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금강경(金剛經)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제(第 8)
제 7(第 七)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에서 “무유정법(無有定法)”이 “여래가설(如來可說)”이라고 하는 말씀이 있었다. ‘부처님이 설법(說法)을 하신 것은 어떤 일정(一定)한 내용(內容)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정법(定法), ‘정(定)해진 법(法)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 법(法)은 말(言)을 하고’, ‘이 법(法)은 말을 하지 않는다.’ 무유정법(無有定法) 여래가설(如來可說)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定)해진 법(法)을 여래(如來)가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자연히(自然) ‘여래(如來)의 설법(說法)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다. ‘이것만은 분명히 여래(如來)가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되어야 그 설법(說法)을 중요하게 여기게 될 텐데, ‘여래(如來)가 꼭 말한 것이 없다.’ 이러니까. 여래(如來) 설법(說法)을 그렇게 중요(重要)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런데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얻은 것이 없고, 말한 것이 없다.’라고 했을 때, 분명히 얻은 것은 없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슨 말이 있는가? ‘얻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게 깨달음이다.
‘얻은 것도 없고, 얻지 않은 것도 없다.’ 또 ‘말한 것도 없고, 말하지 않는 것도 없다.’ 이것이 실상반야(實相般若)이다. 무지무부지(無知無不知) ‘아는 것도 없고, 알지 못하는 것도 없다.’
무설무불설(無說無不說), ‘말한 것도 없고, 말하지 않는 것도 없다.’ 이 경지(境地)를 실상반야(實相般若), 실상(實相)의 세계(世界)라고 한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무유정법(無有定法) 여래가설(如來可說)이라고 해서 ‘일정(一定)한 것을 설법(說法)한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듣고, ‘부처님 설법(說法)이 그렇게 중요(重要)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하니까.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은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의 법문(法問)을 하시는 것이다.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수보리야, 네 생각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약인(若人), 만약 어떤 사람이, 만삼천대천세계칠보(滿三千大千世界七寶)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한 칠보(七寶)를, 이용보시(以用布施), 이것으로 보시를 한다면, 시인(是人) 소득복덕(所得福德), 이 사람이 얻는바 복덕이, 영위다부(寧爲多不), 영(寧)자는 ‘얼마나’ 이런 뜻인데, 어찌 하(何)자라는 의미(意味)도 있고, 어떠하냐? 라는 의미(意味)도 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음이 되겠느냐? 라는 말인데, 얼마나 많지 않겠느냐? 얼마나 많겠느냐?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수보리언(須菩提言) 심다(甚多) 세존(世尊),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심히 많겠나이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왜냐하면, 시복덕(是福德), 이 복덕은, 즉비복덕성(卽非福德性), 곧 복덕의 성품(바탕)이 아닌지라, 시고(是故) 여래설(如來說) 복덕다(福德多), 여래가 ‘복덕이 많다.’고 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금강경(金剛經)이 이렇기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말인가? 첫째, 이것을 말하는 이유(理由)는 이렇다. 이 세상(世上)에서 가장 복이 많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칠보(七寶)라고 하는 것은 물질(物質) 중에서도 제일 좋은 물질(物質)을 칠보(七寶)라고 한다. 그리고 많은 것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한 것이 제일 많은 것이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 물질(物質)을 제일 많이 보시(布施)한 공덕(功德)이 얼마나 많겠느냐?’라는 소리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한 칠보(七寶)를 이용보시(以用布施), 이것을 보시에 쓴다면, 소득복덕(所得福德), 얻는 복덕이, 영위다부(寧爲多不), 얼마나 많겠느냐? 그러니까. 이 세상에 ‘제일 좋은 물질(物質)을 제일 많이 보시(布施)한 복덕(福德)이니까.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는 것이다.
심다(甚多) 세존(世尊), 심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왜냐하면, 시복덕(是福德), 이 복덕은, 즉비복덕성(卽非福德性), 곧 복덕성이 아닐 새, 시고(是故) 여래설(如來說) 복덕다(福德多), 이런고로 여래가 ‘복덕(福德)이 많다.’고 했습니다.
복덕성(福德性)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칠보(七寶)를 보시(布施)한 복(福)이 보시복(寶施福)인데, 이 보시복(寶施福)은 세간법(世間法)에서는 최고(最高)로 많은 복(福)인데, 삼계(三界), 중생(衆生) 세간(世間) 영역(領域)에서 밖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을 유루복(有漏福), ‘없어지는 복(福)’이라고 한다. 그런데 복(福) 중의 제일 큰 복(福)이 칠보(七寶)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채운 보시(布施)다. 이런 복(福)이라도 문제는 삼계(三界), ‘중생(衆生) 윤회(輪廻)에 속하는 복(福)’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복덕성(福德性)이 아니다.’ 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면 무슨 ‘복덕성(福德性)이 아니다.’라는 것인가? 출세간(出世間), ‘세간법(世間法)을 초월(超越)한 해탈복(解脫福)이 아니다.’ 라는 소리다.
시고(是故) 여래설(如來說) 복덕다(福德多), 이런고로 여래가 ‘복덕(福德)이 많다.’고 했습니다. 이 뜻은 “그렇기 때문에 ‘여래(如來)가 세간법(世間法)을 의지(意志)해서 복덕(福德)이 많다.’ 고 했습니다.” 라는 대답이다.
‘세간(世間)의 복(福)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출세간(出世間), ‘해탈복(解脫福)이 않된다.’고 하는 말이다. 해탈복(解脫福)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루복(有漏福)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過去)에 복(福)을 많이 받은 사람이 현재(現在)에 가난(貧窮)하고, 또 현재(現在)에 복(福)을 많이 받는 사람이 미래(未來)에 가난(貧窮)하게 된다.
