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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Ⅱ. 空사상이란 무엇인가.
ⅰ)공의 말뜻
ⅱ)공사상의 개념
ⅲ)공사상의 구조
a. 역사적 필연성
b. 공사상의 구조
ⅳ)공사상의 오해의 여지
ⅴ)부처의 계승자 Nāgārjuna의 공사상
2. 반야심경의 空사상
ⅰ)空性
ⅱ)비움과 채움의 空
3. 확대된 空사상의 해석
ⅰ)인도 신화에서의 공사상
ⅱ)수학에서의 공사상
ⅲ)물리학에서의 공사상
Ⅲ. 空을 깨닫음, 그 길- 禪
1. 禪의 의미
2. 禪의 방법
3. 禪문답
4. 禪의 가치
Ⅳ.空 ․禪 그리고 언어
1. 말의 유용성
2. 언어적 갈등은 이분법적 대립이다.
3. 언어적 갈등과 에고
Ⅴ. 2000년의 空의 효용성
1. 자아의 관점에서
2. 종교의 관점에서
3. 학문의 관점에서
4. 삶의 관점에서
空은 한자어이며 산스그리트 Śunya에 대한 역어이다. Śunya는 형용사와 명사로 쓰여졌으며 형용사적 의미는 일반적으로 ①비어 있는 ②속이 빈 ③불모의, 폐허의, 버려진 ④없는, 부재의 ⑤~할 마음이 없는, 정신이 풀어진 등의 의미로 쓰여졌으며 문헌적 용례로서 ①Māhābhārata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외로운, 홀로의 의미로 Śunya가 쓰이고 ②Rāmāyana 또는 Bhāgavata Purāṇa에서는 ~이 없는, 결핍된 의미로서 쓰였으며 ③Pancatantra에는 존재하지 않고 ~이 빠진, 비실재의. 게으른, 황당한, 의미가 알맞은 말로 쓰였으며 가끔 무감각한, 드러내 놓는, 옷을 벗는 의미로 그 외에 가장이 없는, 무관심한 뜻으로 쓰여졌다.
명사적 쓰임에서는 진공, 허공, 빈 공간, 사막을 의미했으며 철학에서는 비실체, 비존재를 수학에서는 아라비아 숫자 ‘0’ 그 외에 공간, 하늘, 천상계, 대기권, 하늘의 현상 1] 을 의미했다.
이렇게 다양한 의미의 Śunya를 空의 한자로 대치한 것은 아주 좋은 역어를 창조시킨 것이다. 그 이유는 空이란 한자어는 ①비다(虛也) ②하늘(天也) ③크다(大也) ④궁하다(窮也) ⑤이즈러지다, 없다(全也) ⑥벼슬이름 공(官也) 2] 등으로 다양하게 쓰여 Śunya의 여러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2]漢韓最新實用字典, 理想社, 1948. P.472
3]앞의 책, P939-940
대승불교의 Nāgārjuna는 이러한 다양한 의미의 空 Śūnya를 그의 존재론에 대한 명칭으로 사용했다. Śūnya를 실재(reality)의 특성으로 하는 그의 철학이론의 명칭이 되었다. 이전의 모든 철학에는 이미 실재에 대한 무수한 명칭이 있었는데 왜 굳이 Nāgārjuna는 空(Śunya)를 그의 실재론의 명칭으로 삼은 것인가.
그 이유는 空이 '없음' 의 부정적 의미로 보여질지라도 Nāgārjuna에게는 긍정, 부정을 동시에 의미한다. 한편으로 없음과 다른 한편으로 있음의 의미 둘 다를 인정한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성격이 절대자 또는 실재의 특성을 설명하기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슷한 경우는 이샤 우빠니샤드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기도 한다.
그것은 멀리 있기도 하고
그것은 가까이 있기도 하다
그것은 모든 것의 안에 있으며
그것은 모든 것의 밖에도 있다 4]
그에게 있어 空의 긍정적인 의미는 실재는 이러한 언어로 규정된 세계를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Nāgārjuna는 空(Śunya)의 부정적 의미만이 아닌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의미를 함축한다.
(2)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둘 다인가, 둘 다가 아닌가.
(3) 여래는 시초에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둘 다인가, 둘 다 아닌가.
(4) 영혼은 육체가 동일한가, 다른가.
7] akṛtrimaḥ svabhā hi nirapekṣah paratra ca( Madhyamka Kārikā 15. 2)
이는 현상계에서는 무조건적인 독립된 실재나 본질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조건과 상황의 총체 결과에 따라 일어나는 연속적 현상일 뿐이다. 그 자체, 절대적 실체가 없으므로 당연히 실체를 원인으로 생겨나는 필연적인 결과로서 연속된 현상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현상계의 현상들은 상호의존적인 조건과 상황의 결과일 뿐이라는 사상이다. 이러한 현상들의 연속적 과정이 사물이고 사건이라는 입장이다. ‘물 자체’는 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현상계의 현상은 saṁvṛti란 용어로 이해할 수 있다. 현상계는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베일로 싸여서 드러난다. 그래서 실재를 알 수 없다. saṁvṛti는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1. saṁvṛti는 사물의 실제 본질을 전부 덮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원초적 무지이다.(ajñana, the primal ignorance).
2. saṁvṛti는 사물의 상호의존성, 상대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현상이란 의미이다.
3.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saṁvṛti이다. 8]
감각적 경험의 대상으로서 saṁvṛti는 일반 상식의 경험세계가 실재(reality)를 가림으로서 본래의 세계와 다른 모습 마야(māyā, illusion)를 일으킨다.
