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金剛經)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第 十)
불고 수보리(佛告 須菩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어의운하(於意云何) 그대의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석재연등불소(如來昔在燃燈佛所) 여래가 옛적에 연등(燃燈)부처님 처소에 있으면서, 어법 유소득부(於法 有所得不) 어떤 법을 얻은 바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는 뜻입니다. 불야 세존(不也 世尊)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재연등불소(如來在燃燈佛所) 여래가 연등(燃燈)부처님 처소에 있으면서, 어법 실무소득(於法 實無所得) 어떤 법을 진실로 얻은 바가 없습니다. 실무소득이라고 하는 네 글자가 이 문장에서 아주 중요한 글자입니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提 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 장엄불토부(菩薩 莊嚴佛土不)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莊嚴佛國土)했다고 보느냐? 불야 세존(不也 世尊)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왜냐하면, 장엄불토자(莊嚴佛土者) 불토를 장엄한다고 하는 것은, 즉비장엄(卽非莊嚴) 장엄(莊嚴)이 아니니, 시명장엄(是名莊嚴) 이것의 이름이 장엄(莊嚴)입니다. 시고 수보리(是故 須菩提)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은
應如是生淸淨心(응여시생청정심) 응당히 이와 같이 청정심을 내어야 하느니라.
不應住色生心 (불응주색생심) 응당히 색(色)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지니,
이 말은 소리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냄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맛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느낌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법이라고 하는 것은 색성향미촉인데, 색성향미촉법이 기억 속에 저장이 되어 있는 그것은 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외진(外塵) 색성향미촉법은 밖에 있는 티끌이라고 합니다. 내진(內塵)은 현재는 색성향미촉법 밖에 없는데, 기억 속에는 과거 색성향미촉법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또 기억 속에는 미래의 색성향미촉법을 계속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색성향미촉, 미래 색성향미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생각이 좋다. 나쁘다.(好惡)고 분별합니다. 이게 전부 법입니다. 우리 머리 속에 저장된 색성향미촉 그것도 법이고, 좋다. 나쁘다.(好惡)고 하는 것도 법입니다. 또 미래의 색성향미촉을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도 법입니다.
이것을 전부 합쳐서 육진(六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지니,
應無所住 而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 응당히 머무는 바없이 색성향미촉법에 머무는 바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머무는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은 색성향미촉법을 뜻하는 것입니다.
수보리 비여유인(須菩提 譬如有人) 수보리야, 비유하건데 어떤 사람이, 신여수미산왕(身如須彌山王) 몸이 수미산왕(須彌山王)같이 높다면, 수미산은 산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 때문에 산왕(山王)이라고 합니다. 어의운하(於意云何) 시신 위대부(是身 爲大不)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언 심대세존(須菩提言 甚大世尊) 수보리가 말하되, 엄청나게 큽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왜냐하면, 불설비신 시명대신(佛說非身 是名大身)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몸 아닌 것이 큰 몸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이것이 금강경의 본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말하는지, 깊이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금강경에서 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비유이고, 반야이고, 지혜입니다. 반야는 그냥 지혜가 아니고, 정지(正智)라고 합니다. 이 반야정지(般若正智)를 말씀하는 것이 금강경입니다. 그러면 반야정지(般若正智)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제상비상(諸相非相)을 말하고 있습니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도 상(相)이고,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이라고 하는 말이 금강경 제 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 나옵니다. 반야정지(般若正智)로 보면 제상(諸相)은 비상(非相)이라고 합니다. 모든 상(相)은 상(相)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금강경의 반야정지(般若正智)입니다.
중생은 망식소견(妄識所見)이라, 허망한 인식으로 본다고 합니다. 망식소견(妄識所見)으로 보면 제상(諸相)이 제상(諸相)입니다. 상(相)은 상(相)일 뿐입니다. 망식소견(妄識所見)은 비상(非相)인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반야정지(般若正智)는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이니까. 제상(諸相)을 제법(諸法)이라고도 합니다. 같은 말입니다. 제경(諸境) 모든 경계라고도 합니다. 이런 것이 다 비상(非相)이니까. 상(相)이 아니니까.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불일불이(不一不異),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래불거(不來不去),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비상(非相)을 말로 표현한 문구(文句)입니다. 그렇다면 비상(非相)은 무엇인가?
