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수행법(간화선)

[스크랩] [간화선] 간화선이란 무엇인가?

수선님 2019. 1. 13. 12:26
간화선의 본질

한 기연, 한 경계, 한 말씀, 한 구절에서 깨닫고자 하는 것은
생살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고정된 틀을 만드는 것이다.

垂示云. 一機一境 一言一句. 且圖有箇入處. 好肉上?瘡. 成?成窟 - 『碧巖錄』 第3則 垂示


대혜 종고 선사는 『서장書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은 총림에 오래 살면서 많은 선지식을 찾는 데 있지 않다.
다만 한마디 말끝에 바로 깨닫고 겉돌지 않는 게 귀할 뿐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터럭만큼의 간격도 용납하지 않는다.
마지못해 ‘바로’라 말해도 이것은 이미 헛돌아 버린 것이며,
마지못해 ‘깨달았다’고 해도 이것은 벌써 어긋나 버린 것이다.
하물며 자질구레한 것을 이리저리 끌어붙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먹이며
이치가 어떻고 일이 어떻다고 떠벌여 이 공부를 마칠 수가 있겠는가.

此事 不在久歷叢林 飽參知識 只貴於一言一句下 直截承當 不打之?爾 據實而論 間不容髮.
不得已 說箇直截 已是紆曲了也 說箇承當 已是蹉過了也. 況復牽枝引蔓 擧經擧敎 說理說事 欲究竟耶.
- 『書狀』『答 徐顯模 稚山』


여기서 말하는 이 일이란 마음을 밝히는 일이다. 대혜 선사는 이 마음을 ‘한마디 말끝에 바로 깨닫는 ’이 중요하다고 했다. 영가 현각(永嘉玄覺 665~713) 선사도 ‘깨달음의 노래’인 『증도가證道歌』에서 “한마디 말끝에 밝게 깨달아 백억 가지의 법문을 훌쩍 뛰어 넘는다”고 했다.

간화선은 이렇게 부처님과 역대 조사께서 이르신 한마디 말이나 순간적으로 보이신 짧은 행위 끝에 백억 가지 법문을 뛰어넘어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이것은 캄캄한 방에 불이 켜지면 한순간에 모든 것을 ‘확’ 밝히는 이치와도 같다. 간화선은 이와 같이 단박에 뛰어넘어 바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간화선이란 다시 말하여 ‘화두話頭를 간看하여 본래 성품 자리를 바로 보는 선법’ 이다. 본래 성품을 보면 깨닫는 것이다. 이 본래 성품 자리는 모두가 지닌 자성自性이다. 이 성품을 보면 깨닫는다고 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간화선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인도와 중국을 거치면서 자성을 깨닫는 여러 가지 참선법 가운데 가장 발달된 수행법으로 자리 잡았다. 간화선이 뛰어난 점은 마음의 당처를 바로 들어 보인 선사들의 갖가지 화두를 타파하여 그 자리에서 견성성불하기 때문이다. 화두란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말이다.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졌기에 근기가 뛰어난 사람은 이 화두를 받자마자 단박 그 자리에서 깨닫는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기에 어쩔 수 없이 화두를 들고 의심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화두의 실례를 들어 화두를 어떻게 참구하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은 조주(趙州 779~897) 스님의 무자無字 화두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없다(無)”


여기에서 수행자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조주 스님은 ‘어째서 없다(無)고 했는가?’” 이렇게 의심해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무자 화두를 참구하는 요령이다. 또 한 예를 들면,

어떤 스님이 운문雲門 선사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운문 선사가 대답했다.
“마른 똥막대기이니라.”


수행자는 부처님은 지고한 깨달음을 이룬 분인데 운문 스님은 ‘왜 똥막대기라 했을까?’하고 간절히 의심해야 한다. 화두는 이렇게 수행자로 하여금 큰 의심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리하여 수행자의 마음이 온통 의심 덩어리가 되게 하여 마침내 그 의심 덩어리가 툭 터지는 경지로 이끌어 주는 것이다.

화두는 또한 사유할 수 있는 모든 출구를 철저히 차단한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도 없다. 사방이 은산철벽으로 차단되어 바람 한 점 지나지 못하는 철의 장막 한 가운데 서 있는 것과 같다. 다시 예를 들어 보자. 『무문관無門關』에 나오는 법문이다.

