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법인(三法印)
法印이란 [法의 印]이며 불교 자체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이 법은 불, 법, 승의 삼보 가운데의 법이기도 하지만 부처님의 교법을 뜻한다. 즉 법인이란 부처님의 교법으로서의 불법의 특징으로 인도, 중국, 한국 등 모든 불교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근본특징의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이 있기만 하면 그 가르침의 교는 불교라고 할 수가 있다.
法印으로서 원시불교에서는 삼법인 또는 사법인이 설해지고 있으며, 삼법인이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諸行無常, 諸法無我, 涅槃寂靜]의 세 가지이며, 여기에 일체(제행)개고[一切(諸行)皆苦]를 합친 것이 사법인이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한역된 불교경전이 진정한 불설인지의 여부를 판정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 만일 그 경전이 삼법인(三法印)의 취지에 반하던지 모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불교경전이라 보아도 좋은 것이다.
만약에 삼법인(三法印)의 취지에 어긋나는 말을 설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불교경전이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진실한 경전이 아닌 위경(僞經)이 행해졌기 때문에 그의 진위를 판정할 수 있는 표준으로서의 삼법인(三法印)이 채용되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중국에서 삼법인은 소승불교의 설이며, 대승은 법화경 등에 따라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는 일실상인[一實相印]을 설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三法印과 제법실상[諸法實相](구체적으로 말한다면 如是相, 如是性, 如是力 如是作, 如是因 如是緣, 如是果 如是報, 如是本來究竟 등의 十如是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같은 것에 대한 표현의 상이 다를 뿐이다.
1. 제행무상(諸行無常)
불교의 가르침이 일반 사람에게 난해하다고 하는 것은 불교 가운데에는 여러 가지 철학이론이 있으며, 그것이 신앙과 실천 등의 체험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체험]을 갖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와 같이 본질적인 난해성 이외에 불교용어가 일반사회의 용어와 다른 것이 많은 것도 불교를 난해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용어에도 체험적인 뒷받침이 필요한 일도 있으며, 또 동일한 한역어가 서로 다른 인도 말에서 유래된 별개의 뜻을 지니고 있거나 동일한 인도 말이 발음으로 번역되거나 뜻으로 번역되어 있고, 이들 번역어에도 신구의 갖가지가 있어 매우 복잡하다. 또 인도어 자체가 동일어에 여러 가지 개념내용을 포함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諸行無常의 行은 인도말로 상카라(산스카라)라고 하는데, 이 면에는 광협의 갖가지 뜻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行이란 가장 넓은 뜻으로 쓰이는 것으로서 생멸 변화하는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諸行無常이란 모든 현상계는 불생불멸의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생멸하고 변화하는 것임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불생불멸의 실체라던가 형이상학적인 본체라던가 하는 것은 결코 설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들의 경험적 인식에 의해 인식할 수 없는 것이며, 또 비록 인식되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세계로서의 현상계와는 관계없는 것이라 하여 이를 다루는 것이 금지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문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세계로서의 현상세계뿐이다. 불교에서 일체의 존재라든가 제행(諸行)이라 할 경우에는 모두 [현상세계]만을 뜻한다.
법인 중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최초에 놓여진 것은 물(物)이던, 심(心)이던지 모든 현상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여 순간도 정지하지 않는 것은 오늘의 자연과학에서도 사실로 인정할 뿐 아니라 2500년 전 세존께서도 이것은 증명을 요하지 않고 언제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라 하여 다른 법인을 설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이것을 먼저 설한 듯하다.
경전 가운데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무아(無我)인 것이다]하고 설해 있으나 이것은 제행무아(諸行無我)의 법인(法印)의 근거로서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면 세상의 현상이 좋은 방향으로부터 나쁜 방향으로 변화해 가는 것을 말한다.
권불십년(權不十年)과 같은 현상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였다. 사람이 죽는 것을「무상(無常)하다」고 말한 것도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무상(無常)이라는 말에는 염세적, 절망적인 뜻마저 포함되고 있다.
