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스크랩] 화두를 참구하면 왜 돈오 견성하는가

수선님 2018. 12. 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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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제58집 2009․제4권

 

화두를 참구하면 왜 돈오 견성하는가*

 

박태원(울산대)

 

 

[한글 요약]

 

화두 참구와 돈오 견성의 인과 관계에 대한 해명은, ‘간화선의 화두 참구에서 역설하는 의정(疑情)은 어떤 것이기에 돈오 견성의 통로가 될 수 있는가?’에 대답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먼저 화두 참구의 목적인 돈오 견성의 내용을, 혜능의 견해를 중심으로 확인하였다. 이어 대혜의 간화선 사상이 돈오 견성의 핵심 내용인 ‘분별의 해체․무념․관조(반조)’를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간화선에서는 돈오 견성의 방법론으로 왜 의심/의정에 몰두하는 화두 참구를 수립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간화선이 공안 화두로 인해 촉발시키려는 ‘의심/의정’의 성격에 놓여 있다. 이에 관한 종래의 견해는 두 가지이다. 의심의 일상 언어적 의미에 의거하여 ‘모르는 해답을 알고자 하는 탐구적 의심’으로 보는 것이 그 하나이고, 분별심 억제를 위한 마음 집중의 도구적 기능을 주목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그러나 두 가지 견해 모두 화두 의심과 돈오 견성의 인과적 상관성을 파악하는 데는 불충분한 것이다.

 

대혜의 법문을 비롯한 간화선의 모든 화두 참구 법문에서 예외 없이 역설되는 것은 바로 ‘화두 의심으로 일체 분별심을 막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흔히 화두 의심을 ‘산란한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여 분별심을 제어하는 일념 집중의 매개’로 파악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왜 여타의 일념 집중 방식들과는 달리 화두 의심이 돈오 견성으로 이어지는가?’에 답하려면, 화두 의심을 단순히 마음 집중을 위한 수단 정도로 보아서는 안 된다. 화두 의심이 돈오 견성을 위한 분별심의 해체로 이어지게 되는, 그 인과적 고리를 해명해 주는 다른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

 

‘의심’이라는 말이 무엇을 탐구하는 맥락에서 사용될 때, 그 일상 언어적 의미는 분명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다. 탐구의 의지나 열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의심’은 해답을 향한 조준력이나 집중력을 높여간다. 화두 의심에 대한 종래의 두 가지 시선은 각각 조준력과 집중력에 착안한 것이다. 그런데 탐구적 의심에는 또 하나의 특징적 면모가 있다. ‘아직 알지 못함에서 오는 미확정 혹은 무규정의 마음 상태’ 가 그것이다. 아직 해답이 확정되지 않아 개념적 정의나 구획이 설정되지 아니한 무규정의 마음 상태가, 탐구적 의심이 지니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화두 의심을 챙기는 것이 어떻게 분별심의 해체와 그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가? 의심의 집중력을 활용하여 분별적 사량을 제어하려는 것인가? 화두 참구의 의심 챙기기를 그러한 ‘집중으로 분별 제어’라는 발상으로 파악하는 것은 미흡하다. 간화선에서 분별심의 극복과 관련하여 주목한 것은 ‘의심이 지니는 무규정의 마음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의심의 무규정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오롯하게 챙겨간다는 것은, 곧 분별적 정의나 경계 짓기를 거부하는 마음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간화선은, 화두에서 촉발되는 의심에서 ‘규정 짓지 않는 마음 상태’를 잡고 거기에 힘을 실어 선명하고 응축된 상태(疑團)로 확립시켜 챙겨감으로써, 그 어떤 분별적 규정의 범주 안으로도 휘말려 들지 않을 수 있었다.

화두 의심을 챙긴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알려고 애쓰는 마음’도 아니고, ‘의심하는 마음의 집중력을 간수해 가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규정 짓지 아니하는, 경계 미확정의 마음 상태’를 챙겨 가는 것이며, 그 결과 자연스럽게 모든 분별적 규정에 말려들지 않는 국면을 수립하여 유지해 가는 것이다.

 

공안에서 돈발(頓發)한 화두 의심의 ‘분별하지 않는 무규정의 마음 상태’를 순일하게 챙겨 가면, 대상에 대한 분별적 구성의 범주에 휘말리지 않는 마음 자리가 드러나 그 자리에 서게 된다. 이 지점은 정념의 ‘알아차림’으로 수립되는 ‘분별 범주/체계에 휘말려 들지 않는 마음 자리’와 같다. 정념은 신(身)․수(受)․심(心)․법(法)에 대한 ‘알아차림’으로써 신(身)․수(受)․심(心)․법(法)에 대한 분별적 구성 체계에 휘말려 들지 않는 국면을 수립하는 길을 설하고 있고, 간화선은 ‘의심의 무규정적 국면’을 챙겨 역시 분별적 구성 체계에 휘말려 들지 않는 마음 국면을 수립하게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념과 화두는 그 긴 시공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경이롭게도 통한다.

 

‘의심의 무규정적 국면’을 챙겨 분별적 구성 체계에 휘말려 들지 않는 마음 자리를 열고, 그 마음 자리를 오롯하게 간수해 가다보면, 그 자리를 지키는 힘이 충분해졌을 때, 문득 분별심에서 말끔히 해방된 지혜와 자비의 존재 국면(佛性/自性/自性淸淨心/本性)이 온전히 드러난다. 돈오하여 견성한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이 돈오 견성의 자성(自性)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고 세계와 만나는 일이 기다린다(牧牛行/悟後萬行/頓悟인 漸修).

 

 

주제분야 : 불교철학, 선 사상, 간화선

주 제 어 : 돈오 견성, 간화선, 화두 참구, 의심/의정, 화두 의심과 돈오 견성의 인과 관계

 

 

1. 문제의 소재

 

동북 아시아 선불교의 정체성과 개성은 견성(見性)․돈오(頓悟)․화두(話頭)라는 말들 속에 담겨 있다. 선불교의 실질적 창도자인 혜능(慧能 638-713)은 돈오(頓悟) 견성(見性)을 천명하여 선불교의 활력과 개성의 토대를 제공한다.

 

돈오 견성을 설하는 혜능의 언어를 중심으로 개성을 보태가던 선불교는, 중국 송대(宋代)의 대혜 종고(大慧 宗杲 1089-1163)에 이르러 획기적인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화두(話頭)를 간(看)하는 간화선(看話禪)의 면모가 그것이다. 간화선이 부각되기 이전까지는, 돈오 견성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돈오하여 견성하는 것이, ?육조단경?이래 남종선 계승을 자처하는 선문 언어들에 기재된 깨달음의 방식이요 사례들이었다. 간화선 형성 이전에는, 주로 언구를 통한 설법을 통해, 때로는 임제의 할(喝), 덕산의 방(榜)과 같은 변형된 언어 행위를 통해, 학인을 그 자리에서 견성 국면으로 이끌어 주려는 방식이 돋보일 뿐이다. 물론 돈오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견성할 수 있는 조건들은 각자의 수행 이력에 다양한 형태로 마련되어있었을 터이지만, 적어도 간화선 등장 이전까지는 법문을 듣는 순간(言下에) 돈오 견성하는 사태만이 기재되어 있을 뿐, 돈오 견성을 위한 수행 방법이 별도로 제시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대혜 이후 이러한 정황에 일대전환이 생겨난다. 스승으로부터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견성 기연(機緣)들을 공안(公案)으로 삼아 그 공안에서 의심/의정(疑情)을 일으키고, 그 의심/의정을 오롯하게 챙겨 마침내 오도가도 못하는 은산철벽같은 의심덩어리 자체를 타파하여 견성케 하는, 돈오 견성의 방법론적 체계가 확립된 것이다.

 

대혜가 정립하고 있는 간화선은 ‘의심/의정(疑情)을 통한 화두 참구법’이다. 공안(公案)으로 택해진 선사들의 깨달음과 관련된 일화나 언구를 향해 의심/의정을 일으켜 오롯하게 챙겨 가다 보면 홀연 대오(大悟) 견성(見性)하게 된다는 것이, 화두를 간(看)하는 핵심 내용이다. 간화선 맥락의 화두 법문은 당대(唐代) 조주 종념(趙州 從念, 778-897)과 비슷한 시기의 인물 황벽 희운(黃檗 希運, ?-850)의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에 이미 등장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의심/의정(疑情)은 부각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임제 의현(臨濟 義玄, ?-867)까지만 해도, ‘공안을 매개로 의심/의정을 돈발(頓發)시켜 의단(疑團, 의심 덩어리)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그 의단을 깨트려 견성하는’ 참선 방식은 형성되고 있지 않다. 이후 오조 법연(五祖 法演, ?-1104)에 이르러 무자(無字) 화두를 통한 화두 참구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고, 마침내 대혜 종고가 오직 의심/의정으로써 무자(無字)를 참구하여 화두를 타파하라는 식의 ‘의심/의정을 통한 화두 참구법’을 확립시켰다.1]

 

1]월암, ?간화정로?(현대북스, 2006). 232-237쪽. 이상호, ?중국선종 수행법에 나타난 의정에 대한 연구?(위덕대 불교학과 석사학위논문, 2004), 40-41쪽.

 

추측컨대, 선종 발전의 어느 시점부터 선종 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돈오 견성의 구체적 방법론 확립에 대한 요구가 비등하였고, 그 요청에 대한 응답이 간화선 방향으로 모아졌으며, 이러한 추세를 계승․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인물이 대혜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간화선이 혜능의 사상적 정체성을 계승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간화선이, 임제의 가풍을 이어간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의 ‘오조 법연(五祖 法演, ?-1104) - 원오 극근(圓悟 克勤, 1063-1135) - 대혜 종고’라는 인맥에서 뚜렷하게 확립, 완성되었다는 점은 역시 그 신뢰할만한 논거가 된다. 돈오 견성을 천명하여 선종의 정체성을 출발시킨 혜능과, 그 가르침의 정수를 정통적으로 계승해 갔다고 평가받는 강서(江西)의 마조 도일(馬祖 道一, 709-788), 그리고 그의 법맥을 계승하는 ‘백장 회해(百丈 懷海, 749-814) - 황벽 희운 - 임제 의현 ’계열에서 간화선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간화선이 돈오 견성의 사상적 정체성 속에서 돈오 견성의 구체적 방법론으로 형성된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이렇듯 간화선이 돈오 견성의 남종선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기에, 선종 구성원들이나 선사상에 관한 탐구들은, 화두를 참구하면 돈오하여 견성하게 된다는 것을 되물을 필요도 없는 당연한 전제로 간주한다. 화두 의심/의정을 간절히 챙겨가다가 깨뜨리는 순간 돈오 견성의 장(場)이 열린다는 이해와 신념은, 간화선의 흔들릴 수 없는 토대이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간과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화두 의심/의정을 깨뜨리면 왜 돈오 견성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 즉 화두 참구와 돈오 견성의 인과적 상관 관계에 대한 물음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화두 의심을 들어 깨치면 돈오 견성하게 된다는 신념이 합리적이려면, 화두 참구와 돈오 견성의 인과 관계에 대한 적절하고 섬세한 해명이 요구된다.

