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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哲學會 「哲學硏究」 불교의 마음 이해 -緣起적 관점과 性起적 관점을 중심으로- 장진영(원광대) [논문개요] 우리는 마음을 나타내는 수많은 용어를 가지고 있다. 이를 크게 분별심과 무분별심이 관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마음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언어적 분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어떤 것에 대한 분별이 일어날 때, 우리는 그 분별에 의하여 나타난 마음[분별심]을 인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분별을 벗어난 본래 마음[무분별심]도 함께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불교에서는 마음을 일체와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그것을 연기적 관점에서 이해하여 왔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서는 마음에 대한 분별적 접근이 주로 이루어지고, 그 분별심의 생성과 소멸을 연기의 법칙으로 설명하였다. 이때 분별심은 연기된 것으로 무상한 것이며, 찰나적인 것이다. 그러나 결코 분별심을 허망한 것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다. 한편 대승불교에서 용수는 연기의 본질을 ‘空’ 으로 파악하고 연기를 순차적 의존관계가 아닌 동시적 의존관계로 이해하였다. 용수는 공을 통하여 분별심의 허망성을 지적함으로써 분별 이전의 무분별심을 직접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무분별심은 언어적 분별(허망분별)을 떠난 자리이기 때문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不空’의 측면에서는 여러 假名을 통하여 심층의식이나 본성에 대한 접근이 시도될 수 있었다. 여기서 공사상이 분별의 허망성을 지적하는데 초점을 두었다면, 화엄사상은 분별의 진실성을 일체가 연기되어 있다는 일승연기의 입장에서 제시하고 있으며, 나아가 일체가 모두 본성이 그대로 현현한 性起임을 밝힘으로써 무분별과 분별(참 분별) 모두를 긍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화엄사상에서는 ‘분별심’ 혹은 ‘무분별심’ 자체를 밝히는 데 중점을 두기보다는 無住의 입장에서 분별과 무분별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마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연기적 관점[緣起門]에서는 분별의 세계에서 무분별의 세계로 들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기적 관점[性起門]에서는 무분별의 세계에서 분별의 세계마저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마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분별에 집착하는 마음병을 * 주제분야 : 불교철학 1. 들어가며: 마음의 온전한 이해를 위하여 일반적으로 우리는 일상의 어떠한 조건에 반응하여 일어나는 일련의 정신 현상을 통칭하여 ‘마음’이라고 부른다. 특히 인간의 인식 활동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 흔히 우리는 분별심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분별을 인식하는 순간, 그러한 분별이 나타나기 이전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일어난 이 분별이 어디에서 왔는가? 또 일어난 그 분별이 사라진 이후에 그 마음 흔히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 부른다. 불교의 마음에 대한 이해는 ‘一切唯心造’1)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은 것이다.’ 모든 것[一切]은 마음을 떠나서 성립할 수 없으며, 마음도 모든 것을 떠나서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마음은 모든 것들과 연기된 마음이다. ‘마음 이외의 어떤 것’(신체가 되었든, 자연환경이 되었든)과 분별하여 보는 상대의 마음이 아니다. 그러한 분별이 들기 이전의 마음 자체라 할 수 있다. 대승기신론에서 ‘一心’을 ‘心生滅門’과 ‘心眞如門’의 두 측면에서 이해하여 생멸하는 마음과 진여의 마음을 분별하고 있지만, 화엄교학에서는 이러한 분별심(즉 생멸심과 진여심)을 모두 초월한 마음을 다시 한 번 강 마음의 두 측면을 분별심과 무분별심으로 보되, 분별과 무분별의 관계에 대해서는 화엄교학의 연기적 측면[緣起門]과 성기적 측면[性起門]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연기문은 분별에서 무분별로, 성기문은 무분별에서 분별로 각각 연결시켜주는 역할은 한다. 본고에서는 먼저 불교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교리인 ‘연기설’을 중심으로 초기불교에서부터 용수의 ‘空’사상, 이후 화엄교학 특유의 ‘성기설’에 이르기까지 일별하여 불교의 마음 이해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화엄교학의 연기적 관점과 성기적 관점을 중심으로 마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1)『大方廣佛華嚴經』卷19 夜摩宮中偈讚品(T10, p.102a-b). 나아가 인간의 무의식을 ‘본능적 무의식’과 ‘본성적 무의식’으로 구분하고, 특히 ‘본성적 무의식’을 마음의 본질로 파악하고 있다. 김형효, 마음혁명(서울: 살림, 2007), 137-144쪽; 194-201쪽 참조. 한자경 교수도 마음을 ‘표층의 외적 의식’인 일상적인 마음과 ‘심층의 내적 의식(무의식)’인 본성적인 마음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일상적인 대상의식은 뇌나 신체와의 관련 속에 반응하여 작용하는 마음이라고 한다면, 그 이면에 뇌나 신체에 부수되지 않고 오히려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본성적인 마음이 있음을 주장한다. 이를 통해 표면적인 의식이 심층적인 무의식까지 확장되면, 표층의식에 나타난 모든 분별의 마음이 사라지고 무분별의 마음이 드러난다고 한다. 한자경,『명상의 철학적 기초』(서울: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8), 203-204쪽 참조. 2. 연기의 법칙과 마음의 이해 ‘緣起(P. paṭicca-smuppāda; S. pratītyasamutpāda)’는 한마디로 ‘~을 緣하여 일어난다.’는 뜻이다. 연기설은 중아함경에 “연기를 보면 법을 보는 것이고, 법을 보면 연기를 보는 것”3)이라고 하였듯 일찍부터 불교교리의 핵심으로 간주되었다. 연기의 기본 공식이라 할 만한 경구가 잡아함경에 소개되고 있다. 3)『中阿含經』卷7(T01, p.467a), “舍梨子相應品 “若見緣起便見法 若見法便見緣起” [1]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4) 雜阿含經卷10(T02, p.67a), “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此滅故彼滅…”; 雜阿含經卷13(T02, p.92c), “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 此無故彼無此滅故彼滅…” 모든 것은 自性(svābhāva)에서 직접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조건(緣)을 따라[의존하여] 일어난다.(여기서 A1, A2 등은 연기된 모든 현상으로서 法(dharma)을 말하는 것이다.) 연기의 법칙은 기본적으로 ‘마음’을 포함한 모든 것에 적용된다. ‘A1이 있으므로 A2가 있다’는 내용은 초기불교에서는 흔히 ‘A1→A2→…’의 순차적 의존관계로 이해되고 있다. 이후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동시적 의존관계로 보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연기에 대한 이해는 마음에 대한 이해에도 중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1) 마음에 대한 분별 초기경전에서 ‘마음’을 ‘心(citta)’와 ‘意(mano)’, ‘識(viññāṇa)’ 등으로 불렀으며, 이들은 서로 통용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초기불교에서는 마음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5蘊’으로 설명한다. 물질현상인 ‘色(rūpa)’과 정신현상인 ‘受(vedanā, 감수작용)’・‘想(saññā, 표상작용)’・ ‘行(saṅkhārā, 의지작용)’・‘識(viññāṇa, 인식작용)’ 등이 그것이다. 이는 有爲法에 대한 분류로 물질 현상뿐만 아니라 모든 정신 현상도 영구불변한 실체가 아닌 연기된 것임을 보여준다. 5온 뿐만 아니라 12處, 18界에 관한 설명도 마찬가지이다. 12처 가운데 마음에 해당하는 것은 ‘意處’와 의처의 인식의 대상이 되는 ‘法處’가 있고, 18계의 경우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 등의 6식과 ‘意根’ 등이 있다. 이러한 마음은 모두 연을 따라 일어난(연기된) 마음이다. 이처럼 마음의 연기적 이해는 마음의 無常性과 刹那性(순간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5) 초기불교에서 연기설은 마음의 무상성과 찰나성을 밝히는 데 주로 활용되었으며, 이를 통해 마음의 집착을 벗어나 열반을 증득케 하였다. 부파불교시대에 와서는 연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기도 하지만,6) 일반적으로 잡아함경의 연기 문구에 대하여 앞 구절은 ‘流轉門’, 뒷 구절은 ‘還滅門’으로 보아서 ‘연기된 것’의 발생 및 소멸을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5) 미산, 변화무쌍한 마음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가 (마음, 어떻게 움직이는가,서울: 운주사, 2009), 47-48쪽 참조. (서울: 민족사, 2004), 192-193쪽; 전재성, 初期佛敎의 緣起思想(서울: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999), 247쪽 이하 참조. [2] 순차적 의존관계: A1이 일어나면 A2가 일어나고, … , A12가 일어난다. 