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귀한 행복은 '바로 지금, 여기'다..........2013. 10,13 선교율 대법회
<법문>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의 내용을 깊이 살펴보면 대동소이하다. 사람의 지고한 가치를 깊이 인식하고 그를 통해서 제일 가까운 인연인 가정과 이웃과 온 세상을 행복하게 하자는 것이다.
사람의 지고한 가치는 법화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이 다 부처님이다’라고 하는 이 사실이다.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모든 사람을 다 부처님으로 존중하고 찬탄하고 공양하고 예배드리고 그 부처님을 향해 기도드리는 수행과 노력을 통해서 가정과 이웃과 온 세상을 행복하고 평화롭게 만들자, 저는 법화경의 내용을 한결같이 그렇게 해석한다.
상불경 보살품이나 제바달다품에서 그러한 내용을 확실히 보여준다.
제바달다는 부처님을 살해하려고까지 했던 불교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한 사람이다. 법화경에서는 그러한 제바달다에게 수기를 내렸다. 그의 본성이 석가모니 부처님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제바달다도 지극히 고귀한 가치를 가진 부처님이고, 부처님은 ‘제바달다는 나의 스승이다’ 라고까지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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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불교 공부나 불교 수행을 통해서 높은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것이 성불이든, 지극히 평화롭고 지극히 행복한 경지든
끊임없이 탐구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불교에는 행행본처(行行本處)요 지지발처(至至發處)라는 말이 있다.
간다고 갔지만 본래 그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바가 없다.
이르렀다고 하지만 한 걸음도 어디에 도착한 상황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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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다가 멀리 미국에 가든 아프리카에 가든 언제나 그 사람이고 어디를 가도 자기 자신이다.
하루를 수행하고 공부하고 이틀 삼일 일년,십년 내지 50년 60년 70년 긴 세월 동안 어딘가로 이르러 갔다손 치더라도 처음 출발한 그곳이다.
처음 출발한 그곳은 인간이 본래부터 변함없이 지니고 있는 고귀한 가치,그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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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불교 공부는 인간의 본래의 가치에 눈을 뜬다고 하는 것이다.
이미 본래 가지고 있는 그 자리다.그것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다. 불교공부는 다 그 사실 하나 알자고 하는 것이다.
만든 것은 조작이기 때문에 변하고 달라지고 없어지기 마련이다.
부처님은 일찍이 만들지 않고도 가지고 있는 것, 공부하지 않고도 본래 가지고 있는 것, 수행하지 않고도 가지고 있는 우리의 본성자리에 눈을 떴다.
실현해야만 내 손에 잡히는 경지가 아니라 실현하지 않고도 본래 이미 가지고 있는 그 경지에 눈을 뜨고 그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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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해서 내 손에 잡히는 것으로써 내 행복이라고 여긴다면 끝이 없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최고의 행복을 누려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온갖 학문을 연마하고 무술을 연마하고 여러 가지 노력을 했었지만 꿈을 설정해놓고 그 꿈이 실현되었을 때 비로소 행복을 성취했다고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만족되지 못함을 총명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일찍이 아셨다.
일국의 왕자로서 그 자리가 굉장한데도 성이 차지 않았다. 이것으로는 안되겠다 하여서 다 포기해 버리고 본래 있던 것을 찾아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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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우리가 모두 부처님 같이 다 포기하고 나설 수 없다. 그런다고 찾을 수도 없다. 그런 사람은 만 명 중에 한 두 사람이면 된다.
세속의 우리는 세속적인 꿈을 끊임없이 실현해 가야 된다. 그렇지만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그것만이 전부인 것으로 알아서는 안된다.
내 마음속에는 내가 그동안 실현한 것을 다 무시하고 앞으로 이뤄야할 꿈도 다 포기하더라도 그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더 훌륭한 지극히 고귀하고 행복한 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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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희망하고 기대하고 꿈꾸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실현해 가야 된다. 그런데 거기에 너무 집착하고 매달릴 일은 아니다. 그보다 더 위대한 본래적인 나의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꿈을 실현해 가되 본래 가지고 있는 완전한 행복이 또 내 가슴속에는 있다는 것을 늘 되돌아 볼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중도적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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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은 바로 이순간 여기다.