 

종래 이 문제에 대한 전형적인 대답은 크게 두 유형이다. 하나는 ‘모든 문제 해결은 의심에서 비롯된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도 결국 인생사에 대한 궁극적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돈오 견성을 지향하는 수행자들이 화두에 대해 품는 의심도 결국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에 대해 크게 의심을 내어 몰두하면 그 해답으로서의 돈오 견성이 성취된다’는 식의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화두 의심에만 집중하면 모든 분별심이 억제되니, 이런 집중 상태가 지속되다 보면 어느 순간 탁 트여 돈오 견성의 국면에 돌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간화선의 화두 참구와 돈오 견성의 상호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거의 모든 경우가 이 두 유형 중의 하나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2]

 

2] 간화선에 관한 연구나 글들은 공안 언어나 화두 참구의 초논리성, 무분별성 등을 다양한 논리로 풀어보고 있다. 하지만 화두 참구와 돈오 견성의 결정적 가교인 화두 의심 그 자체를 정면으로 다루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주로 사량분별심의 조복이라는 화두 의심의 결과적 역할이나, 간화 실참(實參)과 연관된 수행 지침들을 정리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사실 간화선 탐구에서는 화두 의심이 왜 돈오 견성의 조건이 되는지에 관한 탐구가 핵심적 지위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데, 정작 그에 관한 견해 진술은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저 ‘화두 의심은 인생의 궁극적 과제에 관한 근원적 의문의 연장선’이라거나 ‘분별심을 제어하기 위한 마음 집중의 통로나 매개’ 정도의 이해를 전제로, 간화선 언어의 개성 탐구로 직행하고들 있다. 아마도 간화선의 화두 의심에 대한 이해나 기술의 전형은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하나의 화두에 대해 의심을 지어가다 보면 일체 사량분별이 사라지고 오로지 의심만이 성성적적하여 화두함(能)과 화두되어짐(所)이 하나가 된다. 만약 공안 참구에 의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간화선이 아니다. 간화의 참구는 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속되어야 한다. 불법의 대의나 정법에 대한 지혜를 구족하지 못한 중생이기 때문에 이것을 갖추기 위해서 화두를 의심하는 방편을 통해 번뇌 망상을 조복하려는 것이다. 화두에 의심을 일으킨 간화행자는 이미 우주와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 의식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자일 것이다. 문제 의식이 없이는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 의식이 간절하면 의심은 저절로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문제 의식은 가지고 의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는 외도의 삿된 법이 된다. 화두는 간절하게 사무치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참구해야 한다. 철저한 문제 의식이 없이는 화두 참구, 즉 의심이 일어날 수가 없다. 화두에 대한 의심이 돈발(頓發)되면 일체의 사량분별의 알음알이가 용납되어지지 않는다. --- 의심이 하나의 큰 덩어리를 이루어(打成一片) 시절인연이 맞아 떨어져 한 번 크게 분출하여(噴地一發) 명심견성(明心見性)하면 집 앞 뜰에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소식을 알게 될 것이다.”

(월암, 「한국 간화선과 화두 참구의 계승」 <?보조사상? 제27집, 보조사상연구원, 2007>, 56-57쪽).

‘인생의 궁극 과제에 대한 답을 알고자 하는 근원적 문제 의식’과 ‘일체 사량분별심을 조복하는 하나됨의 몰입/집중을 위한 방편’이라는 관점에서 화두 의심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화두 의심에 관한 종래의 이해와 기술은 결국 이러한 유형으로 수렴되고 있다. 화두 의심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거론한 이상호의 ?중국선종 수행법에 나타난 의정(疑情)에 대한 연구 -간화선을 중심으로-?(위덕대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논문, 2004) 역시 이러한 관점을 불교사상사적 전개와 연관시켜 체계적으로 다듬고 있다.

 

 

첫 번째 해명은 ‘의심’이라는 말의 일상적 용법과 의미에 의거하여 화두 참구와 돈오 견성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강렬한 의문의 마음으로 인해, 추구하고 있는 답인 돈오 견성이 결과물로서 수반된다’는 해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너무도 성글어서 실제로는 화두 참구와 돈오 견성의 인과 관계 이해에 기여하는 것이 거의 없다.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의심이 해답의 성취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답을 알고자 하는 탐구적 의심의 존재 여부나 그 강렬함의 정도는 해답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 조건 정도일 뿐이다. 문제는 이 탐구적 의심과 해답 사이를 연결해 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를 풀 때, 해답을 알고 싶은 탐구적 의심만으로는 곧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한다. 이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것은 문제 풀이를 가능케 하는 특정한 도구 혹은 방법론이다. 어떤 도구적 방법론을 채택하는가에 따라 정답을 얻기도 하고 오답에 빠지기도 한다.

 

붇다 역시 삶의 근원적 불안(苦)이라는 문제 상황의 궁극적 해법을 추구하는 탐구적 의심에서 출발했을 것임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 탐구적 의심은 그를 구도의 여정에 오르게 한 발심의 동력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탐구적 의심과 해법을 이어주는 적절한 진리 구현의 도구 및 방법론이 확보되고서야 붇다는 그가 추구하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붇다의 가르침은 사실상 일관되게 그가 문제 해결을 성취할 수 있었던 도구 혹은 방법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팔정도(八正道)는 붇다가 제시하는 문제 해결의 구체적 방법론이다. 이렇게 볼 때 화두 의심과 돈오 견성의 인과 관계를, ‘문제를 풀려는 탐구적 의심’으로써 설명하려는 것은 적절치 않다.

 

화두 참구와 돈오 견성의 상관성을 해명하려는 두 번째 설명 방식은, ‘일념으로 집중하다 보면 깨친다’는 식의, 일종의 ‘집중을 통한 신비적 도약’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두 의심의 성격이나 역할을 ‘마음을 산란하게 흩어지지 않게 하는 몰입적 집중’으로 이해하려는 이러한 설명 역시, 화두 참구와 돈오 견성의 인과적 관련성에 대한 합리적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 ‘의심 하나에 몰두하면 왜 돈오 견성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집중하다 보면 분별심이 억제되어 깨치게 된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렇다면 굳이 화두 의심에만 집중할 필요가 있는가? 기도나 독송, 독경, 나아가 서예나 기공 수련 등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않고 집중하게 하는 모든 행위들도 마찬가지로 돈오 견성을 수반하여야 하지 않는가?’라고 되묻게 된다. 간화선이 왜 화두 의심을 돈오 견성의 방법으로 채택하였는지를 설명하려면, 화두 의심을 단지 ‘마음 집중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화두 참구와 돈오 견성의 인과적 상관성을 해명하려면 ‘돈오 견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입장을 수립한 후, ‘간화선의 화두 참구에서 역설하는 의심/의정(疑情)은 어떤 것이기에 돈오 견성의 통로가 될 수 있는가?’에 대답하여야 한다. 화두 참구와 돈오 견성의 상관 관계를 설명하는 종래의 견해들은 이러한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결합시켜 탐구하지 않았기에 상술(上述)한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선종이 천명하는 돈오 견성의 의미를, 혜능의 견해를 중심으로 살펴보자.3]

 

3]필자는 혜능의 돈오 견성 사상과 관련하여 「돈오의 대상 소고(小考)」(?철학논총? 제54집 제4권, 새한철학회, 2008)라는 연구를 선행한 바 있다. 혜능의 돈오 견성에 관한 논의는 이 연구의 해당 부분을 다시 요약, 정리한 것이다.

 

 

2. 돈오 견성은 무엇인가?

- 혜능의 견해를 중심으로 -

 

혜능은 돈오 견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마음을 깨달아 견성하면 스스로 불도(佛道)를 성취하는 것이니, 즉시 활연(豁然)하여 본래의 마음을 얻느니라.

--- 선지식들이여, 나는 홍인화상의 처소에서 한 번 듣고 말끝에 크게 깨달아 진여본성(眞如本性)을 몰록 보았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을 후대에 유통시켜 도를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리(菩提)를 돈오(頓悟)하여 각자 스스로 마음을 관(觀)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돈오(頓悟)하게 하는 것이다.

 ---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觀照)하여 안팎으로 환히 밝으면(內外明徹) 자신의 본래 마음을 알게 되니,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곧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성취하면 바로 반야삼매(般若三昧)이고, 반야삼매를 깨달으면 곧 무념(無念)이다.

무엇을 무념이라 하는가? 무념이라는 도리는 일체법을 보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자성(自性)을 청정하게 하여 (色․聲․香․味․觸․法의) 여섯 도적들로 하여금 (眼․耳․鼻․舌․身․意의) 여섯 문을 좇아 달려가게 하지만 대상세계(六塵) 속에서 그것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 오고 감에 자유로운 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이니, 이것을 무념행(無念行)이라 부른다.

--- 무념의 도리를 깨달은 이는 만법에 모두 통하고, 무념의 도리를 깨달은 이는 모든 부처의 경지를 보며, 무념의 돈법(頓法)을 깨달은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른다.” 4]

4] 혜능, 돈황본 ?육조단경?, 신수대장경48, 340下.

 

 

혜능에 의하면, 견성은 자신의 ‘본심/본성/진여본성을 돈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돈오 견성의 토대가 되는 것이 이른바 ‘자성(自性)’이다. ‘자성/자성심지’는 혜능의 설하는 돈오 견성의 근거가 되는 근원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개념이다.

혜능의 자성은 철학 일반이나 중관철학에서 거론하는 ‘불변의 본질/실체적 속성으로서의 자성’이 아니다. 혜능은 자성이라는 언어로써 ‘실체 관념을 내용으로 하는 무지에 의거한 분별망상적 세계 구성이 전개되기 이전의 국면/지평’을 지칭한다. 분별망상적 존재 왜곡과 오염 이전이라는 의미에서, ‘자성의 청정/청정한 자성/공적한 자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자성 국면은 고정되거나 완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작용 여하에 따라 그 국면은 구현/유지(본심/본성/진여본성)되거나 은폐/왜곡/오염(분별망상)되기도 한다. 마음이 지혜롭게 작용하면 자성의 청정 국면이 구현/유지되고, 무지에 이끌릴 때면 자성 국면은 상실/은폐/왜곡/오염된다(“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觀照)하여 안팎으로 환히 밝으면(內外明徹) 자신의 본래 마음을 알게 되니,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곧 해탈이다”).

 

다음과 같은 혜능의 설법도 이러한 뜻을 전하고 있다.

 

 

“선지식들이여, 세상 사람들의 성(性)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니 만법이 자성에 있다. 모든 나쁜 일을 사량(思量)하면 바로 악을 행하고, 모든 착한 일을 사량하면 곧 선행을 닦는 것이니, 이처럼 일체법이 모두 자성에 있고 자성은 항상 청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단지 구름에 덮여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서 해와 달과 별들을 볼 수 없다가, 홀연히 지혜의 바람을 만나 구름을 흩어 구름과 안개를 다 걷어버리면 삼라만상이 일시에 모두 나타난다. 세상 사람들의 자성이 청정한 것은 맑은 하늘과 같고, 지혜는 해와 달과 같다. 지혜는 항상 밝지만 밖으로 대상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을 만나 참된 도리를 열어 미망을 물리치면 안팎으로 환히 밝아(內外明徹) 자성 가운데 만법이 모두 나타나니, 스스로 성(性)에 있음을 청정한 진리의 몸(淸淨法身)이라 부른다.

--- 헤아리지 않으면 성(性)이 곧 공적(空寂)하지만, 헤아리면 곧 스스로 변화하니, 악한 것을 헤아리면 변화하여 지옥이 되고 선한 것을 헤아리면 변화하여 천당이 되며 독하고 해치는 것(毒害)은 변화하여 축생이 되고 자비로움은 변화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화하여 수승한 세계가 되고 우치(愚癡)는 변화하여 하열한 세계가 되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거늘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구나.” 5]

5]같은 책, 339上-中.

 

 

“선지식들이여, 나의 이 법문은 팔만사천의 지혜를 따른다.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 팔만사천의 진로(塵勞)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서 자성(自性)을 떠나지 않는다. 이 법을 깨달은 자는 곧 무념이니, 기억과 집착이 없어 거짓됨과 허망함(誑妄)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스스로 진여의 성품(眞如性)이다. 지혜로 관조(觀照)하여 일체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니 곧 성품을 보아(見性) 불도를 이룬다.” 6]

6]같은 책, 340上.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해가 능히 나타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반야의 지혜도 또한 크고 작음이 없으나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혹한 마음이 있어서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기에 아직 자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인데, 이 근기가 작은 사람이라도 돈교(頓敎)를 듣고 밖으로 닦는 것을 믿지 않고 오직 자기 마음에서 자기의 본성(本性)으로 하여금 항상 정견을 일으키게 하면 번뇌진로의 중생이 당장에 모두 깨닫게 되니, 마치 큰 바다가 모든 물 흐름을 받아들여 작은 물과 큰 물이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과 같다. 바로 견성하면 안팎에 머물지 아니하며 오고 감에 자유로워 집착하는 마음을 제거하여 통달하여 걸림 없이 되니, 마음으로 이런 행을 닦으면 곧 ?반야바라밀경?과 본래 차별이 없다.” 7]

7]같은 책, 340中.