이는 A1이 일어나면 A2에서 A12까지 순차적으로 일어난다는 뜻이다.7) 7) 이에 대하여 조애너 메이시는 초기불교의 경전들을 검토한 결과, 상호의존적 관계를 동시생멸의 관계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한다. 즉 연기의 의미가 시간적 선후에 따라 ‘이것(원인)’이 조건이 되어 ‘저것(결과)’이 발생하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이 서로 조건이 되어(상호의존하여) 동시에 발생하고 동시에 소멸하는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Macy, Joanna R.(이중표 옮김),『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서울: 불교시대사), 2004, 84~121쪽. 제3장 참조. 이처럼 초기불교와 부파불교를 거치면서 시도된 마음에 대한 세밀한 분별은 모두 ‘연기된 것’[有爲法]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유부는 法(dharma)의 자성이 실재한다고 봄으로써 오히려 분별된 마음[心法, 心所法]의 이처럼 초기경전은 전반적으로 마음의 본래성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지 않으며, 아비달마에서도 마음을 유위와 무위를 포괄하는 일체 세계의 근원적이고 본질적 존재로까지 이해하지는 않고 있다.10) 물론 무분별심 10) 권오민,『 인도철학과 불교』, 224쪽 참조. 2) 무분별심에 대한 추구 (1) 空과 무분별심 유부는 연기의 법칙을 순차적 의존관계로 이해하고, 연기된 것의 實有[法有]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연기의 본질을 ‘空’으로 파악한 龍樹(Nāgārjuna, 150-250년경)의 중관사상에 의해서 크게 비판을 받게 된다. [3] 동시적 의존관계: A1이 일어나면 (동시에) A2[A3, …, A12]가 일어난다. 이것은 A1이 일어나면 A2[A3, … , A12]가 동시에 일어나는 관계를 말한다. 반대로 A1가 소멸하면 동시에 A2[A3, … , A12]도 소멸하는 것이다. 12) 유부의 법의 ‘實有’란 ‘自相으로서, 즉 고유한 본질로서 존재한다’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실유의 의미는 단순히 有와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즉 실유란 시간적, 공간적인 규정을 받고 있는 자연적인 사물에 대하여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틀이 되는 법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中村元(남수영 옮김), 용수의 중관사상(서울: 여래, 2010), 86-87쪽. 13) Kalupahana, D. J.(김종욱 옮김),『불교철학의 역사』(서울: 운주사, 2008), 149쪽. [4] 순차적 의존관계: 유 → 분별심 용수는 지적하고자 한 것은 이성적(분별적) 사유의 한계이다. 궁극적 실재는 결코 언어적 분별(vikalpa)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연기의 법칙에 대해서 용수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초기 경전의 연기 공식에서 이것과 저것에 한쌍의 개념을 대입하여 이해하려는 방식, 예를 들어 ‘이것’을 ‘원인’으로, "언어, 엄밀하게 어떤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늘 세계(논의영역)를 둘로 나눈다. A라고 하면 세계는 ‘A’와 ‘A 아닌 것’, 곧 ‘非A’로 양분된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기본적 성질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A’를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할 때는 반드시 배후에 ‘非A’를 상정하고 전제로 한다.17) 즉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A라고 할 때, 그 A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A 아닌 것’을 이면에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A는 ‘非A’의 부정(즉 ‘A아닌 것’을 A의 이면으로 은폐)에 의하여 비로소 A로 여기서 용수가 연기의 본질적 의미로 제시한 ‘공’은 인간의 이성적 사유에서 비롯된 모든 분별과 그 분별에 의해서 개념화된 모든 것의 비실체성[무자성]을 주장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부파불교에서 제시된 여러 가지 마음에 대한 분별이 사실은 무분별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공한 것이며, 허망 분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분별에 의해서 주장된 마음은 모두 ‘연기된 것’일 뿐이며, 실체가 아니다. 15) 梶山雄一(김성철 옮김), 『空입문』(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07), 64쪽 참조. 17) 梶山雄一(김성철 옮김),『空입문』, 97쪽. 용수의 이러한 논리는 반야경 계통에서 널리 통용된 것으로 금강경에도 ‘卽非’의 논리로 제시되고 있다. 직접 ‘空’을 설하진 않지만, 금강경 특유의 ‘A 卽非A, 是名A’18)의 논리가 그것이다. 18) 金剛般若波羅蜜經 卷1(T08, p.751b), “所言一切法者,即非一切法,是故名一切法” [5] A 卽非A, 是名A A가 (not A)와 즉하기 때문에 비로소 A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A’ 가 ‘not A’와 卽하다는 것은 ‘A’가 ‘not A’가 상호의존적 관계,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A’가 있으므로 ‘not A’가 있는 것이고, 여기서 용수가 ‘空’을 통하여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분별된 것의 부정, 즉 모든 것이 연기된 것이라는 점에서 허망분별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그 이면에 참 분별이 무엇인지를 얘기하자는 것이다. 오히려 ‘공’을 통해서 妄분별을 놓고, ‘무분별의 분별’, 분별에 얽매이지 않는 眞분별을 살리자는 것이다. 중론 「관사제품」의 유명한 게송에서 용수는 “연을 따라 일어난 것(연기된 것), 나는 그것을 ‘空’이라 부른다. 그것[공]은 가명(임시로 명명된 것)이며, 또한 그것[공]은 中道이다.”20)라고 하였다. ‘연기’는 곧 ‘공’인데, 有[가명]와 無[공]의 二邊을 다 떠났기에 ‘중도’ 라는 것이다.21) 이 점에서 볼 때, 모든 분별된 것은 곧 공이므로 부정되는 것이지만, 다시 공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명’으로 긍정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용수의 ‘공’사상을 통해서 한편에서는 일체의 유위법이 연기된 것이며, 공한 것이며, 자성이 없는 것임을 명확히 하여 한편에서는 부파 불교에서 주장되었던 마음23)에 대한 분별적 사유를 부정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마음에 대한 분별적 사유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분별 이전의 마음’을 직접 자각케 함으로써 참 분별[무분별의 분별]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19) 금강경의 ‘즉비의 논리’에서, ‘A라고 이름한다’[是名A]는 것은 ‘A이다’와는 다르다. 오히려 정반대로 ‘A라고 이름한다’는 것은 ‘A이다’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임시로 ‘A라고 부른다’는 뜻이다. 김호성, 禪觀의 대승적 연원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5), 46-49쪽 참조. 유부는 무위법을 독립된 실체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때 무위법은 연기가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다. 반면에『中論』에서는 유위법이 성립하지 않으면 무위법도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中村元(남수영옮김), 용수의중관사상, 171-172쪽. 용수는 이를 ‘二諦說’로 설명하고 있다. 중론 「관사제품」에서 “모든 부처는 두 가지 진리[二諦]에 의지하여 중생을 위한 법을 설한다. 하나는 세속의 진리[世俗諦, 言說諦]요, 둘은 승의의 진리[勝義諦, 第一義諦]한다. 여기서 世俗(saṃvṛti)의 진리와 勝義(paramārtha) 의 진리는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언어에 의한 분별을 통해서 ‘승의의 진리’를 설명하고 인식할 수밖에 없고, ‘세속의 진리’라는 것도 ‘승의의 진리’를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별심’과 ‘무분별심’의 관계도 그와 같다. 분별이전의 마음은 언설로써 설명할 수 없는 不可說의 자리이며, 언어도단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모든 마음에 대한 분별적 접근을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그 실상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24)中論 卷4 觀四諦品(T30, p.32c), “諸佛依二諦 為眾生說法 一以世俗諦 二第一義諦 若人不能知 分別於二諦 則於深佛法 不知真實義” 용수 이후 대승불교는 무분별심인 본성에 대한 탐구[무의식의 본성적 측면]에 집중하게 된다. 