이것을 삼계윤회(三界輪廻)라고 하는 것이다. 과거(過去)에 다 부자(富者)가 지금(至今) 가난(貧窮)하다. 또 지금(至今) 부자(富者)가 앞으로 가난(貧窮)해지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된다.
과거(過去)에 젊던 사람이 지금(至今)은 나이가 많다. 그러면 지금(至今) 젊은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가? 나이가 많아지는 것이다. 이것을 유루복(有漏福) 줄줄 새는 복(福)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배(寶裵)를 보시(布施)한 복(福)이라고 해서 복(福)이 없는 것은 절대(絶對)로 아니다. 굉장(宏壯)히 많은 복(福)이고 그 보다 더 높을 수가 없는 복(福)인데, 문제(問題)는 ‘이것만 가지고는 해탈(解脫)을 하지 못한다.’ 이 소리다.
그래서 무루복(無漏福)이 않된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인가? 약인(若復有人),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어차경중(於此經中), 이 경 가운데서, 수지내지사구게등(受持乃至四句偈等), 내지(乃至)는 더 나아가서는, 끝에 가서는, 마지막에 이르러서, 사구게 등을 수지해서,
위타인설(爲他人說),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해설하면, 기복(其福) 승피(勝彼), 그 복(福)이 저 칠보(七寶)를 보시(布施)한 복덕(福德)보다 더 수승(殊勝)하다. ‘저 복(福)보다 이 복(福)이 낫다.’ 그러면 이 복(福)은 무엇인가? ‘수지내지사구게등(受持乃至四句偈等) 위타인설(爲他人說)’ 이것이다.
수지(受持), 수(受)는 경(經)을 배우는 것(學)이고, 간직할 지(持)자는 내가 잘 실행(實行)을 하는 것이 지(持)자이다. 위타인설(爲他人說)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연설(演說)이라고도 하고, 해설(解說)이라는 말을 쓰는데, 해설(解說)을 한다든지, 그것을 펼쳐서 설명(說明)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복(福)을 가질 지(持)자 하고, 배울 경(經)자를 써서 지경복(持經福)이라고 한다. 그래서 복(福)에는 칠보(七寶)를 보시(布施)하는 보시복(寶施福)이 있고, 그냥 보시(布施)를 하는 것이 아니고, 보배(寶裵) 보(寶)자와 배풀 시(施)자를 쓰는 보시복(寶施福)이다.
보배(寶裵)를 보시(布施)하는 보시복(寶施福)이 있고, 경(經)을 수지(受持)하고, 해설(解說)하는 지경복(持經福)이 있다. ‘지경(持經)하는 복(福)이 있다.’는 것인데, ‘보배(寶裵)를 보시(布施)한 보시복(寶施福)을 지경복(持經福)에다가 비교(比較)를 하면 이것은 복(福)도 아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物質)을 보시(布施)하는 것은 복(福)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絶對) 아니다. 그러나 ‘물질(物質)을 보시(布施)한 그 복(福)보다 경(經)을 수지(受持)하고, 해설(解說)한 그 복(福)이 훨씬 더 높다.’ 는 말이다. 이게 승피(勝彼)다. ‘저 보다도 더 나으니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또 왜 더 나은가? 그것은 보배(寶裵)를 보시(布施)한 복(福)만 가지고는 해탈(解脫)을 못한다. 그러니까. 이 경전(經典)을 수지(受持) 독송(讀誦)하고 위인해설(爲人解說)을 하면 법신불(法身佛)을 얻어서 실상반야(實相般若)에 들어가고,
또 보신불(報身佛), 화신불(化身佛)을 얻어서 원만성불(圓滿成佛)을 하게 되는데, 지경(持經)하는 데에는 이것을 어려운 말로 ‘아는 공덕(功德)이 있고, 만드는 공덕(功德)이 있다.’고 한다.
아는 공덕(功德)을 ‘요인(了因)’이라고 한다. 요인(了因)이라는 말은 ‘아는 인이 된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경(經)을 잘 수지(受持) 독송(讀誦)하고 위인해설(爲人解說)을 하면 그 실상반야(實相般若)을 ‘알게 된다.’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법신불(法身佛)이다. 실상반야(實相般若)를 깨달으면 그것이 법신불(法身佛)이라는 말이다.
또 이렇게 수지(受持) 독송(讀誦)을 하고 위인해설(爲人解說)을 하면 자수용신(自受用身), 자기만이 몸을 받아서 몸을 쓰는 ‘자수용신(自受用身)’을 얻는데 이것을 보신불(報身佛)이라고 한다. 보신불(報身佛)은 수행(修行)이 완성(完成)되어 복덕(福德)과 지혜(智慧)가 원만(圓滿)하고 밝아 늘 진리(眞理)를 관조(觀照)하여 스스로 그 법락(法樂)을 받는 불신(佛身)이다.
그 다음에 다른 이를 위해서 많은 변화(變化)의 공덕(功德)을 일으킬 수가 있는데, 그것을 타수용신(他受用身), 변화신(變化身)이라고 한다. 다른 이에게 깨달음의 기쁨을 수용(受用)하게 하기 위하여 나타내는 불신(佛身)이다.
그런데 이런 삼종보리(三種菩提), 세 가지 종류의 깨달음, 삼종불신(三種佛身)은 지경(持經) 공덕(功德)에서 다 ‘이루게 된다.’ 그래서 ‘이루는 것’을 ‘작인(作因)’이라고 한다. ‘요인(了因)’, ‘작인(作因)’이 있는데, 그래서 이것을 ‘지혜(知慧)로서 아는 것이 있고, 노력(勞力)으로 만드는 것이 있다.’ 는 것이다.
‘노력(勞力)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을 보신불(報身佛), 화신불(化身佛)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이 법신불(法身佛)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요인(了因)’, ‘알아서 증득한다.’고 한다.