 

 

이처럼 혜능의 자성은 불변의 본질이나 실체가 아니고, 마음 씀씀이여하에 따라 드러나기도 하고 가려지기도 하는, 분별 망상 이전의 지평이요 국면이다. 주소지를 점유한 존재론적 실재가 아니라, 그저 분별 망상 이전, 그 실재(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재)적 장(場)/국면/지평에 대한 명사형 지칭일 뿐이다.

 

마음의 지혜로운 작용에 의해 이 자성 국면을 돈오하는 것이 견성이다. 이것을 ‘본심/본성/진여본성을 몰록 본다’고 말한다. 따라서 ‘자성/자성심지․본심/본성/진여본성’은 사실상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들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돈오 견성을 말할 때는 ‘자성/자성심지’보다는 ‘본심/본성/진여본성’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혜능이 천명하는 돈오 견성이란, <지혜로운 마음 씀씀이(돈오)로 자성 지평/국면(自性心地)이 환하게 드러나면 본심/본성/진여본성을 알게 된다>는 것이라 하겠다.

 

혜능에 의하면, ‘본심/본성/진여본성’을 돈오하여 자성 국면이 구현되면 무념(無念)이라는 마음 경지가 펼쳐진다.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觀照)하여 안팎으로 환히 밝으면(內外明徹) 자신의 본래 마음을 알게 되니,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곧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성취하면 바로 반야삼매(般若三昧)이고, 반야삼매를 깨달으면 곧 무념(無念)이다.

무엇을 무념이라 하는가? 무념이라는 도리는 일체법을 보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자성(自性)을 청정하게 하여 (色․聲․香․味․觸․法의) 여섯 도적들로 하여금 (眼․耳․鼻․舌․身․意의) 여섯 문을 좇아 달려가게 하지만 대상세계(六塵) 속에서 그것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 오고 감에 자유로운 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이니, 이것을 무념행(無念行)이라 부른다.

--- 무념의 도리를 깨달은 이는 만법에 모두 통하고, 무념의 도리를 깨달은 이는 모든 부처의 경지를 보며, 무념의 돈법(頓法)을 깨달은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른다.” 8]

8]같은 책, 340下.

 

 

“선지식들이여, 나의 이 법문은 팔만사천의 지혜를 따른다.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 팔만사천의 진로(塵勞)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서 자성(自性)을 떠나지 않는다.

이 법을 깨달은 자는 곧 무념이니, 기억과 집착이 없어 거짓됨과 허망함(誑妄)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스스로 진여의 성품(眞如性)이다. 지혜로 관조(觀照)하여 일체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니 곧 성품을 보아(見性) 불도를 이룬다.” 9]

9]같은 책, 340上.

 

 

지혜로운 관조(觀照)로써 자성 국면이 드러날 때의 마음을 무념(無念)이라 한다. 이 무념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국면인가?

 

인간(중생)의 마음에는, 언제부터인지 그 기원을 확정할 수 없지만, ‘무지․탐욕․분노에 기반한 존재/세계 해석과 경험의 기준과 방식’이 마치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다. 대상(존재/세계)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선입 기준과 방식에 의해 경험 내용을 구성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불교에 의하면, 이 구성 과정은 존재/세계의 온전한 면모(실재)를 왜곡/변질/은폐시키는 것이며, 그것을 분별 혹은 분별망상이라 부른다.

‘무지․탐욕․분노에 기반한 존재/세계 해석의 기준과 방식’을 대상에 적용하여 진실과 분리시키고(分) 실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別)이 분별(分別; papanca 희론, 개념적 구성과 확산)이다. 중생들은 그러한 세계 경험 구성 과정(일체법을 봄)에서 그 구성의 기준 및 방식(분별 체계)에 달라붙어 노예적으로 종속되어 있다(집착).

 

분별 체계를 간직하고 그것과 한 몸으로 결합되어 있다가(기억과 집착), 지혜로 관조하여 그 분별 체계에서 빠져 나와 더 이상 진실(실재)을 비틀거나 다른 것으로 만드는 마음(誑妄, 분별망상)이 아닌 지혜로운 마음으로 보면(觀照), 그 때 자성 지평/국면이 밝아진다(항상 자성(自性)을 청정하게 하여).

이 때는 대상 세계의 경험이 없어지거나 인식 혹은 사유 작용이 무화(無化)되는 것이 아니다. 대상을 분별로써 그 실재를 비틀거나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면모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작용과 능력이 활발발해진다(대상세계(六塵) 속에서 그것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 오고 감에 자유롭다, 지혜로 관조(觀照)하여 일체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니 곧 성품을 보아(見性) 불도를 이룬다). 무념은 인식이나 사유 작용의 무화(無化)가 아니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 무념(無念)이고, 그러한 마음 작용이 무념행(無念行)이다.10]

10] ?대승기신론?과 원효 사상에서도 무념은 ‘존재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온전한 마음 자리’이자 ‘지혜로운 마음’으로 펼쳐지고 있다.(박태원, 「원효의 각(覺)사상 연구」, ?철학논총?34집, 새한철학회, 2003, 78-79쪽)

 

무념과 무념행을 가능케 하는 돈오 견성의 구체적 방법은 관(觀) 혹은 관조(觀照)라는 말에 담겨 있다.

 

 

“각자 스스로 마음을 관(觀)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돈오(頓悟)하게 하는 것이다.

---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觀照)하여 안팎으로 환히 밝으면(內外明徹) 자신의 본래 마음을 알게 되니, ----” 11]

11]같은 책, 340下.

 

 

선종 견성법의 키워드인 반조(返照) 혹은 회광반조(廻光返照)는 바로 혜능의 이 관조(觀照) 수행을 계승한 것이다. 관조 수행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가? 혜능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성을 보는 것이다(識自本心 是見本性). --- 인연에 미혹한 사람은 대상 위에 생각을 내고(有念) 다시 그 생각 위에 삿된 견해를 일으키니, 모든 대상세계에 대한 번뇌망상이 이로부터 생겨난다.” 12]

12]같은 책, 338下.

 

 

대상에 대한 경험이 실체 관념에 근거한 인식/경험/행위 체계 내에서 구성되어 가는 것이 분별망상이다. 본능처럼 업력으로 내면화되어 있는 분별적 경험 방식/체계는 존재의 온전한 면모(실재)를 변형/왜곡/은폐시킨다. 중생은 그 분별적 경험 방식/체계를 무자각하게 가동시키며 진실에서 일탈해 간다. 이렇게 대상을 향해 펼치는 분별적 경험 방식/체계는, 일단 수립한 분별적 구성물 위에 다시 적용되어 진실(실재) 왜곡을 가중적으로 확대시켜 간다. ‘인연에 미혹한 사람은 대상 위에 생각을 내고(有念) 다시 그 생각 위에 삿된 견해를 일으키니, 모든 대상세계에 대한 번뇌망상이 이로부터 생겨난다.’는 말은 이러한 정황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 말은 초기불교의 참선법인 정념(正念)과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정념이라는 ‘알아차려 지켜보기’는 존재에 각인 되어있는 ‘실체적 세계 구성의 인식과 행위 체계’에 더 이상 휘말려 들지 않음으로써, 생각 생각마다 실체 관념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고 관(觀)하게 해 준다. 그리하여 그 실체 관념의 허구성과 비본질성을 직접지로서 알 수 있게 하여, 무아 정견(正見)이 제공하는 무실체적 실재에 관한 지적(知的) 조망을 실제 생각 생각마다의 마음 씀씀이에서 직접지로서 구현케 해 준다.

 

혜능이 말하는 ‘유념(有念)으로 대상 세계에 대해 번뇌망상 일으키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명백하다. 대상을 향해 무자각하게 펼치던 분별적 인식․감수․행위의 체계/계열/범주에 더 이상 휘말려 들지 말고 대상과 만나야 한다. 이것이 ‘관(觀)하여 비추어 봄(觀照)’이다. 이 관(觀)하는 마음 국면을 혜능은, ‘헤아리지 않음’․‘대상을 여읨’․‘앞생각에서 붙들어 미혹하다가 뒷생각에서 깨달음’․‘생각생각 지혜로 관조하여 항상 법상(法相)을 여읨’ 등으로 말하고 있다.

 

 

“지혜는 항상 밝지만 밖으로 대상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을 만나 참된 도리를 열어 미망을 물리치면 안팎으로 환히 밝아(內外明徹) 자성 가운데 만법이 모두 나타나니, 스스로 성(性)에 있음을 청정한 진리의 몸(淸淨法身)이라 부른다.

--- 헤아리지 않으면 성(性)이 곧 공적(空寂)하지만, 헤아리면 곧 스스로 변화하니, 악한 것을 헤아리면 변화하여 지옥이 되고 선한 것을 헤아리면 변화하여 천당이 되며 독하고 해치는 것(毒害)은 변화하여 축생이 되고 자비로움은 변화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화하여 수승한 세계가 되고 우치(愚癡)는 변화하여 하열한 세계가 되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거늘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구나.” 14]

14]위의 책, 339上-中.

 

 

“대상에 달라붙으면 생멸이 일어나서 마치 물에 파랑이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바로 ‘이 언덕(此岸)’이요, 대상을 여의면 생멸이 없어서 마치 물이 계속 이어져 흘러가는 것과 같으니 곧 ‘저 언덕에 이른다(度彼岸)’고 말하니 따라서 바라밀이라 한다.

--- --- 선지식들이여, 번뇌가 바로 깨달음이니, 앞생각을 붙들어 미혹하면 곧 범부이고 뒷생각에 깨달으면 곧 부처이다.” 15]

15]같은 책, 340上.

 

 

“자성(自性)은 그릇됨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으니, 생각생각에 반야로 관조하여 항상 법상(法相)을 여의는데, 무엇을 세우겠는가? 자성을 단밖에 닦을지니, 세우면 점차가 있으니 세우지 않는 것이다.”16]

16]같은 책, 342中-下.

 

 

관조에 의해 ‘유념적(有念的) 분별망상 구성’은 ‘무념적(無念的) 진실대로 보기’로 전환된다.

“일체법을 보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자성(自性)을 청정하게 하여 (色․聲․香․味․觸․法의) 여섯 도적들로 하여금 (眼․耳․鼻․舌․身․意의) 여섯 문을 좇아 달려가게 하지만 대상세계(六塵) 속에서 그것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 오고 감에 자유롭고”,17]

“기억과 집착이 없어 거짓됨과 허망함(誑妄)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스스로 진여의 성품(眞如性)이니, 지혜로 관조(觀照)하여 일체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아 곧 성품을 보아(見性) 불도를 이루는”,18]

무념적 진실대로 보기가 구현되는 것이다.

 

17]같은 책, 340쪽 下.

18]같은 책, 340上.

 

 

3. 화두 참구란 무엇인가?

- 대혜의 견해를 중심으로 -

 

혜능의 돈오 견성 사상을 축으로 전개해 가던 선불교는 중국 송대(宋代)의 대혜 종고(大慧 宗杲)에 이르러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대혜는 ‘의심/의정(疑情)을 통한 화두 참구법’을 제창한다. 공안(公案)으로 택해진 선사들의 깨달음과 관련된 일화나 언구를 향해 의심/의정을 일으켜 오롯하게 챙겨 가다가 홀연 그 의심/의정이 타파되고 돈오 견성하게 된다는, 이른 바 화두(話頭)를 간(看)하는 간화선(看話禪)이 대두한 것이다. 과거의 견성 기연(機緣)들을 공안으로 삼아 그 공안에서 의심/의정을 일으키고, 그 의심/의정에 몰입하여 마침내 의심 덩어리 자체를 타파함으로써 견성케 하는, 돈오 견성의 방법론적 체계를 확립시킨 인물이 대혜이다.