붓다는 그의 실제적 관심인 苦의 원인이 무명에 있다고 말했으며 Nāgārjuna가 파악한 인간의 苦의 원인은 내재한 이성의 이율배반적 성격이고 9] 이 이율배반적 성격에서 생긴 사고, 언어, 글, 이론, 모두는 이율배반적 성격을 띄므로 향상 대립적이면서 혼동과 갈등을 일으키는 고통인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적 성격의 이성에 근거한 갈등은 그가 관찰한 마야로서 saṁvṛti이다. 그러므로 Nāgārjuna는 이런 이성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것이 苦를 치료하는 길이 된다. (drṣti-śūnya, devoid of all views)
9]'The world-illusion is presented to the Mādhyamika as the total and persistent conflict of reason' -T.R.V. Murti, Studies in Indian thought, Motilal Banarsidass, Delhi, 1983. p.191.-
이는 절대적인 관점으로 이때 Śunya는 사고의 형성의 변화가 없는, 또는 다양성이 없는 것이란 뜻이다.
(Prapañca-Śūnya devoid of prapañca, verbalization, thought construction and plurality)
T. Stecherbatsky에 의하면 Śunya 의 의미는 절대적 관점에서 세 가지로 말한다.
1.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2. 있다, 없다, 둘 다이다. 둘 다 아니다. -사고 법주나 술어로 적용 될 수 있는 사고를 초월하는 것이다.
3. 부분으로 나누어 질 수 없는 복수성이 없는 의미를 지닌다. 10]
이는 경험적 실재의 saḿvṛti에 대립되는 절대적 실재로서 paramārtha로 말해진다. 이는 어떠한 언어의 왜곡이 없는 실재의 세계이다. 사고의 카테고리나 관점들은 마음으로 하여금 사물은 고정된 방식으로 보게 하여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약탈한다. 이러한 방해는 이성의 기능에 의한 것이고 이성의 개념과 사고와 작용이 없을 때 paramārtha가 있다. 이는 언어적 모든 활동, 글, 개념, 범주, 이념, 이론에서 자유로운 관점의 세계이다. 이는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는 세계이다. 이러한 두 관점에서 정의되는 śunya는 실재는 ~라고 규정짓는 형식이 아니다. 이는 ~이 아닌, 없는, 무규정의 대상이다.
첫째가 침묵의 방법이다. 부처가 대답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 침묵한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우빠니샤드, 아가마(Āgama)문헌에서는 이 방법을 사용한 예가 나온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실제로 무엇이라고 정확히 가르치는 것이 아니므로 설명을 더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의 방법이 있다.
이는 부정적 언표의 방법이다. 실재는 ‘무엇이 아니다’라고 형식으로 말한다. 우빠니샤드의 neti neti(not this, not this)도 이 방법이다.
세 번째는 ‘실재는 궁극적으로 무엇이다’라고 규정하는 방법이다.
이런 세 방법 중 Śunyavāda의 방법은 두 번째의 부정적인 방법에 속한다. śunya을 두 가지 관점에서 ‘~이 없는’의 부정적 언급으로서 궁극적 śunya는 무엇이라고 언표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유식론(Vijñāvāda)에서는 실재는 vijñāna라고 말하는 것은 긍정적인 언표인 것이다.
물론 간접적으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절대적 세계는 드러내지만 표면적으로는 어떤 절대적 실재에 대한 지시가 없다. 이러한 입장은 모든 언어로 표현된 실제에 관한 모든 규정이 실재가 아님을 비판하는 입장으로 궁극적으로 어떠한 설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중도 철학을 비판 철학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입장은 ‘Sūnyata of drṣti' (negation of all the views)로서 모든 이론에 대한 空사상을 표명하게 된다. 인도 전통의 실체적 실재관으로서 브라흐만 전통(the substantial view of Brahmanical system)은, 실재(reality)는 영원불멸하며 모든 변화를 넘어 있다는 입장이고, 초기의 불교의 모델관(the modal view of the early Buddhism)은 영원한 실재는 없으며 모든 것은 변화하고 순간적이라는 입장이다.
이 두 대립되는 학설에 대해 긍정과 부정에 구애됨이 없이 모든 이론에 기울지 않고 초연히 궁극적 실재를 관하려는 자세이다. 모든 이론의 옳고 그름, 긍정, 부정을 떠나 실재에 대한 모든 이론과 해석에서 초월할 때 실재를 알게 된다는 입장이다.
모든 견해를 초월하는 의미의 空사상을 반야(Prajñā)로서 작용하게 하는 출발점이라 하겠다. 대내적으로는 불교 자체에 대한 비판도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모든 철학 종교에 혁명적 자극, 모든 지성적 활동과 산물에 새로운 각성을 주었다.
