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마음, 걸림 없는 세계로
생사에서 벗어나 생사 밖에 있는 해탈을 워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의 모습을 여실히 아는 여실지견(如實知見)에 의해서 생사가 고(苦)의 세계가 아님을 알게 되며, 아울러 모든 불만족이 그 자체로서 불만족을 낳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집착에 의해서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 등 4고 8고는 그 자체로서는 고가 아닙니다. 고의 근원은 집(集), 곧 자아의식으로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이는 자아(自我)의 허상을 유(有)나 무(無) 등으로 집착하는 것입니다. 자아가 그 자체로서 결정된 것이 없고 인연조건에 의한 나툼에 지나지 않은 것을 알게 될 때 공(空)의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깊은 반야바라밀을 닦을 때, 곧 집착이 단지 업에 의한 허상임을 알고 연기세계로 낱낱을 나투는 공에 대한 체득을 이룰 때, 모든 고액이 다 사라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고의 세계는 자아의식에 의해 시공이 제한된 세계입니다. 이 세계가 무상, 무아를 여실히 아는 수행에 의해 제한된 시공을 벗어나게 되는 순간,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하고 한없는 지혜광명의 부처님[無量光佛]인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이 나투는 것입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세계는 의(意)에 의한 시공의 제한인 업이 지멸(止滅)된 세계입니다.
이와는 달리 중생세간이란 의(意)의 닫힌 마음에 의해 자신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를 제한시키고 있기 때문에 매사에 걸리고 있습니다. 이 의의 걸림을 벗어난 것이 '여의(如意)'입니다. 때문에 모든 보배 중에 보배는 여의가 됩니다. 이것을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삼천대천 세계를 칠보로써 보시하는 것보다 빈 마음의 공덕이 더 크다'고 하였으며,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빈 마음이 근본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 빈 마음이 여의입니다. 앞서 끊임없이 변하는 무상이 그 극점에서 부동(不動)이며 이 부동이 오히려 온갖 동(動)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빈 마음이 온갖 공덕을 내는 바탕이 됩니다.
세상의 가장 값진 보배라 해도 그 가치는 제한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치척도를 재는 인간의 마음이 한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빈 마음은 아무런 제한 없는 마음이며 그 자체로 시공을 넘어선 마음으로 이곳에서 온갖 생명의 창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생명은 마음의 고향이며 마음은 드러난 생명들의 모습만큼 다양한 터전을 다 마련하니 마음이란 한정된 영역이 없기 때문입니다. 빈 마음의 한정 없는 생명창조의 모습은 중생의 제한된 의식을 넘어선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쉽사리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빈 마음의 한없는 생명인 지혜광명의 세계를 알고자 할진대 생각생각에 그 알고자 하는 알념(一念)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가 일념마저 사라져 무념(無念)이 됐을 때 알고자 하는 마음자리가 곧 한없는 생명의 지혜광명이 되어 그 자리에 부처님의 빛을 온몸으로 나투게 됩니다.
저 먼 곳 어디엔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지헤광명의 세계가 스스로가 서 있는 자리에서 열리면서 우주법게의 생명들에게 지혜광명의 세계를 여는 것입니다. 빈 마음의 생명창조의 세계는 그래서 생각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념의 빈 마음이 됐을 때는 온갖 시절인연을 따라 갖가지 생명들의 세상을 걸림 없이 펼치니, 화엄세계를 뜻하는 해인삼매 가운데 나타나는 모든 중생과 사물들의 걸림 없는 세게가 그것입니다. 이와 같이 걸림 없이 펼쳐지는 온갖 생명들의 향연이 빈 마음자리인 여의(如意)에서 뜻대로[如意] 나툰 것입니다.
뜻대로 생각할 수 없는 생명들의 향연을 풍성하게 나투는 것이 해인삼매(海印三昧)입니다. 해인삼매를 삼매 가운데 삼매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해인삼매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사람을 능인(能人)이라 하며 능인의 마음자리인 여의보배에서 뜻대로[如意] 낱낱 모습들이 제 모습대로 나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의보배인 마음자리가 중생의 마음자리를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의 마음자리가 그대로 능인의 마음자리입니다.
중생과 능인은 공성(空性)의 마음자리에서 아무런 차이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중생과 부처의 마음자리가 다르다고 한다면 중생이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 조동종의 개조(開祖)인 도원(道元)선사는 중생이 깨닫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화엄에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착한 마음이 일어나면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십시오. 그때는 착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이요 악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이때 선악의 분별이 사라지고 빈 마음의 법계 부처님이 온갖 마음으로 나툰 것이니 마음마음이 부처님의 세계요 낱낱 중생과 사물들도 또한 부처님의 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동심으로 온갖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대상에 따라 움직이면 안됩니다. 그때는 이미 스스로의 마음이 아니라 마음 밖에 또 다른 마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황벽선사께서 착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이요 악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이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마음이 아니니 빈 마음에서 나온 일체의 마음은 그대로 법계 부처님의 여의보배인 마음자리에서 뜻대로 나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성게의 두 번째 게송에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는 본래의 고요함이라 하였습니다. 이 마음을 조주스님께서는 평상심(平常心)이라 하셨습니다. 일체 현상이 마음에서 일어났으나 마음은 한 번도 고요한 모습을 잃지 않고 부동으로 있습니다. 움직임 그대로 움직이지 않음이며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온갖 움직임이 그 자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중생의 제한된 의(意)의 작용인 망념으로는 알 수 없으니 부사의(不思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스로 여의보배를 갖고 뜻대로 부처님의 해인삼매에서 생각을 넘어선 생명들의 장을 풍요하게 연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 그 자신은 모르고 있는 것을 <법화경(法華經)>의 '신해품'에서는 궁자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화엄경(華嚴經)>의 선재동자가 깨달음을 위해 여러 선지식을 참방하고는 마지막에 첫 번째 자리로 돌아와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를 열고 있는 것도 같은 경우입니다. 이 자리를 여의지 않고 뜻대로 여의보배인 마음자리에서 풍성한 생명의 장을 여는 것은 무아, 무상의 삼매체험, 곧 제한된 중생심의 시공을 벗어난 해인삼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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