 

필자는 앞서, 선종 발전의 어느 시점부터 선종 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돈오 견성의 구체적 방법론 확립에 대한 요구가 비등하였고, 그 요청에 대한 응답이 간화선 방향으로 모아졌으며, 이러한 추세를 계승․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인물이 대혜였을 것으로 추측한 바 있다. 그렇다면 대혜는 왜 화두 참구를 역설하게 된 것일까? 화두 참구의 필요성을 돈오 견성과의 상관성에 초점을 맞추어 확인해 보자.

 

 

반복되지만, 논의의 흐름을 위해 앞서 확인한 돈오 견성의 내용을 다시 요약해 보자.

혜능의 견성은 자신의 ‘본심/본성/진여본성을 돈오하는 것’이며, 이 돈오 견성의 토대가 되는 것이 ‘자성(自性)’이다. 이 자성은 ‘실체 관념을 내용으로 하는 무지에 의거한 분별망상적 세계 구성이 전개되기 이전의 국면/지평’을 지칭한다.

 

대상에 대한 경험이 실체 관념에 근거한 인식․감수․행위의 체계/문법 내에서 구성되어 가는 것이 분별망상이다. 본능처럼 업력으로 내면화되어 있는 분별적 경험 방식/문법/체계는 존재의 온전한 면모(실재)를 변형/왜곡/은폐시킨다. 중생은 그 분별적 경험 방식/문법/체계를 무자각하게 가동시키며 진실에서 일탈해간다. 이렇게 대상을 향해 펼치는 분별적 경험 방식/문법/체계는, 일단 수립한 분별적 구성물 위에 다시 적용되어 진실(실재) 왜곡을 가중적으로 확대시켜 간다. 중생들은 이러한 분별 체계에 달라붙어 노예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자성은 마음 씀씀이여하에 따라 드러나기도 하고 가려지기도 하는, 이 분별 망상 이전의 지평이요 국면인 바, 이 자성 국면을 돈오하는 것이 견성이다.

 

‘본심/본성/진여본성’을 돈오하여 자성 국면이 구현되면 무념(無念)이라는 마음 경지가 펼쳐진다. 분별 체계를 간직하고 그것과 한 몸으로 결합되어 있다가, 지혜로 관조하여 그 분별 체계에서 빠져 나와, 더 이상 진실(실재)을 비틀거나 다른 것으로 만드는 마음(誑妄, 분별망상)이 아닌 지혜로운 마음으로 보면(觀照), 그 때 자성 지평/국면이 밝아진다. 이 때는 대상 세계의 경험이나 인식 혹은 사유 작용이 무화(無化)되는 것이 아니다. 대상을 분별로써 그 실재를 비틀거나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면모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작용과 능력이 활발발해진다. 이처럼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 무념(無念)이고, 그러한 마음 작용이 무념행(無念行)이다.

 

무념과 무념행을 가능케 하는 돈오 견성의 구체적 방법은 관(觀) 혹은 관조(觀照)이며, 선종 견성법의 키워드인 반조(返照) 혹은 회광반조(廻光返照)는 바로 이 관조(觀照) 수행을 계승한 것이다. 대상을 향해 무자각하게 펼치던 분별적 인식․감수․행위 방식/문법/체계에 더 이상 휘말려 들지 않고 대상과 만나는 것 - 이것이 ‘관(觀)하여 비추어 봄(觀照)’이다. 관조에 의해 ‘유념적(有念的) 분별망상 구성’은 ‘무념적(無念的) 진실대로 보기’로 전환된다.

 

결국 돈오 견성의 핵심 내용과 구조는, ‘분별의 해체’과 ‘무념’ 그리고 ‘관조(반조)’의 세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대혜의 간화선이 혜능의 돈오 견성을 계승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화두 참구는 어디까지나 돈오 견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혜의 간화선은 돈오 견성의 핵심 내용과 구조에 상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대혜의 간화선 사상이 ‘분별의 해체․무념․관조(반조)’를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1) 간화선과 분별의 해체

 

대혜는 간화선을 가장 효과적인 분별 해체의 방법이라 역설한다. 특히 대혜가 서신을 주고받으며 간화선을 가르치고 있는 대상들은 주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 계층들인 관료들인데, 대혜는 그들에게 발달한 분별 지성의 덫을 지적하며 그 해법으로서 간화선을 제시하고 있다.

 

 

“요즘 사대부들이 흔히 성급하게 곧 선(禪)을 알고자 하여 경교(經敎) 위와 조사들의 언구 중에서 널리 헤아려 분명히 알아 말하고자 하니, 분명히 알려는 곳이 도리어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일임을 알지 못하는구려. 만약 ‘무자(無字)’ 화두만 뚫는다면 분명히 앎과 분명히 알지 못함을 사람에게 묻지 않아도 됩니다.” 19]

19]대혜, ?서장?, 答宗直閣, 신수대장경47, 933下.

 

 

“이근총명(利根聰明)의 장애가 되어 얻으려고 하는 마음이 앞서서 문득 그냥 놓아버렸기 때문에

--- --- 이 병은 비단 똑똑한 사대부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참구한 납자들도 역시 그러하니, 흔히들 물러나 힘 더는 곳(省力處)에 나아가서 공부를 지으려 하지 않고, 다만 총명과 의식․계교․사량으로써 밖을 향해 쫓아 구하며, 선지식이 총명과 의식․사량․계교하는 그 밖을 향하여 본분활구(草料)를 보이는 것을 듣고 대개 면전에서 허물을 놓쳐 버리고는 말하기를 <옛날부터 고덕(古德)들이 실다운 법을 사람에게 줌이 있다>라고 하니, 조주의 방하착(放下着)과 운문의 수미산과 같은 것들이 이것입니다.” 20]

20]같은 책, 答曾侍郞, 917中.

 

 

“다만 이 화두를 들어서 홀연히 기량이 다할 때에 문득 깨달을 것입니다. 제발 문자를 찾아 인증하고 어지러이 헤아려서 주해하는 것을 피하십시오. 비록 주해하기를 분명히 하며, 정확하게 설명할지라도 모두가 다 귀신 살림살이입니다.” 21]

21]같은 책, 答呂郞中, 930中.

 

 

“저번에 편지를 받아보니, 그 가운데 갖가지 취향들이 모두 내가 평소에 꾸짖은 병들이더이다. 이 같은 일들을 안다면 머리 뒤로 던져버리고, 근거(巴鼻)도 없는 곳과 잡거나 더듬을 수도 없는 곳과 재미도 없는 곳을 향하여 넌지시 공부를 지어 보십시오.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조주께서 <없다> 대답하신 것을,

평소에 총명한 사람은 언구 드는 것을 듣고는 곧 심의식(心意識)으로써 알아차리고 널리 헤아려서 인증하여 말로써 증명할 곳을 두고자 하니, 인증을 용납치 않고 널리 헤아림을 용납치 않으며 심의식으로써 이해함을 용납치 않음을 알지 못합니다. 비록 인증하고 널리 헤아리고 이해하더라도 모두 정식(情識)의 일이니, 생사의 언덕엔 반드시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 온 천하의 선사․장로라고 일컫는 자들이 알아서 밝힌 것은 그대의 편지에 써서 보내온 소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그 나머지 갖가지 삿된 알음알이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22]

22]같은 책, 答王敎授, 934中-下.

 

 

“능히 어리석고 둔함(昏鈍)을 아는 자는 반드시 어리석고 둔하지 않으니, 다시 어느 곳을 향하여 뛰어난 깨달음을 구하고자 합니까? 사대부들이 이 도를 배우되 곧 어리석고 둔함을 빌려서 들어가야 합니다. 만약 어리석고 둔함에 집착하여 스스로 말하길 <나는 감당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곧 어리석고 둔함의 마구니에 걸리게 됩니다. 대개 평소에 지견이 많아 깨달음을 증득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서 장애가 되기 때문에 자기의 바른 지견이 드러나지 못하지만, 이 장애도 또한 밖에서 온 것이 아니며 또한 다른 일이 아니라서 다만 이 능히 어리석고 둔할 줄 아는 주인공일 뿐입니다.

--- --- 단지 그저 <능히 이 어리석고 둔함을 아는 것은 필경에 ‘이 무엇인고?’>를 간(看)하십시오. 다만 이곳을 향하여 간(看)할지언정, 뛰어난 깨달음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간(看)하여 오고 간(看)하여 가다가 문득 크게 웃게 되리니, 이 밖에는 가히 말할 게 없습니다.” 23]

23]같은 책, 答李寶文, 935中-下.

 

 

“만약 일찍이 이성(理性) 위에서 재미를 얻거나, 경교(經敎) 가운데서 재미를 얻거나, 조사들 언구 위에서 재미를 얻거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곳에서 재미를 얻거나, 발을 들고 걸음을 움직이는 곳에서 재미를 얻거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뜻으로 상상하는 곳에서 재미를 얻으면, 도무지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만약 당장에 쉬고자 한다면 마땅히 앞의 재미 얻는 곳을 좇아서 그것들을 모조리 주관하지 말고, 도리어 잡거나 더듬을 수 없는 곳과 재미없는 곳으로 나아가 뜻을 붙여 간(看)해 보십시오.

만약 뜻을 붙이려 하나 붙이지 못하며 잡거나 더듬으려 하나 할 수 없고, 더욱이 잡을 근거가 없어서 이치의 길(理路)과 뜻의 길(義路)에 마음이 도무지 행하지 아니함이 마치 토목(土木)․와석(瓦石)과도 같음을 깨달을 때에는,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자신의 몸과 목숨을 놓아버리는 곳이니, 소홀히 하지 말고 또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총명 영리한 사람은 흔히 총명의 장애를 받는 까닭에 도안(道眼)이 열리지 아니하여 길을 접함에 막힘이 생겨납니다.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마음(心意識)의 끄달린 바가 되어 생사에 유랑하여 자재하지 못하니, 만약 생사에서 벗어나 쾌활한 자가 되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한 칼로 두 동강을 내어서 마음의 길 머리(心意識路頭)를 끊어야 비로소 조금 서로 응함이 있을 것입니다.” 24]

24]같은 책, 答王敎授, 934中.

 

 

중국 송대(宋代)는 ‘문(文)의 부활’이 돋보이는데, 이는 송대 선종의 문자선(文字禪)이나 의리선(義理禪) 경향과 맞물려 있다. 문벌귀족의 몰락과 과거제의 시행은 실력을 중시하는 풍조를 일으켰으며 그 결과 국가 전체에 문(文)을 중시하는 풍조가 성행했다. 송대의 선종은 세력 확대와 다양한 분파 발생, 새롭게 부흥하는 유가의 도전에 직면하여 자신의 정통성 확보와 수행 풍조의 쇄신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부응하여 등록(燈錄)과 어록(語錄)이 등장한다. 송대 선종은 개인들 간의 일대일 대면을 통한 전수로는 포괄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으므로, 다양한 분파와 방법들 가운데 어떤 표준이 제시되어야 했었다.

고칙공안의 발생은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공안집과 어록, 등록은 선의 가르침을 직접적 전수에서 간접적 전수로 확대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후대 선종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25]

25]명법, ?선종과 송대사대부의 예술정신?(씨아이알, 2009), 102쪽.

 

송대 선종에서 발생한 어록, 등록의 편찬, 송고(頌古)문학, 경전 읽기 등의 경향을 문자선(文字禪)이라 부른다. 문자선의 경향은 사대부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것이었는데, 송대 문자선의 출현은 ‘문의 부흥’이라는 시대적 풍조에 선종이 응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문자선의 경향은 당시 선종의 폐단을 극복하려는 내부의 노력과, 문을 숭상하던 사대부 계층의 풍조가 결합한 결실이다.26]

26]같은 책, 93-97쪽.

