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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

수선님 2018. 12. 30. 12:30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

1. 머리말


불교에는 크게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의 두 흐름이 있다. 남전은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져, 그곳을 근거로 하여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 퍼졌다. 북전은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고, 다시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


전자를 남방불교 혹은 상좌불교(上座佛敎, Therav?da)라 하고, 후자를 북방불교 혹은 대승불교(大乘佛敎, Mah?y?na)라고 부른다. 상좌불교는 팔리어로 전승되어 온 팔리문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팔리불교’라고도 한다. 따라서 ‘남방불교’, ‘상좌불교’, ‘상좌부 불교’, ‘남방 상좌부 불교’라는 명칭들은 모두 남전의 불교를 일컫는 동일한 용어들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것을 짧게 줄여 ‘상좌불교’라고 부르자는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하나의 용어로 통일되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상좌불교 국가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 일부이고, 대승불교 국가는 중국·한국·일본·몽골·티베트·네팔 등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불교도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상좌불교를 소승(小乘, H?nay?na)이라고 업신여겨 왔다. 엄격히 말해서 현재의 테라와다(Therav?da, 上座部)는 히나야나(H?nay?na, 小乘)가 아니다. 테라와다(상좌부)는 히나야나(소승)와 마하야나(대승)라는 두 술어가 나오기 이미 오래 전에 존재하고 있었다. 대승불교도들이 소승이라고 폄하한 것은 부파불교를 가리킨 것인데, 이러한 소승부파는 오늘날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그 동안 멸시해 온 상좌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초기불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 성과와 아울러 교통과 통신 및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다른 나라의 불교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승불교도들은 상좌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상좌불교도 역시 대승불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런데 최근에는 동남아 상좌불교에 관한 저서와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 지난 2002년 <불교평론>에서는 ‘상좌부 불교의 이해’라는 특집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필자도 두 전통의 불교를 비교한 논문들을 발표한 바 있다. 여기서는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에 대하여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2. 상좌불교의 역사와 전통


1) 상좌부의 기원과 의미


상좌부(上座部)라는 단어는 팔리어 테라와다(Therav?da)를 번역한 말이다. 테라와다는 테라(thera, 장로들)와 와다(v?da, 말씀 혹은 교리)의 합성어이다. 그 의미는 ‘장로들의 교의(敎義)’라는 뜻이다. 이 부파는 팔리삼장(三藏, Tipi?aka)에 토대를 두고 있다. 수세기 동안 상좌부는 스리랑카·미얀마·태국에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오늘날 상좌불교도의 수는 전 세계적으로 1억이 넘는다. 최근에는 유럽과 미국 등 서양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재의 상좌부의 뿌리는 불멸 직후에 개최되었던 제1결집 시기에까지 소급된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테라와다’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스리랑카의 고대 년대기인 ??D?pava?sa(島史, 4세기)??와 ??Mah?va?sa(大史, 5세기)?? 및 Samantap?s?dik?(一切善見律註, 율장의 주석서)??에 의하면, ‘Therav?da’, ‘Theriya’, ‘Therika’라는 용어는 붓다 입멸 3개월 후 라자가하(R?jagaha, 王舍城)에서 개최된 제1결집 이후 처음으로 불교사에 소개되었다. 붓다의 직제자였던 500명의 아라한들이 참석했고, 마하깟싸빠(Mah?- kassapa, 大迦葉) 장로가 의장을 맡았던 이 결집에서 붓다의 전체 가르침인 법(法)과 율(律)이 7개월 동안 암송되었고, 스승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만장일치로 수용되었다. 이 결집에서 승인되고 동의되었던 것이 ‘Therav?da(장로들의 교의)’, ‘Theriya’, ‘Therika(장로들의 전통)’으로 명명(命名)되었다.”


