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金剛經) 일상무상문(一相無相分) (第 9)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수다원(須陀洹) 능작시념(能作是念) 수다원(須陀洹)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아득 수다원과부(我得 須陀洹果不) ‘내가 수다원 과(果)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언(須菩提言) 수보리가 말하되, 불야 세존(不也 世尊)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왜냐하면, 수다원(須陀洹) 수다원은, 명위입류(名爲入流) 이름이 류(流)에 든다는 뜻이로되, 이무소입(而無所入) 그러나 들어가는 바가 없으니, 불입(不入) 색성향(色聲香) 미촉법(味觸法) 색성향미촉법에 들지 않기 때문에, 시명 수다원(是名 須陀洹) 이름을 수다원이라 하나이다.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사다함(斯陀含) 능작시념(能作是念) 사다함(斯多含)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아득 사다함과부(我得 斯陀含果不)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다고 하겠느냐? 수보리언(須菩提言) 수보리가 말하되, 불야 세존(不也 世尊)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왜냐하면
사다함(斯陀含) 명일왕래(名一往來) 이실무왕래(而實無往來) 시명사다함(是名斯陀含) 사다함은 이름이 한 번 갔다가 오는 것이로되, 진실로 갔다 오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름을 사다함(斯多含)이라 하나이다.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아나함(阿那含) 능작시념(能作是念) 아나함(阿那含)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아득아나함과부(我得阿那含果不)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하겠느냐? 수보리언(須菩提言) 수보리가 말하되, 불야 세존(不也 世尊)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왜냐하면, 아나함(阿那含) 명위불래(名爲不來) 이실무불래(而實無不來) 시고 명아나함(是故 名阿那含) 아나함은 이름이 오지 않니 한다.는 뜻이로되, 실제로 다시 오지 아니함이 없기에 이런고로 아나함이라 하나이다.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아라한(阿羅漢) 능작시념(能作是念) 아득아라한도부(我得阿羅漢道不) 아라한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고 하겠느냐?
수보리언(須菩提言) 수보리가 말하되, 불야 세존(不也 世尊)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왜냐하면, 실무유법(實無有法) 명아라한(名阿羅漢) 진실로 법(法)이 아라한(阿羅漢)이라고 이름할 만한 것이 있음이 없습니다. 세존(世尊) 세존이시여, 약아라한(若阿羅漢) 작시념(作是念) 만약 아라한(阿羅漢)이 이런 생각을 하되, 아득아라한도(我得阿羅漢道) ‘내가 아라한(阿羅漢) 도(道)를 얻었다고 한다면
즉위착아인중생수자(卽爲着我人衆生壽者) 곧 아·인·중생·수자(我人衆生壽者)에 집착함이 됩니다. 세존(世尊) 불설아득무쟁삼매인중(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 최위제일(最爲第一) 시제일(是第一) 이욕아라한(離欲阿羅漢)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얻은 사람 가운데 가장 제일로 욕망(慾望)을 여윈 아라한(阿羅漢)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세존(世尊) 아부작시념(我不作是念) 아시이욕아라한(我是離欲阿羅漢) 세존이시여, 내가 이런 생각을 하되, 나는 욕망(慾望)을 여윈 아라한(阿羅漢)이 아니라고 합니다. 세존(世尊) 아약작시념(我若作是念) 세존(世尊)이시여, 내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되, 아득 아라한도(我得 阿羅漢道) 내가 아라한(阿羅漢) 도(道)를 얻었다고 한다면
세존(世尊) 즉불설수보리(卽不說須菩提) 시요아란야행자(是樂阿蘭那行者) 세존께서 수보리가 아란나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지 않했을 것입니다. 이수보리(以須菩提) 실무소행(實無所行) 수보리가 진실로 행한 바가 없기 때문에, 이명수보리(而名須菩提) 시요(是樂) 아란나행(阿蘭那行) 수보리가 아란나행을 좋아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이 한문(漢文)을 우리말로 쭉 해석(解釋)을 해본 것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아는 말이 가끔 나오는데, 어떻게 하면 경(經)에서 말하는 진실(眞實)한 뜻을 이해(理解)할 수 있을까? 이것을 경학(經學)이라고 합니다. 경학(經學)이라고 하는 것은 경(經)에서 말씀하시는 진실(眞實)한 뜻을 이해(理解)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理解)를 하면 그 진실(眞實)한 뜻을 자꾸 참구(參究)를 하고 참구(參究)를 해서 경(經)의 뜻이 확실(確實)히 보여지면 그것을 경안(經眼)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경(經)에는 경(經)에서 말씀하시는 경설(經說)이 있고, 또 경지(經志), 경(經)에서 말씀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직접(直接)보면, 경안(經眼)을 얻은 것입니다. 경안(經眼)을 얻고 나면, 자기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하고, 행동해 온 것하고, 경(經)을 통해서 얻은 것하고, 어떤 것은 합(合)하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합(合)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꾸 수련(修練)을 하면, 나중에는 같아집니다. 이것을 수행(修行)이라고 합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 주제(主題)는 사다함(斯多含)이나 아나함(阿那含)이 아니고,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입니다.