[본칙] 수산 성념首山省念 선사가 죽비를 들고 대중에게 말했다. “여러분, 이것을 죽비라고 부르면 집착이요,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등지게 된다.”
[평창] 무문 혜개無門慧開 선사가 말했다.
“죽비라 부르면 집착이고 죽비라 부르지 않으면 등지게 된다”고 하니, 말이 있어도 안 되고 말이 없어도 안 된다. 속히 말해 보라. 속히 말해 보라.

首山和尙, 拈竹?示衆云, 汝等諸人, 若喚作竹?則觸, 不喚作竹?則背. 汝諸人且道 喚作甚?.
無門曰, 喚作竹?則觸, 不喚作竹?則背. 不得有語, 不得無語, 速道速道. - 『無門關』, 43則


긍정도 안 되고 부정도 안 된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무엇을 갖다 대도 안 된다. 도저히 접근할 길이 없다. 어느 쪽의 길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길이 끊어진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마음의 자취 또한 끊긴 심행처멸心行處滅이다. 이 자리에서 의문덩어리인 화두가 활활 살아난다.

간화선이라 할 때, 그 간看하는 대상으로서의 화두는 대상화해서 객관적으로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커다란 의심을 일으켜 끝없이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다. 화두는 주관과 객관을 근거로 하는 생각의 길이 끊어진 곳에 있다. 여기에는 단지 커다란 의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화두에 깊이 들어간다는 뜻으로 참구參究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역대 조사들은 이렇게 화두를 간절히 의심해 들어 갈 것을 입을 모아 강조했다. 화두가 수행자에게 커다란 의심으로 다가왔을 때 화두는 비로소 생사심을 끊는 취모검吹毛劒이다. 이 때 화두는 더 이상 알음알이(知解)로 분별하는 대상이 아니며, 탐구의 대상도 아니다. 온몸을 던져 의심하고 의심하여 의심이 단단히 뭉쳐 오도 가도 못할 때, 이 의심덩어리(疑團)를 깨트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간화선에서 그다지도 의심을 강조하는 까닭이다.


간화선에서는 왜 의심을 강조하는가?

간화선의 생명은 철저한 의정을 통해 깨치는 데 있다. 화두는 일상적인 분별의식을 불태워 스스로의 본성을 깨닫게 한다. 사람들은 보통 주변의 사물이나 일에 대해서 그것을 대상화하고 양변兩邊으로 나누어 판단하면서 살아간다. 그것도 자신의 의식속에 채색된 주관적인 선입견으로 분별하고 추리하여 이런저런 것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우리의 분별의식은 이렇듯 자신의 색안경을 낀 채 대상을 보고 사유판단하기 때문에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맹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날로 그 불완전성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의식이 ‘나’라고 하는 생각을 축으로 세상을 이리저리 재단해 보는 알음알이로 끊임없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먹고 마시고 사량하며 살아가는 이성의 구조란 게 본래 이와 같다. 문제는 자신의 본래 성품이 이러한 분별의식에 가려 그 바른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데 있다. 오직 분별의식을 타파해야만 자신의 본성이 밝게 드러나게 된다.

본래면목을 밝히려면 화두를 들고 그것과 하나가 되어 간절하고 사무치게 의심해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지극히 의심해 들어가다 보면 화두 하나만 또렷이 남게 되는데 이때 어떤 계기(機緣)를 만나 화두를 타파하면 마침내 자신의 본래 모습을 몰록 깨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캄캄한 암흑 속을 헤매면서 일편단심으로 눈 뜨기만을 바라던 장님이 어떤 부딪친 계기로 번쩍 눈을 뜨는 것과 같다. 또한 이것은 백년 천년 동안 막혀 있던 체증이 한순간에 내려가고 짊어지고 있던 물통의 밑바닥이 탁 빠져버린 상황과도 같다. 하지만 눈을 떠 보면 그러한 깨달음이 스스로에게 본래 갖춰져 있었던 것임을 확인할 따름이다. 그러니 새로 얻은 것도 깨달은 것도 없는 것이다.

출처 : 通達無我法者
글쓴이 : CD굽던노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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