 

명법이 적절히 지적하듯이,27] 문자선의 경향을 단순히 선의 타락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언어적 분별에서 해방되려는 선 본령의 의중에서 일탈하여 오히려 선의 이름으로 언어 문자의 덫에 걸려드는 그늘이 문자선에 드리워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동시에 선종의 전통을 체계화, 표준화하여 선 탐구의 보편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문자선의 의도는 선종의 발전에 긍정적이었음도 분명하다. 특히 돈오 견성이라는 깨달음 국면에 언어가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태도는 선종 특유의 언어(공안의 언어)를 성립시키기도 하였다.28]

 

27]같은 책, 102-103쪽.

28]명법은 언어와 깨달음의 관계에 관한 선종 특유의 태도를 주목하여 이를 어록․등록의 문체 및 ?능가경?의 언어관과 관련하여 논하고 있다(같은 책, 104-145). 선종의 언어관을 이해하기 위한 유익한 논구이다. 논자 역시 선종의 언어관에 대해서는 지속적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필자의 관점은 별도의 글로써 제시할 예정이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글들에서 나타나듯이, 대혜는 송대 선종의 문자선 풍조에 드리운 그늘을 지적하며 비판하고 있다. 문자선은 의리선(義理禪)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문자선의 언어 신뢰는 언어로 표현된 선구(禪句)들의 의미를 언어적 분별 지성으로 해석하려는 태도와 쉽게 결합한다.

특히 선(禪)을, 해탈의 돈오 견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련된 문(文) 교양의 연장선에서 다분히 지적 관심의 대상으로 접근했던 사대부들은, 쉽게 의리선의 덫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세련된 문(文)을 갖추었다는 것은 언어 지성이 발달하였음을 의미한다. 언어적 개념을 통해 사물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능력의 발달은 흔히 분별 지성의 고도화를 수반한다. 만약 이 분별 지성의 노예가 되면 존재와 삶이 왜곡되어 고(苦)가 초래된다. 대혜는 문(文) 부활 시대의 주역들인 사대부들과 적극적으로 교제하며 그들과 더불어 선종의 본령과 생명력을 공유하려고 하였다. 문 부활 풍조에 부응하는 문자선 발달의 긍정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선 본령의 돈오 견성을 삶의 축으로 삼고 있는 대혜로서는, 문자선과 의리선에 드리운 분별 지성의 덫을 극복의 과제로 주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돈오 견성 국면은 분별의 마지막 커튼마저 제쳐질 때 드러난다. 그런데 돈오 견성으로 안내하는 선의 언어에 탐닉하는 사대부들은, 그 발달한 언어의 분별 지성 능력으로써 공안들의 의미를 나름대로의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고 풀어낸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한 공안 풀이일지라도, 공안 풀이의 주체는 여전히 분별의 알음알이에 걸려 있다. 언어 지성이 발달한 사대부들은, 그 총명에 수반하여 발달한 분별 지성으로 인해, 오히려 돈오 견성의 문턱에 더 두터운 분별의 장벽을 쌓고 있다.

 

그러나 언어 지성의 발달이 반드시 돈오 견성의 장애만은 아니다. 분별 지성의 한계는 분별 지성의 운용 능력이 발달할수록 분명해지는 법이다. 역설적으로 말해, 언어적 분별 지성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 분별 지성의 덫에서 근원적으로 해방될 가능성은 높아진다고도 할 수 있다. 언어의 덫에서 풀려나는 길은 언어의 포기가 아니라 언어의 극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넘어서는 데 있다. 그렇게 언어의 덫을 풀어버린 자는, 타인이 걸려 있는 언어의 덫을 풀어주기 위해 언어를 자유롭게 운용한다. 그는 언어의 극한에서 한 걸음 더 내 딛은 자이기에, 언어적 분별의 속성과 내용 및 그 한계를 속속들이 세밀하게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언어의 구제적(救濟的) 활용에 능숙하다. 불교가 택한 언어 분별의 극복은 이 노선에 놓여 있다.

 

사대부들과 적극적으로 교제하며 그들이 세속의 일상에서 돈오 견성 국면을 열고 그것을 다시 세속 일상에서 운용할 수 있게 안내하려는 대혜로서는, 사대부들의 발달한 언어 지성에서 빛과 그늘의 양면을 동시에 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대부 지성들이 돈오 견성 국면에 돌입하는데 가장 장애가 되고 있는 분별지(分別知)의 대목을 집중적으로 일깨워준다. 그들은 분별 언어지성이 발달한 만큼, 언어 분별의 덫에 잘 걸리는 동시에 언어 분별의 속성과 내용 및 한계를 절감하여 그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고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별 지성의 덫에서 해방되는 방법으로서 그들에게 제시한 것이 바로 간화선의 화두 참구이다.

 

그런데 분별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중생 알음알이의 보편적 특징이다. 대혜는 모든 유형, 모든 수준의 알음알이 분별지를 해체하여 돈오 견성으로 돌입시키는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간화선의 화두 참구라고 자신 있게 역설한다.

 

 

“평전화상이 말씀하시길 <신령스러운 광채가 어둡지 않아 만고에 훌륭한 법이니, 이 문에 들어서면 알음알이(知解)를 두지 말라>하시며, 또 고덕(牛頭融선사)이 말씀하시길 <이 일은 유심(有心)으로도 구할 수 없고 무심(無心)으로도 얻을 수가 없으며, 언어로써 설명할 수 없고, 적묵(寂黙)으로도 통하지 못한다>라고 하시니, 이것이야말로 진흙에 들어가고 물에 들어가는 노파심의 가장 훌륭한 말씀이거늘, 가끔 참선하는 사람이 다만 이렇게 생각으로만 지나쳐 버리고 <이 무슨 도리인가?>라고 자세히 간(看)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힘줄과 뼈가 있는 자라면 듦(擧着)을 듣고는 당장에 금강왕보검을 잡아 한칼에 잘라버립니다.

그리하여 네 가지 길(有心․無心․言語․寂黙)의 갈등이 절단되어 곧 생사의 길도 끊어지고, 범부니 성인이니 가르는 길도 또한 끊어지며, 계교(計較)하고 사량(思量)함도 또한 끊어지고, 득실시비 또한 끊어지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깨끗하고 적나라하여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없어집니다. 어찌 통쾌하지 않으며 어찌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29]

29]대혜, ?서장?, 答曾侍郞, 917下.

 

 

2) 간화선과 무념(無念)

 

혜능에 의하면,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觀照)하여 안팎으로 환히 밝으면(內外明徹) 자신의 본래 마음을 알게 되니,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곧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성취하면 바로 반야삼매(般若三昧)이고, 반야삼매를 깨달으면 곧 무념(無念)이다”.

돈오하여 자성 국면이 구현되면 무념이라는 마음 경지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념의 내용은, “일체법을 보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자성(自性)을 청정하게 하여 (色․聲․香․味․觸․法의) 여섯 도적들로 하여금 (眼․耳․鼻․舌․身․意의) 여섯 문을 좇아 달려가게 하지만 대상세계(六塵) 속에서 그것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 오고 감에 자유로운 것”30]이라 한다.

30]혜능, 돈황본 ?육조단경?, 신수대장경48, 340下.

 

무념은 사유의 중지가 아니다. 마음의 인지 작용이 멈춘 상태가 아니라, 분별적 인지가 극복된 지혜로운 인지 국면이다. 분별로써 왜곡하던 존재와 세계를 진실대로 보는 마음 국면을 무념이라 부른다. 따라서 분별지에 의해 펼쳐지던 번뇌망상이 무념에서는 고스란히 지혜로운 식별로 전환된다.

 ‘번뇌망상이 곧 깨달음이고, 분별식(識情)이 곧 진공묘지(眞空妙知)이며, 알음알이가 바로 해탈 도량이고 생사를 벗어난 곳’이다. 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 무념(無念)이고, 그러한 마음 작용이 무념행(無念行)이다. 발달한 분별 지성(사량분별과 총명)이 전혀 장애가 되지 않고 오히려 진실 구현의 도구가 되는 국면이 무념이요 무념행이다. 대혜는 이러한 무념의 국면이 간화선에서 구현된다고 말한다.

 

 

“의정(疑情)을 깨뜨리지 못하면 생사가 번갈아 더하지만, 의정을 만약 깨뜨리면 나고 죽는 마음(生死心)이 끊어집니다. 생사심이 끊어지면 불견(佛見)․법견(法見)이 없어지니, 불견․법견도 오히려 없는데 하물며 다시 중생의 번뇌견을 일으키겠습니까? 다만 모르고(미혹하고) 답답한 마음을 ‘간시궐’ 화두 위로 옮겨서 한번 내던짐에, 내던져 멈추면 생사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모르고(미혹하고) 답답한 마음과 사량분별하는 마음과 총명을 일으키는 마음이 자연히 행하지 않습니다. 행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 홀연히 내던져 멈춘 곳을 향하여 소식을 끊으면 평생토록 경쾌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소식이 끊어짐을 얻고서는, 불견과 법견과 중생견을 일으켜서 사량분별하며 총명을 지어 도리를 말하더라도 모두 서로 방해가 되지 않아, 일상의 행위(四威儀) 가운데 다만 항상 가르침을 거침없이 펼칩니다.

--- --- 맨 먼저 바깥 쪽(대상)을 향하여 별도로 의심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간시궐’ 위에서 의심을 깨뜨리면 일체 의심이 한꺼번에 깨뜨려집니다.” 31]

31]대혜, ?서장?, 答呂郞中, 930中-下.

 

“평상시에 계교하여 맞추어 보는 것도 식정(識情)이고, 생사를 쫓아서 옮겨 다니는 것도 역시 식정이며, 두려워 무서워하며 어쩔 줄 모름도 역시 식정이지만, 요즘 공부인들은 이 병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 속에만 있으면서 출몰하니

--- --- 만약 혹 한 때라도 놓아버릴 수 있어서 온갖 것을 사량․계교하지 않는다면 홀연히 본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 식정이 곧 진공묘지(眞空妙智)여서 다시 특별한 지혜를 얻을 것이 없습니다. 만약 특별하게 얻은 바가 있고 특별하게 증득한 바가 있다면 또한 도리어 옳지 않습니다.” 32]

32] 같은 책, 答曾侍郞, 918上.

 

“이미 일어난 곳을 알았다면 곧 이 알음알이(知解)가 바로 해탈 도량이며 바로 생사를 벗어난 곳입니다. 이미 해탈의 도량이며 생사를 벗어난 곳이면, 앎(知)과 이해(解) 바로 그 자체가 적멸이고, 앎과 이해함이 이미 적멸이면 알음알이라고 능히 아는 것도 적멸하지 않을 수 없으며, 보리․열반과 진여․불성도 적멸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다시 어떤 것이 장애할 수 있으며, 다시 어느 곳을 향하여 깨달아 들어감을 구하겠습니까??” 33] 33] 같은 책, 答富樞密, 921中.

 

“그런 까닭으로 <보살이 이 생각할 수 없는 곳에 머무르면 그 가운데서 끝없이 생각할 수 있다. 이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곳에 들게 되면 생각과 생각 아님이 모두 다 적멸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적멸한 곳에도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하니, 만약 적멸한 곳에 머물러 있다면 곧 법계량(法界量)에 관섭(管攝)받게 됩니다. 교리로는 그것을 법진번뇌(法塵煩惱)라고 하는데, 법계량을 없애고 갖가지 뛰어난 것을 일시에 다 없애 버리고서 ‘정전백수자’ ‘마삼근’ ‘간시궐’ ‘구자무불성’ ‘일구흡진서강수’ ‘’동산수상행‘ 등의 화두를 잘 간(看)하십시오. 홀연히 한 글귀 아래에 꿰뚫게 되면 비로소 그것을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廻向)이라 일컫습니다.” 34]

34]같은 책, 答張提刑, 928上.

