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전래와 조사선의 수용
한국의 간화선은 육조 혜능 선사가 정착시킨 조사선의 흐름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조사선의 정맥이다. 한국에 이 선법이 처음 들어온 것은 신라 말과 고려 초기로 당시 당나라에서 유학한 구법승들이 중국에서 선법을 받아와 이 땅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부분 혜능 선사의 제자들에게 선법을 받아왔고 이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 바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고려시대에 이르자 이 구산선문을 통칭하여 ‘조계종曹溪宗’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혜능 선사의 선법을 이은 선종이라는 뜻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조계종’이라는 종명 또한 혜능 선사가 머물며 돈오선법을 펼쳤던 산 이름에서 유래한다. 당송시대부터 혜능 선사를 조계 혜능曹溪慧能으로 불려 온 점으로 볼 때 조계종은 그 정체성을 조사선의 정맥을 잇고 있는데 두고 있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구산선문과 그 선문을 연 개산조開山祖는『문조사예참문禪門祖師禮懺文』1600年 正月 八公山 夫人寺 開板 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① 가지산문 도의(道義 783~821) 국사
② 사굴산문 범일(梵日 810~889) 국사
③ 사자산문 도윤(道允) 국사
④ 성주산문 무염(無染) 국사
⑤ 봉림산문 현욱(玄昱 787~869) 국사
⑥ 희양산문 도헌(道憲 824~882) 국사
⑦ 동리산문 혜철(惠哲 785~861) 국사
⑧ 수미산문 이엄(利嚴 870~936) 국사
⑨ 실상산문 홍척(洪陟) 국사
『선문조사예참문』에서는 가섭 존자로부터 육조 혜능 선사에 이르는 서른 세 분의 삽삼조사 법계를 기록하고 난 뒤 구산 산문의 개산조를 위와 같이 밝히고 있다.
조계종의 종조인 도의 국사는 혜능 선사의 4세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 선사에게 선법을 받아왔다. 도의 국사는 지장 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참구하여 의심 뭉치인 의단疑團을 풀고 드디어 막힌 체증을 뚫었다. 이를 본 지장 선사는 마치 돌 속에서 아름다운 옥을 고른 듯, 조개 껍질 속에서 진주를 주워낸 듯 기뻐하면서 “진실로 이런 사람에게 법을 전하지 않고 누구에게 전하랴!” (洪州開元寺, 就於西堂智藏大師處, 頂謁爲師, 決疑釋滯. 大師猶若?石間之美玉, 拾蚌中之眞珠 謂曰 ... “誠可以傳法, 非斯人而誰” -『조당집』제17권.) 하면서 법명을 ‘도의道義’로 고쳐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조사선은 우리나라 스님으로서는 최초로 도의 국사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런데 도의 국사가 의단을 풀었다는 내용을 보면 국사는 지장 선사에게 참문參問하여 가르침을 받고 스승이 전해준 말씀을 간절하게 참구하다가 깨달았음을 알 수가 있다. 물론 당시 조사선의 수행법은 간화선이 체계화되기 전의 선법이었다. 그렇지만 간화선이 체계화되기 이전 조사선에서도 화두 참구와 같은 방식의 수행법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건국이념은 불교였다. 성종 이후에는 유학이 정치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불교는 지금까지 기능해 왔던 역사 형성력이 약화되었고 기존의 문벌귀족과 유착되면서 보수 세력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각 국사 의천 스님이 출현했고 스님은 문벌귀족과 결탁한 왕권강화라는 왕실의 정책에 부응하여 경전을 수집하고 속장경을 조판하고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한편 왕실의 강력한 후원을 받는 천태종의 출현으로 선종은 다소 위축되었는데, 12세기에 접어들어 교단을 정비하면서 새로운 기반을 다져 나갔다. 가지산문의 원응 학일學一(1052~1144) 국사와 사굴산문의 대감 탄연坦然(1070~1159) 국사는 선종의 부흥을 위해 활약했던 분들이다. 또한 선승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면서 당시 고려 선에 사상적 영향을 크게 미쳤던 이자현(1061~1125) 거사는 활기찬 거사불교시대를 꽃피웠다.
