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법성게(法性偈)」주석 모음

수선님 2019. 10. 20. 13:07

「법성게(法性偈)」주석 모음

●『법계도기총수록 法界圖記叢髓錄』

「법기 法記」 / 「진기 眞記」 / 「대기 大記」

●『일승법계도원통기 一乘法界圖圓通記』

●『대화엄법계도주병서 大華嚴法界圖註序

「법성게(法性偈)」주석 모음1)

1)「법성게(法性偈)」주석 모음은 현존하는『일승법계도』주석서 중『법계도기총

수록(法界圖記叢髓錄)』과 균여의『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와 설

잠의『대화엄법계도주병서(大華嚴一乘法界圖註幷序)』에서『일승법계도』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볼 수 있는「법성게」에 대한 주석 부분만을 뽑아 실었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고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모든 것이 끊어져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智非餘境.

총수록(叢髓錄)2)

2) 총수록(叢髓錄)은『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이하『총수록』)을 가리킨다.

『총수록』의 저본(底本)은『한국불교전서』제6책에 수록된『법계도기총수록』이다.

이에 대한 교감본으로 갑본(甲本)은『고려대장경』제45권에 수록된『법계도기

총수록』이며, 을본(乙本)은『대정신수대장경』제45권에 수록된『법계도기총수

록』이다.

「법기」3)

3)『총수록』(韓6, p.776b5-24).「법기」는『일승법계도』에 대한 법융의 주기(註記)이

다. 법융에 대해서는 자세한 행적이 전하지 않지만 대략 8백 년을 전후한 시기

에 활동한 화엄학승으로서, 의상-상원-신림-법융으로 이어지는 부석적손이다.

「법기」는『총수록』에「법융대덕기」·「법기」·「융기」등으로 표기되어 있기도 하

는데, 총 47회 인용되어 있다.

무엇이 ‘법(法)’인가? 인분(因分)4)의 설명을 빌려서 굳이 가리켜 본다

면, 그대의 몸과 마음이 곧 그것이다. 무엇이 ‘성(性)’인가? 곧 원융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째서 원융한가? 두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인 까닭

에 둘이 없는가, 둘이면서 둘이 없는가? 하나인 까닭에 둘이 없는 것이 아

니라, 곧 그 두 모양이 바로 둘이 없다고 한다.

何者是法? 借因分詮, 若强指者, 汝身心是. 何是性? 卽圓融

是也. 云何圓融? 無二相故. 一故無二, 二而無二耶? 非是一

故無二, 卽其二相, 直云無二.

4) 인분(因分)은 인(因)의 분제, 즉 인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원

인이 되는 것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경지이다. 인분은 말로 설할 수 없

는 과분(果分)에 대해 한 부분이 되며[세친(世親),『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16a17-21; 大26, pp.133c29-134a3)],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즉

인분이 아니면 과분을 드러낼 수 없고, 과분은 인분에 의해 드러나게 된다.

의상은『일승법계도』에서 인분을 교분(敎分)(또는 연기분)과 동일한 범주로

파악하였다

무엇이 ‘모든 법[諸法]’인가? 법성이 그것이다. 어째서 움직이지 않는

가? 원융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본래 고요한가? 두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본래 고요한 곳을 이름할 수 있는가? 이름하여 지목할 수 없으니,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름이 없는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모

양이 없는가? 모든 것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何是諸法? 法性是也. 何故不動? 圓融故. 何故本來寂? 無二

相故. 本來寂處, 可得名耶? 不可名目, 以無名故. 何故無名?

以無相故. 何故無相? 絶一切故.

만약 그렇다면, 이 가운데에는 닦고 증득함도 끊어졌는가? 끊어졌다.

실로 닦고 증득함이 없는가? 실로 없다. 그러나 성인 역시 닦고 증득한다.

요컨대 닦고 증득함을 필요로 한다면, 어떻게 닦고 증득하는가? 만약 가

르칠 수 있다면 이는 교분(敎分)5)이기 때문이다. 오직 대장부가 마음을 잘

쓰는 곳[善用心處]6)이지, 다른 경계가 아니다.

若爾, 此中修訂亦絶耶? 絶也. 實無修訂耶? 實無也. 然而聖

亦修訂. 要須修訂, 如何修訂? 若可誨者, 是敎分故. 唯大丈夫

善用心處, 非餘境也.

5) 교분(敎分)은 언어나 문자로 표현된 교리, 즉 가르침의 분제이다. 교분은 증분

에 상대되는 개념이며,「법성게」의 연기분이 교분에 해당한다. 증분과 교분의

관계에 대해『일승법계도』에서는, “망정(妄情)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 증(證)·

교(敎)의 두 법은 항상 두 변(邊)에 있지만 이법을 기준으로 하면 증·교의 두 법

은 옛부터 중도이고 하나여서 무분별이다.”(韓2, p.4b3-4. 若約情說, 證敎兩法,

在二邊, 若約理證敎兩法, 舊來中道, 一無分別.)라고 하였다. 또 『총수록』의

「대기」에서는, “이 인(印)에 의지하면, 만약 상근기라면 곧바로 증분에 들어가

고, 중근기라면 ‘진성’ 이하의 교분 중에서 능히 들어갈 수 있으며, 하근기라면

뒤의 ‘행자’ 이하의 수행방편 중에서 비로소 들어갈 수 있다.”(韓6, p.775b6-9;

高45, p.148b14-16. 依於此印, 若是上根, 直入訂分, 若是中根, 眞性下敎分之中,

而能得入, 若是下根, 於後行者下修行方便之中, 方始得入也.)고 하였다.

6) 마음을 잘 쓰는 곳[善用心處]은 의상 화엄사상의 실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화엄경(華嚴經)』의 가르침이 신라인들에게 어떻게 현실적으로 구현되었는가

를 알게 한다. 의상의 제자인 표훈(表訓)·진정(眞定) 등이 의상에게「법계도인」

을 배울 때, “움직이지 않는 나의 몸이 곧 법신 자체라는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

니까?”(『총수록』韓6, p.775b11-12; 高45, p.148b17. 不動吾身, 卽是法身自

體之義, 云何得見?)라고 질문하자, 의상은 사구게(諸緣根本我 云云)로 대답하고,

“그대들은 마땅히 마음을 잘 써야 한다.”(『총수록』韓6, p.775b15; 高45, p.

148b20. 汝等當善用心耳.)고 당부하였다.

이 증분 중에 일체 모든 법이 갖추어져 있는가, 빠져 있는가? 갖추어져

있다. 만약 그렇다면 역시 변계(遍計)의 비법(非法)7)도 갖추고 있는가? 어

찌 갖추고 있겠는가? 그렇다면 빠져 있는가? 어찌 빠져 있겠는가? 말하자

면 한 물건도 보법(普法) 아님이 없으니 어찌 갖추었겠는가? 변계의 비법

을 움직이지 않고 곧 법을 만족하니 어찌 빠져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엄

스님[儼師]8)이 말하기를, “일승 중에 어떤 법이 결여되었는가? 비법이 결

여되었다. 어떤 법이 결여되지 않았는가? 비법이 결여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此訂分中, 一切諸法, 具耶? 闕耶? 具也. 若爾, 亦具遍計非法

耶? 何得具耶? 爾則闕耶? 何得闕耶? 謂無有一物非普法故,

何得具耶? 不動遍計非法, 卽滿足法, 何得闕耶? 故儼師云,

“一乘中, 何法缺? 非法缺. 何法不缺? 非法不缺也.”

7) 변계(遍計, parikalpa)의 비법(非法)은 범부의 망정(妄情)으로 두루 모든 법을

계탁(計度)하는 것이다. 즉 변계는 이리저리 억측한다는 뜻으로서, 자기의 욕

망과 감정에서 시비선악의 차별적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소집은 변계에 의

해 잘못 보이는 대상, 즉 주관의 색안경을 끼고서 대상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언제든지 잘못 분별하는 것을 변계소집(遍計所執)이라 한다. 변계소집으로 나

타난 경계는 망정으로 나타난 허망한 경계이며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

로 공이라 한다.『일승법계도』에서는 증득과 가르침의 두 법이 옛부터 중도이

고, 하나여서 무분별이라는 측면에서 변계(遍計)의 무상(無相)을 말하고, 성자

(聖者)가 변계를 따르기 때문에 삼성(三性)을 건립하여 우선 마음을 편안히 하

고, 이후에 점점 세 가지 무성(無性)을 드러내어 꿈꾸는 사람을 깨우치니 이것

이 바로 성자의 위대하고 훌륭한 방편이라고 하였다.(韓2, p.4b4-13). 변계소집

은 범부의 경계이고, 변계의 모든 법은 전도되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며 범부의

경계가 필경에는 공(空)하여 상대할 것이 없다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비법이

라 한다.

8) 지엄(智儼, 602~668)은 중국 화엄종 제2조(祖)이며, 화엄종의 기틀을 마련하였

다. 수나라 때 스님이며, 천수(天水) 사람이다. 성은 조씨(趙氏)이고, 호는 운

화존자(雲華尊者) 또는 지상존자(至相尊者)이다. 종남산 지상사에 주석하였

으므로 ‘지상존자’라 한다. 지엄의 나이 12세 때(613년)에 스승인 두순(杜順,

557~640)을 만났으며, 두순은 그를 상족(上足)인 달(達)법사에게 맡겨 훈육하

게 하였다. 14세 때 계(戒)를 받고 수행에 전념하였으며, 법상(法常)에게『섭대

승론(攝大乘論)』을 배우고 지정(智正)에게『화엄경(華嚴經)』을 배우다가 별교일

승의 그윽한 뜻을 깨달았다. 지엄은 당시 모든 종파의 교학을 두루 섭렵하고 실

천에 노력하였다. 그가 종남산 지상사에 있을 때 의상이 찾아가 수년간 화엄일

승의 묘지(妙旨)를 배우고『일승법계도』를 지어 지엄의 인정을 받았으며, 이후

신라로 귀국할 때까지 더 공부하였다. 법장의『화엄경전기』권3(大51, p.164a4)

에 의하면 지엄의 저서로 20여 부가 있었다고 하며, 현존하는 것으로는『육십화

엄(六十華嚴)』에 대한 주석서인『수현기(搜玄記)』(5권)를 비롯하여『오십요문답

(五十要問答)』(2권)『공목장(孔目章)』(4권)·『일승십현문(一乘十玄門)(1권)·『금

강반야경략소(金剛般若經略疏)』·『무성석섭론소(無性釋攝論疏)』(4권)·『공양십

문의식(供養十門儀式)』등이 있다. 지엄의 화엄사상은 의상과 법장에게 많은 영

향을 미쳤는데,『총수록』에는 ‘운화존자운(雲華尊者云)’(3회 인용), ‘지상운(至相

云)’(8회 인용) 등의 형태로 지엄과 그의 제자 사이에 행해진 대화들이 실려 있

다. 이러한 내용들은 현존하는 지엄의 저술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로서 지엄 사

상의 일부를 알 수 있게 한다.『화엄경전기』 권3(大51, pp.163b18-164b13)·도선

(道宣)의『속고승전』권25(大50, p.654a10-13)·최치원(崔致遠)의『법장화상전(法

藏和尙傳)』(韓3, p.770b7-23)·염조은(閻朝隱)의 강장법사지비(康藏法師之碑)(大

50, p.280b6-c16)·『법계종오조약기(法界宗五祖略記)』(卍134, pp.544a11-545

a15)에 그의 전기가 전한다.

「진기」9)

9)『총수록』(韓6, p.776c1-15; 高45, p.150a6-14).

‘법성’이란 미세한 티끌 법성·수미산(須彌山)10) 법성·일척(一尺) 법

성·오척(五尺)11) 법성이니, 만약 금일의 오척 법성을 기준으로 하여 논한

다면 미세한 티끌 법성과 수미산 법성 등이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

고서 오척을 이루어 꼭 들어맞는 것이니, 작은 지위가 늘어나지도 않고 큰

지위가 줄어들지도 않으면서 능히 이룬다. ‘원융’이란 미세한 티끌법이 오

척에 만족하고 수미산법이 오척에 계합하기 때문이다. ‘두 모양이 없다’란

미세한 티끌이 비록 만족하고 수미산이 비록 계합하지만 다만 오직 오척

인 때문이다.

法性者, 微塵法性, 須彌山法性, 一尺法性, 五尺法性, 若約今

日五尺法性論者, 微塵法性, 須彌山法性等, 不動自位稱成五

尺, 不增小位不減大位, 而能成也. 圓融者, 微塵法滿五尺, 須

彌山法, 契五尺故也. 無二相者, 微塵雖滿, 須彌雖契, 只唯五

尺故也.

10) 수미산(須彌山)은 고대 인도에서 세계의 중앙에 높이 솟아 있다고 생각한 산이

다. 수미는 산스크리트어 sumeru의 음역이며, 묘고산(妙高山)이라 한역한다. 불

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대해(大海) 속에 있고 금륜(金輪) 위에 있으며 그 높이는

수면에서 8만 유순(由旬)이고, 구산팔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다. 그 주위를

해와 달이 돌고 육도(六道)·제천(諸天)은 모두 그 측면, 또는 위쪽에 있으며, 그

정상에 제석천(帝釋天)이 사는 궁전이 있다.

11) 오척(五尺)은 의상계 화엄에서 주로 사용한 용어이다. 의상이 오척의 몸[五尺

身]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오척은 당시 일반 성인의 키를 의미하는

듯하다.

‘모든 법’이란 앞의 법을 가리킨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앞의 성

(性)을 가리킨다. 성(性)이란 머무름 없는[無住]12) 법성이다. 그래서 화상13)

이 “금일 오척의 몸이 움직이지 않음을 기준으로 해서 머무름이 없다고 한

다”라고 하였다. ‘본래 고요하다’란 앞의 두 모양이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만 오척 법성이 곁에 다른 것이 없으므로 ‘본래 고요하다’라고 하였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일체가 끊어졌다’란, 위에서 처음부터 이름과

모양을 보지 않는 곳과 같다. ‘깨달은 지혜로 알 바이며 다른 경계가 아니

다’란,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능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諸法者, 指前法也. 不動者, 指前性也. 性者, 無住法性也, 故

此和尙云, “約今日五尺身之不動, 爲無住也.” 本來寂者, 指前

無二相也. 只是五尺法性, 側無餘物, 故云本來寂也. 無名無相

絶一切者, 如上初初不見名相處也. 訂智所知非餘境者, 唯佛

與佛, 乃可能知故也.

12) ‘머무름이 없는’[無住, aniketa, apratistha]은 머물러서 집착하는 것이 없다는 뜻

이다. 대상에 국한하여 보면 일정하게 머무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며, 마

음이 일정한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서 자유롭고 걸림이 없는 작용을 잃지 않는

다는 뜻이다. 부주(不住)와 같은 의미이다. 구마라집(鳩摩羅什) 역(譯),『금강반

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에서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

라.”(高5, p.980b13-14; 大8, p.749c22-23. 應無所住, 而生其心.)고 하였고,

『유마힐소설경』중권「관중생품(觀衆生品)」에서는 “머무름이 없는 근본으로

부터 모든 법을 세운다.”(高9, p.992b14-15; 大14, p.547c22. 從無住本, 立一

切法.)고 하였으며,『육십화엄(六十華嚴)』권42「이세간품(離世間品)」에서는

“모든 법은 허깨비와 같고 아지랑이와 같으며, 물속의 달과 같고 거울 속의 형

상과 같으며, 꿈과 같고 번개와 같으며, 부르는 소리의 메아리와 같고, 돌리는

불바퀴와 같으며, 허공의 글자와 같고, 인다라의 진(陣)과 같으며, 일월의 빛과

같아서, 상(常)도 아니요 단(斷)도 아니며, 오거나 가거나 머무르지도 않는다고

관찰한다.”(高8, p.290c11-14; 大9, p.662a23-26. 觀一切法如化如焰, 水月鏡

像, 如夢如電, 如呼聲響, 如旋火輪, 如空中字, 如因陀羅陣, 如日月光, 非常非斷,

無來無去無住.)고 하였다. 의상은 “체는 무주실상이다. 미혹한 작용을 번뇌[惑]

로 삼으니, 미혹한 작용이 그칠뿐이어서 가히 끊을 체가 없다.”(『총수록』 韓6,

p.789b6-8; 高45, p.163b7-8,『석화엄교분기원통초』韓4, p.387a21-23. 體

是無住實相, 迷用爲惑, 迷用息耳, 無體可斷.)고 하였다. 의상의 화엄사상을 담고

있는『도신장』에서는 “묻는다. 법의 여실함이란 무엇인가? 답한다. 이것은 곧

법의 실성이며, 무주의 근본이다. 이미 무주이므로 기준 잡을 만한 법이 없고,

기준 잡을 만한 법이 없기 때문에 무분별상이며, 무분별상이기 때문에 마음이

가는 바의 곳이 아니다. 다만 증득한 자의 경계여서 아직 증득하지 못한 자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균여,『원통기』韓4, p.15a16-21. 問. 其法之如實者,

何乎? 答. 此卽法實性, 无住本也. 旣无住故, 无可約之法, 无可約之法故, 无分別

相, 无分別相故, 非心所行處. 但證者境, 非未證者知.)라고 하였다. 또한『도신

장』에서는 “연기(緣起)란 무성(無性)이며, 무성은 무주(無住)이다.”(『총수록』

韓6, p.777c20-21; 高45, p.151a20. 緣起者無性, 無性者無住.)라고 하였다.

13) 화상(和尙)은 산스크리트어 Upādhyāya의 음역어이며, 친교사(親敎師)·역생(力

生) 등으로 한역한다. 원래는 바라문교에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스승을 산스

크리트어 upādhyāya라 불렀던 것을 불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제자를 둘 자격

이 있는 자, 제자에게 구족계를 내려주는 스승, 수계사인 스승이다. 그 자격요건

은 덕과 지혜를 겸비하고 계율을 잘 지키며 많이 들은 사람이어야 한다. 승가의

전통에서 나이 젊은 비구가 연장자인 비구를 지칭할 때 화상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의상스님을 가리킨다.

원통기(圓通記)14)

14) 원통기(圓通記)는 균여의『일승법계도원통기』(韓4, p.7b13-c6)를 가리킨다.

『원통기』의 저본(底本)은『한국불교전서』제4책에 수록된『일승법계도원통

기』이다. 동국대학교소장본(東國大學校所藏本)『일승법계도원통기』와 국립

도서관소장본(國立圖書館所藏本)『일승법계도원통기』를 저본과 교감하였으

나,『한국불교전서』제4책에 수록된『일승법계도원통기』와 동일하므로 저

본에 따랐다.

본문 중에 처음의 증분 4구는 거듭 점차로 의심을 없앤다. 말하자면 법

성에 무슨 모양이 있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다’

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은 것인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다’고 한

다. 무슨 까닭에 모든 법은 본래 고요한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이름도 없

고 모양도 없으며 모든 것이 끊어졌다’고 한다. 만약 이름과 모양이 없어

모든 것이 끊어져서 본래 고요하다면 어떻게 이러한 경계를 알 수 있는

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라

고 한다. 이와 같이 거듭 점차적으로 없앤다.

文中初證分四句, 展轉遣疑. 謂法性有何相? 故云, 圓融无二

相. 若爾, 應如龜毛兎角耶? 故云, 諸法不動本來寂. 何故諸法

本來寂耶? 故云, 无名无相絶一切. 若无名相絶一切, 本來寂

者, 則云何得知此境界耶? 故云, 證智所知非餘境. 如是展轉

遣也.

또 해석한다. 첫 구는 두 변을 막고, 다음 구는 움직임을 가려내며, 그 다

음 구는 이름과 모양을 가려내고, 마지막 구는 아직 증득하지 못함을 가려

낸다. 처음 두 변을 막는 가운데 만약 진(眞)·속(俗)의 두 모양을 기준으

로 하면 법성 가운데서 끝내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법성은 본래 진(眞)·

속(俗)과 염(染)·정(淨) 등의 모든 상대되는 모양을 여의기 때문이다.

又釋. 初句遮二邊, 次句簡動, 次句簡名相, 後句簡未證. 初遮

二邊中, 若約眞俗二相, 於法性中, 竟不可得. 如是法性, 本離

眞俗染淨等一切待對之相故也.

묻는다. 법성과 진성은 어떻게 다른가?

답한다.「양원화상기」15)에 말하기를, “법성은 진(眞)과 망(妄)에 통하

여 원융을 취하며, 진성은 다만 참된 법만을 기준으로 한다. 왜냐하면 참

된 법은 자재하기 때문에 능히 연(緣)을 따를 수 있고, 망법(妄法)은 자재

하지 않아서 능히 연(緣)을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증분 가운데 진망(眞

妄)에 통하는 법성을 나타내고, 연기분(緣起分)16) 중에는 오직 자재한 진

성의 뜻만 나타낸다. 지혜를 기준을 하여 진실로 논하면 차별이 없다”〈이

상〉라고 하였다.

問. 法性與眞性, 何別?

答. 良圓和尙記云,“ 法性者, 通眞妄取圓融, 眞性者, 但約眞

法. 何以故, 眞法自在, 故能隨緣, 妄法不自在, 不能隨緣. 是

故, 證分中, 現通眞妄之法性, 緣起分中, 唯現自在眞性之義.

約智實論, 无差別也.”〈已上〉

15)『양원화상기』는 의상의『일승법계도』에 대한 양원의 주기로 추측된다.『양원화

상기』가 균여의 저술에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 초기까지는 전해지

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원은 의상의 10대제자(『삼국유사(三國遺事)』「의상

전교(義湘傳敎)」조 韓6, p.349b9-12) 또는 4대제자(최치원(崔致遠),『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韓3, p.775c13)의 한 사람으로서, ‘양원(亮元)’(『법장화상전』) 또는

‘양원(良圓)’(『삼국유사』)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16) 연기분(緣起分)은 깨달음의 증분 법성세계에 들어가는 통로(수단, 방편)라 할 수

있다. 연기관을 통해서 법성을 증득하게 되므로 불가설의 법성에 이르기 위해

가설의 진성(眞性)으로 대치시킨 것이다. 연기분은 세부적으로 나눌 수 있으나,

증분은 한 맛[一味]의 법계처(法界處)이다.(韓6, p.775b3; 高45, p.148b13). 연

기분은「법성게」30구를 과문(科門)할 때 자리행에 해당한다. 자리행은 증분과

연기분으로 나누어서 설명되는데,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이하 ‘십

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까지 14구가 연기분이다.

법계도주(法界圖註)17)

17) 법계도주(法界圖註)는 설잠(雪岑)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대화엄법계도

주병서(大華嚴法界圖註并序)』를 가리킨다. 저본은『한국불교전서』제7책에 수록

(pp.303a10-307a4)된『대화엄법계도주병서(大華嚴法界圖註并序)』이다. 교감본

으로 갑본은 동국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통도사 간행 필사본(1944년)『대화엄

일승법계도(大華嚴一乘法界圖)』이고, 을본은 서울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통도

사 간행 필사본(1944년)『대화엄법계도(大華嚴法界圖)』이고, 병본은『매월당전

집』에 수록(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3. pp.416-421)된 『대화엄법계

도주(大華嚴法界圖註)』이다.『한국불교전서』는 갑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법성(法性)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다. [法性圓融無二相]

‘법(法)’이란 곧 육근(六根)의 문 앞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인 유정(有情)

과 무정(無情)이다. ‘성(性)’이란 육근의 문 앞에 항상 받아 쓰지만[受用]

헤아려 모색할 수 없는 소식이다. ‘원융(圓融)’이란 일체법(一切法)이 곧

일체성(一切性)이며 일체성이 곧 일체법이니, 바로 지금의 푸른 산·푸른

물이 곧 본래성이며 본래성이 곧 푸른 산·푸른 물이다. ‘두 모양 없다[無

二相]’란 푸른 산·푸른 물과 본래성이 원래 하나의 깨끗한 바탕[王太白]18)

이어서 본래 둘이 없다. 다만 세상 사람이 망녕되이 분별을 냄으로써 드디

어 나와 남을 두고, 청정하여 걸림 없는 가운데서 문득 다른 생각을 내어

십법계(十法界)19)를 날조하여 맹렬히 작용하는 것이다. 걸림 없는 소식을

알고자 하는가?

미진의 세계에 자타가 털끝만큼도 떨어지지 않으며

십세의 예와 지금에 시작과 마침이 바로 그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20)

法者, 卽六根門頭, 森羅萬像, 情與無情也. 性者, 六根門頭,

常常受用, 計較摸索不得底消息也. 圓融者, 一切法即一切性,

一切性即一切法, 即今靑山綠水即是本來性, 本來性即是靑山

綠水也. 無二相者, 靑山綠水本來性, 元是一箇王太白, 本來無

二也. 但以世人, 妄生分別, 遂有我人, 於淸淨無礙中, 瞥生異

念, 揑作十法界, 熾然作用. 要知不礙底消息麽?

微塵刹境, 自他不隔於毫釐, 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

18) 태백(太白)은 매우 깨끗하다는 의미이고 왕(王)은 강조하는 말이다.『노자』41

장에 “최상의 덕은 골짜기처럼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참으로 희고 깨끗

한 것은 얼른 보기에 우중충해 보이며, 참으로 넓고 큰 덕은 얼른 보기에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 참으로 위대한 인물은 보통 사람보다 그 성취가 늦고, 너무나

큰 소리는 도리어 그 소리가 귀에 잘 들리지 않으며, 더없이 큰 형체를 가진 것

은 도리어 그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다.”(上德若谷, 太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

偸. …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고 하였다.

19) 십법계(十法界)는 일체 모든 존재 세계를 열 가지로 나눈 것이다. 윤회하는 세계

인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天)의 6도와 성현의 세계인 성문, 연각, 보

살, 부처님의 세계를 합하여 말하는 것이다. 천태에서는 십계 각각이 십계를 갖

추고 있다고 한다[지의(智顗, 538~597),『묘법연화경문구(妙法蓮華經文句)』

권2(大34, p.21a18-19) 등].『화엄경(華嚴經)』「입법계품」에는 희목관찰중

생주야신(喜目觀察衆生主夜神)이 보현보살의 도(道)에 들어가서 십법계의 모든

차별문을 요달한다는 구절 등이 보인다.(高8, p.867c11; 大10, p.377c21-22)

여기에서 설잠은 십법계에 대한 집착을 경계시키고 있다.

20) 이 구절은 이통현(李通玄, 635~730)의『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서문의 “가없

는 세계에 자타가 털끝만큼의 간격이 없으며 십세의 예와 지금에 시작과 마침

이 바로 그 생각에서 떠나지 않는다.”(高36, p.230c18-19; 大36, p.721a20-22.

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 始終不移於當念.)에서 비롯한다. 이통현의

이 말은 양기방회(楊岐方會, 992~1049)의 『양기방회화상후록(楊岐方會和尚後

錄)』(大47, p.647c16-17), 오조법연(五祖法演, 1024~1104)의 『법연선사어록

(法演禪師語錄)』(大47, p.658a21-23),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의『대

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大47, p.822b5-7), 굉지정각(宏智正覺,

1091~1157)의『굉지선사광록(宏智禪師廣錄)』(大48, p.56b6-7) 등 여러 어록

에도 인용되고 있는데, 특히『대혜보각선사어록』(大47, p.907a22-23) 등에서

는 이통현 장자의 말임을 직접 밝히고 있다. 설잠은 그의『화엄석제(華嚴釋題)』

에서도 천여유칙(天如惟則, 1300년 경)이 사용한 이 구절을 이용하여『화엄경

(華嚴經)』의 제목을 해석하고 있다(韓7, p.296c8-13). 여기에서 천여유칙은

이 구절을 두순의 법신송과 연관 지어서 설법하고 있으니, ‘가없는 세계에 자타

가 털끝만큼도 떨어지지 않는다[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는 법신송의 전반

부인 ‘회주의 소 벼 먹거늘 익주의 말 배 부르다[懷州牛喫禾, 益州馬腹腸.]’에,

‘십세의 예와 지금에 시작과 마침이 바로 그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는 법신송의 후반부인 ‘천하의 의원을 찾으니 돼지 왼쪽 허

벅지에 뜸 뜨네[天下覓醫人, 炙猪左膊上.]’로 연결시키고 있다.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다.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諸法]’이란 곧 앞에 나타난 일체 받아 씀[受用]이다. ‘움직이지

아니하여[不動]’란 곧 앞의 헤아려 모색할 수 없음이다. ‘본래 고요하다

[本來寂]’란 곧 앞의 ‘두 모양 없다[無二相]’이니, 이른바 “실끝만큼도 움직

이지 아니하여 본연에 합한다”21)이다. ‘본연’이라고 말하는 것이 벌써 움

직인 것이니 필경 어떠한가?

어리석은 사람의 면전에 꿈도 말할 수 없다.22)

諸法, 即前現前, 一切受用也. 不動者, 即前計較摸索不得也.

本來寂者, 即前無二相, 所謂,“ 不動絲毫合本然”也. 道箇本

然, 早是動也, 畢竟如何?

痴人面前, 不得說夢.

21) 송나라 야보도천(冶父道川, 1100년 경)의『금강경주(金剛經註)』에서『금강경』의

“여시아문(如昰我聞)” 중에 ‘아(我)’에 대해 붙인 야보송의 일부이다. “아여, 알아

차리면 분명 두 개가 된다.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연에 합하였으니

소리를 아는 사람은 저절로 솔바람에 화답이 있으리라.”(卍38, p.696b6-7. 我, 認

得分明成兩箇. 不動纖毫合本然, 知音自有松風和.)

22) 어리석은 사람은 꿈 이야기도 사실이라고 믿어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함부

로 꿈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즉 식견이 얕은 사람 앞에서는 함부로 화제를

꺼내면 안 된다는 의미의 중국 속담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의『대

혜보각선사어록』권1(大47, p.815a20), 허당지우(虛堂智愚, 1185~1269)의『허당

화상어록(虛堂和尚語錄)』권2(大47, p.1001a24) 등에 보이며,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의『무문관(無門關)』권1(大48, p.293b29) 등에는 불가설몽(不可說夢)

의 형태로도 보인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모든 것이 끊어져 [無名無相絶一切]

여기에 이르러서는 부처도 아니고 보살도 아니며, 이승(二乘)도 아니고

범부도 아니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며, 법성도 아니고 법성 아님

도 아니며, 연기[분]도 아니고 증분도 아니니, 이름으로 지목할 수 있겠는

가? 모습으로 지견(知見)할 수 있겠는가? 일체 반연과 의의(擬議)가 모두

허용되지 않으니 비로소 진실임을 어찌 하겠는가?

말하고자 하나 말이 미치지 않으니 숲 아래에서 잘 상량하라.23)

到這裏, 非佛非菩薩, 非二乘非凡夫, 非法非非法, 非法性非非

法性, 非緣起非證分, 可以名目耶? 可以相知見耶? 一切攀緣

擬議都沒, 奈何方信道?

欲言, 言不及, 林下好商24)量.

23) 송나라 자승(子昇)이 모아 기록한『선문제조사게송(禪門諸祖師偈頌)』권1에 실

린(卍116, p.926a17) 법등선사(法燈禪師)의 ‘한산을 흉내내어[擬寒山]’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법등선사는 당나라 청량태흠(淸涼泰欽, ?~795)을 가리킨다.

24) 저본에는「啇」으로 되어 있으나 병본에 따라「商」으로 바꾸었다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 [證智所知非餘境]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것이 이것을 증득하심이고, 역

대 선사가 깨달은 것이 이것을 깨달음이니, 영봉(靈峰)25)과 소실(少室)26)

이후부터 대대로 서로 계승하여 향기를 잇고 불꽃을 이은 사람이 그 얼마

인지 알 수 없으나 다만 이것에 계합하였을 따름이다. ‘경계[境]’란 위에

서 말한 바와 같이 일체가 끊어진 것이니 생각의 여지가 있는 경계가 아

니다. 그렇다면 이 경계와 세간의 경계가 같은가? 다른가? 〈잠자코 있다가 말

하였다.〉

대장부가 지혜의 검을 잡았으니

반야(般若)의 칼날이여! 금강(金剛)의 불꽃이로다.

다만 외도(外道)27)의 마음을 꺾었을 뿐만 아니라

벌써 천마(天魔)28)의 담을 떨어뜨렸도다.29)

쯧쯧! 다시 범함은 용납하지 않는다.30)

三世諸佛之所證, 證此者也, 歷代禪師之所悟, 悟此者也, 自靈

峰少室已後, 代代相承, 連芳續焰者, 不知其幾何, 但契此而已.

境者, 如上所云, 絶一切者, 非商31)量有分之境也. 伊麽則這个

境, 與世間境, 同耶? 異耶? 〈良久云〉 大丈夫秉慧釼, 般若鋒兮!

金剛焰, 非但能摧外道心, 早曾落却天魔膽. 咄! 再犯不容.

25) 영봉(靈峰)은 기사굴(耆闍崛, Grdhrakūta)산을 가리킨다. 중인도 마갈타국 왕

사성 부근에 있는 산이며 독수리가 많이 있으므로 영취산(靈鷲山), 취봉(鷲峰)

이라고도 한다[『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高42, p.556a5; 大54, p.482a18)].

천태에서는 부처님께서『법화경』을 설하신 곳이라고 하지만, 선종에서는 부처

님께서 이곳에서 대중들에게 꽃을 들어 보이셨을 때 가섭만이 미소를 지음[『무

문관(無門關)』권1(大48, p.293c13-16) 등]으로써 처음으로 부처님의 심법(心

法)이 이어지는 시초가 되는 장소이다.

26) 소실(少室)은 중국 하남성 하남부 등봉현의 서북쪽에 있는 숭산(嵩山)의 봉우리

이름이다. 북위(北魏) 태화(太和) 16년(492)에 왕명으로 이 산에 소림사를 건립

[『광홍명집(廣弘明集)』권2(高33, pp.294c23-295a5; 大52, p.104a19-b2)]

하였으며, 이 소림사에서 달마대사가 좌선 수행하고 혜가에게 법을 전해줌[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3(大51, p.220b24-c27)]으로써 비로소 중국에

서 심법이 이어지는 시초가 되었다.

27) 외도(外道, t rthaka)는 외교(外敎), 외학(外學), 외법(外法)이라고도 하는데, 불

교 이외의 교학을 가리키거나 그런 교학을 받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28) 천마(天魔)는 욕계의 꼭대기에 있는 제6천의 주인으로 불교에서는 파순(波旬,

pāpiyas)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항상 악한 뜻을 품고, 나쁜 법을 만들어

수도인을 어지럽히고 사람의 혜명(慧命)을 끊는다고 한다[『번역명의집(飜譯

名義集)』권2(大54, p.1080a25-b7)].

29) 이 4구게는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의『증도가(證道歌)』(大48, p.396b3-4)의

일부이다. 이후 『원오불과선사어록(圓悟佛果禪師語錄)』 권9(大47, p.755c12-14),

『요암청욕선사어록(了菴淸欲禪師語錄)』권8(卍123, p.775a11-13) 등 여러 어록에

인용되고 있다.

30) ‘다시 범함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번만은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지

금은 본래 의도와 반대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임제의현(臨濟義玄, ?~867)

의『진주임제혜조선사어록(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권1(大7, p.496c19), 양기

방회(楊岐方會, 996~1046)의『양기방회화상어록(楊岐方會和尚語錄)』권1(大

47, p.645a15-16),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25)의『벽암록(碧巖錄)』권4

(大48, p.175c11-12) 등에도 나온다.

31) 저본에는「啇」으로 되어 있으나 병본에 따라「商」으로 바꾸었다.

진성은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하여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총수록(叢髓錄)

「법기」32)

32)『총수록』(韓6, p.777a23-b18; 高45, pp.150b13-151a4).

위의 증분(證分) 중에서는 그 몸과 마음을 가리켜 바로 법성(法性)을 보

였으나, 이름과 모양이 없으므로 중생들이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법성

을 진성(眞性)이라 바꾸어 이름하여 그들이 익히게 한다. 비유하면 눈먼

사람이 비단 짜는 것을 배우고자 하니 기술자가 가르쳐 말하기를, “마땅히

모아 갖추어서 오라”고 하니, 저 눈먼 사람이 풀로 만든 끈을 가지고 오

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증분은 일체를 끊었기 때문에 오직 증득한 이만

이 아는 바이다. 그러나 팔식(八識)33)의 망심으로써 증득해 들어가고자 하

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바로 증분의 처소를 가리키지 못하고 이에 한 걸

음 내려와서 임시로 진성이란 이름을 지어서 그것을 보였다.