그러나 보신불(報身佛), 화신불(化身佛) 이것은 만드는 것이지, 이 보배(寶裵)를 보시(布施)한 공덕(功德)만 가지고는 법신불(法身佛)을 알 수가 없다. ‘작인(作因)은 되는데, 요인(了因)이 않된다.’ 이 소리다.
이 부분(部分)은 이해(理解)가 잘되어야 한다. 복(福)을 많이 짓는 것은 만드는 것이다. 작인(作因), 짓는 행위다. ‘아는 인(因)’을 ‘못 짓는다.’ 것이다. ‘요인(了因)’, ‘알아서 증득한다.’는 것을 ‘못 짓는다.’는 것이다.
작인(作因), ‘짓는 행위’만 짓지, ‘요인(了因)’, ‘알아서 증득한다.’는 것은 ‘못 짓는다.’ 것이다. 그러니까. 짓은 것은 사라지니고 없어지니까. ‘조작성(造作性)은 파괴성(破壞性)이다.’라는 것이다. 조작(造作)은 반드시 파괴(破壞)된다.
그러니까. 지금 친(親)한 사이는 앞으로 반드시 멀어지게(疏) 된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발심(發心)을 하지 못한다. 지금 젊은 사람은 반드시 늙고, 지금 늙은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이것을 알아야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법신불(法身佛)을 알고자 하는 ‘요인(了因)’을 얻는 것이다.
‘지금 왕성(旺盛)한 사람은 반드시 쇠약(衰弱)하고,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고, 지금 살아 있는(生) 사람은 반드시 죽고(死), 이것은 지으면 또 사라지고, 지으면 또 사라지는 이런 조작성(造作性)이기 때문에 보배(寶裵)를 보시(布施)한 것만 가지고는 세속적(世俗的)인 복(福)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경복(持經福)’ 이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법신(法身)을 아는 ‘요인(了因)’ 도 되고, 자수용신(自受用身)과 변화신(變化身)을 일으키는 작인(作因)도 여기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지경복(持經福)이 훨씬 더 높다.’ 이것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설법(說法)한 바가 없지만 설법(說法)을 않한 바도 없기 때문에 경전(經典)이 이렇게 중요하다.’ 이 말씀이다.
하이고(何以故) 수보리(須菩提) 일체제불(一切諸佛) 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及諸佛阿縟多羅三邈三菩提法) 개종차경출(皆從此經出), ‘무슨 까닭이겠는가? 하면 수보리야, 여러 부처님들과, 부처님들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의 법(法)이 모두 이 경(經)에서 나왔기 때문이니라.’
‘부처님의 설법(說法)에 의해서 일체제불(一切諸佛)이 나오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 법(法)이 나왔다.’ ‘다 이 경우로부터 나왔다.’는 말이다. 이것은 결정적(決定的)으로 경전(經典)의 그 숭고(崇古)함을 설명(說明)하는 대표적(代表的) 대목(對目)이다.
부처님의 설법(說法)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말씀(言)하는 설법(說法)이기 때문에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 의해서 나온다. 그래서 반야심경(般若心經)에도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 의해서 나온다.’
‘삼세제불(三世諸佛)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蜜多故)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得阿縟多羅三漠三菩提)’이렇게 이야기를 하였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 의해서 나온다.
그러니까. ‘일체제불(一切諸佛)이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에 의해서 나오고, 또 일체제불(一切諸佛)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 법(法)이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에 의해서 나오기 때문에 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경(經)이 바로 이 경전(經典)이다.’
이 말이다. 그래서 ‘다 이 경우로부터 나오나니라.’라고 하였다.
수보리(須菩提) 소위불법자(所謂佛法者) 즉비불법(卽非佛法),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佛法)이 아니니라.’라고 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의 반야경(般若經)에서 나오는 이 불법(佛法)이 도대체 무엇인가?
‘즉비불법(卽非佛法)’ 이것은 무슨 소리인가? 이것은 ‘말(語)과 문자(文字)로 설명(說明)되어지는 경전(經典) 뿐만이 아니다.’이 소리다. ‘곧 불법(佛法)이 아니니라.’ 이 말은 부처님만 알 수 있는 것이지, 일반범부(一般凡夫)가 알 수가 있는 법(法)이 아니다. 그래서 곧 ‘곧 불법(佛法)이 아니니라.’이 말이다.
그리고 다른 경전(經典)에서는 여기에다가 그 밑에 시명불법(是名佛法), ‘그 이름이 불법일 뿐이다.’이라는 말씀을 넣은 경(經)도 있다. ‘소위불법자(所謂佛法者) 즉비불법(卽非佛法), 그리고 시명불법(是名佛法)’이런 식으로 들어가 있다.
여기서 시명불법(是名佛法) ‘그 이름이 불법일 뿐이다.’이라고 하는 여기에는 ‘그러므로 참으로 불법(佛法)이다.’이것을 시명불법(是名佛法)이라고 한다. 그리고 즉비불법(卽非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범부(凡夫)가 알 수 없는 것이 불법(佛法)이다.’이 뜻이 즉비불법(卽非佛法)이다.
그러니까. 조금 전, 아까는 즉비복덕(卽非福德)이라고 하는 이것은 열반(涅槃)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복덕(福德)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범부(凡夫)가 알 수 없는 불법(佛法)’이기 때문에 ‘즉비불법(卽非佛法)곧 불법(佛法)이 아니니라.’고 했다.
이러니까. 어려운 것이다. ‘즉비(卽非)’라고 하는 말이 이런 경우에는 이렇기 때문에 ‘곧 아니고’, 이런 경우에는 이렇기 때문에 ‘곧 아니다.’ ‘범부(凡夫)가 모른다고 해서 즉비불법(卽非佛法)이다.’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참으로 불법(佛法)이다.’ 이것이 시명불법(是名佛法) ‘그 이름이 불법일 뿐이다.’