반야정지(般若正智)로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고 불일불이(不一不異)이고 불래불거(不來不去)이니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법상, 비법상, 또 취상(取相), 취하는 내용, 설상(說相), 말하는 내용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무법상, 무비법상, 불가취(不可取), 불가설(不可說) 또 무아, 무법(법도 없고, 나도 없다.)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구조는 간단한 것입니다. 비상(非相), 상(相)이 상(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상(相)이 상(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상무자성(相無自性)이라, 상(相)에는 자성(自性)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성(自性)이 없으니까. 상(相)이 비상(非相)입니다. 상(相)이 비상(非相)이니까. 중생이 분별하는 것은 전부 상(相)입니다.
나다. 너다. 산다. 죽는다. 좋다. 나쁘다. 있다. 없다. 전부 상(相)인데, 비상(非相)이라고 하니까.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무법상, 무비법상, 불가취(不可取), 불가설(不可說) 무아, 무법이 없으니까. 망식소견(妄識所見)과 반야정지(般若正智)가 딱 만날 때, 그 망식소견(妄識所見)으로서 의심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금강경 제 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까지는 금강경의 대의를 말씀한 부분이고, 제 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부터 끝까지는 27 가지 의심을 일으키는 것을 하나하나 끓어주는 법문입니다. 그것을 27 단의(斷疑)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금강경의 대의 종설(宗說)은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제 5 까지 입니다.
그래서 약견(若見) 제상비상(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렇다면 이런 것을 어찌될까?’ 이렇게 스물 일곱 번 의심을 일으킵니다. 그 의심에 따라서 하나하나 법문을 해서 의심을 끓어줍니다. 그래서 27 단의법문(斷疑法問)라고 합니다.
지금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제 10(第 十) ‘불고 수보리(佛告 須菩提)’ 이것은 다섯 번째 의심입니다. 석가모니불과 연등불이 만나서 석가모니불이 연등불로부터 ‘너는 언제 성불하리라.’ 는 수기(受記)를 받았으니까. 연등불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인가 있지 않겠나?
그래서 ‘석가연등취설(釋迦燃燈取說)의’ 라고 합니다. ‘연등부처님이 설법을 했을 것이다.’ 라고 하는 의심입니다. 그러니까. 연등불이 분명히 설법을 했을 것이니까. ‘반야바라밀은 불가설(不可說)이다.’ 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의심입니다.
‘불가취(不可取) 불가설(不可說)’ 라고 했는데 연등불이 석가모니에게 설법을 했다면 불가설(不可說)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의심입니다. 이것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또 연등불을 만나서 석가모니가 성불을 했다면, 불가취(不可取)라고 했지만 ‘취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의심입니다.
이 부분을 끓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끓어주는 말씀이, 불고 수보리(佛告 須菩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여래가 옛적에 연등(燃燈)부처님 처소에 있으면서, 어떤 법을 얻은 바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얻은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을 수보리가 이제 알고, 부처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연등(燃燈)부처님 처소에 있으면서 어떤 법을 얻은 바가 전혀 없습니다.’ 실무소득(實無所得)이 무엇인가?
소문소설(所聞所說)이라고 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듣고 연등불이 말하는 것이 전부 소설소문(所說所問)인데, 말하는 바. 듣는 바입니다. 말하는 것은 소설(所說)이고 듣는 것은 소문(所聞)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시어언(唯是語言) 오직 말 뿐입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불을 한 것은 인사자오(引師自悟), 스승으로 인해서 스스로 깨달은 것입니다. 스승에게 무엇을 받은 것이 아니고, 인사자오(引師自悟), 스승의 말을 통해서 스스로 깨달은 것이지, 연등불로부터 무엇을 물려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법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통해서 스스로 깨닫는 인사자오(引師自悟)입니다. 또 인경자오(引經自悟), 경을 보면 그 경을 통해서 스스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에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무소득(實無所得)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보니, 반야바라밀이 청정하고, 반야바라밀이 원만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성반야(自性般若)입니다.
스승의 언어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반야정지(般若正智)를 깨달았고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연등불로부터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취(不可取) 불가설(不可說)이라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반야정지(般若正智)는 스스로 깨달아야지, 스승으로부터 취할 수도 없고, 무엇이라고 설명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상(相)이 있어야 설명을 하는데, 말하다가 보면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있다든지, 없다든지, 이것이 상(相)인데, 상(相)이 없는 것은 어떻게 얻을 수도 없고, 상(相)이 없는 것은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오(自悟), 스스로 깨닫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스승이 필요한 것인가? 인사자오(引師自悟), 스승으로 인해서 스스로 깨달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잠들어 있는데, 누가 옆에 와서 ‘일어나’ 라고 큰 소리를 질러서 잠을 깨웠습니다. 그러면 ‘일어나’ 라는 그 소리를 듣고 스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소리를 지른 사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소리로 인해서 스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성기침(引聲起寢) 소리로 인해서 잠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스승은 무엇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반야정지(般若正智)입니다.