근본(根本) 주제(主題)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입니다. 반야(般若)로 모든 것을 보는 것인데, 반야(般若)로 모든 것을 보(見)면, 첫째 무엇을 보는가? 제상비상(諸相非相)이라, 반야(般若)에는 제상비상(諸相非相)입니다. 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닙니다. 그것이 반야(般若)입니다.
그리고 무아무법(無我無法)입니다. 나(我)도 없고, 법(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衆生)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것은 상(相)이 상(相)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그것에 메이고, 나(我)에게 메이는 그것이 아집(我執)입니다. 그리고 나(我)와 세계(世界)를 구성하는 법(法)에 메이는 법집(法執)입니다. 이것을 중생(衆生)이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중생(衆生)이 격(擊)게 되는 것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고, 자작자수(自作自受)라. 업(業)에 의해서 스스로 얻는 것이고, 자기(自己)가 지어서 자기가 받습니다. 항상 이것이 척도(尺度)가 되어야 합니다.
제상비상(諸相非相)이고, 무아무법(無我無法)이다. 이것에 대한 정립이 되지 않고 흔들리게 되면, 캄캄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제상비상(諸相非相)이고, 무아무법(無我無法)입니다. 그래서 상(相)에 걸리고, 아(我)에 걸리고, 법(法)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잘했는데, 왜, 이 모양인가?’라고 하는 것은 자업자득(自業自得)과 자작자수(自作自受)를 믿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재수(財數)가 좋은가?’ ‘운(運)이 좋은가?’ ‘누구를 잘 만났냐?’ 라고 하는 것은 전부(全部)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를 않믿는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모든 상(相)은 상(相)이 아니고 제상비상(諸相非相)이고 무아무법(無我無法)입니다. 나(我)도 없고, 법(法)도 없는 것입니다.
‘나(我)’라고 하는 것은 이 몸(身)에서 나(我)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身)을 구성(構成)한 이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수상행식(受想行識) 그 하나하나가 법(法)인데, 그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온개공(五蘊皆空)은 무아무법(無我無法)입니다. 그리고 좋은 일을 당하든, 나쁜 일을 당하든 절대(絶對) 공짜가 없습니다. 전부(全部) 고통(苦痛)받고 괴로움에 빠지는 것은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를 이것을 믿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밖에서 무엇을 구하기 때문에 전부(全部) 다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觀點)에서 보면, 이런 것도 다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첫 번째가 네 가지 성인(聖人)의 과위(果位)를 설명(說明)하는 중에 반야부(般若部) 이전(以前)부터 있었던 사과성인(四果聖人)이라고 하는 있었는데, 성인(聖人)을 사과(四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第) 일과(一果)가 수다원과, 제(第) 이과(二果)가 사다함과, 제(第) 삼과(三果)가 아나함과, 제(第) 사과(四果)가 아라한과입니다. 이것을 사과(四果) 성인(聖人)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第) 일과(一果)는 첫 번째 과위(果位)인데, 인(因)을 닦았으면 과(果)가 생깁니다.
그러면 첫 번째, 수다원과는 무엇인가? 경전(經典)에서 수다원(須陀洹) 명위입류(名爲入流) 라고 하였습니다. 류(流)에 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류(流)’ 자(字)는 무리 ‘류(類)’ 자(字)와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무리에 든다는 말인데, 무리는 ‘성인(聖人)의 무리에 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인(聖人)의 무리에 드는 것인데, 지금까지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중생(衆生)의 무리에 있었습니다. 중생(衆生)의 무리(衆)에 있다가 성인(聖人)의 무리에 들어간다고 해서 예류 또는 참례한다고 합니다.
중생(衆生)의 무리(衆)에 있다가 성인(聖人)의 무리(衆)에 참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류라고 하고 입류(入流)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중생(衆生)의 무리(衆)에 있다가 성인(聖人)의 무리(衆)에 들어가는가?
본문(本文)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입색성향미촉법(不入色聲香味觸法)일새,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 들지 않으면 성인(聖人)의 무리에 들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생(衆生)은 왜 중생(衆生)인가?
그것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집착(執着)하기 때문에 성인(聖人)의 무리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중생은 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무상하고 공(空)하다고 하는 이것을 중생(衆生)은 모릅니다. 그래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서 자꾸 무엇을 구하려고 합니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은 상(相)인데, 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상(相)이 비상(非相)이라고 하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들리는 것에 따라가고, 보이는 것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꿈(夢)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습니다. 이것을 몽환(夢幻)이라고 합니다. 다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이 몽환(夢幻)과 같은 상(相)이 아닌데, 중생(衆生)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유구개고(有求皆苦)라, ‘구함이 있는 것은 다 고통(苦痛)이다.’라고 하는 것을 모릅니다. 제상비상(諸相非相)이고, 유구개고(有求皆苦)라, 무엇을 구하든지, 마지막에는 늘 고통(苦痛)입니다.