그래서 ‘복덕성(福德性)은 복덕성(福德性)인데, 복(福)을 짓고 덕행(德行)을 쌓을 수 있는 근본성품(根本性品)으로 복덕(福德)이 선행(善行)으로 나타난 결과(結果)지만 삼계(三界=慾界·色界·無色界)에 속하는 복덕(福德)이고, 출세간(出世間)의 해탈(解脫)을 얻지 못하는 복덕(福德)이니까. 곧 복덕(福德)이 아니다.’ 이런 뜻이다.
금강경(金剛經)에 보면, ‘즉비(卽非)’라고 하는 말이 그렇게 많이 나온다. ‘곧 아니다.’ 이것은 바로 이러한 뜻이 있다. 여기에서처럼 ‘허망(虛妄)하기 때문에 아니다.’ 이런 뜻이다. 또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니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범부(凡夫)가 알 수 없기 때문에 곧 불법(佛法)이 아니다.’이 뜻이다. 이 ‘물질(物質)만을 보시(布施)한 복덕(福德)은 윤회(輪廻)를 면(不免)할 수 없기 때문에 곧 복덕(福德)이 아니다.’이런 식이다. 이렇게 내용은 다 같다.
그러면 무엇이 같은가?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실상반야(實相般若)하고 관조반야(觀照般若)하고, 문자반야(文字般若)가 그대로 나타나는데 실상(實相)을 설명(說明)하는 부분(部分)이 있고, 그것을 ‘보라.’ ‘보게 하는 관조(觀照)가 있다.’ 그리고 이것을 설명(說明)하는 문자(文字)가 있다.
그래서 실상반야(實相般若)의 세계(世界)를 이렇게 볼 때, 그것은 범부(凡夫)가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즉비(卽非), 곧 아니다.’는 ‘범부(凡夫)가 반야(般若)라고 하는 것은 곧 반야(般若)가 아니다.’라고 한다.
또 그러면 ‘반야(般若)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는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실상반야(實相般若)의 세계(世界)이다. ‘실상(實相)’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思)으로 접근(接近)을 못한다.
생각(思)으로 접근(接近)을 했다고 하면 그것은 벌써 허상(虛想)이 된다. ‘생각(思)’은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아주 문제(問題)다. 그래서 ‘생각(思)’은 다 모양 상(相)자 ‘상(相)’인데, 이것이 제상(諸相)이다. ‘제상(諸相)은 비상(非相)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실상(實相)’이다.
그래서 이 ‘반야(般若)’에서는 무슨 ‘생각(思)’을 내도 그것은 ‘상(相)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相)이 아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알아도 이것은 망견(妄見)이다. ‘허망(虛妄)된 견해(見解)’라고 한다.
따라서 ‘무엇을 알아서 이것을 얻으려고 하면 억만년(億萬年)을 해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관조(觀照)’를 해야 한다. 딱 보고, 꿰뚫어 보는 그 노력(勞力)으로 실상(實相)의 세계(世界)와 만나는 것이다.
이 생각을 일으키고, 저 생각을 일으키는 그러니까. 사량분별(思量分別)인데, 사량분별(思量分別)을 가지고는 도저히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실상(實相)에 접근(接近) 할 수 없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오온(五蘊)이 다 공(空)함에 대해 ‘조견(照見)’을 해야 된다.
‘조견(照見)’을 하지 못하면 소용(所用)이 없다. 그런데 ‘문자(文字)’라고 하는 것은 그 실상(實相)의 세계(世界)를 ‘관조(觀照)’로서 보게 하도록 설명(說明)해 놓은 것이 문자(文字)이다. 그러니까. 문자(文字)를 통해서 ‘관조(觀照)’를 하고 ‘관조(觀照)’를 통해서 ‘실상(實相)의 세계(世界)’에 들어가면 그게 바라밀(婆羅蜜)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지금 그런 일을 한 번도 경험(經驗)을 해보지 못하고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으면 자고, 자지 아니 하면 생각하고, 지금까지 그것만 해온 것이다. 젊은 사람들을 이렇게 보면, 휴대폰을 가지고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문자도 보내고, 사진도 찍고 별별(別別) 것을 다한다.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차량(車輛)에 탑승(搭乘)해서 가는 동안이라도 가만히 앉거나 서서 쉬면서 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그것도 않하는 사람은 그냥 골아 떨어져 잠을 잔다. 이렇게 무슨 생각을 하지 않으면 잠을 자고, 자지 않으면 생각을 한다.
다들 ‘관조(觀照)’는 배워보지도 못하고, 경험(經驗)을 해보지 못한 상태이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 하고, 잠자는 것을 가지고는 ‘절대 내가 나를 볼 수 없다.’ ‘관조(觀照)’가 않된다. 그렇다면 왜 무엇 때문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하는 것에 매이지 말고, 잠자지 말고, 딱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나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수행(修行)이니, 뭐니, 하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니고, 내 집에서 내 집으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修行)이다. 자기 집에서 자신의 집으로 가는 것이다. 자기 집에서 본인 집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어디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내 집으로는 갈 수 없다. 어디 가지 말아야 한다. 자기 집에서 자기 집으로 가는 비밀(秘密)은 어디 다른 곳을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무엇 때문인가?
이 생각을 일으키고, 저 생각을 일으키는 행위(行爲)를 하지 않아야 한다. 생각이 일어나도 내버려 두고 딱 ‘관조(觀照)’를 해나가는 이것이 조견(照見)이다.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이것이 반야(般若) 즉 관조반야(觀照般若)이다.
이렇게 ‘사구게(四句偈)’만 외워도 이렇다고 하였는데, ‘사구(四句)’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구(四句)’라고 하는 것은 금강경(金剛經)에서 설명(說明)하는 의미(意味)가 잘 나타나면 그것을 ‘사구(四句)’라고 한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의미(意味) ‘사구(四句)’이지, 문구(文句) ‘사구(四句)’가 아니다. 금강경(金剛經)의 ‘사구(四句)’는 문구(文句)가 다섯 자면 다섯 자, 일곱 자면 일곱 자로 이렇게 맞추는 것이 아니다.