이는 부파불교까지 마음에 대한 분별적 이해에 관심을 보였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용수 이전에는 연기의 법 (2) 空과 不空 용수가 ‘공’사상을 천명한 이후 ‘無分別心’[분별 이전의 마음]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공’을 오해하여 ‘無’[비존재]의 세계를 진리적 실상으로 집착하게 된다면, 이는 다시 허무주의에 떨어지게 유식사상에서는 일상적인 ‘대상의식’인 제6식과 ‘자아의식’인 제7식, 그리고 그 이면에 모든 식의 근본이 되는 제8식인 알라야식(ālaya-vijñāṇa)이라는 심층의식을 중심으로 자아[신체]와 세계[器世間, 환경]가 어떻게 識으로부터 轉變(pariṇām)되는지를 탐구하였고, 여래장사상에서는 모든 중생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마음[본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며, 다만 번뇌에 의하여 가려져 있을 뿐이라고 보아 본성(불성)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여기서 여래장은 연기(생사유전)하는 모든 것의 근거[依持]로서 중생이 윤회하는 근거임과 동시에 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유식은 범부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인식의 대상’인 ‘境’을 부정하는 공사상을 일면 수용하면서도 ‘인식의 주체’인 ‘識’만은 부정할 수 없다고하여 ‘唯識無境’의 입장을 제시한다. 이는 연기의 본질을 ‘不空’인 ‘識’으로 의타기성을 중심으로 세계의 존재방식을 3가지로 제시한 것이 곧 ‘三性說’이다. 世親(Vasubandhu)은『唯識三十頌』에서 삼성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식전변으로서의) 분별이야말로 의타기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분별의 대상이 실재하는 것으로 집착할 때 이를 분별성(遍計所執性)이라 하고, 의타기적인 분별이 변계소집적인 실재에의 집착을 이탈한 곳에서 성립하는 것이 진실성(圓成實性)25)이다. 즉 의타기성(상호의존성)인 분별에 대하여 妄분별 하는 것을 분별성(변계소집성)이라 하며, 의타기성으로부터 妄분별이 제거된 상태를 진실성(원성실성)이라고 한다. 여기서 의타기성의 허망분별(분별성)은 식에 포함되어 있는 업과 번뇌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랜 수행을 거쳐 ‘轉依’가 이루어지면 진실성이 드러나게 되어 진여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識은 곧 ‘연기된 것[緣已生]’으로 찰나생멸하며 나타나는 것이다. 유식에서는 識도 역시 연기된 것이며, 온갖 마음의 작용도 모두 식의 전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26) 한편 유식에서도 마음에 대한 세밀한 분 25) 長尾雅人(김수아 옮김),『중관과 유식』(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05), 513쪽. 한편 여래장사상을 최초로 논한 여래장경에서는 “일체 중생은 여래장이다”29)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승만경에서는 여래장의 의미를 ‘空如來藏’과 ‘不空如來藏’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30) 열반경의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31)는 ‘悉有佛性’사상과 관련하여 여래장은 불성과 동의어로 취급되었으며,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이 불성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여래장과 불성을 주장하는 입장은 어디까지나 공사상이 밝힌 부정적인 측면[空]과 함께 긍정적인 측면[不空]을 포괄하여 공사상을 보다 심화시켰다. 하지만, ‘공’과 ‘불공’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본성(불성)의 두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여래장’이나 ‘불성’ 등은 제6식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므로, 이를 인간의 이성적 사유에 의한 제6식의 입장에서 이를 ‘有’로 보아 그 존재성을 주장한다면, 다시 분별에 떨어지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32) 여기서 주의할 것은 ‘연기=공’이라고 할 때, 이때의 ‘공’은 연기의 법칙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라면, ‘식’은 연기의 법칙에 의하여 일어난 것, 즉 연기된 것[緣已生]이란 점이다. 또한 여래장이나 불성의 경우는 공에 29)『大方等如來藏經』卷1(T16, p.457c), “一切眾生有如來藏” 이러한 견해는 ‘공’을 ‘공여래장’으로 보아 주로 허망한 측면으로 인식하고, ‘不空’을 ‘불공여래장’으로 이해하여 청전한 측면으로 인식하여 구별하게 된다. 한 예로 지론종의 혜원의 경우도 ‘공(공여래장)’을 ‘妄法’으로 불공(불공여래장)을 ‘眞法’으로 보고, 공을 다시 ‘망식(=7식)’과 연결되고, ‘불공’은 ‘진식’(=아리야식)으로 연결하고 있다. 慧遠, 大乘義章 卷14(T44, p.745b); 張文良, 澄觀華嚴思想の硏究(東京:山喜房佛書林, 2006), 83쪽 참조. 33) 松本史郞등의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라는 비판도 여래장을 基體로 오해한 것 3. 화엄의 마음 이해: 연기적 이해와 성기적 이해 緣起와 性起는 화엄교학의 중심 개념을 이루는 것이다. 연기는 초기불교 이후 불교 일반의 것이지만, 智儼(600-668)은 독자적인 一乘의 연기설인 ‘法界緣起說’을 주장한다. 법계연기는 당시까지 유행하였던 모든 연기설을 총합하여 제시된 것이었다.34) 성기는 화엄경의 「寶王如來性起品」에 기인한 것이다. 「성기품」은 여래장 사상의 연원이 되기도 하지만, 후대에 체계화된 화엄교학의 성기사상의 연원이 되는 것이다. 空에 의하여 드러난 분별 이전의 실상에 중점을 두어 不空의 측면을 더욱 심화시킨 것이 바로 여래장이다. 이는 모든 중생의 생사와 열반의 근거로 허망분별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는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이다. 33) 松本史郞등의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라는 비판도 여래장을 基體로 오해한 것이다. 松本史郞(혜원 역), 『연기와 공』(서울: 운주사, 1994) 참조. 1) 삼승연기와 일승연기 지엄에 와서 제창된 일승연기는 삼승연기를 비판하고 있지만, 연기에 대한 기본적인 취지는 같은 것이다. 義相(625-702)은 일승법계도에서 연기의 의미가 삼승과 일승에 모두 통함을 밝히고 있다.35) 연기를 통하여 무분별의 진실한 본성을 밝혀 들어간다는 점에서 삼승연기와 일승연기가 상통한다는 것이다. 다만 용수가 공사상에서 허망분별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별에 대한 부정적인 접근방식을 취하였다면, 화엄교학은 공사상에 의해 직시된 분별이전의 자리, 무분별의 자리에 서서 분별을 바라봄으로써 분별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때의 분별은 ‘무분별의 분별’이므로 하나하나가 부처의 자비의 발현이 되고 무량 중생을 건지는 무량 방편이 되어 살아나게 된다. 35)『 華嚴一乘法界圖』卷1(T45, p.712b), “佛舉緣起觀門 以會諸法 一切無分別 即成實性故 地論言 隨順觀世諦 即入第一義諦 是其事也 此義在三乘 亦通一乘” 이는 초기대승경전에서 밝힌 내용을 화엄교학으로 체계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앞서 밝힌 공의 논리와 금강경의 즉비의 논리에서 [‘A’는 ‘not A’의 부정(은폐)을 통하여 비로소 ‘A’라고 부른다] 앞의 A는 ‘妄분별’에 먼저 ‘A’ 라는 분별(妄)을 부정함으로써 무분별의 자리를 직시하게 한 것이고, 그 결과 나타난 뒤의 ‘A’는 무분별의 분별(眞)로 긍정되는 것이다. 이처럼 중관사상은 분별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면, 화엄교학은 무분별의 분별을 긍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A’와 ‘not A’가 나뉘기 이전의 자리에서 ‘A’를 직시함으로써 A를 긍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7] 중관: 분별(妄) →(공)→ 무분별 삼승연기에서 제기한 연의 집산은 결국 분별의 허망성[空]을 드러내기 위한 설정이라면, 화엄의 일승연기에서는 연의 집산에 구애되지 않는 무분별의 입장에서 분별의 진실성[性]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의상은『일승법계도』에서 일승의 연기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모든 연생법(연기된 것)은 하나의 법[一法]이라는 정해진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있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있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일어난 것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며, 일어나지 않은 것이 일어나는 것이다[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음에 어떠한 장애도없다]. 일어나지 않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곧 (모두) 주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도를 뜻하며, 중도의 뜻은 일어나는 것과 일어나지 않는 것에 모두 통한다. 그러므로 용수가 ‘연을 따라 일어난 법을 나는 공이라고 한다. 또한 그것은 가명이라고 한다. 또한 그 것은 중도의 뜻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중도가 곧 무분별의 뜻이니, 분별이 없다는 것은 법이 자성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이고, 연을 따라 다함이 없다는 것은 또한 주착하지 않기 때문이다."36) 36)『華嚴一乘法界圖』 卷1(T45, p.714c), “一切緣生法無有一法定有自性 無自性 故即不自在 不自在者即生不生不生生 不生生者即是不住義 不住義者即是中道義 中道義者 即通生不生 故龍樹云 因緣所生法 我說即是空 亦說是假名 復是中道義即其義也 中道者是無分別義 無分別法不守自性 故隨緣無盡亦是不住” 무분별의 입장에서 볼 때, 연기된 모든 것은 ‘자성을 고집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루어진다.’