바로 이 순간 여기에서 행복해야 된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순간 여기에서 행복하고 편안하면, 내 본성에 대해서 뭔가 인식을 하게 되고 내 본성의 완전무결한 존재에 대한 눈을 뜨게 된다면, 그 이상 지고한 행복은 없다.
가장 고귀한 행복은 ‘바로 지금 여기’다.
오늘 이 순간 우리가 앉아있는 법왕루 바로 이 자리다.
우리가 집에 돌아가면 집에 돌아간 그 순간에는 바로 또 그 자리가 행복한 자리다.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에 앉은 그 순간이다.
그 순간 그 것이 최선의 삶이다.
매순간 내가 앉은 그 자리 그 이상은 없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가.
행행본처요 지지발처다.
행하고 행하고 가고 가고 또 가도 수행하고 수행하고 또 수행해도 본래의 그 자리다.
본래 사람이라고 하는 지금 이 순간이다.
이르고 이르렀다 해도 어떤 꿈을 실현하고 실현하고 또 실현했다손 치더라도 역시 실현하기 이전 출발하던 그 자리 그 순간이다.
행행본처 지지발처라는 말 속에 불교의 이치가 다 표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것을 우리가 얼마나 폭넓게, 깊이 있게 소화해 내고, 풀어서 이해하느냐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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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바달다품에는 두 가지 내용이 나온다.
앞부분은 지난 시간 공부한 내용으로 ‘제바달다도 궁극적으로 부처님이다’‘제바달다는 석가모니의 스승이다’ 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내용이다. 제바달다와 같은 원수를 부처님은 그렇게 녹여 냈고 소화해냈다.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부처님은 위대하고 존경할만한 분이다.
어리석은 불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석가모니가 제바달다를 항상 원수로 생각하고, 불교의 원수로만 생각한다면 부처님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 역시 같은 상황에서 부처님의 100분의 일만이라도 그러할 수 있다면 불교를 믿는 보람이 있다.
제바달다품 오늘 내용은 ‘용녀성불품’이다.
4. 지적(智積)보살과 문수(文殊)보살의 만남
(1) 문수보살의 교화
8. 이 때에 하방에서 다보 세존을 따라 온 보살들이 있었으니, 이름은 지적이었습니다.
다보 부처님께 ‘본국으로 돌아가사이다.’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지적보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여, 잠깐만 기다리라. 여기 한 보살이 있으니 그 이름은 문수사리(文殊師利)라 하느니라. 서로 만나서 묘한 법을 의논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라.”
앞에 나온 견보탑품에서 다보 부처님 이야기는 충분히 공부를 했다. 다보탑은 진정 우리들 자신이다. 바로 이 순간 여기에서 내 자신이 다보부처님이다.
이 순간 여기 있는 내가 많고 많은 보배다.
그것을 하나 깨닫기만 해도 법화경의 내용을 다 깨달은 것과 같다.
그런데 그 다보 보살님을 모시고 온 이는 지적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지혜 지(智)자 쌓일 적(積)자다.
불교의 모든 이름은 다 의미가 있다. 사찰 이름이나 사찰의 모든 문이나 계단이나 법당 이름이 다 그렇고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이나 보살의 이름도 그렇다.
지적보살은 지혜가 잔뜩 쌓였다는 것인데 누구만치 쌓였는가 하면 문수보살만치 쌓였다.
그래서 다보부처님의 제자로서는 지적이 대표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로서는 문수보살이 대표다. 지혜가 있어야지 서로 의논을 한다.
똑똑해야 대변인 노릇을 할 것 아니겠는가. 부처님 세계를 우리의 현실과 연결시켜서 생각해보면 경전이 재미가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지적보살에게 문수보살을 만나보라고 한다.
9 이 때 문수보살이 수레바퀴 같이 큰 천 개의 잎이 있는 연꽃 위에 앉았고,
함께 오는 보살들도 다 보배 연꽃에 앉아서, 큰 바다 속 사가라 용궁으로부터 저절로 솟아올라 오더니 공중에 머물러서 영축산에 이르렀습니다.
이 말 한 마디에 문수보살이 큰 바다속 용궁으로 부터 저절로 솟아올라왔다.