의미(意味)가 딱 드러나면 글자의 수가 많고, 적더라도 그것을 ‘사구(四句)’라고 한다. 그래서 금강경(金剛經)의 ‘사구(四句)’ 중에서 제일 휼륭한 ‘사구(四句)’는 1구-범소유상(凡所有相)2구-개시허망(皆是虛妄)3구-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4구-즉견여래(卽見如來)'있는바 상(相)은 다 허망(虛妄)하니 만약 모든 상(相)이 상(相) 아닌 줄 보면 곧 여래(如來)를 본다.'
이다.
그러나 글자가 맞지 않다. 3구-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은 여섯 자이다. 그런데 이 ‘사구(四句)’를 최고(最高)의 ‘사구(四句)’라고 한다. 금강경(金剛經) 제일게(第一偈)는 이것이다. 이것은 글자가 맞아서 ‘사구(四句)’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의미(意味)가 아주 원만(圓滿)하게 여기 포함 되어 있다.
법화경에도 제일(第一) ‘사구(四句)’가 있고, 화엄경에도 제일(第一) ‘사구(四句)’가 있는데, 금강경(金剛經) 제일(第一) ‘사구(四句)’는 이것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 이게 의미(意味) ‘사구(四句)’인데 금강경(金剛經)은 특히 의미(意味)가 잘 포함된 내용을 ‘사구(四句)’라고 한다.
글자의 형식을 갖춘 것을 ‘사구(四句)’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것이 금강경(金剛經)의 특징(特徵)이다. 왜 그런가? 금강경(金剛經)에는 형식(形式)을 갖춘 게송(偈頌)이 많지 않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만약 나를 현상으로 보려고 하거나 나를 음성으로 구하는 것은 그것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어니, 능히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라고는 게송(偈頌)이 있고,
一切有爲法 (일체유위법) 如夢幻泡影 (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 (여로역여전) 應作如是觀 (응작여시관)‘일체 함이 있는 것들은 꿈과 허깨비와 거품과 그림자 같으며, 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라고는 게송(偈頌)이 있는데,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처럼 이렇게 의미(意味)가 완전(完全)하지 않다. 그래서 범소유상(凡所有相)... 게송(偈頌)을 제일(第一)가는 ‘사구(四句)’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이것 외에도 간단(間斷)하게 이렇게 짧은 부분(部分)이 있더라도 의미(意味)만 잘 포함이 되어 있으면 그것은 ‘사구(四句)’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금강경(金剛經)을 독송(讀誦)하는데, 많이 이야기 하는 부분(部分)이 바로 이것이다.
일체제불급(一切諸佛及)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阿縟多羅三邈三菩提法)개종차경출(皆從此經出) ‘여러 부처님들과 부처님들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다.’ 이것이 아주 금강경(金剛經)을 단적(端的)으로 설명(說明)하는 말이다.
그래서 종종 묻는다. ‘개종차경출(皆從此經出)’ 가운데서 ‘차경(此經)’은 어떤 경(經)인가?
‘여하시차경고(如何是此經故)’라고 물을 것이다. 일체제불급(一切諸佛及)도 이 경(經)으로부터 나왔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阿縟多羅三邈三菩提法)도 이 경(經)으로부터 나왔으니까. ‘이 경(經)이 무슨 경(經)인가?’ 이렇게 질문(質問)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선지식(善知識)마다 답변(答辯)이 다 다르다. 조주(趙州)스님이 금강경(金剛經)을 보고 계시는데, 조주(趙州)스님 한테 누가 물었다. 금강경(金剛經)에 일체제불급(一切諸佛及)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阿縟多羅三邈三菩提法)개종차경출(皆從此經出)이라.
‘제불과 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이 경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데, ‘여하시차경고(如何是此經故)’‘어떤 것이 이 경(經)입니까? 조주(趙州)스님 한테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조주(趙州)스님이 앞에서부터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金剛般若波羅蜜多心經) 여시아문(如是我聞) 운운(云云) 이렇게 쭉 읽었다.
그러니까. 질문(質問)을 한 사람이 불시(不時)‘아니다.’ 그러니까. 조주(趙州)스님 말하기를 ‘나는 경을 따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금강경(金剛經)이라고 하는 것은 여시아문(如是我聞)부터 쭉 나오는 것이 금강경(金剛經)이다. 그래서 ‘이 경(經)이 무슨 경(經)인가?’ 물으니까. 조주(趙州)스님이 앞에서부터 읽기 시작을 한 것이다.
그래서 듣고 있던 청자(聽者)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조주(趙州)스님이 ‘나는 경을 따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금강경(金剛經)은 여시아문(如是我聞)부터 신수봉행(信受奉行)까지 가는 것이지, 따로 금강경(金剛經)이 어디 있나?’ 이 말이다.
이것이 도(道)이다. ‘문자(文字)’를 떠나서 따로 무엇을 찾으면 그것도 망견(妄見)이다. 또 ‘문자(文字)’를 전부(全部)라고 하면 그것도 망견(妄見)이다. 누가 나에게 와서 ‘이 금강경(金剛經)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質問)을 한다면, 앞부분에 이 말이 있다.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제십삼(第十三)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시경명위금강반야바라밀(是經名爲金剛般若波羅蜜) 이시명자(以是名字) 여당봉지(汝當奉持)’
나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금강경(金剛經)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質問)을 한다면, ‘이 경(經)은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蜜)이다. 이 이름으로써 그대는 잘 받들어 가져라.’ 이렇게 대답(對答)을 할 것이다.