上訂分中, 指其身心, 直示法性, 由無名相, 機難得入故, 以法

性轉名眞性, 令其習也. 比如盲人, 欲學織錦, 匠者敎云,“ 當

集具來,” 而彼盲人, 執草繩來. 如是訂分絶一切故, 唯訂所知,

然以八識妄心, 而欲訂入故, 於此人不能直指訂分之處, 乃下

一步, 假作眞性之名, 以示之也.

33) 팔식(八識)은 전오식·제6식·제7식·제8식의 여덟 가지 식을 통칭하는 말이

다. 그 중 특히 제8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서, 윤회의 주체로 여겨진다.

뢰야는 산스크리트어 ālaya-vijñāna 중의 ālaya의 음역이며, 식은 산스크

리트어 vijñāna의 한역이다. 아뢰야식[세친(世親) 조(造), 현장(玄奘) 역(譯),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권1(高17, p.78a15; 大31, p.322c3-4)]은 신역

(新譯)이며, 구역으로는 아려야식(阿黎耶識)[무착(無著) 조, 진제(眞諦) 역,

『섭대승론(攝大乘論)』상권(高16, p.1054a10-11; 大31, p.113c27)]이라

한다. 유식설에서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식의 작용이며, 감춰진 잠재의식,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식이다. 아뢰야식은 모든 유(有)가 생하는 잡염품법

이 이 가운데 거두어지고 간직되어 과(果)의 성품이 되며, 또한 이 식은 모든

법 가운데 거두어지고 간직되어 인(因)의 성품이 된다.[세친 조, 현장 역,

『섭대승론석』권1(高17, p.80c9; 大31, p.324b14-16)].

‘매우 깊다’란 진성에 들어가는 문이니, 말하자면 화장세계(華藏世界)34)

의 매우 깊음과 미륵누각(彌勒樓閣)35)의 매우 깊음이다. ‘화장세계가 매우

깊다’란 하나하나의 티끌 속에서 법계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미세한 티끌을 기준으로 하여 그 안과 밖을 구하나 다 얻지 못한다. ‘미륵

누각이 매우 깊다’란, 말하자면 미륵(彌勒)36)[보살]이 손가락을 튕겨 누각

의 문을 열고 선재(善財)가 들어가자마자 단박에 삼세의 자기 몸 및 법과

모든 선우(善友)를 보기 때문이다.

甚深者, 入眞性之門, 謂花藏世界之甚深, 與彌勒樓閣之甚深

也. 花藏世界甚深者, 以一一塵中見法界故. 是故, 約一微塵,

求其內外, 並不可得. 彌勒樓閣甚深者, 謂彌勒彈指開樓閣門,

善財入已, 頓見三世自身及法與諸善友故也.

34) 화장세계(花藏世界, kusumatalagarbhavyūha, alankāralokadhātusamudra 또는

padmagarbhalokadhātu)는 연화장세계(蓮花藏世界)의 줄인 말이다. 화엄정토는

세하게는 연화장장엄세계해(蓮花藏莊嚴世界海)이다. 화장세계의 장엄과 구조에

대해서는『육십화엄(六十華嚴)』의「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과『화엄경(華嚴

經)』의「화장세계품」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이 세계는 비로자나부처님이 과거

에 서원을 발하고 보살행을 닦아 성취한 청정하게 장엄된 세계로서,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고 광대하게 장엄된 비로자나불의 정토이다. 즉 화장세계는 열 부

처님[十佛]이 교화하는 경계와 관련이 있다. 이 세계는 수미산 미진수(微塵數)

의 풍륜(風輪)에 의해 유지되는데, 맨 밑에 풍륜이 있고 풍륜 위에 향수해(香水

海)가 있으며, 향수해 중에 큰 연꽃이 있고 이 연꽃 안에 무수한 세계를 포함하

고 있다.

35) 미륵누각(彌勒樓閣)은 선재동자가 미륵보살의 인도로 부처님의 밝고 청정한 깨

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을 상징한다.[『육십화엄(六十華嚴)』권59「입법

계품(入法界品)」(高8, p.416c3-5; 大9, p.780b7-9). 선재동자의 청으로 미륵

보살이 오른 손가락을 튕기자 누각 문이 저절로 열렸다가 선재가 들어가자 다시

닫힌다. 선재동자는 누각 안에 백천의 온갖 묘한 누각이 갖추어져 있지만 그들은

서로 장애되지 않음을 보고, 또 미륵보살의 위신력으로 선재동자 자신이 그 모든

누각안에 있고 모든 부처님 계신 곳에 있음을 보게 된다.[『육십화엄(六十華嚴)』

권59「입법계품(入法界品)」(高8, pp.416c5-420b21; 大9, pp.780b10-783b26)].

36) 미륵(彌勒)은 일생보처보살로서 현재 도솔천에 머물고 있는데, 먼 미래에 이

땅에 내려와 성불한 후 세 차례에 걸쳐 설법하여 수많은 중생을 구제할 것이

예정된 미래불이다. 현재는 보살이기 때문에 미륵보살이라고 한다. 미륵(彌勒,

Maitreya)은 매달려야(梅呾麗耶)·말달리야(末怛唎耶) 등으로 음사하며, 한역

으로는 자씨(慈氏)이다.『화엄경(華嚴經)』「입법계품」에서 미륵보살은 선

재동자가 만나는 52번째 선지식이다. 선재동자가 선지식과 만남으로 해서 도

달되는 지위는『화엄경(華嚴經)』전편에서 말하는 화엄보살도의 계위(階位)

인 42계위와 대비시켜 보면, 미륵보살은 묘각위(妙覺位)에 해당한다. 즉 미륵

보살을 만나 불과(佛果)에 들어간다. 그러나 화엄에서는 낱낱 계위에서 다 해

탈문을 증득하는 원융수행문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극히 미묘하다’는 것은 중도(中道)이다. 두 극단[邊]을 떠나기 때문에

중도라 하는 것이 아니라 곧 모든 극단을 기준으로 하여 중도라 한다. ‘자

성을 고수하지 않고’ 등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他]으로

써 성품을 삼으며, 다른 것이 성품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성품으로 삼는

다. 그러므로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고 하였다.

極微妙者, 中道也. 非謂離二邊故以爲中道, 卽約諸邊云中道

也. 不守自性等者, 由自無性, 以他爲性, 由他無性, 以自爲性,

故云不守自性隨緣成也.

「진기」37)

37)『총수록』(韓6, p.777b19-c18; 高45, p.151a5-18).

묻는다. 진성은 위의 법성과 어떻게 다른가?

답한다. 어떤 사람은 “다르다”고 한다. 말하자면 법성은 곧 진(眞)과 망

(妄)에 통하여 원융을 취하고, 또 정(情)38)과 비정(非情)39)에 통한다. 이것

은 곧 오직 진(眞)이면서 또한 오직 유정문(有情門)이니, 아래의 ‘진성’을

해석하는 단락에서 중생의 십이지(十二支)40)를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問. 眞性與上法性, 何別? 答. 有云, “別也.” 謂法性則通眞妄

取圓融, 又通情非情也. 此則唯是眞, 而又唯是有情門, 以下釋

眞性段, 約衆生十二支故也.

38) 정(情)은 유정(有情, sattva)을 말한다. 유정은 정식(情識)이 있는 생물, 즉 중생

을 의미한다.

39) 비정(非情)은 초목, 산하, 대지, 흙, 바위 등 정식(情識)이 없는 것을 말한다. 유

정(有情)에 대칭되는 것으로서, 비유정(非有情)·무정(無情)이라고도 한다. 대

체로 산하, 대지 등은 유정의 공업(共業)으로 초감(招感)되는 것이며, 일체 유

정이 함께 수용하는 것이다.[『순정리론(順正理論)』권18(高27, p.845b5-14;

大29, p.436b27-c5)]. 법장의『화엄경탐현기』권16에서는 “노사나불이 보리

수 아래에서 보리를 이룰 때에 마침내 이와 같은 유(類)를 갖추어서 법계에 두루

하며 거듭거듭 보리이므로 불신(佛身)은 부사의하고 부사의하다. 이는 곧 비정

(非情)의 모든 곳에 두루한 것이다.”(高47, p.745a6-9; 大35, p.414a29-b3.

盧舍那佛於菩提樹下成菩提時, 究竟具足如是等類, 周遍法界, 重重菩提, 是故佛

身不思議不思議也. 此卽遍於非情一切處也.)라고 하였다.

40) 십이지(十二支)는 십이연기의 열두 가지를 말한다. 즉 무명(無明)·행(行)·식

(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更樂)·수(受:痛)·애(愛)·취(取:受)·유

(有)·생(生)·노사우비뇌고(老死憂悲惱苦)의 열두 가지이다.[『증일아함경』권

46(高18, p.660a18-c6; 大2, p.797b18-c19)]. 또한『육십화엄(六十華嚴)』

권25「십지품(十地品)」에서는 “제일의를 여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이

있고, 무명이 업을 일으키면 그것을 행이라 하며, 행에 의하여 첫 식(識)이 있

고, 식과 함께 나서 사취음(四取陰)이 있으며, 취음에 의해 명색이 있고, 명색

이 이루어져 육입이 있으며, 감관[根]과 대경[塵]이 합하기 때문에 촉이 있고,

촉 때문에 수가 생기며, 수를 좋아하는 것을 애라 하고, 애가 왕성한 것을 취라

하며, 취로 일어나는 업을 유라 하고, 업보의 오음을 생이라 하며, 오음의 변하

는 것을 늙음이라 하고, 오음이 무너진 것을 죽음이라 하며, 죽어 이별할 때에

탐착하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슬픔이라 하며, 소리를 내어 울 때는 오식이

고통이 되고, 의식은 근심이 되며, 근심과 고통이 더욱 많은 것을 고뇌라 한다.”

(高8, p.178c13-20; 大9, p.558b27-c6. 不如實知第一義故有無明, 無明起業

是名行, 依行有初識, 與識共生有四取陰, 依止取陰有名色, 名色成就有六入, 根

塵合故有觸, 觸因緣生受, 貪樂受名爲愛, 愛增長名爲取, 從取起業名爲有, 業報

五陰名爲生, 五陰變名爲老, 五陰壞名爲死, 死別離時, 貪著心熱名爲悲, 發聲啼哭,

五識爲苦, 意識爲憂, 憂苦轉多名爲惱.)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실제[實]를 기준으로 하여 이르기를, “진성이 곧 법성이

다”라고 한다. 이른바 ‘진성의 체(體)가 매우 깊고 미묘하다’란 다만 자성

을 두지 않고 모든 연(緣)을 모아서 이루기 때문이다. 만약 삼승을 기준으

로 하여 논하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41)이 무명(無明)의 바람인 연(緣)

을 따라 차별된 만법을 이룬다. 만약 일승의 뜻으로부터라면 연(緣) 이전

에 법이 없기 때문에 먼저 진성이 있어서 연(緣) 따라 이루는 것이 아니

다. 우선 내가 오늘 혹은 물의 작용[水用]이 되기도 하고 혹은 돌의 작용

[石用]이 되기도 하니, 연(緣) 가운데 법계의 모든 법이 남김없이 단박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은 법 가운데 물의 이름과 물의 모양, 돌

의 이름과 돌의 모양 등이 있으므로 이름과 모양이 없지 않으나 이 이름

과 모양은 곧 이름과 모양이 없는 것이다.

然而今約實云, “眞性卽是法性也.” 所謂眞性之體甚深微妙者,

但以不存自性, 攬諸緣成故也. 若約三乘論者, 自性淸淨心, 隨

無明之風緣, 成差別萬法也. 若自一乘義, 則以緣前無法故, 非

先有眞性而隨緣成. 且吾今日, 或爲水用, 或爲石用, 緣中法界

諸法, 無遺頓起故也. 如是法中, 而有水名水相, 石名石相等

故, 不無名相, 而此名相, 卽無名相.

41) 자성청정심은 중생들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마음을 말한다. 이 자성청

정심은 평등하여 분별이 없다.[『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권3(高17,

p.377c23; 大31, p.832b12-13)]. 자성청정은 본래 청정함이며, 진여는 중생

의 마음에 부착된 번뇌에 의해 물들어 있어도 본래 청정하다는 점을 가리켜 말

한 것이다. 화엄교학에서는 고십현 중 유심회전선성문(唯心迴轉善成門)의 유

심을 여래장자성청정심(如來藏自性淸淨心)[법장,『화엄일승교의분제장』(大45,

p.507a8-15)]과 여래성기구덕심(如來性起具德心)[법장,『화엄일승교의분제장』

(大45, p.507a8-15); 『총수록』(韓6, p.843b14-16; 高45, p.225a3-5)]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선 중생의 첫째 무명의 지(支)를 기준으로 하여 열 번의 관

[十番觀]42)을 거치면 무명의 이름과 모양을 움직이지 않고 곧 매우 깊은

법이니, 취하고 버릴 것이 없으므로 ‘미묘(微妙)’라 한다. 그러므로 이름과

모양을 움직이지 않고 곧 곁이 없는 이름과 모양을 이룬다. 만약 보현[보

살]의 증득을 기준으로 하면 곁이 없는 이름과 모양을 움직이지 않고 곧

바로 이름을 여의고 모양을 끊으며, 만약 열 부처님[十佛]43)의 증득을 기

준으로 하면 처음부터 이름과 모양 등을 보지 않는 것이다. 무명의 지(支)

가 이미 그러하듯이, 내지 노사(老死)의 지(支)까지도 모두 이와 같다. 그

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여래가 불법을 설하신 것이 없으니, 그 교

화할 바를 따라서 법을 연설한다”44)라고 하였으며, 설함이 없으면 증분이

고 설하면 교분이다.

是故, 且約衆生一無明支, 歷十番觀, 則不動無明名相, 卽甚深

法, 無所取捨, 故云微妙. 是故, 不動名相, 卽成無側名相. 若

約普賢訂, 則不動無側名相, 卽正離名絶相, 若約十佛訂, 則初

初不見名相等也. 如無明支旣尒, 乃至老死支, 皆亦如是. 是

故, 經云,“ 一切諸如來, 無有說佛法, 隨其所應化, 而爲演說

法,” 無有說者證分, 說則敎分.

42) 열 번의 관[十番觀]이란 보살이 수행하는 관법으로서 십이연기를 십중으로 관

찰하는 것이다.『육십화엄(六十華嚴)』권25「십지품(十地品)」의 현전지(現前

地)(高8, p.179b16-19; 大9, p.559a24-28)에 의하면, 수행하는 보살은 역순

(逆順)으로 십이연기를 열 번 관찰하고는 공(空)의 이치를 닦고 자비스런 큰 마

음으로 중생들을 제도한다고 하였다.

43) 열 부처님[十佛]은『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열 분의 부처님이다. 이 열 부처

님은 특히 지엄스님에 의해 강조되었는데, 그는 해경십불(解境十佛)과 행경십

불(行境十佛)의 2종 십불설을 주장하였다.[지엄,『공목장』 권2(大45, p.560a1-4)].

또한 의상은 열 부처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해석하였는데, 태백산 대로방(大蘆

房)에 머물 때 제자인 진정(眞定)·지통(智通) 등에게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열

부처님을 보고자 하는 자는『화엄경(華嚴經)』으로써 자기의 안목을 삼아야 한

다고 가르친 뒤, 문문구구(文文句句)가 모두 열 부처님이며, 이것 밖에서 부처를

보고자 하는 자는 (生生劫劫)에 끝내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뒤에 열 부처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총수록』 韓6, pp.834b11-835a22; 高45, pp.214a11-

215a12). 또한『법기』에서도 열 부처님에 대해 상세히 해석하였다.(韓6, pp.

832c8-834b3; 高45, pp.212a14-214a5).

44)『화엄경(華嚴經)』권10「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高8, p.74c10;

大9, p.466a27-28).

「대기」45)

45)『총수록』(韓6, p.778a6-24; 高45, p.151b5-16).

표훈(表訓)46) 대덕(大德)47)의 뜻은 곧 ‘진(眞)’은 머무름 없는 본법(本法)

이고, ‘성(性)’은 본분 종자[本分種]이다. 본분 종자란, 만약 경문에서 설한

곳을 가리키면 처음 모임[初會]48)의 과지(果地)의 오해(五海)49)이다. 이 오

해(五海)로써 본식(本識)50)의 체를 삼으며, 이 본식을 기준으로 하여 뒤의

여러 모임 가운데서 혹은 ‘종성(種性)’이라 하고, 혹은 ‘행업(行業)’이라 하

며, 혹은 ‘원선결정(願善決定)’ 등이라 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만약 상근

기의 사람이라면 바로 증분에 의지하여 자기의 몸과 마음이 바로 곧 법성

임을 증득한다. 그러나 이 증득한 곳은 이름과 모양이 끊어졌기 때문에,

중·하근기 사람은 믿지 못하므로 오해(五海)가 바로 그대 본식의 근원이

라고 설하니, 이로써 앞의 근기가 자기의 몸과 마음이 곧 법성임을 안다.

訓德意則眞者, 無住本法也, 性者, 本分種也. 本分種者, 若指

文處, 初會果地五海也. 以此五海爲本識體, 約此本識, 後諸會

中, 或云種性, 或云行業, 或云願善決定等也. 謂若上根人, 直

依訂51)分, 得自身心正卽法性. 然此訂處絶名相故, 中下之人,

未能信得, 故說五海是汝本識之源, 由是, 前機得自身心卽是

法性.

46) 표훈(表訓)은 의상의 십대제자 중 한 명으로, 의상과 함께 흥륜사(興輪寺) 금당

(金堂)에 모셔졌던 열 분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일연(一然),『삼국유사(三國遺

事)』(韓6, p.318b10-13)] 신문왕 1년(681) 왕의 요청으로 몽성사(夢城寺)에 상주

하면서 문무왕의 명복을 비는 예참(禮懺)을 행하였고(「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

今創記)」,『불국사지(佛國寺誌)』(아세아문화사, 1983)], 금강산 만폭동 어구에 표

훈사를 창건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47(淮陽都護府 佛宇

條)]『삼국유사』에 전하는 혜공왕이 탄생설화와도 관련이 있으며[일연,『삼국유

사』(韓6, p.292b3-13)], 의상이 입적한 이후에는 황복사(皇福寺)에 머물면서 표훈

은 진정(眞定) 등과 함께 의상으로부터『일승법계도』를 배웠는데, 의상의 사구게

(四句偈)에 따라 오관석(五觀釋)을 지었으며, 진정이 지은 삼문석(三門釋)에 부동

건립문(不動建立門)을 더하여 4문으로 하기도 하였다.[『총수록』(韓6, p.775b-c)]

그의 오관석은『총수록』중의「대기」에 인용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표훈의 설은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등 균여의 저술에 다수 인용되어 전한다.

47) 대덕(大德)은 덕행이 높은 스님을 가리키는 말이다.『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

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권38에서는 “젊고 나이가 아래인 비구는 어른이

고 나이 많은 비구에게 그 씨족과 성명을 부르지 않고 대덕이라고 하거나 혹은

구수라고 불러야 한다.”(高22, p.885b9-11; 大24, p.399a3-5. 小下苾芻, 於長

宿處, 不應喚其氏族姓字, 應喚大德, 或云具壽.)고 하였다.

48) 초회(初會)는『육십화엄(六十華嚴)』의 7처(處)8회(會) 설법 중에서 처음 모임인

마갈제국(摩竭提國)의 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를 말한다.『육십화엄(六十華嚴)』

에서 적멸도량회에 속하는 품은 제1「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과 제2「노사나

불품(盧舍那佛品)」이다. 이 적멸도량회에서는 보현보살이 설주(說主)가 되어 부

처님 자내증(自內證)의 경계를 설한다.

49) 오해(五海)는 다섯 가지 덕을 구족한 바다라는 뜻이다. 그 다섯 가지는 모든 세

계 바다[一切諸世界海]·모든 중생 바다[一切衆生海]·법계의 업 바다[法界業

海]·모든 중생들의 욕망과 그 근성 바다[一切衆生欲樂諸根海]·삼세의 모든 부

처 바다[一切三世諸佛海]이다.[『육십화엄(六十華嚴)』권3「노사나불품(盧舍

佛品)」(高8, p.17b16-18; 大9, p.409a3-5)]. 법장의『화엄경탐현기』권3

에 의하면, 교리의 일[敎事] 가운데 본분(本分) 안에서는 오해십지(五海十智)를

체로 삼는다(高47, p.495c8; 大35, p.147a14-15)고 하고, 이러한 다섯 가지는

모두 하나에 나머지 넷을 갖추고 있으며, 모두 깊고 넓고 다함없으며 덕을 갖춘

것이 사의(思議)하기 어려우므로 ‘바다[海]’라고 한다고 하였다.(高47, p.504b

16-17; 大35p.156b22-23).

50) 본식(本識, mūlavijñāna, vijñāna)은 근본식(根本識)·근식(根識) 등이라고도 한

다. 유식학에서는 제8 아뢰야식의 여러 명칭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식의 종자를

대상으로 삼아 제7식이 아집을 일으킨다고 한다. 지론종에서는 진망화합식(眞

妄和合識)의 뜻으로도 쓴다.『전식론(轉識論)』에서는 “과보식이란 번뇌의 업에

의해 초래된 것이므로 과보라고 한다. 또한 본식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유위법

의 종자가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이다.”(高17, p.497a8-10; 大31, p.61c10-11.

果報識者, 爲煩惱業所引故名果報. 亦名本識, 一切有爲法種子所依止.)라고 하였

고,『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권5에서는 “[논(論)] 본식은 종자이고 허망한

분별에 섭수되며 모든 식은 차별된다. [석(釋)] 본식이 능히 변이(變異)함으로

말미암아 11식이 되니, 본식은 곧 11식의 종자이다.”(세친(世親) 석(釋), 진제

(眞諦) 역,『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권5, 高16, p.1138a20-22; 大31, p.

181b25-27. 論曰. 本識爲種子, 虛妄分別所攝諸識差別. 釋曰. 由本識能變異

作十一識, 本識卽是十一識種子.)라고 하였다.

51) 이 책에서「訂」은「證」과 통용된다.

그러므로 이 진성에 의지하여야 비로소 본식의 뜻을 건립하는 까닭에

모든 가르침 가운데서 혹은 온전히 갖추어진[具分] 아뢰야식[賴耶]을 설

하기도 하고, 혹은 일부분의 생멸하는[一分生滅] 아뢰야식 등을 설하기도

하지만 오직 보현보살의 근기만이 자기의 본식이 오해(五海)의 근원임을

알기 때문에 ‘열 부처님[十佛]과 보현보살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라고 하

였다.

是故, 依此眞性, 方始建立本識義故, 於諸敎中, 或說具分賴

耶, 或說一分生滅賴耶等, 唯普賢機, 得自本識是五海之源, 故

云十佛普賢大人境.

묻는다. 진성이 이미 이와 같이 매우 깊고 미묘하다면 무슨 뜻에서 이십

이위(二十二位)52)를 나누는가?

답한다. 자성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필요로 하는 바의 지옥, 내

지는 불과(佛果) 등의 연을 따라 이십이위(二十二位)를 이룬다. 이러한 이

십이위(二十二位)는 ‘보(普)’자 도장으로 찍으면 곧 모두 보현[보살] 자체

이기 때문에 제3중 해인53)이 바로 이 보현[보살]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다.

問. 眞性旣如是甚深微妙, 於何義中, 分二十二位耶?

答. 以不守自性故, 隨我所須地獄, 乃至佛果等緣, 成二十二位

也. 如是二十二位, 以普字印, 印則皆普賢自體故, 弟54)三重海

印, 正是普賢大人之境也. 

52) 이십이위(二十二位)는 지엄의『수현기』권1에 의하면, 모든 지위[位]를 다음과

같이 도합 22문으로 열었다. 즉 육도(六道)의 인과(因果)(6문), 성문(聲聞)과 벽

지(辟支) 인과(2문), 성문과 벽지가 의지하는 부처님의 인과(2문), 회심(廻心)한

성문·연각의 인과(2문), 초심(初心) 보살의 인과(1문), 숙교(熟敎)에 직진(直進)

하거나 회심한 보살의 인과(2문), 돈교(頓敎)의 인과(1문), 우법 성문(愚法聲聞)

으로부터 모든 지위를 총체적으로 섭수한 간혜지(乾慧地) 이상의 보살과 부처

(1문), 보현위(普賢位) 중 신(信)으로부터 십지(十地)까지 다 인과에 통하는 보살

과 부처(5문)이다.(高47, p.13b19-c1; 大35, p.27b29-c11).

53) 제3중 해인이란「대기」에서『일승법계도』의 제목을 3중의 오중해인(五重海印)

으로 분배한 가운데 두 번째 오중해인에서「법성게」30구 중 연기분 14구를 배

대한 제3중 해인을 가리킨다.「대기」에서는『일승법계도』의 제목을 오중해인

으로 먼저 분배하고 있으니, ‘일승법계’는 망상해인, ‘도’는 현상해인, ‘합시일인’

은 외향해인, ‘54각’은 정관해인, 그리고 ‘210자’는 어언해인에 배당하였다.(韓6,

p.768b1-c1; 高45, p.141b1-16). 이 ‘210자’를 다시 5중으로 배대하였는데, 증분4구

는 제1 영불현해인(影不現海印)과 제2 영현해인(影現海印)에 배대하고, 연기분

14구는 제3중해인, 이타행 4구는 제4중해인, 나머지 수행방편 4구는 제5중해인

에 배대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제4중해인인 이타행 4구를 다시 5중으로 설명

하였으니, 이를 도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第一重 五重海印〉 〈第二重 五重海印〉 〈第三重 五重海印〉

1.忘像海印(一乘法界)

2.現像海印(圖)

3.外向海印(合詩一印) 第1影不現海印(證分中 2句)

4.定觀海印(54角) 第2影現海印(證分中 餘2句) 初 影離海印(能入海印三昧中)

5.語言海印(210字, 30句) 第3重海印(緣起分 14句) 第2影現海印(繁出如意不思議)

第4重海印(利他行 4句) 第3重海印(雨寶益生滿虛空)

第5重海印(修行方便 4句) 第4重海印(衆生隨器)

第5重海印(得利益)

54)「弟」는 을본에「第」로 되어 있다.

원통기(圓通記)55)

55) 균여,『원통기』(韓4, p.7c6-19).

‘진성은 매우 깊고’ 이하 2구는 연기 자체이고 ‘하나 가운데 일체’ 이하는

연기의 뜻[을 밝히는] 문[緣起義門]임을 볼 수 있다.

묻는다. ‘본법과 작용문을 가려내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답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삼문(三門)56)의 본법이니, 마지막에 이르기

를 연기 본법을 밝혀 마친다”57)라고 하였다.〈이상〉 그러므로 연기 본법과 연

기 자체는 한 뜻이기 때문에 본법은 곧 연기 자체이고, 작용문은 곧 연기

의 뜻[을 밝히는] 문이다. 여기서 해석한 동체(同體)와 이체(異體)의 본법

과 작용문은 모두 연기의 뜻[을 밝히는] 문 중에서 논한 바이다. 그래서 같

지 않다.

可見‘眞性甚深’下二句, 緣起自體,‘ 一中一切’下, 緣起義門.

問. 與料簡本法用門, 何別?

答. 一云,“ 三門本法, 終云, 明緣起本法竟.”〈已上〉 故緣起本法

與緣起自體, 是一義故, 本法則緣起自體, 用門則緣起義門. 今

釋同異體之本法用門, 並於緣起義門中所論, 故不同也.

56) 삼문(三門)은 법장이 『화엄경탐현기』에서 십현문이 원융무애한 열 가지 이유를

밝힌 가운데 그 첫번째 이유인 연기법이 서로 연유함[緣起相由]을 열 가지로 구

분한 것 중 연기본법을 총체적으로 밝힌 처음 삼문이다. 즉, ①모든 연이 각각

다르다[諸緣各異], ②서로 두루 바탕이 된다[互遍相資], ③함께 존립하되 걸림

이 없다[俱存無礙]이다.(高47, p.474a9-17; 大35, p.124a17-26).

57) 법장,『화엄경탐현기』권1(高47, p.474a21; 大35, p.124b1).

묻는다. 중(中)과 즉(卽)의 작용문은 뜻의 문에 해당할 것이고, 만약 본

법이라면 곧 자체에 해당할텐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답한다. 하나의 연기의 뜻[을 밝히는] 문 중에 동체와 이체의 법을 정련

하여 세우는 것은 본법이고, 이 세운 바 같음[同]과 다름[異] 중에 즉하여

중(中)과 즉(卽)의 인다라(因陀羅)를 논하는 것은 작용문이니, 아울러 하

나의 연기의 뜻[을 밝히는] 문 중에 열어서 두 문으로 한 때문이다.

問. 中卽用門, 可當義門, 若本法則當於自體, 何不爾耶?

答. 於一緣起義門中, 鍊立同異體法者, 是本法, 卽此所立同異

之中, 論中卽因陁羅者, 是用門, 並於一緣起義門中, 開爲二門

故也.

법계도주(法界圖註)

진성은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하여 [眞性甚深極微妙]

만약 대화엄의 중중무진법계를 논하면 입술을 달싹하지 않고도 벌써 설

해 마쳤으며 가르침의 방편[敎乘]에 관여하지 않고도 벌써 이미 연설해 마

쳤다. 설사 계곡물 소리가 혀의 모습이 되고 산 빛이 몸의 그릇이 되며58)

온 산하대지가 적멸도량이 되고 모든 유정과 비정이 중회(衆會)가 되어도

언설을 붙일 수 없어 찬양을 다하기 어려운데, 의상스님이 구멍을 꿰맨 데

없는 곳에 들어가 억지로 구멍을 내었으니, 이른바 “그가 이미 상처가 없

으니 그를 상처주지 말라”59)고 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가르침 바다의 파

도와 물결이 침묵의 맛에 걸리지 않으므로 의상스님이 드디어 너른 데 앉

아 넓고 넓어 뜻대로 말하기를, “법성(法性)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고 모

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모

든 것이 끊어져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였

다. 네 구절을 모두 말해 마쳤으니 붉은 분을 바르지 않고도 곧바로 풍류

와 기상이 있다.60) 자, 말해보라. 사구에 그대가 따지고 헤아리는 분별의식

이 있는가? 적멸도량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가 바로 통째로 무쇠61)

서 그대의 주둥이 댈 곳이 없는데, 의상스님이 자비한 까닭에 눈썹을 아끼

지 않고62) 낙초의 말63)이 있어 바로 말하기를, “진성이 매우 깊고 극히 미

묘하다.”라고 하였으니 벌써 충분히 진흙이 묻고 물에 젖었는데64) 산승이

오늘 거듭하여 각주하니 갈등이 적지 않다.

若論大華嚴重重無盡法界, 不渉唇吻, 早是說了也, 不干敎乘,

早已演了也. 直饒溪聲爲舌相, 山色爲身噐, 盡山河大地爲寂

場, 惣情非情爲衆會, 言說不著, 讃揚難盡, 相師入無綘罅處,

强生穿鑿, 所謂“彼旣無瘡, 勿傷之也”. 雖然, 敎海波瀾, 不碍

默味, 相師坐寬, 蕩蕩地, 任他道,“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

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四句道盡了

也, 不搽紅粉, 便有風流氣象. 且道. 四句還有你思量計較, 分

別意識也無? 自寂場至于今日, 便是一條鐵. 無你接觜處, 相

師慈悲之故, 不惜眉毛, 有落草之談, 便道, “眞性甚深極微

妙.” 早是十分帶泥帶水去也, 山僧今日, 重爲注脚, 葛藤不少.

58) 소동파(蘇東坡, 1036~1101)의 ‘동림상총 장로께 드림[贈東林總長老]’이라는 시에

다음의 게송이 나온다. “시냇물 소리가 곧 광장설이니 산 빛이 어찌 청정법신이

아니리오. 밤 사이 팔만사천 게송을 다른 날 어떻게 남에게 들어 보이리오.”(溪

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이 시는 소동파

가 신종 원풍 7년(1084) 황제의 명을 받고 황주(黃州)를 떠나 새 임지인 여주(汝

州)로 가는 도중에 여산(廬山) 동림(東林) 흥룡사의 상총조각(常總照覺) 선사를

방문해 밤새 문답을 나누었는데 이에 소동파가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은 바 있

어 게송을 지어 선사에게 보낸 것이다.

59) 구마라집이 한역한『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상권「제자품(弟子品)」(高9,

p.982b22-23; 大14, pp.540c29-541a1)과 현장이 한역한『설무구칭경(說無垢

稱經)』권2「성문품(聲聞品)」(高9, p.1043c13; 大14, p.562c20-21)에는 “그가

스스로 상처가 없으니 그를 상처주지 말라.”(彼自無瘡, 勿傷之也.)로 되어 있다.

이 구절은 석존이 유마힐장자에게 문병을 가도록 제자들에게 권하자, 제자들이

각자 유마힐 장자와의 인연으로 인하여 문병을 감당할 수 없다고 피하는 가운데,

부루나존자의 인연담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다. 설법제일의 부루나존자가 초심의

비구들에게 설법하고 있을 때 유마힐장자가 나타나 이미 이 비구들은 대승의 마

음을 일으켰는데 비구들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소승의 가르침으로 그들을 가르

쳐 구할 수 없으니, 그 비구들 스스로 상처가 없는데 그들을 상처주지 말라고 하

는 부분이다.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의 『종경록』 권32(大48, p.601c

8-9)에는 “본래 상처가 없으니 그를 상처주지 말라.”(本自無瘡, 勿傷之也.)고

하고 있으며,『벽암록』 권1(大48, p.147b25-26) 등에서 본문과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60) 원나라 노암보회(魯庵普會)가 1317년에 편집한『선종송고연주통집(禪宗頌古

聯珠通集)』에 이 구절과 관련한 게송이 두 수 있다. 먼저 불감혜근(佛鑑慧懃,

1059~1117)의 제자 남화지병(南華知昺)의 “천 길 장대 끝에서 재주 넘고 큰 바

다 물결 속에 낚싯대 던진다. 원래 기골이 좋으니 분칠 없어도 풍류로다.”(卍115,

p.130b13-14. 千尋竿上翻筋斗, 大海波心擲釣鈎. 大體還他肌骨好, 不搽紅粉也風

流.)라는 게송이 있으며, 동림도안(東林道顔, 1094~1164)의 제자 보은법연(報恩

法演)의 “미인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빗질도 귀찮아 금비녀만 꽂아 두고 마는데,

원래 기골이 좋으니 분칠 없어도 풍류로다.”(卍115, p.284b8-9. 佳人睡起懶梳

頭, 把得金釵插便休, 大抵還他肌骨好, 不塗紅粉也風流.)라는 게송이 있다.

61) 보통 “만 리가 통째로 무쇠이다[萬里一條鐵]”라는 표현으로 널리 쓰인다. 모든

것이 평등하며 견고한 순일무잡(純一無雜)과 같은 뜻이다.『대혜보각선사어록

(大慧普覺禪師語錄)』권7(大47, p.838b29),『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20

(大51, p.366b9-10),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 권17(卍137, p.252b6) 등

에 이 표현이 보인다.

62) 선사가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지 못하면 눈썹이 빠진다는 속담이 전해진다. 대

표적으로 ‘취암스님의 눈썹[翠巖眉毛]’ 공안을 들 수 있다. 당나라 취암영참(翠

巖令參)이 하안거를 해제하면서 “하안거가 시작된 이후로 여러분을 위해 서툰

설화를 늘어 놓았는데, 그래도 이 취암의 눈썹이 남아 있습니까?” 하였다. 이에

대해 보복종전(保福從展, ?~928)은 “도둑놈이 정직할 리 없지.”라고 하였고, 장

경혜릉(長慶慧稜, 854~932)은 “눈썹이 남지 않기는커녕 자꾸 자라고 있군.”이라

고 하였고,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은 “조심하라.”고 하였다[『벽암록』

제8칙(大48, p.148b1-4)].

63) 낙초의 말[落草之談]은 아직 깨닫지 못한 범부의 입장[草]으로 내려와[落] 베푸

는 설법을 말한다.『벽암록』제34칙에서 앙산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요

즈음 어디에 있다 왔느냐?” “여산(廬山)에서 왔습니다.” “오로봉(五老峰)을 가

보았느냐?”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화상아, 아직도 산놀이를 못 했구나.” 이

문답에 대해서 운문스님이 “이 말씀은 모두 자비로움 때문에 낙초의 말씀을 하

신 것이다.”라고 하였다(大48, p.172c19-23).

64) 보통은 타니대수(拖泥帶水)로 쓴다.『벽암록』제2칙의 ‘수시’에서 “여기에 이르

러서 어떻게 법문을 청할까? 부처를 운운하는 것은 흙탕물을 뒤집어쓰는 격이

요, 참선을 운운하는 것은 얼굴 가득히 부끄러울 뿐이다.”(大48, p.141b23-25)

고 하였다.