이와 같이 ‘테라와다’는 제1결집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이때 이미 그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현재의 상좌불교도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종가(宗家)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오늘날 현존하는 동남아 상좌불교는 부파로서의 상좌부가 아니라 부파로 분열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원래의 불교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좌부는 역사적으로는 근본분열 이후에 성립된 부파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우선 부파분열의 원인과 그 결과에 대해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2)부파분열의 원인과 그 결과


상가(Sa?gha, 僧伽)는 출가 수행자 집단을 말하며, 화합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긴다. 하지만 어느 집단에서나 갈등과 다툼은 있기 마련이다. 붓다 재세시에도 꼬삼비(Kosamb?) 비구들의 분쟁이 있었다. 이 분쟁은 지율자(持律者, vinayadhara)와 지법자(持法者, dhammadhara) 사이의 다툼이었다. 붓다는 비구들에게 다툼을 즉각 중지하라고 훈계했으나 그들은 다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붓다는 그곳을 떠나버렸다. 나중에는 재가신자들이 이 사건에 개입하여 겨우 수습하였다. 한편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는 엄격한 계율주의로 승단을 개혁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승인 붓다를 등지고 승단의 분열을 획책하였다.


이와 같이 붓다시대에도 승단 내부의 갈등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표면상 승단이 분열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붓다의 높은 인격과 지도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붓다 입멸 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교단이 확대되고 출가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교리와 계율의 해석에 있어서 의견의 대립이 생겨 결국 분열하게 되었다.


붓다 입멸 후 100년경 원래의 불교승단은 두 파로 분열되었다. 이 두 파는 각각 다시 분열을 되풀이 하여 마침내 20부파로 세분되었다. 일반적으로 최초의 분열을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 하고, 그 이후의 분열을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고 한다. 최초의 분열은 제2결집으로 알려진 웨살리(Ves?l?, Sk. Vai??l?) 결집과 연관되어 있다. 그 원인은 웨살리의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십사(十事)를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결집에서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주장한 열 가지 사항은 비법(非法)이라고 판정되었다.


하지만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은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별도로 모임을 갖고 대승가(大僧伽, Mah?sa?gha) 혹은 대중부(大衆部, Mah?sa?ghika)로 알려진 새로운 승단을 조직했다. 이 부파의 이름은 ‘많은 무리의 승려들(大會衆)’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불교승단은 크게 정통파와 비정통파 혹은 보수파와 진보파로 나누어졌으며, 그 후 다시 분열을 거듭하여 18부파 혹은 20부파가 되었다.


20부파 가운데 원래의 상좌부는 가장 보수적이었는데, 그들의 교설은 팔리어로 전승되고 있다. 티베트 전통에 의하면 웃자인(Ujjain, Ujjeni)에 속하는 마하깟짜야나(Mah?kacc?yana, 大迦?延)가 상좌부를 창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팔리 전통에 따르면 우빨리(Up?li, 優波離)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상좌부의 교도들은 빠딸리뿟따(P??aliputta, 華氏城)를 그들의 첫 중심지로 삼았다. 그 후 그들은 점차적으로 꼬삼비(Kosamb?), 아완띠(Avanti), 웃제니(Ujjeni)와 인도 서쪽의 다른 장소들에 정착했다. 사르나트(s?rn?th)의 비문에는 초기에 사르나트에 상좌부의 교도들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나가르주나꼰다(N?g?rjunako??a) 비문에도 상좌부의 교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상좌부의 교도들은 서인도로부터 남인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남인도의 깐찌(K??ci)에서 매우 널리 성행되었다. 얼마 후 이곳은 상좌부 교도들의 중요한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3) 제3결집과 전도사 파견


부파분열 후 다시 100년이 경과한 뒤, 아쇼까(A?oka)왕 재위 기간에 제3결집이 개최되었다. 당시에는 법과 율의 양면으로 비정통파의 견해를 가진 많은 비불교도들이 불교 승려가 되어 승단에 들어왔다. 그로 인해 포살 의식이 약 7년간 빠딸리뿟따(P??aliputta)에서 실행되지 못했다.