[不守自性隨緣性] 이때 무분별은 공이고 무자성이고 중도의 의미이다. 이는 나아가 無住(주착함이 없다), 無盡(다함이 없다)과 동의어로 이해되어 일승연기는 무주연기, 무진연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삼승의 연기는 성문・연각・보살의 입장에서 제시된 것으로 ‘因位’ 에서 ‘果位’로 향해가는 ‘향상문적인 연기’라면, 화엄의 일승연기는 증득한 부처의 입장인 ‘果位’에서 직접 제시된 ‘향하문적인 연기’라는 점에서 연기에 대한 이해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화엄경문답에서 삼승연기와 일승연기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문] 삼승연기와 일승연기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37)『華嚴經問答』卷2(T45, p.608c), “問 三乘緣起一乘緣起有何別耶 答 三乘緣起者 緣集有 緣散即無 一乘緣起即不爾 緣合不有 緣散不無” 초기불교 이후의 연기설에서 연기의 기본 의미는 ‘~연하여 일어난다.’ 는 의미이다. 앞서 동시적 의존관계에서 이해한다면, ‘A가 일어나면 B(C,D, E, …)도 일어나고, A가 사라지면 B(C, D, E, …)도 사라진다.’는 입장 하지만 일승연기에서는 ‘연이 모인다’, ‘연이 흩어진다’는 것도 또한 분별이므로 이 분별마저 떠난 자리[무분별의 입장]에서 연기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즉 연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따라 연기를 설하는 것이 아 화엄의 세계를 흔히 ‘바다’[海]에 비유하는데, 바다에는 증감이 없다. 삼승연기에서는 연이 모이면 그 현상이 있어지고, 연이 흩어지면 그 현상도 없어진다고 이해하지만, 일승연기에서는 연을 따라 있어지고 없어지는 것 하나 하나의 현상들이 모두 법계 전체와 연기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법계는 곧 하나하나의 법(현상)의 不空적 측면, 본성적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법성’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이는 모든 분별을 떠난 자리, 시간과 공간의 제약조차도 떠난 자리인 무분별의 입장에서 연기의 실상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으로 이는 무분별인 본성이 그대로 현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즉 바다가 부동하지만, 그 위에 모든 것을 비추는 것과 같고, 허공이 텅 비어 있지만, 모든 것을 통하게 하는 것과 같다.[성기적 측면] 바다가 모든 것을 다 비추지만 그 그림자를 더하지 않고, 허공이 모든 것을 통하게 하지만 그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과 같다..[연기적 측면] 이처럼 일승의 연기는 무분별의 본성적 측면인 ‘性起’의 입장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법이 연이 모여서 있을 수도 있고, 연이 흩어져서 없을 수도 있는가? 있음도 ‘있다’라고 정해진 것이 아니고 없음도 ‘없다’라고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이 정해지지 않은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본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므로 연을 따라 일어날 때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정해지지 않은 것도 아니므로 연을 따라 일어날 때 곧 있는 것[유]도 없는 것[무]도 아니다. 이와 같은 모든 뜻은 연을 따라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없고, 또한 그렇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비록 허망분별로 사량하여 미칠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멀리서 구할 것도 아니다. ‘허망분별을 돌이키는 것’[返情]만이 바로 이것[참]에 이르는 것이다.38) 38)『華嚴經問答』卷2(T45, p.609a), “問 若爾法亦可緣合有緣散無耶 答 亦得隨緣有無 雖言有無 而既言隨緣 故即可知 非有定有 非無定無 故即知非非定有無 以非有無 故隨緣時 非增減 以非非定有無故 隨緣時即非有無 如是諸義能隨緣言無不當 亦無所當 無自處故無是非處 一乘緣起之法非計情所及 雖非計情所及而不遠求 返情即是也” 용수는 모든 분별을 타파하여 연기의 본질을 공을 천명하였다면, 화엄의 일승연기에서는 오히려 연기의 본질을 성기로 보아 모든 분별을 무분별의 입장에서 직시하게 함으로써 각각의 분별을 모두 긍정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있다. 의상은 법계도에서 緣起分을 설명함에 있어서 “연기의 체는 곧 일승 다라니법이니, 하나가 곧 一切요, 일체가 곧 하나여서 무장애법계의 법이다.”39)라고 하여 화엄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연기의 실상을 일체가 곧 하나이고, 하나가 곧 일체라는 ‘相卽의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상즉의 논리’는 앞서 지적한 ‘즉비의 논리’에 다름 아니지만, 이를 모든 현상[法界,dharma-dhātu]으로 확대 적용함으로써 중중무진의 일승연기를 설명할 수 있게 한 것이다.40) 의상은 「법성게」의 구절에서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일체 가운데 하나가 있다.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다.”41)라고하여 相入과 相卽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39) 華嚴一乘法界圖 卷1(T45, p.712b), “言緣起體者 即是一乘陀羅尼法 一即一切 一切 即一無障礙法法界也” 41)『華嚴一乘法界圖』卷1(T45, p.711a),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9] 상입: A 가운데 B가 있고, B 가운데 A가 있다. 여기서 A는 ‘하나의 개체로서 A’가 아니라 ‘[A/B/C/……]를 온전히 다한 A’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B도 ‘하나의 개체로서 B’가 아니라 ‘[A/B/C/……]를 온전히 다한 B’인 것이다. 그러므로 ‘A中B, B中A’의 상입의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며, ‘A卽B, B卽A’의 상즉의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A中B’라고 할 때는 B가 A의 이면에 은폐되어 A를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즉 B가 없는 A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작용의 측면에서 ‘상입’이라 한다. 즉 A의 일어남에는 B의 작용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일승연기는 상즉와 상입의 논리에 의해서 법계 전체를 중중무진의 연기적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 마치 인드라망의 구슬처럼 하나의 구슬에 일체의 구슬이 비추는 것과 같이 그 하나 역시 연을 따라 성립된 것으로 하나가 단순한 하나가 아니며, 일체를 다한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에 일체가 상입・상즉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2) 연기와 성기: 마음 이해의 두 측면 화엄교학에서는 연기의 본질을 성기로 보고 있다. 연기문은 可設의 세계이고 성기문은 不可設의 세계, 즉 증득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성기를 떠나서 연기를 이해할 수 없고, 연기를 떠나서 성기를 드러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연기와 성기는 둘이 아니다. 즉 ‘분별 이전의 마음’과 ‘분별의 마음’이 결코 둘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분별의 마음[세속제]과 분별이전의 마음[승의제]를 구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분별의 허망성을 타파하고 분별이전의 진실성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한 방편일 뿐, 실상 마음이 둘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즉 일승의 입장(무분별, 무주)에서 본다면 분별과 무분별이 또한 둘이 아닌 것이다. 즉 분별을 놓고 보면 곧 무분별의 성기 세계에 합하게 되고, 다시 [무분별의 입장을 떠나지 않고] 분별을 일으키면 그것이 분별의 연기 세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엄의 수현기는 「성기품」을 해석하면서 성기의 의미를 “여래라는 것은 ‘如’가 진실한 도요, ‘來’가 정각을 이룸이며, ‘性’은 체요, ‘起’는 心地 에 나타나 있음을 따름이다.”42)라고 했다. 法藏(643-712)도 탐현기 에서 “참된 이치를 ‘如’라고 하고, ‘性’이라고 하며, 작용이 나타남을 ‘起’라고하고 ‘來’라고 한다. 