그러나 무상(無常)의 본래의 뜻은 순경(順境)으로부터 역경(逆境)으로 전락하는 것뿐 아니라 반대로 역경(逆境)으로부터 순경(順境)으로 발전 변화하는 것도 무상이다.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건강한 젊은이가 병이 나거나 노쇠하거나 사망하는 수도 있으며, 병약자가 건강해지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며, 어리석은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불만스러운 곤경을 벗어날 수도 있으며, 수양, 노력하는 보람도 있는 것이다. 세상이 무상(無常)하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움직일 뿐 아니라 인간사회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자연계에 있어서도 소우주(小宇宙)로서의 원자(原子)와 전자(電子)는 끊임없는 운동을 계속하고 대우주(大宇宙)로서의 천체도 끊임없는 운동, 변화 속에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영원한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왜 제행무상(諸行無常)이 불교의 근본명제로서 다루어지고 있는가 하면 거기에는 이론적인 이유와 실천적인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론적으로는 제행(諸行)이 무상한데서 세상에서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인식되지 않는다는 무아설(無我說)의 근거를 이루는 것이다. 「색(色)(물질(物質))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고인 것이다. 고라는 것은 무아인 것이다. 」 라고 경전에 설(說)해 놓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무상을 말하게 되는 실천적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다. 실천적으로 무상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을 무상관(無常觀)이라 한다.
무상관(無常觀)의 제 1 의 것은 종교심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무상이란, 사태가 잘 변화하는 것도, 나쁘게 변화하는 것도 뜻하는데, 나쁘게 변화하는 경우, 불행과 비애를 강하게 느끼고 무상의 느낌이 통절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고뇌와 비애를 해결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종교심이 싹트는 경우가 많다. 친한 사람이 죽었다거나 불행 등으로 무상을 경험하여 종교, 신앙 속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은 것이 그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고이다」고 설해지고 있듯이 무상을 위해 고뇌를 경험하고 자기반성을 하여 사태를 조용히 정관(靜觀)할 수 있게 된다. 거기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세계가 펼쳐지며, 자기와 세상의 결함도 알게 되며, 이상으로 구하는 종교심이 싹트는 것이다. 무상관이 종교심을 일으키는 큰 동기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제 2 에는 무상을 관찰함에 따라 집착심과 교만심(驕慢心)을 제거하게 된다. 세상에는 무엇하나 상주불변(常住不變) 하는 것은 없다. 자기와 또는 친한 사람이라도 재산과 지위, 명예까지라도 언제 그것이 없어질는지, 나쁘게 변화할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자랑하여도 그것은 아무 소용없다.
언제 와해되고 소실될지 모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상의 사실을 바르게 관찰한다면 결코 헛되이 집착하거나 뻐기지 않고 언제나 겸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으며, 그러한 태도가 주위 사람들과도 융화할 수 있는 것이다.
제 3 은 무상을 관함에 의하여 사회와 인생의 움직임을 바르게 알고, 제행(諸行)을 아껴 정진, 노력하게 된다. 모든 사상은 시시각각으로 생멸(生滅) 변화하며, 한번 지나가 버린 것을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생존은 전술한 바와 같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과거의 모든 경험의 집적으로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 경험은 시시각각 현재의 찰라뿐인 것이다. 현재 찰라의 경험만이 그 습관력(習慣力)을 남기는 것이므로 습관력(習慣力)이 집적된 지능, 성격, 체질 등의 소질이나 인격은 과거의 현재 찰라의 경험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시시각각(時時刻刻)의 현재 찰라의 경험이 장래 우리의 소질과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인격을 만드는 것은 선악과 같이 현재 찰라의 경험뿐인 것이다. 따라서 때때로 지나가는 현재의 찰라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찰라에 모든 힘을 기울여 노력을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상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으며, 이것 이외에 방법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순간 순간의 현재를 소중히 하여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무상관은 우리를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끄는 것이다.
석존이 제자들에게 최후의 유계(遺誡)로서,
「제행(諸行)은 쇠멸무상(衰滅無常)한 것이다. 너희들은 방일하지 말고 목적완수를 위해 노력하여라.」
하고 말씀하신 것은 그러한 뜻이다. 그러고 무상관에 의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수행을 충실하게 하라는 말씀으로 「현선일야(賢善一夜)의 게(偈)」라는 것이 원시경전 속에 다음과 같이 설해지고 있다.
과거를 따르지 말라. 그리고 미래를 원하지 말라.
과거는 이미 가고 없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나니
다만 현재의 법을 그때그때 관찰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움직이지 않도록 잘 요달(了達)하여 수습(修習)하라.