조주(趙州)스님은 앞에서부터 쭉 읽었다. 그러나 나는 ‘이 경(經)은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蜜)이다. 그러니까 이 이름으로써 잘 받들어서 간직하십시요.’ 이렇게 대답(對答)을 할 것이다.
그전에 어떤 분을 만났는데, 다음과 같이 질문(質問)을 하였다.
“금강경(金剛經)에 보면, 이 경(經)을 읽으면 어떤 복(福)이 있고, 이 경(經)을 읽으면 어떤 공덕(功德)이 있다. 이렇게 설명(說明)을 했으니, ‘이 경(經)을 읽으면 어떤 공덕(功德)이 있다.’ 라고 하는 부분(部分)은 금강경(金剛經)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질문(質問)을 하였다. 이 질문(質問)의 내용(內容)이 무엇이지 이해(理解)가 가십니까?
“금강경(金剛經)에서는 ‘무엇이다.’ ‘무엇이다.’ 이렇게 쭉 설명(說明)을 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경(經)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면, 공덕(功德)이 얼마나 되고, 이 경(經)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면, 공덕(功德)이 얼마나 된다.고, 금강경(金剛經)을 소개(紹介)하고 설명(說明)한 부분(部分)도 있으니까.”
“실제로 금강경(金剛經)이라고 하는 것은 이 부분(部分)을 빼고 금강경(金剛經)이 있습니까? 그것까지 합쳐서 금강경(金剛經)이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質問)을 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경(經)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실상(實相)의 세계(世界)’. 그 ‘실상(實相)의 세계(世界)’를 보게 하는 ‘관조(觀照)의 세계(世界)’를 또 ‘실상(實相)의 세계(世界)’를 볼 수 있도록 ‘관조(觀照)’를 설명(說明)한 ‘문자(文字)의 세계(世界)’가 그게 경(經)이다.
그러니까. 금강경(金剛經)의 공덕(功德)을 설명(說明)했던, 어떤 다른 내용(內容)을 설명(說明)했던, 금강경(金剛經)에 포함(包含)된 모든 글자는 다 금강경(金剛經)이다. 그 분이 질문(質問)을 아주 잘한 것이다. 아주 영리(怜悧)한 분이다.
‘이 경(經)을 읽으면 어떤 공덕(功德)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금강경(金剛經)은 아니다.’ 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금강경(金剛經)을 ‘소개(紹介)한 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수보리(須菩提)가 질문(質問)하고’, ‘수보리(須菩提) 백불언(白佛言),’ 또 ‘불고(佛告) 수보리(須菩提)’가 있다.
그렇다면 ‘불고(佛告) 수보리(須菩提)’처럼 부처님이 수보리(須菩提)에 이야기 한 것만 금강경(金剛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수보리(須菩提) 백불언(白佛言),’ 수보리(須菩提)가 부처님께 말씀하신 그것은 수보리(須菩提)의 질문(質問)이니까. ‘금강경(金剛經)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니다. ‘수보리(須菩提) 백불언(白佛言),’이 있기 때문에 ‘불고(佛告) 수보리(須菩提)’가 나왔으니까. ‘수보리(須菩提) 백불언(白佛言),’도 금강경(金剛經)이고, ‘불고(佛告) 수보리(須菩提)’도 금강경(金剛經)이고, 또 금강경(金剛經)을 설명(說明)한 내용(內容)도 금강경(金剛經)이다.
전체(全體)가 금강경(金剛經)이다. 그리고 이 ‘금강경(金剛經)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반야(般若)를 얻도록 하는 것이 금강경(金剛經)이다.’ 지혜(知慧)다. 동아시아(東-Asia) 불교(佛敎)는 반야불교(般若佛敎)이다.
그래서 선정(禪定)이라고 하더라도 동아시아(東-Asia)에서는 반야선(般若禪)이다. 그러면 무상선(無相禪), 이 무상선(無相禪)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을 하나도 하지 않는 것’이 무상선(無相禪)이다.
동남아시아(東南Asia)에서는 무상선(無相禪)을 많이 이야기 한다. 무상선(無相禪)보다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멸진정(滅盡定), 다 멸진(滅盡)한 선정(禪定)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동북아시아(東北Asia) 불교(佛敎)는 절대(絶對) 무상선(無相禪)이라든지, 멸진정(滅盡定)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동남아시아(東南Asia) 불교(佛敎)는 망상(妄相)을 끊는 불교(佛敎)가 아니다. 지혜(知慧)를 실천(實踐)하는 불교(佛敎)이다. 이것은 완전(完全)히 틀린 것이다. 망상(妄相)을 끊는 불교(佛敎)하고, 지혜(知慧)를 실천(實踐)하는 불교(佛敎)하고는 완전(完全)히 틀린 것이다.
이쪽에서는 지혜(知慧)만 실천(實踐)하면 그만이다. 이게 관조(觀照)이다. 망상(妄相)이 일어나든 말든 아무 상관(相關)이 없다. 관조(觀照), 오로지 관조(觀照)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知慧)를 실천(實踐)해가면 그게 바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바로 보시바라밀(布施婆羅密)이고, 그게 지계바라밀(持戒婆羅密)이고, 전부(全部) 온갖 바라밀(婆羅密)이 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그것이 이 대승불교(大乘佛敎)이다.
그래서 이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것은 반야불교(般若佛敎), 반야선정(般若禪定)이지, 멸진정(滅盡定) 선정(禪定)이나 무상선(無相禪) 선정(禪定)이 아니다. 이렇게 말한다.
무상선(無相禪) 선정(禪定)에 들어가려면 우선 망상(妄相)을 끊어야 한다. 그러나 이쪽에서는 망상(妄相)을 끊는 것이 아니다. ‘망상(妄相)는 체(體)가 없다.’라고 해서 망상(妄相)이 일어나도 거기에 끌려가지 않고, 바로 본래(本來) 자리로 돌아가면 된다.