즉 여래가 성기이다.”43)라고 하였다. 42) 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 卷4 寶王如來性起品(T35, p.79b-c), “如來者 如實道 來成正覺 性者體 起者現在心地耳” 43)『 華嚴經探玄記』卷16 寶王如來性起品(T35, p.405a), “真理名如名性 顯用名起名來 即如來為性起” 여기서 性은 체성의 의미로, 起는 작용의 의미로 보기도 하지만 여기서 體와 用도 분별에 의해 고정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性’은 분별을 떠난 무분별의 자리이며, 일어남도 일어나지 않음도 없는 본래 부동한 자리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起’도 분별을 떠난 자리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不起의 起’, 즉 무분별의 자리[일어남도 일어나지 않음도 없는 자리]에서 일어난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性외에 起가 없고, 起외에 性이 없는 것이다.44) 성기가 곧 여래라는 것은, 성기가 불과를 증득한 여래의 경지에 합일된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증득한 자와 증득된 경지가 따로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으로, 법계도에서도 도인의 한가운데 그 시작과 끝이 만나도록 하여 ‘法[法性]’과 그 끝인 ‘佛[舊來佛]’ 이 한 자리에 있음을 보이고 있다.45) 이는 正覺을 이룬 서가모니불이 三昧 중에서 광명으로 설법하는 형식을 갖춘 화엄경의 근본 취지를 형상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부처의 증득한 경지는 證分[성기]의 세계로 불가설이요, 언어도단이며, 무분별의 세계이다. 이 경지를 펼쳐 보인 것이 화엄경이 제시한 일승의 모습이다. 44) 정순일, 화엄성기사상사연구-중국화엄종을 중심으로- , 162쪽. 지엄의 공목장에서 “성기란 일승법계연기의 실제이다. 본래 究竟하여 修造를 떠난 것이다.”라고 하였다.46) 즉 성기는 본래 구경하여 모두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이며, 수행을 통하여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46) 華嚴經內章門等雜孔目章卷4(T45, p.580c), “性起者 明一乘法界 緣起之際 本來究竟 離於修造” 47) 華嚴經內章門等雜孔目章卷4(T45, p.580c), “起在大解大行 離分別菩提心中 名為起也 由是緣起性故 說為起 起即不起 不起者是性起” 화엄경문답에서 연기와 성기의 관계에 대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문] 성기와 연기 이 두 말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성기란 곧 법성이요, 곧 일어남이 없음을 본성으로 하므로, 곧 일어나지 않음[不起] 으로써 일어남[起]을 삼는다.48) 48)『華嚴經問答』卷2(T45, p.610b), “問 性起及緣起 此二言有何別耶 答 性起者 即自是言不從緣 言緣起者 此中入之近方便 謂法從緣而起 無自性故 即其法不起中令入解之 연기는 성기에 들어가는 방편으로 모든 법이 연을 따라서 일어나지만 실상은 그 법이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연기는 그 일어나지 않음을 깨쳐 본성에 들어가게 하는 것을 말한다. [분별 → 무분별] 성기는 일어나지 않음으로써 일어남을 삼는 것으로 이는 법의 본성 그대로가 일어남[분별이 나타남]을 말하는 것이다.[무분별→분별] 연기와 성기는 모두 ‘起’를 그 본질로 하고 있다. 연기는 연을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 일어난 것은 곧 자성이 없는 것이므로 일어난 바가 없는 것이다.[일어나되 일어남이 없는 것(起의 不起)] 반면에 성기는 일어남도 일어나지 않음도 없는 무분별의 입장에서 있지만, 그것이 일어 남을 그 본성으로 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한 것이다.[일어나지 않되 일어나지 않음이 없는 것(不起의 起)] [10] 연기 : 起의 不起[분별→무분별] 연기와 성기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성기는 부처의 경지로 오직 증득하여 아는 경지이지 언설로서 이를 수 없는 자리이다. 모든 분별을 떠나 있으므로 곧 어디에도 주착하지 않으며[無住], 일체가 주착하지 않으므로, 일체가 다함이 없는 것[無盡]이다. 연기는 언설로서 형용될 수 있는 경지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언설은 허망분별의 집착에 의한 언설이 아니다. 연기와 성기는 화엄의 입장에서 마음 이해의 두 가지 측면을 살핀 것이지만, 결국 하나의 마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마음을 ‘起’를 중심으로 연기와 성기의 두 측면에서 바라본 것일 뿐 두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4. 나아가며: 온전한 마음과 마음의 병 오늘날 마음이 과학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마음을 마음이외의 것과 분별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마음을 인식하고자 할 때 직면하는 어려움은 먼저 마음이 마음을 (스스로)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 가의 문제이다. 마음은 거울에 비친 몸처럼 그 모습을 직접 보거나 그 형상을 직접 만질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촛불이 자신을 비출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마음을 온전히 인식한다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인식과정)은 마음이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매우 광범위한 대상에 걸쳐 있다. 사실 마음은 ‘一切’를 (인식의) 대상으로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것도 마음을 떠나서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을 받는다[受]. 그 주어진 느낌에 따라 그 대상을 좋다 나쁘다, 높다 낮다는 등으로 상대화하고 개념화한다[想]. 그리고 그 느끼고 생각한 것에 대하여 취하고 버리는 등의 의지적 활동을 하기도 한다[行].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기억하고 판단하며, 나아가 반조하고 성찰하기도 한다[識]. 이렇듯 느낌, 생각, 의지, 인식, 그리고 성찰에 이르기까지 마음이 다양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알고 있다. 이처럼 마음은 다양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그 작용하는 마음을 우리는 스스로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인식되는(인식이 될 수 있는) 마음’, 즉 작용하는 마음, 생멸하는 마음과 이러한 시도는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마음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 주었다. 생멸하는 마음, 작용하는 마음과 함께 본성적인 마음을 염두에둔 설명방식이다. 이는 동서양의 사유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불교의 용수는 그가 천명한 空사상을 통하여 비로소 ‘분별이전의 자리(마음)’에 대한 탐구의 길이 크게 열었으며, 이는 일정한 범주로 마음을 분별하는 방식의 한계를 넘어서 분별이 있기 이전의 마음을 하지만 여전히 ‘인식되는 마음’은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지만, 인식하는 마음은 어떻게 인식이 가능할 것인가? 이 부분이 해결되어야만 마음에 대한 온전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3인칭의 불교는 일찍부터 인간이 가지는 인식의 한계를 간파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독자적인 방식을 발전시켜 왔고, 그 결과 마음을 온전히 관찰하고 증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불교 수행의 한 축을 이루는 관찰의 방식도 이성적 사유에 의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주로 본성적 직관에 의한 통찰을 말한다. 물론 대상에 대한 분별이 행해지고 있지만, 그 역시 직관에 의한 분별[무분별의 분별]이라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 개념적 분별에 의해서 실제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분별이전의 마음[무분별심]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불교 전반에 흐르는 마음 이해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자칫 분별의 세계에 떨어지고 마는 인간 사유의 한계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분별 너머의 무분별의 입장을 자 인간의 마음병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연기적 측면에서는 모든 분별 속에서도 분별이전의 본성을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막상 분별에 주착하여 분별이전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연기적 치유’가 필요한 것이다. 반면에 성기적 측면에서는 분별이전의 본성을 떠나지 아니하고 모든 분별이 적실하게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분별과 분별이전의 상태를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마음이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온전하다는 말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며, 마음이 병들지 않고 건강하다는 뜻이다. 참고문헌 T: 大正新修大藏經中阿含經(T01) 世親, 大乘百法明門論(T31) 김사업,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식전변을 중심으로- , 천태학연구 제3호, 서울:천태불교문화원, 2001. : Focusing on the Perspective of 'Dependent Arising' and 'Nature Arising'
치유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적용될 것이다.