아쇼까왕은 당시 가장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목갈리뿟따 띳사(Moggaliputta tissa) 장로와 상의하여 많은 비정통파 승려들을 승단에서 추방시켰으며, 그들의 이단적인 견해들을 진압시켰다. 왕은 가능한 한 승단에서 계율을 유지하고 승단을 정화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 결집은 목갈리뿟따 띳사의 지도력 아래 빠딸리뿟따에서 오직 정통파 승려들에 의해 개최되었다. 아쇼까왕은 결집을 비호했고, 정통파 승려들을 지지했다. 제3결집은 9개월간 개최되었다. 목갈리뿟따 띳사는 결집에서 결론을 도출한 후 아쇼까왕의 후원 아래 불교의 전래와 발전, 그리고 전파를 위해 다른 9개국에 종교적 전도단을 파견했다. 이때 파견된 전도사와 지역 혹은 나라 이름은 다음과 같다.


①맛잔띠까(Majjhantika, 末單提)는 캐시미르(K??m?ra)와 간다라(Gandh?ra)에, ②마하데와(Mah?deva, 大天)는 마히삼만달라(Mahisama??ala)에, ③락키따(Rakkhita)는 와나와시(Vanav?s?)에, ④담마락키따(Dhammarakkhita)는 아빠란따까(Apar?ntaka)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그리스인이었다고 한다. ⑤마하담마락키따(Mah?dhammarakkhita)는 마하랏타(Mah?ra??ha)에, ⑥맛지마(Majjhima)는 히마완따빠데사(Himavantapadesa)에, ⑦소나(So?a)와 웃따라(Uttara)는 수완나부미(Suva??abh?mi, 金地國)에, ⑧마힌다(Mahinda)는 땀바빤니(Tambapa??i, La?k?d?pa)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맛잔띠까는 캐시미르와 간다라 두 곳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도합 9개국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일론에는 아쇼까왕의 친아들 마힌다 장로가 파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세일론의 전승에 따르면,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의 지시로 아쇼까왕은 불교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때까지는 단지 필요한 것을 보시하는 자(paccayad?yaka)였으나, 그것만으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황제 자신이 불법의 상속자(s?sanad?y?da)가 되기 위하여, 그의 아들 마힌다와 딸 상가밋따(Sa?ghamitta)를 승단에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승단에 들어온 마힌다와 상가밋따를 특별히 세일론으로 파견한 것은 당시 인도의 아쇼까왕과 세일론의 데와남삐야 띳사(Dev?nampiya Tissa, B.C. 247-207 재위)왕 사이의 각별한 친분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3결집 기간과 이 결집 이후 목갈리뿟따 띳사에 의해 9개국의 다른 나라로 종교의 전도단을 파견한 것은 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불교의 승려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포교하기 위해 외국에 간 것은 역사상 최초이기 때문이었다. 제3결집은 세일론, 미얀마와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상좌부라는 형태의 불교가 기원전 3세기 후반에 아쇼까왕에 의해 파견된 불교 승려들에 의해서 세일론과 동남아시아에 전래되었다. 상좌부가 세일론에 전래된 이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상좌부 불교의 본부가 되었으며, 거기서부터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어 크게 번성했다. 인도에서 상좌부가 사라진 이후 중요한 본부로서 세일론은 상좌부 형태의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3. 동남아 상좌불교의 현황


현재 동남아시아의 대표적인 상좌불교 국가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이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앞의 세 나라에 비하면 그 세력이 약한 편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동남아의 상좌불교는 근본적으로 그 뿌리가 같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각국의 전통과 역사에 따라 그 특징이 약간 다르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스리랑카는 승려의 교육(敎育), 태국은 지계(持戒), 미얀마는 수행(修行)에 역점을 두고 있는 점이 다르다. 동남아 3국의 불교 현황을 살펴보자.


1) 스리랑카의 불교


세일론(현재 스리랑카)의 불교 개교(開敎)는 아쇼까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에 의해 비롯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왕 데와남삐야 띳사(Devanampiya Tissa)는 마힌다에게 귀의하여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는데, 아누라다뿌라(Anur?dhapura)에 ‘마하위하라(Mah?vih?ra, 大寺)’를 건립하였다.