ⅳ)空사상의 오해의 여지
空사상은 인간 이성에 근거한 모든 지적 활동을 무효화, 무가치화하고 무시하는 것으로 오해 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훌륭하고 정교한 실재에 대한 표현이라도 그 실재 자체가 아니며 어떤 표현으로도 실재 자체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실재는 이성의 기능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모든 철학적, 이론적 작업이 필요한가. 그 이유는 모든 실재에 대한 표현이 실재 자체는 아니지만 실재에 대한 마아크나 힌트, 포인트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이해 방식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포인트로서 도움이 되어 개인적 만족을 준다면 그것 자체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Nāgārjuna가 모든 이론을 비판한 것은 이러한 원리에서 행해진 것으로 이론 자체의 거부라기보다는 하나의 관점을 마치 그것만이 실재에 대한 유일한 표현인 양 집착하는 편견이 있는 태도를 거부한 것으로서 확대 해석할 수 있다. 포괄적인 이해는 실재에 대한 그릇된 태도를 버리고 유효한 접근을 하게 하는 길이다. (K.V. Raman) 찰라적인 것을 찰라로, 개인적인 것은 개인적인 것으로 보는 한 아무 잘못이 없다. 그러나 찰라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개인적인 것을 전체적인 것으로 생각할 때 혼돈이 일어나고 이 혼돈은 고통과 갈등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空이론은 이론 자체의 거부라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상으로, 개별적인 것은 개별적으로 불규칙한 것은 불규칙한 것으로 무규정적인 것은 무규정인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중관학파의 Nāgārjuna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차별성을 넘어서서 절대 세계가 있고 인간 또한 이 절대세계에 대한 언어와 사고를 초월할 때 해탈할 길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고와 주관, 이론과 관점에 대해서 空 Śunya는 ‘空’이지만 언어를 초월한 절대 세계에 대해서는 充인 것이다. 여기까지 확대하여 해석한다면 중관학파는 단순한 언어의 사고, 이론의 부정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근거 위에 서서 사상적 전환을 이룩한 것이라 하겠다.
ⅴ)붓다의 계승자로서 Nāgārjuna의 空사상
붓다의 기본적인 관심은 실제적인 문제로서 苦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것의 원인의 발견과 중도로서 치료가 주요한 관건이었다면 Nāgārjuna에서도 붓다의 주요한 관심이 그의 관심사였다. 단지 차이점은 무엇을 苦로 보고 苦의 원인을 무엇으로 그리고 그 치료 방법은 무엇을 제시하였는가에 있다.
붓다의 四聖제는 苦의 원인, 치료를 위해 발견한 장치라고 하면 Nāgārjuna의 空사상과 변증법도 그런 역할을 하는 장치라고 하겠다. 양자 사이에서 다른 차이점을 상세히 살펴보면 붓다는 苦의 원인이 무지에 근거한 욕망이고 이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苦가 되며 이를 위한 치료제는 중도로서 正道이다.
Nāgārjuna는 苦의 원인을 내재한 이성의 이율 배반성으로 苦는 여러 가지 구조의 이론과 주장의 관점으로 인한 서로간의 이견에 의한 충돌로 보았다. 이성의 이율 배반적 성격은 언제나 대립적인 이론을 가능하게 한다. 근원적 치료는 이러한 이성의 이율 배반적 성격으로 이성에 기인해 발생한 모든 이론의 독점된 절대성을 무효화시키는데 있다고 보았다. 모든 극단을 지향하는 중도에 설 수 있으므로 중관 철학(Madhya make philosophy)가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식한 Nāgārjuna의 空사상은 苦의 원인과 치료방법으로 무명과 중도로서 불교의 기본사상을 형성한 붓다의 계승자로서 Nāgārjuna를 인정하게 된다.
色도 空
受想行識도 空
眼耳鼻舌身意도 空
色聲香味觸法도 空
眼界도 空
儀式界 空
無明이 다함도 空
老死도 空
老死의 다함도 空
苦集滅道도 空
六波羅密도 空
깨달음의 성취도 空
깨달음의 비성취도 空
이 모든 空의 주제는 色卽空이라면, 이것은 형이상학적 명제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과정으로서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세계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色․空이 동시에 경험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론적 증명이 아닌 깨달음의 경험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에서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모든 사물의 본질 자체가 아닌 사물의 개념 사고가 마치 실제처럼 작용하여 우리의 의식이 모든 대상의 空性을 체험할 기회를 앗아간다는데 있다.
그래서 그 사념을 부정하는 과정에 철저함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감각기관이 인식하는 세계로 형성된 관념, 또는 우리의 몸의 기본 구조에서 형성된 관념, 우리의 의식 작용에서 생긴 관념이 모든 본질처럼 착각하는데서 벗어나야 하고 그런 관념이 실체 아님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관념이 매듭이요, 장애요, 번뇌요, 진흙의 구덩이다. 그러므로 空의 갈구가 생겨난다.
그러면 왜 구태여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空의 맨 얼굴을 보려하는가. 그 이유는 그러한 얼굴이 우리에게 고통을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질의 질서 空의 세계가 먼저 인식되지 않는다. 관념의 사고로 재차 해석된 세계를 인식하기 때문에 이 관념으로 채색된 인식은 왜곡되거나 된 것으로 이를 제거하려 한다.
삼단계 위의 구조를 살펴보면, 눈으로 보이는 감각세계(땅의 세계), 관념의 세계(중간세계) 그리고 관념을 초월한 세계(하늘세계)가 있다. 여기서 Nāgārjuna는 관념세계가 일으키는 장애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관념의 空化를 말한다. 그의 Śunyavāda는 이를 위한 제어장치이다. 관념은 실체가 아닌 실체의 허상일 뿐이므로 허상을 제거하면 진실의 속살이 드러난다.
그래서 관념의 장애를 뚫은 선시들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맑게 그 바닥을 드러낸다.
집 앞의 호수를 보라
해 비치니 그 빛
바람부니 물결인다. 11] 찬란하고
더럽지도 않으며 깨끗하지도 않으며
증가하지도 않으며 감소하지도 않느니라.(반야심경)
불교는 6세기경 Gautama Siddharta에 의해 창시되어 스라랑카, 버어마, 태국의 소승불교, 네팔, 티벳, 중국, 한국, 일본을 통해 대승불교로 발달하여 아시아의 종교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정작 인도 본토에서는 불교는 수세기가 지난 후 힌두교에 흡수되었다. 이 흡수된 양식은 바로 인도의 삼신중 두 번째 비슈누 신, 세상의 유지자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부처를 받아들인 것이다. 여기 비슈누 신화를 통해 空사상의 두 관점, 현상계와 본 체계의 의미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말칸데야는 신화에서 등장하는 잘 알려진 신비적 인물이며 끝없는 생명을 부여받은 성자이다. 그는 수 천 살의 나이를 먹었지만 힘이 세고 정신력이 놀라웠다. 그는 비쉬누신의 육체 내부를 두루 편력하면서 성지에서 예배드리기 위하여 잠시 머무르기도 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행렬을 보면서 기뻐하기도 하였다.
