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수다원이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위빠사나 수행을 함으로써 얻는 이익은
숨죽이고 지켜 보고 있을 때
“5000만 숨죽인 4분간” 매스컴이 뽑아낸 제목이다.
오천만이라면 우리나라의 도시와 농촌은 물론 산간 벽지 도서 등지에서 숨죽이고 지켜 보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전국민이 열광하고 있을 동안에 어떤 일이 벌어 졌을까. 또 다른 매스컴에서는 ‘
이런 방법을 예로부터 ‘허허실실(虛虛實實)’ 전법이라고 한다. 뜻을 풀이하면 ‘허를 찌르고 실을 꾀하는 계책’을 말한다.
매스컴에 놀아나는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TV를 보는 것이 낙이다. 여유가 있다면 차를 몰고 멀리 놀러 나가거나, 스키나 골프 등을 즐기면서 때로는 해외에 나갔다 오기도 하겠지만, 서민들은 올림픽과 같은 빅 이벤트가 있을 때 TV보는 낙으로 산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TV를 이용하여 정권의 입맛에 맞는 방송을 내 보내거나 방송을 장악하여 눈을 묶어 두려 한다.
그런 결과 집 없는 서민들이 종부세와 같은 부자감세안을 주장하는 정당에게 표를 몰아 주기도 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상이 발생 되기도 한다.
이 모두가 매스컴과 정권의 의도에 놀아 나는 것이다.
TV를 보고 나면 그다지 남는 것이 없다. 볼 때 뿐이다. 설령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보고 환호 하였더라도 그 것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선수들의 몸값을 이야기 할 때 더욱 더 나와 무관한 일로 느껴지는 것이다.
과연 금메달을 딴 선수의 기쁨이 내 기쁨이고, 선수의 몸값이 수억 내지 수백억이 된다고 해서 그 몸값에 대한 기쁨을 같이 누릴 수 있을까. 보고 나서 뒤돌아 서면 잊어 버리고, 설령 기억이 나더라도 일시적인 기쁨을 줄지언정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 조금도 이득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시 ‘TV시청삼매’에 빠져 있었지만 그것에서 벗어나면 허망한 것이다.
TV시청삼매, 독서삼매, 뜨개질 삼매, 게임삼매
사람들은 무언가에 몰두 해 있을 때 행복하다고 한다. 그런 상태에서 무언가 성취하였을 때 돈으로 환산 할 수 없는 기쁨을 맛 본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기분이 계속 유지 되면 좋으련만 그 좋았던 기분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는다.
어느 한 곳에 몰두 하는 것을 ‘집중’이라 하고 또 다른 말로‘삼매’라고도 한다. 삼매는 수행 할 때 뿐 만 아니라 매우 광범위 하게 쓰인다.
흔히 하는 말 중에 ‘독서삼매’가 있다. 책을 읽는 즐거움에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른 다는 말이다. 이런 삼매의 종류는 여자들이 뜨개질 할 때 ‘뜨개질 삼매’에 빠질 수 있고, 어린아이들이 게임 할 때 ‘게임삼매’에 빠질 수 도 있다.
이와 같이 무언가에 몰두 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삼매라 한다.
기도는
대상에 집중하는 것의 대표적인 예가 ‘기도’일 것이다. 유일신교라면 대상이 ‘유일신’이 되겠고, 대승불교의 경우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등 ‘불보살’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대상에 집중하다 보면 신비한 체험을 경험하기도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대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념은 실재하지 않은 것으로서 오로지 관념으로만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는 대상과 일치 하고자 하는 삼매라 볼 수 있고, 다른 말로 사마타라고도 한다.
불교에 유일한 것
반면에 대상을 분리하여 지켜 보는 수행을 위빠사나라 한다. 그런데 전세계의 종교역사에 있어서 대상과 일치하지 않고 대상과 분리 하여 보는 수행은 불교가 유일하다. 그것도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테라와다이다.
이를 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구분 |
대상 |
방식 |
구원자 |
비 고 |
사마타 |
합일 |
바람 (기도) |
신, 유일신, 산신 , 불 보살 |
전세계 대부분의 종교 (대승불교포함) |
위빠사나 |
분리 |
바라지 않음 (수행) |
없음 |
불교가 유일함 (테라와다) |
기도는 무언가 ‘바라는’ 것이다. 절대자 또는 구원자에게 의지 하여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과 합일 하는 집중수행이 될 수 밖에 없다.
반면에 위빠사나는 대상을 분리하여 관찰 하므로 절대자나 구원자가 있을 수 없다. 즉, 신의 구원이나 불보살의 가피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원인과 결과에 따른 ‘연기적 흐름’만 있을 뿐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함으로써 얻는 이익은
그런 위빠사나 수행을 함으로써 얻는 이익은 무엇일까.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을 참고 하였다.
바라는 것이 없는
첫째, 청정한 마음을 갖게 한다.
위빠사나 수행의 특징중의 하나가 기도가 없다는 것이다.
기도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바라는’ 것이다. 바라는 것이 없다는 것은 탐욕이 없다는 말과 같다. 즉, 알아차리는 순간에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성냄 또한 마찬가지이다. 또 수행을 하고 있을 동안 나태함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탐진치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을 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한 의지를 가지려면
둘째, 안정되고 균형 잡힌 마음이 된다.
탐욕을 가진 사람이 감각 대상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듯 쉽게 흥분하고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런 집착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신의 행동도 절제하기 힘들어진다. 도둑질이 잘못 인줄 알면서도 행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화를 일으키는 대상을 만났을 때 그의 마음은 쉽게 균형을 잃고 만다.
