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실제의 중도자리에 앉으니
중도의 자리란 어떤 특정한 시공(時空)의 자리가 아니라
온생명이 어울려 있는 한삶으로서의 자리를 말하며
이것을 화엄(華嚴)이라 합니다.
'마침내'란 처음을 포함한 말로
처음과 끝이 없는 데서 처음과 끝을 세우니
그것이 진여법계(眞如法界)에서 말하는 중도의 자리입니다.
중도(中道), 실천(實踐)으로 나타나는 현상
여기에서는 '실제의 중도'라고 하고 있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란 진여(眞如)이며, 법성(法性)이며, 법계(法界)며, 여래(如來)며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도란 모든 행동에서 실제가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은 이해가 아니라 증득(曾得)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게송에서 "증지(曾智)라야 알 바"라고 했습니다. 증지란 순간순간 깨들음으로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증득하고 나서야 실천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실천 그 자체가 수행이어야 합니다. 앉을 때는 앉아 있음으로 전체가 되어야 하고 이야기할 때는 이야기로 전체가 되어야 하며, 일할 때는 일로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전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라고 하는 것이 단지 인연조건에 의해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라고 하는 생각을 완전히 비운 데서 전체가 자기로서 드러나며, 이때만이 인연조건으로 잠시 있는 '나'가 불성(佛性)의 온전한 표현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은 수행방법이나 지역의 차이로 그 높낮이를 정할 수 없습니다. 오직 언제 어디서나 빈 마음의 실천인 중도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 있지 않는가에 의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갈수록 중요한 것은 학습입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들은 가종 매체의 광고나 교육에 의해서 잘못된 정보를 너무 많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중도수행의 본질은 인위적인 조건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루어 있는 인위적인 문명의 성과에 대한 반성이 전체적으로 이루너져야만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단과 개인의 이익에 반하는 실천은 정말 여려운 것도 또한 자명한 현실입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처진 우주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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