그런데 한참 구(求)할 때는 구(求)하는 결과(結果)가 고(苦)라는 것을 꿈(夢)에도 결코 모릅니다(不知). 그래서 중생(衆生)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世上)에서 구하는 그 어떤 것도 끝내는 고통(苦痛)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릅니다. 유구개고(有求皆苦)입니다.
구함이 있는 것은 다 고통(苦痛)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입니다. 색(色)이라고 하는 것은 다 공(空)입니다. 그래서 제상비상(諸相非相)이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것을 철저(徹底)히 알아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집착(執着)하지 않고 구하는 행위(行爲)를 일으키지 않게 되면 그것이 첫 번째 수다원과(須陀洹果)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딱 깨달음(覺)을 얻어서 ‘아, 색이 공(空)하구나’ 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 구하면 고통(苦痛)이구나’ 이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입관입도(入觀入道)입니다. 그것이 관법(灌法)에 들게 되고, 그런 도(道)에 드는 것입니다.
색(色)이 공(空)함을 보게 되면 그제서야 관법(灌法)에 들어갑니다. 또 색(色)이 공(空)한 도(道)에 들어갑니다. 그것이 입도(入道)입니다. 그렇게 입도(入道)를 하고 입관(入觀)을 하면 그러한 경지(境地)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데 특별히 따로 들어가는 곳이 있어서 입류(入流)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입류(入流)라고 한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면 확실(確實)히 도인(道人)이 됩니다.
눈(眼)에 보이고(見), 귀(耳)에 들리는데(聽), 집착(執着)하지 않고, 구(求)하는 행위(行爲)를 멈추면 모든 형상(形相)에서 고통(苦痛)이 오고(來), 구(求)하는데서 고통(苦痛)이 옵니다. 상(相)에서 벗어나게 되고 구(求)하는 행위(行爲)를 멈추면 고통(苦痛)은 없습니다. 이것을 수다원과(須陀洹果)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사다함(斯陀含)입니다. 사다함(斯陀含)은 명일왕래(名一往來)라고 하였습니다. ‘한 번 갔다가 온다.’고 해서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사다함(斯陀含)의 아라한들은 ‘천상에 태어났다가 다시 한 번 내려온다.’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일왕래(一往來)’라고 합니다.
물론, 천상(天上)에 갔다가 태어나는 것도 됩니다. 현상(現想)으로 설명(說明)을 하면 그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도(修道) 도(道)를 닦는 것으로 설명을 하면, 도(道)를 닦을 때, “어떤 마음 상태를 ‘일왕래(一往來)’ 라고 하는가?” 그것에 대한 의견은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초기(初期) 불교(佛敎)는 현상(現想)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 ‘천상(天上)에 갔다가 다시 세상(世上)으로 내려 온다.’는 것입니다. 수도(修道)의 설명은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처음에 입도(入道)해서 색(色)이 공함(空)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또, 구(求)하는 것이 고통(苦痛)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도(道)를 깨달은 오도(吾道) 단계(段階)인데, 색(色)이 공함(空)을 알고 구(求)하는 것이 고통(苦痛)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과거(過去)에 늘 구하던 습성(習性)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求)하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볼 때, 구(求)하려고 하는 마음이 툭 일어나고 귀로 들을 때, 구(求)하려고 하는 마음이 툭 일어나고 코로 느낄 때 구(求)하려고 하는 마음이 툭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道)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구(求)하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도(道)를 깨달은 사람은 구하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즉지(卽止)’ 딱 멈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번 갔다가 온다(一往來)’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求)하는 생각이 일어난다.’는 소리입니다. 아주 중요(重要)한 것입니다. 마음(心) 공부(工夫)를 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해서 많은 힘이 드는데, 깨닫고 나면 아주 쉽다.’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이 툭 일어난다고 가정(假定)했을 때,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일어나는 데로 쫒아 간다.’는 것입니다. ‘화가 나면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생각이 일어날 때 거기서 즉지(卽止), 탁 멈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래(一來), 한 번 온다.’고 합니다. 두 번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운 생각이 턱 일어난다.’면 그것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어날 때 ‘즉지(卽止)’ 멈추어 버립니다. 그것이 ‘일래과(一來果)’입니다. ‘한 번 갔다가 온다(一往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좋다.’고 한다면 ‘한 번 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돌아 올 것이 아닙니까? 거기서 ‘즉지(卽止)’ ‘멈춘다.’ 는 것입니다.
