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마음의 보배로운 삶
<법구경(法句經)>에 보면 "비가 금이 되어 내려도 끝나지 않을 갈증, 자꾸만 되살아나는 욕망"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또한 "구도자여! 아무 것도 원하지 않을 때까지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마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욕망이란 나와 나의 것을 가지는 마음입니다. 나가 있는 한 그것을 채우는 나의 것이 있어야 하며 이것은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세우고 나면 만족할 줄 모르는 나의 것을 가지려는 욕망의 끝은 슬픔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 "욕망을 가라앉히면 연꽃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듯 슬픔도 그렇게 떨어져 나가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가 있는 한 너가 있고 너의 것이 나의 것이 되기 전까지 계속되는 부족함은 설사 너의 것이 모두 나의 것이 된다 해도 그칠 줄 모르는 갈증, 끝내는 허무의 늪에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현재에도 사회적으로 그 지위나 경제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고 여긴 사람들 중에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되돌아보는 순간 허무로 채워지는 절망감 앞에 한없이 무력해지다 끝내 아이의 정신상태로 퇴행해 버린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욕망이란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본질이 꿈같고 이슬같기 때문입니다. 찬란한 무지개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손을 내밀면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는 허상을 좇는 것이 욕망의 모습입니다. 이 허상의 욕멍에 대한 허위의식이 절대적 지배를 원하면서 사회적 분만족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 결과 사회적 허무 앞에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에서 절망하고 있는 군상이 시대시대의 역사적 현상일 것입니다. 욕망을 좇고 있는 현실의 자기를 되돌아 봐야 합니다. 아무런 바람 없이 황소가 물을 들여다 보듯 자기 삶을 투명하게 지켜봐야 합니다. 바람 없이 지켜보지 않으면 허위의식에 질식돼 있는 자신을 감당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어린 아이의 연령으로 퇴행해 보린 어른이 그 좋은 예입니다.
단지 지켜보십시오. 아무 것도 원하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십시오.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지금껏 우리가 의지해 왔던 모든 것들은 허상을 좇는 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를 허위의식이라고 하지요. 스스로가 만든 허상에 스스로 얽매여 있는 현실을 놓으십시오. 이 생각에서 자유스러워질 때 연꽃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나가듯 슬픔의 현실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때 그렇게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던 찬란한 무지개가 성큼 자기 앞에 공존하게 됩니다. 잡으려고 하는 만큼 멀어지던 것이 그저 지켜 보는 것으로 있을 때 함께 살아 잇습니다. 현실은 가지려는 자에 의해서 왜곡되기도 하지만 지켜보는 자에게는 빛으로 존재합니다. 지켜봄이란 삶조차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삶을 놓을 때 삶이 삶답게 살아가려면 현실에 만족하게 되고 집착은 사라집니다. 개인과 국가가 그 소유를 키우려고 하는 현실, 소유가 많은 만큼 잘 산다는 왝속 앞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무슨 힘이 있을까? 많이 소유하는 것은 그만두더라도 하루하루의 삶에서 실존의 절망을 감당해야 할 가난은 또 어떻게 할까? 불만족의 원인인 집착이 현실에 만족했을 때 사라진다고 하지만 죽음이 삶이 돼도 누릴 수 없는 만족, 여기에 이르면 삶을 소유하는 자는 누구나 감당해야 할 절망일 것입니다.
개인과 사회적 절망을 해소하는 것은 소유를 비우는 데서 출발합니다. 보시(布施)가 그것입니다. 나누고 나누어 가장 적은 것으로 살 때 도솔천의 삶이 됩니다. 작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삶이 개인과 사회적 실존을 지켜가는 오직 한 길입니다.
이 길이 바로 해인삼매의 터전을 닦는 것입니다. 적게 가진 만큼 온 삶을 살게 되지요. 이때 보는 삶은 비가 금이 되어 내려도 끝나지 않는 갈증이 아니라 보는 것마다 듣는 것마다 부처님의 모습이며 설법이 되어 따로 의지할 곳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화엄에서는 모든 법들이 그대로 불성이라고 했으며 <아미타경>에서는 삼라만상 모두가 아미타불을 염(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능가경>에서도 보살이 열반을 취하지 읺는 것이랴말로 완전한 열반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열반을 구하려는 마음조차 쉬어 버린 빈 마음이 되어 조그만 바람마저 없어졌을 때 고솔천의 삶을 뛰어넘어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혜덕상으로 보배 중의 보내입니다. 곧 우주가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혜덕상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혜덕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빈 마음, 곧 조그만 바람마저 완전히 사라져 진여공성의 삶이 되는 마음이 우주에 가득찬 지혜덕상이며 비처럼 쏟아지는 보배입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모습으로 나투는 빈 마음의 공덕은 한량 없는 사공간에서 빈틈 없이 존재합니다. 하나라도 부족함이 없어 일법계의 일체를 관통하고 모든 생명들을 살찌게 하면서 그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하고 있는 법계일상(法界一相)이 바로 빈 마음입니다.
여기에는 중생과 중생을 이익케 하는 보배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중생이 있고 보배가 있다고 하면 어느 한 중생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한정된 개인이면서 동시에 한정을 넘어서기를 원하는 모순의 벽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이 본래 빈 모습으로 상즉상입의 일법계를 자신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정을 넘어선 그곳에서 참으로 만족돼 있는 자신으로 살게 됩니다.
만족된 삶으로 언제 어디서나 살고 있는 보배비가 허공에 가득하다고 비유했습니다.
중생의 삶이 그대로 법계를 가득 채운 보배가 되는 것으로 이밖에 다른 보배가 없습니다. 온갖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벗어나 참으로 빈 마음의 삶, 해인삼매의 삶, 본래 마음자리인 여의보배의 삶이 풍성하게 나툰 그 모습 그대로가, 어떤 비유로도 나타낼 수 없고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어떤 생각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부사의한 부처님으로 사는 모습입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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