또한 아쇼까왕의 딸 상가밋따(Sa?ghamitt?) 비구니는 마가다의 붓다 성도지로부터 보리수를 이식하였다. 어쨌든 아쇼까왕 당시 세일론에 불교가 초전(初傳)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할 수 있다. 세일론에서 발견된 오래된 각문(刻文)에는 아쇼까왕 시대의 문자와 매우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있다.


그 후 이 섬에서 전개된 불교는 수많은 성쇠의 변천을 겪어왔다. 띳사 왕 후 200년 정도 지나 둣타가마니(Du??hag?ma??)왕이 출현하여 도시 근교에 마리짜왓띠(Maricava??i) 사찰을 지어 승단에 바쳤으며 여러 가지 탑(塔)도 세웠다.


다시 수십 년이 지나 왓따가마니 아바야(Va??ag?ma?? Abhaya)왕 때 그의 귀의를 받은 마하띳사(Mah?tissa) 장로는 왕이 바친 아바야기리 위하라(Abhayagiri vih?ra, 無畏山寺)에 머무르면서 또 다른 부파를 세웠다. 이로써 세일론의 불교는 대사파(大寺派)와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의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또 그때까지 구송(口誦)으로만 전승되어 오던 삼장(三藏)을 비로소 문자로 기록하였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현존하는 팔리문헌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3세기 중엽 고타바야(Go?h?bhaya)왕 때 ‘닥키나 위하라(Dakkhi?a vih?ra, 南寺)’가 독립하였다. 이 파는 후에 제따와나 위하라(Jetavana vih?ra, 祇陀林寺)라고도 불리어졌으며, 4세기에서부터 5세기 초기에 걸쳐 크게 번성한 반면 대사파는 그 세력을 잃게 되었다. 5세기에 들어와 대사파에는 유명한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를 비롯한 주석가들이 나타나 많은 주석서들을 남겼다. 이 무렵 대사파의 세력은 옛날 같지는 않았지만 상좌부의 정통을 고수하려한 흔적이 엿보이고 있다.


요컨대 기원전 3세기에 마힌다 장로가 세일론에 상좌불교를 전래시켰으며, 거기에서 상좌불교를 굳건하게 설립했다. 세일론의 마하위하라(Mah?vih?ra, 大寺)는 상좌불교의 최고 중심지가 되었다. 상좌불교도들은 세일론에서 테라와딘(Therav?din, 上座部敎徒), 위밧자와딘(Vibhajjav?din, 分別說部敎徒)로 알려졌다. 그러나 ??까타왓투(Kath?vatthu, 論事)??는 스타위라와다(Sthavirav?da) 혹은 위밧자와다(Vibhajjav?da) 대신 사까와다(Sakav?da)라는 용어가 적합하다고 했다. 상좌부 혹은 분별설부는 나중에 제따와니야(Jetavaniya, 祇陀林寺派), 아바야기리와신(Abhayagiriv?sin, 無畏山寺派), 마하위하라와신(Mah?vih?rav?sin, 大寺派)이라는 세 부파로 분열되었다.


그 후 스리랑카는 450여 년 동안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처음에는 포르투갈(1505-1658)의 지배를 받았고, 이어서 네덜란드(1658-1796)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리고 영국(1796-1948)의 지배를 받았다. 식민지 지배를 받는 동안 불교는 크게 박해를 받았다. 그 결과 불교사원은 피폐해졌다.


현재 스리랑카에는 세 개의 종파가 있다. 이른바 씨암파(Siam-nik?ya)·아마라뿌라파(Amarapura-nik?ya)·라만냐파(R?ma??a-nik?ya)가 그것이다. 이 세 종파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종파는 씨암파이며, 1753년 태국의 우빨리(Up?li) 장로가 비구 25명과 함께 스리랑카로 와서 구족계를 전해주면서 시작되었다. 씨암파는 다시 아스기리야(Asgiriya)와 말왓따(Malwatta)로 양분되어 두 명의 종정(宗正)을 두고 있다.


