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 열린 세계의 빛으로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이 셋의 본바탕이 진여공성(眞如空性)인 데서 하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중생은 스스로가 진여공성인 줄을 알지 못한 상태고 부처님은 진여공성을 구현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이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삶을 소외된 삶, 번뇌에 물든 삶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 삶의 바탕이 원래 공(空)하기 때문에 수행에 의해서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아는 것이 가능합니다.
본래면목이란 늘 말씀 드렸듯이 연기 관계에서 하나된 온생명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몸과 마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을 떠나서 마음이 있을 수 없으며 마음을 떠나서 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마음과 몸을 인간의 의식과 신체로 한정시킬 수는 없으니, 법계 전체가 마음이며 몸인 것에서 연기의 총상(總相)으로 하나이며 이것이 인간 개체 생명의 장에서도 하나로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수시로 변합니다. 어느 것 하나 머뭄 없이 변화 속에서 제 모습을 갖고 있으니 변화가 자기 정체성을 유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인간과 전체 법게의 관계도 또한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전체의 한 사람의 모습을 있게 하는 것도 몸과 마음의 관계와 아무런 처이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볼 때 한 개체의 생과 사는 개체의 생과 사로 보는 데서는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우주 법계의 변화를 그대로 담은 채로 한 인간의 모습을 있게 한다고 볼 때는 생사가 있지만 이미 생사를 떠나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모든 존재는 관계의 그물망으로 하나되어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독립된 길체로서의 개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관게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계 그 자체는 나눌 수 없지만 개체란, 관계 안에서 더욱 찬연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개체를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연기실상인 생명의 장에서 낱낱은 연속적으로 불변의 존재자로 존재하거나 단지 일화적인 존재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생명의 장과 관계 없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독립된 개체로 실존을 한전시킬 때는 유론(有論)이나 무론(無論) 또는 상주론과 단멸론에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허위의 견해 속에 자신을 함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모습을 있는 대로 알지 못하고 단지 생각으로 만든 세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의 세계에 사는 것을 닫힌 업의 시공에 사는 것이라 하여 중생의 삶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 무아의 삼매 속에 사는 부처님의 세계란 열린 시공의 삶으로, 같은 시공간에 있는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시공을 사는 것입니다. 화엄의 중중무진으로 겹친 시공에서 보면 시공이란 하나의 단일한 시공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공이 동일시공에 겹쳐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삼계의 중생이란 무한시공의 다른 모습도 생각할 수 있지만 동일시공에 무한히 겹쳐 있는 사공에서의 다른 모습, 곧 우리 눈과 귀로는 파악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닫힌 마음의 중생업을 버릴 때, 해인삼매 가운데서 동일시공과 무한시공에서 사는 모든 중생과 사물이 제 모습대로 삼계에 살면서 삼계를 벗어나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해인삼매의 무한히 열린 사공에서 한없는 공덕으로 상호 열린 세계의 빛을 나투고 있으며 이 빛을 자신의 모습 그대로 받아서 생명의 불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생명의 찬연한 불이면서 동시에 무한히 열린 깨달음의 세계에 생명의 불꽃을 나누고 잇습니다. 이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이익입니다. 유위로 조작된 생각이 열리면서 나타난 온갖 중생들의 참 생명의 연기인 비로자나 부처님의 빛을 나누는 것이지요.
스스로 비로자나 부처님이면서 동시에 이웃을 비로자나 부처님으로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중생 하나도 비로자나 부처님의 빛의 생명을 떠날 수 없으며 어떤 한 생명체에 의해서 나머지가 조작되지도 않습니다.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으로 상호 무난히 침투하면서 법계의 보배구슬을 단 그물의 모습으로 함께 있습니다. 함께 살고 있는 데에서만이 부처님의 빛으로 있는 것이며 개체의 별상(別相)은 이 부처님의 모습에서의 별상일 뿐 이 관계를 떠나서 다른 부처님의 별상이 아닙니다.
중생의 얼굴만큼이나 많은 부처님이지만 낱낱 부처님은 다른 모습의 부처님이 그와 같이 존재하게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모습이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떠나 있습니다. 이것이 빈 마음의 상호침투입니다. 따라서 무한히 많은 부처님들이 자기 모습을 비운 데서 자신의 모습을 갖게되고 이웃의 무한히 많은 부처님의 얼굴을 갖게도 하고 있습니다.
이 빈 모습이되 자기 모습을 갖는 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중생의 그릇입니다. 단지 닫힌 모습인 업의 나툼만으로 중생을 제한해서는 안 도비니다. 화엄삼매인 해인삼매란 바로 모든 중생의 모습 그대로 열린 세계의 빛으로 있는 것을 알 때 나타난 무아의 삼매이기 때문입니다. 이 해인삼매에서 봤을 때 자신의 모습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도 그대로 부처님이 죕니다.
이것은 모든 중생과 사물이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이니 모든 중생과 사물이 본래 자아가 없으며 모습을 갖고 있지 않은데서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그와 같은 모습을 갖게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 없는 삼매에서 모든 ㅂ모습의 힘들이 내 모습을 갖게 하여 내가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내 모습이 바로 부처님의 모습이며 그 가운데 모든 중생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이 모여서 내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중생으로서의 자아를 갖지 않는 데서 법계중생으로 부처님이 되고, 법계중생의 제 모습으로 그릇[器]됨을 갖고 있으나 이것은 아울러 이웃 부처님을 만드는 것이니, 무한히 펼쳐진 부처님세계를 이룩하게 하는 것이 또한 중생 자신의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의 이익을 구하려고 할 때는 한 톨의 밥도 진정한 의미에서 소화시킬 수 없지만 부처님을 이루는 베품은 그대로 온 우주 법계를 소화시킬 수 있으니, 베품만이 이익인 것이 해인삼매에서 얻는 중생의 이익입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켜진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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