과거(過去)의 무슨 일이 턱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과거(過去)로 갔던 것이 돌아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거기서 턱 멈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래(一來), 한 번 온다.’는 것이 마음 공부(工夫)의 아주 중요(重要)한 문제(問題)인데 전념(前念)이 기념(起念)에 후념(後念)이 즉지(卽止)라, ‘앞생각이 생각을 턱 일으키면 뒷생각이 곧 그쳐 버린다.’ 고 하였습니다.
그 앞생각이 생각을 턱 일으키는 그것이 ‘온다(一來).’ 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 그쳐 버립니다. 그러면 ‘저 사람이 밉다.’ 고 한다면 이것이 일래(一來), ‘왔다.’고 합니다. 과거 같으면, 미우면 앞에서 욕을 한다든지, 뒤에서 막 험담을 한다든지, 아니면 쫒아가서 싸운다든지, 이런 방법으로 해결을 할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딱 즉지(卽止), 멈추어 버립니다.
‘내가 공연한 생각을 내는구나.’ 기념즉지(起念卽止),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에 곧 멈추어 버린다.’ 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부(工夫)입니다. 일으키는 순간 즉지(卽止) 곧 그쳐 버립니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났을 때 곧 해결(解決)이 되어 버리면 아주 효율(效率)적으로 됩니다.
사다함(斯陀含)은 ‘무서운 생각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래(一來), 한 번 온다’ 입니다. 그리고 곧 즉지(卽止), 그쳐 버립니다. ‘무서울 것이 없다.’ 왜냐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유구개고(有求皆苦)라. ‘구하는 것이 다 고통이다.’ 는 것을 알고, ‘구할 생각이 일어난다.’ 면 바로 ‘멈춘다.’는 것입니다.
유구개고(有求皆苦) 구하는 것이 있는 것은 다 고통입니다. 보고, 듣는 것에 ‘마음이 일어난다.’면 ‘멈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까. 그리고 여기서는 이실무왕래(而實無往來), ‘진실로 갔다 오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실무왕래(而實無往來) ‘진실로 갔다 오는 것이 없다.’고 하는 무엇인가? ‘멈추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멈춘 사람이 없고, 또 들어 간 사람이 없다.’는 것인데, 왜 그런가?
그것은 ‘무아(無我)’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무아(無我)’를 깨달았기 때문에 아라한도 아라한이 아니고, 수다원도 수다원이 아니고, 사다함도 사다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얻었어도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가?
얻었다고 하면 아인중생수자상(我人衆生壽者相)에 집착한 것이고 그것은 ‘무아(無我)’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알고 보면 전부 아집(我執), 망상(妄相) 때문에 화도 나고, 욕심(慾心)이 나는 것입니다. ‘무아(無我)’를 깨달으면 화가 나다가도 딱 난 것을 알고, ‘아!’ 하고 무아(無我)니까. 그치게 됩니다.
사다함(斯陀含)은 현상(現想)을 보고 욕심(慾心)이 나다가도 그치게 됩니다. 왜, 색(色)이 공(空)하니까.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 무아무법(無我無法)에 대한 깨달음(覺)이 탁 밝아(明) 있으면 과거(過去)의 습기(習氣), 집착(執着)의 습기(習氣), 욕심(慾心)의 습기(習氣)로 생각(思)이 일어나도(起) 전념(前念)이 기념(起念)에 후념(後念)이 즉지(卽止)라. ‘앞생각이 생각을 턱 일으켜도 뒷생각이 곧 그쳐 버린다.’ 고 합니다.
사다함(斯陀含)은 마음 공부를 하는 사람은 화가 났을 때, 일어나는 순간에 그것을 딱 알아 차려서 그쳐 버려야 그것이 마음 공부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쾌심하다고 어디에 입력해 놓고, 속에 담아 놓고, 꽁하는 것은 마음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념즉지(起念卽止), 생각이 일어났을 때 곧 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났다.’ 그때 곧 ‘멈추어야 된다.’ 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공부입니다. 무서운 생각이 일어났다면 그 무서운 생각이 ‘왜 일어나는가?’ ‘구(求)하는 마음(心)과 색(色)이 공(空)함을 모르는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실상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니까.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고,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니까. 구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무아무법(無我無法)이니까. 억울(抑鬱)하고 분(忿)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아집습관(我執習慣)으로 억울(抑鬱)하고 분(忿)하고, 과거(過去)에 색(色)이 공(空)함을 모르고 살던 습관(習慣)으로 자꾸 집착(執着)을 하고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수다원과(須陀洹果)만 얻어서는 그것이 멈추어 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사다함과(斯陀含果)까지 와야 어떤 생각이 일어났을 때, ‘즉지(卽止) 그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 단계(段階)입니다. 이렇게 ‘지혜(知慧)를 닦아 나가는데도 길(道)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예를 들어서 꿈(夢)에서 딱 깨었을 때, 그것은 첫 번째 수다원(須陀洹)입니다.