 

 

3) 간화선과 관조(觀照, 返照)

 

혜능에 의하면, 무념과 무념행을 가능케 하는 돈오 견성의 구체적 방법은 관(觀) 혹은 관조(觀照)이다. 반조(返照, 廻光返照) 공부 역시 이 관조(觀照)와 상통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분별적 왜곡을 그치려면 무자각하게 펼치던 분별적 인식․감수․행위 체계/계열/범주에 더 이상 휘말려 들지 말고 대상과 만나야 한다. 내면에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던 분별적 인식․감수․행위 방식/문법에 더 이상 휘말려 들지 않고 대상과 만나는 것이 ‘관(觀)하여 비추어 봄(觀照)’이다. 관조에 의해 ‘유념적(有念的) 분별망상 구성’은 ‘무념적(無念的) 진실대로 보기’로 전환된다. 이 관(觀)하는 마음 국면을 혜능은, ‘헤아리지 않음’․‘대상을 여읨’․‘앞생각에서 붙들어 미혹하다가 뒷생각에서 깨달음’․‘생각생각 지혜로 관조하여 항상 법상(法相)을 여읨’ 등으로 말하고 있다. 대혜의 간화선 역시 이 관조를 계승하고 있다.

 

 

 

“능히 둔함을 아는 자는 도리어 둔합니까, 둔하지 않습니까?? 만약 회광반조(廻光返照)치 않고 단지 둔하다는 근기만을 지켜서 다시 번뇌를 낸다면, 곧 환망(幻妄) 위에 거듭 환망을 더함이고, 허공 꽃 위에 다시 허공 꽃을 보태는 것입니다.” 35]

35]같은 책, 答陳少卿, 922下.

 

“바로 화두를 들 때는 이 누구이며, 근기와 성품이 비루하고 용렬함을 아는 것은 또 누구이고, 들어갈 곳을 구하는 것은 또한 누구입니까?” 36]

36]같은 책, 答汪內翰, 929上.

 

“만약 화두를 들 때에는 능히 드는 것을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返思)! 도리어 왕언장입니까, 아닙니까? 여기에 이르러서는 그 사이에 터럭만큼도 용납하지 못하니, 만약 생각을 멈추고 생각의 기미를 그치면 그림자의 속임(惑)을 입게 됩니다.” 37]

37]같은 책, 答汪內翰, 929中.

 

 

 

4. 화두를 참구하면 왜 돈오 견성하게 되는가?

- 화두 의정(疑情)과 돈오 견성의 인과적 상관성 -

 

화두 참구와 돈오 견성의 인과 관계에 대한 해명은, ‘간화선의 화두 참구에서 역설하는 의심/의정(疑情)은 어떤 것이기에 돈오 견성의 통로가 될 수 있는가?’에 대답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먼저 ‘돈오 견성은 무엇인가?’를 혜능의 견해를 중심으로 확인하였고, 이어 대혜의 간화선 사상이 돈오 견성의 핵심 내용인 ‘분별의 해체․무념․관조(반조)’를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제 돈오 견성과 간화선 화두 참구의 상관성을 화두 의심/의정의 문제를 중심으로 생각해 본다.

 

간화선의 화두 참구는 화두 의심/의정에 그 초점이 놓여 있다. 화두 의심/의정에 관한 대혜의 전형적 설법을 들어보자.

 

 

“천가지 만가지 의심이 다만 이 하나의 의심이니, 화두 위에서 의심을 깨뜨리면 천가지 만가지 의심이 한꺼번에 부서집니다. 화두를 깨뜨리지 못하였다면 다시 화두 위에 나아가서 화두와 더불어 겨루어 가십시오. 만약 화두를 팽개쳐 버리고 도리어 다른 문자 위에 나아가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교(經敎)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고인의 공안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상의 일(塵勞) 속에서 의심을 일으킨다면, 모두가 삿된 마구니의 권속입니다.

우선 화두를 들어 일으키는 곳을 향하여 알려고(承當) 하지 말며, 또한 생각으로 헤아려 재지 말고, 다만 뜻을 붙여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가서 생각하면, 마음이 갈 곳이 없는 것이 마치 노련한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 문득 더 이상 나아갈 곳이 끊어졌음(倒斷)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또 마음이 만약 시끄럽거든 오직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화두만을 들지니, 부처의 말씀․조사의 말씀과 각지 노화상들의 말씀과 온갖 차별들을, 만일 이 무자 화두만 꿰뚫는다면 한꺼번에 꿰뚫어 통과하여서 다른 이에게 묻지 않게 됩니다. 만약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부처님 말씀은 또한 어떻고, 조사의 말씀은 또한 어떻고, 각지 노화상들의 말씀은 또한 어떻고 ---> 하며 묻는다면, 영원토록 깨달을 때가 없을 것입니다.” 38]

38] 같은 책, 答呂舍人, 930上.

 

의정(疑情)을 깨뜨리지 못하면 생사가 번갈아 더하지만, 의정을 만약 깨뜨리면 나고 죽는 마음(生死心)이 끊어집니다. 생사심이 끊어지면 불견(佛見)․법견(法見)이 없어지니, 불견․법견도 오히려 없는데 하물며 다시 중생의 번뇌견을 일으키겠습니까? 다만 모르고(미혹하고) 답답한 마음을 ‘간시궐’ 화두 위로 옮겨서 한번 내던짐에, 내던져 멈추면 생사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모르고(미혹하고) 답답한 마음과 사량분별하는 마음과 총명을 일으키는 마음이 자연히 행하지 않습니다.

행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 홀연히 내던져 멈춘 곳을 향하여 소식을 끊으면 평생토록 경쾌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소식이 끊어짐을 얻고서는, 불견과 법견과 중생견을 일으켜서 사량분별하며 총명을 지어 도리를 말하더라도 모두 서로 방해가 되지 않아, 일상의 행위(四威儀) 가운데 다만 항상 가르침을 거침없이 펼칩니다.

--- --- 맨 먼저 바깥 쪽(대상)을 향하여 별도로 의심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간시궐’ 위에서 의심을 깨뜨리면 일체 의심이 한꺼번에 깨뜨려집니다.” 39]

39]같은 책, 答呂郞中, 930中-下.

 

 

오직 화두 의심 하나만 깨뜨리면, 부처님과 조사, 선사들이 설한 법문을 스스로 꿰뚫어 알게 되고, 삶과 죽음에 동요하는 마음(生死心)이 없어지고, 온갖 망상을 지어내는 사량분별과 의리선(義理禪)의 덫에 걸리게 하는 총명 등을 자연히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에는 온갖 사량분별과 총명으로 짓는 뜻풀이들이 진실을 가리거나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 구현에 도구가 된다.

 

 

그런데 화두 의심 하나에만 매달리면 어떻게 이런 결과가 생겨날까? 돈오 견성하여 드러나는 무념의 국면이 어떻게 화두 의심을 통해 구현되는 것일까?

앞서 거론한 것처럼, 화두 의심과 돈오 견성의 인과적 상관성에 관해서는 종래 두 유형의 시선이 있다.

해답을 알고자 하는 마음 상태인 탐구적 의심이 결국 해답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시선이 그 하나이고, 화두 의심을 집중의 매개로 간주하여, 집중으로 인한 분별심의 억제가 돈오 견성으로 이어진다는 시선이 다른 하나이다.

 

첫 번째 관점은 ‘의심’이라는 말의 일상적 용법에 의거하는 것인데,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탐구적 의심이 반드시 해답의 성취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탐구적 의심의 존재나 그 강렬함은 문제 풀이를 위한 필요 조건일 뿐이다. 탐구적 의심이 해답으로 이어지는 과정에는 반드시 문제 풀이를 가능케 하는 특정한 방법론이 있어야 한다. 어떤 도구적 방법론을 채택하는가에 따라 정답을 얻기도 하고 오답에 빠지기도 한다.

 

대혜가 제시하는 화두 의심은, 문제 해결의 출발이자 해답의 필요 조건인 탐구적 의심이 아니다. 간화선의 화두 의심은 오히려 문제 풀이(돈오 견성)의 방법론에 해당한다. 실제 대혜의 법문 어디에도 화두 의심/의정을,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탐구적 의심이라 설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화두 의심과 돈오 견성의 인과 관계를 ‘문제를 풀려는 탐구적 의심’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두 번 째 관점은 화두 의심을, 일상적 분별심을 제어하여 깨달음으로 전환시키는 집중의 매개로 파악하는 것인데, 가장 일반화된 이해 방식이다. 실제로 화두 참구에 관한 대혜의 법문에는 화두 의심의 기능을 분별심 억제 두고 있음을 누누이 확인할 수 있다.

 

앞의 인용구 중, “만약 화두를 팽개쳐 버리고 도리어 다른 문자 위에 나아가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교(經敎)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고인의 공안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상의 일(塵勞) 속에서 의심을 일으킨다면, 모두가 삿된 마구니의 권속입니다. 우선 화두를 들어 일으키는 곳을 향하여 알려고(承當) 하지 말며, 또한 생각으로 헤아려 재지 말고, 다만 뜻을 붙여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가서 생각하면, 마음이 갈 곳이 없는 것이 마치 노련한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 문득 더 이상 나아갈 곳이 끊어졌음(倒斷)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든가, “다만 모르고(미혹하고) 답답한 마음을 ‘간시궐’ 화두 위로 옮겨서 한번 내던짐에, 내던져 멈추면 생사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모르고(미혹하고) 답답한 마음과 사량분별하는 마음과 총명을 일으키는 마음이 자연히 행하지 않습니다. 행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라는 말에도, 화두 의심에 몰두한다는 것이 일체 분별심을 막는 것에 그 핵심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화두 의심을 챙긴다는 것이 일상적 분별심의 제어에 초점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또 다른 대혜의 법문들을 확인해보자.

 

 

“받아보니 <평시에 잠시도 공부를 중지하지 않는다>고 하니, 공부가 익으면 화두를 쳐서 깨뜨리십시오. 이른 바 공부란 세간의 잡다한 일들을 헤아리는 마음을 ‘간시궐’ 화두 위에 되돌려 두어서 정식(情識)으로 하여금 행하지 못하게 함이 마치 흙․나무․인형과 같은 것입니다. 분명치 않아서 붙잡을만한 그 근거도 없음을 깨달을 때가 바로 좋은 소식이니,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며 또한 앞을 생각하고 뒤를 헤아려서 <어느 때 깨달을 수 있을까?>하지 마십시오. 만약 이러한 마음을 지닌다면 곧 삿된 길에 떨어집니다. 부처님께서 이르시길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헤아릴 바가 아니다>고 하시니, 헤아리면 곧 허물이 생겨납니다. 사량분별로 능히 헤아리지 못함을 아는 자는 누구입니까? 다만 그대 여거인이니, 이리저리 헤아리지 마십시오.” 40]

40]같은 책, 答呂舍人, 931中-下.

 

 

“평상시 연(緣)을 응하는 곳에서 차별경계를 겪음을 깨달을 때면, 다만 차별하는 곳에 나아가서 ‘구자무불성’ 화두를 들지언정 부숴 제거한다는 생각도 짓지 말며, 경계에 물들었다는 생각도 짓지 말며, 차별이라는 생각도 짓지 말며, 불법이라는 생각도 짓지 말며, 다만 오직 ‘구자무불성’ 화두만을 간(看)하십시오.

다만 오직 이 ‘무’자 화두만을 들지언정 또한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만약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두면, 경계 또한 차별이며, 불법 또한 차별이며, 경계에 물든 마음도 차별이며, ‘구자무불성’ 화두도 차별이며, 끊어지는 곳(間斷處)도 차별이며, 끊어짐이 없는 곳도 차별이며, 경계에 물든 마음이 몸과 마음을 미혹케 하고 어지럽혀 안락하지 못한 곳도 차별이며, 능히 허다한 차별을 아는 것도 차별이니, 만약 이 병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다만 오직 이 ‘무’자 화두만을 간(看)하십시오.” 41]

41]같은 책, 答宗直閣, 933中.

