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스크랩] 제26구 歸家隨分得資糧

수선님 2018. 12. 30.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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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가 분에 따라 자량을 얻네

 

근본 마음자리를 드러내는 데는

지금 쓰고 있는 마음 밖에 따로 얻을 자량이 없습니다.

이 마음 그대로 법계 전체에 보배를 보내고 있는 것이며

그 보배로 일체 중생의 온 삶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대로 온전히 열림

 

화엄(華嚴)에서는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해탈(解脫)을 이루는 것도 마음이요 중생계(衆生界)를 이루는 것도 또한 마음입니다. 마음은 삼계를 이루기도 하고 삼계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를 이루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한 번도 결정된 제 모습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금강경(金剛經)>에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이라고 결정된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정된 제 모습을 갖지 않는 마음 씀씀이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의 나툼입니다. 마음을 떠나서 위없는 깨달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집착 없는 흐름과 결정된 제 모습을 갖지 않으면서 인연따라 모습을 나투면서 삶의 온생명을 나타내는 것이 불성(佛性)으로 수행자의 집입니다. 수행자가 돌아갈 집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곳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빈 마음으로 온생명을 살고 있는 인연의 흐름인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이 수행자가 돌아갈 집입니다.

 

돌아간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음은 가고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자리가 집입니다. 집이라고 하지만 마음 자체가 인연따라 모습을 나투어 결정된 제 모습을 갖지 않는 것이어서 집의 모습도 또한 인연의 나타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연이란 무상무아로서 사공의 제한을 떠나 있으면서도 모든 시공을 나타내고 나아가 한 시공의 접면에서 일체 사공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연의 흐름, 곧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시간의 흐름에서 보거나 공간의 한 접점에서 보면 시공의 제한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시공에서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 시공의 나타남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흐름은 그때그때마다 모양을 지니면서 아울러 시공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마음 밖에 따로 시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추상된 모든 것은 물론이거니와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도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며 무상무아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마음이란 뇌의 작용이 아닙니다. 온 우주법계의 열린 시공에서 시공의 치별 없이 작용하면서도 낱낱에서는 차별적 시공을 이루고 있는 중중무진의 법계가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들의 마음 밖에 또다시 법계를 이루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 자체가 법계이며, 그 생각의 작용은 단지 우리들의 뇌의 떨림이 아니라 법계의 떨림입니다.

 

어떤 때는 적극적으로 서로의 모습을 일으키거나 사라지게 아기도 하고 어느 때는 옆에서 지켜보듯이 다른 모습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즉 빈 마음의 시공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서로의 마음자리에서 일어나는 공능(功能)의 상즉상입(相卽相入)에서 제 모습을 띠면서 무차별의 법게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자기의 분(分)을 따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분이라고 해서 낱낱 중생마다 상하의 차별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중생마다의 차별이란 그 자체로 법계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법계는 상하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모습을 갖고 있지만 이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공능만이 아니라, 바로 중중무진으로 겹쳐 있는 시공에서 모든 중생들의 무차별 생명력에 의해서 자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분'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그것을 전체의 부분이라든가 산근기 하근기 등으로 구분한 이해새서는 안됩니다. 일법계의 무차별로 겹쳐 있는 중중무진의 시공에서 각각의 모습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수행자의 근본인 마음자리에서 그 모습 그대로 법계를 나타내는 분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근본마음자리를 드러내는 데는 지금 쓰고 있는 마음 밖에 따로 얻을 자랑이 없습니다. 이 마음 그대로 법계 전체에 보배를 보내고 있으며 그 보배로 일체 중생의 온 삶이 있습니다. 만일 이 마음 밖에 따로 얻을 자랑이 있다고 하면 집착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비록 자량(自量)을 얻는다고 했지만 자량 자체가 빈 마음으로 빛으로 나툰 비로자나 부처님이기 때문에 얻으려고 한다면 마음으로 마음을 보려고 하는 것으로 그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마음이 앎의 대상이 될 때는 이미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다고 합니다.

 

깨달음이란 전체가 그대로 마음이 되는 때입니다. 양경쌍조(兩鏡雙照)를 확실히 여는 것도 그때입니다.

 

그렇다 해도, 곧 본래 집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해도 중생들은 늘 집 밖에서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불안이란 잃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무엇인가를 갖고서 잃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 중생의 삶이며 이를 집착이라고 했습니다. 집착이란 근본실제가 빈 모습임을 알지 못하고서 허공을 움켜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집착이 있을 뿐 집착할 만한 대상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집착을 놓을 때 모든 불안은 사라지고 법계의 맑고 빛나는 마음이 비로자나 부처님으로 나타납니다. 온갖 시비분별이 쉬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비분별을 가리는 말을 삼사고 삼가면서 그 장면을 그저 지켜보기 시작하면 우리 업을 이루는 특성인 언어분별의 허구에서 점점 자유스럽게 됩니다.

 

침묵이 수행자의 큰 덕목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시비분별의 대상이 단지 언어의 허구에 의한 것으로 그 실재가 공한 것임을 분명히 자각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말에서 시비분별이 줄어들면 마음 씀씀이도 아울러 시비문별이 줄어들게 되고 욕심내고 성내는 마음의 파장도 줄어듭니다.

 

마치 어렸을 때 장난감을 소중히 여기다가도 어느 날 별 것 아니게 되듯이 우리들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삶의 전제들고 마음쉼에서 보면 별것 아닙니다.

 

이와 같이 마음 쉬어감이 익어가는 것을 자랑을 얻는다고 합니다. 쉬고 쉰 마음의 작용이 커지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삶의 전제를 이루는 언어분별의 허구에서 완전히 자유스러워질 때 삶의 전환이 일어나게 되고 그때 비로소 법계가 지금 그대로 온전히 열린 세계에서 깨달음의 빛을 나투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삶의 본바탕이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빛을 나누면서 나눔 없는 한 마음으로 법계가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에 의해서만 가능한 분별의 집착을 버릴 때 연기법계(緣起法界)가 진여공성(眞如空性)으로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을 여실히 알게 됩니다.

 

이때 자량이 단지 법계를 여는 방편이 아니라 법계가 중생의 집착을 여는 자량으로 한없이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지혜와 자비가 법계의 참된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을 이룬 모든 분들겠서 한어뵤는 방편으로 어느 곳에도 얽매임 없이 중생을 제도하게 됩니다.

 

분(分)에 따라 법계의 자량을 얻되 그 자량이 또다시 모든 중생을 위해 회향(回向)되는 자리임이 분명한 것도 우리 삶이 진정한 연기법계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 곧 불성(佛性)으로 돌아간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생심은 끊임없이 마음 밖을 향해 무엇인가를 구하고 있는 데에 반해, 수행자는 마음을 마음 자체에 놓고 반조해서 마침내 그 마음자리가 바로 구하고 있던 모든 것이 이미 갖추어진 것임을 알고 구하는 마음이 쉬고 아울러 원만한 불세계(佛世界)를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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