이제 한 사건이 발생한다. 정처없는 여행길에서 범상한 노인은 얼결에 비슈누신의 우주의 입을 빠져나갔다. 그 앞에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광경이 벌어졌다. 브라마 신(창조 신)의 밤의 깊은 침묵 속에서 비쉬누는 입술을 조금 벌린 채로 자면서 저음의 청아한 리듬 소리을 내며 숨을 쉬고 있었다. 말칸데야는 너무나 놀라서 신의 커다란 입술에서 떨어져 이 검은 우주의 바다에 빠졌다.
처음에는 비슈누의 마야 때문에 말칸데야는 잠자는 거인을 보지 못한다. 짙은 암흙의 밤, 별도 없고 멀리 보이는 것은 끝없이 넓은 바다뿐이었다. 그는 절망스러워 어떻게 살 지 걱정이었다. 컴컴한 깊은 바다에서 살아나려고 온간 힘을 다해 버둥거리다 지쳐 근심하면서 이것저것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게 꿈인가? 아니면 내가 허깨비에 홀린 것일까? 참으로 이러한 상황은 나의 상상이 만들어 낸 것일까. 내가 아는 세상은 멀쩡이 잘 운행되고 있었고 내 지식으로는 그런 우주가 갑자기 이렇게 전멸 될 이유도 없었는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태양도 없고, 달도 없고, 바람도 없다. 신들은 존재하지 않고 대지도 그 모습을 감추었다. 여기 이렇게 내 두 눈으로 보는 이 우주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는 사이에 또 다시 그는 잠자는 신의 입에서 미끄러져 컴컴한 바다에 떨어졌다. 아무소리도 나지 않는 적막과 어두움의 바다는 공포를 불러 일으컸다. 그 때 바다 사막에서 한 아이가 보였다 그의 몸은 빛이 나고 있었고, 무화과나무 밑에서 태평스레 잠을 자고 있었다. 다시 마야의 작용에 의해 말칸데야는 광막한 바다 한 가운데서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이 유유히 노는 작은 소년을 보게 되었다.
그는 호기심으로 더 보고 싶었지만 그 어린아이에게서 광채가 너무 나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어서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멀리서 떨어져 있었다. '이러한 비슷한 것을 이전에 보았던 것 같다.' 는 생각을 하면서 바다가 너무 깊어 겁이 나고 긴장이 되었다. 그 어린아이는 그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어서 오너라, 말칸데야야!”
그 목소리는 비구름 속에서 나는 천둥소리처럼 기분 좋은 장중한 음색을 띄었다. 그는 두려운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말을 건넸다.
“어서 오너라, 말칸데야야! 두려워 말아라, 내 아기야, 겁내지 말고 이리 오너라”
이 신화가 힌두교들에게 계시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신의 내면을 통해 실제 본질의 모습은 바다의 광활한 세계, 신들이 유유히 노니는 모습으로 경험되며 다시 현상 세계의 경험은 신의 몸밖의 경험으로서 상징된다. 그리하여 두 대립되는 세계의 설명을 신의 몸의 안과 밖으로 설명하고 말칸데야의 경험을 통해 이 두 세계가 모두 하나의 비쉬누신의 세계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캄캄한 대양은 우리의 空性을 나타낸다.
Śunya는 아라비아 숫자로 ‘0' 이다.
경우1) ‘0' 은 0를 기점으로 음수와 양수로 구분된다. 즉,
--------3, -2, -1, 0, 1, 2, 3,-------
여기서 ‘0'은 양수로 음수도 아니다. 두 양극을 초월해 있다.
모든 부정적, 긍정적 양극을 초월하는 空 ‘0'으로서의 전환점이다. 13]
0+0=0
0-0=0
0×0=0
0÷0=0
0n=0
ⁿ√0=0
空이 실재로서 모든 변화에도 자기의 본질을 지키는 경우와 같다. 현 세계의 모든 변화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지키는 경우의 空사상이 관철된다.
경우3)‘0' 혼자서는 그 힘이 제로이지만 다른 숫자가 왼편에 와서는 숫자의 힘을 막대하게 증대시킨다.
이때 그 숫자의 크기는 0의 반복되는 횟수 n으로 증가하면 10n으로 힘이 증가된다.
0--------------------무력
10------0이 1회------101배
100-----0이 2회------102배
1000----0이 3회------10³배
1000----0이 n회------10n배
이는 내적 본질을 획득함으로서 막대한 에너지를 획득하는 경우와 같다. 空은 자신이 가득 찬 데서 나오는 강력한 에너지의 흐름이다.
그러나 오늘날 Newton의 역학, Faraday와 Maxwell의 場이론, Einstein의 상대성 이론이 합성된 양자 역학(Quantem field theory)의 진공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2) 진공 중에 있는 마이너스 에너지가 전자에 빛이 충만한 에너지를 보이며, 전자가 튀어나온다. 그 전자는 플러스 에너지를 가지므로 관측할 수 있다. 그 뒤에 남는 구멍엔 플러스 에너지를 갖는 반입자라는 양전자이고 그것을 관측할 수 있다.