 

 

“정식(情識)이 아직 깨뜨려지지 않았으면 곧 마음의 불꽃이 번쩍거릴지니, 바로 이러한 때를 당하여 단지 오직 의심하는 화두를 드십시오.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묻되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니 조주 이르시되 <없다>고 하였으니, 다만 오직 화두 의심만 붙잡아 들어야지, 왼쪽으로 와도 옳지 않고 오른쪽으로 와도 옳지 않습니다. 또한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지니지 말며, 화두를 들어 일으키는 곳을 향하여 알려고 하지도 말며, 현묘한 알음알이를 짓지도 말며, ‘있다’ ‘없다’ 하는 헤아림도 짓지 말며, ‘아무 것도 없는 없음(眞無之無)’이라고 헤아리지도 말며, 일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지도 말며, 돌을 두드려 일어나는 불꽃이나 번갯불 번쩍 하는 것과 같이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짧은 순간을 향하여 깨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오직 마음 쓸 곳이 없어 마음이 갈 곳이 없어질 때,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기가 곧 좋은 곳이니, 노련한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감에 문득 나아갈 곳이 끊어짐을 보는 것입니다.” 42] 42]같은 책, 答張舍人, 941中.

 

 

간화선에서 화두 의심/의정을 챙기는 것을 ‘참구(參句)’라고도 한다. 그래서 화두 참선을 ‘공안(公案)을 참구한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공안의 언구를 챙긴다는 것 또한 사량분별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암두스님이 말씀하시길, <경계(物)를 물리침이 최고이고, 경계를 따라감이 최하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씀하시길 <대개 으뜸이 되는 종취는 반드시 언구 알기를 요구하니, 어떤 것이 언구인가? 온갖 것을 사량하지 않을 때를 정구(正句)라고 부르며 거정(居頂)이라고도 하고 득주(得住)라고도 하며 역력(歷歷), 성성(惺惺), 임마시(恁麽時)라고도 말한다. 이러한 때에 나아가 모든 시비가 한결같이 깨지니, ‘이러한’이라 하면 곧 이렇지 못함이다. 긍정하는 글귀도 없애고 부정하는 글귀도 없애버림이니, 마치 한 덩어리의 불과 같아서 닿기만 하면 곧 태워버린다. 무슨 가까이 할 곳이 있겠는가?>하셨습니다.

지금의 사대부들은 흔히 사량․계교로써 안식처를 삼기에, 이러한 말을 듣고는 곧 말하길 <공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하니, 마치 배가 뒤집어지기도 전에 먼저 스스로 물로 뛰어 들어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는 몹시 가련하고 불쌍한 것입니다.“ 43] 43] 같은 책, 答曾侍郞, 917中-下.

 

 

화두 의심의 핵심 기능이 분별심의 제어에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까닭에 화두 의심은 ‘의심에 집중함으로써 분별심을 막는 것’이라는 이해가 일반화된 것이다. 그리고 화두 의심이 분별심을 원천적으로 막아 준다는 점은 대혜 자신이 누누이 밝히고 있는 바이기도 하기에, 화두 의심과 돈오 견성의 상관 관계에서 ‘분별심의 제어’를 주목하는 견해는 타당하다.

 

그러나 화두 의심의 기능을 이처럼 분별심의 제어로 파악하는 견해는, ‘분별심의 제어’와 ‘깨달음(돈오 견성)’이 ‘화두 의심에 대한 집중의 산물’이라고 파악한다. ‘의심에 집중하면 다른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집중 상태가 강렬하고도 순일하게 지속되다 보면 마침내 분별심을 넘어 무분별의 경지에 이르러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화두 의심의 성격이나 역할을 ‘마음을 산란하게 흩어지지 않게 하는 몰입적 집중’으로 이해한다면, 몰입적 집중의 매개를 굳이 의심으로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기가 곤란해진다. ‘일념으로 집중하면 분별심이 제어되고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관점은 사실 수행과 관련하여 가장 널리 공유되고 있는 신념일 것이다. 마음을 산란시키지 않는 순일한 집중 상태는 곧 분별심의 억제 상태이고, 깨달음은 이러한 일념 집중의 소산이라는 생각은 불교의 참선을 이해하는 데에도 가장 널리 적용되고 있는 관점이다.

 

팔정도의 선정 공부(定學)가 일념적 마음 집중을 활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불교 참선의 내용과 구조를 이처럼 일념 집중에 초점을 두어 이해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불교 참선의 핵심 토대인 정념(正念 알아차려 지켜보기)은 전혀 새로운 마음 국면으로 이끄는 길에 관한 소식이다. 단순한 마음 집중의 불교적 버전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차원의 발상이다. 물론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에는 집중의 노력도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그 집중은 ‘알아차려 지켜봄’이라는 전혀 새로운 마음 국면의 ‘순일한 유지’를 위한 보조 역할이라고 보고 싶다. 44]

 

44]불교 참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더욱 상세한 논의가 요구되는 것이나, 여기서는 필자가 이미 논구한 바 있는 정념의 의미를 논거로 제시하는 정도에 그치고자 한다. 남방 상좌부의 위빠사나 및 북방 선종의 간화선 전통이 결국 팔정도 정념과 정정을 나름대로 계승한 것으로 볼진대, 이 불교 참선의 계보를 관통하는 핵심을 ‘대상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라든가 ‘일념적 집중’으로 파악하는 것은,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정념과 정정이 전하려는 핵심에서 그 초점이 일탈될 소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거창한 문제 제기인줄은 알지만, 나름대로 참선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진지하게 진행하며 파고들면 들수록 점점 분명해지는 문제 의식이다.

 

그저 어느 한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 참선의 핵심이라면, 불교 참선의 고유성이나 변별적 개성은 사실상 확보하기 어렵다. ‘대상을 향한 흐트러짐 없는 마음 집중’은 굳이 불교가 아니라도 수행과 관련된 모든 전통에서 공히 채택하고 있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의 기도 수행, 기 수련, 서도, 무술, 독송이나 독경 등도 모두, 그 대상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공히 ‘마음 집중’을 요구한다. 일념 집중이 되어야 각자 추구하는 목표와 최고의 경지가 성취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도 ‘마음 집중’으로 인한 돈오 견성이 가능한 것 아닌가?

 

굳이 화두 의심으로 마음을 집중하는 것만이 돈오 견성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할 수 없지 않은가? 화두 의심의 성격이나 역할을 분별심의 제어에 초점을 두어 파악하면서, 화두 의심/의정을 챙기는 것을 ‘의심/의정을 매개로 마음을 산란하게 흩어지지 않게 하는 몰입적 집중’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왜 하필 화두 의심/의정에 대한 집중이 돈오 견성으로 이어지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화두 참구와 돈오 견성의 인과적 관련성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간화선이 화두 의심을 돈오 견성의 방법으로 채택한 이유를 파악하려면, 화두 의심을 단지 ‘마음 집중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간화선에서는 돈오 견성의 방법론으로 왜 의심/의정에 몰두하는 화두 참구를 수립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간화선이 공안 화두로 인해 촉발시키려는 ‘의심/의정’의 성격에 놓여 있다. 이에 관한 종래의 견해는 두 가지였다. 의심의 일상 언어적 의미에 의거하여 ‘모르는 해답을 알고자 하는 탐구적 의심’으로 보는 것이 그 하나였고, 분별심 억제를 위한 마음 집중의 도구적 기능을 주목하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 그러나 두 가지 견해 모두 화두 의심과 돈오 견성의 인과적 상관성을 파악하는 데는 불충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화두에서 촉발되는 의심 그 자체의 성격이 지니는 다른 면모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단지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 상태도 아니고, 집중을 용이하게 하는 매개도 아니라면, 간화선은 화두 의심의 어떤 속성을 주목한 것일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화두 의심이 분별심을 막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 그 초점이 있다는 점이다. 대혜의 법문을 비롯한 간화선의 모든 화두 참구 법문에서 예외 없이 역설되는 것은 바로 ‘화두 의심으로 일체 분별심을 막는 것’ 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흔히 화두 의심을 ‘산란한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여 분별심을 제어하는 일념 집중의 매개’로 파악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왜 여타의 일념 집중과는 달리 화두 의심이 돈오 견성으로 이어지는가?’에 답하려면, 화두 의심을 단순히 마음 집중을 위한 수단 정도로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화두 의심에는 또 다른 어떤 속성이 있기에 돈오 견성을 위한 분별심의 해체로 이어지는가?

 

‘의심’이라는 말이 무엇을 탐구하는 맥락에서 사용될 때, 그 일상 언어적 의미는 분명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다. 탐구의 의지나 열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의심’은 해답을 향한 조준력이나 집중력을 높여간다. 화두 의심에 대한 종래의 두 가지 시선은 각각 조준력과 집중력에 착안한 것이다. 그런데 탐구적 의심에는 또 하나의 특징적 면모가 있다. ‘아직 알지 못함에서 오는 미확정 혹은 무규정의 마음 상태’가 그것이다. ‘아직 해답이 확정되지 않아 개념적 정의나 구획이 설정되지 아니한 무규정의 마음 상태’ 가 탐구적 의심이 지니는 또 하나의 특징적 면모이다.

 

모든 분별은 정의 내림이고, 개념의 구획 짓기이며, 존재의 자의적 칸 지르기이다. 대상에 대한 진위(眞僞) 판단․선악 판단․미추(美醜) 판단은, 인위적으로 설정한 기준과 방식으로 가르고(分) 타자로 고착(別)하는 경계의 확정이다. 이렇게 구획된 특정한 방을 선택하여 안주하는 순간, 그것은 지식과 확신과 신념이 되어 우리의 욕망과 감수와 행위를 지도한다. 분별심에의 종속성이 심화되어 간다.

 

따라서 인위적 분별로 인한 사실 왜곡이나 존재 오염이라는 일탈적 구성에서 해방되려면, 이 분별의 칸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그러나 이 세계를 향한 분별적 구성은 너무도 오랜 연원을 지닌 것이어서, 마치 유전자처럼 내면에 습관적 버릇으로 각인되어 거의 무의식적 본능처럼 작동한다. 지적 성찰과 반성적 의지만으로는 분별적 구성을 멈출 수가 없다. 분별은 이미 사유의 범주처럼 고착되어 있다. ‘극복해야 할 분별인 줄은 알면서도 분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초기불교 팔정도는 분별적 구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체계적이고도 종합적인 길이고, 그 가운데서도 정념을 핵심으로 하는 참선 공부(定學)는 분별심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새로운 차원의 길이다. 그리고 간화선은 그 참선의 정체성을 화두 참구법으로 계승한다.

 

화두 의심을 챙기는 것이 어떻게 분별심의 해체와 그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가? 의심의 집중력을 활용하여 분별적 사량을 제어하려는 것인가? 화두 참구의 의심 챙기기를 그러한 ‘집중으로 분별 제어’라는 발상으로 파악하는 것은 미흡하다. 간화선에서 분별심의 극복과 관련하여 주목한 것은 ‘의심이 지니는 무규정의 마음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의심의 무규정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오롯하게 챙겨간다는 것은 곧 분별적 정의나 경계 짓기를 거부하는 마음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간화선은, 화두에서 촉발되는 의심에서 ‘규정 짓지 않는 마음 상태’를 잡고 거기에 힘을 실어 선명하고 응축된 상태(疑團)로 확립시켜 챙겨감으로써, 그 어떤 분별적 규정의 범주 안으로도 휘말려 들지 않을 수 있었다. 대혜의 “우선 화두를 들어 일으키는 곳을 향하여 알려고(承當) 하지 말며, 또한 생각으로 헤아려 재지 말고, 다만 뜻을 붙여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가서 생각하면, 마음이 갈 곳이 없는 것이 마치 노련한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 문득 더 이상 나아갈 곳이 끊어졌음(倒斷)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45]라는 말이 바로 이 국면을 지시하고 있다.