오늘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것,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랴.....
이와 같이 주(住)하고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는 자,
이를 적정(寂靜) 모니(牟尼)인 일야(一夜) 현자(賢者)라 하나니.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은 시게(詩偈)도 있다.
과거를 생각하여 슬퍼하지 말고
미래를 원하여 구하지 말라.
다만 현재의 의하여 생활하면
그 까닭으로 안색도 명랑하리라.
요컨대 무상관은 염세적인 면에서 구도심(求道心)과 종교심을 일으키는 것도 되지만, 집착과 아집(我執)을 벗어난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고, 시간을 헛되이 하지 않으며, 시시각각을 알차게 하고, 이상(理想)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2. 제법무아(諸法無我)
이상이 무상하다는 것은 인도의 다른 종교와 철학에서도 설(說)하지만,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명제는 다른 가르침에는 없는 불교의 독특한 것이다.
여기서 제법(諸法)이라함은 일체법(一切法)이며, 그것은「무아(無我)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시불교에서는 세계와 인생의 존재로서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에 의해 나타낸 것처럼 상식적인 현상세계만을 지칭한 것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제법(諸法)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제행(諸行)과 내용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란, 모든 것에 실체(實體)와 본체(本體)를 보지 않는 것이다. 무아(無我)라는 말은 주로 원시불교와 부파불교에서 쓰고 있으나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공(空)」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야경」에서「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던가「오온개공(五蘊皆空)」으로 설(說)해지고 있는 것은 원시불교의 제법무아와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무아와 공은 같은 의미 내용이며, 중국의 선종 등에서는 이것을「무(無)」라는 말로도 표현하였다. 공(空)이나 무(無)가 아무것도 없는 허무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 설명으로 알 수 있다.
중국의 대승불교에서는 무아(無我)나 공(空)을「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인공(人空)[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라 하는「인(人)과 법(法)」의 이종(二種)의 무아(無我)와 공(空)으로서 설(說)했으나 원시불교에서는 이러한 구별을 세우지 않고 양쪽의 뜻을 포함시켰다.
만약 굳이 그 구별을 짓는다면 일방적으로는「색(色)은 무아(無我)인 것이다.」,「오온(五蘊)은 무아(無我)인 것이다」와 같은 법무아(法無我)를 설하고, 가옥과 차량 등의 비유로 무아를 설명하는 경우처럼 비유적 통속적인 입장에서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 등의 인무아(人無我)를 설하였다.
그리하여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일체개공(一切皆空)이 설해진 이유로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경우와 같이 이론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이 있는 것이다. 무아(無我)와 공(空)을「무자성(無自性)」이라 하여 설명하는 것은 이론적인 것이며,「무소득(無所得)」이라던가「무가애」라 하는 것들은 실천적인 면이 있다. 이론적으로는 무아(無我)와 공(空)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실천적으로는 무아(無我)와 공(空)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먼저 무아(無我)와 공(空)은 이론적으로는 무자성(無自性)으로 설명된다. 무자성(無自性)이란 자성(自性) 이라는 그 자체의 일정한 성질이 없다는 것이며, 고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현상적 존재는 영구불멸(永久不滅)이 아니고 고정된 성질이나 상태가 아니다.
영구불멸(永久不滅)의 실체(實體)나 본체(本體)라면 고정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그와 같은 실체(實體)나 본체(本體)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는 고정된 자성(自性)도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정된 실체(實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의 의미이지만 다시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현상의 움직임에도 고정된 것이 없다고 하는 것도 무자성(無自性)의 의미인 것이다.
세상에는 [현상(現象)의 움직임이 일정하다]고 말하는 학설이 있다. 예컨데 해겔의 정신변증법은 우리의 정신이 변증법(辨證法)에 의해 움직이는데, 그것은 반드시 절대정신을 향해 움직이며, 그 진로는 일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에 있어서도 사회는 생산력의 변화에 따라 반드시 일정한 진로를 밟으며, 수렵시대, 농노시대, 봉건시대, 수공업시대, 자본주의시대, 社會主義時代, 共産主義時代의 발전단계를 밟는다고 하지만, 실재의 사회의 전개는 이대로 되지 않았으며,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와같은 형식론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믿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의 사상도 불교가 불멸 후 천년 또는 오백년 동안에는 교법(敎法)도 수행(修行)도 증과(證果)도 바르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정법(正法)의 시대이며 그 후 천년동안은 교법(敎法)과 수행(修行)은 정법의 시대와 같다.