* 주 제 어 : 마음, 분별심, 무분별심, 공, 화엄, 연기, 성기
서는 그것에 이름을 짓고 의미를 부여한다. 반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이름을 짓기도 한다. 인간이 어떤 것을 언어적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그것은 이성적 사유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적 분별에 의하여 인식의 대상이 되는 마음을 ‘分別心’이라 부르기로 하자.
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빛을 인식할 때, 일곱 빛깔 무지개로 가시광선의 범위가 한정되듯, 인간의 사유도 ‘분별 이전의 마음’에 미치고 보면 그 한계가 드러나고 만다. ‘분별 이전의 마음’은 언어적 분별을 떠나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 이성적 사유나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닐지 모른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관찰자와 관찰대상이라는 주객의) 분별을 떠난 차원에서 직관적, 명상적 체험을 통한 인식을 오랫동안 추구하여 온 것이다. 고금을 통하여 동서양의 여러 수행이나 명상 전통에서 밝혀 온 마음의 근원, 혹은 대상화되기 이전의 마음 그 자체를 우리는 또한 넓은 의미에서 ‘마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를 분별 이전의 마음, 언어적 분별을 초월한 마음이라는 의미에서 ‘無分別心’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는 부처가 깨달아 증득한 마음으로 범부의 언설로는 미치지 못하는 경지이다. 그 경지는 어떠한 주착됨도 없고[無住], 어떠한 (妄)분별도 있지 않는 자리로서 ‘무분별심’의 경지인 것이다.
조하고 있다. 그 마음은 ‘眞如’, ‘佛性’, ‘如來藏’, ‘一心’, ‘眞心’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러한 언어(적 분별)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마음이 분별을 떠나있는지 여부에 달려있을 뿐이다. 이를 ‘무분별심’이라 한 것이다. 이처럼 ‘분별심’과 ‘무분별심’은 불교의 마음을 이해하는 기본 구도가 되는 것이다.2)
2) 마음을 분별(의식)에서만이 아니라 무분별(무의식)의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의 하나로 김형효 교수는 ‘의식’과 ‘마음’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의식’은 唯識에서 말하는 제6식과 같이 분별의식으로 보는 반면에 ‘마음’은 인간의 무의식적 측면까지 확장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4)
*연기의 기본 공식: A1이 있으므로 A2가 있고, A1이 없으므로 A2가 없다.
6) 경전에 설해진 연기설의 정형구로 ‘12지 연기’가 기본적이다. 이에 대하여 권오민, 인도철학과 불교
[A1→A2→ … A12(→…)]
대표적인 것으로 說一切有部의 ‘業感緣起說’이 있는데, 이는 연기에 대한 시간적・선형적 이해를 체계화하여 ‘三世兩重因果’로 12연기를 설명하고 있다. 12지를 각기 ‘번뇌(惑)→業→괴로움의 현실[苦]’의 관계로 분별한 것이다. 이는 과거생의 번뇌인 ‘無明’과 업인 ‘行’에 의해 현재생의 ‘識,名色, 6處, 觸, 受’의 5果를 생성하고, 현재생의 번뇌인 ‘愛・取’와 업인 ‘有’에 의해 미래생의 ‘生’과 ‘老死’가 일어나는 방식의 설명이다. 현실의
괴로움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을 煩惱(무명, 애, 취) 혹은 번뇌에 대한 집착으로 본 것이다.8) 번뇌는 염오된 마음작용이며, 동시에 마음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원인이 번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에 대한 자세한 분별이 뒤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마음 작용은 모두 유위법에 해당하는 것으로 유부에서는 심법이외에도 그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마음[心相應行法혹은 心所法]을 자세히 분류하고 있다.9)
8) ‘번뇌(kleśa)’는 곧 心身의 상속을 어지럽히고 핍박하는 심리작용으로서 그 자체가 염오(染)된 것이면서 그것과 상응하는 온갖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더럽히는 것을 말한다. 권오민, 아비달마불교(서울: 민족사, 2003), 192-210쪽 참조.
9) 자세한 설명은 권오민,『인도철학과 불교』, 225-226쪽 참조.
三世實有를 주장하게 된다. 마음에 대한 (언어적・개념적) 분별도 연기된 것인데, 오히려 각 법의 實有마저 인정함으로써 분별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처럼 마음에 대한 분별적 접근이 마음의 다양한 모습을 이해하고 번뇌를 제거함에 있어서 매우 유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분별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에 대한 이해의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며, 특히 생멸하는 마음의 이면에 그 지속성과 통일성을 유지해주는 본성적 마음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11) 하지만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대승불교에 와서 진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1) 平川彰(이호근 옮김),『인도불교의 역사』상(서울: 민족사, 1989), 189-190쪽 참조.
용수는 모든 법은 동시에 생성되고 소멸되는 동시적 의존관계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유부처럼 法의 관계를 순차적 의존관계로 이해하고, 원인과 결과의 일방적 인과관계로 설명하려는 ‘법유’12)의 입장은 승인될 수 없다. 상호의존성을 의미하는 연기(성)는 곧 비실체성을 뜻하는 無自性과 상보적인 내용13)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서로 다른 법을 조건으로 하여 성립하는 것이며, 각각의 법이 실체적인 본성[自性]을 가져서는 안된다.14) ‘法有(三世實有)’를 주장했던 유부의 입장에서는 순차적 의존관계로 연기를 이해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며, 이는 ‘분별심’을 이해하기에 적절한 것이다. 하지만 ‘法空’을 주장했던 중관사상의 입장에서는 분별의 집착에서 벗어나 ‘공’인 무분별의 자리를 직시한다는 점에서 동시적 의존관계로 연기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14) 中村元(남수영 옮김), 『용수의 중관사상』, 53쪽.
