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계의 참된 보배궁전을 장엄해
법계의 참된 보배궁전을 장엄하는 것은
깨어있는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깨어있는 마음만이 삶의 온전한 모습이며
법계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법계를 장엄하는 다라니의 한없는 보배란
마음 마음이 인연따라 한없는 모습으로 빛이 되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부처님께사 말씀하셨던 연기법을 나타내는 게송 곧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에서 이것은 저것에게서 독립될 수 없으며 저것도 아것에게서 독립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것이면서 저것도 이것에게서 독립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것이면서 저것과 하나된 장이 곧 법계(法界)입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이것으로서 저것은 저것을 관통하고 저것은 저것으로서 이것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 그대로 법계이며 저적 그대로 법계입니다. 곧 관계의 장에서 저것으로서의 법계의 모습과 이것으로서의 법계의 모습이 겹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이것일 수 있고 저것이 저것일 수 있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그 자체로서는 공(空)이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에서는 이것과 저것이 완전히 같은 것이며 이것과 저것이 함께 서 있는 장도 공입니다.
이 공인 접면에서 모든 현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일체가 그대로 공의 표현입니다. 때문에 수행자는 이 접면인 공이 순간순간 무상으로 나툰 변화에 투철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유훈으로 남긴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이것은 순간순간 깨어 있는 것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결정된 형태로서 시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상한 순간순간의 변화만 있을 뿐이며 순간순간의 변화는 동일한 어떤 것이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라 변화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순간 깨어 있음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부처님이며 깨어 있지 못한 순간은 그 자체로서 중생입니다.
중생과 부처님은 깨어 있음과 깨어 있지 못한 무명을 접면으로 하여 나누어 있을 뿐, 중생과 부처님의 자성에 차이가 없으며 깨어 있음과 무명의 차이도 그 자성(自性)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자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매순간 전체로 깨어 있어야 하며 그것이 꿈속이나 잠속에서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이때 비로소 연기법의 인연으로 겹쳐 있는 모든 것들이 깨어 있게 되니 이를 장엄(莊嚴)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장엄이란 장엄되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공성(空性)의 빛으,로 인드라망을 이루고 있는 모든 보배들이 빛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수행자가 순간순간 깨달음의 빛으로 자신을 무화(無化)시키면서 전체를 이루고, 그 전체와 무화된 수행자로 하여금 개체의 빛으로 있게 하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화엄연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장엄은 수행자의 빈 마음이며 이는 연기실상인 다라니법의 빛인 것입니다. 이 빛이 또한 법계이니 피차가 없는 가운데 빛으로 제 모습을 나투어서 함께 인드라망의 보배구슬처럼 상즉상입의 대일여래(大日如來)를 나투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수행자가 순간순간 무상의 변화인 인연실상의 무아에 투철히 깨어 있음이 대일여래의 자기표현이며 이것만이 진실한 세게입니다.
법계의 참된 보배궁전을 장엄하는 것은 깨어 있는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깨어 있는 마음만이 삶의 온전한 모습이며 법계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법계를 장엄하는 다라니의 한없는 보배란 마음 마음이 인연따라 한 없는 모습느오 빛이 되는 것입니다.
무상이란 관계 속의 변화가 한없는 것을 말하며 이 변화는 제때 제때 앎으로 빛을 나투니, 시절인연에 따라 피는 꽃이 곧 우주법계의 장엄이며 부처님의 품이며 다라니의 총체입니다. 아울러 이 꽃은 자신의 빛으로 우주법계를 장엄하여 열며 낱낱이 부처가 되게 하면서 다라니의 총체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선사 스님께서는 모든 불보살이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셨습니다. 우주법계가 불보살님의 나툼이며 그것은 나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나는 우주법계의 부처님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며 나와 법계는 공(空)인 접면(接面)에서 서로가 서로를 부처로서 존재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이 참[眞]입니다.
마음 밖에서 또는 마음 안에서 부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나툰 그것이 그대로 전체의 부처를 이루는 것이며 이것만이 참된 보배입니다.
매순간 깨어 있는 마음이란, 안팎이 따로 없을 뿐만 아니라 높고 낮은, 오고 감, 깨끗하고 더러움 등으로 규정된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우리의 일상에서 그대로 실천되어야만 합니다.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를 수레의 두 바퀴레 비유하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 주 하나가 비어도 온전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의 온전한 깨달음은 어느 한 사람만의 문제로 등당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가 당면한 문제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수행이 개인이나 어느 집단만의 일일 수 없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개인아니 집단 또는 안팎 등의 구별만으로 자신의 삶을 삼고 있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집착에서 오는 불만족이며 우리의 진정한 삶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집착에서 오는 개인과 집단 등의 이익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 법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 장엄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장엄이란 깨달음으로 새롭게 이루는 세게가 아니라 잃어버린 장엄을 되차는 것이니, 오늘날 환경운동 등이 좋은 예입니다.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지혜와 자비, 곧 빈 마음과 함께 사는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작은 실천일지라도 그것은 법계를 장엄하는 크나큰 운동이며 희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계의 장엄을 위한 수행은 그것이 비록 크게 드러나지 않는 것일지라도 온 우주를 감싸는 아름다운 모습이며 보배입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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