경전에 바다라는 말도 많고 용궁이라는 말도 많다.
화엄경도 심지어 바닷속 용궁에서 가져왔다고 표현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상징적인 이야기를 아주 잘 한다.
큰바다속이란 불법대해를 말한다.
경전에는 흔히 나오는 불법대해는 부처님 법(불법)이라고 하는 큰 바다를 뜻한다. 그 바다에서 가장 핵심되는 것이 용궁이다.
봉은사 판전에 있는 화엄경은 바로 그 용궁, 불법대해, 불법이라고 하는 큰 바다의 가장 중심되는 곳에서 표현해 낸 부처님 법문이다.
실제로 동해 바다 태평양 바다 어느 밑에 용궁이 있다고 상상하면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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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대해 불법중에서도 가장 중심되는 자리인 용궁에서 가져왔으니 화엄경이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 여기 문수보살도 바로 그 용궁으로부터 솟아났다. 불법의 중심자리가 인격화 해서 드러난 것이 문수보살이다.
문수보살은 불교의 지혜를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혜제일 문수보살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시고 그 깨달음의 내용을 다 표현해 낸 그 지혜의 가르침,그것을 사람으로 등장시켜서 이야기하기로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문수보살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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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문맹자가 많았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리고, 상으로 조성해 놓으면 그 그림과 상으로써 불법이야기를 다 할 수 있도록 짜여져 있다.
다른 종교도 역시 그렇다. 온갖 그림을 많이 그리고 형상을 많이 만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문수보살도 우리가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불법의 중심에서 문수보살이 저절로 솟아올라왔다.
...다시 연꽃에서 내려와 부처님 앞에 나아가 머리를 숙여 두 분 세존의 발에 예경하였습니다. 예경을 마치고 지적보살의 처소에 가서 서로 인사하고 한쪽에 물러가 앉았습니다.
석가모니의 말 한마디에 문수보살이 그런 행동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미 부처님의 지혜는 문수보살로 표현되어서 그 가운데 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적보살이 문수보살에게 물었다.
지적보살이 문수사리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보살님이 용궁에 가서 교화한 중생이 얼마나 됩니까?”
문수보살이 말하였습니다.
“그 수효가 한량이 없고 계산할 수 없고 입으로 설명할 수 없고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잠깐만 기다리면 저절로 증명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10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무수한 보살들이 보배 연꽃에 앉아 바다로부터 솟아 올라와
영축산에 나아가 허공에 머물렀습니다.이 보살들은 모두 문수사리가 교화한 사람들입니다.
문수보살이 언제 그렇게 많은 무수한 사람들을 제도했겠는가.
곧 나오겠지만 사람사람이 본래 부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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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두가지 면이 있다. 역사적 차원과 궁극적 차원이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여기 돌로 만든 불상이 있다. 불상을 조각한 것은 역사적인 차원이다. 그런데 돌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인 차원이다. 돌이 본성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궁극적인 차원과 역사적인 차원이 있다는 말씀을 내가 여러 번 하였다.
여기 나오는‘한 순간에 무수한 사람들을 제도했다’라고 하는 말을 바꾸어서 ‘이 법왕루에 앉아 계시는 모든 청중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라고 해도 하나도 허물이 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행행본처요 지지발처라고 하는 본래 가지고 있는 인간 불성, 인간여래, 사람부처라고 하는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입장에 있어서는 조금도 허물이 되지 않고 모순이 있을 수 없다.
문수보살 같은 이들은 인간의 그러한 입장을 환히 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을 대해놓고 그 사람이 김씨니 박씨는 남자니 여자니 하는 외형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본래적인 차원, 사람 사람이 동일한 궁극적 차원으로만 본다. 이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만이 들어온다. 본래적인 차원만 눈에 들어오는데 개별적인 차별상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구두 만드는 사람은 사람들 만나면 구두만 보인다고 하고, 양복 만드는 사람은 어디가도 양복만 눈에 보인다고 하듯이 이런 마음이 열려있는 불보살들은 사람을 볼 때 어떤 사람을 보더라도 심지어 제바달다를 보더라도, 천하의 극악무도한 깡패를 보더라도 그 사람의 본성을 본다. 본성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문수보살의 눈에는 모두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기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억지로 표현한 말이 절대 아니다.