그리고 증과(證果)를 얻는 사람이 전혀 없기 때문에 상법(像法)[외형적으로 정법과 비슷한]의 시대이며, 그 후 一萬年 동안은 교법(敎法)만 남고 수행(修行)도 증과(證果)도 없어지기 때문에 말법(末法)시대로 하는 것이다.
이 삼시(三時)의 설(說)은 불교의 움직임을 고정한 것으로 보며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의 불교 본래의 입장과 다른 것이며, 석가세존의 교설(敎說)이라 할 수 없다. 사회와 인생의 움직임은 이와 같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조건(緣)을 가하는 방법여하에 따라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움직이는 무자성(無自性)이다. 불교가 외교나, 이단에서 설하던 갖가지 숙명론을 배제한 것은 그것이 佛敎의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의 입장과 반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무아(無我)와 공(空)의 이론적 의미를 고찰하였으나 다음에는 무아(無我)와 공(空)의 실천적 입장으로서의「무소득(無所得)」,「무가애(無가碍)」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어떻게 있는가?」에 답한 것인데 대해 실천적으로는「어떻게 있어야 하는가 ?」에 답하는 것이다.
무소득(無所得)이란, 무아(無我)와 공(空)의 실천적 입장이며, 집착(執着)이 없고 이해손득(利害損得)의 공리주의(功利主義)를 떠나는 것이다. 집착을 없앤다는 것은 모든 것은 자기도 자기의 소유물도 무상하고 무아(無我)이며 영원 불변의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 변화하고 쇠멸할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영원한 것으로서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집착이 있기 때문에 제삼자적인 바른 판단을 할 수 없고, 그릇된 태도와 행동을 취하여 실패와 고뇌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공정한 판단이나 태도를 취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집착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집착이 있으면 이해손득(利害損得)을 중심으로 하여 움직이게 된다. 바른 이치와 정의보다 이해를 중시한다면 결코 이상에 도달할 수 없다.
이를테면 타인에게 시여자선(施輿慈善)을 하는 경우 시여(施輿)함으로써 많은 과보(果報)를 기대한다거나 시여(施輿)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재해를 두려워하여 시여 한다거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시여 한다거나 지금 시여(施輿)해 두면 장래 자기가 빈궁할 때 그것을 되찾게 된다고 생각하거나, 내세에 생천(生天)을 구하기 위하여 시여 한다거나 명예나 지위를 구하기 위해 자선가라는 평판을 얻기 위해 시여 한다거나 하는 것은 시여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모두 대가(代價)를 원하는 유소득(有所得)의 시여이며, 무아무소득(無我無所得)이라 할 수 없다.
무아무소득(無我無所得)의 시여(施輿)란 삼륜공적(三輪空寂)의 시(施)[또는 삼륜청정(三輪淸淨)의 시(施)]라 불리는 것이며, 施輿하는 경우에 시자(施者), 수자(受者), 시물(施物)의 삼륜(三輪)을 공적(空寂)하게 하고 청정하게 시여(施輿)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누구에게 이만큼의 가치 있는 것을 보시한다는 의식을 가지지 않는 것이며, 더구나 이해소득의 생각은 전혀 없으며, 다만 자비연민의 정에 이끌리어 자연적으로 보시하는 것이며, 상대가 잘 되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보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아무소득(無我無所得)의 보시가 이상적인 최고의 것으로 되어있다. 불교에서 설하는 공무아(空無我)의 실천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무소득(無所得)의 태도가 다시 진보되어 완성하게되면 「무가애」의 상태가 된다. 무가애란 무애(無碍)라고도 하며 자유자재를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마음대로 행하는 방일이 아니다. 세상일에도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무책임한 행동은 결코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다. 자유란 반드시 법에 따른 자유이며 주위에 폐를 끼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무소득(無所得)은 집착이 없는 것이며 무애(無碍)는 집착이 없는 행위가 자유자재이고 또한 법에 맞는 것이다.