그러나 꿈이 아닌 세계(世界)가 펼쳐졌는데, 아직도 꿈의 기억(記憶)이 남아서 그 꿈을 꾸는 것처럼 왔다 갔다 한다면 그것이 일래과(一來果)이며, 그것이 사다함(斯陀含)입니다. ‘꿈을 꾸던 버릇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버릇을 멈추는 ‘즉지(卽止)’가 아직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아나함(阿那含)입니다. 명위불래(名爲不來) 이실무불래(而實無不來) ‘오지 않는다.’ 는 것이로되 ‘진실로 오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왜, 오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인가? 그것은 무아(無我)니까. ‘오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구사론(俱舍論)에 의하면 ‘저 높은 천상(天上)에 올라가서 다시는 하계(下界), 욕계(欲界) 낮은 세계(世界), 욕망(慾望)이 지배(支配)하는 세계에 내려 오지 않는다.’고 설명(說明) 하였습니다.
세 번째 아나함(阿那含)의 세계(世界)는 ‘욕습(慾習) 영진(永盡)이라. 욕망(慾望)의 습관(習慣)이 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욕습(慾習)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을 ‘불래(不來)’ 라고 합니다. 욕망(慾望)의 습관(習慣)이 일어났을 때 멈추고, 분(忿)한 마음이 일어났을 때 멈추고 멈추어서 오래 오래 멈추다 보면, 그 욕심(慾心)도 분심(忿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세 번째 아나함(阿那含) ‘불래(不來)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부터는 화가 나지 않습니다. 화가 났을 때 그치면, 그것은 두 번째 일래(一來)사다함(斯陀含)입니다. 분심(忿心)이 아예 나지 않으면 세 번째 아나함(阿那含) ‘불래(不來)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중생들도 때때로 ‘화(忿心)가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화(忿心)가 일어났을 때 참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화(忿心)가 나지 않는 상태, 아나함(阿那含)이 되면, 화(忿心)가 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욕습영진(慾習永盡)’ 욕심(慾心)의 습관(習慣)이 영원(永遠)히 다해서 ‘불래(不來) 오지 않는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고 합니다. 따라서 ‘욕계(欲界)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고, ‘불래(不來)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아라한(阿羅漢)입니다. 아라한(阿羅漢)은 무엇이라고 설명(說明)을 했는가? 아라한(阿羅漢)은 ‘무쟁삼매(無諍三昧)’라고 하며 ‘이욕(離欲) 욕망(慾望)을 여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요(是樂) 아란나행(阿蘭那行) 아란나행을 좋아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라한(阿羅漢)을 번역(飜譯)을 할 때, 세 가지로 번역(飜譯)을 합니다.
①첫 째는 없을 무(無)자, 도둑 적(賊)자, ‘무적(無賊)’이라고 번역(飜譯)을 하게 됩니다. 도둑은 번뇌(煩惱)입니다. ‘번뇌(煩惱)는 도둑이다.’라고 비유(比喩)를 했습니다.
도둑이 무엇을 하는 존재(存在)인가? 나에게 손해(損害)를 끼치는 존재(存在)가 도둑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손해(損害)를 끼치는 존재(存在)는 무엇인가? 그것은 번뇌(煩惱)입니다. 나의 번뇌(煩惱)가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慾心), 나의 분심(忿心) 이런 것이 나를 괴롭힙니다.
나의 어리석음(癡心), 어리석어서 그런데 누구를 원망(怨望)하겠는가? ‘눈에 콩깍지가 쉬었다.’ 고 하는데 누가 콩깍지를 가지고 덮었나? 내 스스로 쉬었는데, 누구를 원망(怨望)하겠는가? 그러니까. 나의 어리석음(癡心), 욕심(慾心), 분심(忿心), 분노(忿怒) 이런 것이 나를 괴롭히는데, 그것이 전부 ‘나의 도둑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라한(阿羅漢)은 ‘탐진치(貪嗔痴)가 다 없다.’그 소리입니다. 그래서 ‘무적(無賊)’ 이라고 합니다. 탐진치(貪嗔痴)가 하나도 없이 사라진 상태(常態)를 아라한(阿羅漢)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적(無賊)’ 이라고 합니다. 아라한(阿羅漢)이 되면 번뇌(煩惱)가 하나도 없고(全無), 탐진치(貪嗔痴)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다함(斯陀含) 같은 ‘일래(一來)’도 아니고 아나함(阿那含) 같은 ‘불래(不來)’도 아니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욕심(慾心)의 습관(習慣)이 다해서 영원(永遠)히 없습니다.
②두 번째는 ‘불생(不生)’ ‘다시는 생사를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첫 번째, 아라한(阿羅漢)이 되고, 게송(偈頌)을 읊은 것이 있는데, 초기경전 아함경에서 계속 반복(反復)적으로 나옵니다.