그래서 망상(妄相)이 일어나도 바로 망상(妄相)이 일어난 줄을 알아서 바로 자기가 하는 일을 계속 해나가면 그것을 정진(精進)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런 반야(般若)를 얻게 되면 그것을 도인(道人)이라고 한다.
이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선(禪)은 전부(全部) 반야선(般若禪)이다. 계속 앉아서 좌선(座禪)만 하는 것을 나무랐고, 아무것도 살피지 못하고, 멸진정(滅盡定) 선정(禪定), 무상선(無相禪) 선정(禪定)에 드는 것을 내 쫓았다.
그래서 이런 선풍(禪風)이 조사선(祖師禪) 선풍(禪風)이 되었다. 반야선(般若禪) 선풍(禪風)이 조사선(祖師禪) 선풍(禪風)이다. 반야선(般若禪)이기 때문에 선정(禪定)에서 금강경(金剛經)을 중요(重要)시 하는 이유(理由)가 바로 이런 것이다.
선문념송집(禪門拈頌集)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고려 말기 혜심(慧諶) 스님이 여러 절의 옛이야기를 칙(則)과 염송(拈頌)을 모아 수록한 책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전라남도 보성의 대원사에서 간행하였다. 30권 10책의 목판본 가운데 17권에 있는 내용이다.
어느 큰 스님이 법문(法問)을 하시기를, ‘망승(亡僧)이 천하(天下)에 향심마처거(向甚麽處去)’이런 법문이 있는데, 망승(亡僧)이라고 하는 것은 큰 절에 살았던 사망(死亡)한 산승(山僧)이 숨을 거두면, 향심마처거(向甚麽處去), 어느 곳을 향하여 갑니까?”
이게 아주 중요한 것이다. 절에 있다 보면 같이 쭉 머무르데, 하루아침에 돌아가신다. 그러면 그분이 어디로 갔을까? 실감(實感)이 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실(祖室) 스님한테 가서 여쭈어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대답(對答)을 무엇이라고 했는가?
거기에 대하여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이 대답(對答)하였다.
수류원귀해(水流元入海) 월락불이천(月落不離天)이라. ‘물은 흘러도 결국은 바다로 가고,’ ‘달은 떨어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 월락(月落)달은 떨어져도 불이천(不離天)하늘을 여의지 않는다.
이렇게 대답(對答)하였다.
죽은 스님이 어디로 갔습니까? 어느 조실(祖室)스님은 월락불이천(月落不離天)이라. ‘달은 떨어져도 하늘을 여의지 않는다.’ 이렇게 대답(對答)하였다.
또 어떤 스님은 ‘망승(亡僧)이 향마처거(向麽處去)’ ‘죽은 산승(山僧)이 어느 곳으로 갔습니까?’ 이러니까.
행선(行船)이 유재(唯在) 파초인(把梢人)이라. 행선(行船) 배를 몰고 가는 것은 유재(唯在) 오직 있다. 파초인(把梢人) 초(梢)라고 하는 것은 배(船)의 노(艪)인데, 키라고 한다. 키를 잡은 사람에게 달렸다. ‘배를 움직이는 것은 다 노를 젓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바로 자신에게 있다. 이렇게 대답(對答)하였다.
또 어떤 분은 ‘망승(亡僧)이 향마처거(向麽處去)’ ‘죽은 산승(山僧)이 어느 곳으로 갔습니까?’ 이러니까. 이렇게 하니까. 미주(美酒)는 무심항(無深衖)이라. 미주(美酒) 좋은 술 무심항(無深衖) 저 깊고 깊은 산간(山間) 벽촌(僻村)에 없다.
그러면 좋은 술이 어디 있을까? 무심항(無深衖) ‘깊은 마을’ ‘깊은 산촌(山村) 마을에는 좋은 술이 없다.’ 이렇게 대답(對答)하였다.
또 어떤 분은 ‘망승(亡僧)이 향마처거(向麽處去)’ ‘죽은 산승(山僧)이 어느 곳으로 갔습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화후(火後) 일경묘(一莄茆)라. 화후(火後) 화장(火葬)을 한 후에 일경묘(一莄茆) 한 줄기 띠풀이 자라나니라. 이렇게 대답(對答)하였다.
이게 반야직담(般若直談)이다. 실상반야(實相般若)를 떡 증득(證得)한 분은 이렇게 직관(直觀)을 하고, 직담(直談)을 하는 것이다. 배운 소리, 들은 소리는 아니다. 바로 보고, 바로 말하는 것이다. 이게 직관(直觀), 직담(直談)이다. 이것을 도(道)라고 한다.
이것은 ‘얻는다든지’, ‘얻지 못한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무득무부득(無得無不得) 얻은 것도 없고, 얻지 못한 것도 없고, 무지무부지(無知無不知) 아는 것도 없고, 알지 못하는 것도 없다. 무설무불설(無說無不說) 말한 것도 없고, 말하지 않은 것도 없다. 고 하는 이런 경지(境地)가 반야직담(般若直談)이다.
희한(稀罕)한 것이다. 교리적(敎理的)으로나 종교적(宗敎的)으로 보면, ‘어디 갔습니까?’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갔지.’ ‘좋은 곳에 가서 태어나지.’ ‘다시 이 세상(世上)에 오지.’ 이것은 신앙적(信仰的)인 말이고, 그저 염원(念願)을 표현(表現)한 것이지, 직관(直觀), 직담(直談)은 아니다.
그런데 도(道)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바로 직관(直觀)이고, 직담(直談)이다. 이것이 묘(妙)하다. ‘죽은 사람이 어디 갔습니까?’ 그러니까. ‘달은 떨어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 또 어떤 분은 ‘배를 움직이는 것은 다 노를 젓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또 어떤 분은 좋은 술은 저 산간(山間) 벽촌(僻村)에는 없다. 또 어떤 분은 화장(火葬)을 한 후에 한 줄기 띠풀이 자라나니라. 이렇게 설명(說明)을 해놓고, 그 다음에 도인(道人) 스님이 여기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무슨 뜻이 있는가?