이것을 가까운 예로 말한다면 서도(書道)의 연습을 한다고 하면, 書道의 연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글씨본으로 필법을 배우는 것인데, 글씨본대로 주의하여 쓸 때는 잘 쓰려고 하는 의식이 있으며 형태는 조정되어 있어도 글씨가 자유롭지 않고 힘이 없으며 위축된 것이 된다. 이것은 有所得의 집착이 있는 글씨이다.
그러나 좋은 글씨를 쓰려고 생각하지 않고 쓴 어린이의 글씨에는 간혹 놀랄 만큼 잘 써진 글씨가 있게 되는 것이다. 필법에는 잘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어색한 곳이 없이 활달한 글씨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無所得, 무집착(無執着)의 글씨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명인(名人)이라 불리는 서도의 대가는 좋은 글씨를 쓰려고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거침없이 쓴 것이 자유롭고 힘이 들어 있으며, 지도(枝道)가 들어있는 자연필법에 부합되는 글씨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무애자재(無碍自在)의 글씨로서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예일능(一藝一能)에 뛰어난 명인이라 불리는 사람은 적어도 그 예능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무애자재(無碍自在)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며, 그와 같은 무애자재(無碍自在)의 예능이 아니면 진실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없는 것이다.
불교가 목적으로 삼는 것은 일예일능(一藝一能)이 아니다. 전인격을 무애자재(無碍自在)의 이상경(理想境)에 도달시키는 데 있다. 유교에 있어서도 공자가「나이 70에 이르러 마음이 원하는 바에 따라 규범을 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바로 무애자재(無碍自在)의 경지를 가리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불타라 지칭하는 것도 세상의 이상적인 이해와 실천적인 행동이 모두 완성되어 그것이 일체가 되고 무애자재(無碍自在)한 활동이 되어 사회구제의 大慈悲의 움직임도 무위자연으로 행해지도록 된 이상적 인격을 지칭하는 것이다.
3. 일체개고(一切皆苦)
이것은 일체행고(一切行苦)라고도 하며, 모든 형상이 고(苦)로 느껴지는 것을 말한다. 고(苦)는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더불어 삼유위상(三有爲相)[현상계에 있어서의 세 가지의 모습]으로서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제법무아(諸法無我)에 대해서는 불교이외의 일반사람이라도 이를 틀림없는 진실로서 인정할 것이지만, 일체개고(一切皆苦)에 대해서는 무상이나 무아처럼 무조건하고 받아 들이지는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고(苦)뿐 아니라 고(苦)도 있고, 락(樂)도 있으며, 고(苦)도 락(樂)도 아닌 상태도 많다.
상식적으로 말한다면 의식주의 경제생활에 있어서 풍부하고 건강하며, 젊고, 희망이 가득한 사람은 행복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같은 경제상태에 있고 같은 가정환경에 있는 경우라도 이를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남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비참한 환경에 있는 사람이라도 본인은 만족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세상에는 결코 불행과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고락(苦樂)은 사람에 따라 다르며 주관적인 감정에 속하는 것이므로 세상의 모든 것이 고(苦)라는,「일체개고(一切皆苦)」에 관한 명제는 진실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론이 생길 것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苦)란 무엇인가 하는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고(苦)에는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의 세 종류가 있다고 하였다.
그중 첫 번째인 고고(苦苦)란 육체로 느끼는 감각적인 고(苦)이다. 맞거나 꼬집히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하는 경우의 고(苦)가 그것이다. 이것은 통각신경(痛覺神經)을 갖고 있는 존재라면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로 감수하는 객관적인 고(苦)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번째인 괴고(壞苦)란 상황이 파괴되고 쇠망하는 경우에 느껴지는 정신적인 고뇌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상황이 악화됨으로써 느끼는 고통도 괴고(壞苦)이다.「무상하기 때문에 고(苦)인 것이다.」라는 것도 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좋아질 경우에는「무상(無常)하기 때문에 락(樂)이다」라는 명제도 성립되는 것이다. 정신적인 고뇌로서의 괴고(壞苦)는 상당히 주관저인 것이며, 어떤 일에 대해 욕망이나 기대를 갖고 있는 경우에 그 욕망과 기대에 반대되는 상황이 생기면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같은 환경에 있어도 사람에 따라 욕망이나 기대가 다르며, 동일인이라도 때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
그러므로 같은 환경에 있어도 그것을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고, 고통으로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 동일인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 감수성과 반응이 다른 것은 욕망과 기대의 유무강약(有無强弱) 때문이다. 거기에 정신적인 괴고(壞苦)의 주관성이 있다.