앞에 말한 ‘법성(法性)’이란 깨끗함과 더러움을 원융하고 진(眞)과 속

(俗)을 통섭하여 이른바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니,65) 만약 일체를

없앤다면 법계의 지혜를 온전히 못하고, 만약 한 가지 일이라도 덧붙이면

청정법계라고 이름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한 ‘진성(眞性)’이란 따

로 유정문(有情門) 가운데서 증입분(證入門)을 취한 것이니 몸을 한 발 물

러나 임시로 진성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고, 법성의 밖에 따로 일단의 진

성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前云法性者, 融淨穢, 通眞俗, 所謂不可取不可捨, 若除一切,

不得全法界之智, 若添一事, 不得名淸淨之界者也. 此云眞性

者, 別取有情門中證入分, 退身一步, 假作眞性之名, 非指法性

外, 別有一段眞性也.

65)『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권29 ‘향시랑 백공에게 답함[答向侍郎

伯恭]’에 “부처님께서는 대자비와 노파심이 간절하셔서 … 꿈과 꿈 아님이 모두

환이므로 곧 꿈 전체가 실제이며 실제 전체가 꿈이어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

도 없음을 깨닫게 하셨다.”(大47, pp.935c17-936a4. 佛大慈悲老婆心切, … 令

悟夢與非夢悉皆是幻, 則全夢是實, 全實是夢, 不可取不可捨.)고 하였다.

만약 장인(藏人)이 세로로 보면 분한이 있으며 만약 원돈 근기에 속한

사람 중에서 가로로 보면 벌써 틀려버린 것이니, 세로도 말고 가로도 말

고 또 일러보라. 이것이 어떤 소식인가? 세로와 가로는 우선 한쪽으로 두

고 무엇이 ‘매우 깊다[甚深]’는 도리인가? 진실이라고 생각해도 전부가 몽

환이요, 거짓이라고 생각해도 순전히 실상이니, 성(性)도 아니고 상(相)도

아니며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지만 성(性)이며 상(相)이고 진실이며

거짓이기 때문에 ‘매우 깊다[甚深]’고 한 것이다. 문수의 오묘한 지혜에 계

합하지만 완연히 초심이니 곧 깊음을 얻을 수 없으며, 보현의 현묘한 문에

들어가지만 일찍이 별체인 적이 없으니 얕음도 얻을 수 없다.66) 묘유(妙

有)는 이를 얻어서 있지 않으니 진실일 수 없으며, 진공(眞空)은 이를 얻

어서 공하지 않으니 거짓일 수 없다.67) 이법이 이름과 말을 끊음은 지혜가

닦음과 증득을 끊음을 말하기 때문에, ‘극히 미묘하다[極微妙]’고 하였다.

그렇다면 알겠는가?

여래가 단멸을 이룬다고 말하지 말라.

한 목소리가 또 한 목소리를 잇대어 오느니라.68)

若是藏人竪看有分, 若是圓頓機中橫看, 早是錯了也, 不竪不

橫, 且道. 是什麽消息? 橫竪且置一邊, 作麽生是甚深底道理?

以謂眞也, 全是夢幻, 以謂假也, 純是實相, 非性非相, 非眞非

假, 而性而相, 而眞而假, 故云甚深也. 契文殊之妙智, 宛是初

心則深也不可得, 入普賢之玄門, 曾無別體則淺也不可得. 妙

有得之而不有, 眞也不可得, 眞空得之而不空, 假也不可得. 理

絶名言, 謂智斷修證, 故云極微妙也. 還會麽?

莫謂如來成斷滅. 一聲還續一聲來.

66) “문수의 오묘한 지혜에 계합하지만 완연히 초심이니”와 “보현의 현묘한 문에

들어가지만 별체인 적이 없으니”는 청량징관(淸凉澄觀, 738~839)의『화엄경

원품소(華嚴經行願品疏)』권1(卍7, p.471b8-9)에서 인용되었다. 이 구절에

대해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의『화엄경행원품소초(華嚴經行願品疏鈔)

권1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문수의 오묘한 지혜에 처음 계합하였

다는 것은 곧 선재가 여러 선지식을 역참하고 다시 문수를 만난 것이니, 마땅히

지혜는 두 모습 없음을 비추어 본래 마음에 계합하여 능상과 소상이 끊어졌기

때문에 몸을 보지 않은 것이다. … 완연히 초심이란 최초에 복성의 동쪽에서 문

수를 친견함은 신지(信智)를 나타내고 지금 또 문수를 친견함은 증지(證智)를

나타낸다. 그 의미는 신지와 증지는 비록 시작과 끝을 설하여도 지혜의 체는

원래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모두 문수임을 밝힌 것이다. … 보현의 현묘한 문에

들어가지만 별체인 적이 없다는 것은 선재가 선지식을 구하면서 최후에 보현보

살의 처소에 이르러 보현의 몸을 미세하게 관찰하고 낱낱 털 구멍 속에서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세계를 본 것이다. … 이와 같이 미래제의 겁이

다하도록 한 털구멍 속에 온갖 세계와 온갖 부처님과 온갖 보살중의 모임이 있

음을 알 수 없듯이 이와 같은 것들이 모두 구경의 변제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묘한 문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한 마음, 한 성품, 털 하나, 티끌 하나를 여

의지 않기 때문에 이어서 별체가 있어본 적이 없다고 한 것이다.”(卍7, p.819a

11-b14. 初契文殊之妙智者, 即善財歷諸善友, 再遇文殊, 當智照無二相, 契合本

心, 絕能所相, 故不見身. … 宛是初心者, 最初在福城東, 得見文殊, 表信智, 今又

見文殊, 表證智. 意明信證雖說始終, 智體元來不別, 所以皆是文殊. … 入普賢之

玄門, 曾無別體者, 善財求友, 最後至普賢菩薩處, 微細觀察普賢之身, 見一一毛孔

中, 有不可說不可說佛刹海. … 如是盡未來際劫, 猶不能知一毛孔中種種刹海, 種

種佛海, 種種菩薩衆會海, 如是等海, 皆悉不知究竟邊際, 故云玄門也. 然不離一心

一性一毛一塵故, 次云曾無別體.)

67) “묘유는 이를 얻어서 있지 않으니”와 “진공은 이를 얻어서 공하지 않으니”는 청

량징관의『화엄경행원품소』권1(卍7, p.471a5)에서 인용되었다. 이 구절에 대해

서 규봉종밀은『화엄경행원품소초』권1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묘

유는 이를 얻어서 있지 않고 진공은 이를 얻어서 공하지 않다는 것은 진계의 사

람을 보지 않는 것이니, 삼승의 인과를 듣고서는 마음을 일으켜 모습을 취하여

구하며, 제법이 모두 공함을 듣고서는 중생을 교화하고 국토를 장엄함을 즐거

워하지 않는다. 진계를 얻으면 일체가 모두 진계와 같음을 알게 되니 공하지 않

고 있지 않음이다. 있음의 자리에서 보면 있음이 이와 다르지 않으므로 있음이

곧 있지 않음이고, 공의 자리에서 보면 공이 이와 다르지 않으므로 공이 곧 공하

지 않음이다. 공하지 않으므로 자연히 수행을 잃지 않고 있지 않으므로 자연히

상을 취하지 않는다.”(卍7, pp.801b13-802a1. 妙有得之而不有, 眞空得之而不

空者, 不見眞界之人, 聞說三乘因果, 則起心取相而求, 聞說諸法皆空, 則不喜化生

嚴土. 若得眞界, 即知一切皆同眞界, 不空不有也. 於有處見之, 有則與之不異, 故

有即不有, 於空處見之, 空則與之不異, 故空即不空, 不空故, 自然不失修行, 不有

故, 自然不取於相也.)

68)『금강경』제27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의 “무슨 까닭인가 하면 아뇩다라삼먁삼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법에 있어서 단멸상을 말하지 않느니라.”(何以故, 發阿耨

多羅三藐三菩提心者, 於法不說斷滅相.)에 대한 야보송의 일부이다[『금강경주(金

剛經註)』권3(卍38, p.746b15-16)].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 [不守自性隨緣成]

일체법은 본래 성이 없으며 일체성은 본래 머무름 없으니, 머무름 없으

면 곧 체가 없으며, 체가 없으면 곧 연을 따라 걸리지 않으며, 연을 따라

걸리지 않기 때문에 자성을 지키지 않고 시방과 삼세를 이룬다. ‘자성(自

性)’이란 모든 법이 상이 없어 본래 청정한 체이다. 알겠는가?

작년 매화에 올해의 버들이여, 모습과 향기가 모두 예전과 같도다.69)

一切法, 本來無性, 一切性, 本來無住, 無住則無體, 無體則隨

緣不碍, 隨緣不碍故, 不守自性, 而成十方三世矣. 自性者, 諸

法無相本來淸淨之體也. 會麽?

去年梅今年柳, 顔色馨香捴依舊.

69)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의 스승인 월림사관(月林師觀)의『월림사관선사

어록(月林師觀禪師語錄)』권1(卍120, p.487b1-2)에 실린 4구 게송의 한 구절이다.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며,

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

一中一切多中一 , 一卽一切多卽一.

총수록(叢髓錄)

「법기」70)

70)『총수록』(韓6, p.779b14-24; 高45, p.153a8-14).

묻는다. 무엇 때문에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 다음에

이 구절을 밝히는가?

답한다. 연기하는 법은 낱낱에 다른 자성이 없어서 서로서로 다른 것[他]

으로써 자성을 삼고 곧바로 연(緣)을 따라 곁이 없이[無側] 일어나기 때문

에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다음에 ‘하나 가운데 일체’ 등의 뜻을 밝힌다.

묻는다. 만약 연기하는 법이 따라 일어남에 곁이 없다면 오직 연(緣) 이

전에는 법이 없다는 뜻인가?

답한다. 연(緣)에 나아가 논하면 연(緣) 이전에는 법이 없으나, 성(性)에

나아가 논하면 연(緣) 이전에 법이 있으니, 무엇인가? 연(緣)에 나아가 논

하는 때에는 금일의 연(緣) 가운데 나타나는 오척이 연기의 본법이며 곁

이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연(緣) 이전에는 한 법도 없지만, 성(性)에 나

아가 논하는 때에는 성기(性起)71)의 법체가 본래 있다.

問. 何故,‘ 不守自性隨緣成’之次, 明此句耶?

答. 凡緣起法, 一一無別自性, 互相以他而爲自性, 方能隨緣

無側而起故,‘ 不守自性’之次, 明‘一中一切’等義也.

問. 若緣起法隨起無側者, 唯是緣前無法之義耶?

答. 就緣論之, 緣前無法, 就性論之, 緣前有法, 何者? 就緣論

時, 現於今日緣中之五尺, 是緣起本法, 無側而立故, 緣以前

無一法也, 就性論時, 本有性起法體也.

71) 성기(性起)는 60권본『화엄경(華嚴經)』「보왕여래성기품(寶王如來性起品)」에 그

명목이 보인다.「보왕여래성기품」은 80권본『화엄경(華嚴經)』에는「여래출현품

(如來出現品)」으로 번역되어 있다. 지엄은『수현기』권4에서 “성(性)이란 체(體)

이며 기(起)는 심지(心地)에 현재함이다.”(高47, p.60a1-2; 大35, p.79b29-c1. 性者

體, 起者現在心地耳.)라고 하였고, 『공목장』에서는 “성기는 일승법계연기의 극치

[際]를 밝힘이다.”(大45, p.580c5. 性起者, 明一乘法界緣起之際.)라고 하였다. 의상

은『일승법계도』에서 법성이 곧 성기라고 직접 표현하고 있지는 않으나 법성을

증분의 세계로 보아서 성기로 연결시키고 있다.『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에서

는 법성이 곧 성기라고 설하고 있는데, 이『화엄경문답』은 법장의 저술로 전해

져 왔으나 근래에는 의상의 소백산 추동의 강의를 의상의 제자 지통이 받아 적

은『지통문답(智通問答)』의 다른 유통본으로 보기도 한다.

「진기」72)

72)『총수록』(韓6, p.779c1-17; 高45, p.153a15-b4).

‘하나 가운데 일체’ 등의 2구는 연기의 체(體)가 연(緣)을 따라 이루어지

는 뜻을 거듭 나타내어 명료하게 하였다. 처음 1구는 인과도리문(因果道理

門)이다. 말하자면 하나[一]를 얻으면 반드시 열[十]을 얻고, 열을 얻으면

반드시 하나를 얻는 것이니, 인(因)을 얻으면 곧 과(果)를 얻고 과(果)를

얻으면 곧 인(因)을 얻는다. ‘열’의 연(緣)은 인(因)이고 이루어지는 바 하

나는 과(果)이니, 인과는 곧 일시(一時) 중에 두 지위가 움직이지 않기 때

문에 인과도리문이라 한다. 다음의 1구는 덕용자재문(德用自在門)이다. 말

하자면 이것이 곧 저것이고 저것이 곧 이것이니, 걸림 없고 곁이 없기 때

문에 덕용자재문 및 지위가 움직이는 문[位動門]이라 한다.

一中一切等二句, 重現緣起體之隨緣成義, 令明了也. 初一句,

因果道理門, 謂得一而定得十, 得十定得一, 得因而卽得果, 得

果卽得因也. 十緣是因, 所成之一是果, 此因果者, 卽一時中二

位不動, 故云因果道理門. 次一句, 德用自在門. 謂此卽彼, 彼

卽此, 無㝵無側, 故云德用自在門 及位動門也.

묻는다. 앞은 중문(中門)이기 때문에 힘이 있고 힘이 없는 문[有力無力

門]73)이고, 이것은 즉문(卽門)이기 때문에 체가 있고 체가 없는 문[有體無

體門]인데 어째서 용(用)이라 하는가?

답한다. 이는 곧 인연의 당체(當體)로서 인(因)에 즉하고 과(果)에 즉하

는 뜻을 용(用)이라 이름할 뿐이지 역용(力用)의 용이 아니다.

묻는다. ‘하나 가운데 일체’란 ‘열’의 연(緣)이 인(因)이고 이루어지는 바

하나는 과(果)이니, 그렇다면 주체[能]와 대상[所]을 합하여 열하나가 되

는가?

답한다. ‘하나’의 연(緣) 가운데서 다른 것[他]을 바라보는 뜻을 기준으

로 하면 이루는 주체[能成]로서의 인(因)이 되고, 상대를 끊은 뜻에서는

이루는 바의 과(果)가 되지만, 그러나 이 두 뜻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열

하나가 아니다.

問. 前是中門故, 有力無力門, 此是卽門故, 有體無體門, 何云

用耶?

答. 此則因緣當體卽因卽果之義, 名爲用耳, 非力用之用.

問. 一中一切者, 十緣是因, 所成之一是果, 然則合能所成爲

十一耶?

答. 於一緣中, 約望他之義, 爲能成因, 絶待之義, 爲所成果,

然此二義無二故, 非十一也.

73) 힘이 있고 힘이 없는 문[有力無力門]은 법장이 부파·유식교학의 종자육의설(種

子六義說)을 이용하여 법계연기의 원인인 인(因)의 육의(六義)를 밝힌 연기인문

육의(緣起因門六義) 가운데 힘[力]으로 구분한 것이다. 연기인문육의는 제법이

생기하는 원인에는 반드시 공유력부대연(空有力不待緣)·공유력대연(空有力待

緣)·공무력대연(空無力待緣)·유유력부대연(有有力不待緣)·유유력대연(有有力

待緣)·유무력대연(有無力待緣)의 육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여섯 문은

공(空)과 유(有) 즉 무체(無體)와 유체(有體)·유력과 무력·대연과 부대연의 세

기준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데, 공(空)과 유(有) 즉 무체(無體)는 상즉의 원리를,

유력과 무력은 상입의 원리를, 대연과 부대연은 동체(同體)·이체(異體)의 원리

를 이용하여 법계연기의 인(因) 전체를 융섭하고 있다.[『화엄일승교의분제장』

(大45, pp.501c28-503a16)]

「대기」74)

74)『총수록』(韓6, pp.779c18-780a10; 高45, p.153b5-12).

‘하나 가운데 일체’ 이하는 대연기 중의 인과도리 및 덕용자재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므로 이 2구가 있다. 숭업(崇業)75)스님이 말하기를 “삼승에

도 이러한 뜻이 있으니, 말하자면 만약 초교(初敎)76)라면 아뢰야식에서 삼

성(三性)의 종자와 본식의 체(體)가 같으니 무기(無記)의 성품이기 때문

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하면, 본식의 체(體) 가운데 훈습하여 이루는 뜻

은 체문이고, 또 덕용자재의 뜻이다. 삼성의 종자가 훈습(薰習)77)의 주체

를 따라 달라지는 것은 역문(力門)이니, 인과도리의 뜻이다. 만약 숙교(熟

敎)78) 가운데라면 여래장79)의 체(體)는 덕용자재의 뜻이며, 생겨나거나 없

어지는 것은 작용[用]이기 때문에 인과도리의 뜻이다. 만약 일승 가운데

라면 법을 따라 인(因)을 변별하기 때문에 열 보법[十普法] 가운데 하나

의 법을 듦에 따라서 체(體)를 갖추고 용(用)을 갖추니, 체(體)는 곧 덕용

자재이고 용(用)은 곧 인과도리이다.

一中一切下, 欲現大緣起中, 因果道理及德用自在之義, 故有

此二句也. 崇業師云,“ 三乘亦有此義也, 謂若初敎賴耶識中,

三性種子與本識體同, 無記性故也.” 解云, 本識體中薰成之義,

是體門, 又德用自在義也. 三性種子隨能薰別者, 是力門, 因果

道理義也. 若熟敎中, 如來藏體, 是德用自在之義, 若生若滅

者, 以是用故, 因果道理之義也. 若一乘中, 隨法辨因故, 十普

法中, 隨擧一法, 具體具用, 體則德用自在, 用則因果道理也.

75) 숭업(崇業)은 8세기 중엽 무렵에 활동한 신림(神琳)의 제자이다. 신림이 부석사

에서 천여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교분기(華嚴敎分記)』를 강의하고 있을 때

숭업은 7세의 사미로서 이 법회에 참여하였다.[균여,『석화엄교분기원통초』(韓4,

p.506a11-20)] 이로 미루어 숭업의 주요 활동 시기는 9세기 전반에서 중엽이었

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숭업이 범체(梵體, 9세기 중엽)를 만나 중국 신수(神秀)

의 말을 전해 주었다는 기록에 의해 그 가능성이 더욱 짙다.[균여,『석화엄교분기

원통초』(韓4, p.308b12-13)]. 숭업이 남긴『관석(觀釋)』이『총수록』과『석화

엄지귀장원통초』에 인용되어 전한다.

76) 초교(初敎)는 대승시교라고도 한다. 화엄교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승

교(小乘敎)·대승시교(大乘始敎)·대승종교(大乘終敎)·돈교(頓敎)·원교(圓敎)

의 다섯으로 나누어서 중관[공시교(空始敎)]과 유식[상시교(相始敎)]의 가르침

을 시교, 즉 초교에 배속시키고 있다.[법장,『화엄일승교의분제장』(大45, pp.

481b5-482a11)]

77) 훈습(薰習, vāsanā, pravrtti)은 향기가 없는 옷에 향기를 쐬면 옷에서 향기가 나

는 것처럼 우리들의 몸이나 말, 뜻의 움직임의 세력이 마음[心識]에 남는 영향

작용을 말한다. 유식학파에서는 칠전식(七轉識)의 현행(現行)을 능훈(能薰)의

법으로 삼고, 제8 아뢰야식을 종자를 저장하는 소훈(所薰)의 장소로 삼는다.

78) 숙교(熟敎)는 종교(終敎)와 같다. 숙(熟)은 생(生)의 대어(大語)이며, 생은 처음·

시작의 의미이다. 종교는 화엄종에서 내세우는 오교의 하나이며, 대승 종극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경론으로는 『능가경』·『승만경』·『기신론』·『보성론』

이 이에 해당한다. 법장은『화엄오교장』권1의 10종(宗)을 밝히는 부분에서,

여덟 번째 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은 대승종교의 여러 경전이 ‘모든 법은 오직

진여일 뿐’이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고 하고, 이는 여래장의 진실한 덕이기 때문

이고 스스로의 체가 있기 때문이며, 성덕(性德)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

다.(大45, p.482a6-8).

79)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은 여래의 태(胎)라는 뜻으로 여래가 될 수 있

는 가능성, 즉 모든 중생에게 성불의 가능성이 있음을 표현한 말이다. 이 때 일

체 중생이 여래가 될 수 있는 근거를 종성(種性, gotra), 계(界, dhātu), 태

(胎)·태아(胎兒, garbha) 등의 개념을 통해서 나타낸다. 『승만경(勝鬘經)』

「자성청정장(自性淸淨章)」(高6, p.1368b20-22; 大12, p.222b5-6)에 의하면,

생사는 여래장에 의하고 여래장이 있으므로 생사를 설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여래장과 중생의 생사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원통기(圓通記)80)

80) 균여,『원통기』(韓4, pp.7c19-8a13).

다음 2구는 다라니의 이법과 작용을 기준으로 해서 법을 거두어들이는

분한을 변별한다.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며’는 이

법[理]이고, ‘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는 작용[用]이다.

말하자면 중문은 인과도리문이고 즉문은 덕용자재문이다. 인과도리를 기

준으로 해서 이법이라 하고, 덕용자재를 기준으로 해서 작용이라 함은 무

엇인가? 중문은 이루는 주체인 인(因) 밖에 이루어지는 과법이 있기 때문

에 인과도리문이다. 즉문은 인연의 당체이니 공(空)에 즉하고 인(因)에 즉

하고 과(果)에 즉하며, 이루는 주체인 인(因) 밖에 이루어지는 과법이 없

으므로 덕용자재문이다. 옛말에 중문은 법에서 먼 문이고, 즉문은 법에서

가까운 문이며, 주반문이란 법에 즉한 문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연기 자

체의 법을 바라보아 셋으로 나누어 차별한 것이다. 말하자면 중문이란 역

용문이므로 주체와 대상이 이루어져 다르므로 ‘법에서 먼 문’이라 하고,

즉문은 체문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당체(當體)가 곧 공(空)하여 인과가

다르지 않으므로 ‘법에서 가까운 문’이라 하며, 주반문이란 일어나지 않는

일어남의 개별적인 모습의 법계에서 먼저 든 것을 주(主)로 삼고 뒤에 든

것을 반(伴)으로 삼으니, 일어나지 않는 자체의 곳에 즉하므로 ‘법에 즉한

문’이라 한다.

次二句, 約陁羅尼理用, 以辨攝法分齊.‘ 一中一切多中一’理

也,‘ 一卽一切多卽一’用也. 謂中門是因果道理門, 卽門是德

用自在門故. 約因果道理云‘理’, 約德用自在云‘用’, 何者?

中門者, 能成因外, 有所成果法, 故因果道理門也. 卽門者, 因

緣當體, 卽空卽因卽果, 能成因外, 无所成果法, 故德用自在門

也. 古辭, 中門者, 法中遠門, 卽門者, 法中近門, 主伴門者, 法

中卽門, 此則望於緣起自體之法, 分三差別也. 謂中門者, 力用

門故, 能所成別, 故云法中遠門, 卽門者, 約體門故, 當體卽空,

因果不別, 故云法中近門, 主伴門者, 於不起之起, 別相法界,

先擧爲主, 後擧爲伴, 卽於不起自體之處, 故云法中卽門也.

법계도주(法界圖註)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며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인] 까닭은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의 법이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일체를

갖추어 하나를 이루며, 일체법이 자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법으로써 일

체를 이룬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 가운에 일체이어서 많은 것이 하나에 걸

리지 않고 일체 가운데 하나여서 하나가 많은 것에 걸리지 않는다. 이러한

즉 한 터럭끝 속에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곳곳에서 중생을 제도하며 가없

는 찰해(刹海)에 일체 중생이 낱낱이 열반한다. 터럭끝과 찰해가 허공 꽃

가운데 경계이며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 몽환 가운데 물건이다. 비유하면

허공과 같아서 비록 일체에 두루하지만 또한 한 티끌을 여의지 않는다. 허

공이 건립하는 소식을 알고자 하는가?

처마에 기댄 산색은 구름에 이어져 푸르르고

난간을 벗어난 꽃가지는 이슬을 둘러 향기롭도다.81)

所以不守自性隨緣而成故. 一法無自性故, 具一切而成一, 一

切法無自性故, 以一法而成一切. 是故一中一切, 多不碍於一,

一切中一, 一不碍於多. 伊麽則一毫端裏, 三世諸佛處處度生,

無邊刹海, 一切衆生箇箇涅槃. 毫端刹海空花中境界, 諸佛衆

生夢幻中物色. 譬如虛空, 雖遍一切, 而亦不離於一塵. 要識虛

空建立底消息麽?

倚簷山色連雲翠, 出檻花枝帶露香.

81) 이 구절은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의『증도가(證道歌)』중 “여래의 대원각

이다”(即是如來大圓覺)라는 구절에 송나라의 남명법전(南明法泉)이 계송(繼頌)

을 붙인 것이다[『증도가송(證道歌頌)』권1(卍114, p.873b1-2)].

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 [一即一切多即一]

[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인] 까닭은 하나 가운데 일체이

며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법이 있기 때문에 곧 일체

가 있고, 일체가 있기 때문에 곧 하나의 법이 있으며, 중생이 있기 때문에

곧 제불(諸佛)이 있고, 제불이 있기 때문에 곧 중생이 있다. 허공이 걸림이

없어 중생과 부처가 둘이 없고, 연하여 생김이 머무름 없어 원인과 결과가

동시이며, 무량하고 두렷한 원인이 찰나를 벗어나지 않고, 가없는 결과의

바다[果海]가 바로 그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 허공이 동작하는 소식을 알

고자 하는가?

대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 먼지가 일지 않고

달빛이 못바닥을 뚫어도 물에 흔적이 없다.82)

所以一中一切多中一故. 以有一法故, 即有一切, 以有一切故,

即有一法, 以有衆生故, 即有諸佛, 以有諸佛故, 即有衆生. 虛

空無碍, 生佛無二, 緣生無住, 因果同時, 無量圓因, 不出於刹

那, 無邊果海, 不離於當念. 要識虛空動作底消息麽?

竹影掃階塵不動, 月83)穿潭底水無痕.

82)『금강경』제17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중의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일체법은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수자도 없다고 설하셨느니라.”(是故, 佛說

一切法,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에 대한 야보송의 일부이다[『금강경주』권2(卍38,

p.736a2)].

83) 저본에는「日」로 되어 있으나『금강경주』의 원문에 따라「月」로 바꾸었다.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시방을 머금고

모든 티끌 중에도 또한 이와 같다.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총수록(叢髓錄)

「법기」84)

84)『총수록』(韓6, p.780b11-20; 高45, p.154a6-11).

미세한 티끌이란, 초교에서는 극히 미세한 티끌[極微塵]이라 하고, 숙교

에서는 공에 가까운 티끌[空鄰塵]이라 하며, 일승에서는 총상으로서의 티

끌[摠相塵]이라고 한다. 이 총상진이란 작은 것을 필요로 하면 곧 작게 되

고 큰 것을 필요로 하면 곧 크게 되니, 그러므로 하나의 티끌 가운데 단박

에 시방을 나타낸다.

微塵者, 初敎云極微塵, 熟敎云空鄰塵, 一乘云摠相塵. 此摠相

塵者, 須小卽小, 須大卽大, 故一塵中, 頓現十方也.

묻는다. 아래 가르침[下敎]85)의 ‘방위와 분한[方分]이 있는 티끌’은 일

승의 티끌과 어떻게 다른가?

답한다. 일승의 티끌은 방위와 분한을 필요로 하면 곧 방위와 분한이 있

고, 방위와 분한이 없음을 필요로 하면 곧 방위와 분한이 없으니, 필요에

따라 자재하기 때문에 다르다.

묻는다. 방위와 분한이 없는 티끌은 다시 더 부수어지지 않는가?

답한다. 또한 부수어짐을 필요로 하면 다한다. 무엇인가? 만약 그 정

(情)으로 헤아려지는 바의 방위와 분한이 없음을 말한다면 요컨대 반드시

육상을 써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問. 下敎有方分之塵者, 與一乘塵, 何別?

答. 一乘塵, 須方分卽有方分, 須無方分卽無方分, 隨須自在故

別也.

問. 無方分之塵非更碎耶?

答. 亦須碎盡. 何者? 若其情謂所計之無方分, 則要須用六相

分析也.

85)『총수록』(韓6, p.794b17, p.822c22, p.824c12; 高45, p.168b19, p.200b3,

p.202b15)에는 ‘하사교(下四敎)’라는 말도 있으며, 오교(五敎) 중 원교(圓敎)

이외의 나머지 4교, 즉 소승교(小乘敎)·대승시교(大乘始敎)·종교(終敎)·돈교

(頓敎)를 가리킨다.

「진기」86)

86)『총수록』(韓6, p.780b21-c3; 高45, p.154a12-15).

‘하나의 미세한 티끌 속에 시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시방 세계를

거두어들여서 하나의 티끌을 이루기 때문에 시방을 포함한다고 하는가,

시방 세계를 모아 하나의 티끌을 이루고 나서 새롭게 새롭게 다시 시방을

포함하는가? 답한다. 두 가지 뜻을 다 갖추고 있다.

一微塵中含十方者, 攝十方界成一塵, 故云含十方耶? 攬十方

界成一塵已, 新新更含十方耶? 答. 二義俱得.

묻는다. 하나의 티끌을 이루는 때에 시방을 거두어들여 다한다면 다시

남음이 없는데, 어떻게 새롭게 새롭게 포함하겠는가?

답한다. 이는 그럴 필요가 있는 곳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티끌을 이루는 때에 시방을 필요로 하면 다하고, 새롭게 새롭게 포

함함을 필요로 하는 때에도 역시 뒤에 뒤에 일어남을 장애하지 않는다.

問. 成一塵時, 攝十方盡, 更無有餘, 何得新新含耶?

答. 是須處須故. 成一塵時, 須十方盡, 須新新含時, 亦不㝵後

後起也.

「대기」87)

87)『총수록』(韓6, p.780c4-8; 高45, p.154a16-18).

‘하나의 미세한 티끌’이란 불국토의 티끌 수만큼 많은 겁 중에 익혀야

할 바를 부지런히 닦기 때문에 비로소 시방 세계를 머금어 수용할 수 있

으니, 걸림 없이 자재하다. 이것은 사법의 가장 미세한 초위(初位)이다. 진

정(眞定)88)대덕이 말하기를, “사(事)를 융섭하여 이(理)를 나타내는 문이란

티끌이 시방을 포함하는 도리를 기준으로 해서 말했을 뿐이지, 하나의 티

끌이 녹아 없어져 이법과 같아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一微塵者, 佛刹塵數劫中, 勤修所鍊故, 方能含受十方世界, 無

㝵自在. 此是事法最細之初位. 眞定德云,“ 事融現理門者, 約

塵含十方之道理云耳, 非謂一塵泯融同理也.”

88) 진정(眞定)은 의상의 10대제자[『삼국유사(三國遺事)』「의상전교(義湘傳敎)」조(韓

6, p.349b9-12)], 또는 4대제자[최치원(崔致遠),『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韓3,

p.775c13)] 중 한 분이다. 진정(眞定)은 출가하기 전에 군졸로 있었는데 가난하

지만 홀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의상이 태백산에서 불법(佛法)을 설하여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말을 듣고 의상에게로 가서 제자가 되었다. 출가한 지 3년

뒤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선정에 들었다가 일어나 스

승에게 알리자, 의상은 제자들을 데리고 소백산 추동(錐洞)으로 가서 초막을 짓

고 3천여 제자들과 함께 진정의 어머니를 위해 약 90일 동안 『화엄경(華嚴經)』

을 강의하였다. 마침내 강의가 끝나자 그 어머니가 현몽하여 하늘에 환생했다

고 한다.(『삼국유사(三國遺事)』「효선쌍미(孝善雙美)」조, 韓6, p.367a11-b23).

소백산 추동에서 이루어진『화엄경(華嚴經)』강설의 추요(樞要)를 제자인 지통

이 모아서 2권으로 만든 것이『추동기』이며,『도신장』도 이 때의 강설을 받아 적

은 것이라고 한다.[의천,『신편제종교장총록』(韓4, p.682a9-18)]. 진정은 의상에게

『일승법계도』를 배웠으며, 삼문석(三門釋)을 지었다.[『총수록』(韓6, p.775b9-c8)]

지리산 동쪽 단속사에 진정대사비가 있다.

원통기(圓通記)89)

89) 균여,『원통기』(韓4, p.8a13-c15).

‘다음 2구는 사(事)를 기준으로 해서 법을 거두어들이는 분한을 밝힌다’

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다.]

묻는다. 하나의 미세한 티끌 중에 시방을 포함함도 또한 다라니인데, 무

엇 때문에 앞의 2구를 해석하여 곧 다라니라 하고, 지금 이것은 사(事)를

기준으로 하여 법을 거두어들임을 밝힌다고 하는가?

답한다. 지금 이것 또한 다라니의 뜻이다. 그러나 앞에서는 모든 법을

통틀어 보아서 바로 다라니라고 표현하고, 지금은 곧 미세한 티끌은 사

(事)이고 시방도 또한 사(事)이니, 이 두 가지 사(事)를 기준으로 하므로

그렇게 말한다. 이것은 대소(大小)가 걸림 없다는 뜻이다.

次二句, 約事明攝法分齊者.

問. 一微塵中含十方, 亦是陀羅尼, 何故, 釋前二句 則云陁羅

尼, 今此云約事明攝法耶?

答. 今此亦是陁羅尼義. 然前則通望諸法, 直現陁羅尼, 今則

微塵是事, 十方亦是事, 約此二事, 故爾云也. 此是大小无碍

義也.

『도신장(道身章)』90)에서, 원효(元曉)91)법사가 말하기를, “작음[小]의 큰

[大] 뜻은 능히 큼을 용납할 수 있고 큼의 작은 뜻은 작음 가운데 들어간

다”라고 하였고, 법장(法藏)92)스님은 말하기를 “반드시 작음의 큰 모양[大

相]·큼의 작은 모양[小相]이라야 비로소 용납하고 들어갈 필요는 없으

니, 바로 작음의 작은 모양이 용납할 수 있고 큼의 큰 모양이 들어갈 수 있

다”93)고 하였다.〈이상〉 법장스님의 뜻은 큼과 작음이 원래 하나이니, 그러

므로 작음은 작음을 무너뜨리지 않고 큼을 용납할 수 있고, 큼은 큼을 무

너뜨리지 않고 작음 가운데 들어간다.

道身章,“ 元曉法師曰,‘ 小之大義能容大, 大之小義入小中,’

藏師云,‘ 不必小之大相大之小相, 方容入, 直小之小相能容,

大之大相能入.’”〈已上〉 藏師之意, 大小元來是一, 是故小不壞

小能容大, 大不壞大入小中.

90)『도신장(道身章)』(2권)은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책으로서, 현존하지 않고 단편

이 전해진다. ‘도신(道身)’은 ‘도신(道申)’으로도 표기된다. 도신은『삼국유사』에

서 말한 의상의 10대제자나『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서 밝힌 사영(四英)에

는 들어 있지 않으나『송고승전(宋高僧傳)』권4에서 ‘당에 올라 그윽한 뜻을 본

자[登堂覩奧者]’(大50, p.729b19-20)로 칭송한 의상의 직제자이다.『송고승전』

4에서 “뜻을 풀이한 책들은 혹은 제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는데『도신장』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大50, p.729b28-29. 如是義門, 隨弟子爲目, 如云道身章是也.)

라고 한 것으로 보아『도신장』의 저자는 도신임을 알 수 있다.『도신장』은『일승

문답(一乘問答)』이라고도 하며, 의천의『신편제종교장총록』(韓4, p.682a10-18)에

그 서명(書名)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고려 전기까지는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신장』은 균여의 저술에 47회,『총수록』에 10회 인용되는 등 이후의 화엄학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현존하는『도신장』의 단편에는 지엄과 의상의 문

답, 원효와의 문답, 의상과 그 직제자들과의 문답 및 양원(良圓)·지통(智通)·상

원(常元) 등 의상 직제자들의 설도 인용되어 있다. 이처럼『도신장』은『추동기』

와 함께 의상의 화엄사상이나 의상 당시의 화엄교학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

료가 된다.