동시적 의존관계: 공 → 무분별심
사물의 진실은 언어에 의해 온전히 표현되지 않으며, 언어나 개념이 그것과 일치하는 대상을 어떠한 실재로서 지니는 것도 아니다.15) 그러나 유부에서는 언어(개념)에 대응하는 법의 실유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용수의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저것’을 ‘결과’로 보아서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생긴다고 하는 사고방식에 대한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16) 이는 단지 이것과 저것의 순차적 의존관계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이것 아닌 모든 것) 사이의 언어적 한계성과 개념적 모순성을 함께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가지야마 유이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념 ‘A’는 항상 그 모순개념인 ‘not A’와 상호의존관계에서 비로소 A로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16) 김성철,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서울: 불교시대사, 2004) 참조.
*‘A’가 곧 ‘(not A)’이므로 이를 ‘A’라고 부른다.
‘not A’가 있으므로 A가 있는 것이다. ‘A’는 ‘not A’와 동시적 의존관계를 따라 일어난 것으로 자성이 없는 것이며, 空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A라고 부르는 것이다.19)
실은 ‘공’이라고 한 것도 또한 공한 것이다. 다만 중생을 인도하기 위하여 ‘가명’으로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가 곧 공일 때, 비로소 제법의 중도실상이 드러나게 된다.
반야경에서도 곳곳에서 眞如, 法性, 實際등22)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들 모두 ‘공’의 동의어로 가명된 것에 다름 아니다.
20)『中論』卷4 (T30, p.33b), “衆因緣生法 我說即是無 亦為是假名 亦是中道義”
21)『中論』卷4 (T30, p.33b), “眾因緣生法 我說即是空 何以故 眾緣具足和合而物生 是物屬眾因緣故無自性無自性故空 空亦復空 但為引導眾生故 以假名說 離有無二邊 故名為中道”
22)『大般若波羅蜜多經』卷38 (T05, p.210c), “真如法 無所有 不可得 法界 法性 法住 法定 實際 平等性 離生性法 無所有 不可得”
23) 부파불교의 법체계에서는 모두 생멸하는 법인 ‘有爲法’에 해당되는 것으로, 無爲法에 해당하는 마음은 별도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더 이상 끊어야 할 번뇌도, 더 이상 닦아야 할 행도 없는 완전한 해탈과 완전한 지혜를 얻게 되면, 이를 ‘열반’ 이라고 하는데, 이 열반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제 깨달음의 세계로서, 대승의 空과 마찬가지로 세간의 언어와 사유를 초월한 不可說의 세계이다. 권오민, 아비 달마불교, 269쪽.
만약 사람이 이제를 분별하여 알지 못한다면 깊은 불법의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24)라고 하였다.
칙을 순차적 의존관계로 이해하여 생멸하는 마음을 세밀히 분별함으로써 마음의 무상성과 찰나성을 밝히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용수는 연기의 본질을 ‘空’으로 파악함으로써 분별의 허망성[무자성성]에 초점을 두고
이를 논파함으로써 동시에 ‘무분별심’에 직접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되어 공의 본의에서 크게 벗어나게 된다. 이에 ‘공’의 이면인 ‘不空’의 측면에 대한 논의가 뒤따르게 되었고, 이는 唯識思想과 如來藏思想으로 발전되어 인간의 심층과 본성에 대한 탐구로 진행된다.
파악한 것으로서 이는 공성의 이면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용수가 공을 통해서 허망 분별을 모두 제거하였다면, 유식에서는 허망 분별(asaṅ-kalpa)하는 ‘분별 그 자체[識]’는 ‘依他起性’으로서 남는다고 본 것이
다. 여기서 ‘의타기’는 ‘연기’와 같은 뜻이다.
별을 시도하는데, 심법으로써 마음의 층위를 나누어 8식설을 주장하고, 이외에 다수의 심소법을 제시하고 있다.27) 하지만 어디까지나 유식은 연기의 본질을 식으로 파악하고 이로부터 만법이 전변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심층의식인 알랴야식의 전변에 의해서 (그 相分으로서) 종자와 자아[신체]와 세계[환경]가 전개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초기불교나 부파 불교에서 색법과 심법 등을 대등하게 분별한 것과 달리 마음에 대한 이해를 만법으로 확대하여 ‘萬法唯識’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28)
26) 轉變은 연기된 것[緣已生]인 식이 생하는 법칙을 말하는 것이며, 알라야식과 7식도 서로를 조건으로 하여 생기한 연이생이다. 식들의 배후에 위와 같은 식들을 생하게하는 어떻게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김사업, 唯識說에서의 緣起해석-識轉變을 중심으로- (『천태학연구』 제3호, 천태불교문화원, 2001)
27) 일체의 법을 5위 100법으로 정리할 수 있다.『大乘百法明門論』卷1(T31, p.855b-c) 참조.
28) 한자경 교수는 마음의 두 층위를 구분하여 유식학파의 마음에 대한 분류에서 전5식과 제6식, 그리고 제7식의 이른 바 7전식은 표층의 마음으로 보고, 제8식은 심층의 마음으로 보았다. 여기서 제6식은 식의 내용을 자신 아닌 대상의 내용으로 객관화하여 의식하는 대상의식이고, 제7말나식은 그렇게 의식하는 자를 자아로 여기는 자기의식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심층의 마음인 제8알라야식의 식전변에 의해서 나타난 행상(견분)과 소연(상분)에 해당되는 것으로 우리의 자아[신체]와 세계[기세간]도 모두 식전변의 결과이며, 식을 벗어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자경, 마음 활동의 두 층위 (마음, 어떻게 움직이는가, 서울: 운주사, 2009), 92-126쪽 참조.
여래장이나 불성은 바로 공에 의해 드러난 분별이전의 자리이며, 언어도단인 자리이며, 중생의 미혹의 세계가 아니라 부처의 깨침에 의하여 비로소 증득되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불성이든, 여래장이든 모두 ‘공’의 가명에 불과한 것이다.
의해서 드러나 직시된 분별 이전의 실상을 지칭하는 일종의 假名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식이나 여래장(불성)을 모든 것의 배후에서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실체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33) 마음의 층위를 나누어서 분별심과 무분별심을 표층과 심층으로 이해하는 것도 실제 우리의 마음에 표층과 심층이 구분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의 두 가지 측면을 설명하기 위하여 假說된 분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30)『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卷1(T12, p.221c), “世尊 空如來藏 若離若脫若異 一切煩惱藏 世尊 不空如來藏 過於恒沙 不離不脫 不異不思議佛法”
31)『大般涅槃經』卷7 如來性品(T12, p.407b), “一切眾生悉有佛性”
32) 平川彰(이호근 옮김), 인도불교의 역사 하(서울: 민족사, 1991), 150쪽 참조.
이다. 松本史郞(혜원 역), 『연기와 공』(서울: 운주사, 1994) 참조.
하지만 이 자리는 인간의 사량에 의해 분별될 수 없는 불가설의 자리로서 모든 중생이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이나, 중생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허망분별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생은 오직 본성(여래장, 불성)에 대한 믿음에 의지하여 수행함으로써 집착을 여의고 본성을 체득해 갈 수 있다. 하지만 중생에게 주어진 ‘분별 이전’에 자리, 즉 본성(불성・여래장)에 대한 믿음은 한편에서는 또 다른 분별과 집착에 대한 위험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에 화엄교학에서는 이와 같은 삼승의 연기를 비판하고 일승의 연기를 주장한다.
34) 정순일, 화엄성기사상사연구-중국화엄종을 중심으로- (원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101쪽 참조.
해당한 것이고, 뒤의 A는 ‘眞분별’에 해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A(분별)가허망분별임을지적함(이를통해무분별을직시하게함).
