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스크랩] 제25구 無緣善巧捉如意

수선님 2018. 12. 30. 12:35

관련 이미지

분별을 떠난 교묘한 방편으로 뜻대로 여의보배를 잡아

 

분별 없는 그저 지켜보는 수행으로

일체가 마음자리의 나툼을 알게 되기 때문에

무연(舞緣)이라 합니다.

또한 마음 없는 데서 마음을 나투어

중생의 세계가 그대로 부처님의 세계를 이루게 하니

방편이라고 합니다.

 

홀연히 한 마음 일어나니

 

마음은 인연 따라 홀연히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일어났을 때는 있는 것 같지만 사라지고 나면 없습니다. 때문에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있는 듯 없으며 없는 듯 있는 것으로, 마음 그 자체는 어떤 모습으로도 제자신을 머물지 않습니다. 있는 대도 머물지 않고 없는 데도 머물지 않습니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금강경(金剛經)>에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쓰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에도 얽매임 없이 그저 인연따라 작용하고 있습니다. 작용만이 있을 뿐 작용 이면에 체성으로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홀연히 일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여실히 알아차려 수행이 익어갈 때, 의지작용인 고정된 대상을 지향하는 중생심이 쉬게 되고 마음이 일체를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음이라고 이름할 수조차 없는 마음이 홀연히 일어나고 이 마음이 일체를 이루면서 법계의 흐름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법계의 흐름에서 고정된 상을 가지고 알아차리는 지각능력을 떼어내서 마음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때에는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은 지각능력이 아닙니다. 마음조차 아닙니다. 제 스스로의 원인을 갖지 않고서도 능히 일체를 나투니 법계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쉬고 쉬면 마음이 없는 곳에서 일체가 마음으로 있으며 법계는 생명을 열어갑니다. 법계의 생명은 마음 없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쉬고 쉰 마음, 빈 마음에서 일체는 깨달음으로 있습니다. 이 마음 밖에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빈 마음, 홀연히 일어나는 마음, 작용만으로 전체를 이루는 마음이 불성아면서 법계의 온전한 생명의 열림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만 이 마음, 깨달음만으로 있는 마음은 몸에 상대한 마음, 인식 대상에 상대하는 인식 주관으로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 몸과 마음, 인식 대상과 인식 주관이 마음자리에서 하나되어 마음으로 몸으로 주관으로 대상으로 깨달음을 나투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물질에 상대하는 하나의 실재(實在)로서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그래도 작용인 곳에서 연기가 현현하고 있으며 연기는 마음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야말로 연기법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연기법이 마음이고 마음이 연기법인 관게에서 일체는 제 모습을 나투고 그것이 법계의 온전한 생명활동이 됩니다. 마음이 연기법의 주체도 아니며 연기법에서 마음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홀연히 일어나는 마음 그대로가 인연화합의 장으로 연기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지켜보기의 수행으로 깨달음이 가능한 것도 이 이유입니다. 아무런 인위적인 분별 없이 그저 지켜보는 수행으로 일체가 마음자리의 나툼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무연(無緣)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연이란 '홀연히'라는 말과 통합니다.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원인이 되거나 그 자체 밖에 원인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관게에서 원인과 결과일 뿐, 어떤 것으로도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무어라고 결정하여 말할 수 없는 데서 일체가 존재하게 되니 불가사의라고 합니다. 이 분별을 떠나 절대평등의 자비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생각으로 해아릴 수 없어 무연, 곧 분별을 떠나 하나됐다고 합니다.

 

주관으로 혹은 대상으로 서로가 상대하는 연기관계가 아니라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으며, 상대가 상대로서 특성을 갖고서 상개하지 않는 가운데서 일체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연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수스님께서는 연기법을 공(空)이며 중도라고 했습니다.

 

물이면서 얼음이며, 얼음이면서 물인 접면(接面)이 물과 얼음을 있게 하는 것이며 그 접면을 공에 비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접면이 한 곳에만 있는 것잉 아니라 전체가 사실은 이 접면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곧 공이 일체의 진실한 모습아며 공이기 때문에 생명활동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공이 일어나서 한 모습을 나투는 것을 임시로 잠깐 존재하는 가법(假法)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모습은 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라니라 공인 접면의 인연에 따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곤과 가법이 중도인 까닭이 잇습니다. 접면은 그 어느 것에도 머물지 않고서도 그 어느 것에도 존재하며 이것에 의해서만이 일체법이 제 모습을 나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도인 공은 아나의 사건이나 사물들이 이루는 접면인 동시에 그 낱낱의 전체가 되고 잇습니다.

 

여기에서 공과 가법과 중도가 연기실상인 인드라망의 법신인 비오자나불의 세계를 나타내는 다른 이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중도의 참모습은 모든 중생의 제 모습입니다. 중생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서 부처님으로서 제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중생 그 모습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이것을 마음 없는 데서 마음을 나투어 중생의 세계가 그대로 부처님의 세계를이루게 하니 방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쉬고 쉬어 빈 마음이 될 때 그 마음 그대로 우주 법계가 됩니다. 마음 없는 데서 법계가 일어나고 법계는 빈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 없는 것이 법신이고 거기서 나타나는 법계가 화신이며 마음 없는 데서 일체를 이루는 공능이 보신입니다.

 

때문에 한 마음이 홀연히 일어나는 것은 단지 마음 하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삼신으로 일체법계를 이루는 순간입니다.

 

수행자의 보배는 법신, 보신, 화신부처님입니다. 그런데 이 삼신 모두가 법계신인 마음자리에서 홀연히 일어나는 것이니 마음 쓰는 대로 삼신이며 법계의 창조입니다. 이것이 또한 여의보배입니다. 마음자리에서 인연따라 뜻대로 나타내는 보내. 삼신이 여의보배입니다.

 

뜻대로 일체의 보배를 나투는 것을 앞서 공인 접면이라 했으며 중도라고 했습니다. 공은 연기법의 근본실제이며 중도는 수행자의 실천입니다. 모든 행위에서 접면인 공의 실천이 될 때 깨달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도 실천이야말로  여의보배를 지금 여기에서 모두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베품은 비로자나의 빛인 법신의 무한한 비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언제 어디서나 무심의 근본마음자리, 일체를 이루고 있는 공인 접면에서 실천으로 빛을 나투어 모든 불별을 떠날 때, 미묘한 부처님의 방편을 제 스스로 쓰고 있으며, 여의보배를 뜻대로 다루어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근본실재에 돌아와 있게 됩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