91) 원효(617~686)는 신라 때의 스님이며, 진평왕 39년(617)에 태어났다. 속성은 설

(薛)씨이며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고 아버지는 담날내

말(談捺乃末)이었다. 원효라는 이름은 스스로 지은 것이며, 당시의 사람들은 그

고장의 말로 그를 ‘새벽[始旦]’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의 출가 시기는 명확하

지 않지만 대략 15세 전후의 나이에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 일정하게 정해진 스

승을 모시지는 않고 여러 스승들에게서 배웠다. 젊은 시절에 당시의 고승 낭

지(朗智)에게『법화경』을 배웠고, 의상(義湘, 625-702)과 함께 보덕(普德)에게

서『열반경』과『유마경』을 배웠다. 또한 의상과 함께 두 차례에 걸쳐 당(唐)나

라 유학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원효는 오도 후 “일체에 걸림 없는 사람은 한길

로 생사를 벗어난다.”(『육십화엄(六十華嚴)』권5「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

8, p.37b20; 大9 p.429b19.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화엄경(華嚴經)』

의 사상에 의거하여 무애박을 두드리고 무애가를 부르며 무애무를 추면서 걸림

없이 교화하였다. 그는 무애행(無碍行)으로 대중을 교화하면서도 불교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수많은 저술을 남겼고, 불교의 여러 쟁론들을 일심(一心)으로

회통시켰다. 원효는 광범위한 대승 교리에 대해 예리한 통찰과 해박함을 지니

고 있었으며, 이러한 바탕 위에서 많은 저술을 지었다. 그의 저술은 80여 부

200여 권(현존 22종)에 달하는데, 그 중 화엄에 관한 것은『화엄경소병서(華

嚴經疏幷序)』·『화엄경종요』·『보법기』 등이며, 현존하는 것은 『화엄경

소』10권 중 서문 권3 일부 및 균여의 저술 등에 인용되어 전하는 『화엄경

종요』·『보법기』의 단편들이다. 원효의 생애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로는

「고선사서당화상비(高仙寺誓幢和尙碑)」와『삼국유사(三國遺事)』(韓6,

pp.347b17-348b19, pp.348b20-349c22, 韓6, pp.349b23-350a19)·

『송고승전』 권4(大50, p.730a6-b29, p.729a3-c3)·『동사열전(東師列

傳)』(韓10, p.996b13-c16) 등이 있다.

92) 법장(法藏, 643~712)은 당나라 때 스님이다. 중국 화엄종의 제3조로 일컬어지며,

중국 화엄종을 대성시켰다. 강거국(康居國) 출신이며, 자는 현수(賢首)이다. 지

엄이『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는 것을 듣고 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후에 측

천무후는 태원사를 건립하고 그를 주석케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으며,

비로소 삭발하고 사문이 되었다. 실차난타의『팔십화엄(八十華嚴)』역장에도 참

가하였으며, 오교십종(五敎十宗)의 교판을 세우고『화엄경(華嚴經)』을 으뜸으

로 삼아 일승원교의 화엄사상을 천명하였다. 그의 저술로『화엄경탐현기』·『화

엄오교장』·『화엄경지귀』·『화엄강목(華嚴綱目)』·『금사자장(金師子章)』·

『유심법계기』·『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범망경소』·『화엄경전

기』등 60여 부가 있다. 이들 법장의 저술에 대해 균여가 주석하였으며,『원통

기』에는『화엄오교장』등이 인용되어 있다. 법장은 종남산 지상사에서 의상과

함께 지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지엄은 법장에게는 문지(文持), 의상에게는

의지(義持)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의 제자로 굉관(宏觀)·지광(智光)·종일(宗

一)·문초(文超)·혜원(慧苑) 등이 있었다. 최치원(崔致遠)의 『법장화상전』(韓3,

p.770b7-23)·『송고승전』권5(大50, p.732a14-b14)『법계종오조약기(法界宗

五祖略記)』(卍134, pp.545a16-549b5)에 그의 전기가 전한다.

93) 균여는 이『원통기』에서 인용한『도신장』의 내용을『석화엄지귀장원통초(釋華

嚴旨歸章圓通鈔)』(韓4, p.143a15-19)에도 동일하게 인용하고 있다. 단 『석화엄지

귀장원통초』에는 ‘대지소의입소중(大之小義入小中)’ 뒤에 ‘지의(之義)’가 더 있

으며,『원통기』의 ‘도신장(道身章)’이 ‘도신장(道申章)’으로, ‘원효법사(元曉法

師)’가 ‘효공(曉公)’으로, ‘장사(藏師)’가 ‘장주(章主)’로 되어 있다.

이른바, 지엄스님이 돌아가시기 열흘 전에 학도들이 그 처소에 나아가

문안을 여쭈었더니, 스님이 대중들에게 물었다. “경 가운데 ‘하나의 미세

한 티끌 가운데 시방 세계를 머금는다’94)는 것과 ‘한량 없는 겁이 바로 한

순간이다’95)라는 등의 경문을 그대들은 어떻게 보는가?”

대중들이 아뢰었다. “연기법은 자성이 없으니, 작은 것은 작은 것에 머

무르지 않고 큰 것은 큰 것에 머무르지 않으며 짧은 것은 짧은 것에 머무

르지 않고 긴 것은 긴 것에 머무르지 않는 등인 까닭에 그렇습니까?”

스님이 말씀하였다. “그렇다. 그렇다. 그러나 아직 설었다.”

대중들이 아뢰었다. “어떻게 이를까요?”

스님이 말씀하였다. “많이 말하려 하지 말라. 단지 하나뿐임을 말하기

때문이다.”96)〈이상〉

謂, 儼師遷神十介日前, 學徒進所問訊, 師問大衆曰, “經中

‘一微塵中含十方世界,’ 與‘无量劫是一念’等文, 汝等作何物

看?” 衆人白云, “緣起法, 无自性, 小不住小, 大不住大, 短不

住短, 長不住長等 故爾耶97)? 師曰, “然之然矣. 而猶生.” 白

云,“ 何謂?” 師曰,“ 莫須多噵. 只言一故.”〈已上〉

94)『화엄경(華嚴經)』에는 “하나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한량없는 찰해를 본다.”

[『육십화엄(六十華嚴)』권56「입법계품(入法界品)」(高8, p.389a20; 大9, p.

754b2. 一一微塵中, 見無量刹海.)] 등과 같이 이와 관련되는 경문들이 매우 많다.

이 구절은 지엄이 그 의미를 파악하여 ‘시방 세계’의 용어를 사용하여 재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95)『화엄경(華嚴經)』에는 “여러 대보살들이 능히 모든 겁으로써 한 순간의 창고

를 삼는다.”[『육십화엄(六十華嚴)』 권56 「입법계품(入法界品)」(高8, p.389

b7-8;大9, p.754b23-24. 諸大菩薩, 能以諸劫爲一念藏.)], “한량없는 겁으로써

한 순간을 삼는다.”[『육십화엄(六十華嚴)』 권2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

(高8, p.9c12; 大9, p.402b20. 以無量劫爲一念.)], “한량없는 겁이 곧 한 순간임

을 안다.”[『육십화엄(六十華嚴)』권9「초발심보살공덕품(初發心菩薩功德品)」

(高8, p.61c18; 大9, p.451a20-21. 知無量劫卽是一念.)] 등과 같이 이와 관련

되는 경문들이 매우 많다.

96) 이상의 인용문 역시『도신장』의 내용이며, 균여의『석화엄지귀장원통초

(釋華嚴旨歸章圓通鈔)』(韓4, p.143b10-17)와『총수록』(韓6, p.783a11

-18; 高45, p.156b16-20)에도 인용되어 있다.

97) 저본에는「耶」 아래에「浮矣見耳」라는 글자가 더 있으나,『총수록』에 인용된

『도신장』에는 없으므로 생략하였다.

‘단지 하나뿐임을 말하기 때문’이란 큼과 작음이 본래 하나이고 둘이 아

니기 때문에 그렇다.

‘只言一故’者, 以大小本來是一不二故爾也.

묻는다. 큼과 작음이 본래 하나임을 어떻게 아는가?

답한다. 의상화상이 말씀하였다. “큼과 작음이 걸림 없는 것은 꿈에서

보는 것과 같다. 무아(無我)의 마음이 잠자는[睡眠] 연(緣)을 말미암아 온

전히 티끌이고 온전히 산이니, 적은 부분이 티끌이고 많은 부분이 산인 것

은 아니다. 꿈을 깬 마음 가운데도 티끌과 산이 걸림 없이 나타난다.”98)〈이

상〉 이 비유로써 법에 합하면 머무름 없는 공(空)을 가리켜 티끌이라 이름

하고 머무름 없는 공을 가리켜 시방 세계라 이름한다. 다만 하나의 머무름

없음[無住]인 까닭에 티끌이 스스로 작은 지위를 무너뜨리지 않고 큼을

용납할 수 있고, 시방이 스스로 큰 지위를 무너뜨리지 않고 작음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큼과 작음이 걸림 없음을 얻는다.

問. 何知大小本來是一耶?

答. 相和尙曰,“ 大小无碍, 可如夢所見, 无我之心, 由睡眠緣,

全塵全山, 非片分爲塵, 多分爲山. 覺夢心中, 塵之與山, 无碍

現現.”〈已上〉 以此喩合法, 則指无住空名塵, 指无住空名十方

世界. 只一无住故, 塵不壞自小位能容大, 十方不壞自大位能

入小. 故得大小无碍也.

98) 이와 유사한 내용이 균여의『석화엄지귀장원통초』(韓4, p.143b19-22)에도 보인다.

묻는다. 「십주품(十住品)」에 이르기를, “지극히 큼에 작은 모양이 있음

을 알고자 보살은 이로써 처음 발심한다”99)라고 하였으니, 곧 ‘작음의 큰

뜻이 큼의 작은 뜻을 용납해서 작음 가운데 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런데] 어째서 ‘큼과 작음이 움직이지 않고서 비로소 용납하고 들어

간다’고 하는가?

답한다. 큰 뜻인 때에 작은 모양을 잃지 않고, 작은 뜻인 때에 큰 모양을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극히 큼에 작은 모양이 있다’고 할 뿐이지, 시방

이 티끌에 들어가고자 하므로 작고, 미세한 티끌이 시방을 용납하고자 하

므로 크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問. 十住品云,“ 欲知至大有小相, 菩薩以此初發心,” 則可云,

‘小之大義能容大之小義, 入小中.’ 何云, 大小不動, 方容入耶?

答. 大義時不失小相, 小義時不失大相. 故云,‘ 至大有小相’

耳, 非謂十方欲入塵故小, 微塵欲容十方故大也.

99)『육십화엄(六十華嚴)』권8「보살십주품(菩薩十住品)」(高8, p.57a20; 大9, p.447b3).

의상화상이 말씀하였다. “‘하나의 미세한 티끌 중에 시방 세계를 머금는

다’는 것은 동일하게 머무름 없음인 까닭에 그렇다.”

원스님[員師]100)이 여쭈었다. “미세한 티끌은 머무름 없는 작음이고 시

방 세계는 머무름 없는 큼입니까?”

답하였다. “동일한 양이다.”

여쭈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사물에 대해 미세한 티끌은 작고 시방세

계는 크다고 말합니까?”

답하였다. “미세한 티끌과 시방 세계는 각기 자성이 없으니 오직 머무름

없음일 뿐이다. 말하자면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크다’란 필요로 하는 곳에

서 필요로 할 뿐이지, 작은 까닭에 작다고 하고 큼인 까닭에 크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크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근기

중에서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크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일 뿐이지, 한결같

이 티끌은 작음의 자성이고 세계는 큼의 자성인 것은 아니다. 또한 ‘티끌

은 크고 세계는 작다’고도 할 수 있으니, 도리가 가지런히 하나여서 머무

름 없는 실상이다.”101)〈이상〉

相和尙曰,“ ‘一微塵中含十方世界’者, 同是无住故爾.”

員師問曰, “微塵无住小, 十方世界无住大耶?” 答. 一量也.

問. 若爾, 何物言微塵小, 十方世界大耶? 答. 微塵與十方世

界, 各无自性, 唯无住耳. 所言塵小世界大者, 是須處須耳, 非

是小故云小, 大故云大. 所謂不知塵小世界大機中令知塵小世

界大耳, 非是一向塵小自性世界大自性. 亦得云‘塵大世界小,’

道理齊一, 无住實相.〈已上〉

100) 원스님[員師]은 의상의 제자인 상원(相員)을 가리킨다.『총수록』(韓6, p.780c10;

高45, p.154a20)에 인용된『도신장』에는 ‘원사(元師)’로 되어 있다.

101) 이 내용은『총수록』(韓6, p.780c9-21; 高45, p.154a19-b5)과 균여의『석화엄지

귀장원통초』(韓4, p.143b22-c9)에도 보인다.

만약 큼과 작음이 동일하여 머무름이 없는 것을 밝게 알 때에 ‘티끌은

크고 세계는 작다’고도 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이 시방은 스스로 작은 모양

을 갖추고 있고 미세한 티끌은 스스로 큰 모양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시방이 미세한 티끌에 들어가고자 하는 때인 까닭에 바뀌어 작게 되고 미

세한 티끌이 시방을 머금고자 하는 때인 까닭에 고쳐서 크게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곧바로 작음은 작음을 바꾸지 않고 큼을 용납할 수 있고, 큼

은 큼을 줄이지 않고 작음에 들어갈 수 있다.

若曉大小同一无住時, 可云塵大世界小, 如是十方自具小相,

微塵自具大相. 是故非謂十方欲入微塵時, 故轉爲小, 徵塵欲

含十方時, 故更爲大. 直小不轉小能容大, 大不減大 能入小也.

법계도주(法界圖註)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시방(十方)을 머금고 [一微塵中含十方]

다만 이 하나의 작은 것102) 가운데 다함 없는 법계를 포함하여 한량 없는

중생과 부처의 정토와 예토가 낱낱에 들어차고 낱낱에 두루하여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이러한즉 다만 이 하나의 작은 것에 허다한 한량이 있

는가? 한량 없는 법계에 허다한 재주가 있는가? 쯧쯧! 크자고 하면 곧 크

고 작자고 하면 곧 작아서, 하나의 티끌에서 시방을 헤아려 시방이 작은

것이 되고, 시방으로 하나의 티끌을 헤아려 하나의 티끌이 큰 것이 되니,

연기가 없기 때문이고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어젯밤 금까마귀103)가 바다로 날아 들고

새벽 하늘에 변함없이 하나의 바퀴104)가 날아오른다.105)

只這一星兒中, 包含無盡法界, 無量生佛, 淨土穢土, 一一充

滿, 一一周遍, 無欠無餘. 伊麽則只這一星兒, 還有許多限量

麽? 無量法界, 還有許多伎倆麽? 咄! 要大即大, 要小卽小, 一

塵計十方, 十方爲小, 以十方量一塵, 一塵爲大, 無緣起故, 無

自性故. 爲甚如此?

昨夜金烏飛入海, 曉天依舊一輪飛.

102) 성아(星兒)는 한 점이라는 뜻이다. 아주 작은 것을 의미한다.

103) 금까마귀[金烏]는 중국에서 전해오는 이야기 중에 태양 안에 세 발 가진 까마귀

가 살고 있다는 데서 태양을 비유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세 발 가진 까마

귀는 태양을 의미하며 고구려의 상징으로 이해되고 있다.

104) 하나의 바퀴[一輪]는 보름달이나 붉은 태양을 비유하는 말이다.

105) 이 구절은 12세기 곽암사원(廓庵師遠)의『십우도송(十牛圖頌)』제9「반본환원송

(返本還源頌)」에 붙인 석고이(石皷夷)화상의 화답송의 일부이다(卍113, p.920a8).

모든 티끌 중에도 또한 이와 같다. [一切塵中亦如是]

이러한 시방의 법계는 개개가 곧 하나의 미세한 티끌이지만 하나의 미

세한 티끌도 또한 얻을 수 없으니 빛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또한 인다

라망이 서로서로 섞이어 사무치고 거듭거듭 사귀어 비추어서 낱낱의 보

배 가운데 여러 모양이 다함없음과 같다. 낱낱의 불국토가 시방에 가득 차

지만 시방이 하나의 불국토에 들어가고도 또한 남음이 없다. 헤아려서 알

바가 아니고 지혜의 눈으로도 볼 바가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경행(經行)106)하고 앉고 누움이여, 항상 그 가운데에 있도다.107)

只這十方法界, 个个是一微塵, 一微塵亦不可得, 如光如影, 亦

如因陁羅網, 互相叅徹, 重重交映, 一一寶中衆象無盡. 一一佛

國滿十方, 十方入一亦無餘. 非擬議所知, 非智眼所見, 何也?

經行及坐臥, 常在於其中.

106) 경행(經行, vihāra)은 일정한 장소를 조용히 거니는 일을 말한다. 좌선 중의 피

로를 풀고 졸음을 없애기 위하여, 또는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가볍게 걸어다니

는 일이다. 행도(行道)라고도 한다.

107) 구마라집 한역의『묘법연화경』 권5(高9, p.779c3-4; 大9, p.46b12-13)에 나

오는 게송이다. 다만『법화경』에는 “불자가 이 곳에 머무르면 부처님께서 수용

하신다. 항상 그 가운데 있으니 경행과 앉고 누움이로다.(佛子住此地, 則是佛受

用. 常在於其中, 經行及坐臥.)”로 되어 있다. 『대혜보각선사어록』 권6(大47,

p.834a28-29), 권24(大47, p.913a17-18),『종경록(宗鏡錄)』권10(大48, p.

469c12-13) 등에는『법화경』의 게송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으나『원오불과

선사어록』권15(大47, p.785a12-14),『밀암화상어록(密菴和尚語錄)』권1

(大47, p.965b12),『굉지선사광록(宏智禪師廣錄)』권4(大48, p.39b21-23),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韓7, p.37c10-11) 등에서는『법계

도주』와 같이 순서가 바뀌어 있다.『선문제조사게송(禪門諸祖師偈頌)』권2

에서는 이 게송을 ‘입당게(入堂偈)’로 소개하고 있다(卍116, p.970b6-7).

한량없는 먼 겁이 곧 일념이고

일념이 곧 한량없는 먼 겁이다.

구세와 십세가 서로 상즉하면서도

그로 인해 뒤섞여 어지럽지 않고 나뉘어져 따로 이룬다.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총수록(叢髓錄)

「법기」108)

108)『총수록』(韓6, p.781c5-9; 高45, p.155a16-18).

‘한량없는 먼 겁(劫)109)이 곧 일념(一念)110)이다’란 한 터럭을 세로로 쪼

개어서 열로 나누고, 나아가 백으로 나누고 천으로 나누어서, 그 한 부분

을 옥판 위에 얹어 놓고 날카로운 칼을 들고서 끊되, 그 날카로운 칼이 판

에 이르는 때를 기준으로 하여 일념이라 한다.

‘無量遠劫卽一念’者, 竪析一髮爲十分, 乃至百分千分, 以其

一分, 置玉板上, 擧利刃斷, 約其利刃至板之時, 爲一念也.

109) 겁(劫, kalpa)은 인도의 시간 단위 중 가장 긴 것을 말한다. 겁파(劫波)라고도

하며, 대시(大時)·시(時)라고 의역한다.『잡아함경(雜阿含經)』권34에서는 개자

(芥子)와 대석(大石)을 비유로 들어 겁의 장구(長久)함을 설명한다. 즉 사방상하

1유순의 철성(鐵城)에 개자를 가득 채워 백 년마다 하나씩 꺼내고 마침내 그 개

자를 다 꺼내어도 겁은 끝나지 않는다고 하고(高18, p.1045b18-20; 大2,

p.242b22-25), 또 사방 1유순의 파괴되지 않는 큰 돌산이 있는데 흰 천으로 백

에 한 번씩 스쳐서 그 돌산이 다 없어져도 겁은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高18,

p.1045c10-14; 大2, p.242c7-10). 겁에 대한 설명은 각 경론마다 다양하며,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권135에서는 중간겁(中間劫)·성괴겁(成壞劫)·대겁

(大劫)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高26, p.1031b9-10; 大27, p.700c11).

110) 일념(一念)은 찰나 일념으로 한 순간이다. 찰나(刹那, ksana)는 극히 짧은 시

간, 순간을 의미하며, 염(念)·염경(念經)이라 한역한다.『대비바사론(大毘婆沙

論)』권136에 의하면, 120찰나는 1달찰나(怛刹那)이고 60달찰나는 1랍박(臘縛)

이며 30랍박은 1모호률다(牟呼栗多)이고 30모호률다는 1주야(晝夜)라고 하였

다.(高26, p.1032b4-8; 大27, p.701b8-11). 또 법장의『화엄경탐현기』권18

에 의하면, 찰나는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사이에 60찰나가 있으며, 120찰나를

1달찰나라고 하고 60달찰나를 1라바(羅婆)라고 하며 30라바를 1마후투로(摩睺

妬路)라고 하는데, 마후투로는 중국 말로 ‘수유(須臾)’라고 번역하며, 30마후투

로는 하루[一日一夜]라고 하였다.(高47, p.786a27-b2; 大35, p.458b24-28).

「진기」111)

111)『총수록』(韓6, p.781c10-17; 高45, p.155a19-b3).

‘십세’란 혹은 제십세(第十世)라 하니, 말하자면 총상의 순간[念]을 말하

기 때문이고, 혹은 십세라고 하니, 말하자면 총별을 합하여 들기 때문이다.

묻는다. 총상의 일세(一世)가 현재의 일념을 취하면 별상(別相)의 세

(世)는 오직 여덟인가?

답한다. 현재의 일념을 기준으로 하여 현재의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면

전후가 상대하여 별상의 가운데 서기 때문에 별상의 세(世)는 아홉이지

여덟이 아니며, 전후를 바라보지 않고 총괄적으로 포함하여 상대를 끊으

면 총상의 제십세가 된다.

‘十世’者, 一云第十世也, 謂摠相念故, 一云十世也, 謂摠別合

擧故.

問. 摠相一世取現在一念者, 別相之世, 唯是八耶?

答. 約現在一念, 望現在之過未, 則前後相對, 而立別相之

中, 故別相之世, 是九非八, 不望前後統包絶待, 則爲摠相第

十世也.

「대기」112)

112)『총수록』(韓6, pp.781c18-782a2; 高45, p.155b4-7).

구세가 즉입(卽入)113)하여 십세를 이루는가? 십세를 기준으로 하여 다

시 즉입을 논하는가?

답한다. 두 가지 뜻을 다 얻는다. 그러므로 법장[康藏]스님이 말하기를,

“그러나 이 구세가 번갈아 서로 즉입하므로 하나의 총체적인 구(句)를 이

루고, 총과 별이 합하여 십세를 이룬다. 이 십세가 다름을 갖추어서 동시

에 현현하여 연기를 이루므로 상입한다”114)라고 하였다.

해석하여 말하기를, 처음 해석은 구세가 즉입하여 십세를 이루는 것이

고, 뒤의 해석은 십세를 기준으로 하여 지금 서로 즉입하는 것이다.

九世卽入成十世耶? 爲約十世更論卽入耶?

答. 二義並得. 故康藏云,“ 然此九世迭相卽入故, 成一摠句,

摠別合成十世也. 此十世具足別異, 同時現現成緣起故, 得相

入也.”

解云, 初釋, 九世卽入115)成十世也, 後釋, 約十世今相卽入也.

113) 즉입(卽入)은 상즉상입(相卽相入)을 말한다. 즉하고 입한다는 의미이다.

114) 법장,『화엄오교장』 권4(大45, p.506c20-22).

115) 법장,『화엄오교장』 권4(大45, p.506c22)에는「卽入」으로 되어 있다.

원통기(圓通記)116)

116) 균여,『원통기』(韓4, p.8c15).

“다음 4구는 때[世時]를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한을 보인다”

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다.]

묻는다. 구세가 즉입하여 이미 십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다시 십세를 기

준으로 하여 또한 즉입함이 있는가?

답한다. 있다. 「의리장(義理章)」117)에 말하기를, “그러나 이 구세가 번갈

아 서로 즉입하여 하나의 총체적인 구를 이루고, 총과 별이 합하여 십세를

이룬다. 이 십세가 다름을 갖추어서 동시에 현현하여 연기를 이루므로 상

입한다.”118)〈이상〉

次四句, 約世時, 示攝法分齊者.

問. 九世卽入, 旣成十世, 然更約十世亦有卽入耶?

答. 有也. 義理章云, “然此九世迭相卽入, 成一摠句, 摠別合成

十世, 此十世具足別異, 同時現現成緣起故, 得相入也.”〈已上〉

117)「의리장(義理章)」은『화엄일승교의분제장』가운데 열 번째인 의리분제(義理分

齊) 부분을 가리킨다.

118) 법장,『화엄오교장』권4(大45, p.506c20-22).

처음 해석은, 구세가 즉입하여 십세를 이루는 것이고, 뒤의 해석은 다시

십세를 들어 즉입을 변별한다. 티끌과 시방, 구세와 십세는 모두 즉입의

뜻을 갖춘다. 그러나 티끌과 시방은 곧 상입[相容]의 뜻이 더하고, 구세와

십세는 곧 상즉의 뜻이 더한다. 그러므로 사(事)를 기준으로 하는 가운데

상입을 들고 때[世時]를 기준으로 하는 가운데 상즉을 든다.

묻는다. ‘그로 인해 뒤섞여 어지럽지 않고 나뉘어져 따로 이룬다’라고

한 것은 앞의 ‘사(事)를 기준으로 한 것’과 ‘때를 기준으로 한 것’의 두 문

을 통틀어 바라보아서 말한 것인가?

답한다. 이미 분과하여 말하기를, “다음 4구는 때를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한을 보인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오직 구세와 십세가 서로

즉하는 등을 바라보아, ‘십세가 법과 떨어져서 다르게 이루는 문’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나뉘어져 따로 이룬다’고 한다.

初釋, 九世卽入成十世, 後釋, 更擧十世辨卽入也, 塵與十方,

九世與十世, 皆具卽入義, 然塵與十方, 則相容義增, 九世與十

世, 則相卽義增. 故約事中擧相入, 約世時中擧相卽也.

問.‘ 仍不雜亂隔別成’者, 通望前‘約事’與‘約世’二門云耶?

答. 旣科云,“ 次四句, 約世時, 示攝法分齊.” 是故, 唯望九世

十世互相卽等, 約十世隔法異成門之義, 云隔別成也.

법계도주(法界圖註)

한량없는 먼 겁이 곧 일념이고 [無量遠刧即一念]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미세한 티끌과 시방이 자성의 체(體)와 상(相)이

없기 때문에, 일체 고금의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처음 발심함을 좇아 보현

의 원(願)을 세워 미래가 다하도록 지금을 여의지 않는다. 혹은 기침 소리

한 번이나 혹은 손가락 튕기는 것 한 번에서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빡

임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처의 방편 아님이 없다. 자, 말해보라. 자세히 알

고 있는가?

이 자리를 여의지 않고 늘 맑으니

찾으면 알 수 있으나 볼 수 없다.119)

如前所說微塵十方, 無有自性體相故, 一切古今, 三世諸佛,

從初發心立普賢願120), 窮未來際, 不離如今, 或謦欬一聲, 或

彈指一下, 乃至揚121)眉瞬目, 無不是諸佛方便. 且道. 還相委122)

悉麽?

不離當處常湛然, 覓則知君不可見.123)

119)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의『증도가』의 한 구절이다(大48, p.396b12-13).

120) 저본에는「顧」로 되어 있으나 을본과 병본에 따라「願」으로 바꾸었다.

121) 저본에는「楊」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과 병본에 따라「揚」으로 바꾸었다.

122) 저본에는「逶」로 되어 있으나 을본과 병본에 따라「委」로 바꾸었다.

123) 저본에는「見」 다음에 「一」이 있으나 병본과 『증도가』에 따라「一」을 삭제

하였다.

일념이 곧 한량없는 먼 겁이다. [一念卽是無量]

바로 지금의 일념이 십세에 걸쳐 통하고 횡(橫)으로 시방에 두루하니

일체 모든 부처님을 세우면서 동시에 중생을 제도하고 일체 중생을 늘어

세우면서 동시에 멸도한다. 옛날도 아니고 지금도 아니며 새로움도 아니

고 오래됨도 아니다. 자, 말해보라. 한량없는 오랜 겁에 도리어 시분(時分)

이 있는가?

그림자 없는 나무 밑에서 다 같이 배에 오르니

유리 궁전 위에 아는 이가 없도다.124)

即今一念, 亘徹十世, 橫遍十方, 建立一切諸佛, 同時度生,

行布一切衆生, 同時滅度, 非古非今, 非新非舊. 且道. 無量

遠刦125)還有時分也無?

無影樹下合同舩, 溜殿上無知識.

124)『경덕전등록』권5서경광택사혜충국사(西京光宅寺慧忠國師)」조에 나오는 게

송이다(大51, p.245a3-13). 당나라 남양혜충(南陽慧忠, ?~775) 국사가 열반에

들 무렵 대종(代宗, 726-779, 재위 762-779)이 국사가 입적한 다음에 제자들은

무엇으로 국사를 기억하느냐고 묻자, 국사가 ‘기워서 이음새 없는 탑[無縫塔]’을

지어달라고 했다. 왕이 다시 탑의 모양을 묻자 국사는 제자인 탐원응진(眈源應眞,

800년 경)에게 물어보라고 대답하였다. 이윽고 국사가 입적하자 왕이 탐원응진

에게 다시 물으니 응진이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소상강의 남쪽이

요 동정호의 북쪽이니, 그 안에 황금이 온 나라에 가득하도다. 그림자 없는 나무

밑에서 다같이 배에 오르니 유리 궁전 위에 아는 이가 없도다.”(湘之南, 潭之北,

中有黃金充一國. 無影樹下合同船, 瑠璃殿上無知識.) 이 이야기는 ‘혜충국사의 이음

새 없는 탑[忠國無縫]’, 또는 ‘국사의 탑 모양[國師塔樣]’이라는 화두로 『종용록』

‘85칙’(大48, p.281c22-25),『벽암록』‘18칙’(大48, p.158a1-3),『선문염송』

‘146칙’(高46, pp.66b16-67a1; 韓5, p.145b5-14) 등에 전한다.

125)「刦」은「劫」의 본래 글자이다. 서로 통용하여 사용된다.

구세(九世)와 십세(十世)가 서로 상즉하면서도 [九世十世互相即]

일념과 많은 겁이 동시여서 걸림 없는 까닭에, 삼세 가운데 각각 삼세를

갖추었으나 평등한 [일]세에 융합하고, 법과 법이 상주하나 서로 통하여

걸림 없다.

一念多刦, 同時無碍故, 三世中, 各具三世, 而融於平等之世,

法法常住交徹無碍.

그로 인해 혼잡하지 않고 나뉘어져 따로 이룬다. [仍不雜亂隔別成]

체(體)가 있으면 곧 섞임이 있고 상(相)이 있으면 곧 어지러움이 있다.

체가 없으면 곧 상이 없는 까닭에 무용(無用)이 용(用)이 되고, 무용이 용

(用)이 되는 까닭에 그 용(用)이 다함이 없다. 삼세를 건립함 또한 나에게

달려 있고 한 순간에 모아 포섭함 또한 나에게 달려 있으니, 삼세(三世)가

일시(一時)이고 일시가 삼세이다. 예전과 다르지 않으면서 바로 새로움이

며 새로움과 다르지 않으면서 바로 예전이니, 일체(一體)로 뻗쳐 있어 예

전과 지금에 사이가 없다.

소림의 소식이 끊어졌나 했더니

복숭아꽃은 여전히 봄바람에 웃고 있네.126)

有體則有雜, 有相則有亂. 無體則無相故, 無用爲用, 無用爲用

故, 其用不窮. 建立三世亦在我, 收攝一念亦在我, 三世一時,

一時三世. 不異古而即新, 不異新而是古, 一體亘然古今無間.

將謂少林消息斷, 桃花依舊笑春風.

126) 부용도해(芙蓉道楷, 1043~1118)의 가풍을 잘 드러내는 다섯 수의 시 중에서 ‘옛

과 지금에 사이가 없다[古今無間]’는 제목의 게송의 일부이다. 게송 전체는 “한

법은 원래 없고 만법은 공한데 그 가운데에 어느 것이 원통을 깨달은 것인가?

소림의 소식이 끊어졌나 했더니 복숭아꽃은 여전히 봄바람에 웃고 있네.”(一法

元無萬法空, 箇中那許悟圓通? 將謂少林消息斷, 桃花依舊笑春風.)이다. 각범혜홍(覺

範慧洪, 1071~1128)의『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권17(卍137, p.513b6-8), 뇌암정

수(雷庵正受, 1146~1208)의『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권29(卍137, p.409a5-7), 원

극거정(圓極居頂, ?~1404)의『속전등록(續傳燈錄)』권10(大51, p.524a14-16) 등에

서 부용도해의 종풍을 잘 알게 하는 게송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처음 발심할 때가 곧 정각이며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常共和.

총수록(叢髓錄)

「법기」127)

127)『총수록』(韓6, p.783a20-b9; 高45, p.157a1-9).

묻는다. 무엇 때문에 ‘구세와 십세가 상즉한다’는 다음에 ‘처음 발심할

때에 곧 정각을 이룬다’는 뜻을 설하는가?

답한다. 증분의 법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혹 어떤 수행인이 이것을

분간하지 못하므로 이 사람을 위하여 증분의 법성을 바꾸어 이것을 보이

며 말하기를, “하나가 자성이 없으니 일체로써 성품[性]을 삼고, 하나의 티

끌에 자성이 없으니 시방으로 성품을 삼으며, 한량없는 겁이 자성이 없으

니 일념으로 성품을 삼고, 일념이 자성이 없으니 한량없는 겁으로 성품을

삼으니, 이와 같은 것을 ‘매우 깊은 진성’이라 이름한다”라고 한다.

問. 何故,‘ 九世十世相卽’之次, 說‘初發心時便成正覺’之

義耶?

答. 訂分之法, 不可得故. 或有行人, 於此無分故, 爲此人, 以

訂分之法性轉示之, 云“一無自性, 以一切爲性, 一塵無自性,

以十方爲性, 無量劫無自性, 以一念爲性, 一念無自性, 以無量

劫爲性, 如是名爲甚深眞性也.”

행인이 생각해서 말하기를, “이미 진성은 알겠는데, 어떻게 하면 증득할

수 있는가?”라고 하므로 다시 가르쳐서 말하였다. “요컨대 마땅히 이 진

성으로 마음을 삼아서 일으켜야 한다. 여기에서 행인이 이와 같이 일으키

기 때문에 마음을 일으킨 것이 곧 불과(佛果)를 만족히 한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열반에 머무는 때에 항상 생사에 노닐고, 생사에 노니는 때에 항상

열반에 머물기 때문에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라고 하였다.”

行人意謂,“ 已知眞性, 如何得訂?” 故復誨云.“ 要當以此眞

性爲心而發. 於是行人如是而發, 故發心卽滿果也. 是故住涅

槃時, 常遊生死, 遊生死時, 常住涅槃, 故云‘生死涅槃常共

和’也.” 

「진기」128)

128)『총수록』(韓6, p.783b19-c7; 高45, p.157a15-b2).

‘처음 발심할 때가 곧 정각이다’란, 동교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삼현

십지(三賢十地)129) 가운데 십해(十解)130)의 초발심주(初發心住)131)에서 부

처를 완전히 이루고, 다시 치지주(治地住)132) 등에서 부처를 완전히 이루

니, 이는 밝음과 어둠의 차이는 없으나 [지위에] 맡겨서 나타난 것이다. 만

약 별교(別敎)에서라면 곧 나의 몸과 마음을 이름하여 정각(正覺)이라고

할 뿐이니, 십해(十解)의 지위에 맡김이 없다.

‘初發心時便正覺’者, 約同敎云, 三賢十地中, 十解初發心住

成滿佛, 復治地住等成滿佛, 此無明昧之殊, 然寄現也. 若自別

敎, 卽吾身心, 名正覺耳, 無寄十解位也.

129) 삼현십지(三賢十地)는 대승보살의 수행계위를 구분한 것이다. 삼현은 십주(十

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을 말하고, 십지는 십성(十聖)이라고도 한다. 화

엄교학에서는 수행 계위를 등각(等覺)·묘각(妙覺)을 합하여 총 42위(位)로 설

정하고 있으니, 제10지(地)를 지나면 등각·묘각의 불과(佛果)의 자리이다. 또는

삼현 이전의 십신(十信)을 합하여 52위로 보기도 한다.