이러한 두 흐름은 사상과 실천에서 상호 교류를 통해 북송에서 들어 온 새로운 선사상을 수용하면서 이전의 선풍을 새롭게 변화시켜 나갔다. 당시 송나라에서는 『능엄경』이 유행했는데 중국에 유학한 의천 스님은『능엄경』을 들여와 능엄도량을 개설하고 주석서를 정리하여『능엄경』을 크게 펼쳤다. 이자현 거사는 이 영향으로 처음에는 선사상을 기본 입장으로 하여『능엄경』을 받아들였으나 뒷날 설봉雪峰(991~1067) 선사의 어록을 보다 깨닫게 되어 그 당시 탄연 선사와 같은 여러 선승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의 고려 선승을 대표하는 선사 가운데는 담진曇眞 선사가 있다. 선사는 송나라에 세 해 동안 유학하면서 부산 법원(浮山法遠 991~1067) 선사에게 선법을 받고 변경에 있는 정인사淨因寺의 주지로 주석하기도 했다. 스님은 유학을 통해 북송 선종계의 동향과 사상적 흐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스님은 예종 13년 안화사安和寺 주지로 있으면서 유학생활을 통해 익힌 선법과 좌선규칙을 폈는데 이것은 고려 선풍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활성화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다. 담진 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들이 왕사, 국사에 오르면서 담진 선사 문하의 선승들이 불교계를 이끄는 주된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탄연 선사도 임제종의 황룡 혜남의 선법을 이은 개심(介諶 1080~1148)에게 서신을 통해 인가를 받고 그의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선사가 개심 선사에게 인가 받은 일은 선종사서인『오등회원五燈會元』에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담진 선사를 비롯한 탄연 선사와 학일 선사 같은 분들이 북송의 선사들과 교류하면서 고려에는 새로운 선적禪籍이 들어와 송의 선문학이 도입되었고 공안선이라는 새로운 선풍이 자리를 잡게 된다.
간화선의 수용과 정착
고려시대 무신집권기에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 선사의 등장으로 다시 한번 선풍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보조 국사가 수선사(修禪社, 지금의 순천 송광사)에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수행운동인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전개하자, 선을 닦는 수행자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었다.
이때 비로소 대혜(大慧 1089~1163) 선사가 세운 간화선법이 보조국사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다. 국사는 수행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과 더불어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이라는 세 가지 방법을 세웠다. 여기서 간화경절문이란 화두를 들고 바로 질러가는 간화선 수행법을 말한다. 국사는 뛰어난 근기의 수행자를 위해 간화선을 제시했던 것이다.
국사는 그의 나이 마흔 한 살때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대혜어록』은 중국에서 간화선을 정착시킨 대혜 선사의 어록이다. 이 글을 읽고 깨친 보조 국사는 간화선의 수행법과 이치에도 저절로 눈이 열렸을 것이다. 국사는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 『절요사기節要私記』에서 간화선 수행의 필요성과 무자無字 화두를 들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간화선을 고려불교에 본격적으로 수용한 분은 진각 혜심(眞覺慧諶 1178~1234) 국사이다. 혜심 선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안公案 모음집이라 할 수 있는 『선문염송禪門拈頌』을 편찬하였다. 이 공안집은 수행승들이 화두話頭로 공부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길을 열어 놓았다. 또한 혜심 선사는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저술하여 수행자들이 ‘무자화두(狗子無佛性話)’에 들어 공부할 때 생길 수 있는 구체적인 병통과 그 증상에 대하여 자세히 밝혀 놓았다.
혜심 선사 이후 간화선의 수행법과 가풍은 수선사의 열여섯 국사를 통하여 계승되었다. 물론 이 분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도 중국에서 간화선 수행법이 몇 차례 고려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1270년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고려는 본격적으로 원나라의 간섭기에 접어들게 된다. 무신집권기에 고려불교를 주도하던 수선사와 백련사 계통이 퇴조하고 충렬왕 이후 선종의 가지산문과 천태종의 묘련사 계열과 법상종 계통이 고려불교의 역사 전면에 새롭게 떠오르게 된다.