반야정지(般若正智)는 그야말로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이니까. 무슨 생각을 해봐도 상(相)밖에는 못하고 무슨 말을 해도 상(相)밖에는 말을 못합니다. 그 어언(語言) 말을 통해서 반야정지(般若正智)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실무소득(實無所得)입니다.
반야정지(般若正智)는 본래 청정합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청정한 것인가? 비상(非相), 상(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상(相)이 있으면 청정해질 수가 없습니다. 다 먼지도 뭍고, 때도 뭍게 됩니다. 따라서 상(相)있는데 어떻게 청정합니까?
없는 상(相)이 있다고 그러면 없는 상(相)이지, 그것이 청정이 아닙니다. 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제상비상(諸相非相) 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닐 때 청정한 것입니다. 반야정지(般若正智)는 본무진로(本無塵怒) 본래 번뇌가 없다고 합니다.
무엇인가 형상이 있어야 번뇌가 있는데,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이니, 본래 청정하고 본래 번뇌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말해 주는가? 그러나 말 못해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냥 깨닫는가? 인사자오(引師自悟) 스승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스스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가르침을 들어도 그 바른 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은 존경의 대상이고 보은의 대상이지, 의지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런데 스승을 매일 자랑하고 스승을 표준으로 삼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어나라’ 고 말하는 사람이 스승인데, 그 말을 듣고 바로 일어나야지, ‘조금만 더 잘깨요.’ 라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스승에게 의지하는 것이 됩니다.
스승을 자랑하고 스승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전부 옳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스승의 말을 통해서 내가 이루어야 됩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반야(般若)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여섯 번째 의심입니다.
‘단 언포위어 불취의’ ‘언포’라고 하는 것이 장엄정토인데 장엄정토가 무엇인가? 불보살이 정토를 장엄을 합니다. 장엄이라고 하는 것은 잘 꾸며서 만든다는 것입니다. 장식이라고 하지 않고 불교에서는 장엄이라고 합니다.
극락세계는 법장비구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만들었는가? 사십팔원을 세워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극락의 장엄입니다. 그러니까. 사찰과 포교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장엄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보살이 원을 세워서 장엄을 했는데, 어떻게 했는가? 공덕을 지어서 장엄을 했습니다. 그것이 원력 장엄이고, 공덕 장엄입니다. 원을 세우지 않으면 공덕을 지을 수가 없고, 공덕을 짓지 않으면 장엄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장엄은 공덕입니다. 또 공덕은 원력입니다. 원력이 없이는 공덕을 지을 수 없습니다. 또 원력이 없이는 장엄을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온갖 장엄이 다 되고, 모든 극락세계가 다 이루어 지는데, 그것으로 본다면 반야바라밀에서 취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어긋난다고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벌써 공덕을 지어서 불국토를 세웠다면 이미 취한 것이 아닙니까? 라고 의심을 합니다. 그런데 왜 취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의심입니다. 그러니까. 그 의심을 끓어주는 법문이, 다음과 같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니까. 장엄을 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처님의 의중을 통해서 딱 아니까. 부처님의 의중대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토를 장엄했다고 하는 것은, 장엄(莊嚴)이 아닙니다. 그럴때 이것의 이름이 참으로 장엄(莊嚴)입니다. 즉비장엄(卽非莊嚴)은 무슨 말인가? 그러니까. 장엄은 반야정지(般若正智)를 깨닫는 것이 최고의 장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일반 장엄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반야바라밀을 성취하는 것이 최고의 장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속적인 장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인 장엄이 아닌 반야정지(般若正智)를 깨달은 장엄을 참으로 장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명장엄(是名莊嚴)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장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는 뜻입니다. 불국토를 건설한다고 하는데,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참뜻은 무엇인가? 성불을 했을 때 그것이 진짜 불국토를 건설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시명장엄(是名莊嚴)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불을 했을 때 그것이 정말로 불국토를 건설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불을 했을 때, 반야정지(般若正智)를 얻었을 때, 반야정지(般若正智) 장엄이 최고의 장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시명장엄(是名莊嚴)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장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세속적인 장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육조구결(六祖句結)에서 설명하시기를, ‘장엄이 세 가지가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였습니다. 불국토 건설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일 장엄은 세간불국토장엄(世間佛國土莊嚴)인데, 첫 번째는 세간불국토장엄(世間佛國土莊嚴)은 절을 짓는 조사장엄(造寺莊嚴), 사경장엄(寫經莊嚴), 보시장엄(布施莊嚴), 그 다음 공양장엄(供養莊嚴) 이런 것이 세간 불국토 장엄입니다.