...본래 성문들은 허공중에서 성문행을 설하다가 지금 모두 대승의 공(空)한 이치를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문수사리보살이 지적보살에게 말했습니다.
“바다에서 교화한 일이 이러합니다.”
그 많고 많은 사람들을 내가 바다에서 불법대해에서 교화했다.
무슨 물속에 가서 교화했겠는가.
불법대해에서 교화했다.
그리고 지적보살이 찬탄하였다.
11 그 때 지적보살이 게송으로 찬탄하였습니다.
“큰 지혜와 덕과 용맹으로
한량없는 중생들을 교화하신 일을
이제 이 여러 회중과 내가 다 보았습니다.
실상(實相)의 뜻을 널리 설하고
일승법을 열어 보이어
많은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여
깨달음을 빨리 이루게 하였습니다.”
실상,사람사람의 진실한 모습.
모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은 모두가 부처라는 것이다.
인간부처다. 사람부처다 하는 것이 사람의 실상이다.
사람의 현상은 차별된 모습이고 차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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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승법을 열어보인다.
일승법이 무엇인가. 일불승이다. 모든 사람이 그대로 다 부처님이다 하는 것이다.그러한 눈이 실상의 눈, 일승법의 눈이다.실상을 생각하는 눈, 일승법을 생각하는 안목으로 보면 사람 사람이 그대로 부처라고 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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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중생들이 널리 제도하여 깨달음을 빨리 이루게 하였다는 것은 무얼 조작해서 한 것이 아니다. 그대로를 두고 하는 소리다. 막연하게 상상하면 머리속에 별별 것이 떠오를 수 있지만, 정말 눈을 열고 보면 그대로 사람일 뿐이다.
*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인불사상을 주장한다.
사람이 부처다.
부처인 사람이며 사람인 부처다. 그런 소리를 끊임없이 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특히 법화경에 있어서는 더욱더 그렇다.
다음으로는 8세 용녀의 성불이다.
이것이 용녀성불품을 이야기 하는 근거다.
5. 팔세 용녀(八世龍女)의 성불
(1) 지적보살의 질문
12 문수사리가 말하였습니다.
“ 나는 바다 가운데서 오직 항상 묘법연화경만을 설하였습니다.”
연꽃같이 아름다운 진리의 가르침,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사람이 좋아한 경전이면 나도 좋아하고 싶다.
우리나라에 얼마 전에 왔던 틱낫한 스님은 프랑스에 망명하여서 명상센터를 건립한 베트남 스님인데 세계적인 명상가다. 그 틱낫한 스님이 제일 좋아하는 경전이 법화경이다. 틱낫한 스님은 법화경을 열심히 읽고 법화경을 사랑한다.틱낫한 스님이 쓴 법화경 해설서도 있다.
여러분도 법화경을 틱낫한 스님처럼 사랑하기 바란다.
틱낫한 스님 같은 그런 훌륭한 스님이 팔만대장경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경전이니까 우리가 한 번 믿고 따를만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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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용녀라는 말은 문제가 많은 말이다.
지대방에서는 ‘용이라는 말이냐, 8살 먹은 용새끼, 용 암놈 새끼라는 말이냐?’ 하는 이야기도 구구하게 많이한다.
그런데 틱낫한 스님은 8세용녀를 ‘8살 먹은 소녀’라고 표현했다. 시인답게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팔세 용녀를 여덟 살 먹은 소녀라고 표현하면 뜻이 좀 약하다.
전래적으로 이 대목을 축생성불 이라고 표현한다.
용은 실재하지 않는 상상속 전설의 동물이지만, 분류하면 축생에 들어가기 때문에 전통적인 경전해석은 ‘축생도 불성이 있고 축생도 성불했다’고 이대목을 해석하는 것이다.
축생이 성불하는데 순식간에 했다.
틱낫한 스님처럼 아주 예쁜 8살 먹은 어린 소녀라고 보면 축생성불이라고 하는 의미와는 많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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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순식간에 축생도 성불했다는 것은 축생도 불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유정무정이 개유불성이다.
그런데 조주 스님은 개가 불성이 없다 라고 하였다.