130) 십해(十解)는 십주(十住)를 말한다. 보살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 집에 머물며 그

가 머무는 곳은 넓고 커서 법계와 허공과 같다. 십주는 이 보살이 머무는 열 가

지로서, 초발심주(初發心住)·치지주(治地住)·수행주(修行住)·생귀주(生貴

住)·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정심주(正心住)·불퇴주(不退住)·동진주(童眞

住)·법왕자주(法王子住)·관정주(灌頂住)이다.[『육십화엄(六十華嚴)』권8

「보살십주품(菩薩十住品)」(高8, p.54b13-15; 大9, p.444c28-445a1)].

131) 발심주(發心住)는 초발심주(初發心住)라고도 한다. 십주 중에 첫 번째 계위에 해

당한다. 보살 수행의 42위 중 첫 번째이며, 52위 중 열한 번째에 해당한다. 발심

주는 보살이 신심이 원만구족해서 처음 발심하는 자리이므로 초발심주라 한다.

초발심주에서는 발심의 인(因)이 되는 10법과 발심의 연(緣), 그리고 구체적인

수행으로서 10법이 설해지고 있다. 발심의 인(因)이 되는 10법은 초발심주의 보

살이 부처님이 갖추신 삼십이상과 팔십종호의 묘한 모습과 존귀하여 만나기 어

려움을 보거나, 혹은 그 신통 변화를 보거나, 그 설법과 교훈을 듣거나, 혹은 중

생들이 무한한 고통 받음을 보거나, 여래의 광대한 설법을 듣고 보리심을 내어

일체지(一切智)를 구하되 조금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다. 발심의 연(緣)인 여래

의 열 가지 수승한 지혜는 옳고 그름을 아는 지혜, 업보의 더럽고 깨끗함을 아는

지혜, 모든 근성을 아는 지혜, 즐거워함을 아는 지혜, 성품을 아는 지혜, 이룰 모

든 길을 아는 지혜, 모든 선정과 해탈의 더럽고 깨끗함을 일으키는 것을 아는 지

혜, 숙명을 걸림 없이 아는 지혜, 천안의 걸림없는 지혜, 삼세의 번뇌가 다하는

지혜이다. 그리고 수행방편으로서 배워야 할 10법은 부처님을 공경 공양하고

보살들을 찬탄하며, 중생들 마음을 단속하고 어진 사람을 친하며, 물러나지 않

는 법을 찬탄하고 부처의 공덕을 닦으며, 부처님 앞에 나는 것을 찬탄하고 방편

으로 삼매를 닦아 익히며, 생사에서 헤맴을 멀리 여의는 것을 찬탄하고 괴로워

하는 중생의 귀의하는 곳이 되는 것이다.[『육십화엄(六十華嚴)』권8「보살십

주품(菩薩十住品)」(高8, p.54b17-c7; 大9, p.445a3-18)].

132) 치지주(治地住)는 십주 중에 두 번째로서, 항상 공관(空觀)을 닦아 심지(心地)를

청정하게 다스리는 지위이다. 치지주에서 보살은 일체 중생에 대해 크게 인자

한 마음,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 즐겁게 하려는 마음, 편히 머물게 하려는 마

음, 기뻐하게 하려는 마음, 중생을 건지려는 마음, 중생을 수호하려는 마음, 내

몸처럼 여기는 마음, 스승처럼 여기는 마음, 여래처럼 여기는 마음 등 열 가지

마음을 낸다. 또한 치지주의 보살은 일체 중생에 대해 큰 자비심을 늘게 하며,

법을 듣고는 곧 스스로 깨닫고 남의 깨우침을 의지하지 않게 하려 하기 때문에

열 가지의 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 열 가지란 먼저 부지런히 배워 오로지 많이

듣기를 구하고, 탐욕을 떠나 선정을 닦으며, 선지식을 친하여 그 가르침을 어기

지 않고, 때를 잘 알아 말하며, 두려움 없기를 배우고, 깊은 이치를 밝게 알며, 바

른 법을 환히 통달하고, 견고한 법의 행을 알며, 어리석음을 멀리 떠나고, 편히

머물러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육십화엄(六十華嚴)』권8「보살십주품(菩薩

十住品)」(高8, p.54c8-17; 大9, p.445a19-28)].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란, 만약 지위[位]에 맡겨 말한다면 적멸

한 열반의 체가 연(緣)을 좇아 생사를 이루니, 생사를 이루는 때가 곧 성

품이 청정한 열반의 체(體)이기 때문이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곧 생사

와 열반이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연(緣)에 있

다. 무엇 때문인가? 생사의 연(緣)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곧 열반을 갖추

고, 열반의 연(緣)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곧 생사를 갖추기 때문이다.

묻는다. 무엇이 생사이고, 무엇이 열반인가?

답한다. 생사가 곧 그대의 몸이며, 열반이 곧 그대의 몸이다.

生死涅槃常共和者, 若寄位云, 寂滅涅槃之體, 從緣成生死, 成

生死時, 卽性淨涅槃之體故也. 約一乘, 則生死涅槃, 非本自

有, 在吾須緣. 何者? 須生死緣中, 卽具涅槃, 須涅槃緣中, 卽

具生死故也.

問. 何者生死? 何者涅槃?

答. 生死卽汝身, 涅槃卽汝身.

「대기」133)

133)『총수록』(韓6, p.784a22-b24; 高45, p.158a6-b2).

‘처음 발심할 때’ 등은 이십이위(二十二位) 중에 어느 한 지위를 따라 선

악(善惡)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처음 발심(發心)함으로 삼으니, 바로 이

것이 곧 정각(正覺)이다.

묻는다.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발심정각을 삼는 것은 괜찮지

만, 어찌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처음 발심함을 삼으며, 또한 정

각이라 하겠는가?

답한다. 머무름 없는 별교를 기준으로 하면 이십이위(二十二位)가 다 머

무름 없는 지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 때에

곧 마지막 불과(佛果)를 거두어들임에 이르기 때문이다.

‘初發心時’等者, 二十二位之中, 隨何一位, 起善惡心, 爲初發

心, 卽是便正覺也.

問. 以起善心爲發心正覺者, 可也, 何以起惡心爲初發心, 亦正

覺耶?

答. 約無住別敎, 則二十二位, 皆是無住之位. 故始起惡心之

時, 乃至攝於後際佛果故也.

묻는다. 만약 그렇다면 머무름 없는 별교 가운데도 또한 이와 같은 발심

정각의 뜻이 있는가?

답한다. 어느 위(位)를 따라 선악의 마음을 일으켜, 문득 정각을 이룬다

는 것은 먼저는 미혹하다가 나중에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본

래 깨달음이므로 ‘정각’이라 할 뿐이다.

問. 若爾, 無住別敎中, 亦有如是發心正覺之義耶?

答. 隨於何位, 起善惡心, 便正覺者, 非謂先迷後覺, 但本來覺,

故云‘正覺’耳.

‘생사와 열반’ 등은 이십이위(二十二位) 중의 삼도(三途)134)·오승(五

乘)135) 등이 가진 모든 분단(分段)136)·변역(變易)137)과 원교(圓敎) 중의 분

단·변역138)을 합하여 취해서 생사 쪽[邊]으로 삼고, 그 가운데 있는 두 가

지의 네 열반[四涅槃]139)과 열 가지 열반[十涅槃]140)을 합하여 취해서 열반

쪽으로 삼는 것이니, 이 둘은 서로 알지 못하며, 하나로서 무분별이다. 그

러므로 ‘항상 함께이다’고 하였다.

‘生死涅槃’等者, 二十二位中, 三途五乘等所有分段變易, 及圓

敎中分段變易, 合取爲生死邊, 其中所有二四涅槃, 及十涅槃,

合取爲涅槃邊, 此二互不相知, 一無分別, 故云‘常共和’也.

134) 삼도(三途, tryapāya)는 육도 중에 세 가지 나쁜 세계(三惡道, tryapāya)로서,

악업에 의해 태어나게 되는 지옥(地獄, naraka)·아귀(餓鬼, preta)·축생(畜

生, tiryañc)의 세계를 말한다. 삼악취(三惡趣, trividhā durgatih)라고도 하니,

‘취(趣)’란 업에 의해 이끌려 가는 장소의 생존 상태를 뜻한다.

135) 오승(五乘)의 승(乘, yāna)은 ‘실어 나른다’는 뜻으로서, 중생을 교화하여 피안

으로 이끄는 다섯 가지 법문(法門)을 말한다. 오승은『총수록』에 의하면 삼승(三

乘)·소승(小乘)·인천승(人天乘)이고(韓6, p.824c20-21; 高45, p.203a1), 법장의

『화엄오교장』권1에 의하면 일승(一乘)·보살승(菩薩乘)·연각승(緣覺乘)·성문

승(聲聞乘)·소승(小乘)의 다섯 가지이다.(大45, p.479c10-11).

136) 분단(分段)은 분단생사(分段生死, pariccheda cyutih)의 줄임말이다. 변역생사

(變易生死)와 함께 두 가지 생사를 이룬다. 분단생사란 삼계를 윤회하는 중생의

생사를 말하는데, 이들의 생사에는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수명·모습 등에 차

이가 있기 때문에 이를 분단생사라 한다. 혜원(慧遠)의 『대승의장(大乘義章)』

8에는 “분단이란 육도의 과보가 삼세로 나뉘어져 다르게 되는 것을 분단이라

하며, 분단의 존재[法]가 처음 일어나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마지막 흩어지는

것을 사(死)라고 한다.”(大44, p.615c4-6. 言分段者, 六道果報三世分異, 名爲分

段, 分段之法, 始起名生, 終謝稱死.)고 하였다.

137) 변역(變易)은 변역생사(變易生死, pārīnāmikī cyutih)를 말한다. 삼계 안에서 생

사윤회하는 몸을 여읜 이후부터 성불에 이르기 전까지의 성자(聖者)들이 수행

하는 삼계 밖의 생사를 일컫는 말이다. 분단생사(分段生死)하는 거칠고 하열한

몸을 변화하여 미세하고 미묘하며 몸의 형태·수명 등에 한정을 갖지 않는 몸을

받기 때문에 ‘변역’이라 하며, 일정한 수명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질적인

의미에서 생사를 거듭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부사의번역생사(不思議變易生

死)’라고도 하는데,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의 선정력과 서원의 힘에 의해 미묘

한 작용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인 몸을 받기 때문에 ‘부사의’라고 한다. 변역생

사의 종류와 수행 계위와의 관계 등은 경론이나 학파에 따라 차이가 있다.『승

만경(勝鬘經)』에서는 “부사의변역사는 아라한·벽지불·대력(大力)보살의 의생

신(意生身), 나아가 구경(究竟)의 위없는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를 말한다.”(高6,

p.1365a2-4; 大12, p.219c22-23. 不思議變易死者, 謂阿羅漢辟支佛大力菩薩

意生身, 乃至究竟無上菩提.)고 하였다.『성유식론(成唯識論)』권8에서는 “부

사의변역생사는 모든 무루의 유분별의 업이 소지장(所知障)의 연이 돕는 세력에

의해 감응된, 뛰어나고 미세한 이숙(異熟)을 말한다. 자비와 서원의 힘으로 말미

암아 몸과 목숨을 바꾸어서 결정적인 제한이 없는 까닭에 변역이라 이름하고,

무루 선정의 원(願)이 바로 자량으로 감(感)하는 바 묘용을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부사의라 이름한다.”(高17, p.574b7-11; 大31, p.45a17-21. 不思議變易生死,

謂諸無漏有分別業, 由所知障緣助勢力所感殊勝細異熟果. 由悲願力, 改轉身命,

無定齊限故, 名變易, 無漏定願正所資感妙用難測, 名不思議.)고 하였다. 또한 길

장(吉藏)은『승만보굴(勝鬘寶窟)』중권에서 “변역이란 몸의 형태의 구별이나

수명의 길고 짧음이 없고 다만 심신(心神)이 생각생각에 서로 전하면서 앞에서

변하고 뒤에서 바뀌는 것이다.”(大37, p.48c4-6. 言變易者, 無復色形區別壽期

短長, 但以心神念念相傳, 前變後易也.)라고 하였다.

138) 원교 중의 분단·변역은 삼도·오승 등이 가진 분단·변역과 차이가 있다. 법장

의『화엄경탐현기』권6에 의하면, 일승의 경우에는 분단과 변역에 대해 두 가

지 설이 있다고 하였다. 그 첫째로, 방편을 포섭하는 입장[攝方便]에서 말한다

십지 이전이나 십지 이상에 모두 변역이 있으니, 하나하나의 계위는 마침내

불지(佛地)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만약 화엄교[自敎]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모두 분단이다. 또한 선재동자는 분단신(分段身)으로써 보현위(普賢

位)에 이르렀으나 모두 법문에 즉하는 분단이기 때문에 과환(過患)이 아니라고

하였다.(高47, p.572b18-23; 大35, p.229b5-11).

139) 네 열반은 이십이위(二十二位) 중의 분단·변역과 원교 중의 분단·변역 생사를

초월한 경계를 말한다.

140) 열 가지 열반은『화엄경(華嚴經)』권43「이세간품(離世間品)」에 설해져 있는데,

여래가 열 가지 뜻이 있어서 대반열반(大般涅槃)을 나타내 보이는 경문에 나온

다.(高8 p.299a18-b9, 大9 p.669a26-b12).

묻는다. 그렇다면 생사는 싫어할 바가 아닌데 무엇 때문에 지상(至

相)141)은 “육도인과(六道因果)는 싫어함을 의지하여 벗어남을 구한다”142)

하였는가?

답한다. 이승 등의 모든 유정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 말을 할 뿐이다.

만약 보현문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모두 실제 스스로의 덕이며 다시 다른

일은 없다고 할 것이다.

묻는다. 만약 그렇다면, 삼도(三途)의 원인[因]인 십악(十惡) 등의 업

(業)이 닦는 대상이 되는가?

답한다. 실(實)을 기준으로 하면 그렇다. 그러므로 만족왕선지식[滿足王

知識]143)의 일 등이 실법문이다.

問. 然則生死非所厭, 何故, 至相云,“ 六道因果依厭求脫耶?”

答. 望二乘等諸有情故, 作是說耳. 若約普賢門云, 皆實自德,

更無異事也.

問. 若爾, 三途之因十惡等業, 爲所修耶?

答. 約實則爾. 是故, 滿足王知識事等, 是實法門也.

141) 지상(至相)은 지엄을 가리킨다. 중국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머물렀기 때문에

지엄의 호를 지상이라고 한다. 종남산은 해발 2천여 미터로 장안이 내려다보이

는 곳이며, 지상사는 북주(北周) 무제의 파불 때(574~579) 2백만여 승려들이 환

속조치를 피하려 들어갔던 곳이기도 하다. 지엄은 이곳에서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폈으며, 의상도 지상사 지엄의 문하에서 화엄의 현묘한 뜻을 공부하고(『삼

국유사(三國遺事)』, 韓6, p.348c1-11), 총장(總章) 원년(668) 7월 15일에『일승

계도』를 지었다.

142) 이 구절은 지엄의『오십요문답(五十要問答)』에서 육도인과(六道因果)를 설명하

는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오십요문답』에는 “묻는다. 육도인과는 본래 성인의

지위가 아닌데 무엇 때문에 거두어 보현문 가운데 두는가? 답한다. 육도인과는

성인의 법에 위배되는 것이나, 보현 방편으로 돌이켜 도에 위반하는 행 및 역행

하는 문을 이루고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방편으로 싫어함을 의지하여 해탈을

얻게 하는 까닭이다.”(大45, p.522b24-26. 問. 六道因果, 本非聖位, 因何攝在普

賢門中? 答. 六道因果, 是背聖法, 普賢方便迴成返道行及逆行門, 令諸有情, 方便

依厭得解脫故.)라고 되어 있다.

143) 만족왕선지식[滿足王知識, Anala]은『육십화엄(六十華嚴)』권49「입법계품(入

法界品)」의 53선지식 중에서 18번째 선지식이다.[『육십화엄(六十華嚴)』(高8,

pp.339c16-340c3; 大9, pp.708a27-709a3)]『팔십화엄(八十華嚴)』권66「입

법계품(入法界品)」(高8, p.841c24; 大10, p.355b1)에는 ‘무염족왕(無厭足王)’

으로 번역되어 있고,『화엄경(華嚴經)』(40권) 권11「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

원품(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高36, p.62c23; 大10, 712b20)에는 ‘감

로화왕(甘露火王)’으로 번역되어 있다.『신화엄경론』권36에 “무염족왕이라

이름한 것은 중생을 이익되게 함에 싫증내지 않기 때문이다.”(高36, p.542c12;

大36, p.971c15-16. 王名無厭足者, 利生無厭故.)라고 하였다. 만족왕은 벌할

자는 벌하고 포섭할 자는 포섭하며 열 가지 선업을 찬탄하는 등 왕법(王法)을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는데, 왕법을 범한 사람들은 손과 발을 끊고 목을 베는

등 지독한 고통으로 다스렸다. 신(身)·구(口)·의(意) 삼업으로 심지어 개미 새

끼에 대해서도 해치려는 마음을 내지 않는 만족왕이 고통스런 도구로 악을

다스려 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살생하고 도둑질하는 등 악업을 행하는

중생들이 열 가지 착하지 않은 길[十不善道]과 일체의 악을 버리고, 열 가지

선(善)을 행하여 궁극의 즐거움을 얻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어 일체

지(一切智)를 갖추게 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高8, pp.339c23-340b18;

大9, pp.708b7-c23).

묻는다. 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허깨비와 같은 법문[如幻法門]’144)

등이라 하였는가?

답한다. 다만 삼승의 모양을 따라 이와 같이 말하였을 뿐이다. 또 죄와

복이라 말한 것은 나와 남을 실제로 집착하는 지위를 기준으로 하여 말했

을 뿐이다. 만약 이러한 집착을 떠난다면 모든 죄와 복이 허깨비[幻] 같고

공(空)과 같으니, 이와 같은 법 중에 무슨 죄와 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허깨비’라 한다.

問. 若爾者, 何故, 云‘如幻法門’等耶?

答. 但隨三乘相, 如是云耳. 又言罪福者, 約我人實執位云耳.

若離此執, 一切罪福, 如幻如空, 如是法中, 有何罪福? 故云

‘幻’也.

144)『육십화엄(六十華嚴)』본문에는 ‘보살환화법문(菩薩幻化法門)’이라 되어 있다.

만족왕은 ‘보살환화법문’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변화로 중생들을 구제한다. 만

족왕이 행하는 그 갖가지 괴로운 다스림은 변화로 만든 것으로서, 이는 만족왕

이 보살환화법문을 성취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만족왕은 선재동자에게 자신

은 오직 이 환화 법문밖에 모른다고 하고, 위대한 보살들은 무생법인(無生法忍)

을 얻어 일체의 존재는 다 요술과 같음을 알고 보살의 행은 다 변화와 같음을

알며, 일체 세간은 다 번갯불과 같음을 알고 일체 모든 법은 다 꿈과 같음을 알

고서 걸림없는 법계에 깊이 들어가 보살의 묘한 행을 갖추고 경계가 걸림이 없

어 일체의 행을 다 포섭하며 무량한 선(旋)다라니에서 자재를 얻었다고 찬탄하

고는 남방의 선광성(善光城)에 사는 대광왕(大光王)을 찾아가서 그에게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보살도를 닦는가를 물으라고 인도한다.(高8, p.340b18-c1; 大9,

pp.708c23-709a2).

원통기(圓通記)145)

145) 균여,『원통기』(韓4, p.9a9-16).

“다음 2구는 계위를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한을 밝힌 것이

다”146)라고 한 것은 처음 발심함과 정각, 생사와 열반이 모두 지위인 까닭

이다.

묻는다. ‘처음 발심할 때 곧 정각을 이룬다’라는 것은 구경의 과(果)

인가?

답한다. 그렇다. 도주(圖主)147) 등이 옛 사람의 인(因) 가운데 과(果)를

설함을 가려내버리니, 이법이 평등한 것을 기준으로 하여 이해해서 부처

님의 경계와 같아 동등하게 해석하면 삼승이 되고,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연기 법문이 처음과 끝을 구족하여 처음을 얻으면 곧 끝을 얻어 마지막이

비로소 처음이므로 구경의 과(果)이다.

“次二句, 約位以彰攝法分齊”者, 初發心與正覺, 生死與涅槃,

皆是位故也.

問. 初發心時便成正覺者, 究竟果耶?

答. 爾也. 以圖主等, 簡去古人因中說果, 約理平等解, 同佛境

等釋以爲三乘, 約一乘, 則緣起法門, 始終具足, 得始卽得終,

窮終方原始, 故究竟果也.

146) 의상,『일승법계도』(韓2, p.2c21-3a1).

147) 도주(圖主)는『일승법계도』를 지은 의상을 말한다.

법계도주(法界圖註)

처음 발심할 때가 곧 정각이며 [初發心時便正覺]

진성이 남[生]이 없고 자성이 없으며 연기도 없어 서로 마주함이 끊어

짐을 확연히 알아서, 이와 같이 발심하고 이와 같이 행리(行李)148)하는 까

닭에 처음 발심할 때에 원만하고 원만한 과해를 이미 두루 마친 것이다.

이른바 “선재동자가 법계를 여의지 않고서 백 개의 성을 두루 지나며, 초

심을 뛰어넘지 않고서 바로 누각에 올랐다.”149)는 말이 바야흐로 사실이다.

장안의 좋은 풍류 논하지 말라.

편의를 얻는 것이 편의에 떨어지는 것이다.150)

了知眞性, 無生, 無自性, 無緣起, 絶對待, 如是而發心, 如是

而行李, 故初發心時, 圓圓果海, 已遍了也. 所謂,“ 善財童子,

不離法界, 遍歷百城, 不越初心, 便登樓閣,” 方信道.

休論長安好風流, 得便宜是落便宜.

148) 행리(行李)는 원래 여장(旅裝)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행리(行履)와 같은 말

로 쓰였다. 여기에는 차근차근 지나간다는 의미와 함께 이미 그 과정을 마쳤다

는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다. 설잠은 이어진 글에서 “처음 발심할 때에 원만하

고 원만한 과해를 이미 두루 마친 것이다”라고 하여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149)『화엄경(華嚴經)』「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선재동자가 문수(文殊)를 따라 발

심하여 점차 남쪽으로 가서 110개의 성을 지나며 선지식을 만나 뵙고 마지막에

미륵이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사이에 누각에 들어간 이야기를 가리킨다. 이 때 선

재는 지금까지 들었던 모든 선지식들의 법문을 문득 잊어버리고 다시 미륵의

가르침에 의하여 최초의 문수를 뵙고자 생각하자 문수가 멀리서 오른손을 펼쳐

110유순을 지나 선재동자의 정수리를 만졌다. 선재가 백여 개의 성을 두루 지났

으나 다시 최초의 문수를 만난다는 점과 마지막인 미륵을 만난 곳에서 문수가

손을 뻗쳐 선재의 정수리를 만진다는 점이 바로 “선재동자가 법계를 여의지 않

고서 백 개의 성을 두루 지나며, 초심을 뛰어넘지 않고서 바로 누각에 올랐다”

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선재의 모든 구법이 사실은 미동도 하지 않은 본래

자리이자 전체를 두루 다닌 자리인 것이다. 인과가 둘이 아닌 화엄의 상즉 경계

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150) 회암지소(晦巖智昭, 1200년 경)의『인천안목(人天眼目)』권2에 실린 대혜종고(大

慧宗杲, 1089~1163)의 게송 일부이다(大48, p.309c3-7).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 [生死涅槃常共和]

만약 생사를 논한다면 바로 이것이 보현의 경계이고, 만약 열반을 논한

다면 바로 이것이 속박된 윤회이다. 자, 말해보라. 열반과 윤회가 서로 떨

어진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무명의 실제 성품이 곧 불성이요,

환화의 헛된 몸이 곧 법신이다.151)

若論生死即是普賢境界, 若論涅槃即是具縛輪廻. 且道. 涅槃

與輪廻相去幾何?

無明實性即佛性, 幻化空身即法身.

151)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의『증도가』의 한 구절이다(大48, p.395c10).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으니,

열 부처님[十佛]과 보현[보살]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다.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총수록(叢髓錄)

「법기」152)

152)『총수록』(韓6, p.785a2-10; 高45, pp.158b17-159a1).

이 가운데 이(理)와 사(事)란 생사는 성품이 없으니 열반으로써 성품을

삼고 열반은 성품이 없으니 생사로써 성품을 삼는 것이니, 곧 생사와 열반

이 성품이 없는 것은 이(理)가 되고 성품이 없는 생사와 열반이 사(事)가

된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말하기를, “연기는 성품이 없으며 성품이 없는

연기이다”라고 하였다. 연기가 성품이 없는 것은 이(理)이고, 성품이 없는

연기는 사(事)이다. 이(理) 역시 진성의 이(理)이며, 사(事) 역시 진성의 사

(事)이다. 그러므로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라고 하니, 이는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경계이다.

此中理事者, 生死無性, 以涅槃爲性, 涅槃無性, 以生死爲性,

則生死涅槃之無性爲理, 無性之生死涅槃爲事. 故古人云, “緣

起無性, 無性緣起也.” 緣起無性是理, 無性緣起是事也. 理亦

眞性之理, 事亦眞性之事. 故云‘冥然無分別,’ 此是十佛普賢

境也.

「진기」153)

153)『총수록』(韓6, p.785a11-16; 高45, p.159a2-5).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다’ 등이란 총체적으로 위의 뜻을 밝히는 것

이니, 위에서 나타난 바는 비록 많은 법이 있다 하나 이(理)와 사(事)를 벗

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경계’라고 한 것은 [다

음과 같다.]

묻는다. 연기분은 오직 보현[보살]의 경계인데 어찌하여 열 부처님을

말하는가?

답한다.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는 마음과 보현[보살]의 마음이 그윽이

합하여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바로 보현[보살]을 취하고, 나누어지지

않는 뜻 가운데서 아울러 열 부처님을 들었을 뿐이다.

‘理事冥然’等者, 摠明上意, 上來所現, 雖有多法, 而不出理事

故也.‘ 十佛普賢境’者.

問. 緣起分唯普賢境, 何云十佛耶?

答. 佛外向心, 與普賢心, 冥合不分故, 正取普賢, 而不分義中,

幷擧十佛耳.

「대기」154)

154)『총수록』(韓6, p.785a17-b11; 高45, p.159a6-17).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다’ 등이란 증분과 교분[訂敎二分]의 대의를

통틀어 맺는 것인가, 오직 교분만인가?

답한다. 혹은 ‘통틀어 맺는다’라고 하니, 말하자면 아래 구절에서 ‘열 부

처님과 보현[보살]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혹은

‘오직 교분을 맺는다’라고 하니, 말하자면 증분을 맺으면서 ‘증득한 지혜

로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理事冥然’等者, 通結訂敎二分大意耶? 唯敎分耶?

答. 一云,‘ 通結也,’ 謂下句云,‘ 十佛普賢大人境’故. 一云,

‘唯結敎分,’ 謂訂分結云,‘ 訂智所知非餘境’故.

묻는다. 처음의 뜻 가운데서 어떤 것이 이(理)이고, 어떤 것이 사(事)

인가?

답한다. 증분은 이(理)이고 연기분은 사(事)이니, 곧 증분과 교분이 무

분별이다. 그러므로 아래 본문에서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은 옛부터 중도

이고, 하나로서 무분별이다’155)고 하였다. 또 증분을 기준으로 하면 부처님

의 증득한 마음으로 이(理)를 삼고 나타나는 바 세 가지 세간의 법으로 사

(事)를 삼는다. 또 연기분 중에서 머무름 없는 본법은 이(理)가 되고, 이십

이위(二十二位)는 사(事)가 된다. 그러므로 증분의 이(理)와 사(事)가 무분

별한 것은 열 부처님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며, 교분의 이(理)와 사(事)

가 무분별한 것은 보현[보살]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다. 이 뜻인즉 곧 증

분은 오직 열 부처님의 경계이고 교분 중에서는 열 부처님을 말하지 않은

것이니, 이른바 안으로 향하면 열 부처님이고 밖으로 향하면 보현[보살]

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안과 밖의 때를 통틀어 맺어서 이와 같이 말할

뿐이다.

問. 初意中, 何理何事耶?

答. 訂分理, 緣起分事也, 則訂敎無分別也. 故下文云,‘ 訂敎

兩法, 舊來中道, 一無分別也.’ 又約訂分, 以佛訂心爲理, 所

現三世間法爲事. 又緣起分中, 無住本法爲理, 二十二位爲事.

是故, 訂分理事無分別者, 十佛大人境, 敎分理事無分別者,

普賢大人境也. 此意則訂分, 唯是十佛之境, 敎分之中, 不言

十佛也, 謂內向則十佛, 外向則普賢故. 今通結內外之時, 如

是言耳.

155) 의상,『일승법계도』(韓2, p.4b4).

뒤의 뜻은 이러하다.

묻는다. 이미 ‘열 부처님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라고 말했는데, 어찌하

여 ‘오직 교분만을 맺는다’고 하는가?

답한다. 연기분 중에도 또한 열 부처님이 있으니, 이 교분도 역시 열 부

처님이 밖으로 향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처님과 보현[보살]이

상속하면서도 각기 다르다’는 뜻을 기준으로 하였다.

後意則.

問. 旣云十佛大人境也, 何云唯結敎分耶?

答. 緣起分中, 亦有十佛, 以此敎分, 亦是十佛外向門故也. 此

約佛與普賢相續各別之義.

원통기(圓通記)156)

156) 균여,『원통기』(韓4, p.9a16-b2).

‘다음 2구는 위의 뜻을 총체적으로 논한다’란 앞의 ‘사(事)에 즉하여 법

을 포섭함을 밝히는 것’과 ‘때를 기준으로 하는 것’과 ‘지위를 기준으로 하

는 것’ 등이 모두 사법(事法)인데, 무슨 까닭에 여기서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라고 하는가?

답한다. 티끌[塵]과 시방[十方], 순간[念]과 겁(劫) 등이 모두 사법(事法)

이지만, 그러나 즉입(卽入)이 걸림 없다는 것은 이(理)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만약 오직 이(理)를 기준으로 한다면 한 맛이기 때문에 즉

입할 만한 것이 없으며, 만약 오직 사(事)를 기준으로 하면 서로 걸리기 때

문에 즉입할 수 없다. 요컨대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다르지 않음을

말미암아야 비로소 걸림 없음을 얻기 때문이다. 안으로 증득함은 오직 열

부처님의 경계이므로 다른 경계가 아니며, 연기분도 또한 열 부처님의 경

계이므로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다’라고 한다.

‘次二句, 摠論上義’者, 前之卽事明攝法, 與約時約位等, 並

是事法, 何故, 今云, ‘理事冥然无分別’耶? 答. 塵與十方, 念

與劫等, 是皆事法, 然卽入无碍者, 以不異於理故爾也. 若唯

約理, 以一味故, 无可卽入, 若唯約事, 以互相碍故, 不可卽入,

要由理事冥然不異, 方得无碍故也. 內證唯是十佛境, 故非餘

境, 緣起分者, 亦是十佛之境, 故云,‘ 十佛普賢大人境’也.

법계도주(法界圖註)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으니 [理事㝠然無分別]

이(理)를 말하고 사(事)를 말함이 비록 천 가지가 있으나 ‘매우 깊은 진

성[甚深眞性]이 자성을 고수하지 않는다[不守自性]’에 지나지 않을 따름

이다. 진성의 이(理)는 묘용이 항상하고 진성의 사(事)는 법과 법이 늘 융

섭하니, 동림이 울창하고 빽빽함과 남악이 우뚝 솟고 높음은 보현의 경계

이고 문수의 면목이며 넝쿨을 잡고 정상에 오름과 병을 들고 연을 땀은

문수의 지혜이고 보현의 묘용이다. 연기할 때에 분명 자성이 없으나 자성

이 없는 곳에서 언제나 연기한다. 도리어 자세히 알겠는가?

하나의 지위가 모든 지위를 구족하니

물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며 행하는 업도 아니다.157)

說理說事, 縱有千般, 不過甚深眞性不守自性而已. 眞性之理,

妙用恒然, 眞性之事, 法法常融, 東林欝密, 南岳嵯峨, 普賢之

境, 文殊面目, 攀蘿登頂, 挈瓶採蓮, 文殊之智, 普賢妙用. 緣

起時, 的的無性, 無性處, 常常緣起. 還相委悉麽?

一地具足一切地, 非色非心非行業.

157)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의『증도가(證道歌)』의 한 구절이다(大48, p.396

b9-10).

열 부처님[十佛]과 보현[보살]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다. [十佛普賢大人境]

위대한 성인의 경계를 보고자 하는가?

마침 어떤 사람이 천태(天台)로부터 오더니 도리어 남악(南岳)으로부터

간다.158)

要見大人境界麽?

適159)有人從天台來, 却從南岳去.

158)『금강경』제14「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의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

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느니(須菩提, 菩薩爲利益一切衆生, 應

如是布施)”에 대한 야부의 송 중에 “아침에는 남악에서 노닐고 저녁에는 천태에

머문다.”[『금강경주』권2(卍38, p.725a5-6. 朝遊南岳, 暮住天台.)]는 구절이 있다.

악은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 선사가 머물던 호남성(湖南省)의 형산(衡山)

을 가리키고, 천태는 천태지자(天台智者, 538~597) 대사가 머물던 절강성(浙江

省)의 천태산을 가리킨다.

159) 저본에는「邊」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과 병본에 따라「適」으로 바꾸었다.

능히 해인삼매 가운데 들어가

여의(如意)를 번다하게 나타냄이 불가사의하다.160)

보배를 비내려 중생을 도와 허공을 채우니

중생이 근기 따라 이익을 얻는다.

能入161)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160)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번다하게 나타냄의 여의함이 불가사의

하다,’ ‘번다하게 나타냄이 여의하여 불가사의하다.’

161) 저본에는「人」으로 되어 있으나『법계도』의 한불전과 속장경 원문에는「入」으

로 되어 있어서 이에 따라「入」으로 하였다.

총수록(叢髓錄)

「법기」162)

162)『총수록』(韓6, pp.785c9-786a15; 高45, pp.159b11-160a9).

‘해인’ 가운데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구족하였으니, 말하자면 세 가

지 세간의 법에 섭입하는 것은 자리이고, 세 가지 세간의 법을 나투는 것

은 이타이다. 그러나 일승 가운데는 이타가 없다. 왜인가? 교화되는 중생

이 바로 스스로의 안으로 증득한[自內訂] 오해(五海) 가운데의 중생이기

때문에 근기에 응하여 일어나고, 능히 [교화를] 입히는 가르침도 스스로의

해인정(海印定)으로부터 일어난 바이기 때문이다.

海印中具自利利他, 謂攝入三世間法, 是自利, 現現三世間法,

是利他. 然一乘中, 無利他也. 何者? 所化衆生, 是自內訂五海

之中衆生故, 應機而起, 能被之敎, 從自海印定中所起故也.

‘여의를 번다하게 나타냄’이란 해인정으로부터 일어나는 가르침[敎]을

여의로 삼는다. 이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부처님의 뜻에 칭합하

기 때문이고, 둘째는 중생의 뜻에 칭합하기 때문에 ‘여의’라 이름한다. 비

유하면 마치 전륜왕이 갖고 있는 여의가 왕의 창고 안에 있으면 온갖 보배

를 비내리지 않지만, 만약 전륜왕이 이 여의를 깃대 위에 내다 걸어두고서

빈궁한 사람들을 위하여 온갖 보배를 비내려 주길 청하면 그 필요로 하는

바를 따라 갖가지 물건을 비내려서 뜻과 같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繁出如意’者, 從海印定所起之敎, 爲如意也. 此有二義, 一稱

於佛意故, 二稱於衆生之意故, 名爲如意. 比如輪王所有如意,

在王藏內, 不雨衆寶, 若轉輪王, 以此如意, 出置幢上, 爲貧窮

人, 請雨衆寶, 隨其所須, 雨種種物, 無不如意.

그러나 이 물건들은 본래 여의주 안이나 전륜왕의 몸에 있었던 것이 아

니라, 허공 중에서 다만 중생의 지극함[感]과 왕의 세력으로써 이 여의주

가 보배를 비내려 다함이 없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서원과 중생의 지극함

으로써 해인의 가르침이 중생에 응한다. 창고 안에 있을 때는 부처님의 안

으로 증득하심을 비유하는 것이고, 깃대 위에 내다 걸어 보배를 비내리는

때는 부처님의 밖으로 교화하심을 비유한 것이다. ‘불가사의하다[不思議]’

란 불가사의한 안으로 증득함[內訂]으로부터 일어나니, 불가설의 중생 수

에 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然此物等, 本不在於如意珠內及輪王身, 而虛空中, 但以衆生

之感及王勢力, 此如意珠, 雨寶無盡也. 如是以佛誓願及衆生

感, 海印之敎, 應衆生也. 在藏內時, 喩佛內訂, 出置幢上, 雨

寶之時, 喩佛外化也. ‘不思議’者, 從不思議內訂而起, 應不可

說衆生數起故也.