그렇게 절을 짓고, 경을 쓰고, 보시하고, 공양하는 그것이 세간불정토(世間佛國土) 첫 번째 장엄입니다. 두 번째 장엄은 신불국토장엄(身佛國土莊嚴)인데, 몸이 불국토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불토장엄(身佛土莊嚴)입니다.
신불토장엄(身佛土莊嚴)는 무엇인가? 보행공경시야(普行恭敬是也) 모든 사람에게 견일체인(見一切人) 일체의 사람을 보고, 보행공경(普行恭敬) 널리 널리 다 공경행을 실행합니다. 내가 공경행(恭敬行)을 다 실행하면 그것이 자기 몸을 불국토로 만드는 것입니다.
절을 짓고, 경을 쓰고, 보시하고, 공양을 하면 그것이 세간불국토장엄(世間佛國土莊嚴)이고, 내가 누구를 보든지, 견일체인(見一切人) 아들을 보나 딸은 보나 친구를 보나 누구를 보나 다 공경행(恭敬行)을 실행하면 신불토장엄(身佛土莊嚴) 온 몸이 불국토가 됩니다. 이것이 정말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항상 공경행을 닦으면 내 몸 전체가 부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불토장엄(身佛土莊嚴)입니다. 그게 제이 장엄입니다.
그 다음 제삼 장엄이 있는데, 그것은 심불국토장엄(心佛國土莊嚴)입니다. 마음 불국토 장엄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심청정(心淸淨)이면 불토청정(佛土淸淨)입니다. 마음이 아주 청정하게 되면, 온 국토가 청정해집니다.
그래서 염염상행(念念常行) 무소득심(無所得心) 생각 생각이 얻을 바 없는 마음을 실행하면, 얻을 바 없는 마음하고 얻을 바 있는 마음은 무엇인가? 구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구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보지 않고, 그 상(相) 하나하나에 탐진애증심(貪嗔愛憎心)을 갖고 쫓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소득심(所得心)입니다. 모양을 보는 것은 상(相)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양과 동시에 모양이 아닌 모양의 자성까지 보는 그것이 상(相)과 비상(非相)을 다 보는 것입니다.
어떤 ‘모양이다.’ 라고 보는 것은 상(相)이 있다는 제상(諸相)을 보는 것이고, ‘이 모양에는 자성이 없다.’ 그래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이렇게 보면 이것은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탐진애증심(貪嗔愛憎心)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혜쌍수(淨慧雙修)입니다. 제상(諸相)이 상(相)이 아님을 보는 것은 지혜이고, 탐진애증심(貪嗔愛憎心)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정(淨), 선정(禪定)입니다. 그런데 모양만 딱 보고 ‘저것은 금이다.’ ‘가치가 있다.’ ‘이쁘다.’ ‘좋다.’ 이렇게 욕심을 내면 그것은 소득심(所得心)입니다.
‘저것이 좋다.’ 고 하면 ‘얻으려고 한다.’ 는 것입니다. 심청정(心淸淨)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소득심(所得心)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득심(所得心)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보되, 탐진애증심(貪嗔愛憎心)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부 애증(愛憎), 좋아하고 싫어하고, 탐진(貪嗔), 욕심내고, 화내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욕심이 없으면 절대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는 자기 욕심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를 낼 때는 꿈에도 그것을 모릅니다. 이게 전부 소득심(所得心)입니다. 이것이 탐진애증심(貪嗔愛憎心)입니다.