(3) 진공 중에는 ‘불확정성 원리’로 인해 극히 짧은 시간에만 에너지 보존 법칙을 파괴할 수 있는 가상전자, 양전자 쌍이 생성, 소멸을 반복하고 있다.
(4) 진공 중에 전하를 놓아두면 진공은 분극을 일으킨다. 분극으로 인해 전하 넓이가 생긴다. 그 때문에 ‘유효전하’의 크기가 중심의 전하로 접근함에 따라 커지게 된다. 14]
고전적 기계론적 세계관인 Democritos의 원자론은 물질과 빈 공간의 개념이다. 이 둘은 서로 교차할 수 없는 분리된 두 개념이다. 그러나 새로운 場의 이론(field theory)이. 등장하면서 입자(particles)의 새로운 개념의 등장과 공간(void)의 개념이 변형되었다. 이 이론은 아이슈타인의 중력장과 공간의 기하학을 연합하면서 시작되었고 양자이론과 상대성 이론이 원자내에서 생기는 입자(subatomic paticles) 즉 역장(force fields)을 설명하였다. 이 양자장 이론(quantum field theory)에서 중요한 것은 입자와 공간사이의 구분이 본래의 엄격함을 잃고서 空(void)은 역동적인 양(量)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상대성이론은 이 전자 역동학의 구조를 변형시켰다. 전하와 흐름, 전기전자 자기장을 합성해서 그 이론은 모든 운동을 상대적이고 모든 전하의 흐름은 관찰자와 관련해서 전자가 움직이는 구조의 흐름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전기장으로 나타낼 수도 있다. 전기장이 자기장으로 합성된 것이다.
장의 이론은 전자기장뿐만 아니라 중력장과도 연합되었다. 중력장은 모든 부피를 가진 물체가 중력의 중심이 되어서 그 주위를 인력의 장으로 만든다. 이는 인력․척력이 둘 다 작용하는 경우와 다르다.
중력의 場이론은 상대성의 표준이다. 물체의 부피는 주위에 있는 공간에 그 영향을 전자기의 전하체보다 더 넓게 작용시킨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상대적 이론의 중력의 장과 다른 여기서의 중력의 장은 구부러진 공간이다. 물질은 결국 중력의 장과 분리될 수 없고 중력의 장은 구부러진 공간과 분리될 수 없다. 즉 물질과 공간은 서로 나눌 수 없이 한 전체의 서로 의존적 관계이다.
철학자이고 물리학자인 Enst Mach는 Mach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우주에서 물질은 다른 물질이 있을 때 부동성을 갖는다. 물질이 움직일 때 물질의 부동성은 중심의 힘을 만든다. 이런 힘은 세탁기에서 젖은 빨래에서 물을 분리하는 탈수기처럼 이런 힘은 항성에서 상대적으로 천체가 운행하여 나타난다. 갑자기 운행하는 물체인 항성이 없어지면 천체의 중심의 부동성의 힘 또한 사라진다. 이는 Einstein에 영향을 주어 상대성 이론의 일반적 이론을 형성하였다.
대우주의 차원에서 모든 물체는 구분된 실체가 아니라 그들 환경과 어쩔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특성은 나머지 세계와의 상호관계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물체와 환경과의 통일과 상호관계성은 원자구성요소, 양성자, 전자에서도 나타난다. 전자역학이 양자이론과 결합해서 양자 전자 역학이라 불리고 이는 원자보다 작은 입자의 전자의 상호작용을 설명한다. 여기서 두 개념이 합성되었는데 전자기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Quanta(particles)의 형태를 취하는 장이 양자장의 개념이다.
이 양자 場이론에서는 공간과 딱딱한 입자와의 구별이 극복되어 물리적 실체는 Quantum field가 된다. 이는 공간 어디에서나 있는 지속적인 매개체이다. 입자는 단자의 場의 공간적 응집이고 에너지 응집은 입자도 상황조건이 맞으면 물질이 된다.
Einstein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장이 극단적으로 집약된 공간의 지역으로 구성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장이나 물질 둘 다를 위한 물리학은 없다. 왜냐하면 場만이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입자와 공간사이의 관계는 역동적인 관계이다. 물리학에서는 공간으로서 공은 참으로 ‘살아있는 空’이고 창조와 파괴의 끝없는 리듬 속에서 변화한다. 그러므로 空은 ‘充’이다.
바로 이런 이론공부로 인한 폐단을 극복하고 空을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실천적 방안이 禪이다.
1. 禪의 의미
선은 산스끄리어 dhyāna에서 유래한다.
dhāyāna는 jhāna(dhāyā의 속어)로 변하고 다시 여기서 어미가 없는 jhāna가 한자로 禪那 또는 禪으로 바꾸어진 경우다. 15]
흔히 불교에서 禪은 깨달음을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경전의 법을 넘어선 가르침이란 의미로 다음처럼 요약된다.
문자에 의존함이 없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닦아서
성품을 깨닫고 붓다를 이루게 한다.
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旨人心 見性成佛 16]
16]같은책, P.27
17]같은책, p.25.
우리가 보통 영혼, 무한, 진리라는 형이상학적 용어뿐 아니라 일상언어에서 조차 그 언어에 합당한 실체적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에 집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적 관습에 대한 집착이 우리의 정신적 환상을 빚어내게 된다.