[8] 화엄: 무분별[=공] ⇄ 분별(眞)
→ A(분별)가 무분별의 분별(=眞분별)임을 드러냄.
그러므로 일승연기에서는 모든 법이 정해진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도 모든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한 법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 한 법 이외에 나머지 모든 법이 연기된 것임을 전제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답] 삼승연기는 연이 모이면 있어지고, (연이) 흩어지면 없어진다. 일승연기는 그렇지 않다. 연이 모인다고 있어지는 것도 아니고, 연이 흩어진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37)
이다. 여기서 A와 B(또는 C, D, E, …)는 서로 바뀌어도 상관없다. 즉 A와 B(또는 C, D, E, …)는 각각이 서로의 조건이 되어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일반적인 삼승연기에서는 ‘연이 모이면 다른 연들도 있어지는 것이고, 연이 흩어지면 다른 연들도 없어지는 것’이다.
니다. 연이 모인다는 분별도, 연이 흩어진다는 분별도 모두 떠난 무분별의 자리에서 일어남을 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일승의 연기는 곧 성기의 관점을 그 배경으로 한다.
삼승연기가 하나의 강줄기와 같다면, 일승연기는 바다와 같은 것이다.
삼승연기가 한 법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을 연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논한다면, 일승연기는 본래 성품 자리는 바다와 같이 예로부터 不動하여 한 법도 생멸함이 없는 가운데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이다. 화엄은 한 법이 연을 따라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연기의 의미를 法界전체로 확대하여 하나의 법이 연기함은 곧 重重無盡으로 전개된 무량한 법계 전체가 연기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답] 또한 그러하니, 연을 따라[隨緣] ‘있다’[有]고도 ‘없다’[無]고도 할 수 있다. 비록 ‘있다’ ‘없다’ 말하지만 이미 연을 따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그렇다’라고 함이 없기 때문에 곧 ‘자기라고 할 곳’[自處]도 없다.
자기라고 할 곳이 없으므로 ‘옳다 그르다 할 곳’[是非處]도 없다. 옳다 그르다 할 곳이 없으므로 일승의 연기법은 (이와 같은) 허망분별[妄情]에 의한 사량으로 미칠 바가 아니다.
無所當故即無自處
40) 김호성, 禪觀의 大乘的淵源(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164-170쪽 참조.
상즉: A가 곧 B이고, B는 곧 A이다.
*A= [A/B/C/……]를 다한 A
*B= [A/B/C/……]를 다한 B
‘A卽B’의 경우는 A가 [A/B/C/……]를 다한 A이고, B도 [A/B/C/……]를 다한 B라는 점에서 A가 B와 그 체성에 있어서 동일하기 때문에 이를 ‘상즉’ 이라 한다.
45)『華嚴一乘法界圖』卷1(T45, p.711a), “法性圓融無二相… … 舊來不動名爲佛”
그럼에도 ‘起[일어난다]’라고 한 것은 ‘분별을 떠나 보리심 가운데 일어난 것’ 이다. 이는 무분별의 보리심에서 일어난 분별이요, 연을 따라 일어나는 연기적인 측면의 일어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본성이 그대로 일어난 것이지만, 연을 따라 일어나는 성질에 비추어 ‘일어난다[起]’고 하였을 뿐이다. ‘일어남[起]’이라고 하지만 곧 일어나지 않음[不起]이다. 본래 부동하여 일어나지 않음[不起]을 곧 성기라 한 것이다.47)
[답] 성기란 곧 스스로 그러한 것[自是]이니, 연을 따르지 않음을 말한다.
연기란 이 가운데 들어가는 가까운 방편이니, 이를테면 법이 연을 따라서 일어나지만[起] 자성이 없으므로, 곧 그 법이 일어나지 않는 [不起] 가운데 그것을 이해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其性起者 即其法性 即無起以為性故 即其以不起為起”
성기 : 不起의 起[무분별→분별]
중생의 무량한 근기에 맞게 일어나는 무량한 법문과 같은 것이다.
연기적 측면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 분별에도 집착하지 않도록 하여 무분별심으로 돌아가게 하자는 것이며, 성기적 측면에서는 예로부터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조금도 분별하지 않으나 곧 그대로 온갖 만상을 나
타내지 않음이 없는 것으로 마음이 또한 무분별의 입장에 주착되지 않고 모든 분별을 적실하게 나타내도록 하자는 것이다.
‘인식하는 마음’, 즉 작용하고 생멸하는 마음을 지켜보는 마음의 구분이 가능하다면, 비로소 마음이 마음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동양적 사유에서 본성에 대한 관심은 인간과 자연(세계)를 총괄하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관심과 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은 늘 변화하는 마음의 차원을 뛰어넘는 본래 마음을 그 사상적 중심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마음을 협의와 광의, 표층과 심층 등 범주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마음 이해의 한 방법(분석적 방법)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이겠지만, 그 역시 마음을 분별하여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온전한 마음 이해에 도달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대로 비추어 보게 한 것이다.
관점에서 마음을 분석하는 방식[이성적 분석]에는 한계가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1인칭의 관점에서 마음을 직시하는 방식[본성적 직관]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마음은 학문적 탐구대상이나, 과학적 분석대상에 머물기보다는 명상이나 수행을 통해 비로소 온전히 체득될 수 있는 것이다.
할 수 있다. 이는 1인칭의 관점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대상에 대한 관찰(분석)인 3인칭의 관점과는 다르다. 과학의 시대라고 부르는 현대사회에서도 불교가 그 유용성을 가지는 것은 과학적 접근이 가지는 인식의 한계, 즉 분석의 방식으로는 마음을 관찰하는 데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마음이 마음을 관찰할 때, 마음은 관찰자이기도 하면서 관찰의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음에 대한 분석적 앎(知識)이 가지는 한계와 함께 마음에 대한 근원적 앎(智慧)의 가능성을 새롭게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분별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마음을 대 할 때에도 깊고 낮은 마음의 층위를 나누거나, 넓고 좁은 마음의 범위를 설정하기도 한다. 또는 허망한 마음과 청정한 마음, 생멸심과 진여심 등으로 나누어 보려고 한다. 이러한 분별은 맞을 수도 있으며, 틀릴 수도 있다.
그것은 일승의 안목을 통해 판단되는 것일 뿐이다. 이상의 분별이 적절하게 사용되었다면, 그것이 마음의 참다운 실상을 적실히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훌륭한 방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방편에 집착하게 된다면, 오히려 마음의 실상으로부터 더욱 멀리 벗어나고 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음의 실상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말에 있지도, 말에 없지도 않은 것이다.
각케 할 것이며, 무분별의 입장에서 마음을 이해함으로써 참다운 분별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분별을 내야 할 자리에서 적절하게 분별을 내지 못한다면, 반대로 분별에 집착되어 분별이전의 마음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면, 우리는 이를 마음이 분별에 집착되었다고 하며, 이를 ‘마음의 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러한 집착에 놓고 온전한 마음의 실상을 회복하는 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도 분별이전의 자리에 주착하여 거기서 적실한 분별이 나타나지 못한다면, 이는 ‘성기적 치유’가 필요할 것이다.
마음이 온전할 때, 비로소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가 가능할 것이며, 세상에 대해서도 치유를 위한 무량한 방편들을 쏟아내게 될 것이다.
雜阿含經(T02)
大般若波羅蜜多經(T05)
金剛般若波羅蜜經(T08)
大方等如來藏經(T16)
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T12)
大般涅槃經(T12)
龍樹, 中論(T30)
慧遠, 大乘義章(T44)
義相, 華嚴一乘法界圖(T45)
____, 華嚴經問答(T45)
智儼, 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T35)
____, 華嚴經內章門等雜孔目章(T45)
法藏, 華嚴經探玄記(T35)
澄觀, 大方廣佛華嚴經疏(T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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