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

[스크랩] 대지도론(大智度論) 98. 반야바라밀이란 무엇인가?

수선님 2018. 12. 30. 12:53

17. 초품 중 단바라밀(檀波羅蜜)의 뜻을 풀이함
  
[經]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머무르지 않는 법으로써 반야바라밀 가운데 머무르고

버릴 바 없는 법으로써 단바라밀을 구족하니,

베푸는 이와 받는 이와 베푸는 물건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論] [문] 반야바라밀이란 어떤 법인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렇게 말한다.

 

“무루지혜[無漏慧]의 뿌리가 반야바라밀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지혜 가운데 으뜸가는 지혜를 반야바라밀이라 하는데,

무루지혜의 뿌리가 곧 으뜸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무루지혜의 뿌리를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26) 범어로는 avici-mahānaraka. 무간지옥(無間地獄) 혹은 무택대지옥(無擇大地獄)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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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보살이 아직 번뇌[結]를 끊지 못했다면 어떻게 무루의 지혜를 행할 수 있겠는가?

 

[답] 보살이 비록 번뇌를 끊지 못했으나 행하는 모습[行相]은 무루의 반야바라밀을 닮아 있다.

그러므로 ‘무루의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한다.

 

비유하건대 성문의 사람이 난법(煖法)27)․정법(頂法)․인법(忍法)․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을 행함에도 먼저 비슷한 무루의 법을 행하면 나중에 고법지인(苦法智忍)28)이 생기기 쉬운 것과 같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보살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번뇌[結使]를 끊어 청정해진 이와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해 청정치 못한 이이다.

번뇌를 끊어 청정해진 보살은 능히 무루의 반야바라밀을 행한다.”

 

[문] 만일 보살이 번뇌를 끊어 청정하다면 어찌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가?

 

[답] 비록 번뇌를 다 끊었으나 10지(地)가 아직 완전하지 못하고, 아직 불국토를 장엄하지 못했으며,

아직 중생을 교화하지 못했기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또한 번뇌를 끊는 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3독을 끊어 그 마음이 인간과 하늘의 5욕(欲)에 집착되지 않음이요,

둘째는 비록 인간이나 하늘의 오욕에 집착되지는 않으나 보살의 공덕과 과보에 대하여는 아직 5욕을 버리지 못함이니, 이런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비유하건대 장로 아니로두(阿泥盧豆)가 숲 속에서 좌선할 때 정애천녀(淨愛天女) 등이 맑고 묘한 몸으로 찾아와서는 아니로두를 시험하려 했다.

 

이에 아니로두는 말하기를 “아가씨들아, 푸른빛으로 오너라. 뒤섞인 빛은 필요 없다”라고 하고는 부정(不淨)을 관하려 하였으나 관을 이루지 못했다. 황색ㆍ적색ㆍ백색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 아니로두는 눈을 감은 채 쳐다보지 않으면서 말했다.

  
  
  
27) 범어로는 uṣma-gata.
28) 범어로는 duḥkhe`nvaya-jñāna-kṣāntiḥ. 고제를 관찰해 얻는 지혜인 고법지의 직전에 얻는 마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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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들아, 멀리 물러가라.”

 

이에 즉시 천녀들이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하늘의 복덕으로 나타난 형상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보살의 한량없는 공덕의 과보로 닦는 5욕겠는가.

 

 

또한 견다라(甄陀羅) 왕이 8만 4천의 견다라들과 함께 부처님께 와서 거문고를 튀기고 노래를 불러 부처님께 공양했다. 이때 수미산왕과 산과 나무와 인간과 금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춤을 추었으며, 부처님 곁의 대중들과 큰 가섭까지도 모두가 자리에서 안정을 찾지 못했다.

 

이때 천수(天須)보살이 큰 가섭에게 물었다.

“나이 많은 구숙(舊宿)께서는 12두타(頭陀)의 법을 행하심에 으뜸이거늘 어찌하여 자리에서 스스로 안정을 찾지 못하십니까?”

 

큰 가섭이 대답했다.

“삼계의 5욕이 나를 요동시킬 수 없지만, 이는 보살의 신통한 공덕과 과보의 힘인 까닭에 나로 하여금 이렇게 하게 하는 것이다. 내게 마음이 있어서 스스로 안정치 못한 것이 아니다. 비유하건대 수미산은 사방에서 바람을 일으켜도 움직일 수 없으나 대겁이 다할 때에 이르러 비람풍(毘藍風)이 일어나면 마치 마른 풀이 날리듯 요동치는 것과 같다.”