그리고 精神的인 욕망이나 기대는 주로 인간 특유의 것이며, 다른 동물에서는 그다지 볼 수 없다. 실연 자살을 하거나 생활고로 인해 일가 자살을 하는 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일이며, 다른 동물세계에서 볼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 경험하는 극렬한 고뇌는 주로 인간에게만 볼 수 있는 정신적인 고뇌이다. 불교에서는 생(生), 노(老), 병(病), 사(死)등의 고를 들지만 이러한 고(苦)를 생(生), 노(老), 병(病), 사(死)라고 하는 육체적, 생리적인 고통보다도 오히려 생(生), 노(老), 병(病), 사(死)를 전제로 하는 정신적인 괴고(壞苦)를 지칭하는 것이 많은 편이다.
예컨대 이전에는 폐결핵에 걸리면 불치, 난치로 여겨진 적이 있었으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오히려 결핵으로 쓰러진 경우의 자기의 장래라든가 가족의 생활을 생각하고 괴로워하는데서 생기는 고뇌가 그 병고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암에는 아픈 것과 아프지 낳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암이라는 선고를 받음으로써 낙담해 버리고 병상이 갑자기 악화하는 예가 있다. 병은 기분에서 생긴다는 말이 있는 것도 병(病)의 고통이 다분히 기분에 의한 정신적인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병(病)뿐만 아니라 노(老)의 고통에 있어서도 늙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고통은 아니다.
다만 눈이 어두워진다거나 귀가 멀어지며 신체가 자유로이 움직이지 않는 부자유에 의한 곤란은 있다고 하더라도 육체적인 노쇠가 특히 격렬한 고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노(老)가 고통이 되는 것은 노후의 일에 대한 경제적인 이유와 인간관계 등에 대한 우려가 고뇌의 커다란 원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죽음에 있어서도 사(死)라는 생리적인 사실은 일순간의 일이며, 이를 고통으로 삼을 것은 그리 없지만, 죽음에 의한 자기에 대한 사회의 평가라든가 가족의 곤궁을 생각하고 괴로워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워 지거나 죽음을 괴로워하는 것이다.
정사(情死)를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죽음은 오히려 구가(謳歌)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죽음에 대한 마음가짐의 여하에 따라 죽음이 고통스러운 것이 되기도 하고 또한 소망스럽고 즐거운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괴고(壞苦)라는 정신적 고통은 욕망이나 기대가 많고 심하면 심할수록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 경우의 고뇌도 큰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나 기대는 마음가짐에 따른 것이며, 마음가짐을 바꾸기만 한다면 욕망이나 기대가 즉시 사라지는 동시에 그것을 얻지 못한 고뇌도 곧 해소되는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오인하는 데서도 고통이 생기고 그것이 오인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알자마자 즉시 고통이 사라지는 수도 있다.
이를테면 제삼자로부터 '지극히 사랑하는 상대자가 다른 이성과 친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그 순간 상대방을 원망하고 미워하며 자기가 버려졌다고 절망하여 고통을 느끼다가 뒤에 제삼자의 말이 사실무근한 허언(虛言)이었음을 것을 안 순간 상대방에 대한 지금까지의 증오와 불신과 절망의 생각은 한꺼번에 사라져 안심과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
종교란 고뇌를 바꾸어 안심과 행복을 얻게 하는 것이라 하거니와 종교가 다루는 고뇌에는 이 정신적인 괴고(壞苦)가 매우 많다 할 것이다. 마음가짐을 바꾸게 하고 바른 세계관, 인생관을 가르치며, 그릇된 선입관을 제거시켜 줌으로써 정반대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지금까지 절망적이었던 세상이 희망이 가득한 밝은 세계로 변화하는 것이다. 회심(回心)이라든가 종교심이 그것이며 마음의 눈을 바꾸게 하는 것이다
세 번째인 행고(行苦)란 행(行) 즉 현상세계 자체가 고(苦)라는 것이다.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일체행고(一切行苦)라고도 하므로 이 문제는 이 세 번째인 행고(行苦)를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일체의 현상계는 과연 모두가 고(苦)일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상식적으로 말한다면 현상계에 대해 우리는 고(苦)로 느끼는 일도 있지만, 락(樂)으로 느끼고 불고불락(不苦不樂)으로 느끼는 일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현상계는 모두 고(苦)라 하는 것일까? 이것은 불교뿐 아니라 인도 일반의 사고방식에 유래되는 것이다.