45]같은 책, 答呂舍人, 930上.

 

화두 의심을 챙긴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알려고 애쓰는 마음’도 아니고, ‘의심하는 마음의 집중력을 간수해 가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규정 짓지 아니하는, 경계 미확정의 마음 상태’를 챙겨 가는 것이며, 그 결과 자연스럽게 모든 분별적 규정에 말려들지 않는 국면을 수립하여 유지해 가는 것이다.

 

공안에서 돈발(頓發)한 화두 의심의 ‘분별하지 않는 무규정의 마음 상태’를 순일하게 챙겨 가면, 대상에 대한 분별적 구성의 범주에 휘말리지 않는 마음 자리가 드러나 그 자리에 서게 된다. 이 지점은 정념의 ‘알아차림’으로 수립되는 ‘분별 범주/체계에 휘말려 들지 않는 마음 자리’와 같다.

정념은 신(身)․수(受)․심(心)․법(法)에 대한 ‘알아차림’으로써 신(身)․수(受)․심(心)․법(法)에 대한 분별적 구성 체계에 휘말려 들지 않는 국면을 수립하는 길을 설하고 있고, 간화선은 ‘의심의 무규정적 국면’을 챙겨 역시 분별적 구성 체계에 휘말려 들지 않는 마음 국면을 수립하게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념과 화두는 그 긴 시공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경이롭게도 통한다.

 

‘의심의 무규정적 국면’을 챙겨 분별적 구성 체계에 휘말려 들지 않는 마음 자리를 열고, 그 마음 자리를 오롯하게 간수해 가다보면, 그 자리를 지키는 힘이 충분해졌을 때, 문득 분별심에서 말끔히 해방된 지혜와 자비의 존재 국면(佛性/自性/自性淸淨心/本性)이 온전히 드러난다. 돈오하여 견성한 것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되 <개에게도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니 조주스님께서 이르시되 <없다(無)>라고 하심을 오직 간(看)하십시오. 청컨대 다만 부질없이 헤아리는 마음을 잡아서 ‘무(無)자’ 위에 돌이켜 두어 그 사량을 간(看)해 보십시오. 홀연히 헤아림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향하여 한 생각을 막아 깨뜨린다면 바로 이것이 삼세(三世)를 요달한 곳입니다.” 46]

46]같은 책, 答汪內翰, 926下.

 

 

이제 그에게는 이 돈오 견성의 자성(自性)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고 세계와 만나는 일이 기다린다(牧牛行/悟後萬行/頓悟인 漸修).

 

 

5. 맺는 말

 

화두 참구와 돈오 견성의 인과 관계에 대한 해명은, ‘간화선의 화두 참구에서 역설하는 의정(疑情)은 어떤 것이기에 돈오 견성의 통로가 될 수 있는가?’에 대답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먼저 화두 참구의 목적인 돈오 견성의 내용을, 혜능의 견해를 중심으로 확인하였다. 이어 대혜의 간화선 사상이 돈오 견성의 핵심 내용인 ‘분별의 해체․무념․관조(반조)’를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간화선에서는 돈오 견성의 방법론으로 왜 의심/의정에 몰두하는 화두 참구를 수립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간화선이 공안 화두로 인해 촉발시키려는 ‘의심/의정’의 성격에 놓여 있다. 이에 관한 종래의 견해는 두 가지 였다. 의심의 일상 언어적 의미에 의거하여 ‘모르는 해답을 알고자 하는 탐구적 의심’으로 보는 것이 그 하나였고, 분별심 억제를 위한 일념 집중의 도구적 기능을 주목하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 그러나 두 가지 견해 모두 화두 의심과 돈오 견성의 인과적 상관성을 파악하는 데는 불충분한 것이다.

 

대혜의 법문을 비롯한 간화선의 모든 화두 참구 법문에서 예외 없이 역설되는 것은 바로 ‘화두 의심으로 일체 분별심을 막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흔히 화두 의심을 ‘산란한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여 분별심을 제어하는 일념 집중의 매개’로 파악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왜 여타의 일념 집중 방식들과는 달리 화두 의심이 돈오 견성으로 이어지는가?’에 답하려면, 화두 의심을 단순히 마음 집중을 위한 수단 정도로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화두 의심에는 또 다른 어떤 속성이 있기에 돈오 견성을 위한 분별심의 해체로 이어지는가?

 

‘의심’이라는 말이 무엇을 탐구하는 맥락에서 사용될 때, 그 일상 언어적 의미는 분명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다. 탐구의 의지나 열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의심’은 해답을 향한 조준력이나 집중력을 높여간다. 화두 의심에 대한 종래의 두 가지 시선은 각각 조준력과 집중력에 착안한 것이다. 그런데 탐구적 의심에는 또 하나의 특징적 면모가 있다.

‘아직 알지 못함에서 오는 미확정 혹은 무규정의 마음 상태’가 그것이다. ‘아직 해답이 확정되지 않아 개념적 정의나 구획이 설정되지 아니한 무규정의 마음 상태’가 탐구적 의심이 지니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간화선에서 분별심의 극복과 관련하여 주목한 것은 ‘의심이 지니는 무규정의 마음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의심의 무규정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오롯하게 챙겨간다는 것은 곧 분별적 정의나 경계 짓기를 거부하는 마음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간화선은, 화두에서 촉발되는 의심에서 ‘규정 짓지 않는 마음 상태’를 잡고 거기에 힘을 실어 선명하고 응축된 상태(疑團)로 확립시켜 챙겨감으로써, 그 어떤 분별적 규정의 범주 안으로도 휘말려 들지 않을 수 있었다.

 

화두 의심을 챙긴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알려고 애쓰는 마음’도 아니고, ‘의심하는 마음의 집중력을 간수해 가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규정 짓지 아니하는, 경계 미확정의 마음 상태’를 챙겨 가는 것이며, 그 결과 자연스럽게 모든 분별적 규정에 말려들지 않는 국면을 수립하여 유지해 가는 것이다.

 

공안에서 돈발(頓發)한 화두 의심의 ‘분별하지 않는 무규정의 마음 상태’를 순일하게 챙겨 가면, 대상에 대한 분별적 구성의 범주에 휘말리지 않는 마음 자리가 드러나 그 자리에 서게 된다. 이 지점은 정념의 ‘알아차림’으로 수립되는 ‘분별 범주/체계에 휘말려 들지 않는 마음 자리’와 같다.

정념은 신(身)․수(受)․심(心)․법(法)에 대한 ‘알아차림’으로써 신(身)․수(受)․심(心)․법(法)에 대한 분별적 구성 체계에 휘말려 들지 않는 국면을 수립하는 길을 설하고 있고, 간화선은 ‘의심의 무규정적 국면’을 챙겨 역시 분별적 구성 체계에 휘말려 들지 않는 마음 국면을 수립하게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념과 화두는 그 긴 시공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경이롭게도 통한다.

 

‘의심의 무규정적 국면’을 챙겨 분별적 구성 체계에 휘말려 들지 않는 마음 자리를 열고, 그 마음 자리를 오롯하게 간수해 가다보면, 그 자리를 지키는 힘이 충분해졌을 때, 문득 분별심에서 말끔히 해방된 지혜와 자비의 존재 국면(佛性/自性/自性淸淨心/本性)이 온전히 드러난다. 돈오하여 견성한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이 돈오 견성의 자성(自性)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고 세계와 만나는 일이 기다린다(牧牛行/悟後萬行/頓悟인 漸修).

 

화두 참구에 몸을 싣는 이들은 많지만 낙오나 실패의 경우가 의외로 많다. 화두 의심을 챙기는 공부 길에서 쉴 곳을 마련하여, 가면 갈수록 쉬게 되는 경우가 생각만큼 많지 않다. 그 간과할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화두 의심의 성격이나 역할에 대한 정확한 조준의 결핍이 아닌가 생각한다. 화두 의심을, ‘의심’이라는 말의 일상적 의미로 이해하여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마음’으로 보거나 ‘분별심을 누르는 마음 집중의 매개’로 보아 그 국면에 초점을 두어 의심을 챙기다 보니, 투입하는 노력에 비해 돈오 견성과의 간극이 기대처럼 좁혀지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이에 비해 화두 의심의 ‘규정 짓지 아니하는, 경계 미확정의 마음 국면’ 에 초점을 맞추고 그 국면을 포착하여 순일하게 챙겨간 경우는 돈오 견성의 국면에 성공적으로 돌입하였던 것이라 생각한다.

 

화두 의심을, ‘규정 짓지 아니하는 마음 국면’을 겨냥한 것으로 볼 때는, 간화선 화두 참구 법문이 딛고 있는 합리적 기반 역시 더욱 선명해진다. 간화선 화두 참구법은, 불교 전통에서 지속시켜 온 인간 마음에 대한 심층적/합리적 탐구와 수행 경험에 의해 축적된 지혜를 토대로, 불교 참선의 핵심과 정통성을 창의적 방식으로 계승한 것이다. 그러기에 화두 의심 하나 오롯하게 잘 챙기면 일체 분별심을 녹일 수 있다는 화두 참구 법문은, 신비적 비술도 아니고 지성과 무관한 비약의 테크닉도 아니다.

얼핏 간이해 보이는 화두 참구 법문의 이면에 깔린 고도의 정교한 합리적 성찰을 간과해 버리면,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기치를, 지적(知的) 성찰이나 계발 없이도 부처가 될 수 있는 ’비약의 테크닉‘쯤으로 오인하여 불교 지성적 소양을 건너뛰고 덤벼들게 된다. 그럴 때 치선(痴禪)/광선(狂禪)의 작폐는 예고된 덫이다.

 

 

 

참고문헌

 

혜능, 돈황본, ?육조단경?, 신수대장경48.

대혜, ?서장?, 신수대장경47.

명법, ?선종과 송대사대부의 예술정신?(씨아이알, 2009)

박태원, ?정념과 화두?(UUP -울산대출판부-, 2005)

월암, ?간화정로?(현대북스, 2006)

이상호, ?중국선종 수행법에 나타난 의정에 대한 연구?(위덕대 불교학과 석사학위논문, 2004)

박태원, 「돈오의 대상 소고(小考)」(?철학논총? 제54집 제4권, 새한철학회, 2008)

월암, 「한국 간화선과 화두 참구의 계승」(?보조사상? 제27집, 보조사상연구원, 2007)

 

 

 

[Abstract]

 

Why does the Practice of Wha-Doo(話頭參究) lead to the Sudden Enlightenment and Seeing Nature (頓悟見性)?

 

Park, Tae-Won(Ulsan Univ.)

 

The school of Seon(禪宗), especially the Seon of seeing the Gong-An(公案), asserts that the doubt of the Wha-Doo(話頭 疑心/疑情) leads to the Sudden Enlightenment and Seeing Nature (頓悟見性). There are two views on the interrelation between the doubt of the Wha-Doo(話頭 疑心/疑情) and the Sudden Enlightenment and Seeing Nature (頓悟見性). one is that the mind which desires to know the unknown makes the acquiring the Sudden Enlightenment and Seeing Nature (頓悟見性). This view pays attention to the ordinary meaning of the word 'doubt'. The other is that the doubt of the Wha-Doo(話頭 疑心/疑情) is a kind of method for concentration which makes the mind not-divided. But these two views are not sufficient argument to explain the causal interrelation between the doubt of the Wha-Doo and the Sudden Enlightenment and Seeing Nature.

 

The doubt of the Wha-Doo has the aspect of non-prescription. We have to pay attention to this aspect of non-prescription to understand the causal interrelation between the doubt of the Wha-Doo and the Sudden Enlightenment and Seeing Nature. The seeker of the Sudden Enlightenment and Seeing Nature takes the aspect of non-prescription in Wha-Doo and concentrate on it. thus can acquire the Sudden Enlightenment and Seeing Nature.

 

 

투 고 일 : 2009년 8월 17일

심 사 일 : 2009년 9월 19일

게재결정일 : 2009년 10월 10일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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