부처님이 첫 번째 아라한(阿羅漢)이 되었을 때, 그 상태(常態)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1. 아생은 이진이라.(我生已盡) ‘나의 생사(生死)는 이미 끝났다.’ 생사(生死)는 욕심(慾心) 때문에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욕심(慾心)이 없어지면 생사(生死)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도 무명행(無明行)... 이렇게 나오는데, 무명행(無明行) 그것이 욕심(慾心)입니다.
그래서 명색(名色)이 거기서부터 태어나는(生) 것입니다. 그런데 무명행(無明行) 그것이 없어지면, 명색(名色)이 없어집니다. 그 다음은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탐진치(貪嗔痴)가 하나도 없이 다 끝나니까. 생사(生死)가 끝나버린 것입니다.
2. 범행은 이립(梵行已立)이라. ‘닦아야 할 도(道)는 닦았다.’ 그러면 닦아야 할 ‘도(道)’ 는 무엇인가? ‘탐진치(貪嗔痴)를 닦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진치(貪嗔痴)’를 깨끗이 다 없앴다고 하는 것입니다. ‘탐진치(貪嗔痴)’를 일으키지 않으니까. 생사(生死)가 끝나고, ‘탐진치(貪嗔痴)’를 깨끗이 정화(淨化)를 시켰으니까. ‘도(道)’를 다 닦은 것이고,
3. 소작은 이변(所作已弁)이라. ‘해야할 바는 이미 다 했다.’ 삼매(三昧)와 신통(神通)은 다 얻었다는 것입니다. 아라한(阿羅漢) 이후에는 삼매(三昧)가 여일(如一)하게 됩니다. 그러면 삼매(三昧)와 신통(神通)을 다 얻었기 때문에 ‘해야할 것은 다 했다.’고 한 것입니다.
4. 불수후유(不受後有)라. ‘다시 생사(生死)를 받지 않는다.’ 이렇게 됩니다. ‘탐진치(貪嗔痴)’를 일으켜야 생사(生死)를 받는데 ‘탐진치(貪嗔痴)’를 일으키지 않으니까. ‘생사(生死)를 받지 않는다.’ 그것을 아라한(阿羅漢)이라고 하고 그것을 ‘불생(不生)’이라고 설명(說明)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생사(生死) 가운데서 고통(苦痛)이 있는 몸을 받지 않는다.’ 이것이 ‘불생(不生)’입니다. 고통(苦痛)이 있는 몸을 왜 받는가? 그것은 구(求)하는 욕심(慾心) 때문에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 왜 나를 낳았나요?’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 아버지가 낳은 것이 아니고 내가 세상(世上)을 그리워해서 구(求)하려고 하는 욕심(慾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 도움을 받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어머니, 아버지가 그냥 생짜배기로 만든 줄을 알고 있습니다. 절대 생짜배기로 낳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世上)에 나와 보고 싶은 욕심(慾心)이 있었습니다.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부모(父母)의 도움을 받아서 왔다.’ 이것입니다.
자기업(自己業),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는 꿈에도 모르고, 부모(父母)님이 나를 낳아서 그것도 잘 낳지도 못하고 근사한 부모(父母)도 아니어서 부모(父母) 원망(怨望)합니다.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항상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 색즉시공(色卽是空) 제상비상(諸相非相)이라는 것을 턱 보고(觀) 있으면 번뇌(煩惱)가 생겨나지(不生) 않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니까. 자꾸 구(求)하는 욕심(慾心)이 생기고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라한(阿羅漢)은 다시는 생사(生死)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탐욕(貪慾)을 끊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것을 ‘불생(不生)’ 이라고 합니다.
③세 번째는 ‘응공(應供)’이라고 합니다. ‘공양(供養)에 응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응공(應供)’이 무엇인가? ‘생사(生死)를 벗어났기 때문에 생사(生死)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으로부터 공양(供養)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사(生死)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생사(生死)를 벗어난 사람에게 공양(供養)을 올리면 그것은 복(福)을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라한(阿羅漢)을 복전(福田)이라고 합니다. ‘공양(供養)에 응(應)하는 복전(福田)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佛敎)입니다. 인생의 복전(福田)이 됩니다. 열심히 수행하여 생사(生死)를 벗어난 아라한(阿羅漢)에게 생사(生死)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衆生)이 공양(供養)을 올리면 그것은 한(限)없는 복(福)이 되는 것입니다. 아라한(阿羅漢)은 중생(衆生)이 복(福)을 심는 복밭(福田)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복전(福田)’이라고 합니다.
공양(供養)을 올리면 공양(供養)을 올리는 그 사람이 감사(感謝)하게 여기는 그것이 불교(佛敎)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복(福)을 지을 수 있는 기회(機會)를 얻었기 때문에 감사(感謝)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심(信心)’이라고 합니다.