 아라마뿌라파는 씨암파가 창종된 지 55년 후인 1808년에, 라만냐파는 그 후 56년 뒤인 1864년 일단의 스리랑카 스님들이 버마에 가서 구족계를 받아 돌아와서 창종한 종파이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3개 종파에 속하는 사찰의 총 숫자는 10,035개이고, 승려의 총 숫자는 32,715명이며, 이 중에서 비구는 15,397명이고 사미는 17,318명이다.


2) 태국의 불교


태국의 불교 역사는 곧 태국(Thailand)의 국가 역사이다. 국가·불교·왕은 하나 속의 셋(Trinity or Three in one)으로 서로 의존 관계에 있다. 불교는 국가의 종교, 즉 국교는 아니지만 불교 전래 이후 깊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태국의 불교 전래 시기는 둘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아쇼까왕이 소나(So?a)와 웃따라(Uttrara)를 수완나부미(Suva??abh?mi, 지금의 Nakon Pathom)에 파견했을 때였다. 두 번째는 스리랑카의 불교가 씨암의 첫 번째 통일국가의 수도였던 수코타이(Sukhothai)에 전해졌을 때였다. 태국의 상가는 세 가지 원칙, 즉 계율과 승가법, 그리고 타이의 관습을 준수한다.


현재 태국에는 2개의 상좌부 종파가 있다. 이른바 ‘마하니까야(Mah? Nik?ya)’와 ‘담마유트니까야(Dhammayut Nik?ya)’가 그것이다. 마하니까야는 수코타이 왕조시대에 스리랑카의 승려들에 의해 성립된 승가와 연계되어 있는 다수파이다. 담마유트니까야는 후에 왕이 된 몽쿠트(Mongkut, 1804-1868) 왕자가 1833년 설립한 소수파이다. 담마유트니까야는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작은 규모의 승단이다. 몽쿠트 왕은 즉위하기 전 27년간 승려로 지내면서 복고적인 불교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태국 불교의 특징은 ‘승가법(Sa?gha Act)’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태국의 승가법은 1902년에 제정되었으며, 1941년에 제2차 개정되었고, 1962년에 제3차 개정되었으며, 마지막으로 1992년에 다시 개정되었다. 태국불교의 두 중요한 전통, 즉 중국과 베트남계의 대승불교와 마하니까야와 담마유트니까야의 상좌불교는 승가법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다만 승왕(僧王, Supreme Patriarch, Sa?ghar?ja)은 왕이 상좌부 중에서 한 명을 임명하는데, 종신제이다. 태국 승가의 중요한 정책은 ‘최고승가회의(Supreme Sa?gha Council)’ 혹은 ‘대장로회의(Mah?thera Sam?khom)’라고 하는 최고 의결기구에서 결정된다. 이 회의는 8명의 종신회원과 승왕이 임명한 순환회원 1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태국의 승려는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상가법’에 규정되어 있다. 스리랑카와 미얀마에서는 승려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이 점은 태국과 다르다. 태국 불교는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왕실은 불교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태국의 불교교육은 크게 교리학습과 팔리학습으로 구분된다. 교리학습은 3단계로 되어 있고, 팔리학습은 9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태국어로 가르치는 3단계의 교리학습은 비구와 사미를 위한 기본 교육으로 기획되었다. 팔리학습은 태국어를 팔리어로 팔리어를 태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배운다. 9단계 시험을 통과하면 왕의 지원과 함께 학사학위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다. 하지만 많은 승려들은 이 시험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팔리시험에 응시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승가에서는 팔리학습의 최고 단계를 박사학위와 동등하게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태국의 현대 불교교육은 두 파에서 운영하고 있는 두 개의 불교대학에서 담당하고 있다. 마하니까야의 마하출라롱콘라자위달라야 대학교(Mahachulalonkornrajavidyalaya University, MCU)와 담마유트니까야의 마하마쿠트 대학교(Mahamakut University)이다. 두 대학은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 국립이다. 두 대학 모두 승려와 재가불자 모두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으며, 학사에서 박사과정까지 개설되어 있다.