수선사가 퇴조하면서 간화선의 흐름은 새롭게 떠오른 일연(一然, 1200~1289) 선사를 중심으로 한 가지산문이 주도하기에 이른다. 일연 선사는 젊은 시절 밀교와 관음신앙에 뜻을 두었으나 그 뒤 사상적 변화를 일으켜 멀리 목우자 화상의 법을 잇고(遙嗣牧牛和尙) 1249년에는 남해 정림사에서 『선문염송』을 열람하고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을 저술하였다. 이 무렵 고려의 많은 선승들은 원나라에 들어가 구법활동을 하였고 이들을 통해 많은 선적과 새로운 선법이 도입되면서 고려 선종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간화선의 발전과 완전한 정착
간화선이 이 나라에 확고하게 정착된 것은 고려 말에 활약한 세 선지식에 의해서였다. 이 세 선지식은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1),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 백운 경한(白雲景閑 1299~1375) 선사를 말한다. 이분들은 몸소 중국으로 들어가 선문의 진정한 종사들과의 거량을 통해 임제종의 바른 법맥을 이은 뒤 고려로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세 선지식은 당시 고려 선문의 새로운 가풍으로 형성된 몽산 선사의 가르침대로 깨달은 뒤 본색종사를 찾아가 인가를 받는 엄정한 전통을 세웠던 것이다.
태고 보우 국사는 스무 해 동안의 뼈를 깎는 정진으로 서른일곱 살에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고 서른여덟 살 때 활연히 대오大悟했다. 선사는 그 뒤 원나라 하무산霞霧山에 머물던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 선사를 찾아가 임제종의 정맥을 이어 왔다.
나옹 혜근 선사는 스물일곱 살에 크게 깨치고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십 년 동안 머물렀다. 스님은 원나라에 머무는 동안 처음에는 평산 처림(平山處林 1279~1361) 선사에게 가사와 불자拂子와 함께 그의 선법을 전해 받았고, 다음에는 인도에서 건너온 선지식인 지공指空 선사에게 가사와 불자 및 범어로 쓴 서신을 받아 왔다.
백운 경한 선사는 어려서 출가하여 크게 깨달은 뒤 중국에 가서 태고 국사와 마찬가지로 석옥 청공 선사의 법을 받아왔다. 백운 선사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의 편저자이기도 하다.
나옹 혜근과 백운 경한 선사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도 사실이지만 간화선을 고려 말에 널리 확산하여 정착시킨 분은 역시 태고 보우 국사이다. 보우 국사는 본분종사의 가풍으로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뛰어넘는 초불월조超佛越祖의 격외선지格外禪旨에 따라 ‘대장경의 모든 가르침과 천칠백 공안과 임제의 할喝과 덕산의 방棒일지라도 본분상에서 볼 때 다 부질없는 것’이라 설파했다.
국사는 간화선 수행을 하되 화두를 참구하여 의심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 화두를 타파한 뒤에는 본색종사를 찾아가 깨달은 경지를 확인받으라고 가르쳤다. 곧 태고 선사는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은 뒤 본색종사를 찾아가 묻고 바른 깨달음인지 아닌지를 결택 받아야 한다는 간화선 수행체계를 명확히 세워 놓은 것이다.
태고 보우 국사가 대한불교조계종의 중흥조로 숭앙받는 이유는 이러한 간화선의 수행 체계를 확립한 점과 더불어 중국에서 임제종의 정맥을 이어 와서 이 법맥이 조선불교를 통해 끊어짐이 없이 전해 내려 왔기 때문이다. 다음은 보우 국사가 석옥 청공 선사를 만나 법을 거량하여 임제선법을 전해 받은 내용이다.
석옥 화상이 『태고암가』의 발문을 써주면서 물었다.
“우두牛頭 선사가 사조四祖를 만나기 전에는 무엇 때문에 온갖 새들이 꽃을 입에 물고 왔는가?”
“부귀하면 사람들이 다 우러러 보기 때문입니다.”
“사조를 만난 뒤에는 무엇 때문에 꽃을 입에 문 새들을 찾아볼 수 없었는가?”
“가난하면 아들도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공겁空劫 이전에도 태고太古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허공이 태고 가운데서 생겼습니다.”
석옥 화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불법이 동방으로 가는구나.”
화상은 다시 가사를 주며 믿음을 표하며 말했다.
“이 가사는 오늘 전하지만 이 법은 부처님께서 전하시어 오늘에 이른 것이요. 이제 그대에게 전해 주니 잘 보살펴 지녀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오.”
또 주장자를 집어 들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이것은 노승이 평생토록 지녔던 것이오. 오늘 그대에게 주니 그대는 이것으로 길잡이를 삼으시오.”