유정 무정이 전부 불성을 가지고 있다, 산천초목이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할 것 없이 모두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이다. 그것이 옳은 말인 줄 믿고 있었는데 이 시대 부처님인 조주스님이 불성이 없다고 하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다.
하늘이 무너져야 화두가 된다.청천벽력같이 들려야 그것이 화두가 된다.
그렇게 들리지 않으면 의심이 안된다.
억지로 의심 짜내서 할 필요가 없다.
자연스러워야 된다. 자연스러운 의심도 얼마 안되면 퇴색되어 버리는데 억지 의심이 얼마나 가겠는가.
*
내가 평소에 존경했던 노스님이 계시는데 지금은 열반하고 안계신 범용스님이다. 그 스님은 하루에 한 번 했으면 싶은 게 3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하루에 식사를 한 번 하는 것과, 잠을 한 번 자는 것과, 화두를 한 번만 드는 것이다. 차마시고 아침 점심 저녁먹고 오후쯤 출출하다고 참을 먹기도 하니까 한 번만 식사하면 좋겠다고 하는 말은 명언이다.
그런데 잠을 한 번 자고 싶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화두를 한다고 앉아서 끊임없이 꾸벅 꾸벅 졸기 때문이다.
그것을 횟수로 세면 한 시간에 열 번도 더 자는 것이다.
어렸을 때 선방에서 못을 쳐놓고 줄을 걸어서 목에 걸고 졸음을 쫓기도 하였다. 졸 때 목이 조여서 잠이 깨는 것이다. 칼을 앞에 받쳐서 뾰족한 쪽이 허리나 배에 가서 찔리도록 해놓기도 하였다. 옷이 있으니 상처는 나지 않지만 따끔하다. 수행하는 스님들은 잠과 심한 투쟁을 한다.
그렇게 한 시간에 열 번도 더 자니까 노스님이 하루에 잠을 한 번만 잤으면 좋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 말들른 부처님도 못하신 말이다. 피나는 수행을 해 본 데서 나온 말이다.
화두를 한 번만 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에 대해서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루에 화두를 한 번만 들다니요. 수행자가 그렇게 하면 됩니까?”내가 물었다.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순간 생멸이 심하다.
일찰나에 900생멸 한다. 일찰나는 120분의 1초다. 120분의 1초인 일찰나에 구백번 생멸하는 것이 우리의 의식 속도다. 그러니까 그 한 찰나 동안에 별별 망상을 다 부리고 화두가 수십 번 왔다 갔다 왔다 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도 하루에 한 번 딱 하면은 끝나야 된다.
여러 번 부를 필요 없다.한 번 관세음보살 하면 그것이 계속 지속되어야지 여러 번 불러서 놓쳤던 것 또 줍고 그럴 이유가 없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관세음보살을 하루에 한 번 밖에 안부른다.딱 한 번 부르면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대로 내가 관세음 보살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하루에 무(無) 라고 하는 화두 한 번 들면 하루종일 무다.
이뭣고 라고 하면 하루종일 이뭣고가 지속이 된다.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것 먹고 저거 먹고? 그게 아니다.
참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 공부랍시고 하고 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본래 부처인 자리를 발견해서 거기에 눈뜨라고 하였다.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본래 부처님 자리에 눈떠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다.
법화경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대승 경전은 성문과 차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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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가운데 항상 묘법연화경을 설했다.
...지적이 문수사리에게 물었습니다.
“ 이 경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 여러 경전 중의 보배입니다. 세상에서 희유한 것입니다. 중생들이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 경을 닦아 행하면 빨리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문수보살이 말하기를
(2) 문수보살의 설명
13 문수사리가 말하였습니다.
“사가라 용왕의 딸이 있어 나이가 여덟 살인데, 지혜가 있고 총명하여 중생들의 근성과 행하는 업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라니를 얻어서 여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깊고 비밀한 법장(法藏)을 다 받아 지니었습니다. 선정에 깊이 들어가 모든 법을 분명히 알고, 찰나 동안에 보리심을 내어 물러가지 않는 자리를 얻었습니다. 변재가 걸림이 없고, 중생들을 어여삐 생각하기를 갓난아기 같이 여깁니다. 공덕이 구족하여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연설함이 미묘하고 광대합니다. 자비스럽고 어질고 겸양하며, 뜻이 화평하여 능히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큰 성인이 마음을 쓰는 마음의 작용을 이렇게 표현했다.그런데 이미 그 여덟 살 먹은 소녀라고 하든 아니면 축생, 용의 딸이라고 하든간에 이미 그는 이렇게 부처가 되었다. 이 말은 결국은 무엇이겠는가.
