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라니의 다함 없는 보배로
순간순간 깨어있는 마음이 법계(法界)를 이루는 보배이며
이 마음은 늘 새롭게 세계를 밝히고 있습니다.
다함 없는 보배인 깨어 있는 순간순간의 한 마음이
바로 연기법계(緣起法界)의 총상(總相)이 되어 모든 것을 거두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라니(陀羅尼) 곧 총지(摠持)라고 합니다.
다함없는 불성(佛性)의 빛으로
어른 스님께서 법상(法床)에 올라 법문을 하실 때 가끔씩 묻습니다.
"이것을 주장자라고 해도 맞지 않고 주장자가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다. 그럼 이것을 무엇이라 해야 하겠는가?"
이것은 주장자라는 이름과 주장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사물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삶의 여실한 모습을 깊숙이 꿰뚫어 보는 지혜가 순간순간 살아있는 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만일 주장자를 주장자라고 한다면 이는 상견(常見)에 떨어지는 것이며, 주장자가 주장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단견(斷見)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주장자가 주장자가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유(有), 무(無), 역유역무(亦有亦無),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주장을 부처님께서 사견(邪見)이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있고[有] 없는[無] 것의 주어를 설정하고 그에 대해서 있다거나 없다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무 등의 술어로 보면 다르지만 이 술어가 가리키고 있는 주어로 어떤 것이 전제된다고 하는 데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유무의 주어가 <금강경(金剛經)>에 따르면 사상(四相)이 됩니다. 그래서 상(相)을 갖지 않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며 법계(法界)기 됩니다. 상에 집착하는 것은 중생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참된 삶, 깨달음의 세계인 법계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을 등지는 것입니다. 상을 버리는 것이 스스로의 본래 모습인 연기실상(緣起實相)의 법계로 사는 것입니다.
상은 말과 생각으로 나타내는 모든 것입니다. 지금 상을 떠난 세계를 설명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방편인 말을 빌려 쓰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신통력을 사용하여 상을 떠난 여여한 모습을 가리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아(無我), 무상(無相)의 본래 모습을 확실히 증득하고 무념무상의 마음 쓰기가 상을 떠난 깨달은 삶입니다.
상을 갖는다는 것은 제한된 시공을 사는 것이며 무념무상(無念無相)이란 시공의 제한을 떠난 언제나 전체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체란 앞서 서까래가 집이라고 했던 비유를 생각하면 됩니다.
상을 갖는다는 것은 제한된 시공(時空)을 사는 것이며 무념무상이란 시공의 제한을 떠나 언제나 전체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체란 앞서 서까래가 집이라고 했던 비유를 생각하면 됩니다.
한 생각 일어남이 우주법계의 일어남이요, 한 생각이 사라짐이 우주법계의 사라짐입니다. 물론 겹쳐진 다른 모습의 한없는 우주 모두가 한 생각과 함께 거립된 것입니다. 그래서 중중무진법계라고 하는 것이지 중중무진법계 가운데 한 우주법계가 생각의 일어남 사라짐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드라망의 한 구슬이 중중무진으로 펼쳐진 인드라망 구슬 전체를 나타내고 있듯이 한 생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각이 연기법계를 건립하는 것이지 주어진 연기법계에서 한 생각의 포말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한 생각이 연기법계의 총상(總相)이면서 별상(別相) 등으로 육상(六相) 모두가 그 가운데 들어 왔습니다. 한 생각이 우주법계의 연기실상을 모두 드러내 보이고 있으므로 총지(總持)라고 하며 다라니(陀羅尼)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라니는 한 생각이며 연기실상이며 공성이며 우주법계입니다. 연기법계란 무상(無相), 무아(無我), 열반(涅槃)의 다른 이름이며 시공을 벗어나 있으면서도 사공 그 자체입니다.
이 관게에서 중생은 제한된 시공만으로 자아를 삼고 그것으로 온갖 사물의 척도를 삼습니다. 그래서 시공이면서 시공을 벗어난 색 그대로 공인 다라니의 총상을 보지 못하며, 시공을 벗어나 있으면서도 온갖 시공으로 제 모습을 나투는 공 그대로 색인 다라니의 별상을 보지 못한 안목을 갖는 것입니다. 이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고 합니다.
변계소집성이란 제한된 시공, 곧 상을 갖는 것을 말하며 지각대상으로 남아 말로 표현되는 것으로 중생의 업을 이루는 근간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업으로 알게 되는 세계가 꿈과 같으며 구름 등과 같다고 합니다.
수행으로 말미암아 말과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법계실상을 보게 되면 한 발자국도 불성(佛性)이 여실하게 나타난 세계를 떠난 적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불성이란 중생의 안에 있늠 부처가 되기 위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드러나 있는 법계가 그대로 불성이며 이것은 제한된 생각과 말을 떠나 잇습니다.
빛나는 마음인 법계 그대로가 불성인 세계는 시공의 제한을 떠나 있기 때문에 어느 곳 어느 때를 가리지 않고 빛으로 나투는 보배입니다. 다함 없는 빛나는 마음, 불성의 빛이 또한 다라니 연기법입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부처님의 덕상(德相)인 지혜광명으로 빛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함 없는 빛인 보배는 상을 갖지 않는 마음입니다. 변계소집성의 상을 떠나 법계에 충만한 빛나는 마음, 이 보배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합니다. 한 생각이 사라지는 순간에 법계가 한 모습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기실상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공부하는 사람은 어떠한 상도 가져서는 안됩니다. 상을 갖는 순간 마음 밖에서 마음을 구하는 것이 되며 아울러 모든 것들이 자성을 갖고 있다고 여기게 되면서 삶의 실상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삶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공부인들이 자신의 수행법이 자신이 그 수행법을 선택하지 않는 때도 일정한 모습으로 실재하고 있다고 여기는 데서도 쉽게 발견됩니다.
수행법을 가르침에 의해서 임시방편의 가법(假法)으로 전해지고는 있지만, 그것도 모두에게 똑같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수행자와 관계를 갖게 되면서 새롭게 전개되는 연기관계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말과 생각을 빌어 가르침이 전해지고는 있지만 그 가르침조차도 수행자를 벗어난 별개의 가르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와 가르침이 연기관계로서 새로운 세계를 순간순간 열고 있는 것이며 같은 가르침인 것 같지만 같은 것이 아닌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남기신 말씀, "게으르지 말고 항상 깨어 있으라", "법을 의지처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하신 것도, 깨어 있을 때만이 법이 삶의 빛으로 나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금강경>에서 결정된 법이 없다고 강조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순간순간 깨어 있는 마음이 법계를 이루는 보매이며 이 마음은 늘 새롭게 세계를 빛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다함 없는 보배인 깨어 있는 순간순간의 한 마음이 바로 연기법계의 총상이 되어 모든 것을 거두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라니, 곧 총지(總持)라고 하고 있습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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