 특히 마하출라롱콘라자위달라야 대학교는 4개의 단과대학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태국 내에 10개의 캠퍼스와 10개의 교육센터(학습장)가 있다. 그리고 한국·대만·싱가포르 등 3국에 자매학교를 두고 있다. 태국불교의 현황을 살펴보면, 2002년 현재 6300만 인구 중 94%가 불교도이고, 32,000개의 사원이 있고, 265,965명의 비구, 87,695명의 사미가 있다.


3) 미얀마의 불교


미얀마의 공식 국가명은 ‘미얀마 연방(Union of Myanmar)’이다. 미얀마는 1989년 5월 27일 국명을 ‘버마(Burma)’에서 ‘미얀마(Myanmar)’로 바꾸었다. 미얀마라는 명칭은 17세기경부터 이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미얀마 국명은 범어 Brahma-de?a(‘범천의 국토’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미얀마의 상좌부 불교는 11세기 중엽 상부 미얀마의 파간(Pagan)을 중심으로 버마족에 의한 최초의 통일 국가를 건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버마족의 영웅 아나와라따(Anawrata 또는 Anuruddha, 1044~1077년 재위, ‘아노야타’라고도 함)왕은 하부 미얀마의 몬족의 나라 타톤(Thaton)을 공격하여, 그곳으로부터 500명의 상좌부 승려를 팔리어 삼장(三藏)과 함께 파간으로 데려와서 미얀마 상좌부 불교의 확립을 꾀하였다.


 그 후 아노야타왕은 스리랑카의 대사파(大寺派, Mah?vih?ra)로 승려를 보내어 대사파 전승의 상좌부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파간 왕국은 13세기말(1287년) 몽고(元)의 쿠빌라이 칸(Kublai Khan)에 의해 왕국이 멸망하기까지 5천여 불탑과 사원을 건설하면서 상좌부 불교를 발전시켰다.


파간 왕국 멸망 후 200여 년간의 혼란기를 거쳐서 15세기 후반에 몬족 출신의 담마쩨디(Dhammacedi, 1472~1492 재위)왕은 남부 미얀마의 페구(Pegu)를 중심으로 페구 왕조를 일으킨다. 담마쩨디왕은 1475년 스리랑카로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 다시 스리랑카 대사파의 상좌불교의 올바른 계율의 맥을 도입하여, 당시 분열되어 있던 미얀마의 승단을 통일한다.