문자와 개념에 집착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갈등(葛藤), 교분자(膠分子), 화타(話墮)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갈등이란 마치 칡넝쿨이 복잡하게 얽히듯 언어와 개념이 복잡하게 서로 뒤엉켜 본말(本末)을 모르게 되는 것이며 교분자란 말(言)이 끈적거리는 아교 그릇처럼 사람을 현혹시켜 어리석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며 화타란 언어 이전의 참뜻을 놓치고 단지 어구에만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어록에서는 언어와 개념에 의한 불교 이해를 부정하고 참된 불교 수행의 방법으로 오직 체험과 직관, 사상과 생명의 장려한 융합을 택했던 것이다. 18]
그러므로 不立文子, 敎外別傳으로서의 禪은 경전 개설 중심의 논쟁인 학문 불교, 절을 세우고 불상을 세우는 공덕주의 불교를 반대하고 오직 마음의 깨달음을 강조하여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수하는 ‘以心傳心’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운문 문헌에서는 선법을 적은 제자에게는 “네 입으로 한 마디도 못하면서 내 말만 베껴 써서 훗날 나를 팔러 다닐 셈인가”라고 말하고 말 많은 사람에게는 칠칠치 못한 사기꾼들이 남이 뱉어낸 침이나 받아먹으면서 기묘한 골동품 같은 말들을 외워 가지고 도처에서 날뛰고 있구나 라고 질타하셨다고 한다. 19]
모든 형이상학적 시비는 경전 해석에 매달려 언어의 그물에 걸려 전체적 지각이 사라진다. 언어는 하나의 상징 체제인데 이를 실체의 것으로 여기는 착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언어를 초월해 마음의 깨달음을 얻은 선승들은 깨달음의 계기가 다양하다.
강을 건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비질하다가 던진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칠 때, 벗겨진 신발을 다시 신다가, 돌을 쪼겔 때 돌과 망치가 부딪치는 소리에, 닭 우는소리, 목침이 떨어지는 소리, 기둥에 머리 부딪치는 순간, 성주의 목소리를 듣는 중에 등 다양하다.
19]같은 책 P.19
ⅰ)이러한 선의 효시는 붓다가 가섭 제자에게 이심전심으로 꽃을 통한 이해전달이다.
영축산에서 설법을 하시던 세존께서는 대중들에게 한 송이 연꽃을 들어 보였다. 대중들은 금시 영문을 몰랐으나 오직 가섭 존재만이 홀로 미소를 지었다.
열반으로 향하는 미묘한 마음
형상을 벗어난 실상
지극히 미묘한 진리의 문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경전의 법을 넘어선 가르침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남송시대 무문헤개 선사, 문무관 제 6칙 “세존염좌”
ⅱ) 두 번째의 선문답은 달마대사와 양부제의 경우다.
남인도 즉 향지왕의 셋째 아들로서 중국에 불교의 깨달음을 전하는 달마는 선종의 일대 조사이다. 그 대화는 다음과 같다.
보리달마의 대답은 뜻밖에도 간단했다. 그리고 충격적이었다.
"전혀 공덕이 될 것이 없습니다."
당황한 양무제가 다시 물었다.
“어찌 공덕이 없다고 하는가”
“ 공덕이란 인간과 신들의 속세에서나 필요한 덧없는 행위이며 그 과보 역시 조금씩 새어나오는 옹달샘에 불과할 뿐이지요. 그림자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실체가 아닌 것처럼 그것은 허상일 뿐입니다.”
2.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공덕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공덕이란 청정한 지혜의 완성에 있습니다. 이 지혜의 본질은 형상을 초월한 것이며 공적인 것입니다. 이 진정한 공덕은 세간적인 방법으로도 추구되지 않는 것입니다. ”
무시당한 것 같아 화가 난 양무제는 보리 달마의 지식을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3. “그렇다면 어떤 것이 그대의 제일 성스러운 진리인가?"
"아무 것도 성스러울 것이 없소.”
양무제는 자신의 모든 지식을 거부하는 달마 대사에게 더욱 화가 나 큰 소리로 물었다.
4. “짐 앞에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모르겠습니다.”
2부분은 空의 본질을 말하는 대목으로 이는 모든 형상에서 벗어난 것이며 세속적인 삶과 무관함을 말하는 대목이다.
3부분은 빛의 진리는 聖과 俗도 초월한 空의 세계인 것을 말해주고 있다.
4부분은 인간의 본질은 언어로서 표현될 수 없고 규정될 수 없는 무한자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같이 양무제와의 대화에서 달마대사는 모든 형식과 언어를 넘어선 공의 본질로서 마음의 깨달음을 말하면서 후대 중국의 제일 효시로서 선의 큰 법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ⅲ)제 6조 혜능의 경우다
혜능은 선종의 모든 형식을 벗어나 종교와 삶의 원만한 조화를 크게 이루어낸 대선사이다. 평범과 비범, 불교, 도교, 유교성인과 범인의 모든 사상과의 원만한 조화 속에서 불교와의 집착까지도 넘어서서 대융화를 이룩한 6대 조사이다.
거울 또한 물이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먼지가 일까.
혜능은 「단경」에서 원만 융해한 삶을 강조하면서 모든 종교적 삶, 철학과의 포용적인 태도를 취한다.
행식이 바르면 참정이 무슨 필요인가.
은혜를 알아 어버이를 섬기고
믿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라.
겸손과 존경으로 위 아래 화목하고
참으면 나쁜 일들 조용히 사라지네.
나무 비벼 불을 얻듯 하면,
진흙 속에서 붉은 연꽃 피리라.
입에 쓰면 몸에는 좋은 약이니
거슬리는 말 충언임을 기억하라.
허물을 뉘우치면 지혜가 일고
잘못을 감추면 마음이 어질지 못하다.
나날이 한결같이 좋은 일 하면
도를 이루는데 시줏돈도 필요 없다.