屋跋 所獻歌以授 乃問牛頭未見四祖時 因甚百鳥啣花 曰富貴人皆仰 曰見後因 甚百鳥啣 花覓不得 曰淸貧子亦?屋又問 空劫已前 有太古耶 無太古耶 曰空生太古中 屋微笑云 佛法東矣 遂以袈裟表信曰 衣雖今日 法自靈山 流傳至今 今附於汝 汝善護持 毋令斷絶拈?杖囑云 是老僧平生用不盡的 今日附? ?將這箇 善爲途路. - 『太古和尙語錄』『韓國佛敎全書』
조선시대의 간화선 전승과 근세의 간화선 재흥
간화선법은 보우 국사에 의해 우리나라에 완전히 정착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간화선은 한국불교의 주된 수행법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보우 국사의 선맥은 환암 혼수(幻菴混修 1320~1392), 구곡 각운(龜谷覺雲), 벽계 정심(碧溪正心), 벽송 지엄(碧松智嚴 1464~1534),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 선사로 이어졌고, 영관 선사에 이르러 다시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선사와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 선사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된다.
서산 선사 문하에는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 선사와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 두 거장이 나왔고 이 가운데 편양 언기 선사의 문파가 뒷날까지 번창하게 되었다. 이 선맥은 다시 편양 선사에서 풍담 의심(楓潭義諶 1592~1655), 월담 설제(月潭雪霽 1632~1704), 환성 지안(喚惺志安 1664~1729) 선사로 이어진다.
근세에 와서 조계종의 간화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분은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6~1912) 선사와 용성 진종(龍成震鍾 1864~1940) 선사이다. 경허 선사는 용암 혜언龍巖慧彦 선사의 법을 이었다. 경허 선사의 출현은 꺼져가는 간화선의 선풍을 되살리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경허 선사의 제자로는 수월(水月 1855~1928)·혜월(慧月 1855~1928)·만공(滿空 1871~1946)·한암(漢岩 1876~1951) 선사 같은 분들이 있다.
용성 선사는 환성지안 선사에게 법맥을 이었다. 간화선에서는 무엇보다도 법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환성 선사 이후 적막하던 종문이 이분들로 말미암아 다시 활기를 되찾아 오늘에 이르렀다. 이분들의 선풍은 모두 조사선에 바탕을 둔 간화선 일맥이었다.
한국의 간화선은 육조 혜능 선사가 정착시킨 조사선의 흐름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조사선의 정맥이다. 한국에 이 선법이 처음 들어온 것은 신라 말과 고려 초기로 당시 당나라에서 유학한 구법승들이 중국에서 선법을 받아와 이 땅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부분 혜능 선사의 제자들에게 선법을 받아왔고 이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 바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고려시대에 이르자 이 구산선문을 통칭하여 ‘조계종曹溪宗’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혜능 선사의 선법을 이은 선종이라는 뜻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조계종’이라는 종명 또한 혜능 선사가 머물며 돈오선법을 펼쳤던 산 이름에서 유래한다. 당송시대부터 혜능 선사를 조계 혜능曹溪慧能으로 불려 온 점으로 볼 때 조계종은 그 정체성을 조사선의 정맥을 잇고 있는데 두고 있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구산선문과 그 선문을 연 개산조開山祖는『문조사예참문禪門祖師禮懺文』1600年 正月 八公山 夫人寺 開板 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① 가지산문 도의(道義 783~821) 국사
② 사굴산문 범일(梵日 810~889) 국사
③ 사자산문 도윤(道允) 국사
④ 성주산문 무염(無染) 국사
⑤ 봉림산문 현욱(玄昱 787~869) 국사
⑥ 희양산문 도헌(道憲 824~882) 국사
⑦ 동리산문 혜철(惠哲 785~861) 국사
⑧ 수미산문 이엄(利嚴 870~936) 국사
⑨ 실상산문 홍척(洪陟) 국사
『선문조사예참문』에서는 가섭 존자로부터 육조 혜능 선사에 이르는 서른 세 분의 삽삼조사 법계를 기록하고 난 뒤 구산 산문의 개산조를 위와 같이 밝히고 있다.
