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부처님의 마음은 보리심이다.

수선님 2019. 4. 7. 12:31

보리심(菩提心)이란 깨닫는 마음, 부처님을 향하는 마음, 밝은 마음이다. 이러한 보리심과 반대되는 말은 중생심(衆生心)이다. 중생심이란 밝음이 없는 무명(無明)이다.

지혜광명(智慧光明), 자비광명(慈悲光明), 원력광명(願力光明) 등이 보리심의 광명이라 하겠다. 깨달음은 생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상 즉 실체를 보는 것인데, 중생들은 실상과 실체에 접근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에 덮여 있다.

눈을 떠 밝음을 얻는 광명을 선공덕(善功德)이라 하는데, 눈은 보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보이는 능력이 있다. 보리심은 억지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지혜광명, 원력광명, 자비광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중생의 생각에 덮이면 분별심(分別心)이고, 생각에 덮이면 저절로 탐진치(貪瞋痴)가 나타난다.

연못가에서 연못을 볼 때 연못 속에는 달이 없는 것인데, 마치 달이 물 속에 있는 것처럼 보게 되는 것을 어리석은 치(痴)라 하고, 그 달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탐(貪)이며, 그리고 건져도 건져도 건져지지 않음으로 분노가 생기는 것이 진(嗔)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첫째로 무상(, alaksana)을 깨달으셨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여 영원할 것이라는 미혹(迷惑) 속에 살고 있다.

두 번째로 깨달으신 것이 무아(我,), 공간()이다. ‘나’라는 것은 없는 것인데, 중생들은 항상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집을 예로 든다면, 집이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터와 주춧돌과 기둥 등이 모여서 한 순간 집이라고 하는 형태를 나타낸 것일 뿐, 그 본질이 있는 것도 아니요,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며, 영원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무아이다.

‘나(我)’라고 하는 것도 부모님으로부터 여러 가지를 물려 받았고, 자라면서 우주의 온갖 도움과 보살핌으로 견뎌내는 것이지, 물거품과 마찬가지이다. 며칠만 굶어도, 사고가 나도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무아를 알지 못하여 ‘나’가 있는 것으로 알고 ‘나’에게 잘 해주려 노력한다.

유명해져야 하고, 잘난체 보여야 하고, 대접 받고 싶은데, 잘 안되니까 화가 나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 분노무지 삼독이 바로 중생심이다. 사람들 마음(生)과 죽은 자의 영혼(死) 속에는 이러한 것들이 가득 차 있다. 모두 욕망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부처님은 여기에서 하나를 더 얻으셨는데, 그것이 열반이다. 열반이란, 욕망과 분노를 다 삭여서 욕망과 분노가 다 깨끗해졌다. 그러므로 화가 나질 않고 마음이 평온한 상태, 욕망과 분노가 정화된 심리상태가 되는 것이다.

무상을 바로 보고, 무아를 바로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면 욕망과 분노가 정화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꽃이 떨어지면 슬퍼하지 않지만,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슬퍼한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꽃의 무상함은 인정하지만 자신의 무상함은 인정하지 못한다.

자신이 늙고, 죽음에 대하여 인정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은 허황한 욕망을 쫓아 가다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원통함을 느끼게 됨으로 원통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절망이 오고, 슬픔이 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생명이 무상함을 직시하셨으므로 돌아가실 때에 슬퍼하시지 않고 태연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열반 속에서 나타나는 마음이 보리심이다. 어리석음과 분노, 그리고 욕망이 정화된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깨달은 마음의 광명이다. 지혜 광명과 자비 광명, 그리고 원력 광명 이것을 지비원(智悲願) 삼심(三心)이라 한다.

중생이 갖고 있는 삼독심(三毒心)인 탐진치는 미혹함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탐은 사람에게 근심을 가져다 주는 독소이며, 잘못된 생각과 판단에서 나오는 어리석음의 독소가 자신과 남에게 고통을 준다.

열반의 상태에서는 삼독심이 정화되고 삼심이 일어난다. 이것이 보리심의 광명이다. 보리심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원력이다. 원력은 탐욕이 변형된 것인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탐욕이라 하는데,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원력이다.

어리석음에 덮인 마음은 자기만을 위해서 탐욕을 부리다가 스스로 고통을 만든다. 그러므로 탐욕의 결과는 고통이다. 탐욕은 자신을 파멸시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다. 상대의 소리를 잘 듣기 때문에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 하는 것이다.

정신이 미숙할수록 상대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한다. 허망한 것에 집착하고 매달리는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지혜이다. 청정하여 헛된 것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현대 용어로 쓰자면 원력은 의지이며, 자비는 함께 나누는 것이다.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에 감정에 치우치면 의지가 약해지는데, 헛된 감정에 빠지지 않도록 경호를 해 주는 것이 지혜이다. 부처님의 모습에는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보살상에서는 이것이 분리 되어 있다. 원력으로는 보현보살(普賢菩薩) 대표적인 보살이다. 널리 그리고 어질게 하는 것이 보현이다.

중생의 고통을 듣고 자비를 베푸는 관음보살. 지혜의 경호원으로 사천왕(四天王)이 있다. 사천왕은 허망함이 다가올 때 금강저(金剛杵)로 부숴버리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진 것이 보리심이다. 보현보살로 공덕을 닦고, 관세음보살로 자비를 나누고, 허망하고 무상함에 미혹하지 않도록 호법신장으로 제거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불교에서 금강경을 중요시 하는 것과, 법화경의 관세음보살 보문품(普門品)을 중시하며, 화엄경의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을 중시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이다. 상징으로 보자면, 원력의 상징을 보살로는 보현보살인데 다른 상징으로 코끼리가 있다. 그래서 보현보살은 항상 코끼리를 타고 있다.

코끼리는 물을 만나건, 산을 만나건 두려움 없이 계속 나아간다. 자비의 상징으로는 감로수, 지혜의 상징으로 금강저로 나타낸다. 우리는 보물과 같은 순수하고 지고지순한 마음의 불성을 가지고 있는데, 무명에 덮여 있어서 꺼내지 못하는 것이다.

탐욕과 분노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기 때문이다. 무상과 무아를 보는 순간 탐욕과 분노를 일으킬 근거가 없음을 알게된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화낼 일도 없고, 욕심낼 일도 없다. 깊이 보고, 자세히 보면 보이는 것이다. 물 속의 달처럼 태어남이 없이 태어나고, 사라짐이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화낼 일 없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리심이며, 보리심이 생기면 원력과 자비와 지혜가 나온다.

 

종범스님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4000380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