여기서 행(行)이라든가 현상이라 말하는 것은 輪廻界에 있어서의 현상을 가리킨 것이며, 업보에 의해 윤회되고 범부(凡夫)에 의해 관찰된 현상을 가리킨 것이다. 따라서 행고(行苦)라든가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명제는 바르게 말한다면「윤회(輪廻)전생(轉生)하는 범부에게는 일체의 현상은 고(苦)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인 생각에 의하면 절대로 고뇌하지 않는 상태는 윤회를 벗어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윤회(輪廻)전생(轉生)하는 범부(凡夫)사이에는 거기에 쾌락과 행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절대적인 적정(寂靜)의 락(樂)은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범부(凡夫)에게 있어서는 현상세계는 고(苦)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一切皆苦」와 行苦에관한 사고방식이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 있어서 이 명제도 결코 그릇된 것이 아닌 것이다.
4. 열반적정(涅槃寂靜)
서양의 불교학자와 인도학자 중에도 불교가 제행무상(諸行無常) 혹은 일체개고(一切皆苦)와 같이 절대적, 염세적임을 강조하고 또 뒤에 말하는 사제(四諦)의 가르침에 있어서도 고제(苦諦)을 최초에 두고 생(生), 노(老), 병(病), 사(死)등의 고(苦)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는 비관적인 염세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의 고뇌를 없애 주는 것이다. 사회에 불행과 불안과 고뇌가 없다면 사람들은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종교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종교, 신앙이 요구되는 곳에는 반드시 고뇌와 불안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고뇌와 불안의 비관적 상태가 사람들에게 종교심을 일으키게 하는 동기가 되는 것이다. 욕망이나 기대와 같은 이상의식(理想意識)이 있어 그 이상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고뇌를 해소하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종교의 출발점에서 죄악과 더러움과 어리석음 등, 이상에 반대되는 현실의 괴로움이 반드시 존재한다.
크리스트교에서 原罪를 설하고 佛敎에서도 악인정기(惡人正機)를 설하는 것이 그것이다. 原始佛敎는 현실의 고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고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결코 비관적인 염세주의는 아니다. 고(苦)는 출발점이지만 최후에는 정락(淨樂)의 열반에 도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상을 말한 것이「열반적정(涅槃寂靜)」의 명제이다 佛敎를 염세주의라 하여 비난하는 사람은 涅槃寂靜을 보지 않는 사람이다.
범부(凡夫)로서의 일체의 그릇된 생각과 그릇된 생활태도에서 벗어나, 바른 세계관 인생관에 입각하여 이상적인 생활 태도를 자연적으로 취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이 보리(菩提)이고 열반의 경지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輪廻의 미혹한 생태를 지적으로 벗어나서 모든 생활에 고뇌가 없는 적정안은(寂靜安穩)의 정복(淨福)의 생태가 되는 것이다.
열반이란 그 말의 뜻에는「불어서 끄는 것」또는「조림(稠林)이 없는 것」등으로 설명되는데 그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 일체의 번뇌(煩惱)(이상생활을 방해하는 것)가 사라지고 멸제(滅除)된 상태를 가리킨다.
또는 번뇌의 조림(稠林)이 전혀 없어진 생태를 말한다. 불교 이전의 인도 철학에서는 열반을 불사(不死)라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에서도「불사(不死)」란 말이 자주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生死輪廻를 초월하여 열반의 상태에 도달한 것을 말한다. 客觀的으로 죽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죽음으로서 겁내지 않고 생사를 문제시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것은 고락(苦樂)과 생사를 초월한 것이며, 그와 같은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깨침을 얻은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와 같은 깨달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모든 세계가 편안한 부처님의 국토가 되는 것이며, 깨달은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마침내 주위의 環境도 이상(理想)의 國土로 이룩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佛敎의 이상(理想)인 것이다.
이상으로 사법인(四法印)에 관한 설명을 마쳤거니와, 이 법인은 모든 佛敎學說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며, 십이연기(十二緣起), 사제(四諦)등의 가르침은 모두 四法印의 기초에 입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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