조계종의 종조인 도의 국사는 혜능 선사의 4세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 선사에게 선법을 받아왔다. 도의 국사는 지장 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참구하여 의심 뭉치인 의단疑團을 풀고 드디어 막힌 체증을 뚫었다. 이를 본 지장 선사는 마치 돌 속에서 아름다운 옥을 고른 듯, 조개 껍질 속에서 진주를 주워낸 듯 기뻐하면서 “진실로 이런 사람에게 법을 전하지 않고 누구에게 전하랴!” (洪州開元寺, 就於西堂智藏大師處, 頂謁爲師, 決疑釋滯. 大師猶若?石間之美玉, 拾蚌中之眞珠 謂曰 ... “誠可以傳法, 非斯人而誰” -『조당집』제17권.) 하면서 법명을 ‘도의道義’로 고쳐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조사선은 우리나라 스님으로서는 최초로 도의 국사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런데 도의 국사가 의단을 풀었다는 내용을 보면 국사는 지장 선사에게 참문參問하여 가르침을 받고 스승이 전해준 말씀을 간절하게 참구하다가 깨달았음을 알 수가 있다. 물론 당시 조사선의 수행법은 간화선이 체계화되기 전의 선법이었다. 그렇지만 간화선이 체계화되기 이전 조사선에서도 화두 참구와 같은 방식의 수행법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건국이념은 불교였다. 성종 이후에는 유학이 정치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불교는 지금까지 기능해 왔던 역사 형성력이 약화되었고 기존의 문벌귀족과 유착되면서 보수 세력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각 국사 의천 스님이 출현했고 스님은 문벌귀족과 결탁한 왕권강화라는 왕실의 정책에 부응하여 경전을 수집하고 속장경을 조판하고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한편 왕실의 강력한 후원을 받는 천태종의 출현으로 선종은 다소 위축되었는데, 12세기에 접어들어 교단을 정비하면서 새로운 기반을 다져 나갔다. 가지산문의 원응 학일學一(1052~1144) 국사와 사굴산문의 대감 탄연坦然(1070~1159) 국사는 선종의 부흥을 위해 활약했던 분들이다. 또한 선승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면서 당시 고려 선에 사상적 영향을 크게 미쳤던 이자현(1061~1125) 거사는 활기찬 거사불교시대를 꽃피웠다.
이러한 두 흐름은 사상과 실천에서 상호 교류를 통해 북송에서 들어 온 새로운 선사상을 수용하면서 이전의 선풍을 새롭게 변화시켜 나갔다. 당시 송나라에서는 『능엄경』이 유행했는데 중국에 유학한 의천 스님은『능엄경』을 들여와 능엄도량을 개설하고 주석서를 정리하여『능엄경』을 크게 펼쳤다. 이자현 거사는 이 영향으로 처음에는 선사상을 기본 입장으로 하여『능엄경』을 받아들였으나 뒷날 설봉雪峰(991~1067) 선사의 어록을 보다 깨닫게 되어 그 당시 탄연 선사와 같은 여러 선승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의 고려 선승을 대표하는 선사 가운데는 담진曇眞 선사가 있다. 선사는 송나라에 세 해 동안 유학하면서 부산 법원(浮山法遠 991~1067) 선사에게 선법을 받고 변경에 있는 정인사淨因寺의 주지로 주석하기도 했다. 스님은 유학을 통해 북송 선종계의 동향과 사상적 흐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스님은 예종 13년 안화사安和寺 주지로 있으면서 유학생활을 통해 익힌 선법과 좌선규칙을 폈는데 이것은 고려 선풍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활성화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다. 담진 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들이 왕사, 국사에 오르면서 담진 선사 문하의 선승들이 불교계를 이끄는 주된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탄연 선사도 임제종의 황룡 혜남의 선법을 이은 개심(介諶 1080~1148)에게 서신을 통해 인가를 받고 그의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선사가 개심 선사에게 인가 받은 일은 선종사서인『오등회원五燈會元』에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담진 선사를 비롯한 탄연 선사와 학일 선사 같은 분들이 북송의 선사들과 교류하면서 고려에는 새로운 선적禪籍이 들어와 송의 선문학이 도입되었고 공안선이라는 새로운 선풍이 자리를 잡게 된다.
간화선의 수용과 정착
고려시대 무신집권기에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 선사의 등장으로 다시 한번 선풍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보조 국사가 수선사(修禪社, 지금의 순천 송광사)에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수행운동인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전개하자, 선을 닦는 수행자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었다.
이때 비로소 대혜(大慧 1089~1163) 선사가 세운 간화선법이 보조국사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다. 국사는 수행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과 더불어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이라는 세 가지 방법을 세웠다. 여기서 간화경절문이란 화두를 들고 바로 질러가는 간화선 수행법을 말한다. 국사는 뛰어난 근기의 수행자를 위해 간화선을 제시했던 것이다.