그래서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보고, 탐진애증심(貪嗔愛憎心)을 일으키지 않는 그것이 심청정(心淸淨)이고, 그 심청정(心淸淨)이 심불국토장엄(心佛國土莊嚴)입니다. 마음 불국토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불국토가 되었을 때, 그게 제일 장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말하는 것은 아니고, 절을 짓고, 경을 쓰고, 보시하고, 공양하는 그것도 세간불국토(世間佛國土)입니다. 또 몸으로 항상 누구를 보든지, 견일체인(見一切人) 아들을 보나 딸은 보나 친구를 보나 누구를 보나 다 공경행(恭敬行)을 닦는 그것은 신불토장엄(身佛土莊嚴) 온 몸이 불국토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불국토(佛國土)는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보고, 탐진애증심(貪嗔愛憎心)을 일으키지 않고 일체 공덕(功德)을 닦는 그것이 심청정(心淸淨)이고, 그 심청정(心淸淨)이 심불국토(心佛國土)입니다. 마음 불국토입니다. 이러한 장엄(莊嚴)을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장엄은 ‘불국를 자기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취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취(不可取)라고 합니다. 이것을 여기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금강경에서는 무엇을 권하는가?
취상장엄(取相莊嚴) 상(相)을 취하는 장엄도 있고, 항상 공경을 하니까. 이상장엄(離相莊嚴) 상(相)을 여의는 장엄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相)을 전부 취(取)합니다.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공경심을 가지고 다 버립니다. 상(相)을 다 버립니다. 이것은 이상장엄(離相莊嚴)입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장엄은 정심장엄(淨心莊嚴)을 권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그것이 진짜 장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심장엄(淨心莊嚴)은 어떤 것인가? 금강경에서 아주 유명한 구절(句節)입니다.
시고 수보리(是故 須菩提)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은
응여시생청정심(應如是生淸淨心) 응당히 다음과 같이 청정심을 내어야 하느니라.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 응당히 색(色)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지니,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당히 머무는 바없이 색성향미촉법에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머무는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은 색성향미촉법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심장엄(淨心莊嚴)입니다. 청정한 마음으로 장엄을 하는 것입니다.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 모든 보살 마하살은 응여시생청정심(應如是生淸淨心) 응당히 다음과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라. 이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는 것이 무엇인가? 주색생심(住色生心)을 하지 말고,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색이라고 하는 것은 상(相)입니다.
색에 ‘머문다.’ 고 하는 것은 ‘집착을 한다.’ 는 것입니다. 색에 집착을 해서, 머물게 되면 거기에 메이게 됩니다. 머물면 잡히는 것입니다. ‘색에 집착을 해서 마음을 낸다.’ 이 말은 색에 집착해서 마음을 내는 경우에는 탐진(貪嗔) 욕심내고, 성내고 애증(愛憎)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마음 밖에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머무는 것은 집착이고, 머물러서 마음을 내는 것은 탐진애증심(貪嗔愛憎心)입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색(色)과 마찬가지로 성·향·미·촉·법에도 집착(執着)해서 탐진애증심(貪嗔愛憎心) 탐하고, 성내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그 마음’ 이라고 하는 것은 탐진애증심(貪嗔愛憎心)이 아닌 반야정지(般若正智)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를 낸다.’ 고 하는 것은 ‘무엇을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출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현발(現發) ‘나타내어 일으킨다.’ 는 것입니다. 색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 이것이 반야정지(般若正智) 입니다.
탐진애증심(貪嗔愛憎心) 탐하고, 성내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을 그냥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생기심(而生其心)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장엄이다.’ 고 합니다.
문제는 색에 집착을 해서 마음을 내면 깨닫지 못한 사람이고, 색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면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깨달았는가? 깨닫지 못했는가? 하는 것은 색에 집착을 하는가? 집착을 하지 않는가? 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색이라고 했지만 색성향미촉법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색성향미촉법에 집착을 해서 탐진애증심(貪嗔愛憎心)을 일으키면 어리석은 사람이고,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지 않고 반야정지(般若正智)을 일으키면 그것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생기심(而生其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정혜(淨慧)라고 하는데 혜(慧)는 색이 색이 아닙니다. 그러나 색성향미촉법 이것은 상(相)입니다. 색성향미촉법이 아닌 것을 보는 이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보고나서 탐진애증심(貪嗔愛憎心) 탐하고, 성내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선정(禪定)입니다. 무엇을 보든지 항상 상이 상(相)이 아닌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에서 그 여래가 법성(法性), 본성(本性)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보든지, 상(相)이 상(相)이 아닌 것을 볼(見) 수 있으니까. 다른데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삼매(三昧)라고 합니다. 그 삼매를 원효성사가 금강삼매경론을 해석하면서 여섯 번째로 삼매에 대한 정의를 말한 것이 있는데, 앞에 다섯 가지가 있고, 여섯 번째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삼매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라고 초기 불교에서부터 내려옵니다. 그런데 원효성사가 이것을 해석하기를 념심(念心)전일(全一)어경지성(於境至性) ‘마음으로 하여금 경계의 본성에 오로지 하나로 하는 연고다.’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오로지 하나로 한다.’ 어디에 하나로 하는가? 어경지성(於境至性) 경계를 하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계를 하나로 하면, 그 모양과 형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식집중이지, 금강삼매는 아니라고 합니다.
