문이 가장 급한 일이다. 만약 선정을 잘 이루지 못하면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망망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슬을 찾으려면 물결이 가라앉아야 한다. 물결이 일렁이면 찾기 어렵다. 물결이 가라앉아 맑고 깨끗해지면 마음의 구슬이 저절로 나타난다.
《원각경(圓覺經)》에 이르기를 "거리낌없는 청정한 지혜가 다 선정에서 나온다"고 하였고, 《법화경(法華經)》에서는 "고요한 곳에서 마음을 닦고, 편안히 머물러 움직이지 않기를 수미산처럼 하라"고 하였다.
범부와 성인을 뛰어 넘으려면 반드시 반연(攀緣)을 고요히 끊고, 앉아서 가고 서서 가려면(坐脫立亡) 선정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한 평생 힘을 기울여도 오히려 잘못될까 두려운데, 하물며 게을러 가지고야 어떻게 생사의 업(業)을 막아내겠는가?
그러므로 옛 사람이 이르기를 "만약 선정의 힘이 없으면 죽음의 문에 굴복 당하고, 눈앞이 캄캄하여 갈팡질팡 헤매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라건대, 모든 참선하는 벗들은 이 글을 거듭거듭 읽고,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여 다 같이 바른 깨달음을 이룰지어다.
―《좌선의》―
실제로 좌선을 하다보면 알게 되겠지만, 좌선이야말로 진정한 자신과의 만남이다.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인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만 앉아만 있다는 것이 그렇게도 어렵고 힘든 것인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몇몇 유별난 분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잠시라도 무엇인가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듯하다. 때로는 한꺼번에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해낼 수 있어야 능력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앉아있기만 한다는 사실이 마냥 낯설기만 하다. 두렵기도 하고. 평상시에는 이일 저 일에 쫓겨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는데, 막상 앉아있으려니 생가지도 않았던 근심걱정, 계획, 회한 등등이 마구 떠올라 괴로울 정도이다.
다리는 피가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저려오기만 하고, 엉덩이는 배겨오고 졸음은 밀려오고, 죽을 맛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과정을 피해가서는 안 된다. 여태껏 전혀 돌아보지 못했던 자신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내 육신 하나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적응이 되어 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비로소 행동을 변화시킴으로써 사고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정상에 선 이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인생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심지어 남들과 직접 경쟁해 쟁취하는 운동경기나 무도시합조차도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고 술회한다. 외로운 고도.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싸움이다.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가 인생에 승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참선은 단순히 자신과 싸움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짜 나의 허상을 여실히 바라보고, 참 나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참 나의 발견. 참 나를 본 이라야 생은 물론 죽음에 임박해서도 당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업생(業生)이 아니라, 원생(願生)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서서 죽고 앉아 죽고 심지어는 물구나무서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참 나는 항상 되고, 즐겁고, '나'가 있으며, 깨끗하다.
우리 모두 참 나를 돌아보자! 또한, 느껴보자!
이것을 이 생에서 이루지 않으면 언제 이룰 것인가?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출처 : 通達無我法者
글쓴이 : CD굽던노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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