국사는 그의 나이 마흔 한 살때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대혜어록』은 중국에서 간화선을 정착시킨 대혜 선사의 어록이다. 이 글을 읽고 깨친 보조 국사는 간화선의 수행법과 이치에도 저절로 눈이 열렸을 것이다. 국사는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 『절요사기節要私記』에서 간화선 수행의 필요성과 무자無字 화두를 들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간화선을 고려불교에 본격적으로 수용한 분은 진각 혜심(眞覺慧諶 1178~1234) 국사이다. 혜심 선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안公案 모음집이라 할 수 있는 『선문염송禪門拈頌』을 편찬하였다. 이 공안집은 수행승들이 화두話頭로 공부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길을 열어 놓았다. 또한 혜심 선사는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저술하여 수행자들이 ‘무자화두(狗子無佛性話)’에 들어 공부할 때 생길 수 있는 구체적인 병통과 그 증상에 대하여 자세히 밝혀 놓았다.
혜심 선사 이후 간화선의 수행법과 가풍은 수선사의 열여섯 국사를 통하여 계승되었다. 물론 이 분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도 중국에서 간화선 수행법이 몇 차례 고려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1270년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고려는 본격적으로 원나라의 간섭기에 접어들게 된다. 무신집권기에 고려불교를 주도하던 수선사와 백련사 계통이 퇴조하고 충렬왕 이후 선종의 가지산문과 천태종의 묘련사 계열과 법상종 계통이 고려불교의 역사 전면에 새롭게 떠오르게 된다.
수선사가 퇴조하면서 간화선의 흐름은 새롭게 떠오른 일연(一然, 1200~1289) 선사를 중심으로 한 가지산문이 주도하기에 이른다. 일연 선사는 젊은 시절 밀교와 관음신앙에 뜻을 두었으나 그 뒤 사상적 변화를 일으켜 멀리 목우자 화상의 법을 잇고(遙嗣牧牛和尙) 1249년에는 남해 정림사에서 『선문염송』을 열람하고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을 저술하였다. 이 무렵 고려의 많은 선승들은 원나라에 들어가 구법활동을 하였고 이들을 통해 많은 선적과 새로운 선법이 도입되면서 고려 선종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간화선의 발전과 완전한 정착
간화선이 이 나라에 확고하게 정착된 것은 고려 말에 활약한 세 선지식에 의해서였다. 이 세 선지식은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1),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 백운 경한(白雲景閑 1299~1375) 선사를 말한다. 이분들은 몸소 중국으로 들어가 선문의 진정한 종사들과의 거량을 통해 임제종의 바른 법맥을 이은 뒤 고려로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세 선지식은 당시 고려 선문의 새로운 가풍으로 형성된 몽산 선사의 가르침대로 깨달은 뒤 본색종사를 찾아가 인가를 받는 엄정한 전통을 세웠던 것이다.
태고 보우 국사는 스무 해 동안의 뼈를 깎는 정진으로 서른일곱 살에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고 서른여덟 살 때 활연히 대오大悟했다. 선사는 그 뒤 원나라 하무산霞霧山에 머물던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 선사를 찾아가 임제종의 정맥을 이어 왔다.
나옹 혜근 선사는 스물일곱 살에 크게 깨치고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십 년 동안 머물렀다. 스님은 원나라에 머무는 동안 처음에는 평산 처림(平山處林 1279~1361) 선사에게 가사와 불자拂子와 함께 그의 선법을 전해 받았고, 다음에는 인도에서 건너온 선지식인 지공指空 선사에게 가사와 불자 및 범어로 쓴 서신을 받아 왔다.
백운 경한 선사는 어려서 출가하여 크게 깨달은 뒤 중국에 가서 태고 국사와 마찬가지로 석옥 청공 선사의 법을 받아왔다. 백운 선사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의 편저자이기도 하다.
나옹 혜근과 백운 경한 선사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도 사실이지만 간화선을 고려 말에 널리 확산하여 정착시킨 분은 역시 태고 보우 국사이다. 보우 국사는 본분종사의 가풍으로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뛰어넘는 초불월조超佛越祖의 격외선지格外禪旨에 따라 ‘대장경의 모든 가르침과 천칠백 공안과 임제의 할喝과 덕산의 방棒일지라도 본분상에서 볼 때 다 부질없는 것’이라 설파했다.