진리는 그대 마음에서 찾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밖으로만 찾아 헤매나.
그대 가르침 따라 닦으면
천국이 그대 앞에 펼쳐지리라.
혜능은 이 세상에는 36가지 대립되는 쌍들이 있다고 한다. ----있음과 없음, 현상과 공, 움직임과 고요, 맑음과 흐림, 평범한 것과 그리고 성스러운 것, 승려와 세속인, 크고 작음, 길고 짧음, 올바름과 그릇됨, 어리석음과 지혜, 번뇌와 평안, 자비와 악의, 영원함과 무상함, 허와 실, 기쁨과 분노, 나아감과 물러감, 삶과 죽음, 화신과 보신.
만약 그대가 이 36개를 잘 알아서 적절히 쓸 줄만 안다면 모든 경전의 진리를 꿰뚫어 상대적인 양극단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참 본성이 스스로 일어날 것이다. 그리하여 남과의 대화에서도 밖으로는 현상에 초연하며 안으로는 공 가운데 있어도 공으로부터 초연해 있을 것이고, 공에 집착하면 다툼이 나락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 따름이다.
누가 그대에게 있음의 의미를 물으면 없음의 시각에서 대답하나 평범한 것을 물으면 성스러운 것을 말하고 성스러운 것을 물으면 평범한 것을 대답하니 이렇게 두 극단이 서로 도와 중도의 의미가 밝혀지리라.
누가 어둠을 물으면 「밝음은 어둠의 원인이요, 어둠은 밝음의 원인이다」라고 대답하나 밝음이 사라지면 어둠이 오리니 어둠은 밝음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밝음은 어둠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이 둘의 상호 관계 속에서 비로소 중도의 의미가 밝혀진다.20]
혜능은 이 대립되는 이원적인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 이렇게 수직적 상승으로 空의 무한 경지를 향하고 있다.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그가 부모일지라도 죽이고,
친척 권속이라 해도 죽여라.
사이에 존재하는 인력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우주적 신뢰의 바탕이 되는 이 <본래의 나>란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은 자연히 우리가 본능 또는 천성이라 부르는 생명 본질의 문제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우리가 본래부터 갖고 태어난 지혜를 우리는 <직관>이라 부르고, 모든 후천적인 행동들은 <학습>이라 부른다.
머리로는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한 궁극의 그 힘 속에 모든 사물은 공통된 그 기원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고요한 시간에 우리의 뇌리를 스치는, 그러나 어떻게 해서 우리의 영혼 속에 떠오르는지 그 방법을 결코 알 수 없는 존재의식은 사물과 공간, 빛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이며 같은 근원에서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도를 닦은 여러 벗들이여, 마음의 근원적인 법칙은 형상이 없으나 순수하고 유연하게 온 누리를 관통한다. 눈으로 보며, 귀로는 듣고 코로도 냄새를 맡으며, 입으로는 대화를 하며, 손으로는 잡고, 발들도 걷고 있지 않는가? 이는 본래 한 개의 신령스러운 구슬인데 쪼개어 여섯 조각으로 나누어진다.
근본적인 한 마음이 육도(六根, 眼耳鼻舌身意)의 작용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그 한마음이 본래 공한 것이므로 가는 곳마다 해탈의 법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소승은 왜 이렇게 설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구도자 여러분이 밖을 향해 찾아 구하며 헐떡이는 마음을 쉬지 못하고 옛사람의 쓸데없는 언어와 행위에 매달려 흉내내려 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살아 있는 진리는 결코 과거의 언어와 형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21]
첫째, 모든 압력과 왜곡에서 벗어나 본질을 ‘봄’이다.
이는 자신의 전 존재로서 본질을 직접 체험함이다. 순수한 의식의 깨어남이며 확실성이며 궁극적 도달이다. 종교적 의식, 문헌들에 집착한 보잘 것 없는 형식적인 모든 신앙 의식을 거부함이다. 의식의 우상, 사회적인 우상의 심리적 질곡을 거부함이라. 특히 경전의 해석에 집착한 경전 경건주의를 배격함이다.
그리고 나서 종교적 본질 - 마음의 깨달음을 자신의 존재, 삶에서의 체험이다. 이상한 일화, 비밀스런 언어, 비논리적인 문답, 빼어난 유우머, 이해 못할 행동, 모순 등의 선문답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이러한 종교의 본질을 도달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자신에게 깊은 신뢰와 실천으로 직접 자신의 존재로서 체험하는 것이 선이다.
禪은 자신의 본래 본질을 통찰하는 방법이며 구속에서 자유로 나가는 길을 지시한다. 우리를 삶의 원천에서 그 자리에서 생명의 물을 마시게 하며 유한한 무리들이 이 세상에서 고통받게 하는 모든 질곡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 禪이란 일상적인 환경에서 압력 받고 뒤틀어져 있는 우리에게 활동하기에 적합한 에너지 수로를 만들어 준다.
둘째는 부분적인 앎이 아니므로 전체로서의 앎으로서 새로운 인식이다.
현상과 본체, 부처와 중생, 무지와 깨달음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전체로서 하나로 인식하여 한쪽으로 치우친 인식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인식의 새로운 관점을 획득하게 된다.
모든 대립되는 생각, 사건들은 禪을 통하여 하나의 질서로서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 조화를 가져오게 한다. 서로 다른 사고, 사건 등은 禪을 통해서 존재의 연속적인 계기의 질서로서 존재를 구심점으로 하는 하나의 원으로서 통일로 이해된다.