불성을 보는 것이다.
(3)지적보살의 의심
14 지적보살이 말하였습니다.
“내가 보니 석가여래께서 한량없는 겁 동안에 어려운 고행을 행하시며 공을 쌓고 덕을 쌓아 깨달음의 도를 구하실 적에 잠깐도 쉬지 아니 하셨습니다. 삼천대천 세계에서 겨자씨만한 곳에라도 보살의 몸과 목숨을 버리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다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뒤에야 깨달음[普提]의 도를 이루셨는데, 이 용녀가 잠깐 동안에 정각을 이루었다는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이렇게 본다. 역사적인 사실만 보고 하는 말이다.
현상적이고 역사적인 입장으로서 사람을 보면 이렇게 보인다.
궁극적인 차원으로 우리 인간의 본성을 보면 문수보살이 말하는 이야기와 똑같다.본래 부처다. 용녀도 부처다.
내가 무수히 이야기 했지만, 법화경은 결국 이 두 차원을 가지고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는 극악무도한 제바달다도 부처라고 했는데 이제는 용녀까지도 축생까지도 부처다. 그 말을 증명하려고 용녀가 출현을 한다.
(4) 용녀의 출현
15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용녀가 문득 앞에 나타나서 머리를 숙여 예경하고 한 쪽에 물러가 앉아서 게송으로 찬탄하였습니다.
“죄와 복의 실상을 깊이 통달하시고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시며
미묘하고 청정한 법신에
삼십이상을 갖추었습니다.
팔십 가지 잘생긴 모양으로 법신을 장엄하게 꾸미시니
천상과 인간이 함께 우러르며
용과 신들이 모두 공경합니다.
모든 중생의 무리들이 받들어
모시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또 법을 듣고 보리를 성취함은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고 증명하십니다.
나는 대승의 교법을 설하여
고통 받는 중생들을 제도합니다.”
8살 먹은 용녀의 설법이다.
용녀를 축생이라고 하자.축생이라고 설법 못할 까닭이 없다.
축생도 그대로 설법하고 산천초목도 그대로 설법한다.
*
저 하나의 나뭇잎에 온 우주가 다 동원 됐다.
그 내용을 우리가 눈 뜨고 보면 그 보다 더 위대한 설법이 어디 있겠는가.
저 하나의 나뭇잎이 나무 뿌리를 만들었다. 나무 가지를 만들고 나무 줄기를 만들었다. 뿌리에서 줄기가 나고 줄기에서 가지가 나오고 가지에서 잎이 맺었는데 어째서 나뭇잎이 뿌리를 만들고 줄기를 만들고 가지를 만들었다고 하는가. 나뭇잎이 태양빛을 받아서 영양을 만들어야 뿌리가 자라 줄기가 튼튼해지고 가지가 생긴다. 이 도리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나뭇잎에는 저 흘러가는 구름이 있다.
저 푸른 하늘이 있다. 또 태양이 있다.
내리는 쏟아지는 소낙비가 있다.
우리 불자들은 하나의 나뭇잎 속에 태양을 보는 것이다.
하나의 나뭇잎 속에 흘러가는 구름을 본다.
우리가 시인이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불자들은 다 그 정도 수준이 되었다.
나뭇잎 하나를 만드는데 구름도 태양도 비도 바람도 모든 것이 다 동원이 되었다. 불자들의 안목으로 그동안 배운 불교의 안목으로 그것을 보고 느낄수 있다면 나뭇잎 한 장을 들고 ‘여기에 구름이 있구나 여기에 소낙비가 있구나 여기에 바람이 있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불자가 되어야 한다.
사실이 그렇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저 나뭇잎 하나보다 더 훌륭한 법문을 누가 하겠는가.