 이로써 미얀마는 파간 왕조의 아노야타왕에 이어 두 번째로 상좌불교의 부흥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는 미얀마 불교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미얀마 불교는 16세기의 법난을 거쳐 17세기에는 가사의 착의법을 둘러싸고 승단의 정통성 문제가 생겼다. 즉 승려가 마을에 들어갈 때 가사로 어깨를 가려야 하는가 한쪽만 가려도 되는가 하는 문제로 승단은 편단파(偏袒派)와 통견파(通肩派)로 분열하여 18세기에 그 정점에 달했다고 한다.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왕은 보도파야(Bodawpaya, 1782-1819)왕이다. 그의 종교 정책은 ⑴ 미얀마의 상좌부를 통견파로 통일하고 ⑵ 종교정화위원회를 설치하여 승단을 정비하려고 하였다. 또한 스리랑카의 낮은 카스트의 사미의 수계를 위해서 스리랑카의 사미 몇 명을 당시의 수도 아마라뿌라에 불러 비구계를 받게 하였다. 이들이 스리랑카에 돌아가서 아마라뿌라파를 형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보도파야왕에 의해 시도된 승단의 조직 체제 정비는 19세기 후반에 즉위한 민돈(Mindon, 1852-1877)왕에 의해서 한층 강화된다. 민돈 왕은 8명의 학식 있는 장로로 형성된 종교회의소를 수도 만달레이(Mandalai)에 두고 상좌부 승려와 사원을 지도하고 감독하도록 하였다. 1871년 민돈왕은 상좌부 제5차 결집을 개최해서 2,400명의 승려가 만달레이에 모여 팔리삼장과 주석서를 정비, 편찬하여 대리석 729매에 새겨서 만달레이의 쿠토도(Kuthodo)탑에 보관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영국의 식민지 등의 영향으로 승단의 질서가 흐트러지자, 승단 내에서 자체 정화를 위해서 몇몇 종파가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종파가 쉐진(shwegyin)파, 드와라(Dwara)파, 켓트윈(Hugettwin)파이다. 민돈왕의 종교회의(Thudhamma)에 기인하는 투담마파는 위의 세 파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한 승단 내부의 문제가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자 민돈왕이 중재에 나서서 위의 세 파를 인정하게 되었다. 위의 세 파는 하부 미얀마에서 활동하였는데, 계율을 엄수하고 스승과 제자간의 복종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세 파의 활동에 자극받아 상부 미얀마의 승단도 정화되기 시작했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는 고승들이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불교 시험 제도는 왕조 시대부터 시작하여 영국 식민지 시대에도 1895년부터 46년간 계속되었다. 1948년 미얀마는 독립하였다. 독립 후 초대 수상인 우 누(U Nu)는 승단 및 불교 진흥을 위해서 많은 개혁을 하였다. 1954년~56년까지 거행했던 제6차 결집은 불멸 2,500년 기념사업으로 진행된 불교진흥 사업의 하나였다. 1962년 네 윈이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정교(政敎) 분리 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팔리 국가시험의 실시, 불탑의 보수 등의 불교진흥을 위한 사업은 계속되었다.


1980년 5월 24일부터 27일까지 미얀마 전 종파 합동 회의가 개최되어 종교와 정치적 문제, 종교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미얀마의 전 9종파를 통괄하는 조직의 설치, 종교적 분규의 해결, 출가 등록제와 신분의 규정 확립이라는 세 가지 사항을 입법화하였다.


미얀마 불교의 교학에 있어서는 두 가지 팔리경전 시험이 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팔리 국가시험과 사설시험이다. 팔리 사설시험은 승려와 재가자가 중심이 된 감독 단체가 진행을 감독한다. 미얀마의 승려 교육기관은 크게 사설 교육기관인 전문 강원(Mahagandayong)과 국립 불교대학(State Pariyatti S?sana University)으로 대표된다. 사설 전문 강원이 전국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고, 국립 불교대학은 양곤(Yangon)과 만달레이(Mandalai)의 두 도시에 설치되어 있다.


미얀마의 종교 인구의 분포를 보면, 인구의 89.4%가 상좌부 불교도이고, 이슬람이 3.9%, 힌두교도가 0.5%, 기독교도가 4.9%. 미얀마 고유의 정영(精靈, nat) 신앙이 1.2% 기타가 0.1%이다. 미얀마는 종교 인구 분포에서 알 수 있듯이 스리랑카·태국·라오스·캄보디아 등과 더불어 상좌부 불교 국가임을 알 수 있다.


1995년의 미얀마 종교국의 통계에 의하면, 미얀마에는 전체 승려의 약 87%를 차지하는 수담마(Sudhamma? or Thudhamma)파와 8%를 차지하는 쉐진파(Shwegyin)를 포함해서 9개의 공인된 상좌부 종파가 있으며, 미얀마의 승려 수는 비구가 162,195명, 사미가 234,595명으로 총 396,790명이다. 통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성 출가자(thira-shin)의 수는 3만 또는 9만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미얀마도 태국과 같이 남자는 일생에 한 번의 승려 생활을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사미계를 받고 절에서 생활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다.