‘보배를 비내려 중생을 도와 허공을 채우니’란, 허공이 가없으므로 세계

가 가없고, 세계가 가없으므로 중생이 가없으니, 이 가없는 중생에게 이와

같은 가르침을 입히지 못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중생이 근기 따라 이익을 얻는다’란, 이 여의(如意)의 가르침은 삼승·

오승·무량승(無量乘)163) 등 일체의 중생 가운데서 각각 근기에 칭합하여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雨寶益生滿虛空’者, 虛空無邊故, 世界無邊, 世界無邊故, 衆

生無邊, 於此無邊衆生, 如是之敎, 無所不被故也.

‘衆生隨器得利益’者, 此如意敎, 於三乘五乘無量乘等一切衆

生中, 各各稱根, 令得利益故也.

163) 무량승(無量乘)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한량없이 많고 다양함을 나타내는 말이

다. ‘승(乘)’은 탈 것이라는 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배와 같이, 중생을 태우고

생사윤회의 바다를 건너서 열반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

이다.『육십화엄(六十華嚴)』권60「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는 “혹은 어떤

한 세계에서 일승을 말하는 소리로 듣고 혹은 이·삼·사·오승 소리로 듣고 내지

무량한 승으로 듣네.”(高8, p.424b1; 大9, p.787b16-17. 或有一世界, 聞說一

乘音, 或二三四五, 乃至無量乘.)라고 하였고, 법장의 『화엄오교장』 권1에서

는 “혹은 무량승이니, 모든 법문을 말한다.”(大45, p.479c12-13. 或無量乘,

謂一切法門也.)라고 하였다.

묻는다. 만약 그렇다면 이 화엄에서 삼승의 별과(別果)를 얻는가?

답한다. 없다. 말하자면 이 대경 중에 무량승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며,

이에 이 경전이 갖추고 있는 무량승 중에서 『대품경(大品經)』164) 등이 별

과를 얻을 뿐이다.

問. 若爾, 於此花嚴, 得三乘別果耶?

答. 無也. 謂此大經中, 具無量乘故, 乃於此經所具無量乘中,

大品經等, 得別果耳.

164)『대품경(大品經)』은 후진의 구마라집이 번역한 27권『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의 줄인 이름이다.『대품반야경』은『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대

품반야』라고도 한다.『마하반야바라밀경』 권17에 의하면, 생사의 길이 길고 중

생의 성품이 많지만 생사는 허공과 같고 중생의 성품도 허공과 같으며, 이 가운

데 실로 생사를 왕래하는 것도 없고 해탈하는 자도 없음을 바르게 기억해야 한

다고 하였다.(高5, p.417a7-10; 大8, p.349b7-10

「진기」165)

165)『총수록』(韓6, p.786a16-b4; 高45, p.160a10-17)

‘해인삼매’란 스스로의 증득[自證]이어서 말을 여읜 것인데 무슨 까닭

에 이타(利他)의 처음에서 밝히는가?

답한다. 이타의 연기는 별도의 자체가 없이 다만 열 부처님의 안으로 증

득하신 해인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도(道)에 사사로이 숨기는 것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海印三昧’者, 自訂離言, 何故, 利他之初明耶?

答. 表利他緣起無別自體, 但依十佛內訂海印所起故也. 若不

爾者, 道有私隱故.

‘번다하게 나타낸다’ 등이란 순간순간마다 여의(如意)의 가르침을 일으

켜 미래가 다하도록 쉼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만 일념에 법계를 온전히

거두어들여 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가사의하다’고 말한다.

‘보배를 비내려’란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여 ‘보배’라고 말한다. 또한 중

생이 수용하는 갖가지 보물이다.

‘허공을 채운다’란 중생이 불가사의한 가르침을 입으면 곧 범부의 마음

을 움직이지 않고 법성 허공과 더불어 단지 이 한 물건이어서 본래 스스

로 원만함을 알기 때문이다.

‘繁出’等者, 於念念中, 起如意敎, 盡未來際, 無休息故. 又但

一念, 全攝法界, 無側故也. 是故云‘不思議’也.

‘雨寶’者, 約敎云‘寶’也. 又是衆生受用, 種種寶物也.

‘滿虛空’者, 衆生蒙不思議敎, 則知其不動凡心, 與法性虛空,

只是一物, 本自圓滿故也.

‘근기를 따라 이익을 얻는다’란, 산왕(山王)의 두루한 근기[普機]는 총상

의 가르침을 얻고 차별의 작은 근기[小機]는 차별의 가르침을 얻으니, 각

기 스스로 이익을 이루기 때문이다.

‘隨器得利’者, 山王普機, 得摠相敎, 差別小機, 得差別敎, 各

自成益故也.

「대기」166)

166)『총수록』(韓6, p.786b5-c13; 高45, p.160a18-b17).

‘해인’은 증분과 교분에 통하기 때문에 교분에서 밝힐 뿐이다. 또 이 4구

는 제4중 해인(第四重海印)167)이기 때문이다.

묻는다. 제4중 해인은 선정의 안이기 때문에 이타의 모양이 숨어 있는

데, 무슨 까닭에 이타에 배대하는가?

‘海印’者, 通訂敎二分故, 明於敎分耳. 又此四句, 是第168)四重

海印故也. 問. 第四重海印, 是定內故, 利他相隱, 何故, 以配

利他耶?

167) 제4중 해인은 오중해인(五重海印:忘像海印·現像海印·外向海印·定觀海印·語言

海印)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네 번째 해인, 즉 이타

행 4구가 배대된 제4중해인이다.

168) 저본에는「弟」로 되어 있으나 을본에 따라「第」로 고쳤다.

답한다. 제4중 안에 동교와 별교의 2교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곧바로 한 줄의 붉은 인(印)을 기준으로 해서 논하면 곧 차별이 없기 때문

에 별교이며, 만약 굴곡을 기준으로 해서 말하면 차별이기 때문에 곧 동교

중의 근기를 따르는 뜻이다. 그러므로 근기를 따르는 굴곡의 붉은 인(印)

인 까닭에 ‘여의의 가르침’이라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하기를 ‘이법에

의지하고 가르침에 근거하여’라고 한 것은, 제3중 해인169)을 기준으로 하

면 머무름 없는 이법·머무름 없는 가르침인 것이고, 제4중170)을 기준으로

하면 머무름 없는 이법·여의의 가르침이다. 이 제4중을 기준으로 하여 4

구를 다시 오중해인으로써 분배하면171) 처음 2구는 차례대로 첫째와 둘째

해인에 배대하고,172) 다음 1구는 제3해인,173) 그 다음 1구는 뒤의 두 해인이

다.174) 말하자면 아래 본문에서 이 해인을 해석하기를, “구경에 청정하고

담연 명백하여 세 가지 세간이 그 가운데 나타난다”175) 등이라 하였기 때

문이다.

答. 第四重內, 具同別二敎故. 若直約一道朱印而論, 卽無差別

故, 是別敎, 若約屈曲而言, 是差別故, 卽同敎中, 逐機之義也.

是故, 逐機屈曲之朱印, 故云‘如意敎’也. 是故, 前云, ‘依理據

敎’者, 約第三重, 則無住理無住敎也, 約第四重, 則無住理如

意敎也. 約此第四重, 四句更以五重海印分配, 則初二句, 如次

配初二海印, 次一句, 第三海印, 次一句, 後二海印也. 謂下文

釋此海印, 云“究竟淸淨, 湛然明白, 三種世間, 於中現現”等故.

169) 이 제3중 해인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세 번째 해인, 즉 연기분 14구가 배대된 제3중 해인이다.

170) 이 제4중해인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네 번째 해인, 즉 이타행 4구가 배대된 제4중해인이다.

171) 제3중 오중해인이니, 제4중 해인인 이타행 4구를 다시 오중해인으로 분배한 것

이다.

172) 제4중 해인인 이타행 4구를 다시 오중해인으로 분배한 가운데 첫째 구인 ‘능입

해인삼매중(能入海印三昧中)’은 제3중의 첫째 해인인 영리해인(影離海印), 둘째

구인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는 제2 영현해인(影現海印)에 해당한다.

173) 이타행 4구 중 제3구인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은 제3중 해인에 해당

한다.

174)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을 말한다. 「대기」에서는 이를 다시 ‘중생수

기’와 ‘득이익’으로 나누어 각각 제4중 해인과 제5중 해인에 배대시켰다.

175) 의상,『일승법계도』(韓2, p.3c16-17).

화상[의상스님]의 뜻은, 이 가운데의 해인이 오직 한결같이 제4중176)

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므로 이 중에서 다시 분배하였다. 처음 구는 영리해

인(影離海印)이고, 다음 구는 영현해인(影現海印)이다. 그러므로 ‘여의를

번다하게 나타낸다’ 등이라 말한다. 다음 구절은 제3중177)이니 교화하시는

부처님이 열 가지 보법의 보배를 비내려서 보현보살의 근기를 이익되게

하신다. 뒤의 구절은 제4중178)에서 여의교(如意敎)의 붉은 인(印)이 근기의

굴곡에 꼭맞기 때문에 ‘중생이 근기 따라’라고 말한다. 제5중179)에서 언설

의 법을 일으켜 중생으로 하여금 믿고 알며 행하고 증득하도록 하기 때문

에 ‘이익을 얻는다’고 말한다.

和尙之意, 此中海印, 非唯一向當第四重, 是以, 此中更分配

也. 初句影離海印, 次句影現海印. 故云‘繁出如意’等. 次句第

三重, 能化之佛, 雨十普法之寶, 益普賢機也. 後句於第四重,

如意敎之朱印, 稱機屈曲, 故云‘衆生隨器’也. 於第五重, 起言

說法, 令機信解行訂, 故云‘得利益’也.

176) 이 제4중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네 번

째 해인, 즉 이타행 4구가 배대된 제4중해인이다.

177) 이 제3중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하여 그 중 네 번

째 해인을 다시 5중으로 나눈 가운데 세 번째 해인, 즉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

生滿虛空)’에 해당하는 제3중 해인이다.

178) 이 제4중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하여 그 중 네 번

째 해인을 다시 5중으로 나눈 가운데 네 번째 해인, 즉 ‘중생수기(衆生隨器)’에

해당하는 제4중 해인이다.

179) 이 제5중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하여 그 중 네 번

째 해인을 다시 5중으로 나눈 가운데 다섯 번째 해인, 즉 ‘득이익(得利益)’에 해

당하는 제5중 해인이다.

그런데 제4중180)으로써 올바른 뜻을 해석한다면 ‘능인(能人)’이란 교화

하시는 부처님이며, ‘해인’은 정장정(淨藏定)이다. ‘여의를 번다하게 나타

냄’이란 여의의 가르침의 붉은 인(印)이 근기에 응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보배를 비내려 중생을 도와 허공을 채운다’라는 것은 열 보법을 비내려

정위(正爲)181) 가운데서 온전히 온전히 응하니, 말하자면 한 줄의 붉은 인

(印)이 원만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중생이 근기 따라 이익을 얻는다’라는

것은, 겸해서 전전(輾轉)히 먼 것까지 이끌어서 그들을 위하는 가운데 부

분부분마다 응하니, 말하자면 저 근기의 마땅함을 따라서 각기 이익을 얻

게 하는 것이, 큰 모서리에서는 크게 굽어지고 작은 모서리에서는 작게 구

부러지며 글자 따라 구부러지는 것과 같다.

然以第四重正義釋者, ‘能人’者, 能化佛也, ‘海印’者, 淨藏定

也.‘ 繁出如意’者, 如意敎之朱印, 應機現現也.‘ 雨寶益生滿

虛空’者, 雨十普法, 於正爲中, 全全而應, 謂一道朱印, 圓滿

現現也.‘ 衆生隨器得利益’者, 於兼轉引遠爲之中, 分分而應,

謂隨彼機宜, 各令得益, 如大角則大曲, 小角則小曲, 隨字而屈

曲也.

180) 이 제4중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네 번

째 해인, 즉 이타행 4구가 배대된 제4중해인이다.

181) 정위(正爲)는 전체를 다 바르게 위한다는 뜻으로, 전체적으로 이익되게 한다는

것이다. 즉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중생들을 바르게 위하는 것이다.

원통기(圓通記)182)

182) 균여,『원통기』(韓4, p.9b2-11).

‘능인’이란 혹은 말하기를, “석가를 이곳 말로 ‘능인(能仁)’이라 하니, 능

인(能人)이라 말한 것은 글쓴 자의 잘못이다”라고 한다. 혹은 말하기를,

“능히 교화하는 사람[能化之人]”이라고 한다. 지금 해석하자면 석가가 능

히 교화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아래 본문에 말하기를, “석가여래의 가르

침의 그물에 포섭되는 세 가지 세간이 해인삼매로부터 번다하게 나타난

것임을 표현하려고 한 때문이다”183)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두 가지 뜻을

다 얻는다.184) ‘여의(如意)’란 곧 일음(一音)의 가르침이니, 비유하면 큰 바

다에 여의주가 있기 때문에 만물을 윤택하게 하고 여러 진귀한 보배를 비

내려 일체를 이익되게 한다. 석가부처님이 해인삼매 가운데 일음의 여의

한 가르침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能人’者, 一云“釋迦, 此云能仁, 而言能人者, 書者之誤也.”

一云“能化之人”也. 今釋, 釋迦是能化之人, 是故下文云,“ 欲

表釋迦如來, 敎網所攝三種世間, 從海印三昧, 繁出現現故.”

是故二義得也.‘ 如意’者, 卽是一音敎, 比如大海, 有如意珠

故, 潤澤萬物, 雨諸珍寶, 利益一切. 釋迦佛海印三昧中, 一音

如意之敎, 利益衆生, 亦如是也.

183) 의상,『일승법계도』(韓2, p.1b2-4).

184) 이처럼 능인은『원통기』에서는 능인(能仁)·능인(能人)으로 회통하고 있는데,

본서에서 능인을 능입(能入)으로 한 것은『일승법계도』의 저본인『한국불교전

서』의 원문에 따른 것이다.

.

법계도주(法界圖註)

능히 해인삼매 가운데 들어가 [能入185)海印三昧中]

진성 가운데에서 이(理)를 드러내고 사(事)를 드러냄이 비록 여러 가지

가 있으나 그 자성을 헤아려 마침내 얻을 수 없으니, 곧 부처와 중생이 이

에 진성 가운데의 빛과 그림자여서 부처 이룸도 없으며 중생 제도함도 없

고, 단지 하나의 진성일 따름이다. 마치 염부(閻浮)186)의 바다 가운데 있는

염부의 산하대지와 초목 총림이 그 실체를 헤아려 마침내 얻을 수 없으

니, 곧 산하의 형색이 이에 큰 바다의 빛과 그림자이니, 성품을 볼 수도 없

으며 모양을 취할 수도 없어, 오직 하나의 큰 바다일 따름인 것과 같다. 열

부처님의 내증도 단지 이와 같을 뿐이다.

於眞性中, 顯理顯事, 縱有多端, 推其自性, 了不可得, 則佛與

衆生, 乃眞性中之光影, 無佛可成, 無生可度, 但一眞性而已.

如閻浮海中, 所有閻浮山河大地草木叢林, 推其實體, 了不可

得, 則山河色相, 乃大海之光影, 無性可見, 無相可取, 惟一大

海而已. 十佛內證, 只如是耳.

185) 저본에는「仁」으로 되어 있으나『일승법계도』 원문을 따라「入」으로 바꾸었다.

186) 염부(閻浮, jambudvīpa)는 수미산의 남쪽 바다에 있는 대주(大洲)의 이름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한다.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도 한다

여의(如意)를 번다하게 나타냄이 불가사의하다. [飜出如意不思議]

해인정(海印定) 가운데서 일어난 법은 어떤 형상인가? 성(性)도 아니고

상(相)도 아니며 이(理)도 아니고 사(事)도 아니며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며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나, 설하여진 가르침은 곧 성(性)이고

곧 상(相)이며, 곧 이(理)이고 곧 사(事)이며, 곧 부처이고 곧 중생이며, 곧

진실이고 곧 거짓이다. 한 소리로 펼쳐 말하지만 부류를 따라 각각 다르

며,187) 부류를 따라 각각 다르지만 한 가지 소리에 원만하게 섭수되어, 중

생의 갖가지 마음으로써 중생의 갖가지 성품을 설한다. 식정으로 도달할

바가 아니며 사량으로 미칠 바가 아니니, 그러므로 ‘뜻과 같아서 불가사의

하다[如意不思議]’라고 하였다. 알겠는가?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서 고기 물지 않으니

배에 가득 공연히 달빛만 싣고 돌아온다.188)

海印㝎中所起之法, 如何形狀? 非性非相, 非理非事, 非佛非

衆生, 非眞非假, 而所說之敎, 即性即相, 即理即事, 即佛卽衆

生, 卽眞即假. 一音演暢, 而隨類各異, 隨類各異, 而圓攝一音,

以衆生種種心, 說衆生種種性. 非識情所到, 非思量所及, 故云

如意不思議. 會麽?

夜靜水寒魚不食, 滿船189)空載月明歸.

187)『화엄경(華嚴經)』권1에 “한 소리로 연설하여도 다 남음이 없으며 이 변재로 많

은 겁 동안 연설하여도 끝이 없다. 이것은 광명 비침 마음의 법문이다. 여래의

묘한 음성 깊고 원만해 중생들 부류 따라 이해하도다. 그래도 그 말에는 차별

없으니 범음(梵音)이 두루 퍼져 최상이 되네.”(高8, p.5c17-20; 大9, p.399b4-7.

音演說悉無餘, 此辯塵劫演不盡. 是名光照心法門. 如來妙音深滿足, 衆生隨類悉

得解. 一切皆謂同其語, 梵音普至最無上.)라는 구절이 있고, 『유마힐소설경』

상권에도 “부처님은 한 소리로 법을 설하시지만 중생은 부류 따라 각각 이해하네.

”(高9, p.978b5; 大14, p.538a2. 佛以一音演說法, 衆生隨類各得解.)라고 하였다.

『대혜보각선사어록』권19(大47, p.891c7-8) 등에도 이러한 경문이 인용되어 있다.

188) 당나라 선자덕성(船子德誠, 800년 경)의 ‘어부송(漁父頌)’으로 알려져 있는 4구

게의 일부이다. 전 2구는 “천 자나 되는 낚싯줄을 곧장 드리우니, 한 물결이 일

자마자 만 물결이 따라 이네.”(千尺絲綸直下垂, 一波纔動萬波隨.)이다.『금강경

주』권3(卍38, p.750b12-13),『명각선사어록(明覺禪師語錄)』권3(大47, p.692

a7-8등에 게송 전체가 인용되어 있으며,『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

권1(大47, p.814a3-4), 『굉지선사광록(宏智禪師廣錄)』 권1(大48, p.4c27-28)

등에는『법계도주』와 같은 부분이 인용되어 있다.『선종송고연주통집(禪宗頌

古聯珠通集)』권37에는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이 “배에 가득 공연히

달빛만 싣고 돌아온다”를 “배에 가득 달빛을 싣고 돌아온다”(滿船載得月明歸)로

고친 내용을 전하고 있다(卍115, p.472a17-18).

189) 저본에는「舡」으로 되어 있으나 병본에 따라「船」으로 바꾸었다.

보배를 비내려 중생을 도와 허공을 채우니 [雨寶益生滿虛空]

이 한 개 여의보가 백천의 여의보를 내보내고 이 한 해인정광삼매(海印

定光三昧)가 백천의 해인정광삼매를 내보낸다. 그러나 이 해인정광삼매

는 단지 열 부처님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에서만 홀로 증득하는 것이 아니

라 일체 중생에게 각각 열 부처님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인 해인정광삼매

가 있다. 태어남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

지, 혹 성내고 혹 기뻐하며 혹 말하고 혹 침묵하는 낱낱마다 각각 낱낱 해

인이 있으니, 낱낱 해인이 낱낱마다 중생의 번뇌의 바다를 내보내고 낱낱

번뇌의 바다가 각각 진여법성의 바다를 갖추어 둘이 없고 섞임이 없기 때

문에 그 ‘허공에 가득한 이익[滿虛空益]’을 다만 팔자 모양으로 열어 젖혀

[八字打開]190) 두 손으로 분부(分付)191)할 따름이다.

這一个如意寶, 流出百千如意寶, 這一海印㝎光三昧, 流出

百千海印㝎光三昧. 然而這海印㝎光三昧, 非但十佛大人境界

獨證, 一切衆生, 各有十佛大人境界海印㝎光三昧. 從生至死,

從旦至暮, 或嗔或喜, 或語或默, 一一各有一一海印, 一一海

印, 一一流出衆生煩惱海192), 一一煩惱海各具眞如法性海, 無

二無雜故, 其滿虛空益, 但八字打開, 兩手分付而已.

190) 팔자 모양으로 열어 젖혀[八字打開]는 조금도 숨김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191) 분부(分付)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명령이나 지시를 내리는 일을 말한다.

192) 저본에는「染」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과 병본에 따라「海」로 바꾸었다.

중생이 근기따라 이익을 얻는다. [衆生隨得利益]

큰 부자 집안의 그릇마다 다 금이고 해인정 가운데 법마다 다 참이지만,

다만 크고 작음과 모나고 둥글음과 물들고 깨끗함의 차이가 있을 뿐이니

그 얻은 이익이 다른 법이 아니다. 다만 큰 것을 크다 말하고 작은 것을 작

다 말하며, 모난 것을 모났다 말하고 둥근 것을 둥글다 말하며, 물든 것을

물들었다 말하고 깨끗한 것을 깨끗하다 말할 뿐이며, 작은 것을 넓혀서 크

게 하며 모난 것을 깎아 둥글게 하며 물든 것을 고쳐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알겠는가?

산이 비어 바람이 돌을 떨어뜨리고

누각이 고요하여 달빛이 문에 들어온다.193)

大富家中, 噐噐皆金, 海印㝎中, 法法皆眞, 但有大小方圓染淨

異耳, 其所得益, 不是他法. 只爲大者言大, 小者言小, 方者言

方, 圓者言圓, 染者言染, 淨者言淨, 非愽小以令大, 刻方以爲

圓, 革染而說淨也. 會麽?

山虛風落石, 樓靜月侵門.

193) 두보(杜甫, 712~770)의 ‘서각의 밤[西閣夜]’에 나오는 구절로서 앞의 두 구절은

“황홀하게 추운 산에 저녁이니 길게 이어진 흰 안개 어둡다.”(恍惚寒山暮, 逶迤白

霧昏.)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본래 자리에 돌아와

망상 쉼을 반드시 얻지 않을 수 없고

무연(無緣)의 선교(善巧)로 여의(如意)를 잡아서

집으로 돌아가 분수 따라 자량을 얻는다.

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총수록(叢髓錄)

「법기」194)

194)『총수록』(韓6, p.787a19-b18; 高45, p.161a15-b9).

‘수행자[行者]’란 곧 모든 보법을 믿고 향하는 사람이며, ‘본래 자리’란

곧 안으로 증득한 해인이다. ‘망상 쉼을 반드시 얻지 않을 수 없고’라는 것

은, 두 가지 아집[二我執]195)으로써 망상을 삼으니, 위의 안으로 증득한 해

인의 경지와 같아서 무아의 사람이라야 능히 이를 수 있다. 만약 나[我]가

있다면 반드시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바닷가의 풀은 바닷물이 있기

때문에 마르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의식의 인아(人我)와 법아

(法我)의 두 가지 아(我)는 저 말나(末那)196) 및 려야(黎耶)197)의 바다 몸으

로 말미암아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무엇인가? 려야(黎耶)의 본식은 나

[我]의 뿌리이고, 그 말나식은 나의 줄기이며, 육식(六識)198) 및 전오식(前

五識)199)은 모두 두 가지 아(我)가 출입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行者’則凡諸信向普法之人也,‘ 本際’則內訂海印也. 叵200)息

妄想必不得者, 以二我執爲妄想也, 如上內訂海印之際, 無我

之人, 乃能得至. 若存我則必不得至故也. 如海邊荓201), 有海水

故, 不得202)令渴, 如是意識人法二我, 由彼末那及黎耶海身而

還203)起, 何者? 黎耶本識, 是我之204)根, 其末那識是205)我之莖

六206)及前五, 皆是二我出入之門故也.

195) 두 가지 아집이란 인아(人我, purusa, sattvātman)와 법아(法我, dharmagrāha)

또는 인아집과 법아집을 말하며,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이라고도 한

다. 인아는 자성을 가진 단일한 개체를 뜻하거나 그 개체의 자성이 실유(實有)

한다고 집착하는 사견이며, 법아는 색(色)·심(心)을 구성하는 모든 법[諸法]의

자성을 뜻하거나, 또는 법의 자성이 실유한다고 집착하는 사견을 말한다. 즉 인

아견은 일체의 범부 사람의 몸[人身]은 오온(五蘊)이 임시로 화합한 것임을 환

히 알지 못하고 사람에게 항상하는 아체(我體)가 있다고 고집하는 악견(惡見)이

며, 법아견은 일체의 범부 제법(諸法)의 공성(空性)을 환히 알지 못하고 법에 진

실한 체용(體用)이 있다고 고집하는 망견(妄見)이다.

196) 말나(末那, manas)는 대승불교의 유식학에서 주장하는 팔식설(八識說) 가운데

제7식을 말한다. 말나는 산스크리트어 manas의 음사이며, 염오의(染汚意)·사량

식(思量識)·의(意) 등으로도 한역한다. 이 말나에는 사량(思量)의 뜻이 있으며,

사량의 내용은 마음속의 인식대상을 집착하면서 인식한다는 뜻이 있다. 사량이

란 말은 무아(無我)의 진여성을 망각하고 아집과 법집 등의 전도심을 나타내는

망심의 작용을 항상 발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염오의 번뇌를 야기한다

고 해서 염오의라고 별칭한다. 이 말나식은 심층심리에 속하는 심리로서 내면

세계의 진실성을 망각하여 차별심을 나타내며 제8아뢰야식을 대상으로 그것을

자아라고 집착하여 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아치(我癡) 등의 네 가

지 번뇌를 항상 야기하는 역할을 한다.

197) 려야(黎耶)는 구역(舊譯)으로서 제8 아려야식을 말한다. 신역(新譯)으로는 아뢰

야식이라고 한다. 아려야식과 말나식은 그 체성이 상호간에 의지하고 공존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아려야식은 그 체성과 작용이 항상 지속되기는 하지만

미세한 사량의 작용은 없다. 이와 달리 말나식은 아려야식과 함께 삼계를 윤회

하는 도중이나 어떠한 극한 상황에 처할 때나 상관없이 항상 그 작용이 단절되

지 않는다.

198) 육식(六識)은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

식(意識)의 여섯 가지 인식의 작용이다.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

뜻[意]의 육근[根]이 빛깔[色]·소리[聲]·냄새[香]·맛[味]·감촉[觸]·법(法)의

육경[境]을 상대하여, 보고[見] 듣고[聞] 냄새 맡고[嗅] 맛보고[味] 감촉하고[觸]

아는[知] 요별작용(了別作用)을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여기에 말나식과 아뢰야

식을 더 추가하여 팔식으로 우리의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며, 제9 암마라식의 청

정식을 설정하기도 한다. 아비달마불교에서는 이들 육식은 심작용(心作用)의

기능이고 그 체(體)는 동일하므로 육식이 동시에 작용할 수는 없다고 하고, 유

식학에서는 동시에 작용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199) 전오식(前五識)은 유식학에서 제6 의식(意識) 이전의 오식을 함께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일컫는 명칭이다. 즉 팔식설에서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

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 다섯 가지 식을 말한다. 이는 전5근의 인식작용

이기는 하나 항상 제6의근이 함께하여야 발생할 수 있다.

200) 저본에는「匹」로 되어 있으나 을본에 따라「叵」로 고쳐 해석하였다.

201) 저본에는「□」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荓」로 해석하였다.

202) 저본에는「□□」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不得」으로 해석하였다.

203) 저본에는「□□□」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身而還」으로 해석하였다.

204) 저본에는「□」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之」로 해석하였다.

205) 저본에는「□」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是」로 해석하였다.

206) 저본에는「□□」로 되어 있으나 을본에 따라「莖六」으로 해석하였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수미산을 오르고자 하는데, 여덟 바다[八海]207)

다 말려버리면 마침내 육지에 의지해서 가서 수미산에 오를 수 있는 것

과 같다. 이와 같이 행자가 만약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점차로 팔식

(八識)208)의 망상의 바다를 쉬어서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삼승의 뜻이다. 일

승 가운데서는 만약 첫 번째 바다를 건너면 곧 모든 바다를 건너는 것이

고 수미산 정상을 밟는 것이기 때문에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본래 자리

에 돌아갈 수 있다.

比如有人欲上須彌, 乾八海竟依陸而行得上須彌. 如是行者若

欲返本, 漸息八識妄想海已而得至者, 三乘義也. 一乘之中, 若

履初海, 卽履諸海, 踐須彌頂故, 不移一步, 得還本際也.

207) 여덟 바다[八海]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있는 여덟 바다를 말한다. 수

미산 둘레에는 차례로 거제라(佉提羅, Khadiraka)·이사타라(伊沙陀羅,

Īsādhara)·유건타라(遊乾陀羅, Yugamdhara)·소달리사나(蘇達梨舍那,

Sudarśana)·안습박갈나(安溼縛拏, Aśvakarna)·니민타라(尼民陀羅,

Nimimdhara)·비나다가(毘那多迦, Vinataka)·작가라(斫迦羅, Cakravāda)의 여

덟 산이 있으며, 이들 산과 산 사이에 각기 하나의 바다가 있으므로 모두 여덟

바다가 된다.[『기세경(起世經)』권9「세주품(世住品)」(高19, p.331a12-b13;

大1, p.356b28-c18);『장아함경(長阿含經)』권21(高17, pp.1009c13-1010a16;

大1, p.139a23-139b17) 등 참조]

208) 팔식(八識, astau vijñānani)은 유식종에서 나누는 식의 종류로서, 안식·이식·

비식·설식·신식·의식·말나식·아뢰야식의 여덟 가지이다. 안식·이식·비

식·설식·신식은 전오식이라 하고, 의식은 제6식, 말나식은 제7식, 아뢰야식은

제8식이라고도 한다. 유루의 제8식과 제7식과 제6식과 전오식을 바꾸어서, 각

각의 식에 따라 차례로 번뇌가 없는 지혜인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

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를 얻는다.[『성유식론(成唯識論)』

권10(高17, pp.590c7-591a20; 大31 p.56b2-c4)].

‘무연(無緣)의 선교(善巧)’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묻는다. 무엇 때문에 ‘망상을 쉰다’는 다음에 이 구절이 있는가?

답한다. 본래 자리에 돌아가고자 하면 반드시 망상을 쉬어야 하고, 망상

을 쉬고자 하면 반드시 연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묻는다. 무연(無緣)이란 무엇인가?

답한다. 오식(五識)이 오진(五塵)의 경계를 반연[緣]하는 때에 의식이

함께 반연하고, 그 말나는 안으로 향하여 나[我]를 집착하고 려야(黎耶)의

본식은 세 가지 종류의 경계209)를 반연하니, 이러한 까닭에 여의를 잡을

수 없다. 연이 없기[無緣] 때문에 성자의 뜻을 얻을 수 있음을 이름하여

‘잘 여의를 잡는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법성의 집으로 돌아

가는 것이며, ‘자량을 얻는다’는 것은 행자의 가행방편(加行方便)이다.

‘無緣善巧’等者. 問. 何故,‘ 息妄想’次有此句耶?

答. 欲還本際, 要息妄想, 欲息妄想, 要須無緣故也.

問.‘ 無緣’者何?

答. 五識緣於五塵境時, 意識同緣, 其末那則向內執我, 黎耶本

識, 緣三類境, 是以, 不能捉如意也. 以無緣故, 得聖者意, 名

爲‘善捉如意’也.‘ 歸家’者, 歸法性家也,‘ 得資糧’者, 行者加

行方便也.

209) 아려야식의 세 가지 대상, 즉 종자(種子), 전오식(前五識), 기세간(器世間)을 말

한다.

「진기」210)

210)『총수록』(韓6, p.787b19-c7; 高45, p.161b10-17).

‘망상을 쉰다’라는 것은, 지위[位]에 맡김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처음

의 지혜[智]로 끊음을 구하여도 끊을 수 없고, 중간과 나중의 지혜로써 끊

음을 구해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논(論)에서 말하기를, “처음도 아니

고 중간과 나중도 아니다”211)라고 하였다. 그러나 끊을 수 없음으로써 끊

음을 삼기 때문에 끊는다는 뜻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논에서 “앞과 가운

데와 뒤에서 취한다”212)라고 하였다. 만약 곧바로 일승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 장애를 듦에 체의 양이 법계와 같고, 지혜를 드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息妄想’者, 約寄位云, 初智求斷, 不可得斷, 以中後智求斷亦

尒. 故論云,“ 非初非中後.” 然以不可得斷而爲斷故, 斷義得

成. 故論云, “前中後取也.” 若直約一乘, 則擧其障, 體量等法

界, 擧智亦尒.

211) 세친,『십지경론』 권2(高15, p.14a19, p.15a5; 大26, p.132b12, p.133a10).

지엄의『수현기』(高47, p.13c10; 大35, p.27c22)에서도 이를 인용하고 있다.

212) 세친,『십지경론』권2(高15, p.15b5; 大26, p.133b1).

그러므로 지엄[至相]스님이 말하기를, “연기의 성품과 같다”213)고 하였

으니, 이와 같이 끊는다. 만약 장애와 다른 지혜로써 지혜와 다른 장애를

끊으려고 한다면 망상을 쉬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얻지 못한다. 지계(持

戒)도 역시 그러하다. 만약 별도로 선(善)을 취하여 능히 막는 것으로 삼

고 그 불선(不善)을 취하여 막음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이와 같이 지니는

자를 오히려 ‘계를 깨뜨리는 사람’이라고 이름한다.

‘무연의 선교’ 등이라는 것은 분별이 없는 것이며, ‘여의’라는 것은 가르

침이다. ‘집으로 돌아가다’라는 것은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자

량’이라는 것은 2천 가지 도(道)의 품목 등이다.

故至相云, “如緣起性,” 如是斷也. 若以別障之智, 欲斷別智之

障者, 以不息妄想故, 必不得也. 持戒亦尒. 若別取善, 以爲能

防, 取其不善, 以爲所防, 如是持者, 猶名‘破戒人’也.

‘無緣善巧’等者, 無分別也, ‘如意’者, 敎也. ‘歸家’者, 還眞

源也,‘ 資糧’者, 二千道品等也.

213) 지엄,『수현기』 권3(高47, p.36c5-6; 大35, p.53b14).

「대기」214)

214)『총수록』(韓6, pp.788a6-789a9; 高45, pp.162a8-163a13).

묻는다. 앞의 제4중215) 안의 이익을 얻는 근기를 어떻게 보는가?

답한다. 보현[보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만약 여덟 번 모임의 교화를

돕는[助化] 뜻을 기준으로 하면 근기(根機)라 말하지 않는다. 제3중216)에서

야 비로소 근기가 된다. 만약 제4중217)을 기준으로 한다면 위광(威光)218)

선재(善財)219)가 다 이 정장정(淨藏定)220) 중의 이익을 얻는 근기이다. 다만

선정 안에서 얻는 이익을 선정 밖에서 설하여 보였을 뿐이다. 이 뜻을 기

준으로 하기 때문에 ‘이익을 얻는다’고 한다. 이 제5중221) 안에서는 흘러나

오는 것[所流]·목표로 하는 것[所目]의 근기로써 비로소 교화의 대상을

삼는다.

問. 前第四重內, 得益之機, 如何見耶?

答. 普賢有二義. 若約八會助化之義, 不云機也, 於第三重, 方

爲機也. 若約第四重, 則威光善財, 皆是淨藏定中, 得益之機

也. 但是定內所得之益, 於定外說示耳. 約是義故, 云‘得利益’

也. 於此第五重內, 以所流所目之機, 方爲所化也.

215) 이 제4중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네 번

째 해인, 즉 이타행 4구가 배대된 제4중해인이다.

216) 이 제3중 해인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세 번째 해인, 즉 연기분 14구가 배대된 제3중 해인이다.

