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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엇을 평상심이라 하는가

수선님 2019. 2. 17. 12:37

 

무엇을 평상심이라 하는가

 

 

祖云 道不用修 但莫染汚

何爲染汚 但有生死心 造作趣向 皆是染汚

若欲直會其道 平常心是道

何謂平常心 無造作 無是非 無取捨 無斷常 無凡聖

故 經云 非凡夫行 非聖賢行 是菩薩行

마조선사가 말씀하였다.

“도는 수행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염오되지만 않으면 된다.

무엇을 염오라 하는가? 다만 생사심이 있어서 조작하여 나아가는 것이 모두 염오다.

만약 곧 바로 도를 알고자 한다면 평상심이 도이다.

무엇을 평상심이라 하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가 없고 단상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범부의 행동도 아니며 성현의 행동도 아닌 것이 보살의 행이니라’라고 하였다.”

 

 

 

 

 

 

조작 시비 취사 단견과 상견

양변 멀리 벗어나야 … ‘중도’

 

 

해설 : 마조선사의 말씀 중에 “평상심이 도다”라는 말은 매우 유명하다. 평상심이 도라는 말은 사람마다 그 해석이 구구하다. 평상심이 도라는 말의 뜻을 마조선사가 스스로 해석한 내용이 여기에 소개되었다.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가 없고 단견과 상견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성인이니 범부니 옳은 것이니 그른 것이니 하는 양변에 치우치지 않고 그 양변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것이 곧 평상심이라는 뜻이다. 양변을 벗어나면 양변에 집착하지 않고 양변을 자유자재로 잘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그와 같은 평상심은 곧 중도(中道)다.

그러므로 평상심은 중도요 중도는 곧 평상심이다. 중도라는 말도 무엇이라고 표현을 하자니 부득이해서 중도라고 할 뿐이다. 실은 이름이 없다. 모두가 거짓 이름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범부의 행동도 아니며 성현의 행동도 아닌 것이 보살의 행’이라고 하였다.”

참다운 보살의 행이란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어서 일체의 명상을 초월하여 일체에 걸리지 않고 일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삶이다.



* 유위에도 무위에도 머물지 말라

 

祖曰 不盡有爲 不住無爲

有爲 是無爲之用 無爲 是有爲之依 不住於依

故 經云 虛空無所依

心生滅義 心眞如義 心眞如者 喩如明鏡照像

鏡喩於心 像喩於法

若心取法 卽涉外緣 卽是生滅義

不取於法 卽是眞如義

마조선사가 말하였다. “유위를 다하지 말고 무위에 머무르지도 말라.

유위는 무위의 작용이며 무위는 유위의 의지할 곳이니 의지할 곳에 머무르지 말라.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허공은 의지하는 바가 없다’라고 하였다.

마음의 생멸하는 이치(心生滅義)와 마음의 참되고 여여한 이치(心眞如義)에 대하여, 마음의 참되고 여여함이란, 비유하자면 마치 밝은 거울이 어떤 형상을 비추는 것과 같다.

거울은 마음에 비유하고 형상은 법에 비유한다.

만약 마음이 법을 취해서 곧 바깥 인연에 젖어들면 곧 이것은 생멸하는 이치다.

법을 취하지 아니하면 곧 이것은 참되고 여여한 이치이다.”


해설 : 이 단락에서는 유위와 무위의 문제와 마음의 생멸함과 참되고 여여함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였다.

유위(有爲)란 불교교리에서 말하는 인연에 따라 발생하고 형성되는 모든 현상이다. 즉 원인과 조건과의 결합을 통하여 현실로 나타나는 여러 현상을 말하는데, 유위는 현상이므로 원인과 조건 등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아비달마와 같은 소승불교에서는 그것이 인간사회, 인간생활의 실제 모습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것을 ‘유위무상(有爲無常)’ 또는 ‘유위전변(有爲轉變)’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불교에서 사용되는 유위와 무위의 의미는 일체 행위에 집착이 있고 조작이 있어서 자연스럽지 못한 것을 유위라 하고 일체 행위에 아무런 집착이나 조작이 없어서 저절로 그러함을 무위라 한다.

비유하자면 물고기가 물 속을 가듯이, 새가 창공을 날듯이 걸림이 없고 흔적이 없는 행동을 말한다.

마음의 생멸(心生滅)하는 이치란 눈으로 사물을 대하거나 귀로 소리를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할 때 그 사물과 소리와 냄새가 무엇인가를 알아내고 좋고 나쁨을 분별하여 취사선택하는 일체 심리적 작용과 현상들을 말한다. 그 특징으로는 수시로 변화하는 것이다.

 

 

무비스님 / 조계종 전 교육원장 
 

 

불교신문 2616호/ 4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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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심(無爲心) :

 

함이 없이 하는 마음」을 말함. 도교(道敎)에서는 무위(無爲)를 '아무것도 하지 말라, 인위적인 것을 조작하지 말고 자연 그대로 살아가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로 쓰입니다.

 

그러나 불교(佛敎)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하되 '했다는 정신적인 상념은 필요 없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즉 무심(無心)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불교의 무심(無心)은 아무것도 생각 안하는 것이 아니고「필요없는 망념과 헤아림이 없는 것을 무심(無心)」이라고 합니다.

 

 

 

② 무위의 법(無爲法) :

 

원어는 아삼크리타 다르마(Asa sk ta-dharma). 만들어진 것으로 있지 않은 존재. 곧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존재라는 뜻이다.

 

지금 눈앞에 현상으로 나타나 있는 존재인 유위의 법(有爲法;Sa sk ta-dharma이 아니라, 현상의 배후에 있는 '절대적인 것 · 무한한 것 ·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무규정적인 것'을 말한다. 즉 인연으로 인해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지 않는 법을 말하는 것이다.

 

'있다 · 없어졌다 하는 법'이 상대세계의 법이라면, 이 상대성의 원리를 초월한 절대경지의 법이 무위의 법인 것이다. 무위라 함은 모든 법의 진실체(眞實體)를 말하는 것이고, 위(爲)는 위작(僞作), 조작(造作)의 뜻으로서 인연의 조작의 뜻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간에 생주이멸(生住離滅),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사상(四相)의 변천을 거치는데, 이런 것이 없고, 하는 것이 없고, 조작 할 것도 없는 경지이므로 무위법(無爲法)이라 하는 것이다.

 

원문의 asmakrta-prabhvita hyarya-pudgalah를 '구마라집'은 '일체의 현성(賢聖)은 모두 무위법으로서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하고, 진제는 '왜냐하면 일체의 성인은 모두 무위법에서 현현되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급다는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인가, 무위법에 의해 성인은 현명(顯明)하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하며, 이후 현장이나 의정도 prabhavita를 현현(顯現)으로 번역하고 있다.

 

콘제는 그의 저서 '금강반야경'의 주해에서 '절대적인 것이 성자들을 드높인다(an absolute exalts the holy persons)'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성자들이란, "一相無相分에서 열거되는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의 도"를 획득한 네 종류의 현성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절대적인 것에서 나와 위대한 힘으로 되고, 그로 인해 우세하며, 그 관계의 결과로서 탁월하며, 무제약적인 것에 의해 인정되고 특징지워지고 확립된다는 용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콘제는 우레자의 '왜냐하면 귀인(貴人)은 무위에 의해 특징지워지기 때문이다'라는 번역을 들어 자신의 번역에 가장 가깝다고 하고 있다. 한편 티벳역에서는 '모든 성인은 무위법에 의해 開始되고 있기 때문이다'라 하고 있다.

 

 

http://www.buljahome.com/main_fm.htm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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