경지성(境至性) 경계의 본성에 전일(全一)하는 그것이 금강삼매를 하는 것입니다. 경상(境相)에 전일하는 것이 아니라 경성(境性)에 전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념심(念心) 전일(全一) 어경지성(於境至性) ‘경계의 본성에 마음으로 하여금 오로지 한결 같이 하는 연고다.’
그 경계의 본성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삼매라고 합니다. 그래서 경계의 본성은 오는 것이 아닙니다.(不來不去) 또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금강삼매에 들어 있으면 온다. 간다. 죽는다. 산다. 좋다. 나쁘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죽네 사네 하는 것은 전부 삼매에 들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심일경성(心一境性)이 되면, ‘마음을 경계의 본성에 온전히 한결 같이 한다.’ 는 것입니다. 그것이 삼매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 가고 있는데 이것을 경상(境相)이고, 경성(境性)은 이 물건이 어디서 온 것도 아니고, 어디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비상(非相)이니까. 나(生)는 것도 아니고, 죽(死)는 것도 아닙니다. 이 경성(境性)을 한결 같이 보고 있으면, 죽고, 살고, 오고, 가는 것은 하늘의 아지랑이가 왔다. 갔다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이것입니다. 꿈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꿈을 보고 놀랄 필요도 없고, 허깨비를 보고 겁낼 필요도 없는 그것이 금강삼매경입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 장엄 정토다.’ 라고 합니다. 그것이 ‘정심정토(淨心淨土)’ 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일곱 번째 의심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수득보신(修得報身), 부처님이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갖춘 것은 공덕 보답으로 얻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원만 상호는 전부 공덕보답입니다. 요즘 성형수술을 하면 얼굴이 예뻐진다고 하는데 그것도 일종의 돈을 주고 수술을 한 것이기 때문에 보답은 보답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수술을 해서 얻은 몸이 아니고 공덕을 많이 쌓아서 공덕보답으로 얻은 몸이 삼십이상이고 팔십종호가 원만구족상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보신(報身)입니다. 그러니까. 키가 크다고 오만할 필요도 없고, 키가 작다고 비관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도 다 자기 공덕보답으로 우리 같은 몸을 얻은 것입니다. 따라서 공덕을 많이 지으면 내생에는 그 공덕보답으로 더 좋은 몸을 다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몸은 거룩한 공덕보답의 몸을 얻었으니, 그것이 취(取)한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 의심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수보리야, 비유하건데,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 이것은 수미산이 제일 큰데, ‘수미산 스스로 내가 제일 크다.’ 라고 생각하겠는가? 저 북한산이 ‘스스로 내가 북한산이다.’ ‘내 북한산이 아주 명산이다.’ 이런 생각을 하겠는가?
‘그런 생각은 없다.’ 는 것입니다. 그것과 같이 ‘산이 높아도 높다는 생각이 없고, 바다가 깊어도 깊다는 생각이 없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공덕보답으로 원만구족상을 얻었는데, ‘내가 원만구족상을 갖추어서 얻었다.’ 고 하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진짜 인물 잘생긴 사람은 자기가 인물 잘났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자기 인물이 어떤지 잘 모릅니다. 그것이 진짜 미인이고, 그것이 진짜 미남입니다. 진짜 미인은 자기 얼굴에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진짜 미녀는 자기 얼굴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보면 좋아서 죽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예쁘다고 말하지도 않는데, 매일 ‘나 예쁘지?’ 이렇게 합니다. 이것은 아이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요즘 보면 ‘동안(童顔)얼굴’ 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자기 얼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다 아이들이 하는 짓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수미산과 같고, 큰 바다와 같아서 바다가 깊은들 내가 깊다는 생각이 전혀 없고, 산이 높은들 높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그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다 얻었어도 내가 얻었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취(取)한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래는 오고 감이 없는 열반과 같은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장엄정토분 제 10 이 끝났습니다. 원문을 두 번 읽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중앙승가대학교 전 총장. 종범스님(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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