국사는 간화선 수행을 하되 화두를 참구하여 의심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 화두를 타파한 뒤에는 본색종사를 찾아가 깨달은 경지를 확인받으라고 가르쳤다. 곧 태고 선사는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은 뒤 본색종사를 찾아가 묻고 바른 깨달음인지 아닌지를 결택 받아야 한다는 간화선 수행체계를 명확히 세워 놓은 것이다.
태고 보우 국사가 대한불교조계종의 중흥조로 숭앙받는 이유는 이러한 간화선의 수행 체계를 확립한 점과 더불어 중국에서 임제종의 정맥을 이어 와서 이 법맥이 조선불교를 통해 끊어짐이 없이 전해 내려 왔기 때문이다. 다음은 보우 국사가 석옥 청공 선사를 만나 법을 거량하여 임제선법을 전해 받은 내용이다.
석옥 화상이 『태고암가』의 발문을 써주면서 물었다.
“우두牛頭 선사가 사조四祖를 만나기 전에는 무엇 때문에 온갖 새들이 꽃을 입에 물고 왔는가?”
“부귀하면 사람들이 다 우러러 보기 때문입니다.”
“사조를 만난 뒤에는 무엇 때문에 꽃을 입에 문 새들을 찾아볼 수 없었는가?”
“가난하면 아들도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공겁空劫 이전에도 태고太古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허공이 태고 가운데서 생겼습니다.”
석옥 화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불법이 동방으로 가는구나.”
화상은 다시 가사를 주며 믿음을 표하며 말했다.
“이 가사는 오늘 전하지만 이 법은 부처님께서 전하시어 오늘에 이른 것이요. 이제 그대에게 전해 주니 잘 보살펴 지녀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오.”
또 주장자를 집어 들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이것은 노승이 평생토록 지녔던 것이오. 오늘 그대에게 주니 그대는 이것으로 길잡이를 삼으시오.”
屋跋 所獻歌以授 乃問牛頭未見四祖時 因甚百鳥啣花 曰富貴人皆仰 曰見後因 甚百鳥啣 花覓不得 曰淸貧子亦?屋又問 空劫已前 有太古耶 無太古耶 曰空生太古中 屋微笑云 佛法東矣 遂以袈裟表信曰 衣雖今日 法自靈山 流傳至今 今附於汝 汝善護持 毋令斷絶拈?杖囑云 是老僧平生用不盡的 今日附? ?將這箇 善爲途路. - 『太古和尙語錄』『韓國佛敎全書』
조선시대의 간화선 전승과 근세의 간화선 재흥
간화선법은 보우 국사에 의해 우리나라에 완전히 정착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간화선은 한국불교의 주된 수행법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보우 국사의 선맥은 환암 혼수(幻菴混修 1320~1392), 구곡 각운(龜谷覺雲), 벽계 정심(碧溪正心), 벽송 지엄(碧松智嚴 1464~1534),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 선사로 이어졌고, 영관 선사에 이르러 다시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선사와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 선사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된다.
서산 선사 문하에는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 선사와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 두 거장이 나왔고 이 가운데 편양 언기 선사의 문파가 뒷날까지 번창하게 되었다. 이 선맥은 다시 편양 선사에서 풍담 의심(楓潭義諶 1592~1655), 월담 설제(月潭雪霽 1632~1704), 환성 지안(喚惺志安 1664~1729) 선사로 이어진다.
근세에 와서 조계종의 간화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분은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6~1912) 선사와 용성 진종(龍成震鍾 1864~1940) 선사이다. 경허 선사는 용암 혜언龍巖慧彦 선사의 법을 이었다. 경허 선사의 출현은 꺼져가는 간화선의 선풍을 되살리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경허 선사의 제자로는 수월(水月 1855~1928)·혜월(慧月 1855~1928)·만공(滿空 1871~1946)·한암(漢岩 1876~1951) 선사 같은 분들이 있다.
용성 선사는 환성지안 선사에게 법맥을 이었다. 간화선에서는 무엇보다도 법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환성 선사 이후 적막하던 종문이 이분들로 말미암아 다시 활기를 되찾아 오늘에 이르렀다. 이분들의 선풍은 모두 조사선에 바탕을 둔 간화선 일맥이었다.
출처 : 通達無我法者
글쓴이 : CD굽던노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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