아주 중요(重要)합니다. 자선(慈善)과 공양(供養)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어떤 것이 자선(慈善)이고 공양(供養)인가? 자선(慈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선행(善行)을 베푸는 입장(立場)이고, 공양(供養)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복(福)을 심는 입장(立場)입니다.
복(福)을 심는 사람이 고마운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전혀 틀리니까. 불교(佛敎)의 보시공양은 아주 뜻이 깊은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복(福)을 심는 것이지, 내가 어디다가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아주 기본적인 신심(信心), 그것이 응공(應供), 공양(供養)에 응(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쟁(無諍)’이라고 하는 것은 적정(寂靜)고요한 것, 번뇌(煩惱)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무쟁삼매(無諍三昧)라고 하는 것은 번뇌(煩惱)도 않일어나고 삼매(三昧)의 장애(障碍)가 없습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을 보는데 전혀 흔들림이 없고, 무아무법(無我無法)을 보는데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것을 ‘삼매(三昧)에 대한 장애(障碍)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번뇌(煩惱)를 일으키면 장애(障碍)가 되어서 번뇌장(煩惱障)이 일어나고, 삼매(三昧)에 장애가 되어 삼매장(三昧障)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번뇌장(煩惱障), 삼매장(三昧障) 다 않 일어납니다. 그것을 무쟁삼매(無諍三昧)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수도(修道)로 아라한(阿羅漢)의 경지(境地)를 설명(說明)을 하면 ‘번뇌(煩惱)가 영진(永盡)’ 번뇌(煩惱)가 영원히 다 없어져서 ‘여물무쟁(餘物無諍)이라’. 어떤 대상(對相)과도 다툼이 없습니다. 이러한 경지(境地)를 아라한(阿羅漢)이라고 합니다.
‘다툰다.’고 하는 것은 ‘얻은 마음이 있을 때 다툰다.’고 합니다. ‘저 사람, 왜 저렇게 싸우냐?’ 서로 자기가 원(願)하는 것을 얻으려고 싸우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그러니까.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얻는 것이 괴로움이라.(有得皆苦), 유구개고(有求皆苦) 얻는 것이나 구하는 것이나 다 같이 괴로움입니다.
‘얻음이 있는 것은 다 괴로움이다.’ 이것을 아는데, 그것을 얻으려고 하겠는가? 얻을 마음이 없으니까. 싸움이 않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쟁삼매(無諍三昧)라고 하고 ‘조용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란야행(阿蘭那行)’이라고 합니다. 아란야행(阿蘭那行)도 ‘고요하다.’는 ‘적정(寂靜)’의 뜻입니다.
아라한(阿羅漢)이 되면, ‘생사(生死)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번뇌(煩惱)가 일순간(一瞬間)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아라한(阿羅漢)’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道)’ 닦는 경지(境地)로 보면 이런 곳에 올라가면 ‘마음에 생멸기복(生滅起伏)이 없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가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다가 하는 ‘마음의 생멸(生滅)이 없다.’고 합니다. 생멸기복(生滅起伏)이 없다면 무슨 마음이 있는가? 목석(木石)이나 허공(虛空)과 같은가? 그것은 ‘분별사념(分別思念)도 없고, 허공무사(虛空無思)도 아닙니다. 그리고 허공과 같이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본각(本覺)이 상조(常照)라. 본래 해인삼매(海印三昧)와 같은 그런 깨달음입니다. 본각(本覺)이 항상 비추는 경지(境地)가 이 경지(境地)입니다. 허공(虛空)과 같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고 온갖 삿된 생각 스스로 분별하고 스스로 갈라놓는 그런 ‘분별사념(分別思念)’이 아니고 ‘본각상조(本覺常照)’입니다.
‘본래(本來) 밝은 마음이 항상 비추는(常照) 단계(段階)가 아라한(阿羅漢)의 경지(境地)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이것을 ‘꿈에 낮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꿈속에서 꿈 깬 이야기를 하니, 도대체 지각(知覺)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전부 꿈속에 있는데, 꿈 깬 이야기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꿈을 깨는 입장에서 보면, 정말 중요한 말씀인데, 꿈속에서 들으면 감동이 않 올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꿈을 깨려면 꿈 깬 이야기를 들어야 압니다.
그래서 ‘아라한(阿羅漢)의 경지(境地)는 이렇고 아나함(阿那含)의 경지(境地)는 이렇고 사다함(斯多含)의 경지(境地)는 이렇고 수다원(須陀洹)의 경지(境地)는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이 무쟁삼매(無諍三昧)를 ‘높은 경지(境地)로 절대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실천(實踐)하신 대승불교(大乘佛敎)입니다. 이것을 교학(敎學)에서는 ‘증도혜(證道慧) 도(道)를 증득(證得)한 지혜(知慧)’라고 합니다.