호혈마궁(虎穴魔宮) 도(道)라고 하는 것은 호랑이 굴과 마구니 집에 스스로 들어가는 도리(道理)가 있다. 또 피모대각(被毛戴角) 피모(被毛)라고 하는 것은 ‘털가죽을 덮어 쓴다.’는 말인데, ‘축생(畜生)이 된다.’는 소리다. 대각(戴角)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에 뿔이 난다.’는 말인데, ‘짐승(禽獸)이 마음대로 된다.’는 뜻이다.
경천주지(景天柱地)‘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받친다.’는 뜻도 있고, 즉현본종(卽現本宗)‘바로 본래 자리를 드러낸 뜻도 있다.’ 이렇게 설명(說明)을 하였다.
너희들 중에서도 어떤 것이 그른 도리(道理)인지 잘 가려낸다면 장부(丈夫)가 해야 할 일을 마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반야(般若)이다. 이것은 생각(思)을 가지고는 절대(絶對) 되는 것이 아니다. 생각(思)으로는 않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는 것이 있고, 알지 못하는 것이 있고, 얻는 것이 있고, 얻지 못하는 것이 있고, 죽는 것이 있고, 사는 것이 있다. 이게 전부(全部) 생각(思)이다.
그러나 관조(觀照)를 통해서 생각(思)이 끊어진 자리에 들어 갈 때, 그게 바라밀(婆羅密)이다. 그래서 반야(般若)로 들어가는 바라밀(婆羅密)이다. 이것을 설명(說明)한 것이 금강경(金剛經)이다.
금강경(金剛經)이 왜 어렵게 되는가? 하면 금강경(金剛經)이라고 하는 이 반야(般若)가 또 ‘어떤 상(相)이 있다고 생각(思)을 한다.’ ‘반야상(般若相)을 또 짓는다(作).’ ‘물질상(物質相)을 또 짓고(作), 이것은 물질(物質)이고, 반야(般若)의 세계(世界)는 이럴 것이다.’ 이게 생각(思)이다.
그래서 금강경(金剛經)에서도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아니고, 이름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따라서 반야상(般若相)이 딱 하나 정해졌다면 그것 이외는 반야(般若)가 아니다. 그러면 ‘없다’라고 하면 또 없는 상(相)을 짓는다. 없는 상(相)이 있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실상(實相)이라고 하는 것은 ‘있다.’는 그 자취(自取)가 없는 듯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묘유(妙有)라고 한다.’ 묘유(妙有)라고 하는 것은 ‘있어도 있는 자취(自取)가 없다.’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설법(說法)을 해도 설(說)하는 것이 없이 설(說)하는 그것이 묘유(妙有)이다.
그러면 ‘없다.’라고 하면, ‘없다.’는 그 자취(自取)가 떡 그대로 있으면, 그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있다는 것이다. ‘없어도 없는 그 자취(自取)가 없어야 한다.’ 이것을 진공(眞空)이라고 한다. 이게 실상(實相)이라고 한다.
진공(眞空)묘유(妙有)가 실상(實相)이다. 그게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없어도 없는 그 자취(自取)가 없고, ‘있어도 있는 자취(自取)가 없다.’ ‘그대로 있다.’ 자취(自取)라고 하는 것은 전부(全部) 망견(妄見)에서 보여지는 허상(虛想)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 자취(自取)는 다 망견(妄見)의 소생(所生)이다. 망견(妄見)에 의해서 보여지는 허상(虛想)이다. 이 물건(物件)이 지금 높은 법상(法床)에서 떠들고 법문(法問)하고 있는 저의 모습이 보이지요? 이게 전부 여러분의 망견(妄見)으로 보는 다 허상(虛想)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있어도 있는 자취(自取)가 없다.’ 이것은 묘유(妙有)밖에 아니다. 없어도 없는 그 자취(自取)가 없다. 이것은 진공(眞空)밖에 않된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실제(實際)로 관조(觀照)를 하면 그것과 만나는 것이지, 생각(思惟)을 내어서 헤아리는 것이 아니고, 말(言說)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수지독송(受持讀誦)’하라. 여기서 수지(受持)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지경(持經)이다. 그래서 이 수지(受持)라고 하는 말(言說)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기에 들어가는(同參) 것이다.
그것은 밥(供養)을 먹는 것과 같아서 밥(供養)을 먹는 것이 아니라 내 몸(身)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물(水)이 있으면 이것은 물(水)이 아니라 내 몸(身)이 된다. 수행(修行)이 이런 것이다. 경(經)을 읽고 독송(讀誦)하는 것이 아니고, 경(經)이 내 몸(身)이 되는 것이다. 이게 수지(受持)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다라니(陀羅尼)를 외운다고 하는데 다라니(陀羅尼)를 외는 것이 아니다. 내 몸(身)이 다라니(陀羅尼)가 되고, 다라니(陀羅尼)가 내가 되는 것이다. 옛날에 보면 할머니들이 ‘무엇을 많이 가지고 오세요.’ 라고 물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말한다. 이게 도담(道談)이다.
무엇을 많이 가지고 오는데,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한다. 아주 희한(稀罕)한 소리다. 사실(事實)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이 ‘있어도 있는 자취(自取)없이 있다.’ 고 하는 것이다.
‘없다.’ 라고 하는데, ‘없는 자취(自取)가 있으면 벌써 있다.’ 는 것이 된다. ‘없는 자취(自取)없이 없다.’ 어떻게 아는가? 이것은 자기(自己)가 보지 않고는 설명(說明)이 않된다. 말로써는 극담(極談)이다. 말로써는 최대한 다한(極談) 것이다.
종범 - 성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