언어로써 표현된 철학이나 종교는 사실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 실재에 관한 논리적인 표현 그 자체가 실재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첫째는 실재에 관한 좀 더 분명한 이해를 도모한다면 의미가 있다. 둘째는 그런 이론이 꼭 실재는 아니더라도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자기 만족을 준다면 그 나름대로 값어치가 있을 것이라 하겠다.
결국은 언어의 유용성의 면에서 실재에 관한 징검다리 역할로서 또는 실재를 가르치는 포인터로서 이해되면 그 소용을 다함이다. 그러나 징검다리와 포인터로서 역할을 잊고 상징을 실재로서 여기면 이는 광신적 맹목적인 믿음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 것이다. 실재에 대한 지식이란 아무리 위대해도 피상적 묘사일 뿐이다. 즉 그 자체는 결코 실재가 될 수 없기에 실재에 대한 피상적 지식이다. 오직 그 자체(실재)가 됨으로서 본질의 지식이 얻어진다.
구름이 되고 마침내 하늘로 사라지듯
구름이 어디로 가고 언제 사라지는지 알 수 없네.
사념의 물결도
마음이 마음을 깨달을 때
해체되리다. 24]
24]한바다, 마하무드라의 노래, 양문출판사, 1977. P.17
이러한 관념들은 곧 이내 대립적 이분법적 사고로서 언어 세계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이러한 언어적 대립세계를 세상과 사물의 속성으로 인식하면서 살게된다. 이러한 사고는 마침내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일으켜 본래의 꽃의 모습이 아닌 해석으로 된 언어로 향기 없는 조화와 같다. 하나의 현상이며 착각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너와나’ ‘국내와 국제’의 「영어공용교육 찬성론」 「영어공용교육 반대론」 「고전주의와 실용주의」 과거와 미래, 정신과 물질, 동양과 서양, 남과여, 신세대와 구세대 등은 우리 대부분이 저마다 싸우게 되는 이분법적 싸움이다. 이런 언어 관습화는 묵은 시체이다. 마치 시바신이 어깨에 부인의 시체를 메고 다니듯 우리는 이미 죽은 언어의 시체를 어깨에 메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 갈등을 일으키는 주된 이유는 그 갈등 뒤에 있는 에고의 작용이다. 이 에고는 본래 개별화 원리로서 의식이었지만 ‘나의 것’으로 생각하는 소유의식이 결합되고 그것이 나라는 의식(자아 의식의 실체로 착각하는 사고 작용)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에고의 가장 큰 신하는 사고 기능이다.
이 사고 기능은 자신에 대해 불리한 경우 자신을 가장하고 그리고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과소․과대의 선전작용을 하게 된다. 이러한 작용이 자신의 허상으로 만든 관념의 집을 형성하고 이 집이 습격 받으면 마치 자신이 습격을 받은 것처럼 괴로워하게 된다. 이 에고에서 생겨난 저마다의 관념의 집은 인성을 지배하고 이에 위배되는 모든 이론과 사고를 철저히 배격하며 타인에게 공격성을 띄어 언어적 긴장 속에 살게 한다. 그러므로 언어적 갈등의 가장 큰 주범은 이 에고이다.
중심과 바깥이란 굳은 관념마저 풀어진다.
이와 같이 마음이 마음을 깨달으면
모든 마음의 움직임은 끝나고
무념의 상태에 머물게 되며
위없는 보리심을 깨닫게 되리라. 25]
나의 안도 空, 나의 바깥도 空, 나의 전체가 空, 세상 전체가 空이다. 모든 구별과 차별이 空으로 돌아간다.
큰 것이 곧 작은 것이네.
위에 있는 것이 아래에도 있으니
오직 존재하는 것은 한 생명과 한 이치라네.
이것을 움직이는 자 또한 그 하나라네.
이것을 움직이는 자 또한 그 하나라네
신성한 경계에는
안도 없고 밖도 없다.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다. 26]
26]같은 책, P.158
空은 불교의 공이 아닌 모든 인간 종교에서 연습되어야 하는 사고와 규범 위로 상승케 되는 도구다. 인도의 요가는 원래 정통 육파철학의 하나였지만 모든 종교, 철학에서 요가를 실천한 것처럼, 空은 모든 종교가 포섭해야 할 덕목이다. 이는 니힐리즘의 포기가 아닌 자유의 길로의 적극적인 지침, 포용하는 덕목이다.
단지 상징은 상징으로서 이해하는 한 우리의 적용 범위나 접근은 올바르다. 그러나 상징인 이론들을 실제 사실로서 적용하면 여기서 오차는 증대된다. 모든 이론은 절대성에서 개연성으로 그 수요 체계를 바꾸어 많은 새로운 이론, 대립되는 이론들이 수용되고 활성화되는 학문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정보, 지식, 사람. 사건, 일의 홍수 속에서 부담스럽고 숨가뿐 삶을 산다. 이러한 홍수에서 벗어나 휴식과 건강으로 인도하는 것이 空이다. 空은 끝없이 비우면서 모든 이물질을 제거하며 자체내의 생명을 다시 솟게 한다. 마치 샘물에서 물을 길으면 길을수록 더욱 더 맑은 물이 샘에 고이듯이 우리의 空의 샘물은 심리적, 신체적 피곤을 제거하며 새 삶의 에너지를 가져다준다.
행하되 행함이 없이 행하며,
말하되 말함이 없이 말하고,
또 수행하되 수행을 넘어선 수행을 하는 것이다. 27]
이것이 지고의 空.
이는 대상에 대한 집착과 나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 있네.
이것이 최고의 명상.
여기에 헤매는 마음은 없어라.
이것이 황제의 행위 28]
28]앞의 책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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