217) 이 제4중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네 번

째 해인, 즉 이타행 4구가 배대된 제4중해인이다.

218) 위광(威光)은『팔십화엄(八十華嚴)』권11「비로자나품(毘盧遮那品)」에 나오

는 대위광(大威光) 태자를 가리킨다. 대위광 태자는 부처님의 광명을 보고 옛

날부터 지은 선근력(善根力)으로 즉시에 열 가지 법문을 증득하게 된다.(高8,

p.488c7-20; 大10, p.54c11-23).

219) 선재(善財)는 60권본·80권본『화엄경(華嚴經)』「입법계품(入法界品)」과 40권본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구도자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집 안에 재물이 풍족

하였으므로 선재라고 이름지었다. 선재동자는 각성(覺城)에서 문수보살을 처음

만나 그의 인도로 53선지식을 차례로 찾아다니면서 보살도를 묻고 실천하는데,

이들 선지식은 법계로 향해가는 점차적인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지위가 일체의

지위인 일위일체위(一位一切位)의 일승보살 계위를 다양한 방편으로 교설하고

있다. 선재 역시 초발심에 해탈하여 법계에 들었으며〔入法界〕계속해서 선지식

들을 만나 무수한 해탈문을 증득하는 것은 중중무진으로 불세계를 장엄하는 화

엄일승보살도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220) 정장정(淨藏定)은『육십화엄(六十華嚴)』권3「노사나불품(盧舍那佛品)」(高8,

pp.16c18-17a2; 大9, p.408b13-28)에서 보현보살이 여래 앞에서 연화장 사자

좌에 앉아 들어가는 일체여래정장삼매(一切如來淨藏三昧)를 말한다. 보현보살이

이 삼매에 들어가자,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나타나 노사나불의 본원력과 보현보살

이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청정하게 행한 원력으로 보현보살이 이 삼매에 들어

갈 수 있었다고 찬탄한다. 보현보살은 이 삼매에 일체 모든 부처님과 함께 들어

서 일체의 지혜의 힘을 비롯한 열 가지 지혜에 들어가서 일체 세계와 중생계와

중생계의 욕락과 모든 부처님들을 관찰한다.

221) 이 제5중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다섯

번째 해인, 즉 수행 방편과 이익 얻음 8구가 배대된 제5중해인이다.

묻는다. 만약 위광과 선재가 바로 이 선정 안에서 이익을 얻는 근기라면

오직 처음과 나중의 두 모임만 선정 안인가?

답한다. 만약 제4중222)을 기준으로 하면 여덟 번 모임의 법이 모두 다 선

정 안이지만 우선 위광과 선재를 들어 말하였을 뿐이다. 말하자면 『법계품

초(法界品抄)』223)에서 “일승에서 선지식을 구하는 것은 오직 이 선정 안이

기 때문에 선정 안의 일로써 보였을 뿐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問. 若威光善財, 正是定內得益之機, 則唯初後二會, 是定

內耶?

答. 若約弟四重, 則八會之法, 皆是定內, 然且擧威光善財云

耳. 謂法界品抄, 云“一乘求知識, 唯是定內, 故知以定內事示

之耳.”

222) 이 제4중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네 번

째 해인, 즉 이타행 4구가 배대된 제4중해인이다.

223)『법계품초(法界品抄)』는『입법계품초(入法界品鈔)』1권을 말한다. 의천의『신편

제종교장총록』권1에 지엄의 저술로 되어 있으나(韓4, p.681c9), 지금 전하지는

않는다. 지엄의 이 저서에 대해 의상이『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1권을 지

었다고 하나(韓4, p.681c10), 이 또한 현존하지 않는다.『법계품초』는 그 단편이

『총수록』에만 4회(韓6, p.769a20, pp.769a3-770a17, p.788a17-18, p.788a23

-b1) 인용되어 전하는데, 현존하는 지엄의 저술에는 보이지 않는 내용들로서

지엄 사상의 일부를 알게 해 준다.

묻는다. 무엇 때문에 제3중224) 안에서는 위광과 선재 등으로써 근기를

삼지 않는가?

답한다. 저 제3중225)은 함께 하지 않는 별교이기 때문에 다만 보현[보살]

로써 비로소 근기를 삼는 것이며, 제4중226)에는 동교와 별교를 갖추고 있

으므로 위광과 선재로써 근기를 삼는다. 그러므로 『법계품초』에서 “만약

삼승의 과문에 의거한다면 다섯 가지 상[五相]227) 등이 있으며, 이 때문에

견문(見聞)228)·해행(解行)229) 등의 삼생(三生)230)이 삼승위(三乘位)에 의지

하여 일승을 드러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 삼생(三生)의 지위는 제4

231) 안에서는 깊고 얕음이 없고, 제5중232)에는 깊고 얕음이 있다. ‘행자’

라고 말한 것은 제5중233)을 기준으로 하면 소류(所流)·소목(所目)의 근기

이며, 만약 제4중234)이라면 위광과 선재이다. 그러나 실(實)을 기준으로 하

면 무릇 모든 뛰어난 이로서 이 화엄을 향하는 사람이 모두 이 가운데의

‘행자’이지만 위광과 선재가 수행하여 인(因)이 나타나기 때문에 치우쳐

든다.235) 이 ‘행자’ 등은 자기의 몸과 마음이 곧 노사나[舍那]236)의 체(體)임

을 알기 때문에 ‘본래 자리에 돌아가다’라고 한다.

問. 何故, 第三重內, 不以威光善財等爲機耶?

答. 彼第三重, 則是不共別敎故, 但以普賢, 方爲機也, 於第四

重, 具同別敎故, 以威光善財而爲機也. 故法界品抄, 云“若依

三乘科文者, 有五相等, 是以, 見聞解行等三生, 依三乘位, 現

一乘耳. 此三生位, 於第四重內, 無淺深, 於第五重, 有淺深也.

言‘行者’者, 約第五重, 則所流所目237)機也, 若第四重, 則威光

善財也. 然約實, 則凡238)諸俊239)向此花240)嚴之人, 皆是此中行

者, 而威光善財, 修行因現241)故242), 偏擧243)□.244) 此行者等, 知

自身心卽舍那體, 故云‘還本際’也.

224) 이 제3중 해인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세 번째 해인, 즉 연기분 14구가 배대된 제3중 해인이다.

225) 이 제3중 해인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세 번째 해인, 즉 연기분 14구가 배대된 제3중 해인이다.

226) 이 제4중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네 번

째 해인, 즉 이타행 4구가 배대된 제4중해인이다.

227) 다섯 가지 상[五相]은 육도(六道) 가운데 천인(天人)이 죽기 전에 그 신체 등

에 나타나는 다섯 가지 쇠망의 모습을 말한다. 즉 옷이 더러워지는 것, 머리 위

의 꽃이 시드는 것, 몸에 냄새가 나고 더러운 것, 겨드랑이에 땀이 흐르는 것, 본

좌(本座)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다.[『대반열반경』(36권) 권17(高38,

p.892b4-6; 大12, p.721a26-28)]

228) 견문(見聞)은 견문위(見聞位)의 줄임말이며, 견문생(見聞生)이라고도 한다. 견

문위는 화엄가에서 말하는 삼생성불(三生成佛) 중 첫 번째 위(位)로서, 화엄의

진리를 듣고 미래에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고히 하는 단계이다. 견문하여

성불의 종자를 심는다는 것은 견문한 내용과 같이 실천하여 몸에 익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법장은『화엄일승교의분제장』에서 “견문위는『화엄경(華嚴經)』의

무진법문을 보고 들어서 금강과 같은 견고한 종자 등을 이루는 지위이다.”(大45,

p.489c5-6. 見聞位, 謂見聞此無盡法門, 成金剛種子等.)라고 하였고,『화엄일승성불

묘의(華嚴一乘成佛妙義)』에서는 “견문위는 선재동자가 바로 전생에 이와 같은

보현보살의 법을 보고 들은 인연으로 저 해탈분의 선근을 이루는 것이다.”(韓3,

p.728a19-21. 見聞位, 卽是善財次前生身, 見聞如此普賢法故, 成彼解脫分善根故.)라

고 하였다. 또한 『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에 의하면, 견문위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물러나는 까닭은 큰 법을 들었지만 들은 대로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

라고 하였다.(大45, p.601a12-13).

229) 해행(解行)은 해행위(解行位)의 줄임말이며, 해행생(解行生)이라고도 한다. 견

문에 이이서 도솔천자 등이 악도를 벗어나 일생(一生)에 곧 이구삼매(離垢三昧)

를 얻어 십지(十地)의 무생법인 및 십안(十眼)·십이(十耳) 등의 경계를 얻는 것

을 말하며, 또 선재동자가 신위(信位)로부터 십지(十地)에 이르기까지 선지식의

처소에서 한 생(生)의 한 몸에 보현의 모든 계위를 다 구족하는 것 등을 일컫는

다.[법장,『화엄일승교의분제장』(大45, p.489c6-11)]

230) 삼생(三生)은 과보를 기준으로 하여 생(生)의 모습을 세 가지로 구분한 것으로

즉 견문생(見聞生)·해행생(解行生)·증입생(證入生)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증입

생은 미륵보살이 선재에게 내가 앞으로 정각을 이룰 때 너는 마땅히 나를 보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인(因)과 과(果)의 두 지위를 나누어 말한

것이다.[법장,『화엄일승교의분제장』(大45, p.489c11-15)]

231) 이 제4중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네 번

째 해인, 즉 이타행 4구가 배대된 제4중해인이다.

232) 이 제5중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다섯

번째 해인, 즉 수행방편과 이익얻음 8구가 배대된 제5중해인이다.

233) 이 제5중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다섯

번째 해인, 즉 수행방편과 이익얻음 8구가 배대된 제5중해인이다.

234) 이 제4중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네 번

째 해인, 즉 이타행 4구가 배대된 제4중해인이다.

235) 다른 보살들은 한량없는 겁 동안 수행하여야 보살의 원행(願行)을 만족하고 모

든 불보살들을 친근(親近)하지만 선재와 대위광 태자는 능히 불국토를 청정히

하고, 중생을 교화하며, 지혜로써 법계에 깊이 들어가며, 모든 바라밀을 성취하

고, 모든 행을 증광(增廣)하며, 모든 대원(大願)을 원만히 하고, 일체 마군의 업

을 초월하며, 모든 선우(善友)를 섬기고, 모든 보살도를 청정하게 하며, 보현의

모든 행을 구족하는 등 한 생[一生]에 다겁(多劫)의 과(果)를 원만히 한다.[징

관(澄觀),『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권2(大36,

p.12a12-23)]

236) 노사나[舍那]는『육십화엄(六十華嚴)』의 주불인 노사나불(盧舍那佛)을 말한다.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 중 보신불(報身佛)에 해당하나 『팔

십화엄(八十華嚴)』에서는 주불인 법신 비로자나불로도 번역되고 있다. 그리고

화엄종에서는 법신·보신·화신의 삼불(三佛)이 원융하다는 삼불원융의 노사나

불로 받들고 있다.

237) 저본에는「□□□」로 되어 있으나 을본에 따라서「流所目」으로 해석하였다.

238) 저본에는「□」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凡」으로 해석하였다.

239) 저본에는「體」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俊」으로 해석하였다.

240) 저본에는「□□」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向此花」로 해석하였다.

241) 저본에는「□□」로 되어 있으며, 갑본에는 글자가 마멸되었다.

242) 저본에는 자체(字體)가 마멸되었으나 을본에 따라「故」로 해석하였다.

243) 저본에는「□」로 되어 있으며 갑본에는 글자가 마멸되었다. 을본에 따라「擧」로

해석하였다.

244) 저본에는「□」로 되어 있으며, 갑본은 글자가 마멸되었다.

묻는다. 제4중245) 안에서는 무엇으로 본제(本際)를 삼는가?

답한다. 위광과 선재가 얻는 화장세계의 과(果)와 티끌 수같이 많은 법

문 등이 이것이다. ‘망상’이라고 말한 것은 소류(所流)와 소목(所目) 등에

통하니, 말하자면 아래 가르침[下敎]의 사람이 자교(自敎)의 자취를 지켜

서 집착하여 구경을 삼기 때문에 이 미혹한 집착을 기준하여 총체적으로

망상을 삼음이니, 만약 이 집착을 끊으려면 요컨대 모름지기 육상(六相)

의 칼을 사용해야 한다.

問.246) 於第四重內, 以何爲本際耶?

答. 威光善財所得花藏世界果, 及塵數法門等是也. 言‘妄想’

者, 通所流所目等也, 謂下敎之人, 守自敎跡, 執爲究竟故, 約

此迷執, 惣爲妄想, 若斷此執, 要須用六相刃也.

245) 이 제4중은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5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네 번

째 해인, 즉 이타행 4구가 배대된 제4중해인이다.

246) 저본에「□」는 자체(字體)가 마멸되어 있으나, 을본에 따라「問」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숙교 중에서는 삼아승지겁[三祗劫]247)에 사상(四相)248)의 꿈을 깨

서 진여가 있다고 헤아려서 구경이 된다고 말하니,249) 자취를 지키고 머무

르기 때문이다. 육상 가운데 이상(異相)의 도장으로 그것을 찍으면 곧 그

끊어지는 대상이 마침내 앞의 20가지 꿈이니, 각각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

고서 분명하게 차별된다. 그러므로 만약 일승에 들어가면 요컨대 삼승에

서 말하는 망상을 끊는다는 마음을 쉬어야 한다. 만약 그 망상 끊는다는

망상을 쉬지 않는다면 곧 망상을 쉬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가지 못한

다. 그런즉 망상을 끊는다는 마음을 끊어 없애서 일어나지 않는 것, 이것

을 ‘이 가운데서 망상을 쉰다’라고 이름한다.

且熟敎中, 於三祗劫, 覺四相夢, 計有眞如, 謂爲究竟, 守迹而

住故, 以六相中異相印, 印之, 則其所斷竟前二十夢, 各位不

動, 而歷然差別也. 是故, 若入一乘, 要息三乘謂斷妄想之心.

若不息其謂斷妄想之妄想, 則以不息妄想故, 必不得入也. 然

則, 斷妄想之心, 斷除不起, 是名‘此中息妄想’也.

247) 삼아승지겁[三祗劫, trikalpāsamkhyeya]은 삼대아승지겁(三大阿僧祇劫)·삼아승

지야(三阿僧企耶)·삼승지(三僧祇)라고도 하며, 무앙수(無央數)라 의역한다. 보

살의 수행이 성만(成滿)하여 불과(佛果)에 이르기까지 경과하는 무한히 긴 시간

을 셋으로 나눈 것이다. 보살의 수행 계위 가운데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

(十行)·십회향(十廻向)의 사십위를 제1 아승지겁, 십지(十地) 가운데 초지부터

7지까지를 제2 아승지겁, 8지부터 10지까지를 제3 아승지겁이라고 한다.

248) 사상(四相)은 생(生)·주(住)·이(異)·멸(滅)을 말한다. 사유위(四有爲)·사유위

상(四有爲相)이라고도 한다. 사물이 변천하는 것을 설명하는 말로서, 심불상응

행법(心不相應行法)에 속한다.

249) 법장의『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大44, p.259a13)에서는 각(覺)과

불각(不覺)을 설명하면서 사상(四相)의 꿈의 차별에 대하여 점차적인 각[漸覺]을

설한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른바 망상이란 무릇 자기의 몸과 마음 밖에서 부처를

바라고 법을 구하는 마음을 총체적으로 망상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한다.

혹은 말하기를, “별교의 뜻으로써 이 문장을 해석하면 마땅히 ‘망상을 쉬

지 않는다’라고 해야 할 것이니, 만약 망상을 쉰다면 반드시 얻지 못할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 구절에서 이미 ‘분수 따라 자량을 얻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동교를 기준으로 하여 해석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니, 이는

바로 그 인연관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又云,“ 所謂妄想者, 凡自身心之外, 希佛求法之心, 惣爲妄想

也.” 一云,“ 以別敎義, 釋此文者, 應云‘不息妄想,’ 若息妄想,

必不得故也. 然而下句, 旣云‘隨分得資糧’故, 約同敎釋者宜

也, 以此是其因緣觀故.”

묻는다. 아래 본문에서 행자(行者)를 해석해 말하기를, “행자란 일승의

보법을 보고 들은 이후, 내지 이것은 별교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

다”250)라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에 여기서는 동교라고 하는가?

답한다. 이는 소목(所目)의 별교를 기준으로 하여 말했을 뿐이니, 불공(不

共)의 머무름 없는 별교가 아니다. ‘일승의 보법을 견문한다’고 말한 것은

제5중 해인에 서 있어서 선정 밖의 견문을 기준으로 하여 말했을 뿐이다.

問. 下文釋行者云,“ 行者者, 見聞一乘普法已去, 乃至此約別

敎一乘說也,” 何故, 此云同敎耶?

答. 此約所目別敎云耳, 非是不共无住別敎. 所云‘見聞一乘普

法’者, 立在第五重海印, 約定外見聞云耳.

250)『일승법계도』(韓2, p.4a6-8).

‘선교로 여의를 잡아서’ 등이라 말한 것은, 비유하면 장님이 그 눈 먼 까

닭에 자신의 보배 있는 곳을 미혹하고 오랫 동안 빈곤하여 멀리 타향에서

걸식하니, 두 눈 갖춘 사람이 마음에 애민함을 일으켜서 위하여 한 끈을

가지고 그 보배 장소에 매고, 그 한 끝을 장님의 손에 쥐어주고서 가리키

며 일러주기를, “그대가 만약 잃어버리지 않고 끈을 찾아가면 그대의 보배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님이 듣고 나서 잃어버리지 않고 찾아가 보배 있는 곳에 이르면, 그

보배 있는 곳에 또한 신령스런 약도 있어서 그 약 기운의 힘으로 눈이 떠

져 밝게 되어 가진 바 온갖 보배를 자재하게 취하여 쓰는 것과 같다.

言‘善巧捉如意’等者, 比如盲人, 由其盲故, 迷自寶所, 長年貧

困, 遠乞他鄕, 有具眼人, 心生哀憫, 爲持一索, 繫彼寶所, 以

其一末, 授盲人手而指誨云,“ 汝若不失尋索而行, 則返汝寶

所. 盲人聞已, 不失尋行, 得至寶所, 其寶所中, 亦有靈藥, 以

藥氣力, 眼得開明, 所有衆寶, 自在取用.

행자도 또한 그러하여, 지혜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안으로 증

득한 법성의 보배 있는 곳을 미혹하고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궁핍하여

다른 이에게 구걸하니, 어떤 큰 성자가 대비의 원을 일으켜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다’ 등의 다라니 끈을 드리워서 행자의

신심의 손에 쥐어 주고 ‘진성이 매우 깊다’는 한 끝을 저 증분의 보배 있는

곳에 매고 가르쳐서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잃어버리지 않고 부지런히 수

행 정진하면 반드시 곧바로 그대의 법성의 보배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라

고 하였다.

行者亦尒, 智眼盲故, 迷自內訂法性寶所, 無始時來, 窮乞於

他, 有大聖者, 起大悲願, 垂‘一中一切多中一’等陁羅尼索, 授

於行者信心之手, 以‘眞性甚深’之一末, 繫彼訂分寶所, 而敎

誡云,“ 汝若不失勤行精進, 則必直返汝法性寶宅.”

행자가 믿고 받아서 성자의 뜻을 얻어 여의의 가르침을 잡으면 처음 발

심하는 때에 문득 열 가지 눈[十眼]251)을 열어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증득한 법성의 보배 있는 곳에 들어가서 다함없는 자기 집

의 진귀한 보배를 받아 쓸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이 만약 법성의

집에 돌아가고자 한다면 요컨대 반드시 다라니의 끈을 잘 잡아서 지니어

잃어버리지 말고 자량으로 삼아야 한다.

行者信受, 得聖者意, 捉如意敎, 初發心時, 便開十眼, 不動一

步, 直入內訂法性寶所, 受用無盡自家珍寶. 是故行人, 若欲還

歸法性家者, 要須善捉陁羅尼索, 持而勿失, 爲資糧也.

251) 열 가지 눈[十眼, daśacaksus]은 육안(肉眼)·천안(天眼)·혜안(慧眼)·법안(法

眼)·불안(佛眼)·지안(智眼)·명안(明眼)·출생사안(出生死眼)·무애안(無礙

眼)·보안(普眼)이다. 여기서 눈[眼]은 비추어서 본다[照矚], 또는 여실하게 지견

(知見)한다는 뜻이다. 보살의 행덕(行德)이 청정하고 뛰어남에 연(緣)을 밝게 비

추는 것에 열 가지가 있다고 한 것이다.『육십화엄(六十華嚴)』권41「이세간품

(離世間品)」에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눈이 있다. 그 열 가지란 이른바 육안

(肉眼)이니 일체의 빛깔을 보기 때문이며, 천안(天眼)이니 일체 중생이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혜안(慧眼)이니 일체 중생의 온갖 근기

를 보기 때문이며, 법안(法眼)이니 모든 법의 진실한 모양을 보기 때문이며, 불

안(佛眼)이니 여래의 십력을 보기 때문이며, 지안(智眼)이니 모든 법을 분별하

기 때문이며, 명안(明眼)이니 모든 부처님의 광명을 보기 때문이며, 생사를 벗어

난 눈[出生死眼]이니 열반을 보기 때문이며, 걸림이 없는 눈[無礙眼]이니 모든

법을 걸림이 없이 보기 때문이며, 보안(普眼)이니 평등한 법문에서 법계를 보기

때문이다. 불자들이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눈이니, 만약 보살마하살

로서 이 눈을 성취하면, 그는 곧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큰 지혜의 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高8, p.285 b2-10; 大9, p.657c10-19. 菩薩摩訶薩, 有十種眼.

何等爲十, 所謂肉眼見一切色故, 天眼, 見一切衆生死此生彼故, 慧眼, 見一切衆

生諸根故, 法眼, 見一切法眞實相故, 佛眼, 見如來十力故, 智眼, 分別一切法故,

明眼, 見一切佛光明故, 出生死眼, 見涅槃故, 無礙眼, 見一切法無障礙故, 普眼,

平等法門見法界故. 佛子, 是爲菩薩摩訶薩十種眼, 若菩薩摩訶薩成就此眼, 則得

一切諸佛無上大智慧眼.)라고 하였다.

원통기(圓通記)252)

252)『원통기』(韓4, p.9b11-c6).

‘본래 자리’란 법성의 자리이다. ‘망상 쉼을 … 않을 수 없다[叵息妄想]’

등이란, 혹은 ‘망상을 쉬지 않는다[莫息妄想]’라고 하였다. 만약 망상을 쉰

다면 곧 반드시 본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으니, 이것은 본유(本有)253)를 기

준으로 하여 해석한 것이다. 『소(疏)』에 말하기를, “망상을 자르지 않아도

하늘을 나르듯이 여러 가지가 나타나고, 신령스런 거울을 갈지 않아도 두

렷이 밝은 것이 깨달음[覺]과 같다”254)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혹은 말하기

를, “만약 망상을 쉬지 않는다면 반드시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지금 해

석하면, 이 행자는 닦아 증득한다는 뜻을 대치하므로 뒤의 뜻에 있다. 그

러므로 아래에서 말하기를, “분별을 배반하여 무분별을 얻는다. 그러므로

‘무연’이라 한다”고 하였고, 내지 설한 대로 수행하여 성자의 뜻을 얻는다.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善巧]이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세 방편 중에 머

무름 없는 방편이다.

‘本際’者, 法性處也. ‘叵息妄想’等者, 一云, ‘莫息妄想.’ 若

息妄, 則必不得還本際, 此約本有釋. 疏云,“ 妄想不剪而霄翔

累表, 靈鑑匪磨而圓明等覺”者, 是也. 一云, “若不息妄想, 則

必不得也”, 今釋此是行者, 對治修證之義故, 存後義. 是故,

下云, 背反分別, 得无分別, 故曰无緣, 乃至如說修行得聖者意

也. 善巧不住者, 三方便中, 无住方便也.

253) 본유(本有)란 본래 고유의 성덕(性德)을 말한다. 이것은 수성(修成)·수생(修生)

등과 상대되는 말이며, 이 둘을 아울러 ‘본유수생(本有修生)’이라 한다. 즉 유정

(有情)과 비정(非情)을 막론하고 그 본성은 만덕(萬德)이 원만하며, 성인이라 하

여 증가하지도 않고 범부라 하여 감소하지도 않기 때문에 본유라 한다. 지엄은

『수현기』권3에서 범부의 염법(染法)과 보리의 정분(淨分)의 두 가지 측면에서

법계연기를 밝히는데, 그 중 정분의 입장에서 본유와 수생 등을 설명한다.(高47,

p.45a13-b13; 大35, pp.62c25-63a29). 법장은『화엄경탐현기』 권15에서

“모든 부처님의 공덕은 수생과 본유 두 가지를 넘지 않으며, 이 두 가지가 서로

상대하면 네 가지가 있게 된다. 첫째는 오직 수생이니, 신(信) 등의 선근은 본

래는 없으나 지금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오직 본유이니, 진여는 항하의 모래

처럼 많은 성(性) 공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본유수생이니, 여래장이

저 요인(了因)을 기다리는 것으로서 본래는 숨어 있으나 이제 나타나기 때문

이다. 넷째는 수생본유이니, 무분별지등이 안으로 진여에 계합하여 명연(冥然)

히 한 가지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高47, p.724a23-28; 大35, p.392a15-20.

諸佛功德無過二種, 謂修生本有, 此二相對總有四句. 一唯修生, 謂信等善根, 本

無今有故. 二唯本有, 謂眞如恒沙性功德故. 三本有修生, 謂如來藏待彼了因, 本

隱今顯故. 四修生本有, 謂無分別智等, 內契眞如, 冥然一相故.)라고 하였다.

254) 지엄,『수현기』 권1(高47, p.1a16; 大35, p.13c11-12). 징관의『대방광불화

엄경소』권1에서는 이 부분이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망상을 자르지 않아

도 확철히 성품이 공하고, 신령스런 거울을 갈지 않아도 단박에 만법을 밝힌다.”

(大35, p.504a6-7. 妄想弗翦, 而廓徹性空, 靈鑑匪磨, 而頓朗萬法.)

‘분수를 따라 자량을 갖춘다’란 인행이므로 ‘분수를 따라’라고 하고, 이

러한 인행으로써 보리에 이르므로 ‘자량’이라 한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여의주를 얻어 모든 생계 도구를 다 자재하게 얻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만약 모든 행자가 여의교를 얻으면 이미 보리의 자량을 갖추게 되고 가서

과(果)의 처소에 이르러 모든 것이 자재하다. 또 ‘무연의 선교’란 곧 머무

르지 않는 도이며, ‘여의의 가르침을 잡는다’라는 것은 가르침의 도이며,

‘집으로 돌아가 분수 따라 자량을 얻는다’라는 것은 돕는 도이니, 말하자

면 분별이 없는 머무르지 않는 이법을 얻어 생사와 열반의 두 변에 머무

르지 않으므로 ‘머무르지 않는 도’라 하며, 일음(一音)의 가르침을 얻으므

로 ‘가르침의 도’라 한다. ‘자량’이란 보리를 돕는 분이기 때문이다.

‘隨分得資粮’者, 因行故云隨分, 以此因行, 至於菩提, 故云

資粮. 比如有人得如意珠, 於一切資生之具, 皆得自在. 如是

若諸行者, 得如意敎, 則爲已具菩提資粮, 行至果處, 一切自

在. 又‘无緣善巧,’ 則不住道,‘ 捉如意敎,’ 則敎道,‘ 歸家隨

分得資粮,’ 則助道, 謂得无分別不住之理, 不住生死涅盤255)二

邊, 故云不住道, 得一音敎, 故云敎道也. ‘資粮’者, 助菩提分

故也.

255) 저본의「盤」은「槃」과 통용된다.

법계도주(法界圖註)

그러므로 수행자는 본래 자리에 돌아와 [是故行者還本際]

‘본래 자리[本際]’를 알고자 하는가?

선을 물으면 선이 망이고 이(理)를 구하면 이(理)가 가깝지 않으니,

설사 현묘함을 알았다 하더라도 또한 눈 속의 티끌이다.256)

要識本際麽?

問禪禪是妄, 求理理非親, 直饒玄會得, 也是眼中塵.

256)『인천안목(人天眼目)』권1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의 제자 극부(克符, 800

년 경)선사의 게송으로 나온다. “‘경계를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다’는 말 뜻

을 찾아보니 어느 곳이 참인가? 선을 물으면 선이 망이고 이를 구하면 이가 가

깝지 않다. 해가 비치니 찬 빛이 담담하고 산이 아득하니 푸른 빛 새롭다. 설사

현묘함을 알았다 하더라도 또한 눈 속의 티끌이다.”(大48, p.300c1-3. 奪境不奪

人, 尋言何處眞. 問禪禪是妄, 究理理非親. 日照寒光澹, 山遙翠色新. 直饒玄會得,

也是眼中塵.)

망상 쉼을 반드시 얻지 않을 수 없고 [叵息妄想必不得]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시체를 지키는 귀신이고, 역대 선사가 번뇌에 매

인 범부이다. 비록 부처가 설하고 보살이 설하며 국토가 설하고 삼세일시

(三世一時)가 설한다 할지라도, 요강에 똥 싸는 소리257)와 다르지 아니하

니 향상의 한 수와 끝내 관계가 없다. 온 대지가 곧 업식(業識)258)이어서

넓고 넓어 본래 의지할 것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다만 거짓 이름자로써 중생을 인도한다.259)

三世諸佛, 是守屍鬼, 歷代禪師, 是愽地凡夫. 直饒佛說菩薩

說, 刹說三世一時說, 不異㞘沸260)熱椀鳴聲, 於向上一著, 了沒

交渉. 盡大地是業識, 茫茫無本可據. 何故?

但以假名字, 引導261)於衆生.

257) 저본에는 ‘전각의 부처가 끓는 주전자의 김새는 소리와 다르지 아니하니[不異殿

佛熱椀鳴聲]’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전불(殿佛)은 독비(㞘沸)’의 잘못이라고 볼 수

있으니, 이 때 ‘독비열완명성(㞘沸熱椀鳴聲)’은 엉덩이로 데워져 뜨뜻한 그릇이

우는 소리, 즉 요강에 똥 싸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이다.『벽암록』제79칙에 “어

떤 스님이 투자(投子, 819~914)스님에게 물었다. ‘모든 소리가 부처님의 소리라

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투자스님이 ‘그렇다.’고 하였다. 그 스님이 ‘화상께서는

요강에 똥 싸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투자스님이 문득 후려쳤다. 또

다시 물었다. ‘거친 말과 자세한 말이 모두 제일의제(第一義諦)로 귀결한다는데,

그렇습니까?’ 투자스님이 ‘그렇지!’라고 하자 그 스님이 ‘화상을 [말뚝에 매여 있

는] 노새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라고 하고 투자스님은 다시 대뜸 후려쳤다.”(大

48, p.205b28-c7. 僧問投子. 一切聲是佛聲是否? 投子云, 是. 僧云, 和尚莫㞘沸

碗鳴聲, 投子便打. 又問. 麤言及細語皆歸第一義是否? 投子云, 是. 僧云, 喚和尚

作一頭驢得麽? 投子便打.)라고 하였다.

258) 업식(業識)은 중생이 윤회하게 되는 근본 식을 말한다. 진제 역,『대승기신론(大

乘起信論)』에 의하면, 아뢰야식을 의지하여 무명이 있고 불각(不覺)이 일어나

끊임없이 상속하는 원인은 의(意)라고 하면서 그 의(意)의 다섯 가지 이름 중에

첫 번째를 업식(識識)이라고 하고, 무명의 힘으로 불각(不覺)의 망심이 움직이

기 때문이라고 하였다.(高17, p.616b21-c3; 大32, p.577b3-7)

259)『묘법연화경』권1「방편품」(高9, 732b12-13; 大9, p.8a19)의 게송이다.

260) 저본에는「殿佛」로 되어 있으나 의미상「㞘沸」로 바꾸었다.

261) 저본에는「噵」로 되어 있으나 을본과 병본에 따라「導」로 바꾸었다.

무연(無緣)의 선교(善巧)로 여의(如意)를 잡아서 [無緣善巧捉如意]

진여성의 연기인 ‘무연(無緣)’으로써 집 가운데 모양 없는 ‘뜻과 같음[如

意]’을 잡아내니 이것을 ‘훌륭하고 교묘함[善巧]’이라고 이름한다. 그 훌륭

하고 교묘함은 본래 기량으로 도달할 바가 아니다. 알겠는가?

강 위의 저녁 무렵 그림과 같은데

어부는 한 벌 도롱이 입고 돌아온다.262)

以眞如性緣起之無緣, 捉出家中無相之如意, 是名善巧. 其善

巧, 本非伎倆所到. 會麽?

江上晩來堪畵處, 漁人披得一蓑歸.

262) 당나라 정곡(鄭谷, ?~896)의 ‘설중우제(雪中偶題)’의 한 구절이다.

집으로 돌아가 분수 따라 자량을 얻는다. [歸家隨分得資粮]

집으로 돌아가는 살림살이는 본래 특별할 것이 없으니 다만 본지풍광

(本地風光)263)으로써 본래의 한전지(閑田地)264)를 얻으면 그 집 살림살이로

충분하다. 그 이른바 자량은 삼십도품(三十道品)265)이니 곧 주리면 밥 먹

고 목마르면 마시며 추우면 불 쬐고 더우면 바람쏘이니, 무슨 소식이 있

는가? 비록 그러하나 오이를 심어 오이를 얻고 과일을 심어 과일을 얻으

니,266) 일승의 청정한 법계에 종자를 심어 어찌 현묘한 이야기가 없겠는가.

얼른 일러라.

길이 손님 보내는 도리로 인하여

집 떠나 있던 때를 추억하도다.267)

歸家活計, 本無奇特, 但以本地風光, 得本來閑田地, 足伊家活

計. 其所謂資粮三十道品, 即是飢飯渴漿, 寒附火熱268)乘凉269),

有什麽消息? 雖然, 種瓜得瓜, 種果得果, 一乘淸淨法界下得

種子, 豈無玄談分. 速道.

長因送客處, 憶得別家時.

263) 본지풍광(本地風光)은 아무런 조작이 없이 본래 갖추고 있는 본연의 모습을

말한다. 본래면목, 진면목, 본분사 등과 같은 말로 쓰인다.『벽암록(碧巖錄)』

제99칙의 ‘평창’에서 “바로 청정하고 훌훌 벗고 텅 비어 말끔하여야만 결코

한 물건도 없게 되니, 이것이 바로 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는 것이다.”(大48,

p.223b10-11. 直須淨裸裸赤灑灑, 更無一物可得, 乃是本地風光.)라고 하였다.

264) 한전지(閑田地)는 아무 일 없이 한가한 상태를 말한다. 모든 것을 뛰어넘어 편안

한 상태이다. ‘한한지(閑閑地)’로도 쓴다.『벽암록(碧巖錄)』제45칙의 ‘평창’에서

“듣지 못하였느냐? 용아(龍牙)스님의 말을. ‘도를 배우려면 무엇보다 깨달으려

해야 한다. 마치 용주(龍舟)를 빼앗듯 해야 한다. 비록 옛 전각(殿閣) 같은 한가

한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꼭 이를 얻어야만 비로소 쉬게 된다’고 하였다.”(大

48, p.182b9-11. 不見龍牙道學道. 先須有悟由. 還如曾鬪快龍舟. 雖然舊閣閑田

地, 一度贏來方始休.)고 하고 있다.

265) 삼십도품(三十道品)은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을 간략히 표현한 말이다. 삼

십칠조도품은 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

根)·오력(五力)·칠각분(七覺分)·팔정도(八正道)를 합한 것이다.

266) 『금강경』제6「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의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느

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렇게 한량없는 복덕을 얻느니라.”(須菩提,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에 대한 야보송의 일부이다[『금강경주(金剛經注)』

1(卍38, p.707a16)].

267) 뇌암정수(雷庵正受, 1146~1208)의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권16(卍137,

p.240a5-6)이나 원극거정(圓極居頂, ?~1404)의 『속전등록(續傳燈錄)』(大51,

p.667a9-10) 등에서 불등수순(佛燈守珣, 1079~1134)의 말로 전하고 있다.

268) 저본에는「□」로 표시되어 있으나 을본과 병본에 따라「熱」을 추가하였다.

269) 저본에는「□」로 표시되어 있으나 을본과 병본에 따라「凉」을 추가하였다.