 

이런 일로 인하여 두 가지 번뇌 가운데 한 가지를 아직 끊지 못했다면 이러한 보살들은 응당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아비담(阿毘曇)29)에서의 주장이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반야바라밀은 유루의 지혜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살이 보리수[道樹] 밑에 이르러서야 번뇌를 끊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비록 큰 지혜와 한량없는 공덕이 있었으나 모든 번뇌를 아직 끊지 못했나니, 그러므로 보살의 반야바라밀을 유루의 지혜라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 발심할 때로부터 보리수하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의 지혜를 반야바라밀이라 하고

  
  
  
29) 범어로는 Abhidharma. 그 어의는 ‘법(dharma)에 관하여(abhi)’라는 의미로, 아비달마(阿毘達磨)ㆍ비담(毘曇)이라 음역하거나 대법(對法)ㆍ무비법(無比法)ㆍ승법(勝法) 등으로 의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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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성불할 때의 반야바라밀은 다시 살바야(薩婆若)30)라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보살의 유루ㆍ무루의 지혜를 모두 합해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왜냐하면 보살은 열반을 관찰하고 불도를 행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로 인하여 보살의 지혜는 응당 무루일테지만,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고 일을 다 끝내지 못했으므로 유루라 해야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보살의 반야바라밀은 무루이고, 무위이고, 볼 수 없고[不可見], 대할 수 없다[無對].”

 

또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 반야바라밀은 얻을 수 없는 모습이니, 혹은 있는 듯, 혹은 없는 듯,

혹은 항상한 듯, 혹은 무상한 듯, 혹은 공한 듯, 혹은 실한 듯하다.

 

이 반야바라밀은 음(陰)․계(界)․입(入)에 속하지 않는다.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며,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곧 유무(有無)의 사구(四句)를 벗어나 실로 집착할 바가 없다.

비유하건대 마치 불꽃이 사방 어디에서도 손을 댈 수 없는 것과 같다.

 

손을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의 모습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질 수 없으니, 삿된 소견의 불이 태우기 때문이다.”

 

 

[문] 앞에서 갖가지 사람이 반야바라밀을 말했는데 무엇이 옳은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각각 이치가 있으니, 모두가 진실이다” 했다. 마치 경의 말씀과 같다. 곧 5백 비구가 각자 두 가[二邊]와 중도(中道)의 이치를 말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두 도리가 있다” 하셨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에 대답한 것이 진실이다. 왜냐하면 깨뜨릴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법이 털끝만치라도 틈이 있다면 모두가 허물이 있으면 가히 깨뜨릴 수 있고,

설사 없다고 할지라도 또한 깨뜨릴 수 있다.

 

하지만 이 반야에는 유(有)도 없고 무(無)도 없고 비유비무(非有非無)도 없다.

나아가 이러한 말조차 없으니, 이것을 적멸하고 한량없고 희론 없는 법이라 한다.

 

그러므로 깨뜨릴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다.

이것을 참된 반야바라밀이라 하니, 가장 뛰어나 지날 이가 없다.

 

마치 전륜성왕이 모든 적을 항복시키고도 스스로 교만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온갖 말과 희론을 깨뜨렸으나 깨뜨린 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이 뒤로 품마다 갖가지 의문(義門)으로 반야바라밀을 설명하나 모두가 진실한 모습이다.

 

 

 

‘머무르지 않는 법으로 반야바라밀에 머물러서 6바라밀을 구족한다’를 풀이하리라.

 

[문] 어떻게 머무르지 않는 법으로 반야바라밀에 머물러서 능히 육바라밀을 구족한다고 하는가?

 

[답] 이와 같이 보살은 온갖 법은 항상함이 아니요 무상함도 아니며, 괴로움이 아니요 즐거움도 아니며, 공도 아니요 실도 아니며, 나도 아니요 나 없음도 아니며, 생멸도 아니요 생멸치 않음도 아닌 줄로 관찰하며 이처럼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되 반야바라밀의 모습에 집착되지도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머무르지 않는 법으로 머무른다’고 한다.

만일 반야바라밀의 모습을 취한다면 이는 머무는 법으로 머무는 것이 된다.

 

[문] 만일 반야바라밀의 모습을 취하지 않아서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모든 법은 탐욕이 근본이 된다’ 하셨는데 만일 취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6바라밀을 갖출 수 있겠는가?

 

[답] 보살은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먼저 서원을 세우기를 “내가 반드시 모든 중생을 제도하리라” 한다.

 

정진의 힘 때문에 비록 모든 법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서 열반의 모습 같은 줄 알지만

다시 모든 공덕을 행하여 6바라밀을 구족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머무르지 않는 법으로써 반야바라밀 가운데 머무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컬어 ‘머무르지 않는 법으로 반야바라밀에 머문다’고 한다.
  
[436 / 2071] 쪽
  

 

대지도론(大智度論) 98. 반야바라밀이란 무엇인가?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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