나뭇잎 하나가 최고의 법문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을 해서 엄청난 법문을 한다 하더라도 내가 귀막고 있고 내가 딴 생각하고 있으면 소용이 없다.
그렇지만 내가 하나의 나뭇잎을 들고 그러한 우주법계의 연관관계, 법계연기의 관계까지도 생각한다면 그보다 더 훌륭한 법문이 없다.
하나의 나뭇잎이 그 훌륭한 법문을 한다.
그런데 용녀라고 법문 못하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용새끼라고 하자. 8살 먹은 용새끼가. 그것도 암놈 새끼다.
법문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법문이 다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
법화경의 깊은 뜻을 우리가 이해한다고 해도 백분의 일도 아직 이해 못하고 수박 겉핥기로 넘어가고 있다.
수박 겉핥기로 넘어가고 있는데 나머지는 전부 여러분들의 몫이다.
하나의 나뭇잎 속에 그런 의미가 있다는 데 이것이 도대체 무슨 도리인가. 이게 도대체 무슨 소식인가 하고 여러분들이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5) 사리불의 의심
...또 여자의 몸에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다. 첫째는 범천왕이 되지 못하고, 둘째는 제석천왕이 되지 못하고, 셋째는 마왕이 되지 못하고, 넷째는 전륜성왕이 되지 못하고, 다섯째는 부처님 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빨리 성불할 수 있겠는가?
축생이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여자의 몸의 다섯가지 장애가 있다 라고 사리불이 의심하다. 그것은 편협한 소승 성문들의 마음이다.
이 사람은 한국에 왔다가는 혼날 사람이다.
사리불도 꽁 막힐 때는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
사리불이 그렇게 어리석을 리가 없지만 이 순간에는 이런 역할을 자청해서 맡은 것이다.
경전은 참 재미있게 짜여져 있다. 이렇게 자유자재하다.
때로는 부처님 보다 뛰어난 지혜를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렇게 사리불을 통해 그 당시 사회적 통념을 그대로 대변한다.
2700여년 전의 사회적 통념이 그러했다.
요즘 인도사회가 변화하고 있다고 하는데 카스트 제도가 참 기가막힌 제도다.
그걸 아직도 그 사회에서 쓰고 있다.
불가촉 천민은 카스트 사성계급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불가촉 천민이 바라문 옷깃을 스쳤다면 그 사람의 손을 잘라도 아무 죄가 아니다.그렇게 인간 차별을 하는 사회다.
바라문들이 사용하는 베다 경전 같은 것을 어쩌다가 잘못해서 불가촉 천민이 손으로 스쳤다면 그 사람을 죽야도 죄가 안된다. 똑같은 사람인데 그런 천민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그 당시에 부처님은 그 계급차별을 타파하고 나섰으니 얼마나 위대한 혁명가인가.
부처님은 정말 위대한 혁명가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까지도 그런 카스트 제도가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지금은 경제가 우선으로 하는 시대가 되다보니 그런 계급이 더 여러 가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가끔 그런 것을 무너뜨리고 좋은 학교에 가서 장관도 되고 변호사도 되고 하는 총명한 사람들이 간혹 나오고 있다.
*
아무튼 사리불은 용녀를 그렇게 무시를 했다.
그러자 용녀가 구슬을 부처님께 바쳤다. 부처님이 구슬을 받는데 3초가 걸렸다.우리가 어떤 물건을 전해주고 상대가 받으면 빨리 받으면 1초, 좀 늦게 받아도 3초면 건네받을 수 있다. 그렇게 짧은 순간에 주고 받았다.
(6) 용녀가 구슬을 바치고 성불하다
17....
용녀가 지적보살과 사리불에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이 보배 구슬을 드리는 것을 세존께서 받으시니 그 일이 빠릅니까?”
“매우 빠르다.”
용녀가 말하였습니다.
“두 분의 신통한 힘으로 나의 성불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보다 더 빠를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했다.
내가 성불하는 것은 이 3초보다 더 빠르다, 그래서 기어이 성불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이미 성불했다고 되어 있는데도 못믿으니까 다시 성불하는 것을 우정 보여주는 모습이 여기 나타나고 있다.
여러 가지 현상을 1초안에 다 보여준다.