다라니의 다함 없는 보배로써

법계의 진실한 보배 궁전을 장엄하여

마침내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으니

옛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

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총수록(叢髓錄)

「법기」270)

270)『총수록』(韓6, p.789b16-c18; 高45, pp.163b12-164a8).

‘다라니’란 법계 법의 다함 없다는 뜻이다.

묻는다. 수많은 법이기 때문에 다함 없다고 하는가, 다만 하나의 법을

기준으로 하여 또한 다함 없다고 하는가?

답한다. 두 가지 뜻을 다 얻는다. ‘진실한 보배 궁전’이란 증분을 기준으

로 하면 법성의 자리이며, 연기분을 기준으로 하면 곧 화장세계의 염오를

떠난 진성이다.

‘陁羅尼’者, 法界法之無盡義也.

問. 衆多法故, 云無盡耶? 但約一法, 亦云無盡耶?

答. 二義皆得.‘ 實寶殿’者, 約訂分, 則法性處也, 約緣起分,

則花藏世界離染眞性也.

묻는다. 만약 다라니로써 법성의 진실한 보배 궁전을 장엄하는 것이라

면, 증분의 처소에서 중중(重重)의 중(中)·즉(卽)과 미세 등의 뜻을 허락

하는 것인가?

[답한다.] 혹 저 증분은 가히 설할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뜻을 설하

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법은 남음이나 결여됨이 없이 일체를 만족하기 때

문에 인다라 등의 구경의 궁극이라야 이에 증분인 것이다.

묻는다. 화장세계의 염오를 떠난 진성은 어떤 것인가?

답한다.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는 문이 그것이다. 화장정토(華藏淨土)271)

는 삼승이 함께 배우는 곳이기 때문에 삼승의 근기를 따라서 계(界)를 나

누고 바다를 여의니, 만약 자종(自宗)을 기준으로 하면 오직 하나의 바다

일 뿐이니, 세 품류가 없다.

問. 若以陁羅尼莊嚴法性實寶殿者, 訂分之處, 可許重重中卽

微細等義耶?

若以彼訂分不可說故, 不說如是義耳. 然法無遺缺, 滿足一切

故, 因陁羅等究竟之極, 乃訂分也.

問. 花藏世界離染眞性, 是何?

答. 佛外向門是也. 花藏淨土, 三乘共學處故, 隨三乘機分界離

海, 若約自宗, 唯一海耳, 無三品也.

271) 화장정토(華藏淨土)는 화엄교주의 정토 세계로서, 연화장 세계를 말한다. 의상

은 당(唐)에서 귀국한 후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그 본당으로서 무량수전

을 짓고, 그 안에 주불로서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 아미타불은 극락정토에 계

시는 부처님인데, 여기서는『육십화엄(六十華嚴)』의 주불인 노사나불의 화현으

로서 아미타불을 모신 것이다.

‘마침내 … 앉으니[窮坐]’란 십세가 상응하여 마땅히 법계에 칭합하기

때문이다. ‘중도(中道)’란 세 가지 세간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삼는 것이

니, 한 물건도 몸과 마음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옛부터[舊來]’란 위의

증분 가운데 본래 고요함이다. ‘움직이지 아니함[不動]’이란 위의 증분 가

운데 모든 법의 움직이지 않음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침상에서 잠이

들어 꿈속에서 30여 역(驛)을 돌아다녔으나 깨고 난 뒤에야 비로소 움직

이지 않고 침상에 있은 줄 아는 것과 같다. 여기서도 그러하니, 본래의 ‘법

성’으로부터 30구절을 지나 다시 법성에 이르렀으니, 단지 하나로서 움직

이지 않았기 때문에 ‘옛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이라고 하였다.

‘窮坐’者, 十世相應, 應稱法界故也. ‘中道’者, 以三世間爲自

身心, 無有一物非身心者故也.‘ 舊來’者, 上訂分中本來寂也.

‘不動’者, 上訂分中, 諸法不動也. 比如有人, 在床入睡, 夢中

廻行三十餘驛, 覺後方知不動在床. 此中亦爾, 從本法性, 經

三十句, 還至法性, 只一不動故, 云‘舊來不動’也.

묻는다. 이 뜻은 숙교 중의 ‘일심(一心)을 미혹하여 육도(六道)를 떠돌

다가 깨달아서 일심으로 돌아간다’는 뜻과 어떻게 다른가?

답한다. 저 숙교 가운데서는 20가지 꿈이 민멸(泯滅)하여야 비로소 일

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이 종(宗) 중에서는 몽념(夢念)을 움직이지 않고

곧 법성이기 때문에 버릴 것이 없고 별도로 돌아갈 바도 없기 때문에 매

우 다르다.

問. 此義與熟敎中, ‘迷於一心, 流轉六道, 悟復一心’之義, 有

何異乎?

答. 彼熟敎中, 泯二十夢, 方歸一心, 此宗之中, 不動夢念, 卽

法性故, 無所棄捨, 無別所歸, 故逈異也.

「진기」272)

272)『총수록』(韓6, pp.789c19-790a9; 高45, p.164a9-17).

‘다라니’란 총지이고, ‘진실한 보배 궁전’이란 세계 바다[世界海]이다.

‘마침내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다’란 일승 구경의 참된 근원에 사무쳐 도

달하는 것이다.

‘陁羅尼’者, 摠持也,‘ 實寶殿’者, 世界海也.‘ 窮坐實際中道

床’者, 徹到一乘究竟眞源也.

‘옛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라고 한 것은, [다음

과 같다.]

묻는다. 어째서 번뇌에 묶인 유정(有情)이 옛부터 성불하였는가?

답한다. 만약 그가 아직 닦음의 연을 일으키지 않은 때라면 ‘옛부터 성

불하였다’고 이름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금일 발심의 연(緣) 가운데 법계

의 모든 법이 비로소 단박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혜의 연(緣)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번뇌 등의 법도 또한 지혜의 연을 이루어서 일어나게 되고,

번뇌의 연(緣)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서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요컨

대 금일 발심의 연(緣)을 기다려서 곁[에 다른 아무 것도] 없이 일어나는

때가 비로소 옛부터 이루었다는 것일 뿐이다. 연(緣) 이전에 한 법도 없기

때문에 ‘옛부터’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삼승이라면 존중해야 할 정

해진 근본이 있기 때문에 오직 시각(始覺)273)이 곧 본각(本覺)274)과 같다는

뜻만을 취하여 논하는 것이나, 일승은 그렇지 않아서 존중해야 할 정해진

근본이 없어 근본과 지말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로 함을 따라서

모두 하나를 얻는다.

‘舊來不動名爲佛’者. 問. 何故, 具縛有情, 舊來成佛耶?

答. 如其未起修緣之時, 不得名爲‘舊來成佛,’ 何者, 今日發心

緣中, 法界諸法, 方頓起故. 須智緣中煩惱等法275), 亦爲成智之

緣而起, 須煩惱緣中, 亦如是也. 是故, 要待今日發心之緣, 無

側起時, 方舊來成耳. 緣以前無一法故, 不云‘舊來’也. 若三

乘, 則有所尊定本故, 唯取始覺卽同本覺之義論也, 一乘不爾,

無所尊定本, 本末不定故, 隨須皆得一.

273) 시각(始覺)은 가르침을 듣고 수행하여 처음으로 얻어진 깨달음을 말한다. 즉 후

천적인 수습(修習)을 통해 차례대로 무시이래의 미혹을 끊어 점차적으로 타고

난 마음의 근원을 알아차리고 계발(啓發)하는 것이다. 대체로 대승에서는 사

람의 마음은 본래 적정(寂靜) 부동(不動)하여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어서 청정

하여 물듦이 없음을 ‘본각’이라 하고, 후에 무명의 바람이 움직여 세속의 의식

(意識)활동을 내고, 좇아서 세간의 갖가지 차별이 있는 것을 ‘불각(不覺)’이라

고 하며, 내지 부처님 법을 받아 듣고[受聞] 본각을 계발하여 불각에 훈습되지

않고 아울러 본각과 더불어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을 ‘시각’이라고 한다. 실

차난타(實叉難陀) 역,『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상권에 의하면, 본각(本覺)에

의지하여 불각(不覺)이 있고 불각에 의지하여 시각이 있다고 설하였다.(高17,

p.703c19-20; 大32, p.585a12-13).

274) 본각(本覺)은 본래 갖추어져 있는 각성(覺性), 즉 부처님의 본래의 깨달음을 말

한다. 시각(始覺)과 상대되는 말이다. 타고나면서부터 본래 가지고 있을 뿐만 아

니라 번뇌에 오염되거나 상에 미혹되지 않는 본래 청정한 깨달음의 본체를 말

한다.『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심생멸문(心生滅門)에서 각(覺)의 뜻은 심제일

의성(心第一義性)이 일체 망념의 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일체 망념의 상을 떠

났으므로 허공계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니, 법계의 일상(一相)이 바

로 일체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며 이 법신에 의지하여 일체 여래를 본각이라 설

한다. 또한 시각에 상대하여 본각을 세우지만 시각인 때에 곧 본각이어서 별도

의 각(覺)이 발생하여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高17, p.703c13-19; 大32,

p.585a7-12).

275) 저본에는「□□」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는「善法」으로 되어 있고, 을본에는「等

□」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갑본과 을본에 따라「等法」으로 해석하였다.

「대기」276)

276)『총수록』(韓6, p.790a10-17; 高45, p.164a18-b2).

‘진실한 보배 궁전’이란 혹은 ‘국토 바다’라 하기도 하고, 혹은 ‘성기과

(性起果)와 삼덕차별과(三德差別果)’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덕(三德)277)

은 구경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이 성기과이다. ‘마침내 실제의 중도 자리

에 앉으니’란 인위(因位)의 배움이 궁극적으로 과위(果位)에 이르기 때

문이다. ‘옛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란 처음에 ‘법

(法)’자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불(佛)’자에 이르는 것이니, 처음의 시작과

마지막의 이르름이 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상이 말씀한 바, “가

도 가도 본래 자리요, 이르고 이르러도 출발한 자리이다”라는 것이 대개

이 뜻이다.

‘實寶殿’者, 或云‘國土海,’ 或云‘性起果與三德差別果’也.

然三德非究竟故, 正是性起果也.‘ 窮坐實際中道床’者, 因位

學窮至於果位故也.‘ 舊來不動名爲佛’者, 初起‘法’字, 終至

‘佛’字, 初起終至, 是一處故也. 是以, 和尙所云,“ 行行本處,

至至發處,” 盖此意也.

277) 삼덕(三德)은 부처님의 과위(果位)가 갖추고 있는 세 가지 덕상(德相)으로서,

덕(智德)·단덕(斷德)·은덕(恩德)을 말한다. 지덕(智德)은 부처님의 입장에서

일체 모든 법의 지혜를 관찰하는 것이고, 단덕은 일체의 번뇌 혹업(惑業)을 다

없애는 덕이며, 은덕(恩德)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으로 말미암아 중생에

게 은혜를 베푸는 덕이다. 징관(澄觀)의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권12에서는 “중생을 구호하여 은덕을 성취하고, 번뇌를 길이 끊어 단덕을 이루

며, 모든 행을 밝게 알아서 지덕을 이룬다.”(大35, p.589c12-14. 救護衆生成就恩德,

永斷煩惱成於斷德, 了知諸行成於智德.)라고 하였다.

「대기」278)

278)『총수록』(韓6, p.790b3-791a8; 高45, pp.164b8-165a18).

이 인(印)의 대의는 그 하얀 종이로 기세간을 표시한다. 말하자면 하얀

종이는 본래 물든 색이 아니므로 검은 것을 찍으면 곧 검고, 붉은 것을 찍

으면 곧 붉은 것과 같다. 기세간 역시 그러하여 깨끗하고 더러움에 국한되

지 않으니, 중생이 주처(住處)하면 곧 물들어 더럽고 현성(賢聖)이 주처하

면 곧 청정한 까닭이다.

此印大意, 以其白紙, 表器世間. 謂如白紙, 本不染色, 點墨卽

黑, 點朱卽赤. 器界亦爾, 不局淨穢, 衆生處則染穢, 賢聖處則

淸淨故.

그 검은 글자로 중생세간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검은 글자는 한결같이

모두 검지만 낱낱은 같지 않은 것처럼, 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번뇌 무명이

모두 스스로 어둡게 덮어서 갖가지로 차별되기 때문이다. 그 붉은 선으로

는 지정각세간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마치 붉은 선이 한 줄로 끊어지지 않

고 처음과 끝이 둥글게 이어져서 모든 글자를 꿰는 가운데 빛깔이 분명한

것처럼, 부처님의 지혜도 또한 그러하여 평등하고 광대하게 중생의 마음

에 두루하며 십세가 상응하여 두렷이 밝게 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인(印)이 세 가지 세간을 갖추고 있다.

以其黑字, 表衆生世間. 謂如黑字一等皆黑, 箇箇不同, 衆生亦

爾, 煩惱無明, 皆自暗覆, 種種差別故. 以其朱畫, 表智正覺世

間. 謂如朱畫一道不斷, 始終連環, 貫諸字中, 光色分明, 佛智

亦爾, 平等廣大, 遍衆生心, 十世相應, 圓明照矚故. 是故, 此

印具三世間.

만약『관석(觀釋)』279)을 기준으로 한다면 곧 4가지 뜻이 있다.

첫째, 만약 흰 종이를 취하면 검은 글자와 붉은 선이 모두 제거되므로

글자와 붉은 선은 종이를 여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약 기세간을 떠나면

부처와 중생이 없기 때문에 기세간 중에 중생과 부처를 갖추고 있다.

若約觀釋, 卽有四義. 一若取白紙, 則黑字朱畫皆去, 故字與朱

畫, 不離於紙. 如是若離器界, 無佛衆生故, 於器中具生及佛也.

279)『관석(觀釋)』은 숭업(崇業)의 저서이다.『총수록』(韓6, pp.778b1-779b13; 高45,

pp.151b18-153a7)에는 ‘숭업사관석(崇業師觀釋)’이라는 이름으로 인용되어 있다.

숭업은 의상의 제3세 부석적손(浮石嫡孫)으로 추정되는 신림(神琳)의 제자이며,

9세기 전반부터 중엽에 이르는 시기에 활동한 의상계의 스님이었을 것으로 추

정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삼악도가 나타

나 있으며 사람·하늘·아수라(阿修羅)280)가 각각 업보를 받는다.281)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각각 나유타(那由他)282) 무수억의 부처님이 그 가운데

서 법을 설하고 계심을 나타내 보인다.283) 하나의 티끌 가운데 티끌 수같

이 많은 세계가 있고, 낱낱 세계에 생각하기 어려운 많은 부처님이 계시

며, 낱낱 부처님 처소의 뭇 모임 가운데서 나는 항상 보리행 연설하심을

본다”284)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널리 삼세

의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일을 나타낸다”285)고 하였다.

是故, 經云,“ 於一微塵中, 現有三惡道, 人天阿修羅, 各各受

業報. 於一微塵中, 各示那由他 無數億諸佛, 於中而說法. 一

塵中有塵數刹, 一一刹有難思佛, 一一佛處衆會中, 我見恒演

菩提行.” 又云,“ 一微塵中, 普現三世一切佛佛事.”

280) 아수라(阿修羅, asura)는 투쟁하여 그치지 않는 자란 뜻이다. 불교에서는 6도

(道) 가운데 하나이며, 아수라를 제외한 인(人)·천(天)·아귀(餓鬼)·축생·지옥

을 5도라고 한다. 수미산 아래 큰 바다 밑에 그 머무는 곳이 있다고 한다. 아수라

는 부처님께 귀의하여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신중이 되었으며 이 선업(善業)의

결과로 가게 되는 선취(善趣)에 해당한다.

281)『육십화엄(六十華嚴)』권26 「십지품(十地品)」(高8, p.184a11; 大9, p.564a20-21).

282) 나유타(那由他, nayuta)는 수량 또는 시간의 단위로서, 지극히 큰 수를 의미한

다. 나유다(那庾多)·나유다(那由多)·니유다(尼由多)·나술(那術) 등으로 음역

하며, 1만·10만·1천억·1조·1구(溝) 등으로 의역한다. 『구사론』 권12에 의하

면, 1나유다는 1천억에 해당하며(高27, p.542b20-c2; 大29, p.63b14-19),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권177(高27, pp.45c8-46b2; 大27, pp.890c15-

891a20)에도 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283)『육십화엄(六十華嚴)』권26「십지품」(高8, p.184a9; 大9, p.564a16-17).

284)『화엄경(華嚴經)』(40권) 권40「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入不思議解脫境界

普賢行願品)」(高36, p.229b6-7; 大10, p.847b27-28).

285)『육십화엄(六十華嚴)』권31「불부사의법품(佛不思議法品)」(高8, p.222c24-223a1;

大9, p.601a12-13).

둘째, 검은 글자를 기준으로 해도 또한 그러하니, 중생 중에도 기세간과

부처를 갖추고 있다.

二約黑字亦爾, 故於生中, 具器及佛也.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하나의 모공 가운데 널리 시방 세계를 보니

그 세계가 미묘하게 장엄되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모였다.286) 낱낱 털구

멍 가운데 수많은 세계가 부사의한 갖가지 모양으로 장엄되어서 일찍이

비좁거나 궁색함이 없었다.287) 일체 세계 국토와 모든 부처님이 내 몸 안

에 계시면서 걸리는 바가 없으니 나는 일체 털구멍 가운데서 부처님의 경

계를 나타내고 자세히 관찰하였다”288)라고 하였다.

是故, 經云,“ 於一毛孔中, 普見十方刹, 彼刹妙莊嚴, 諸佛菩

薩會, 一一毛孔中, 億刹不思議, 種種相莊嚴, 未曾有迫隘. 一

切刹土及諸佛, 在我身內無所㝵, 我於一切毛孔中, 現佛境界

諦觀察.”

286)『육십화엄(六十華嚴)』권9「초발심보살공덕품」(高8, p.64c24; 大9, p.454b13-14).

287)『팔십화엄(八十華嚴)』권10「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高8, p.486b22; 大10, p.52

b4-5).

288)『육십화엄(六十華嚴)』권3「노사나불품(盧舍那佛品)」(高8, p.18a23-24; 大9,

p.409c6-7).

또 이르기를, “보살은 자기 마음의 생각생각마다 항상 부처님이 있어서

정각 이루심을 안다”289)고 하고, 내지 이르기를 “자기의 마음과 같이 일체

중생의 마음도 또한 다시 그러하여, 모두 여래가 있어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신다”290)라고 하였다.

又云,“ 菩薩知, 自心念念常有佛成正覺,” 乃至云,“ 如自心,

一切衆生心, 亦復如是, 悉有如來, 成等正覺.”

289)『팔십화엄(八十華嚴)』권52「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高8, p.749a22-23; 大10,

p.275b23-24).

290)『팔십화엄(八十華嚴)』권52「여래출현품」(高8, p.749a24-b1; 大10, p.275b25-26).

셋째, 붉은 선을 기준으로 해도 또한 그러하므로 부처 중에 기세간과 중

생을 갖추고 있다.

三約朱畫亦爾, 故於佛中, 具器及生也.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삼세의 모든 겁과 부처님 세계 및 모든 법

과 모든 감각기관[根]과 심(心)291)·심법(心法),292) 일체의 허망한 법이 한

부처님 몸 가운데 이 법이 모두 나타난다.293) 널리 시방의 모든 세계 바다,

있는 바 일체 중생 바다가 다하도록 부처님의 지혜가 평등하여 허공과 같

으니 모두 능히 털구멍 가운데 나타난다294)”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일

체의 모든 부처님이 일념 중에 능히 한량없는 세계와 한량없고 셀 수 없

는 청정한 중생을 다 나타내 보이신다”295)라고 하였다.

是故, 經云,“ 三世一切劫, 佛刹及諸法, 諸根心心法, 一切虛

妄法, 於一佛身中, 此法皆悉現. 普盡十方諸刹海, 所有一切

衆生海296), 佛智平等如虛空, 悉能現現毛孔中.” 又云,“ 一切諸

佛, 於一念中, 悉能示現, 無量世界, 無量無數, 淸淨衆生.”

291) 심(心, citta)은 산스크리트어 citta의 의역이며, 질다(質多)라 음역한다. 심법·

심사(心事)라고도 한다. 우주의 존재 일반에 대한 인간의 정신을 말하며, 집취

(執取)하여 사량(思量)하는 작용을 갖춘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심왕 및 심소법의 총칭이다. 색(色)과 신(身)에 상대해서 말한 것으로,

오온(五蘊) 가운데 수온(受蘊)·상온(想蘊)·행온(行蘊)·식온(識蘊)에 상당한다.

둘째는 오위 가운데 하나인 심왕을 가리킨다. 오온 가운데 식온(識蘊)에 상당하

며, 일심(一心)의 주체인 육식 혹은 팔식을 통괄해서 말한 것이다. 셋째는 심

(心)·의(意)·식(識)의 셋을 상대하여 말한 것이다. 소승유부 등에서 주장하는

셋은 같은 사물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대승유식종에서 심(心)은 곧 제8아뢰

야식을 가리키며, 적집(積集)의 뜻을 함유하고, 모든 법을 생산해내는 근본 체

(體)이므로 집기심(集起心)이라고도 하며, 곧 아뢰야식이 종자를 축집(蓄集)해서

능히 생기(生起) 현행(現行)하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 앞의 육식을 식(識)이라 일

컬으며 곧 요별, 인식작용을 하고, 제7말나식을 의(意)라고 하며 곧 사유작용을

한다. 마음의 주체와 종속작용을 가지고 나눌 때에 전자를 심왕이라 하고 후자

를 심소(心所)라고 말한다. 이상에서 말한 육식 혹은 팔식은 곧 심왕이 되고, 심

소는 그것에 따라서 생기하는 것을 가리키며 또한 곧 미세한 정신작용이다.

292) 심법(心法, cittadharma)은 우주만유를 심왕(心王)·심소법(心所法)·색법(色

法)·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무위법(無爲法)의 오위(五位)로 나눈 가운데 하나

이며, 심왕을 가리킨다. 일체만유를 색법과 심법으로 분류할 때 색법에 상대해

서 심왕과 심소를 총합하여 심법이라 한다.『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

에서는 “심법은 간략히 8가지가 있다. 첫째는 안식이며, 둘째는 이식이며, 셋째

는 비식이며, 넷째는 설식이며, 다섯째는 신식이며, 여섯 째는 의식이며, 일곱째

는 말나식이며, 여덟째는 아뢰야식이다.”(高17, p.80811-13; 大31, 855b20-22.

心法 略有八種. 一眼識, 二耳識, 三鼻識, 四舌識, 五身識, 六意識, 七末那識, 八

阿賴耶識.)라고 하였다.

293)『육십화엄(六十華嚴)』권35「보왕여래성기품(寶王如來性起品)」(高8, p.249c19; 大

9, p.627c1-3).

294)『팔십화엄(八十華嚴)』권5「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高8, p.454b19-20; 大10, p.24c

25-26).

295)『팔십화엄(八十華嚴)』권46「불부사의법품(佛不思議法品)」(高8, p.710b4-5; 大10,

p.242b25-27).

296)『팔십화엄(八十華嚴)』원문에는「界」로 되어 있다.

넷째, 흰 종이와 검은 글자와 붉은 선은 다 온전히 서로 거두어들이므로

따로 취하여 세 가지 물건이 각기 다를 수 없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세간이

융통하여 서로 포섭해서 섞여 한 덩어리가 되지만 문으로 삼는 것이 각기

달라서 역연히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하나의 인(印)은 만약 기세

간의 문으로써 관하면 곧 기세간의 해인이다.

四白紙黑字朱畫, 皆全相收, 不可別取而三物各異. 如是三種

世間, 融通相攝, 混爲一團, 而爲門各別, 歷然不動也. 故此一

印, 若以器門觀, 則是器海印.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화장세계의 있는 바 티끌의 낱낱 티끌 가운

데서 법계를 본다. 널리 광명이 부처님을 나타내는 것이 마치 구름이 모인

것과 같으니, 이것이 여래의 세계가 자재한 것이다.297)”라고 하였다

是故, 經云,“ 花藏世界所有塵, 一一塵中見法界. 普光現佛如

雲集, 此是如來刹自在.”

297)『팔십화엄(八十華嚴)』권8「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高8, p.471a20-21; 大10,

p.39b28-29).

중생의 문으로써 취하면 곧 중생해인(衆生海印)이며, 부처의 문으로써

취하면 곧 불해인(佛海印)이다. 그러므로 『소(䟽)』에서 “중생 마음속의 부

처가 부처 마음속의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시고, 부처 마음속의 중생이

중생 마음속의 부처가 설법하시는 것을 듣는다”298)라고 하였다.

以衆生門取, 則是衆生海印, 以佛門取則是佛海印. 是故, 䟽

云,“ 衆生心中佛, 爲佛心內衆生說法, 佛心內衆生, 聽衆生心

中佛說法也.”

298) 법장,『화엄경탐현기』 권1(高47, p.469a17; 大35, p.118c27-28).

묻는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다만 국한하여 말하기를 ‘능인해인’이

라고만 하는가?

답한다. 실(實)을 기준으로 하면 이와 같아서 부처님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망상이 다하여 마음이 맑아지는 뜻을 따라서 임시로

‘능인해인’이라 이름하였을 뿐이다.

問. 若爾, 何但局云, 能人海印耶? 答. 約實如是, 非局於佛,

且從妄盡心澄之義, 假名‘能人海印’耳.

원통기(圓通記)299)

299)『원통기』(韓4, p.9c6-11).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써’ 등이란, 인(因) 가운데서 보리분의 자량

을 닦기 때문이며, 능히 이르는 과(果) 가운데서 이 다함없는 만족의 보배

를 얻어서 법계의 진실한 보배 궁전을 장엄하는 것이다. ‘마침내 … 앉으

니[窮坐]’란 혹은 ‘편안히 앉는다’고 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앉음으로써 바

름[正]을 삼으니, 말하자면 법계에 궁극적으로 앉음에 칭합하는 것이다.

‘以陁羅尼无盡寶’等者, 以因中修菩提分資粮故, 能至果中,

得此无盡滿足之寶, 莊嚴法界實寶殿也.‘ 窮坐’者, 一云‘安

坐.’ 然以窮坐爲正, 謂稱於法界窮極坐也.

법계도주(法界圖註)

다라니의 다함 없는 보배로써 [以陁羅尼無盡寶]

이 보배 곳간은 부처 세계에도 있지 않고 중생 세계에도 있지 않으며,

청정한 세계에도 있지 않고 물든 세계에도 있지 않아서, 낱낱이 두렷이 밝

고 낱낱이 교섭하여 사무치니, 다 지니고 있는 법계의 다함없는 오묘한 보

배를 알고자 하는가?

그대가 열두 때 가운데 보는 것이 소리를 만나고 색을 만나며 거스름을

만나고 따름을 만나는 것이니, 바야흐로 다른 것을 따라서 얻지 않음을 알

리라.

這个寶藏, 不在佛界, 不在生界, 不在淨界, 不在染界, 一一圓

明, 一一交徹, 要識捴持法界無盡妙寶麽?

你看十二時中, 遇聲遇色遇逆300)遇順, 方知不從他得.

300) 저본에는「遊」로 되어 있으나 을본과 병본에 따라「逆」으로 바꾸었다.

법계의 진실한 보배궁전을 장엄하여 [莊嚴法界實寶殿]

인다라망은 그림자와 형상이 서로 참여하여 거듭거듭 다함이 없으니,

장엄함을 말미암지 않고 닦아 증득함을 말미암지 않고 본래 갖추어 있으

며 본래 두렷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실(實)’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 실

자(實字)는 움직일 수 없으니 움직이면 재앙이 생긴다.”301)고 하였다.

因陁羅網, 影像互叅, 重重無盡, 不因莊嚴, 不因修證, 本來

具足, 本來圓成, 故云實. 又云,“ 這介實字, 不得動着, 動著

則禍生.”

301)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25)의『어록』에는 “움직이지 말라. 움직이면 네 허리

를 때리리라.”(大47, p.768c18-19. 不得動著. 動著打折汝腰.)는 보수(保壽, 900년 경)

의 말이 전하고,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의『어록』에는 “움직이지 말라. 움

직이면 너의 노새 허리를 때리리라.”(大47, p.814a9. 不得動著. 動著打折爾驢腰.)고

하고 있으며, 경산지우(徑山智愚, 1185~1269)의『어록』에는 “움직이지 말라. 움직

이면 얼굴에 불이 나리라.”(大47, p.1042a7. 不得動著. 動著則燎却面門.)고 하였다.

마침내 실제의 중도(中道)자리에 앉으니 [窮坐實際中道床]

깊이 법성의 바다에 들어가 마침내 구경처가 없으므로 ‘궁(窮)’이라 하

고, 요긴한 나루를 차단하여 범부과 성인을 통하지 않게 하므로 ‘좌(坐)’라

하며, 참도 없고 거짓도 없어 유위(有爲)에 속하지 않으므로 ‘실(實)’이라

하고, 일체 범부와 성인이 몸담을 데가 없으므로 ‘제(際)’라 하였다. 도리

어 한 물건이라고 불러서 움직일 수 없음을 ‘중(中)’이라 하고, 삼승(三乘)

과 오성(五性)이 항상 밟아감을 ‘도(道)’라 하며, 구경에 평온하고 항상하

여 안배를 쓰지 않음을 ‘상(床)’이라 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이러한 화장세

계는 물듦을 여의어 청정한데 어찌 이와 같은 상량이 있겠는가? 만약 이

와 같은 상량이 있으면 어찌 오늘에 이르렀겠으며, 만약 상량이 없으면 열

가지 보법의 세계는 어느 곳에서 출생하는가?

왼손으로 한 번 치고 말하기를, “불사(佛事)의 문 가운데에서는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302)라고 하고, 오른손으로 한 번 치고 말하기를, “한 법도

보지 않으니 곧 여래이다.”303)라고 하였다. 알겠는가?

모래알처럼 많은 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이요,

일체 성현은 번개가 번쩍함과 같도다.304)

深入法性海, 了無究竟處, 故云窮, 把斷要津, 不通凡聖, 故云

坐, 無眞無妄, 不屬有爲, 故云實, 一切凡聖容身無地, 故云際.

喚作一物不得動著之謂中, 三乘五性常常履踐之謂道, 究竟平

常不用安排之謂床. 雖然任麽華藏世界, 離染淸淨, 豈有如此

商305)量? 若有如此商306)量, 爭到今日, 若無商307)量, 十普法界,

向什麽處出生? 左手拍一下云,“ 佛事門中, 不捨一法,” 右手

拍一下云,“ 不見一法, 卽如來,” 還會麽?

大千沙界海中漚, 一切聖賢如電拂.

302)『종용록』제34칙(大48, p.250a29)이나『종경록』권51(大48, p.720b12) 등에 보인다.

303)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의『증도가』의 한 구절이다(大48, p.396c11-12).

304) 영가현각(永嘉玄覺)의『증도가』의 한 구절이다(大48, p.396c24)

305) 저본에는「啇」으로 되어 있으나 병본에 따라「商」으로 바꾸었다.

306) 저본에는「啇」으로 되어 있으나 병본에 따라「商」으로 바꾸었다.

307) 저본에는「啇」으로 되어 있으나 병본에 따라「商」으로 바꾸었다.

옛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 [舊來不動名爲佛]

살펴보면, 천태교(天台敎)308)에서는 육즉(六卽)309)으로써 원교(圓敎)의

부처를 판석(判釋)하니, “이른바 일체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으니 부처님

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안 계시거나 성품과 모습이 항상 머문다”310)라 하

고, “얕은 데에서 깊은 데에 이르기까지 지위, 지위가 둘이 아닌 것을 부처

라 한다”311)고 하였다. 이『법계도』의『총수론(緫髓論)』에서는,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침상에서 잠이 들어 꿈 속에서 30여 역을 돌아다녔으나 꿈을

깬 후에야 비로소 움직이지 않고 침상에 있었음을 아는 것과 같다. 본래의

법성으로부터 30구절을 거쳐 다시 법성에 이르기까지 단지 하나로서 움직

이지 않았음을 비유하기 때문에 ‘옛부터 움직이지 않는 부처[舊來不動佛]’

라 한다”312)고 하였다.

按台敎, 以六即判圓敎佛,“ 所謂, 一切衆生, 皆有佛性, 有佛

無佛, 性相常住,”“ 從淺至深, 位位不二名佛.” 本圖緫髓論,

“比如有人, 在床入睡, 夢中回行三十餘驛313), 覺後方知不動在

床. 喩從本法性, 經三十句, 還至法性, 只一不動, 故云舊來不

動佛.”

308) 천태교[台敎]는 중국 수나라 때 절강성 천태산에서 지의(智顗, 538~597)가 창립

한 가르침이다.『법화경』과『열반경』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였다. 지의가『법화

경』을 중심으로 제법실상론(諸法實相論)을 주창하며 『법화문구(法華文句)』·『법

화현의(法華玄義)』·『마하지관(摩訶止觀)』의 삼대부(三大部)를 지어서 하나의

종파를 이루었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의 현광(玄光, 570년 경), 고구려의 파야(波

若, 600년 경), 고려의 제관(諦觀, ?~970) 등이 천태교를 연구하였으며, 의천(義天,

1055~1101)은 송나라에 가서 종지를 배우고 돌아와서 1097년(고려 숙종 2) 개성

에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하여 천태종이 성립되었다.

309) 육즉(六卽)은 천태종에서 계위(階位)를 여섯 단계로 나눈 것이다. 이 여섯 단계

는 사람이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깨달음과 미혹함의 차별이 있음을 표시한 것

일 뿐, 수행의 대상인 실상(實相)의 이치에서는 깨달음과 미혹함이 둘이 아니

므로 ‘육즉’이라 한다고 한다. ①이즉(理卽)은 불성진여(佛性眞如)를 갖추고서

도 알지 못하여 아무런 수행도 하지 않고 생사에 윤회(輪廻)하는 자리이고, ②

명자즉(名字卽)은 일체가 모두 부처인 것을 교시(敎示)하였지만, 내 몸이 곧 부

처라는 것을 이름으로만 아는 자리이고, ③관행즉(觀行卽)은 처음 십승관법(十

乘觀法)을 닦으면서 겸행육도(兼行六度)와 정행육도(正行六度) 등의 수행을 첨

가하여 원묘(圓妙)한 이치와 상응하는 자리이고, ④상사즉(相似卽)은 수행의 공

을 쌓아서 진지(眞智)와 비슷한 지혜를 내는 자리로서 십신(十信)에 해당하고,

⑤분진즉(分眞卽)은 한 부분씩 무명을 파하고 한 부분씩 본유(本有)의 불성을

등득하여 드러내는 자리로서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

地)·등각(等覺)에 해당하고, ⑥구경즉(究竟卽)은 원래 지닌 불성 전부가 나타나

끊을 미혹도 없고 증득할 지혜도 없는 구경원만한 자리로서 묘각위(妙覺位), 즉

불과(佛果)에 해당한다.[『마하지관(摩訶止觀)』권1(大46, p.10b7-c21)]

310) 제관(諦觀, ?~970~?),『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권1(大46, p.780a13)

311) 제관(諦觀),『천태사교의』권1(大46, p.780a18-19)

312)『총수록』(韓6, p.789c10-14). 다만 ‘옛부터 움직이지 않는 부처’가 『총수록』에는

‘옛부터 움직이지 않는다[舊來不動也.]’로 되어 있다.

313) 저본에는「」로 되어 있으나 인용된『총수록』에 따라「驛」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원(圓)을 말하고 돈(頓)을 말하여 이름으로써 부처를 나타냄은

잘못을 저질렀음이 뚜렷하니, ‘옛부터 움직이지 않는 부처’라고 이름할 수

없다. 가르침 그물의 갈등을 여의고 조사의 현묘한 관문을 부술 자는 없는

가? 청컨대 일러보라. 만약 없으면 내 스스로 말해버리겠다. 〈잠자코 있다가

말하였다.〉

산 구름과 바다 달의 정취를 남김없이 설하였는데도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 채 부질없이 슬퍼하는구나.314)

然說圓說頓, 以名現佛, 觸犯當頭, 不得名爲舊來不動佛. 莫

有離敎網葛藤, 碎祖師玄關者麽? 請道將來. 如無自道去

也.〈良久云〉

說盡山雲海月情, 依前不會空惆悵.

314)『금강경(金剛經)』 제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의 “여래는 일체의 모든 모양

이 곧 모양이 아니라고 설하며, 또한 일체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하니

라.”(如來說, 一切諸相, 即是非相, 又說, 一切衆生, 卽非衆生.)에 대한 야보송의 일부

이다.[『금강경주』권2(卍38, p.725a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