증도혜(證道慧)에 머물면 무쟁삼매(無諍三昧)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다툼이 없는 삼매(三昧)를 얻으려고 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삼매(三昧)에 턱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쟁삼매(無諍三昧)이고 증도혜(證道慧)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大乘佛敎)는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교도혜(敎道慧)’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道)를 가르치는 지혜(知慧)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원효성사(元曉聖師)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무쟁삼매(無諍三昧)하고 금강삼매(金剛三昧)는 엄격히 다릅니다. 무쟁삼매(無諍三昧)라고 하는 것은 생사(生死)없는 경지(境地)에 들어가는 것이 최고정점(最高頂點)입니다. 그런데 금강삼매(金剛三昧)는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는 현장(現場)에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이 금강삼매(金剛三昧)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는 무쟁삼매(無諍三昧)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도혜(敎道慧)’를 쓰는 것, 도(道)를 가르치고 지혜를 쓰는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금강경(金剛經)을 해석(解釋)한 우리나라 함허스님이 계신데, 그 분이 아라한(阿羅漢)을 설명을 하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적연상정(寂然常定) 고요히 항상 선정(禪定)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아라한(阿羅漢)입니다.
비유(比喩)하여 말하면 ‘사수침잠(死水沈潛) 죽은 물에 잠겨 있다.’ 이렇게 설명(說明)을 했습니다. ‘약시진용(若是眞龍) 부장사수(不藏死水) 참용은 죽은 물에 숨어 있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참용(眞龍)은 죽은 물에 숨어 있지 않고 적연상정(寂然常定)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라한(阿羅漢)을 비판한 말씀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가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교도혜(敎道慧)’ 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물 속에서 몸을 한 번 돌이킨다. 이것을 ‘전신(轉身)’ 이라고 합니다.
삼매(三昧) 속에서 ‘교도혜(敎道慧)’를 다시 일으키는 것을 ‘전신(轉身)’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선정락(禪定樂)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보고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대는 전신(轉身)을 못했다.’ 이것이 ‘사수침잠(死水沈潛) 죽은 물에 잠겨 있다.’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약시진용(若是眞龍) 부장사수(不藏死水) 참용은 죽은 물에 숨어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정락(寂靜樂)’에 머물러 있으면 안락(安樂)합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을 ‘제이도(第二道) 다음 단계의 도’라고 하고 ‘등각(等覺) 모든 것이 같은 도(道)’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중생을 제도하러 나오는 것을 ‘묘각(妙覺)’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묘각(妙覺)의 경지(境地)에 올라가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묘각(妙覺)’의 경지(境地)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신(轉身)’ ‘몸을 돌이켜야 된다.’ 그리고 ‘몸을 회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흥비도생(興比度生)하여 시득도(始得道) ‘몸을 돌이키고 자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마땅한 도이다.’ 이렇게 함허 스님이 설명(說明)을 달아 놓았습니다. 이런 경지(境地)를 도(道)라고 합니다.
야부(冶夫)스님은 도(道)에 들어가서, 도(道)를 닦고, 도(道)를 행하는, 그 과정(過程)을 무엇이라고 설명(說明)을 했는가?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방복에 은명주(尨服 銀明珠)조개 배속에 밝은 구슬이 있다. 조개 속에 진주(珍珠)가 있는 것이 도인(道人)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도인(道人)은 무엇인가? 조개 속에 진주(珍珠)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진주(珍珠)는 조개에서 생깁니다. 겉으로 보면 진주(珍珠)가 있는 조개인지, 없는 조개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 보면 진주(珍珠)가 조개 속에 들어 있는 그것이 도인(道人)이다. 이 말입니다. 석중에 장벽옥(石中 藏碧玉) ‘돌 속에 푸른 옥을 감추고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이 도(道)라고 합니다.
도(道)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그냥 볼 때는 돌덩어리인데, 그 속에 푸른 옥이 들어 있는 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그리고 ‘유사자연향(有麝自然香) 사향이 있는 노루는 저절로 향기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도향(道香)라고 합니다.
하필당풍이립(何必當風已立) 어찌 바람 부는 쪽을 향해서 있겠는가? 도(道)를 자랑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도(道)입니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조개 속에 진주가 들어 있는 것과 같고, 돌 속에 옥이 들어 있는 것과 같고, 노루 속에 사향이 들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저절로 부족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道)입니다.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흡사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으나 하나하나 행동할 때 보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 그것이 도(道)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인생이 세상에 태어나서 마음공부, 도(道)의 맛을 보고 가면, 조개가 진주알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진주가 있는 조개하고 없는 조개하고 값으로 보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개는 똑같은 조개입니다. 여기까지 설명(說明)을 드리고, 읽고 마치겠습니다.
중앙승가대학교 전 총장 종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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