...그때 여러 모인 이들이 보니 용녀가 잠깐 동안에 남자로 변하여 보살의 행을 갖추고 곧 남방의 무구세계에 가서 보배로운 연꽃에 앉아 등정각을 이루었습니다. 삼십이상과 팔십 가지 잘 생긴 모양을 갖추고 시방의 모든 중생을 위하여 미묘한 법을 설하였습니다.
‘잠깐 동안에’ 라는 말은 돈오돈수다.
잠깐 동안에 용녀가 남자로 변하여 등정각을 이루고 32상과 80가지 잘 생긴 모양을 갖추고 미묘한 법을 설하였다.
이미 용녀는 성불했다고 소개가 되어 있다.
그런데도 용녀가 나와서 구슬을 주고 받고 하는 일을 보이고 어리석은 중생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까지 연극을 하는 것이다.
한 짧은 순간에 영화 한 편을 다 보여 주듯이 ‘이렇게 내가 성불했습니다’ 라고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화 같기도 하고 상당히 의미 깊은 내용을 이렇게 보여주는데 이것 또한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의 본래 성불, 인간의 궁극적 차원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
궁극적 차원은 모든 존재가 동일하다.
그것을 부처라고 이름을 붙이든 뭐라고 이름을 붙이든 이름은 아무 의미없다.
사실 그 차원에서는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는 그러한 것을 수용하고 있다.
그것이 주인공이다.
그것을 가지고 여러분은 여기까지 오신 것이다.
그것 가지고 다시 돌아간다.
그것을 가지고 식사도 하고 잠도 자고 일터에 가서 일도 하고 누구와 시시비비도 하고 싸움도 하고 서로 즐거우면 웃기도 한다.
그 차원을 가지고 하루종일 무한히 쓰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정작 또 밖으로 드러난 것만을 가지고 시시비비한다. 밖으로 드러난 역사적인 차원에 끄달리고 거기에 속고 미혹되어서 살아간다. 그 좋은 궁극적인 차원을 우리는 다 가지고 하루종일 실컷 무한히 쓰고 있다.
몸뚱이는 피로를 느끼지만 그 물건은 아무리 써도 피로도 안 느낀다.
그것이 인간의 참 고귀한 존재라고 하는 입장인 것이다.
마지막 18번 한 번 읽고 끝내겠다.
(7) 대중들이 보고 이익을 얻다
18 이 때에 사바세계의 보살, 성문과 천, 룡, 팔부와 사람과 사람 아닌 이들이 용녀가 성불하여 널리 시회대중(時會大衆)과 천신과 인간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을 멀리서 보고 마음이 환희하여 멀리 예경하였습니다.
한량없는 중생들이 법을 듣고 깨달아서 물러가지 않는 자리를 얻었습니다. 또 한량 없는 중생들이 도(道)의 수기를 받았습니다. 무구세계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사바세계의 삼천 중생들은 물러가지 않는 지위에 머물렀으며, 삼천 중생들은 보리심을 내고 수기를 받았습니다. 지적보살과 사리불과 모든 대중들은 묵묵히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8세 용녀가 성불을 했다. 새삼스럽게 성불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 성불을 우정 표현하자니 ‘성불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한량없는 중생들이 도의 수기를 받았고, 무구세계는 여섯가지로 진동하고 사바세계 삼천 중생들은 물러가지 않는 지위, 불퇴전의 지위에 머물렀다.이 불법중에서 이제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 갈수록 신심이 증장하는 지위에 머물렀고, 삼천 중생들은 보리심을 내고 수기를 받았다. 이러한 결과를 용녀가 성불했다고 하는 이야기에서 얻었다.
여러분들도 궁극적 차원에 대한 이해와 신심과 그 안목을 좀더 깊이 다질 수 있는 공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했어요.
청량한 날 맑은 햇빛
차 맛이 더욱 깊어지는 계절>
<아름다운 절...차분한 마음>
이라고 메모 되어 있는데, 오늘 날씨와 비교해
보면 한 달 전의 가을은 어리고 풋풋했네요.
하지만 언제나 오늘은 최고입니다.
...지금 비가 오고 있고요,
만추의 봉은사,
보고 싶은 분들과의 만남
설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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