현재 상좌불교 국가 중에서 수행의 전통이 가장 널리 보급된 나라는 미얀마이다. 전국 각지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수많은 명상센터(Meditation Center)가 있고, 이곳에서 다양한 수행법들이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상좌불교 국가보다 두드러진 현상이며, 미얀마 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의 동남아시아 상좌불교는 스리랑카에서 유래된 것이다. 기원전 3세기 스리랑카에 전해진 상좌부는 그곳에서 교의를 정비한 다음 벵갈만을 건너 동남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런데 후일 스리랑카 불교가 유럽의 기독교 국가의 식민지로 인해 쇠퇴하자, 이번에는 동남아시아가 스리랑카 불교의 재건을 도왔다. 이처럼 상좌불교의 역사는 서로 돕고 보완하는 종교교류의 역사였다.


이를테면 스리랑카는 11세기에 위자야바후(Vijayab?hu) 1세가 버마의 아노야타왕의 도움을 받아서 법통을 계승하였다. 반대로 13세기가 되어 버마의 파간 왕조가 멸망함으로써 버마의 상좌부도 함께 쇠퇴하고 만다. 그리하여 페구 왕조의 담마쩨디(Dhammacedi, 1472-1492 재위)왕은 1476년에 비구와 사미들을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콜롬보 교외의 깔야니(Kaly???)(지금의 Kala?iya)에서 정식으로 수계를 받게 했다.


이 왕이 깔야니(Kaly???) 비문을 남겨 인도 불교의 상황을 전해 주고 있다. 버마 상좌부의 주류는 이때 전해진 것이다.


또한 스리랑카는 16세기 이후, 포르투갈과 그 뒤를 이은 네덜란드에 의해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불교도 이때 고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16세기 말엽에서 17세기 후반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어서 쇠퇴해 가던 상가에 새로운 정통성과 활력을 불어 넣었다.


한편 태국에서도 라마 캄헹(R?ma Khamheng, 1275-1317)왕이 13세기에 비구들을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당시 대사파로 통일되어 있던 스리랑카의 불교계로부터 다시 정통적 상좌부 불교를 수입하였다. 이것이 태국의 마하니까야(Mah? Nikaya)이다.


버마에서는 11세기 중엽에 아노야타왕이 출현하여 남부 버마의 몬족(族)을 정복하여 파간에 수도를 정하고 몬족을 통해 알게 된 스리랑카계의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제정했다. 타이에서는 13세기 중엽에 수코타이 왕조의 제2대인 라마 캄헨왕이 스리랑카계의 불교를 국교화(國敎化) 하였다.


 또 캄보디아에서는 일찍부터 불교와 힌두교가 혼합된 종교가 오랫동안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9세기에 이루어진 앙코르왓트(Angkor Wat)의 장엄한 불교 유적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다가 자야와르만(Jayavarman, 1181-1218 재위) 7세 때인 1181년에 스리랑카로부터 상좌부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되었는데, 14세기 중엽에 이 앙코르 왕조가 태국인들의 세력에 의하여 붕괴되자, 캄보디아에는 상좌부 불교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남아시아의 불교는 상좌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남방 상좌부라는 한 계통으로만 발전되어 온 것은 아니다. 동남아시아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인도문화의 영향권에 있었다. 그래서 여러 형태의 인도문화가 들어왔다. 이를테면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 힌두교 등 다양한 형태의 신앙들이 도입되었다. 일종의 혼돈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상좌부 불교로 정비되었다. 그 이면에는 각각 그 지방이나 나라에서 상좌부 불교를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국교적인 위치를 공고히 해 준 뛰어난 국왕의 힘이 밑받침되었다. 현재의 동남아 상좌불교는 그 나라에서 국교(國敎)는 아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보호 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마성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초기불교 인간관 연구(Man in Buddhist Perspective)’로 부(副)철학박사(M.Phil.)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학교(경주) 불교학과 강사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태국 마하출라롱콘라자위달라야대학교 한국분교를 비롯한 각종 불교교양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 명상스쿨
글쓴이 : 선 암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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