그런데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다면 매순간 마다 불안하게 만드는 탐욕과 성냄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탐욕을 부리지 않고, 화를 내지 않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되려면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고질병도 치유되는
셋째, 병이 치유 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병을 치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 네번째인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에 이르면 소소한 질병과 통증 정도는 약을 먹지 않아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책에서 말하기를 알아차림이 있는 순간은 매우 강력한 힘이 작용 하기 때문에 수행중에 병이 생겨도 약을 먹으려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 때 병을 치료 하기 위하여 약을 먹으면 치료시간이 오히려 더 오래 걸린다고 한다.
그와 같은 이유로 목이 뻣뻣하거나 두통, 복통쯤은 알아차리기만 해도 바로 사라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질병’은 어떠 할까. 오래 동안 약을 먹어도 잘 낮지 않은 병을 말한다. 그런 병은 16단계 지혜중 11번째 단계인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saṅkhārupekkhā ñāna)’단계에 이르면 고질병은 사라진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약과 훌륭한 의사로도 치료 되지 않던 고질병이 수행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치유 된다는 것은 매우 획기적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적당히 노력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
부단히 노력해서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의 단계로 가야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수행을 시킨다면
넷째, 법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다.
불교는 법의 종교이다. 그런 법의 종교로서의 불교는 초기불교의 전통을 잘 간직 하고 있는 테라와다이다. 법의 종교의 특징은 수행을 통하여 지혜를 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어려운 법문도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 11번째 단계인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saṅkhārupekkhā ñāna)’단계에 이르면 모든 법문에 대한 이해력이 깊어져서 쉽게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으로 보았을 때 만일 학생들에게 위빠사나 수행을 시킨다면 분명히 좋은 성적을 거둘 것임에 틀림 없다.
수다원이 되면 어떤 점이
다섯째,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여섯째, 궁극적으로 성스런 법을 얻는다.
위 두 이익은 앞서 말한 이익의 결과이다. 그 이익의 결과는 수다원도의 지혜에 이르렀을 때를 말한다.
결국 위빠사나 수행이란 수다원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수다원이 되면 어떤 점이 좋을까.
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수다원이 되면
|
내 용 |
비 고 |
1 |
사악도에 태어나지 않는다 |
오계를 자동으로 지키기 때문에 사악도에 떨어질 만한 행위를 하지 않음 |
2 |
다시 태어날 때 고귀한 존재로만 태어 난다 |
그가 얻은 법이 자동적으로 그를 높은 지위로 올려 놓기 때문 |
3 |
일곱생이내에 윤회를 끝낸다 |
일곱생 이내에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에 이르는 아라한이 된다. |
수다원은 ‘성자’의 흐름의 경지에 들어간 존재를 말한다. 그래서 ‘예류자(豫流者)’라고도 한다.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결코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다시 태어나면 고귀한 존재로만 태어 난다는 것이다. 즉, 귀한 마음을 가진, 부유하고, 높은신분의 잘생긴 존재를 말한다.
그렇게 태어 나는 이유는 보통사람들 처럼 계율을 떠 올릴 필요도 없이 ‘자동적’으로 지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누군가 죽이려는 의도가 일어나지 않으며,
무엇인가를 훔치려는 의도가 일어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부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려는 의도가 일어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려는 의도가 일어 나지 않으며,
취하게 하는 것을 먹으려는 의도가 일어 나지 않는다.
수다원에 이른 사람은 이와 같은 5계의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계를 지키는 것이 어렵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수다원이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런데 현생에서 수다원에 이른 사람이 다음 생에서 수다원 이었던 사실을 까맞게 잊어 버리고 생활하게 되는 경우는 어떠 할까.
수다원에 이른 사람들은 다음 생에서 부유하고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 나기 때문에 ‘최소한의’ 감각적 즐거움에 젖는 다는 것이다.
비록 좋은 외모, 좋은 소리, 좋은 향기, 좋은 맛, 좋은 감촉, 좋은 집, 최고로 좋은 차와 같은 다섯가지 감각을 즐기지만, 그 것들에 깊이 빠지지 않고 오감의 즐거음을 ‘약간’ 즐길 뿐이라는 것이다.
진정으로 그가 즐기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것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보시를 즐긴다.
둘째, 계율을 지키는 것을 좋아한다.
셋째, 사마타 수행을 즐긴다.
넷째, 승가의 일을 돕는 것을 좋아 한다.
여기서 보시를 즐기는 이유는 보시 할 때 즐거움을 느끼고, 보시를 하기 위하여 돈을 벌 때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 승가의 일을 좋아 한다는 것은 불사에 참여 하는 것을 좋아 한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이 수다원이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 갈까.
일곱생이내에 자신이 수다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도 있지만, 일곱생이 다 되도록 모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곱생에 이르러서는 깊이 참회하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아라한이 되어 열반에 이른 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도
우리 주변에도 수 많은 수다원들이 있는지 모른다. 지금 이순간에도 오계를 지키며 열심히 보시하고, 남을 위해 배려 하며 살아 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진흙속의연꽃
'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업대로 수명대로 사는 세상, 대범천은 왜 수다원을 부러워할까 (0) | 2019.01.06 |
---|---|
[스크랩] 작은 수다원, 쭐라 소따빤나 (cula sotapanna) (0) | 2019.01.06 |
[스크랩] 수다원이 된다는 것, 보통사람과 어떻게 다른가 (0) | 2018.11.25 |
[스크랩] 불교와 정신의학 - 전현수 박사 (0) | 2018.11.25 |
[스크랩] [위빠사나 수행기7] 욕계, 색계, 무색계의 화생(化生) 이야기 (0) | 2018.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